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데이터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
스티븐 베이커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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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 및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스티븐 L. 베이커는 위스콘신-메디슨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뒤, 처음 언론사 경력을 쌓은 버몬트에 소재한 주간지 블랙 리버 트리뷴을 시작으로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비즈니스 위크의 멕시코 시티 지사로 파견되었으며, 또한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 산업 전반을 취재하는 등 경제 전문 기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다른 언론사들에서 왕성한 기고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뉴욕 타임즈와 월 스트리트 저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및 보스턴 글로브지가 이에 해당됩니다. 이 책과 관련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제가 얼마전에 서평을 남긴 아난드 기리다라다스의 ‘엘리트 독식 사회’의 글 구성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두 책이 거의 동일하게 일종의 르포 취재 형식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전자는 소위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이들의 언행을 통해, 후자인 이 책에서는 저자인 베이커가 고안한 일종의 IT 전문가들을 뜻하는 ‘뉴머러티 Numerati’가 사회적으로 이행하고 있는 변화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앞으로 ‘데이터 마이닝’을 뜻하는 빅데이터 사회를 가늠해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07년 “The Numerati”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에 초도 번역되어. 2014년 (아마도) 재개정판으로 2판이 출시되었습니다. 다만, 개정판이 나왔음에도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우선, 이 책은 총 7장의 소주제별 구성과 마지막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자인 스티븐 베이커가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오늘날 발전된 웹 기반의 수집된 개인간의 데이터와 이를 통한 데이터 마이닝이 과연 어떤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간략한 예측과 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재런 러니어를 비롯한 업계의 이론가들이 앞으로 우리의 프라이버시와 익명성이 구글과 같은 거대 웹기반 기업들의 데이터 수집으로 인해 시민의 권리가 사실상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것이라 예견한 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의 5장, 테러리스트에서도 논증하고 있듯이, “뉴머리티가 제공하는 도구를 활용하여 자체 감시를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사회가 자유롭고 거침없이 돌아가고 구성원들이 나쁜 짓도 좀 하면서 살수 있을까를 알아보기 위함”을 라스베이거스의 소프트웨어 기업가인 제프 조나스의 대안으로 이를 관찰해보고 있는데요. 여기에 소개된 제프 조나스는 IBM에 소속된 전문가로 그 자신도 어떻게 하면 시민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난 9.11 테러 이후 미국 사법정보 당국인 FBI와 CIA의 데이터베이스를 비롯한 방대한 이들 데이터베이스들을 통합하는데 미국 정부는 10억달러 이상을 쏟아부은 바가 있습니다. 현재 다수의 정보 당국을 총괄하고 있는 NSA의 주된 임무가 데이터 수집에서 이 대상자들을 찾아내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테러리스트를 추려내는 과정이 과연 무고한 희생을 방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것은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이런 정보당국의 비대화가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는 이들 미국인들의 관심과 의회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감시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또 한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요. 후에 이어지는 백악관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이들 정보 기관의 입을 중요시하고 시민들의 기본적 권리를 국가 안보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배치 기조로 더 나아간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불리워도 과도한 해석이 아닐겁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NSA에서 일하고 있다는 수학자 제임스 샤츠를 통해 데이터 마이닝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들 뉴머리티 즉, 숫자 지식 계급이라는 IT 전문가들이 일반 시민들에 비해 민감한 업계에 일하고 있는 만큼 그만큼 높은 수준의 도덕적 기준을 이들이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위 많은 전문가들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고 있는 ‘특별한 자신의 분야’에 비이성적으로 매몰된 나머지 다수의 이익이라는 부분에서 괴리되는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즉, 내가 특별한 일을 맡은 선택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과도한 자부심을 갖고 더 나아가 본인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는 계급주의적 사고관을 가질 수가 있는데, 이 부분이 권력과 결탁하게 되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명약관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들 전문가 그룹들을 아주 밀착해서 감시할 만한 어떤 수단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것은 앞으로 관련 학자들이 염두해 두어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는 법칙은 현재 웹 검색 기반의 구글이나 다른 쇼핑몰 사이트 및 신용카드 회사들이 그것이 적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시민들의 여러 정보 조각들을 수집해 자신들의 이익으로 수렴하는 데 쓰이고 있다는 이해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으로 수집되는 개인들의 데이터들이 어떤식으로 데이터 마이닝을 걸쳐 실제 소비 생활이나 사적인 행위 등에 쓰이는지 밝혀내는 것이 바로 2장, 소비자입니다. 