모털 엔진 견인 도시 연대기 1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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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브라이튼에서 태어난 필립 리브는 오늘날 뛰어난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및 아동 소설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앵글리아 러스킨 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터를 공부하고 이후 브라이튼 대학의 학생 연합 잡지에 만화를 주제로 여러가지 작품들을 그리면서 만화와 일러스트 작업 등에 주목하게 됩니다. 몇몇 책에 만화를 제공하면서 명성을 얻기도 하는데요. 특히, 그런 자신의 진로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준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 소개하는 견인 도시 연대기의 첫번째인 ‘모털 엔진 Mortal Engines 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01년 위의 동일한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이전에 초도 번역이 이뤄진 것 같은데, 제 능력 부족으로 정확한 서지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읽은 판본은 피터 잭슨의 영화가 개봉한 즈음에 나온 개정판으로 2018년 판본입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이 모털 엔진이라는 작품은 저자인 필립 리브의 ‘견인 도시 연대기‘의 첫번째 장을 장식하는 글입니다. 일단,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도 주문을 하긴 했습니다만, 과연 모털 엔진 만큼의 이야깃거리를 줄 수 있을지 이 시점에서는 약간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모털 엔진이라는 작품이 대단하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스토리의 구성상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과 꽤 치밀한 스토리 라인의 개연성은 단순한 SF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의미심장했습니다. 사실 이런 류의 디스토피아적인 소설은 작가들에 따라 다소 틀에 박힌 설정과 구성상의 진행이 많이 시도 되었는데요. 그와는 반대로 저자인 필립 리브가 글을 쓰기에 앞서 꽤 많은 시간을 공들여 정치와 사회학의 여러 모티브들을 소설에 녹여낸 점은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대략 3000년 전에 있었던 60분 전쟁으로 고대인들이라 불리우는 과거 그 시기의 과학 문명이 절단나고 나서, (아마도 지독한 환경 훼손 때문인지) 이후의 인류가 땅과 대지가 아니라 도시 밖을 나가지 않음으로써, 이 소설의 큰 이데올로기인 ‘도시진화론‘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이념으로 이들 주류에 맞서 ‘반견인 도시 연맹‘이라는 땅과 대지에 정착한 반대의 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저자는 양자의 대결을 그리지 않고 맹목적이지는 않지만 거의 도시들의 야만화에 따른 생존의 문제로 이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원과 식량은 나날이 부족해지고, 특히 견인 도시 세력이라 불리우는 움직이는 도시들은 약한 마을이나 도시를 약탈해 이를 근근히 이겨내는 식으로 버텨내게 됩니다. 여기에 작중 (더 큰 악에게 이용되어 반항하지 못하는) 악으로 나오는 밸런타인의 딸인 캐서린이 왜 다른 도시들과 거래나 대화를 통해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밸런타인은 ˝도시진화론은 그런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일변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는 암울한 우리의 미래도 그려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삼권분립과 유사한 일종의 지배체제가 런던에서 보이는데요. 엔지니어 길드-역사학자 길드-상인 길드 간의 삼권의 체제가 첨예화된 계급사회로 이를 떠받들고, 약탈이든 뭐든 간에 쟁취하고 강탈한 달콤한 꿀은 ‘하이 런던‘의 계층만이 온전히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계급간의 이동은 출신 성분으로 인해 매우 어려우며 이런 구조속에 기술 관료 지배체와 같은 ‘테크노크라트‘의 상명하달의 독재로 도시 전체가 굴러가고 있습니다. 흡사 이것은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과두체제‘와 너무나 닮아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과거 많은 지식인들이 도덕주의가 일방적으로 결여된 과학 문명의 귀결점에 대해 예측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도 이 길드 지배 체제가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과거 60분 전쟁 이후, 전 인류가 절멸에 이르게 되었고, 이후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은 아무래도 권력의 소유물이 되어 도시 전체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구조적인 합리화‘의 희생양이 됩니다. 사실 이런식의 견고한 디스토피아적인 소설은 찾아보기 힘들텐데요. 그런점에서 작가의 사전 작업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만했습니다. 그리고 이 테크노크라트가 위력을 발휘하는 연유에는 종래의 기독교 소멸이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소설 속에는 이미 업적을 남긴 사람을 신으로 받들고 또한 이미 다신교의 분위기였습니다. 이들 각 신전은 이미 정치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종교가 이들 계급 정치에 자정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더욱이, 두 주인공인 톰과 헤스터의 성장에 이르는 과정은 특히 주목할 만했는데요. 여기에 캐서린까지 더하면 세계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이 어린 아이들의 발걸음과 톰과 같이 사뭇 갈등하면서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명백히 인식하고 깨닫게 되는 길 또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톰은 본디 내면의 나약함과 주저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평범한 소년이었으나, 행로중에 여러 인물들과 흔치 않은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 가는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다만, 톰의 부모님에 대한 사건이 뭔가 복선으로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시장에 의해 약간 언급만 되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데요. 다음 권이나 다다음 권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끝으로, 추천의 글을 쓴 홍인기 교수는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격류에 휩쓸려 파편화되어 가는 삶을 힘없이 응시하고 있는 한국의 소설가들에게도 들이밀고 싶다˝고 추천사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마르셀 프루스트가 ˝인간은 마땅히 대지위에 발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말을 스쳐지나갈 뿐이라고 생각해도 이것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어떤이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자유 역시 오롯한 인간의 결정으로 남겨놓아야겠죠. 보이지 않는 손이라든지 합리적인 계산이라든지 정치 없는 시장이라든지 이런것들은 도리어 인간을 파편화에 던져버리고 말았으니, 적잖은 경제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정치까지 좌지우지해 사실상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려고 하는 시도에 소설이든 뭐든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글 본문인 121페이지에 주인공 톰을 통해 약간 인종차별적인 문장이 보였는데 번역상 오류인지 아니면 제가 문맥상 잘못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아쉬운 부분이라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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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들의 반항 - 마르크스에서 마이클 무어에 이르는 비판적 사고
로버트 미지크 지음, 서경홍 옮김 / 들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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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로버트 미지크는 언론인이자 저술가 및 정치이론가로 자신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국경을 넘어 독일까지 명성이 알려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지난날 독일 특파원으로서의 경력이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지금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정당 정치간의 이념적 차이가 극명하지만, 과거에는 오스트리아 정당과 독일 정당간에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타게스차이퉁과 프로필과 팔터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저술에 있어서는 글 형태상 보편적인 논저를 쓰기보다는 르포르타주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보기 드문 사상가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게는 어쩌다 보니 그의 글 서평이 세번째이기도 합니다만, 미지크의 글을 평가해 본다면 다소 에둘러 표현하는 법이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특히, 이 책은 독일 공영방송 ZDF의 토론 프로그램 ‘철학 사중주‘에서 꼭 일독해야 할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Genial Dagegen, Kritisches Denken Von Marx Bis Micheal˝로서,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0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 예상을 하기도 했지만, 이 책 역시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먼저 원서의 제목과 달리 번역된 책의 제목을 이 정도로 밖에 쓰지 못한 출판사에 유감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좌파들의 반항‘이라는 제목이 아마도 이 책의 판매고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짐작되는데요. 뿐만 아니라 뉘앙스 역시 썩 좋지 못해서, 오해를 살 만한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제목 평가는 이 정도에서 끝내고, 미지크의 이 책은 간단히 설명하면 일종의 문화비평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인 바탕은 21세기의 대량 생산의 포드주의와는 달리 변형되고 진화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이런 현실에 마찬가지로 변화를 맞고 있는 세계 좌파들에 대한 보편적인 분석서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가볍거나 단순한 시대사회적 현상만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단순 나열에 그치지 않고, ‘시스템과 그 구성원들‘에 대한 꽤 세밀한 르포르타주인 것은 분명합니다.

