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합들 - 갈등과 적대의 세계를 정치적으로 사유하기 사상가들 총서 1
샹탈 무페 지음, 서정연 옮김 / 난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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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도 자신을 ‘정치이론가’로 소개하고 있는 저자, 샹탈 무페는 전세계에서 많은 존경과 관심을 받고 있는 여류 학자입니다. 특히 번역된 이 책의 간행 취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정치학 및 정치철학 분야에서 최근의 무페 만큼 조명을 받고 있는 학자는 흔치 않기도 합니다. 그녀는 영국에서 학문적 동반자이자 삶의 동반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만남으로 자신의 사상적 경향이 여러모로 견고화되었고, 라클라우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대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 또한 두터워진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더불어 그녀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성찰과 분석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근래 세계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학문적 소명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이 책은 지난 2013년, “Agonistics : Thinking the World Politicall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글의 서문에서도 무페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바탕은 그녀의 공개 강연과 발표가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글이 대체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정치 제도를 방치하는 전략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대의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최근 세계의 문제적인 경향들과 다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련의 학문적 목표 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무페는 ‘경합’이라는 용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요.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갈등은 근절될 수 없으며 근절되어서는 안된다”는 명제 아래 “모든 쟁점을 따져보고 다만 이를 서로 적대화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앞선 단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 경합을 통해 무페가 바라는 점은 “사회가 완전히 총체화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즉, 단일대오 아래 정치적 선명성이 거부되고 오로지 하나의 사상 하나의 주장으로 총체화 되는 것에 대한 완벽한 거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자유민주주의 기조 아래에서 서로 대치되고 대비되는 정치적 상대자들이 서로 괴멸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어쩌면 정치이론가들 내지는 정치학자들의 사명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최근의 미국 정치 무대에서 풀뿌리 정치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티파티 운동”이 미국내의 모든 진보주의 운동을 사실상 격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점은 이렇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이 책은 총 6장의 다소 구분된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1장에서는 경합적 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와 함의, 2장은 만약 다극적이고 경합적인 세계가 가능하다면, 과연 어떤 민주주의가 필요하겠는가에 대해. 3장은 다소간의 인위적이고 배타적인 집합통일로의 선택에 놓여 있는 현재의 유럽과 국가인가 지역인가의 유럽 논의를, 4장은 사실상의 포퓰리즘을 시사하는 오늘날의 급진주의 정치의 현주소를, 5장은 경합적 정치로 도출되는 현재의 보완적인 예술의 가치와 실천을, 그리고 마지막 6장인 결론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선, 1장은 그동안 제가 집중했던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의 다원적 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근거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정성은 정확히 갈등에 대한 승인과 정당화”에 있으므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근절할 수도 없고, 또한 근절해서도 안된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것은 “대결을 혐오하면서 합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 참여에 대한 무관심과 불만을 야기한다”는 전자의 부정으로 초래될 수 있는 측면을 이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민주주의적 대의가 수많은 의견들의 총합을 기본으로 통일된 주장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조정된 각각의 의견을 도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점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혼란과 의견 불일치를 더욱 강화시켜 기본적인 현실 정치에서 역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는 반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굳이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언급하기보다는 인간의 권리인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현재까지 고안된 여러 정치 사상이나 이론들 가운데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은 거의 민주주의가 유일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일찍이 스피노자가 밝힌 바와 같이 권력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체제나 제도의 결함보다는 그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드는 인간들의 본질적인 욕망에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 권력들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측면의 이 민주주의는 따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을정도로 다수의 이익에 효과적으로 수렴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물론 소수의 이익에 집중하는 신자유주의자들과 같은 이들은 이러한 민주주의를 사실상 거부하고 시장에서 정치를 제거하고 공공선을 아예 시장에 일임하는 맹목적 믿음을 갖고 있는데, 지난 40여년의 이러한 이행 가운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아주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적대없는 다원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먼저 여기에는 무페가 강조하는 대로 “갈등이 적대적 형태로 출현하는 것을 먼저 피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버마스가 주장한대로 시민들의 건전한 공론장이 많이 마련되어야하며, 저자인 무페가 대중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중’이라고 이해하는 바와 같이 스스로가 부화뇌동하지 않는 건강한 이성과 이를 통한 여러 학습들을 통해 합리적인 정치성을 갖추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2장에서는 다극적이고 경합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보편적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와 평등과 인민에 의한 지배, 즉 인민 주권의 이념을 특권화하는 이 민주주의 모델이 우리의 삶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녀는 강조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저자인 무페가 얼마나 