이 광범위한 소비 업계에 근무하는 뉴머리티들은 일종의 소비 패턴 분석가들로서, 이를 통해 개인들의 성향과 소비 습관들을 정확히 분석해내고 이를 기업에 이용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용카드의 문제는 내가 사용한 카드의 명세서가 중앙서버에 저장된다는 점과 이것에 대한 접근권이 불명확하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일겁니다. 이것들은 공적으로 처리된 것이 아니라, 아주 지극히 사적인 범위안에 들어가 있는 부분으로 이 사적인 정보들이 소위 기업 영역으로 여겨지는 본사 중앙 데이터에 축적되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간략하게 5장에서도 분석되고 있습니다만 각 권력기관들이 여차하면 이들 신용카드 기록에 접근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영장 청구가 과연 면밀히 고려되고 있는지에 대해 아주 당연하게 시민들을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으레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은 자신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다수 시민의 권리에 대한 일종의 인식적 책임 회피로 단순히 현재 우리가 국가 기관에 우리의 권리를 위임하는 형식으로는 매우 불안한 상황이며, 확실히 미국의 사례들을 고려해 봤을때도 현재 이 빅데이터 관련 문제가 전환기에 있는 만큼 애초에 이를 규정하고 제한할 법안이나 기구 등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정치와 관련한 3장, 유권자에서는 현재 미국 선거 운동 전반에 대한 꽤 내밀한 분석이 이번 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미 미국의 선거 운동과 관련된 산업은 꽤 정평이 나있기도 합니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고, 이를 위한 전문가들의 지원과 자원 투입이 매우 원할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의 개인 정보들과 그 알고리즘 등을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고, 선거철이 되면 이를 통한 결과 예측이나 지지층 규모 등을 분석할 수 있는데요. 이 점은 꽤 공교롭게도 현재 미국의 금권 정치와 면밀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과거 조지 W. 부시가 엘 고어 전 부통령에게 아슬아슬하게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이것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분석을 당시 조지 W, 부시의 선거를 총괄한 이들이 수행하고 더 나아가서는 다우드를 비롯한 당시 전략가들이 부동표 지역에 대한 공화당의 영향력 확대에 힘을 기울인 것은 사실상 수백만 달러의 투자에 이른 것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애초에 정치자금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에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선거 형태가 돈이 없으면 사실상 해결되지 못한다는 볼멘 소리는 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무차별적인 금품 살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 운동 전반의 천문학적인 비용 증가와 이를 더 부추기는 정치 자금법의 유명무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현재 사소하게는 우리의 여러 정보 단편들이 이제는 거스를 수도 조차 없는 거대 웹 기업들에 의해 수집되고 조직됨으로써, 이들 업종에서 대두하고 있는 ‘뉴머러티들’과 관련 산업의 이행 과정을 꽤 객관적으로 저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의 번역 제목인 ‘빅데이터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출판사의 꽤 의도적인 시도로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전반적인 맥락으로 우리의 아주 기본적인 프라이버시와 권리가 이들 뉴머리티들의 손에 처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체로 이 분야에 대해 호의적인 학자들과 언론사들은 이러한 이행과정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앞서 제가 언급하대로 이들 모두는 매우 강도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하며, 자신들이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밝히고 있는 이 부분은 사실상 교과서에 등장할 만한 교리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우리가 이들과 국가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에 돌입하기 전에 이들이 이러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으면 하는 조그만 바람을 써본 것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아쉬운 점은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이것에 대해 입을 싸매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 이들이 말하는 본래 자유라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취할 자유와 경제적 자유’뿐이니 일견 이해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당 업계의 관계자가 쓰는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제3자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이 객관적으로 뉴머러티들을 통해 논증하고 있는 ‘미래 세상’은 꽤 의미가 있는 작업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따라서, 아쉽게도 이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는 것은 많은 독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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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본능 - 일상 너머를 투시하는 사회학적 통찰의 힘