포스트 포드주의적인 상황으로 오늘날 21세기의 자본주의는 꽤 놀라울 만한 모습으로 진화를 거듭했습니다. 이와 같은 면모에는 ˝인간이 생산한 물질 세계는 인간을 지배할 뿐 아니라 인간을 적대하고,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형성하며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탈인간화 된 존재‘를 창조한다˝고 미지크는 분석합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자본주의가 왜 개인주의를 신봉하게 되는지에 대한 일종의 사념적 근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글 서두에서 ˝자본주의는 얽히고설킨 개인들을 옭아매는 구속의 토대위에서 개인주의를 생산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합니다. 조금 관점이 벗어나는 얘기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이성이라는 미명하에 자유 시장 경제와 소극적 정부를 지지하는 자유시장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근거가 되는 이 ‘개인주의‘가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개인주의가 사회적으로 성장했던 부분에는 인간이 어느정도 전통적인 권력에서 해방되고, 좀 더 면밀한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는 점은 확실히 인정할 만합니다. 이것과 더불어 미지크가 글의 후반에서 피력하는 ˝참된 삶, 진실한 느낌, 내적인 풍요에 대한 욕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지만 그 욕망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그것도 바로 현존하는 사회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점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산물의 열거를 통해 이것들의 역설을 찾아보려고 강력하게 애쓸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글의 목적이 저자인 미지크가 밝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렇게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적극적으로 내면화 되어 더할나위 없이 진행된 자본주의의 이행에 있어 그것과 동시에 현재 세계의 좌파들도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저는 그동안의 여러 서평을 통해 샹탈 무페와 지그문트 바우만의 입을 통해 ‘좌파의 지리멸렬‘에 대해 수없이 언급해 오기도 했는데요. 복잡한 사회 구조속에 자본주의가 강력하게 강요하는 규범들과 계급화에 대해 기존의 좌파들이 대중들과 시민들에게 괴리되어 있었고, 이들이 교조주의적이 되고 사변적으로만 틀 안에 갇혀 있었던 점이 그 반대에 있는 ‘배타적인 현실의 본류들(이를테면 시장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 시장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이득을 찾으려고 하는 보수 정치인들)‘을 마땅히 견제해야만 하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엄혹한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시민들 개개인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이 문제가 시민들 손에 쥐어지기 전에는 바로 많은 지식인들과 학자들의 비판과 설명이 있어야 했지만, 마찬가지로 지식인들의 자본주의적 영합도 충분히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늘날 밝혀지고 있는 좌파의 아이콘들은 정치적인 권력하에서 이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탈취하기 보다는 대중문화속에서 혹은 학술 강연과 시민 강의 등을 통해 시민들의 삶의 변곡점들을 살펴보고 이들이 더 나은 삶과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등의 노력으로 변화되어 왔다는 점을 미지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마이클 무어 현상과 ‘슈퍼스타‘ 슬라보예 지젝의 예시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어는 하층 계급을 위로하고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이 시스템 전체를 공격하기 보다는 거대 기업의 소유자나 권력의 선두 주자 등을 희화화와 모욕 주기 등으로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고, 세계화 된 자본주의 문화에 전반적인 불편한 심기를 보이면서 비판하는 지젝의 경우는 그가 많은 학계의 구성원들에게 때로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냉소가이자 광적이고 정치적으로 오류를 지닌 그가 한편으로는 위대한 도덕주의자˝라고 평가하는 점은 미지크가 보이는 곳곳에 드러나는 수사의 날것에 일부 독자들은 얼굴을 찌푸릴 수도 있지만, 그가 학자와 정치이론가 및 언론인의 여러 경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인물임을 감안한다면 크게 화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지젝에 대한 약간의 희화화에 대해 저역시 지젝을 사상적으로 크게 지지하고 있는 입장에서 마냥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미지크가 지젝을 뭔가 팝스타처럼 묘사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에 대한 진정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작고한 바우만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인 소비 지상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자본주의가 전통주의적인 도덕적 원칙을 휴지통에 던져 버린 것 또한, 강하게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이 소비 지상주의의 근거가 되는 개인의 합리성 원칙의 괴상한 초월은 몇몇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자아 표현과 개인의 만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본주의의 아주 낙관적인 현상이라고 간혹 설명해 내고 있습니다만, 이것의 결과가 지난 40여년간 어떠했는지는 모두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만연한 소비 지상주의에 대한 건설적 대안이라는 것이 그저 좀 더 덜 소비하는 것밖에 없는 시점에서 이것을 대놓고 비판하고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꽤 노곤한 작업임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대로 이렇게 변화되고 변질된 우리의 자본주의는 ˝영원히 모순과 결부되어 있고, 지배를 원하며, 후기 자본주의적 조건 하에서 타도라는 문제는 시스템 자체의 기능을 개선하기 위한 타도라는 데 있다˝고 카챠 디펜바흐의 입을 빌어 미지크는 좀 더 본질적으로 언급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좌파들의 변화가 과연 일시적일 것인가, 아니면 종래의 과격한 사회 변혁을 부르짖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가 지금으로선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뒤에 미지크가 팝 문화에 대해 설명하듯이, ˝비즈니스에 반하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더 좋은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다소의 역설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합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벌면서 이 점을 자아실현과 연계하는 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화가 ˝어떤 점에서는 이 구조들이 지닌 좀 더 많은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신적 삶에 더 깊이 파고든다˝는 점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이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욕망, 재화로 측정되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값어치를 절대적으로 과신해 이를 자아 실현과 연계하는 보다 직접적인 자본주의의 내면화는 앞으로 이미 규명된 모순과 문제점을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좌파 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변화된 대응이 필요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네트워크 자본주의화가 거대 인터넷 기업들을 통해 진행되면서 이러한 변화 요구는 그 이전부터 요구되어 왔지만, 인터넷과 개인의 욕구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연계하는 자본주의의 급격한 혼종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이에 대한 꽤 집요한 연구가 필시 있어야만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지크의 글의 후반부의 결말은 누구나 한번쯤은 꼭 일독해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이 책의 재간행이 있어야 할 텐데, 이 부분은 오로지 출판사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군요.