강력하게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런 그녀를 사회주의를 품은 혁명주의자라고 급진주의와 같은 멋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만 일전에 민주정치 아래에서 많은 좌파들이 지리멸렬한 것이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 우파들에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궁극적으로는 건강한 민주제도를 답보하기 위함이라는 대의에는 실패했던 것이라고 진단했던 그녀의 이런 주장에는 앞선 논의들이 기반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다시, 앞선 논점으로 돌아가서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적 이상의 다층적 절합들, 종교와 정치가 다른 관계를 가질 수도 있는 그런 절합들의 가능성을 구상하는 다원주의적 접근법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그녀가 진단하는 데에는 오늘날 대규모 이슬람 난민의 유입 사태에 놓여 있는 유럽의 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또한 이 점은 얼마나 우리가 효과적으로 다원주의적 사회를 향해 갈 수 있겠느냐에 대한 선결 과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뒤이어, 3장은 앞서 간략히 설명한대로 오늘날 유럽의 선결 문제인 이슬람 난민들과 이주민들의 유입과 더불어 진정한 통합에는 거리가 먼 현재의 유럽 정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국가들의 유럽인가, 지역들의 유럽인가”라는 이번장의 소제목은 이렇듯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유럽연합은 주권의 담지자이자 민주주의 실행의 중심처를 제공하는 동질적인 데모스를 유럽적 수준에서 창안하는 데 목표를 둬야 한다는 제안을 상기해야 한다”고 먼저 저자는 언급하고 이러한 측면에서 사실상 오늘날의 유럽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좌파 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유럽 연합의 틀 안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모델의 대안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전반적인 이익을 위한 정치 제도화의 개변에 따른 지난 몇 십년간의 이행에 따른 다수의 고통에 눈을 감고 있는데요. 이것은 아직도 경제로 인해 사회는 진보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삶의 개선에 이르지 않았냐고 이들은 반문합니다. 즉,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 이행 자체에 대한 어떠한 결점도 없다는 식의 일방적인 수용화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탈정치화를 동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확실히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어지는 4장의 오늘날의 급진정치 특히 우파 포퓰리즘의 등장이 앞선 3장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자인 무페는 이 4장의 첫줄에서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무소불위를 떨쳤던 날들이 다행히 저물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저는 여기에 그리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러 출판계를 포함해 많은 학계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일겁니다. 그렇지만 이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우리의 비판에 의해 대안 가치의 부상으로 인한 쇠퇴인지, 그냥 그 반대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대로 과거 좌파의 실패는 부정할 수 없고 이러한 가운데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세력과 대안 세력이 전무한 가운데) 이어진 신자유주의화가 어떤식으로 나타났는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선을 위해서는 다시 시장에 대한 정치의 우위와 탈정치화를 회복시켜 많은 시민들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것을 조직하고 단일하게 만들 세력이 있는지는 부정확합니다.

따라서, “자유 무역이 진보를 이룬다는 잘못된 통념”을 얼마나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다중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조직할 수 있겠는가”에 앞으로의 대안도 출현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개인은 사회와 국가로부터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절대적으며 환원 불가능한 존엄성을 지닌다”는 점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식의 민주 제도를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보여지는데요. 사실 장황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대해 쓸 글은 많지만 아주 중요하게 고찰해야 될 점은 뭐니뭐니해도 이 신자유주의화가 마땅히 행해져야 했을 기본적인 민주적 가치를 외면하게 하고 시장이 무엇보다 우위를 점하는 식의 체제를 일방적으로 구축시켜 왔다는 점에 있을겁니다. 여기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 인류가 얼마나 경제를 받아들였다고 애초에 인간과 경제가 같이 태어난것으로 여기는 경제학자들과 이러한 풍토에 비판했던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서 내리는 결론인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항헤게모니적 공격을 함께 개시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저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가 정말 ‘일반지성’을 갖는 ‘자발적인 다중’이라면 최소한 현재의 체제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적 인식은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많은 학자들과 이론가들이 현실에 맞는 이론들을 재정립화시켜야 하며, 시민들은 권력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다원주의적 가치에 맞는 건전하고 힘있는 시민들의 권력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이 앞으로 다음 세대와 전세계에 미래에 가장 필요한 해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먼저 이 책을 좀 더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의 일독이 무엇보다 필요한데요. 현재로선 절판되어 구할 수 없기에 이 점은 매우 아쉬울 따름입니다. 조만간 시중에 다시 재간행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민’, ‘인민주권’과 관련해 아직도 이데올로기적 가치관으로 투영해 보이는 외눈박이 분들이 있을텐데요. 얼마전에 국사를 가르치는 황현필 선생은 “이 인민이라는 글자는 사람인과 백성민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라는 취지로 강의에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저 역시 이에 동의하고 더불어 우리가 장 자크 루소의 인민 주권과 그에 따른 공화주의를 긍정하고 인정한다면 이 인민이라는 단어를 이념적 단어로 몰이해하는 것은 이제는 그만해야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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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역사 - 거래, 스파이, 거짓말, 그리고 진실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강규형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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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이르러 대단한 냉전 역사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존 루이스 개디스는 미국 텍사스 주 커튤라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난 후, 의외로 텍사스 대학에서 현대 철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이후, 영국 옥스포드와 미국 프린스턴 대, 그리고 핀란드 헬싱키 대학 등지에서 방문 교수를 역임하며 비로소 그의 명성에 걸맞는 세계 현대사와 냉전사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더불어 ‘냉전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조지 케넌과의 밀접하고 돈독한 관계는 아마도 냉전사와 미국 현대 외교사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넘어 천착하게 된 이유가 되지 않았나 짐작해 봅니다. 