랜들 콜린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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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의 사회학자로 알려진 랜들 콜린스는 하버드와 스탠퍼드를 거쳐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과거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을 당시 그는 반전 운동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이후 하버드에서 사회심리학을 연구하고 버지니아 대학 등을 거쳐 현재 펜실베니아 대학의 사회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 아마도 랜들 콜린스는 어빙 고프먼에 주로 탐독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지고 보면 고프먼도 역시 뒤르켐의 학문적 지류이니 콜린스 역시 그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막스 베버와 비슷하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에밀 뒤르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회학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뒤르켐의 사회학의 기능주의적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실증적 논거를 비롯한 사회학에서의 기본틀을 마련한 그의 업적은 분명 존중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지난 1982년 초도 출판되었으나, 이후, 1992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원제는 “Sociological Insight”로 국내에는 바로 1992년판을 기반으로 지난 2014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인데요. 재간행을 앞두고 있는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

우선 이 책은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구조들을 (현실) 사회학적 이해를 기반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글 자체는 저변의 확대를 위해 쓴 것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꽤 독해가 수월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즉. 총 6장의 주제로 차례대로 요약해 보자면, 1장은 인간의 합리적인 측면의 맹신 이면의 비합리성, 2장은 사실상 종교의 공통된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도덕주의, 3장은 일터나 일상생활에서 규명해 본 권력의 개념, 4장은 법과 범죄의 서로 역설적 측면에서 비롯된 사회 범죄의 의미, 5장은 전통적 성애적 권리의 변화 및 현재의 결혼 제도의 예측을, 6장은 사회학의 필연적 존재라고 여겨도 될 만한 인공지능의 불확실한 미래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6장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한데요. 문맥 그대로라기 보다는 인공지능의 출현을 일종의 사회적 실험으로 저자는 바라보는 듯 했습니다. 더불어 이것에는 사회학과 사회학자들의 존재 의의가 있다고 보는 듯 했고요.

이 책의 저자인 콜린스는 자신의 글을 본격적으로 써 나가는 와중에 독자들에 중요한 인식 수단들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합리성은 완벽하지 않으며, 그 이면에는 비합리적인 측면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런 인간들이 모여 구성한 사회는 이 개개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합리적 행동에 나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그 안에 ‘의례’와 ‘유대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합리적인 본성 가운데 존재하는 비합리적인 측면과 의례 및 유대감을 기본 인식으로 이 책을 읽어 나가시면 글의 일관된 논지를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경제학자들은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들에 대해 저마다 철저히 이성으로 무장한 옹호론을 내놓는 일은 아주 흔하다”고 저자는 일반적인 경제학과 이 합리적 본성과 더불어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사회학자들은 이 합리적인 본성 혹은 이기심과는 다른 “사회에 필연적으로 필수불가결인 도덕주의적 요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텐데요. 바로 이러한 합리적 본성에 의해 추구되었던 “계약주의 내지는 계약설”에 에밀 뒤르켐이 “사회 조직의 궁극적인 기반이 계약이 아니라는 점”은 사회학자들이 이를 어떻게 보는지 극명히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양자간의 계약 관계를 해설하며 양쪽의 어느 한 사람이 계약 관계를 철회해 자신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합리적인 측면이라고 풀어냅니다. 다만, 매번 모든 계약 관계가 이런식으로 될 것이라면, 사회적 합의가 무너질테니 따라서 법에 의한 강제 규정이 존재하게 된 것은 앞의 근거적 단순화를 차치하더라도 꽤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개인의 이익과 안정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저자는 계약을 다루고 있으니 그만큼 저자의 이론에 대한 접근이 평이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강제된 규약(사법체계)에서가 아니라 “모두가 공통의 이익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는 도덕적 의무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의무 조항 역시 근거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익을 추구하는 인간이 유대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경우는 훨씬 더 하다”는 분석은 단순히 유대감의 존재 여부에 따른 사회의 구성적 요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익 추구와 별개로 도덕적 측면과 상대방을 고려하는 유대주의가 중요하다는 논법일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이 과거 계몽주의적 도덕적 접근이라고 폄하될 수 있으나 현재의 개인들의 수많은 이익 추구에 대해 어떠한 면죄부가 주어진 것은 꼭 모든 경제학자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들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교묘히 제시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사회 전반에 이런 인식이 내면화 된게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전통주의 사회 이전과는 달리 근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이식된 기존의 사회가 생산력과 그로 인한 사회 발전에 나서게 됨으로써, 이것이 필연적으로 진행된 흐름이라고 봐야 할 것이죠. 