-글 중반부에 장 지글러와 체 게바라의 일화가 소개됩니다. 그가 1960년대에 2주간 체 게바라의 운전수를 했다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자본주의가 차갑고 합리적이며 모든 관계를 사물화 한다면 인간 ‘그 자체‘는 따스함, 친근함, 친절함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하고 낭만적이며 일견 보수주의적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은 시장영역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들에게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새로운 반역도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폐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을 교육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교류를 노골적인 현금 지불로 환원시킬뿐더러 그 밖의 다른 인간적 유대들을 해체시키고, 모두를 하나의 작은 경제단위로 간주한다

인간이 생산한 물질세계는 인간을 지배할 뿐 아니라 인간을 적대하고,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형성하여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탈인간화된 존재를 창조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면서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은 지난 시절의 포드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일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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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세계화 - 지구민주주의 선언
죠지 몬비오 지음, 황정아 옮김 / 창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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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조지 조슈아 리처드 몬비오는 영국 출신의 칼럼니스트이자 환경문제와 정치활동과 관련된 글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옥스포드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난 이후, BBC의 라디오 프로그램 프로듀서를 거쳐 자연사에 대한 탐사 보도 전문 기자로 인도네시아, 브라질 그리도 동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현재에는 영국 가디언지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으며, 2004년 이후에는 정치 활동에도 적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생태학과 자연보호 및 세계화 정치에 대한 저작들을 꾸준하게 출판하고, 최근에는 ‘사로잡힌 국가 Captive State‘로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Age of Consent : A Manifesto for a New World Order˝로 지난 200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3년 뒤인 2006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잠시 글을 더 진행하기에 앞서 한가지 번역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데요. 여기에는 역자가 번역한 외래어 가운데, ˝꼴롬비아, 써비스, 꾸바, 프롤레따리아, 스딸린, 엘리뜨, 뽀르뚜갈˝이라는 한글 표기가 등장합니다. 서평을 쓰기전에는 저자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출신이어서 외래 고유 명사에 된소리 표기가 저런식으로 된 줄 알았는데, 이 책은 런던에서 출간되었고, 저자 역시 영국인이기 때문에 아마 영어로 출판되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그렇다면 역자가 예전인 1970년대에 ˝종속이론이나 재3세계 정치˝ 이론서에 등장했을 법한 외래어 표기를 저렇게 한 것에 대해 비판보다는 뭔가 이해가 되질 않네요. 그래서 역자의 한줄 답변이라도 듣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선, 저자가 글 서두에서 밝히는 이 글의 기획 의도는 다른 여타의 글과는 달리 매우 명확한 관점으로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전지구적 민주주의화‘를 위해서, 저자는 총 네 가지의 제언을 하고 있는데요. 첫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세계의회, 둘째 현재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부여된 권한을 제거한 민주화된 유엔 총회, 셋째 무역적자를 자동으로 소멸시키고 채무 축적을 예방하는 국제청산동맹, 넷째 부자 나라를 제약하고 가난한 나라를 해방시키는 공정무역기구 등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으리라 생각됩니다. 저자 역시, 앞선 해법들은 매우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며, 다만 이것 이외에 건설적인 다른 대안이 도출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입장을 바꿀 수 있다고 첨언합니다. 사실, 2차대전 종전 이후 케인스의 용맹한 ‘다 같이 잘 살수 있는 경제 해법‘이 미국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브레튼우즈 체제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소위 ‘자유 무역‘과 ‘각국의 최소한의 민주정치‘가 요구되는 국제 체제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개발 도상국에게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는 이 자유 무역 체제는 기존의 G7국가는 말할것도 없이 우리나라와 대만, 중국 역시 경제 발전 초기에는 국내 시장 보호와 산업 보조금을 비롯한 보호 무역 체제로 내수를 방어하고 수출에 올인하는 정책을 펼친바가 있습니다. 이 책의 6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제국주의 시기의 영국 역시 자국의 면화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네덜란드와 인도 및 벨기에 등의 관련 산업을 각종 수단을 동원해 고사시킨 경험이 있으며, 최근에, ˝방글라데시는 의류 판매 특권에 대해 해마다 미국에 3억 1,4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은 개도국에 비해 산업 우세를 보이고 있는 선진국 역시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자유무역이라는 본질이 얼마나 자신들의 이익에 기반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저자인 조지 몬비오가 제안하는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지구적, 국제적 문제의 다수가 지구적, 국제적 민주주의의 부제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자명˝하므로, 오히려 진정한 세계화를 위해 앞선 네 가지의 해법을 고려해보자고 주장하는 것이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계의회 건설을 위한 꽤 실효성 있는 제안을 담은 4장과 저자의 표현대로 거의 ‘자유주의에 의한 전체주의적 강요‘를 일삼고 있는 IMF에 대한 비판과 많은 개도국들의 무역 역조로 인해 발생한 부채 해결을 위해 국제청산연맹과 같은 제시는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음에서 살펴보겠지만, 5장에서 서술되는 IMF 국제통화기금의 본질이 어떠한지는 1997년부터 1998년의 태국과 한국에서 여실히 잘 드러났으며, 국제 금융주의자들의 의견에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정부와 국제 금융 체제가 어떤식으로 이들 국가의 금융 시장에 대한 빗장을 제거하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재편에 몰두했는지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됩니다. 물론 5장의 서술이 리처드 피트의 ˝불경한 삼위일체˝ 만큼이나 적나라 하지는 않지만, 그동안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제기하고 피력한 IMF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공감이 되지만, 미국과 서유럽이 쥐고 있는 IMF와 세계은행에 대한 주도권을 과연 이들이 포기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선 희의적입니다. 물론 말레이시아가 IMF가 요구한 반대로 자본 시장의 통제를 통해 1997년 이후의 위기를 벗어났지만, 이러한 사례는 극히 희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6장에서 비판하고 있는 WTO의 사례에서 G7국가가 주도하며, 밀실 행정이라고 봐도 무방한 WTO의 그린룸에서 이들 서방 선진국가들이 어떻게 개도국들의 대사들을 손에 쥐락펴락 하는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국제 경제 체제 내에서도 민주주의화가 필요하며, 이 민주화에 대한 선결이 전체적인 국제정치와 세계경제 측면의 맥락에서 제일 시급히 달성되어야만 하는 과제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이행 가운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삶을 지배하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능력을 지구적 차원에서 효과 있게 억제할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보주의적 운동에 공감하는 많은 활동가들과 세계 시민 다수들을 실망에 빠트리는 조건이기도 할텐데요. ˝세계의 식량이 과잉 생산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식량 살 돈이 없는 8억 4,000만명은 영양 실조인 것으로 공식 집계된다˝는 점 역시,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무역 조건하에, 기득권을 갖고 있는 유리한 국가는 무조건 이러한 흐름속에서 이익을 추구하려 할 것이며, 여기에는 그동안 세계 정치가 분실한 도덕주의적 가치와 국제 정치 무대에서 힘있는 권력 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여러 기만과 술수로 자신의 이익에 동조하게 만드는 그런 당위성을 어떻게 하면 타파할 수 있겠는가가 큰 과제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의회의 달성이 시급히 요구되지만, 미국의 국제정치와 기본 기조를 고안한 조지프 나이 뿐만 아니라, 저명한 경제학자인 대니 로드릭 역시 이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 바가 있습니다. 이 세계의회의 가능성에 대한 저자의 다각도의 분석에서 특히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인구 비례에 따른 의석수 배정과 민주주의국가와 비민주주의국가로 분류해 비민주주의 국가가 민주정치의 국가들과 달리 좀 더 적은 의석수를 갖는 등의 전세계의 민주주의 달성을 위한 이런 장치들이 물론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과제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베이징 컨센서스로 도출된 중국의 경제 발전이 ‘민주화 없는 성장‘으로 서구의 우려를 강화시켰던 것으로 국제 정치 무대가 민주화에 대한 해법을 인식하고 있다면, 중국 역시 그러한 기조 아래 자신들의 정치를 민주화 해야만 그에 합당한 국익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과 다름 없습니다. 다만, 이 지점에 대한 인식 역시 상당히 이상주의적 이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에 그 세계의회에 대한 요구를 많은 NGO들이 국제 무대에서 뒷받침해야 하며, 특히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시민들이 고결한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국가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국가 정책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공감대가 마련되어야 하겠죠.