또한, 그의 삶에 있어서 마지막 원고가 될지도 모르는 ‘조지 케넌’의 전기의 집필은 냉전사를 비롯한 미국 현대사에 대한 이 노학자의 집념을 엿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여기에 따로 저자인 개디스가 언급했던 이 책을 펴내게 된 목적의 변을 적어보고 싶은데요. 이제는 냉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많아진 만큼 이 냉전을 일반적인 교양 수준에서라도 후세에 전하고 싶었다는 그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번역 출간된 마이클 돕스의 글과 함께 같이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5년, “The Cold War : A New Histor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는 거의 모두 살아남았다”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의 그의 소회가 이 냉전을 여실히 평가하는 문장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베를린 장벽과 구소련이 붕괴한 1989년과 마지막 1991년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첨예한 냉전의 기간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는가냐고 질문을 한다면 1945년의 분단과 1950년의 한국 전쟁으로 귀결될 수 있을겁니다. 마찬가지로 개디스의 이 글 역시 진정한 냉전의 시작을 바로 의도치 않은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실용적이었던 루즈벨트는 2차 세계대전중에 소련을 동맹국으로서 환영했다”는 문장은 전후 스탈린의 비타협적인 소련의 팽창을 루즈벨트가 어느 정도 인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관된 제국주의자의 면모를 보인 처칠과는 달리 스탈린은 “그의 겉모습 뒤에 신중한 타산, 야심, 권력욕, 질투, 잔인성, 그리고 교활한 복수심이 숨어 있음”을 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전후 그리스에서의 혼란에 영국이 재빠르게 책임을 뒤로하고 바통을 이어 받은 미국에 이 그리스 카드를 이용해 스탈린은 전후 구상인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우선권’을 따내게 됩니다. 물론 상당히 민주주의가 진행된 체코슬로바키아에 스탈린이 붉은 군대를 파견한 것은 이를 여실히 입증한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더욱이 냉전 시기 동안 NATO의 존재와 함께 다루었던 다소 배타적인 핀란드 문제는 다수의 서유럽 국가들이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와는 구별되게 이 글 1장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이 오로지 바랬던 것은 바로 “안전보장”이라고 언급됩니다. 1949년까지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했던 미국이 자신의 안전보장을 추구했다는 것은 약간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근래 읽었던 많은 미국 정치와 관련된 책에서 미국 유권자들이 매우 직접적으로 시민의 안보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스탈린의 구상에 반항을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입니다. 사실상 모스크바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던 티토는 이후 소련의 징벌을 받을것이라고 여겨졌으나, 오히려 그는 워싱턴과 가까워지면서 역사의 확신을 거부합니다. 바로 이후, 마오쩌둥을 다루는 데 이골이 나있다고 여긴 스탈린은 “차이나 핸들러”로서 당시 김일성에게 한국 전쟁을 승인하고, 이후 전세의 영향에 따라 중국을 지원카드로 내세우는 등의 방안을 마련하지만 이것은 미국의 신속한 참전에 다시금 냉전의 서막을 일깨우게 됩니다. 고작 작은 땅덩어리 남한을 공산화시키는 것을 모욕이라고 여겼던 트루먼은 아주 재빠르게 (전쟁이 발발한지 거의 12시간도 안되어) 참모들을 소집하고 더 나아가서는 유엔에 회부하는 등의 정치적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이 한국 전쟁은 그동안 재건에 나서고 있던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안보 보장이라는 측면의 외통수였으며, 애치슨 라인을 차치하더라도 워싱턴은 이를 마냥 좌시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전쟁 와중에 “워싱턴의 유럽 동맹국들은 확전을 생각하면서 겁을 먹고 제정신을 잃을 정도였다”는 언급에서 맥아더가 부르짖었던 핵무기 사용과 더불어 한반도 무력 통일이 왜 불가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맥아더는 이를 인식하는 동시에 수용하고 이후 워싱턴의 처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글의 후반부인 5장에서 이 냉전을 요약하는 “전쟁 억지 전략가들은 방위 대책이 전혀 없이 차라리 미사일 수만개를 즉시 발사되도록 배치해 놓는 것이 국방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고 확신했다”는 개디스의 평가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1983년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연합 훈련인 “에이블 아처 83 Able Archer 83”의 두 번의 핵전쟁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상호확증파괴 MAD는 차치하더라도 아예 민간인들의 절멸까지 인식하는 두 강대국의 핵대결은 물론 냉전을 종전시킨 세 명의 트로이카, “로널드 레이건, 마가렛 대처, 레흐 바웬사”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가기 전까지 아마도 우리에게는 거의 생존의 문제였을 겁니다. 개디스는 본문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인간사의 피폐화를 무조건 답보하지는 않았다고 비평하고 있습니다만 일전에 스탈린이 자본주의 국가들 간에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이 마르크스 교조주의가 허구로 밝혀졌던 것만큼 전세계 민주주의에 의한 자본주의체제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개디스는 “정당성과 정의는 다르다”는 헨리 키신저의 말을 소개하면서 이 키신저를 비판했던 자유주의자들의 말에 문득 답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외 정책이 언제나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고, 따라서 안정을 일순위로 추구하는 키신저의 냉소적인 태도를 비난했다”는 이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의 논리는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왜냐하면 이 첨예한 냉전 구도의 시기에서 미국의 CIA가 자신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과테말라에서 1954년 아르벤스 구스만 정부를 몰락시키고, 1961년에 케네디 행정부가 벌인 쿠바 피그만 침공의 수포, 그리고 1970년 선거로 선출된 칠레 민주정권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3년간이나 몰락시키기 위해 고군부투한 당시 백악관과 후에 군부 쿠데타에 끝장난 칠레에 대해 헨리 키신저가 적잖이 안도했다는 회고를 붙인 것은 키신저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어두운 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냉전 시기에 미국과 자유 진영의 생존의 사활적 이익이 달려 있다고 하더라도 CIA가 외국 정부를 몰락시키는 것에 대한 정당성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대해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과거 매카시즘에 대한 것만으로 적당한 교훈을 미국인들이 얻었다면 스스로 민주주의의 맏형 국가를 자임하면서도 어떻게 선거로 당선된 민주 정부를 퇴출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미국인들의 양심에 의한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고찰이 수반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을 키신저가 그냥 국제 외교에서의 단순한 낭만주의라고 취급하려고 하는 부분은 노련한 외교학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닉슨이 벌인 일들로 인해 그의 하야 이후 법 위에 대통령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중차대한 헌법적 관념에 비해 CIA가 외국 정부에 벌인 일들을 그냥 위법 정도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약간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레이건이 특유의 단순명료함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한 통찰을 보여왔다고 평가하는 것에서도 그가 닉슨과 같이 불거지지 않았을 뿐이지 여러 과오를 만들어냈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할겁니다. 