물론 이러한 도정에서 우리의 도덕적 책무와 도덕주의가 뒷전으로 밀려났으니 이 부분은 그것의 폐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 4장은 특히 현재 미국내의 범죄와 사법제도의 모순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만큼 현재 미국 사회의 범죄 발생의 근원을 사회적 차원에서 규명하는데 큰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독자가 이 4장을 따로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뒷부분에 인용이 되기도 하지만, 에밀 뒤르켐은 사회가 살아남으려면 범죄가 필요하다고 하기까지 했는데요. 이 부분이 일정 부분 이런 범죄자들을 도태시켜 건전한 부분만을 건사시킨다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미국의 사법 체계에 따른 판사와 검사, 변호사들 간의 거래와 가해자들에 대한 형량 거래 등이 만연한 범죄에 따른 사법 당국의 일처리 효율을 위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매우 강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개인의 범죄에 대해 그것을 일개 사람의 일로 국한시켜 이해하려는 편견이 있습니다. 저자인 콜린스는 이러한 기본적인 개인의 인식을 보이더라도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이들 범죄에 대해 접근하고 이해하면 그 결과는 분명 다르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요. 그래서 범죄가 법의 역설적인 측면에서 조장되고 있다는 해석은 크게 공감이 되었고, 미국의 사법체계가 처벌의 엄중주의에 급급해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중범죄인들이 있는 교도소에 무차별적으로 수감시켜 갱생은 커녕, 다시 중범죄의 굴레에 옭아매는 결과를 미국 사법제도와 사회가 재생산하고 있다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정독을 하다가 잠시 들었던 생각은 경찰 조직과 사법 조직을 아주 면밀하게 관찰하고 시스템을 분석하는 어떤 연구 용역이나 연구부서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를테면 형법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모여서 이 조직내의 실제적인 조건과 성격을 규명하고 이것을 시민 사회에 널리 인식시키는 것이 이 자체만으로도 범죄 최소화에 기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이것은 다른 측면으로 의사나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업계 정보를 가급적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소위 전문가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일종의 은폐주의와 비슷한 효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인들인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느냐와 같은 이 차별적 태도는 의사들이 자신들의 일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사회 구성원들과 자신들은 다른 존재임을 각인시키고 따라서 이들 계층이 통제가 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실로 명료한 해석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그동안 자유주의적 이성에 기반한 사회적 체제의 틀을 마련해 왔다면, 이제는 이 합리적이라는 수준의 인식을 달리 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즉, 앞선 의사들의 예를 들었듯이 우리 모두가 사회적 유대감을 갖고 아주 직접적인 권력에 의지해 사회를 유지하기 보다는 소속감을 고취시키는 건전한 의례와 소수의 기득권층을 공통된 사회 구성원으로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반드시 마련하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의무이자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뭔가 통제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실 수도 있으나 이것의 기본적인 의미는 “합리적인 이익이라는 본성의 비합리성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학의 근본 목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실종된 현재의 도덕적 책무를 고려해본다면 분명 매우 중요한 시점임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더 나아가서 열린 다원주의의 근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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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 조커가 지배하는 시대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4
안병진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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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와 서울대를 거쳐 미국 뉴스쿨 대학원에서 한나 아렌트 상을 수여받은 경희대 미래문명원 안병진 교수는 국내에서 제법 잘 알려진 진보적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의 유명한 논저 가운데 하나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보수주의 위기의 뿌리’는 학계와 출판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안교수가 포퓰리즘 연구를 해보면 큰 학문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물론 이는 일개 독서인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짦게 밝히는 대로 광범위한 도널드 트럼프 연구의 그리 가볍지 않은 길라잡이가 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이 책은 몇년간의 지난 트럼프의 단상을 돌아본 글이면서, 앞으로 트럼프로 초래된 미국의 정책 변화와 세계 체제에 대한 여러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작은 분량의 글이지만 몇가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의문을 다소 해결할 수 있었는데요. 