끝으로, 이 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바와 같이 공정 무역에 대한 가치에 대해. 특히 ˝가난한 나라 그리고 가난한 나라만이 자신들의 경제 일부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적 주장이 받아들여진 지는 이미 오래됐다˝는 부분과 동일하게 이들 국가들이 자신들의 자원을 온전히 국민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반과 동시에 이에 대한 선진국들의 이해 관계를 철회할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은 단순히 국제 기구와 선진국들의 얼마간의 경제 원조 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일인당 국민 소득이 천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국가들에게 오로지 자유 무역의 원리만 강조하는 것은 더많은 경제적 차취를 불러일으키는 결과 밖에는 도출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케인스의 주장대로 개도국 국가들을 일정 수준의 경제 규모로 달성시켜 이들 국가들이 성공적인 소비 자본주의의 구성원으로서 참여하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선진국들의 이익에 규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이들에 끈질긴 인내가 바탕이 된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하며,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자유 무역이 사실상의 약탈 무역으로 오도되지 않기 위해, 국제 사회가 민주주의적 가치를 먼저 고려하는 풍토가 조성이 되어야 하겠죠. 글 서두에서 저자는 무정부주의와 자유시장주의가 결과적으로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근거에는 바로 이러한 자유 무역의 퇴행적 결과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애초에 이들 타협 불가의 자유시장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고려했던 것은 이와 같은 불균형한 무역 구조속의 국제 경제 체제를 더욱 고착화 시켜 자신들의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결코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 내심이 이에 담겨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적나라하게 WTO의 그린룸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IMF를 비롯한 이런 이해관계가 아직도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음에도 개선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해관계와 극명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누군가에게 지옥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천국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환경을 개선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논리와 영합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 책 2장에서, 시민의 깨어있는 삶 mindful living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실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바람은 국적과 인종을 떠나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이 2006년 출간된 이후로 변변한 서평 한줄 없이 지금까지도 절판되지 않고 판매되고 있다는 점은 뭔가 신기하게 느껴졌는데요. 출판사의 이름값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생경한 현상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민주주의 통치가 무정부주의 보다 정의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이유는 그것이 강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반대 의견의 기회를 제공하는 유일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1945년 이래 미국은 200 차례도 넘는 군사작전을 개시, 그 중 대부분은 세계 평화를 고취하는 일과 무관하고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행한 것이다