더군다나 레이건 임기 말년에 이란-콘트라 게이트의 관련자들에게 연방 대통령령에 의거 면죄부를 쥐어준 것 또한 대비되는 레이건과 닉슨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지만 민영화와 더불어 진행된 신자유주의화에 대해서도 보이는 저자의 애매한 태도도 약간 아쉬워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강조하지만 상호 멸절의 대결 구도에서 “미소 관계에서 오로지 추구했던 것은 안정화”였던 만큼 그와는 다르게 반대로 진행된 대규모 핵무기 감축 조약과 더욱 개량된 탄도탄 미사일의 개발과 배치 등은 수없이 많은 우발적인 핵전쟁이 발발할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의 평화를 위한 노력과 서유럽과 아시아에서의 미국 동맹국들에게서 진행된 민주주의적 이행이 좀 그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든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여기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면서 키신저가 “세계는 2차대전 종전 이후로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른 면모일 것입니다. 물론 개디스가 언급하는 민완 외교관인 키신저에 대한 꽤 긍정적인 평가가 글 곳곳에서 보이기도 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역사가의 입장에서 백악관의 주요 행위자였던 헨리 키신저에 대한 평가는 다르게 할 수도 있다는 측면의 진술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입체적인 분석은 스탈린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행적, 수많은 백악관과 크레믈린의 주인들을 통해서 이를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은 저자인 개디스의 수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약간 첨언으로, 스탈린이 한국 전쟁에서 신속한 미국의 개입을 오판한 것은 당시 백악관이 대만으로 쫓겨난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구원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고 개디스는 언급하고 있는데요. 더불어 앞서 밝힌대로 트루먼이 이 남침을 미국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던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덕분에 과거 애치슨 라인에 대한 실제적인 외교적 평가가 그동안 공개된 여러 외교문서들로 인해 ‘개인적 의견’으로 이해되고 있는 점은 뭐랄까요 역사의 드러난 선명성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는 분들에 따라서는 최근에 번역된 개디스의 “미국의 봉쇄전략”과 갈등하실 수도 있겠는데요. 전반적인 내용은 전자가 더 상세하고, 여기의 “냉전의 역사”는 약간의 개론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분명 양자는 각각의 일독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번역은 후자가 좀 더 나아보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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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파워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스마트파워위원회 엮음, 홍순식 옮김 / 삼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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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행정부 이후 차기 행정부인 오바마 행정부에 지난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한 동맹과의 균열 그리고 전세계에서 미국의 영향력 쇠퇴에 직면한 시기 등에 적절한 조언의 목적을 위해 탄생한 것이 이 ‘스마트 파워’라는 보고서 입니다. 국내에는 삼인 출판사가 일종의 단행본으로 번역 출간을 했습니다만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등지에서 편찬하는 관련 백서나 보고서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보입니다. 바로 이 보고서를 작성한 곳은 미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CSIS 즉, CSIS인데요. 이 CSIS는 영국의 국제전략연구소 International Institution for Strategic studies를 본떠 만든 초당적이고 독립적인 비영리적 기구입니다. 여기에는 미국의 전 상원의원인 샘 넌 Sam Nunn이 1999년부터 의장을 맡아온 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국제정치학과 국제외교에서의 ‘스마트 파워’를 고안한 조지프 나이와 과거 딕 체니와 함께 포드 행정부에서 헨리 키신저를 몰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대표적인 네오콘 인사인 리처드 아미티지가 이에 속해 있습니다. 특히 리처드 아미티지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기에 국무부 부장관을 역임했고, 우리에게는 대표적인 ‘저팬 핸들러’로 유명한 인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09년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보고서라는 성격상 다시 재간은 불가능하지 않나 짐작해 봅니다.

먼저, 이 책의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가 등장합니다. “전통적인 동맹국들조차 미국적 가치와 이해가 과연 그들 자신에게도 적합한지 의문을 품고 있다”고 단정하면서, 이러한 연유에는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기에 벌인 이라크 전쟁과 이후, 불법적으로 운영된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죄수들에게 대한 각종 고문과 가혹행위가 단순한 국제 사회의 여론 악화를 넘어 동맹국들간에서도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불러일으킨 주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CSIS는 근래 ‘스마트 파워’를 고안한 조지프 나이의 추동에 힘입어 차기 행정부에 국제 외교 무대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재고를 위해 적절한 조언을 하기 위한 목적을 이 보고서에 담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미국의 영향력 유지에 악영향을 끼친 관타나모 수용소의 존재 하나 만으로 이러한 결과가 도출된 것은 아니며, 냉전이 종식된 시기 이후부터 2001년 9. 11 테러를 거쳐 이러한 사실상의 미국 패권 위기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미국을 상대로 굉장한 짓을 벌이고 있는 중동의 테러단체와 같은 비정부적인 소수 무력 단체의 등장은 어쩌면 국제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적나라하게도 이들 소수의 테러단체가 극소량의 핵무기라도 손에 넣는다면 그것의 파급효과는 기존의 핵보유국이 갖고 있는 핵무기와는 본질을 달리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릅니다. 본문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핵 관련 참사로 말미암아 지구상에 광범위한 물리적 피해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위협은 반세기 동안 존재해 왔다”는 것 이상의 참혹한 나레이션이 앞선 테러단체들의 의해 발생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책 2부에서 언급되는 “공유된 전략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위기는 더 일어나기 쉬울 것”이며, 여기에는 어떻게 하면 미국이 추구하는 자국의 안전 보장 및 세계 안보 위기를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심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하드 파워에 의존한 대응을 잠시 내려놓고, 국제 사회의 공감대와 미국에 대한 준 적대국들에 대한 태도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기존의 동맹국들이 미국의 대의적 목적에 규합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스마트 파워’를 위주로 영향력 재편을 해야한다고 이 보고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최근의 국제적인 구상들을 거부해 왔는데요. 