또한, 꽤 객관적인 시각의 글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우선, 미국의 수장인 도널드 트럼프는 국내에서 학계와 여러 전문가들에게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자도 역시 트럼프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을 언급하고 특유의 괴랄한 트위터 정치 그리고 자신이 어떤 분야이든지 통달했다는 식의 자기애적 사고를 마찬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얻게된 사실은 트럼프가 백안관에 입성 후, 전 정권이었던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TPP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오히려 아시아 태평양에 중국의 영향을 확대시킨 것과 최근에 이란의 핵합의를 과거로 돌리고 중동에 암울한 전운을 드리운 점 등을 고려했을 때, 트럼프가 사실상 자신의 행동 결과에 대한 매우 진지한 예측과 성찰이 없는 인물이 아닌가하는 일종의 뜨악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의 전임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패권과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하여 상당히 기울었던 점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그 한계를 받아들여 그전과는 달리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표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이 포함된 중동 정세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오바마는 보이기도 했는데요. 그런 배경에는 미국의 쇠퇴의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되지만,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한다면 물론 약간 다른 논법이지만, 저자의 말대로 중동에서 제3차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란의 핵문제와 이스라엘의 과도한 대응이 미국과 동맹국을 전화로 이끌 가능성이 있는데요.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과연 트럼프가 국제 정치 무대에서 이러한 파급 가능성을 과연 이해하고 있었는지 매우 의문이 듭니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는 미국의 백악관을 차지하기 위해, 무소속이나 제3의 후보가 되는 길을 고려치 않고 공화당을 점령하는 길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특히 트럼프가 “인종적 배타성에 근거한 반동적 포퓰리즘의 화신”이고, 티파티를 비롯한 극우 포퓰리즘과 러스트 벨트를 비롯한 하류층 백인 남성의 지지를 얻고 당선에 이릅니다. 이러한 지지층의 파괴력으로 말미암아 공화당 내 꽤 건전한 보수주의자들 역시 트럼프에 굴복해 그의 지지기반이 된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상황입니다. “이런 트럼프의 포퓰리즘을 지성주의적 리버럴들이 불편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운동”이라고 저자는 평가하며, 여기에 대한 미국 리버럴들의 단순한 격하한 평가와 대응 부족은 지난 3년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약간 다른 관점이겠지만 좌파 포퓰리즘과 같은 민주적 원동력을 주장한 샹탈 무페를 저자도 인용하고 있지만 인종주의와 엘리트 층에 대한 격렬한 분노 그리고 쉽게 선동되어 버리는 극우 포퓰리즘을 자유 민주주의의 어떤 맥락 속에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저자의 판단에는 불행하게도 동의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미국의 고도화된 반지성주의적 분위기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지도자의 출현을 예견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인식을 감안하더라도 이 극우 포퓰리즘을 자유 민주주의의 어떤 사생아 쯤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저자 역시 맺음말에서 이러한 위험스런 정치 변동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시민들의 중요한 당위적 행동들과 인식의 확장 등을 여러 문장들로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시민이 자신만의 왕성한 지적 욕구와 깊은 성찰과 토론을 통해 선동 정치가들의 궤변을 논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현재까지 다수의 시민들을 이러한 공론장에서 퇴출시켜 버린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그냥 몇마디 말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지성주의가 지성주의를 압도하는 시대”라고 표현하는 저자의 언급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물론 왠만한 지성주의 시대로 표현되는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과도한 믿음 또한 문제이긴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과 엘리트 들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이것이 과연 정치 발전을 위한 대응인지 아니면 표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어떤 선동 정치인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는 꽤 명백해 보입니다. 다만, 이것과 관련해 저자가 설명한 “비통한 자들이 땅 위에서의 비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위대함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선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앞선 부분에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어떤 욕망이 내포되어 있는 듯 보이는데요. 이들이 스스로 비루함을 선택한 것은 아닐텐데, 마찬가지로 젠더와 같은 개념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같이 이들의 비루함 또한 개인의 온전한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저자가 인정하듯이 “1980년대 이후 지속된 신자유주의적 영향”과 이를 레이건 시대에 양 정치 세력이 용인한 결과이기도 할 것입니다.