오늘날 권력을 잡은 거의 모든 정부는 오직 금융 시장이 받아들일만한 정책만 제시하므로 실상 지구적 자본을 대표한다

민주주의가 우리가 생각하는 올바른 결과를 가져올지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부재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점 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케인스가 이미 제공했으나 지금껏 받아들이지 않았던 선물은 가난한 나라가 부자나라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도, 또 계속 가난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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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지금의 자본주의를 견뎌낼 수 있을까
놈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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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노엄 촘스키 (혹은 놈 촘스키)는 전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언어학자이자, 철학자, 인지과학자, 역사가, 사회비평가, 정치철학자 및 저술가의 직함을 갖고 있는 진정한 학자이자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국의 티파티를 비롯한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촘스키가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하는데요. 이처럼 촘스키는 엘리트-테크노크라트주의적인 기존의 국가 권력 체계에 대중의 종속만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비판적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지식인의 진정한 역할이 요구된다고 그는 매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쥘리앙 방다로부터 최근의 ‘엘리트 독식 사회‘의 아난드 기리다라다스가 주장한 ‘지식인들이 엘리트들과 아주 강하게 결속해 결국 일반 다수의 이익에 반하게 되는 경제 엘리트들과 정치 엘리트들의 홍보 역할˝을 자임하는 지성적 퇴보에 이르게 되지 않았나 고민해 봅니다. 이런 학계의 일반적인 흐름에서 거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바로 노엄 촘스키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근래 촘스키의 글로 서평을 쓰면서 자주 인용했던 것이 그가 장기간 CIA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점입니다. 권력이 두려워하는 지식인, 권력이 떨떠름하게 여기며 마땅히 사회와 격리시키고 싶은 지식인이 바로 이 노엄 촘스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4년 원제, ˝Masters of Mankind Essays and Lectures : 1969~2013˝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촘스키의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정치철학적 편역본(혹은 발췌본)은 원제대로 1969년부터 2013년까지 공개 강의와 몇몇의 시론을 묶어 출판한 글입니다. 여기서 독자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국내 출판사에 의한 편집 출판이 아니라, 원래 미국에서 이러한 시도대로 출판된 논저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총 7장의 주제로 생태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전지구적 환경 문제와 정치철학적으로 기본적인 도덕적 원리에서 ‘보편성의 원칙‘을 기반으로 미국 국내 정치와 미국의 (불법적인) 국제정치적 개입, 테러리즘, 선제공격론 및 현재의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여러 분석과 비판을 글에 담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글의 논증 가운데에는 중요한 지식인의 역할론인 ‘오로지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가감없이 폭로‘ 하는 일종의 겸허한 책무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서문을 작성한 마커스 래스킨에 의하면 현재의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겉으로는 민주주의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는 반민주적인 엘리트 계급에 의해 국가와 사회가 ˝부자와 권력자를 섬기는 강력한 국가˝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일찍이 미국 건국의 기초를 닦은 제임스 매디슨에 의해서도 ‘다수로부터 부유한 소수를 보호해야 하며‘, 함께 ‘원칙없는 대중에 의한 정치 참여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하면 제어할 수 있는가에 자신의 사상을 건국 기초에 녹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촘스키도 이 부분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이런 제임스 매디슨의 사상을 연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매디슨이 생각해 낸 해결책은 ˝사회를 조각내고 대중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것이었다˝고 그는 분석합니다. 이 점은 분명하게도 촘스키가 강조하는 ‘어떻게 하면 사회의 파편화를 방지하고 이를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7장의 논증과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제임스 매디슨을 먼저 이렇게 인용하게 된 것은, 알렉시스 토크빌을 거쳐 존 듀이가 강조해 온 ‘조건들의 평등‘에 위반되는 소수 권력을 위한 안배를 이렇게 중요시 했다는 점은 단순히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나 군중의 봉기를 넘어서 왜 미국에서 ‘개인의 자유‘가 이처럼 중요하게 세대를 거쳐 내면화 되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인식적 단초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제가 무분별한 상업 경제에 의한 민주정치에 대한 부식과 같은 존 듀이의 해석을 아주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경제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까지 받아들인 이 자유의 신봉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헌법을 초월하여) 지킬 수 있는 