기후변화에 관한 교토의정서, 국제형사재판소, 대인지뢰금지협약, 아동권리협약이 포함된 일련의 국제 함의 등을 미 의회가 거부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협정과 세계적인 규멉은 가장 필요한 때에 미국이 동맹들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지속적인 역량을 제공한다”는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더욱이 “미국 국내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국제법을 구속력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시사적인 것으로, 동맹을 구식이며 없어도 되는 것으로, 그리고 국제 제도를 노후하고 부적당한 것으로 본다”고 첨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 이러한 미국의 직접주의에 대한 선입견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아직도 많은 국가들은 “서구의 군사력 아래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고 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이 처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이 보고서는 일종의 다자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존에 해왔던 AIDS/HIV 백신 개발에 대한 초정부적인 협력과 후진국들과 실패 국가들에 대한 점진적인 원조 프로그램, 그리고 국제 무대에서의 대의에 관한 최소한의 공감대 전환 등을 이 다자주의 이론에 근거해 제시합니다. 물론 이러한 조언에 대해 8년 기간의 오바마 행정부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채택하면서 어쩌면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보다 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유일노선을 경주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까지 제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과연 이 스마트 파워가 하드 파워를 상호 보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이 동맹들과 우호국들과의 연대에 나서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협력과 대화에 나서는 길이 그냥 자신의 하드 파워인 군사력을 투입해 직접적으로 추구해 가는 것이 좀 더 손쉬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의 보고서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공공외교에 대한 지원과 각 국가들의 협력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지원프로그램 그리고 기존의 동맹들에 대한 “같이 갈 수 있는 대의”에 대해 본질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미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 또한 성대하리라 여겨집니다. 사실 다자주의적 국제 정치가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막대한 비용보다는 적을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그리 생각합니다만, 아무래도 미국 국민들이 자신들의 안보에 얼마나 기여하고 보장할 수 있는 대통령을 뽑으려고 하는 점은 그들의 권리일 수도 있겠습니다. 따라서, 각자의 행위자들이 서로 추구하는 목적과 이익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일방적인 수단의 투사는 그것의 정당성을 논하기에 앞서 그 결과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야 됩니다. 특히, 오직 미국만이 선점했던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의 큰형, 전세계인들의 인권의 요람 및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지난 이라크 전쟁과 포로들에 대한 극악한 대우와 인권 유린 등이 오늘날 어떻게 미국을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미국 정치권이 계속 고심해봐야 하는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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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이란 무엇인가 - 근대 국가의 기원과 진화
로버트 잭슨 지음, 옥동석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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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로버트 잭슨은 버클리 대에서 정치과학과 관련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이후, 보스턴 대학에서 국제 관계학을 가르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비롯한 식민정치에 대한 연구와 이와 관련해 동시대의 영국의 견고한 제국주의 정치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이 뿐만 아니라 옥스포드 대학과 런던정경대 및 스탠포드 대학의 방문 교수이기도 하며, 영국과 캐나다 그리고 덴마크 정부의 외교정책 자문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07년에 “Sovereignt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1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한가지 번역과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역자는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인데, 아무래도 정치학과 인문학에 관련된 배경 지식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본래 인명 표기에 대한 영문상으로의 표기를 그냥 갖다 쓸 정도로 개념이 부족해 보였는데요. 이 부분은 맨 마지막에 따로 밝혀 두기로 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은 약간 특이하게도 역자의 번역 취지의 글이 맨 앞에 위치해 있었는데요. 이것을 서문으로 여겨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역자의 변이라는 장으로 맨 뒤에서 다루는 것과는 매우 상이한 것입니다. 물론 원저자의 서문이 뒤에 이어지기도 합니다. 다시 글로 돌아와서, 이 글은 총 6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다시 엄밀히 말하자면 주권과 주권체 개념에 대한 유럽 위주의 시대적 서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평가하는 데에는 저자인 로버트 잭슨이 1장에서 주권체에 대해 밝히는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즉, “주권체는 중세 이후에 전 세계적으로 등장한 헌법사상인 동시에 그 이전 시대를 명확히 구분짓고 또한, 보편적 기독교 신정에 반하는 사상에 기초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규정되는데요. 이는 시대를 거치면서 주권체의 개념이 변화하게 되고 이것은 최종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읽히 인지하고 있는 “주권체는 바로 다름 아닌 일반 의지의 행사”이면서 이러한 주권체를 형성하며 발전해 온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주권은 거부될 수 없기 때문에 문어상으로는 국민 주권체는 대중이 실질적으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정부로 이해될 수 있다”는 4장, 대중 주권체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1장에서 저자가 단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이 책이 사상사적 관점에서 기술되었다’는 부분입니다. 애초에 정치발전과 공화주의적 착안과 민주제도 전반의 부분에서 학술적으로 주권과 주권체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이 주권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역사적인 사상의 흐름을 거쳐 변화를 거쳐 왔는지에 대해 저자는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접근법이 아예 무의미하거나 한계를 갖고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애초에 유럽의 역사에서 이 주권을 다루고 있고 (물론 그럴 수 밖에 없겠습니다만) 소위 문명 세계를 이루는 사람들의 권리라는 것으로 다루고 있는 점은 소급으로만 이해해도 그 근거가 명확해 보였는데요. 