끝으로, 1960년대 현재 트럼프의 아버지로 지칭해 될 만한 포퓰리시트였던 조지 윌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널드 레이건을 트럼프와 한 묶음으로 만든 저자의 결단에 박수를 치고 싶었는데요. 리처드 닉슨과 로널드 레이건이 겉으로 표징하는 이념이 보수에서도 더 오른쪽이지만 이들이 꽤 유연한 정치적 판단으로 놀라운 결과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중국에 대한 긴장 완화와 소련에 대한 데탕트를 초래한 것 등과 같은 사례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며 하야한 리처드 닉슨이나 때로는 정치색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널을 뛰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정치인의 단일한 색깔을 정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 혼란을 준 것은 분명하나, 특히 레이건과 같은 경우도 그의 업적에 비견될 만큼 과도하고 불법적인 일들을 벌인 것은 분명합니다. 현재 미국 내에서 레이건의 위상을 고려해 본다면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빨리 제대로 이뤄졌음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또한, 트럼프 현상을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 기반해 해석한 것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고, “양극화한 적대적 정치”이라는 현재 미국 정치의 일면을 어느 정도 드러낸 점은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결론에서 많은 독자들이 오로지 얼마간의 국제 기사에 의지해 글로벌 현상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제언 역시 크게 공감할 만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환경을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먹고사니즘’을 얼마나 극복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이 먹고사니즘과 관련해 오해를 방지하고자 더 첨언하다면, 자신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한 문제들을 모두 먹고사니즘으로 몰고가는 행위를 주요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막줄은 이 책의 서평과는 매우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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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
로베르트 미지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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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이 글의 저자 로버트 미지크는 1989년 ‘아르바이터 차이퉁’을 거쳐 92년부터 97년까지 프로필의 독일 베를린 특파원을 역임한 좌파 언론인입니다.또한, 그 이후에도 팔터, 프라이탁, 융에 벨트, 노이에 도이칠란트,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및 자이트 지에 기사와 칼럼을 기고 하는 등 오스트리아와 독일 양국에서 비판적인 언론인으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흔히 좌파 지식인이라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분야인 비디오 블로그에 자신의 정치 비디오쇼인 “FS 미지크”를 운영하고 있기도 한데요. 스스로를 말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성격이라고 겸손을 담고 있지만,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대로 지식은 단순히 앎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에 그 스스로 몸소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저에게는 미지크와 관련해 얼마전 “고장난 자본주의”에 이어 두번째 서평이기도 한데요. 구글에서는 오스트리아에 출판된 그의 책이 여럿 검색이 되는데, 조만간 그의 다른 책도 국내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Was Linke Denke”로 지난 2015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6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저자인 미지크가 책의 결말에서 이 책의 취지에 대해 “좌파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로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국문으로 번역된 이 책의 제목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는 상당히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 제목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질 수 있기도 한데요. 물론 독자들의 눈에 쉽게 들어오게 하려는 의도야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이런 시도는 조금 지양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다시 본래 글로 들와서, 저는 여기에다 “소위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좌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좀 더 드러난 의도라 여겨집니다. 아주 단순한 구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구체적 담론을 드러내는 매우 진지한 논저라기 보다는 ‘좌파의 생각’ 그리고 이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사고, 인식 등이 꽤 단순하고 설득적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지크 본인 뿐만 아니라, 번역가의 노력도 이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래서 번역 역시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세계의 자본주의가 최근 한차례의 심각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경제적 이데올로기와 체제로서 대안이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와 한몸이 되면서 이 틈에 정치가 들어올 자리는 분명 없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마거렛 대처의 말대로 “대안은 없다”는 식의 맹목주의적 믿음이 과연 모두에게 합당한 결과를 낳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이 신자유주의적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기 위해 진보주의와 좌파의 지리멸렬이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연유에는 아마도 샹탈 무페의 “좌파가 일반 시민들과 유리되어 있었다”는 해석대로 그 원인의 일부가 설명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 미지크는 “1980년대의 좌파에 경도된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은 스스로 의문을 갖고 수많은 서적을 읽으며, 사고를 확장하고 사색하는 일에 몰두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사회에 해악이 되지는 않았다”고 돌아보고 오히려 이러한 학생들은 분명 소수였지만 주변에서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고 그는 회상합니다. 