지렛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개인적으로도 인간 자유의 기본 권리를 지지합니다만 초기 계몽주의 시대에서 자유의 이념은 근본적으로 진보주의적이었으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어떤식으로 변화되어 왔는지를 고려해 본다면, 소수의 기득권층과 거대 자본가가 이 ‘자유‘를 어떻게 이용하고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 모두가 면밀한 개념화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은 매우 명확해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도덕적 기본 원리로서의 보편성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2차대전 이후 진행된 뉘른베르크 재판과 관련하여 촘스키는 보편을 다른 국가, 특히 적국에게 적용하는 ‘정의로운 계몽된 국가들‘에 의해 진행된 이 재판이 ˝그 이후에 올바른 결론이 내려졌다면, 패전국만이 아니라 승전국도 처벌 받았을 것˝이라고 비판하고 마찬가지로 이후에 있었던 미국 CIA에 의한 쿠바의 피그만 침공으로 인해 쿠바의 주권이 침해되었다면 마땅히 당시 쿠바 군부가 마이애미나 뉴저지에 공격을 가할 수 있지 않겠느냐와 같은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케네디 행정부 때는 동맹국이나 우방국 뿐만 아니라 적국에도 무기를 파는 상행위에 대해 아무런 고려가 없었으며, 니카라과와 파나마에 있었던 미국 정부의 불법적인 개입 그리고 칠레에 민주정부를 무너뜨리고 피노체트를 권좌에 앉히게 된 그 끔찍한 결과에 까지 미국이 어떠한 책임을 졌는가에 대해 지난 역사로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국제정치가 헨리 키신저에 의도대로 현실과 이상의 차이로 인한 괴리와 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가 그렇게 강조한 미국의 번영된 민주주의의 이식 또는 자유 민주주의의 맏형이라고 강조하는 프로파간다에 얼마나 어긋나는지 일일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동안 냉전 시기에 UN에서의 다수결에 의한 방안과 안건 토의가 미국이 ‘다수에 의한 결정‘에 의한 미국 국익의 침해를 들어 국제 연합을 불신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촘스키가 열거한, 쿠바 민항기 폭파를 비롯한 수많은 테러 행위를 일삼은 오를란드 보슈를 조지 H. W. 부시가 그에게 사면권을 부여한 것이라든지, 1999년 초에 있었던 동티모르 사태에 있어서 동티모르 인구 4분의 1을 학살한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 미국과 영국의 끊임없는 지원은 대체 미국의 국익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소수의 엘리트-테크노크라트 지배체제에 대해서 촘스키는 1960년대에 이후 대중이 정치적 공론장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이들 엘리트들이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많은 대중들은 권력 자체에 대해 소극적이고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엘리트 기득권층은 그리 믿고 있었지만, 미국의 민주주의가 금권정치와 소수의 과두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음에도 오늘날의 네트워크 기반의 기술 발전으로 대중들의 정치 참여가 훨씬 더 강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다수의 지식인들이 이런 엘리트들과 결탁해 이러한 사회구조적 시스템의 옹호와 홍보를 더하고, 과거 우드로 윌슨과 같이 ˝소수 엘리트가 여전히 정치와 사회에서 필요하다˝는 식의 읠슨 독트린의 논법은 이들의 정치적 가치관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촘스키도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많은 엘리트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 참여 및 민주주의를 사실상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시스템적 안정과 설사 재분배의 실패와 불평등이 심화될지라도 현재의 고정되고 견고한 계급주의적 구조를 옹호하기 마련입니다. 단순히 아주 소소한 사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들은 불만을 갖기 일쑤이고, 이러한 대중들의 요구와 목소리가 나중에는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이르는 제한적인 혁명으로도 나갈 수 있다고 여기는 듯 합니다. 물론 이 점은 대단히 억측인게 많은 민주 사회의 헌법이 개인의 사유 재산을 충실하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동안 신자유주의화와 세계화에 따른 경제적 이행에 따라 이들 소수의 권리는 더욱 증대되어 왔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갈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근래에 급속한 양적이고 차별적인 자본주의화에 대한 촘스키의 비판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도 역시 갈수록 후퇴되어 가고 있는 민주 정치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단순히 민주주의의 쇠퇴에 대한 해법으로 다원주의적 가치를 먼저 제시하기 보다는 이 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인 ‘많은 지식인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에서 그는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제임스 매디슨으로 권력을 가진 소수에 대한 옹호와 배려에 대한 오래된 인식론과 그런 연유로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어떻게 평등의 문제가 계속 왜소화 되어 왔는지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확실히 그동안 진행된 시장 자유화에 대한 민주적 개혁이 필요한 것은 매우 타당하고, 그동안 정부와 기득권을 옹호해 온 거대 언론 재벌들과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다수의 언론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좀 더 대중이 네트워크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을 피력할 수 있는 대체재가 있어야 하는 점은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시급히 고려해야 되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40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법 규모가 큰 출판사가 이런 오타를 수정하지 않고 책을 펴내는 것은 매우 실망스런 부분이라고 밝히고 싶군요.