이를테면 3장의 유럽의 주권과 전 세계에서, 각 유럽의 국가들이 제국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이 임의로 정해놨던,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의 토착 정권에 대한 사실상의 주권 불인정은 바로 이것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흐름속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열강이 식민지 건설에 나섰고, 근대를 넘어선 1910년대의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 조차 유럽인들을 제외한 다른 민족과 인종에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저자가 밝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유럽의 정치가 주권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겁니다. 과거 중세 시대에 있었던 정교 일치 사회에 대해 저자인 로버트 잭슨은 이 시기의 로마 교황으로 선도되는 여러 정치적 기술과 체제에는 각 유럽의 봉건 영주들 중심의 일종의 선정권을 갖고 있는 중세 왕정으로 구분된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는 로마 교황이 봉건 왕정에 대한 정당성 답보에 관여했으며, 14세기 이전까지도 왕이라 지칭되는 자들이 완전한 중앙 집권체를 이루지 못했기에 봉신의 권리만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봉건 국왕들이 자신들 위에 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한 존재임을 피력하는 루이 14세와 찰스의 시기까지는 교황권에 대한 쇠퇴에 따른 일종의 권력 공백이 이들 봉건 왕들의 정치적 권력 확대와 더 나아가서는 17세기 이후 로마 교황의 권한까지 억누르는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는 격렬한 종교 개혁과 그 흐름에 따른 사회 변혁이 봉건적 왕들의 이익 확대에 부차적으로 기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였는데요. 단순히 자신들의 군주를 뽑고 옹립할 권리를 종교 개혁 와중에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당시 만연된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터무니 없는 민중들에 대한 착취는 국왕과 교황권이라는 권력의 교체를 추동했던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저자는 바로 중세 시대 이후의 유럽 시기를 주권의 시대의 시작으로 파악하는 듯 보였습니다. 특히 저자 자신이 엄청난 변화라고 인지한 군주 체제에 대해 점차 인정되는 주권과 기독교 공화정이라는 체제로의 해체과정은 수세기에 지속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친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 체제와 각 봉건 영주들이 자신들이 신성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의미로 “기독교 신이 인정한 권리에 의해 통치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적 유지는 유럽이 근대 초기에 이를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외형적으로는 유럽의 세력 균형이 시작된 시기이며, 그런 연유로 베스트팔렌 체제 자체가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신성의 유지와 신성한 권력이라는 이름의 각 국왕들의 주권체가 뒤이어 ‘제국 주권체’라는 미명하에 식민지 건설과 인종적으로 차별을 지우는 식의 권위와 정치적 선점이라는 오명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뒤이어 4장에서는 ‘국민의 이름’이라는 대중 주권체에 대해 기록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3장과 4장은 집중해서 읽어야 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라는 대목에서 시작된 이 대중 주권체는 후에 프랑스 혁명이후로 초래된 나폴레옹 보나파트트의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로 전달됩니다. 이 대중 주권체는 정치적으로는 과거 제국 주권체와는 달리 매우 다변하고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됩니다. 영국의 명예 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중이 스스로 주권을 챙취하게 되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으며, 더욱이 프랑스 혁명 이후 발생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제정은 전 유럽은 전화의 불길로 이어지게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의회 주권체라는 개념이 발생한 게 아닌가 문득 예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대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을 목도하고 난 이후에 그것의 폭력적 결과를 얼마간이라도 방지하기 위해 의회의 주권 개념이 도입된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이 ‘대리인 정치’가 일반적인 대중들을 대신해 반대와 첨예하게 싸워 나가는 개념으로 일정 부분 인정한다면 이러한 체제의 발전이 아주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런 의회 정치와 의회 주권의 시기에는 “국민의 이익, 공공재, 공익, 국가안보, 시민권, 공공복리 등이 내포하는 정치 사회의 규범적 기준에 의한 주권체”를 등장하게 하였습니다.

현재의 국민 국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민족 자결주의와 관련해 ‘동일 민족 동일 국가’라는 의미하에 양차대전 이후 이러한 정치 결사체의 획득이 시도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전 유럽에서의 국민 국가 개념의 발생일텐데요. 특히 이 부분은 저자가 밝히는 대로 캐나다의 ‘두 개의 민족 그리고 한개의 민족 자결’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배타적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는 세계화의 범람 가운데 이 국민 국가의 축소 내지는 쇠퇴가 예견되어 왔는데요. 물론 저자의 논법과는 약간 벗어난 경우일 수도 있겠지만, 근래 중동에서의 테러리즘 발호는 이러한 국민 국가의 쇠퇴를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실 그동안 초강대국 미국과 국제연합이 주도하는 ‘인도적 개입’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테러리즘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해당 지역에서의 주권 약화를 불러일으켰다 이해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다. 애초에 주권 개념을 국제 연합의 지위나 국제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배타적이 고유한 개념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면 많은 실패 국가에서 보여지는 내전과 전쟁에서 고통스런 인명 피해와 무분별한 살상을 막기 위해 이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이 바로 앞선 측면에서 주권의 쇠퇴를 가져왔고 더불어 세계화의 흐름속에서 이어지는 탈국경화 역시 여기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자가 의문을 표하는 부분인 이러한 세계화의 시스템에서의 세계시장과 같은 초국가적 활동이 과연 평화를 불러왔는가에 대해 우리 모두가 깊은 성찰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블랙 워터와 같은 민간 군사 조직이 초래한 여러가지 혼란과 갈등을 보더라도 애초에 국민 국가의 주권적 쇠퇴가 과연 환영받을 만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들이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국헌적 체제 하에 공인된 시민들의 주권 개념이 명목상으로만 우선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전반적인 국민 국가 개념의 퇴출은 있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글의 결론에서도 국민 국가의 시스템이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만 한 국가와 국민 그리고 이들이 모인 국제 체제에서의 주권체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이 최소한 외부요인에 의해 붕괴에 이르지 않기 위해 제도의 마련이나 인식의 재정비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 권리와 이익이라는 것에도 귀결되며 다소 곁가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서두에서 일찍 저자가 확언한 바와 같이 어쩌면 주권 개념이 현실 정치의 포퓰리즘을 극복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할 수 있겠습니다.