더불어 “생각과 이론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우리가 계속 깨어 있도록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그즈음 도래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분개하고, 다 같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했으며 그것이 사회와 지배논리에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이기도 했다고 돌이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미지크는 우리의 자본주의가 모두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나아갔고 어떤 부분은 후퇴했다고 특히, 좌파는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오늘날 내면화된 자본주의가 개인의 창의력과 성취욕, 개성에 있어 이바지한 부분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식대로 냉전 이후의 세계 유일의 무결점 이념이라는 식의 해석은 물론 과도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애초에 우리가 좀 더 건전한 자본주의를 기대한다면, 미지크의 주장대로 “좌파에게도 적당한 표를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겠죠. 그전까지는 많은 좌파는 혁명 담론에 매몰되어 현실적으로 거의 가능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다른 좌파와의 갈등도 심화시켜 왔습니다. 수많은 연결된 시민들과의 연대를 그동안 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들이 존재합니다만 1장에서 표명한 대로 좌파가 여러 사람들과의 연대에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 점은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와 연계해서도 매우 중요한 행동 양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의 의견 교환이 구시대물이라고 하지만, 이미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세계에서 토론하고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온라인상에서의 수많은 사람들과의 연결 만큼이나 오프라인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끊임없는 의구심과 의문을 갖고 많은 지적 탐구를 병행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부속품’이 되지 않는 길임은 명확해 보입니다.

다음, 우리의 비판, 좌파의 비판은 이렇습니다. 저자인 미지크의 말대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반대하기, 흠잡기를 일컫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방식의 해부, 개념에 대한 분석, 전제 근거와 비난에 대한 분석, 숙고와 이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오로지 비판만 있었으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패착이 숨겨져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에 근거한 이런 비판 인식이 자본주의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선명성을 견지하는 좌파들의 도덕적 측면’이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우월감을 가져다 주웠을 뿐, 좌파 자체가 시민들과 괴리되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우리의 노동을 어떤식으로 규정지어야 할지에 대해 폭넓은 의견 제시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개개인의 개성의 표출이라는 명목으로 과도한 소비 지상주의에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하지 못했던 것은 ‘좌파의 정신’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들 주변에서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만드는 증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시민 개개인들의 삶이 전체적인 체제의 측면에서 ‘품위있는 삶과 마땅한 행복 그리고 도덕적 건전성’을 마땅히 답보해야 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프레카리아트’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당시에 좌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역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지크가 강조하는 대로 푸코가 우리가 얼마나 권력에 취약한지에 대해 예견했던 것은 뭔가 계시로까지 여겨지기도 합니다. 자본주의가 있는 그대로 여러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체제의 권력과 또한, 그 체제의 권력 마저도 누가 휘두르고 있는지 불명확한 시대에 우리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권력에 대한 사안은 매우 복잡하다”는 그의 평가는 이렇게 정확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권력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는 찾을 수가 없으며, 마땅한 시민의 권력을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들의 야합에서 빨리 되찾아야만 하는 당위를 이 글 6장과 7장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인간 소외’를 좌파 역시 짐작해 냈지만,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스스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심각한 인종주의적 오류에 빠져 있었고, 자신들의 역사 이외에는 다른 역사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격이기까지 했는데요. ‘이 겹겹으로 축적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히려 인간 소외와 식민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화해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봤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화해는 이처럼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고 봐야하겠죠.