어용 언론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노동계를 비난하고, 국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금융계와 산업계 거물들의 잘못을 얼버무리며 감추는 역할을 맡은 상업적 매체를 가리킨다

지식인들에게 예외 없이 내재된 엘리트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 성향에 과감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이런 노력(사회 파편화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무산되고 말 것이란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현재의 좌파에게는 현 사회와 사회 변화의 장기적인 추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 대안적 형태와 사회 조직을 만들어 낼 가능성에 대한 판단, 사회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이 절실히 필요하다

냉전은 미국 자본이 지배하는 통합된 세계 경제를 건설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미국 정부가 시행하는 데 필요한 재원과 심리적 환경을 보장해 주기도 했다

노동자와 가난하고 약한 사람은 의회와 법원이 수립한 사회 정책에 실질적으로 종속된다

월터 리프만에 의하면,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역할은 참여자가 아니라 ‘행동의 구경꾼‘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자칭 계몽된 국가들을 제외하면 어떤 국가에도 그 권리(선제적 공격)가 부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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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 히틀러와 독일·미국의 자본가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질문의 책 27
자크 파월 지음, 박영록 옮김 / 오월의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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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의 역사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자크 R. 파월(혹은 자크 R. 포웰스)은 벨기에 겐트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에서도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오랫동안 파시즘 연구에 공을 들여왔고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학계에서 대표적인 수정주의적 역사학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가 집필한 대부분의 역사 주저가 양차대전을 다루고 있고, 그 가운데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 연구가 들어가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지난 2017년에 번역 출간된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에 이어 두번째 서평이기도 한데요. 개인적으로 그의 이 책은 앞선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와 제임스 Q. 위트먼의 ‘히틀러의 모델 미국’에 대한 훌륭한 보론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더욱이 2차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야욕으로 이해되는 기존의 대전사에 대해 상당히 반하는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기에 독자들의 면밀한 배경 지식이 요구되는 글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7년, “Big Business and Hitler”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먼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보다 간단히 자크 파월의 이 글을 소개해 드리자면, 지난 세계대공황의 혼란한 시기 이후, 독일과 미국의 거대 경제인들이 어떻게 히틀러의 파시즘을 지지하고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가에 대한 역사적 서술과 이 기업가들이 왜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파시즘과 같은 권위주의적 체제에 기울어갔는지에 대한 아주 가감없고 여실히 비판적인 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일독하는 내내, 전세계에 거대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이 사회 권력층이라고 불리우는 거대 기업가들이 어떤식으로 민주주의를 불신했고, 반대로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를 자신들의 최대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체제로 여겼는지에 대해 저자가 논하는 내내 실로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실체를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기업인들은 당시 볼셰비즘을 유대인들과 연계시키고 히틀러가 그 처참한 반유대주의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을 분명 잘 알고 있으면서도 헨리 포드와 랜돌프 허스트와 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들이 어떻게 그것에 동조했는지에 대해 마찬가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이 저명한 경제인들의 실체에 대해 여러분들은 또 어떻게 느끼실지 매우 궁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군요.