- 118페이지의 텔리랜드라는 인명이 나오는데요. 이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전후 복구에 참여했던 탈레랑 Talleyrand 을 뜻합니다. 매우 공공연하게 알려진 탈레랑의 인명 표기를 영문 표기로 글에 실는 것은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1장에서는 당트레브 d’Entreves에 대한 표기는 정확한데 이걸보면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1페이지의 에드먼드 버커 역시 에드먼드 버크로 표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2장부터 등장하는 레그나 Regna라는 개념을 번역하지 않고 그냥 레그나라고 표기한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107페이지에는 아예 레그나를 왕국으로 표기하는데 여기에서도 기준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110p의 더취의 반란이라는 표기도 손쉽게 번역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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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국가의 조건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안진환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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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출신으로 일본계 3세의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냉전 종식의 시기에 ‘역사의 종언’이라는 주장으로 자유 시장이 기반이 된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의 정당성과 우위성을 설명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동시에 그는 코넬대와 하버드대를 거쳐 조지 메이슨, 존스 홉킨스, 스탠포드 대학 등에서 강의하며 국가 발전론과 국제 경제학 및 국가 건설과 민주화에 대한 연구를 평생에 걸쳐 수행해 오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그에게는 약간의 관변 학자라는 이미지도 투영되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굳게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면에서는 다른 보수 우파 지식인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어찌됐든 그는 학계 전체적인 측면에서 자유주의 정치학 분야에 큰 획을 그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State Building”이라는 원제로 지난 2004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05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현재로서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우선, 총 3부의 비교적 얇은 소고라 부를 수 있는 후쿠야마의 이 논저가 실질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바로 “약한 국가의 통치력 향상과 민주적 정통성 제고 및 자립적인 제도 강화 등의 방법과 관련된 주요한 과제”로서 살펴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후쿠야마는 약한 국가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강한 국가를 설명하고 바로 이러한 점의 기본 조건으로 ‘훌륭한 통치와 (성숙한) 민주주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정치학자들이 민주주의의 양가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다원주의와 불협화음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시선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야마는 일견 보기에 그것이 명목적이라 할지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1장의 도입에서 설명하고 있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파고에 대해 “당시 공공부문의 지출에 몸살을 앓던 대다수 선진국들은 이런 신자유주의를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평가하고 또한, “공공부문이라고 해도 규모를 줄일 분야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강화해야 할 분야도 있다는 점을 (아마도 당시 정책권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는 점도 그는 따로 후술하고 있는데요. 확실히 강한 국가의 건설이라는 측면에서 잠정적인 민주주의의 쇠퇴를 불러온 신자유주의에 대한 꽤 객관적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신자유주의적 이행 과정 가운데 비롯된 민영화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도 “민영화는 국가 기능 범위를 축소하는 것을 포함하는 한편, 높은 수준의 국가 역량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더불어 강조합니다. 2차대전 이후 유럽의 열강에 의해 식민지 치하에 있었던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과 전쟁의 폐허에서 갓 출범한 대만과 한국, 일본이 전자와 다른 성취를 보였던 이면에는 성공과 성장을 바라는 국민들의 조직적인 기대와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와 관련해 후쿠야마는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특유의 국가 정체성을 갖고 여기에 정부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요. 이것과 관련해 3장에서는 약간 광범위한 속단일수도 있으나 “유럽인이나 일본인은 자국이 민주 국가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역사를 공유해 온 국민이다. 이들은 정치가 아닌 다른 원천에서 정체성을 느낀다”고 다른 국가들과 구별되는 점을 진술합니다. 이것은 중국과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신자유주의화는 다른 측면에서도 부작용을 낳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당시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적절한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자유화는 위험하다는 논지를 적극적으로 펼친 바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로 설명됩니다. 즉, 많은 후진국과 실패 국가들이 최소한의 제도적 뒷받침 없이 시장 자유화와 세계화에 뛰어들게 되었고, 여기에는 후에 나오겠지만 사실상의 베스트팔렌 체제적 국민 주권 국가의 약화와 국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선진국들의 (광범위한) 방만한 원조 등이 번영과 발전을 바라는 전자의 국가들에게 일종의 대실패를 맛보게 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이것과 관련해 3장에서는 미국이 최근에 대외 원조와 관련해 일종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일정 수준의 개혁과 성장에 실패한 국가들에게 원조를 제공하지 않는 등의 변화가 이뤄지고 있지만 이것의 이면에는 아예 그런 공감대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실패 국가들의 국민들에게는 꽤 가혹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해석을 후쿠야마는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998년에 한국이 IMF에 의한 구제 금융을 받을 때 당시 미국 클린턴 정부가 분명 우리나라가 외환 자유화 전면적인 외환 거래를 준비할 제도적 수준의 준비와 기관의 유치가 되어있지 않음에도 그것을 강요한 것은 분명 문제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사실상의 경제적 국제 규범으로써 ‘워싱턴 컨센서스’가 이를 수행하는 관료조직의 애매한 인식과 미흡한 대처로 한국과 같은 국가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결과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일종의 편의주의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불명확합니다만 어찌됐든 우리나라의 사례로 봐도 자유화 자체에는 최소한의 준비와 기준이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뒤이어, 2장은 일반 조직론에 입각해 개인과 조직간의 설명과 그런 개인들이 구성되어 나타나는 조직의 근본 특성과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조직론에 대한 연구는 성공한 국가 조직과 건설을 위한 선제 조건으로써 이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분야로 후쿠야마는 보는 듯 했는데요. 