이 책의 대략적인 서술 방향은 독일 재계인들에게 사실상 발탁되었다고 인정되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의 총수 이자 독일 파시즘의 화신인 히틀러의 행적과 앞선 경제인들과의 실체적인 관계를, 그리고 2부에서는 전시 경제를 밟아가고 있던 독일에 막대한 투자와 그에 따른 거대한 이권을 유지하고 있던 미국의 경제인들과 이들이 어떻게 히틀러의 독일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대전사의 접근과는 달리 자크 파월의 이 책은 그 궤가 사뭇 다르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당시 유럽과 미국의 분위기에서 소비에트에서 벌어진 혁명의 기운으로 인해 많은 자본가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점은 분명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만, 이들은 일정 이상의 금도를 넘어서는 오로지 자신들의 거대한 이익 창출에 골몰한 결과를 참혹한 대전에 이입하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이들이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볼 때, 지난 1차대전의 결과는 “독일 내부의 적색 혁명론자들과 유대인이 등 뒤에서 칼을 꽂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힌덴부르크에 의해 히틀러는 ‘보헤미안 상병’이라고 일축되기도 했습니다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사업가와 은행가, 그리고 돈 많고 힘 있는 개인들의 재정 지원이 없었다면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이 대중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고 1929년 이후 독일 정치에서 히틀러의 부상에 대해 언급됩니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영국의 체임벌린을 필두로 당시 영국 지도층과 프랑스 엘리트 층이 히틀러와의 온건한 지원 관계를 유지하며, 뮌헨 협정을 영국이 손에 쥔 것은 단순히 체임벌린이 유약하고 순진했다는 기존의 학설과는 달리 체임벌린 자신이 히틀러의 지지자였다는 점을 파월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름뿐인 사회주의 노동당을 달았던 히틀러의 정당은 스스로가 지독한 민족주의자였으며, 또한 반유대주의적인 맹목적 믿음을 내면화하는 실체를 보이고 있었는데요. 이 반유대주의와 관련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헨리 포드의 연관성을 저자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헨리 포드가 1920년에 출간한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적 주장인 ‘국제유대인’을 히틀러가 수차례나 탐독했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미국 경제계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는지 드러내는 사례라고 분석됩니다. 히틀러가 포드의 이 책을 통해 “영감과 용기를 받았다”는 것은 후에 무차별적인 유대인 절멸에 이르렀다는 것은 정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런 히틀러와 동조하는 국내외에 세력에게 있어, “이들 파시스트와 필로파시스트는 자신들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애국심도 쉽게 접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이해됩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영국의 기업가와 은행가를 비롯한 지배층 대다수는 파시즘을 무척 선호했고,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히틀러가 동부 유럽을 삼키면서 이곳을 식민지화하고 이곳에 거주는 이등 시민들의 재산을 약탈해 독일 국내 경제를 부흥시키는데 사용했으며, 더욱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멸수용소’에 있던 유대인 노동력들을 강제 노역에 처하게 함으로써, 이 파시즘의 권위주의가 어떤식으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기여했는지를 밝혀내고 있습니다. 2부에서 그려지는 당시의 미국 역시, 다수의 많은 경제인들이 백악관의 주인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을 경멸해 마지 않았으며, 미국 재계의 주요 인사들 역시 파시즘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임과 동시에, “미국의 기업가와 은행가가 실제로 상당한 금액의 돈으로 히틀러를 후원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고 저자는 단언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헨리 포드는 자신이 그동안 보여왔던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한 지지를 1939년 이후 사실상 철회하면서도 그 본심에는 일전에 행했던 아돌프 히틀러를 지지한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연합국과 나치 독일 어느 한 곳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로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디즘과 더불어 당시의 자본주의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이들 기업인들과 은행가들이 반사회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인식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는 점은 초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대전의 막바지까지 나치 독일이 전쟁의 지속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미국 기업들이 손수 고무와 석유를 지원하고, 특히 알루미늄이라는 전략적 원료를 ‘무한정 비축’ 할 수 있었던 건 대체로 엘코아라는 또다른 미국 기업 덕분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독일의 프리츠 티센과 햘마르 샤흐트와 미국의 헨리 포드, 월터 C. 티글, 이레네 듀퐁과 같은 양국의 기업인들이 가차없는 징발과 노예 노동력을 제공한 이 파시즘을 얼마나 선호했는지 대체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에서 이들 기업인들의 상상도 못할 정치적 인식을 모든 자본가들의 일로 치부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자크 파월의 앞선 논저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의 주요한 결론이 왜 그런식으로 도출되었는지 충분히 이 글을 통해 함께 이해할 만했습니다. 자크 파월의 말대로 미국은 루즈벨트의 케인스식 대처 뿐만 아니라 이 거대한 대전에 의해 경제 위기를 벗어났으며, 영국에 제공한 무기대여법과 이를 통한 전쟁 물자 판매로 인해 이후의 ‘아메리카 드림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결코 부인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 여겨집니다.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자들이 있다는 역사적 경험은 인류가 결코 극복하기 힘든 딜레마로 남겨질 것은 매우 분명해 보이는데요. 이것이 역사적 진보라는 측면의 부산물인지는 모르겠으나 파월의 이 책이 얼만큼의 교훈을 제공하게 될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적정한 생활 수준을 누리도록 해줄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당시) 미국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과두제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뒤, 나치스와 협력해 또는 나치 독일에서 사업을 벌였던 제너럴모터스 등의 미국 기업들은 처벌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미 연합군의 폭격으로 자회사가 입은 손해까지 보상 받았다

(당시) 지식인들에게도 ‘위험한 계급’ 또는 ‘군중’에 대한 공포가 표출되었다

히틀러는 1926년에서 1927년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산업계 금융계 명사들 앞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표출했다

당시 재계의 구성원들은 국가 통제주의 (케인스식 경제)를 혐오했고, 이상적인 자유방임주의 세계에서는 자신들의 사업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데, 그 권한을 침해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지배층은 그들의 관점에서 성가신 민주주의 체제를 자신들이 원하는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프랑스 지배층이 굴욕적이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패배를 통해 독일에서 파시스트 ‘정권’을 ‘수입’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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