여기에는 각 개인들의 이기심들과 구성원들의 조직적인 협력의 문제와 주인과 대리인의 관계에 따른 여러 문제점과 의의 등을 상세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즉, 본격적으로 조직을 구성시켜 제도를 뒷받침하고 국가 전반을 다루게 되는 상황에 이를 때, 국소적인 측면에서 기업의 조직 발전론과 이를 확장시켜 어떻게 하면 국가 조직으로서의 효율적인 성공을 이뤄낼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논의들과 논저들을 통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산재한 많은 조직들은 주인과 대리인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갖고 있고 오로지 서로간의 공적인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협력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과제와 질문들을 구성원에 대한 인센티브와 확장시킨 공공 행정 분야의 의미까지 다루게 됩니다. “보통의 법치국가들은 기술적인 전문 지식과 결단력 있는 행동의 필요성이 결합된 군사 지휘권이나 금융 정책권 같은 특정 재량권을 행정력에 다시 포함할 수 있는 방법을 조심스레 모색하고 있다”고 후쿠야마는 덧붙이고 있는데요. “공공행정이 나라마다 다르고 포괄적인 일반화가 쉽지 않다는 걸 전제”하면서도 여기에는 특이성의 문제, 이를테면 공공교육이나 국방과 같은 산출과 효과의 관계에 따른 그래프와 도표 등을 글에 수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진 국가들 가운데 꽤 모범적인 모델로 불리우는 덴마크의 사례를 일반적으로 발전 국가들이 차용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에는 각 구성원과 조직,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제도 등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일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과거 미국은 일본과 한국 필리핀 등에서 자신들의 국가 기능적 전반을 이식하기 보다는 일반적인 선출된 민주적 정부의 기능과 기본적인 체계만을 만들어 놓은 것은 물론 단순한 외형적 결과론이겠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점은 분명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미국이 이러한 체계를 이식한 전후 국가들 가운데 오로지 한국만이 특별하게 성공을 했으며, 이것은 미국의 도움이라기 보다는 오로지 한국민들의 노력의 성과라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후쿠야마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글의 2장에서 영국이 과거 인도와 싱가포르에 남긴 유산으로 말미암아 인도는 짧은 기간내에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고, 싱가포르는 효과적인 헌법 체계를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더불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한국과 대만의 일례를 들면서 “일본 또한 대만과 한국을 점령했던 시기에 견실한 제도를 몇개 남겼다”고 평가하는데요. 저는 이것이 당시 일제의 쌀수탈로 농민 자신들 마저 곤궁기에 먹을게 없었던 정도로 행해졌던 조선의 자원 기지화에 대해 정확한 성찰 없이 저런 정도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여기에다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크나큰 증오심을 품고 있다”고 뭔가 이상한 뉘앙스의 문장을 들여다 놓기도 했는데요. 물론 그를 일본계 3세의 미국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되겠지만 조직론과 관련된 그렇게 많은 원전을 책에 소개했으면서도 이 정도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예 일본이 한국에 대만에 남겨 놓은 견실한 제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설명을 해놨으면 어느 정도 살펴볼 이유라도 되었겠지요.

끝으로, 많은 실패를 겪고 있는 국가들과 발전 과정에 있는 국가들에게 필요한 부분은 견실한 제도와 민주주의의 확립이 될 것입니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은 어느 정도 경제적 발전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후쿠야마가 2장에서 밝힌, “해당 국가의 엘리트들이 개혁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수요를 느끼지 않는 한 좀처럼 효과가 없다”는 점과 오히려 “리콴유와 같은 인물이 통치하는 권위주의 국가가 사실상 나을 수 있다”는 점은 민주주의 체제 확립의 복잡한 이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유럽의 극명한 차이에서 주권 민주 국가의 결정은 아무리 올바른 절차를 거친다 해도 그것만으로 공정성 또는 보편적인 자유주의의 가치와 합치한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과 민주적 다수가 타국에 무서운 결과를 안겨주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인권을 침해하거나 (자기들 민주적 질서의 바탕이 되는) 인간 존엄의 규범까지 어길 수도 있다”는 점은 우리가 꽤 곱씹어야 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후쿠야마는 논의 전개 과정에서 과거 국민 국가가 한계에 이르거나 그 의미가 축소되어 해당 개별 국가가 자신들의 주권을 보위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러한 결과가 과거 유고슬라비아 사태와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현재 미국의 일방주의에 기인한 것도 있기 때문에 많은 유럽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민주적 정통성이 얼마간의 개별 국가보다 더 큰 국제 공동체의 의지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을 디스토피아적인 것으로 너무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사실상, 국내적인 민주적 통치로서의 기반과 국제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정당성은 서로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역으로 고찰해본다면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국가들에게 국제 사회 차원의 행정적 지원과 이식의 실질적인 방안을 선진 민주 국가들이 고려해 보는 것이 어떨까 끝머리에서 다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큰 의미는 없겠지만, 76페이지에 오타 한 곳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문장들 가운데 핵무기와 관련된 표현이 있었는데, 꽤 인상 깊어 적어보려고 합니다. “병 속에 도로 집어 넣기 어려운 ‘지니’로 대변되는 핵무기”

-또한, 조지 W. 부시의 선취주의 즉, 예방 차원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선제 공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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