이처럼, 좌파가 관심을 가지로 지켜봐야 될 사회의 여러 이면은 아직도 많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이 글의 결론에서 “의문을 품으며 우리는 전진한다”는 끝맺음은 다음 세대의 좌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어떠한 믿음이라도 최소한 세번 정도는 의심해야 한다”는 어떤 비범한 개인의 통찰은 앞선 미지크의 논법과도 매우 부합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저자인 미지크의 숨겨진 의도가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그가 왜 좌파일 수 밖에 없는지는 이 글을 통해 약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럴때는 그와 같은 용기가 매우 부럽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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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의 정치학 -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절대숫자
로렌조 피오라몬티 지음, 김현우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탈리아 로마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인 로렌조 피오라몬티는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프리토리아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헤르티 커버넌스 스쿨의 연구원이면서 동시에 뉴욕 타임즈 및 가디언 지 등에 칼럼을 기고 하고 있는 정치경제학 계통의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관계로 현지의 지역 경제에 관심이 많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연구 분야 중 하나인 전반적인 GDP 경제학이 세계의 다른 빈곤 국가들에게 어떻게 별다른 소용이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학자적 호기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의 중요한 주제장인 3장, ‘GDP 퇴위를 위한 지구적 모색’에서 GDP와 아프리카 및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GDP 사조에 따른 부작용 사례들과 상대적으로 빈곤국인 부탄과 코스타리카 국민들의 행복 지수 등을 제시하며 실질적으로 이 GDP가 시민의 안녕과 삶의 질을 설명해주는 지표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13년에 “Gross Domestic Problem”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피오라몬티의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인데요. 책의 재간행을 앞두고 있는건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다른 번역본은 아직 판매되는 것으로 보아 꽤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인 피오라몬티가 본문에 언급한 중요한 문장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시장 메커니즘은 상황에 따른 가격 조정을 통해 희소한 자원을 대체하도록 인도하고 발명가와 기업가들이 다양한 기술적 해법들을 개발하도록 촉진함으로써, 결국 붕괴를 예방하게 할 것이라고 보았다”는 일종의 평가는 꽤 명백한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일찍이 멜서스가 낙태와 과감한 인구 계획 및 전쟁 상황을 경제상황에서 이용하자고 주장했던 것과 같이 효율성과 효용 및 경제 시스템하에서의 인간과 사회를 사실상 부속으로 취급한 것은 일련의 경제학 발전과정에서 매우 무분별하게 인용되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애덤 스미스도 자신의 그 유명한 논저가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무조건적인 합리성을 보장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특히 2008년에 일어났던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가 당시에 고도화된 금융 시장을 선도했던 경제 엘리트들이 과연 합리적이었는지는 모든 경제학자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자 역시 GDP의 도덕적인 측면이 전무하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 있고, 성장 일변도의 경제적 논법이 겉으로 보이는 규모의 경제는 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일면에는 수많은 문제점을 근대 이전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키워 왔다는 것은 모두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짧은 분량의 서론과 1장에서는 어쩌면 냉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GDP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간략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시 계획의 일환으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마련한 쿠즈네츠의 이 경제 도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가 대공황을 벗어나는데 기여를 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전까지는 전년이나 10년전의 통합적인 경제적 지표가 불분명해 당시 기준으로 내각에서 어떠한 정책을 수립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인정될 만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쿠즈네프의 역할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가 1941년에 “국민소득의 계측은 항상 암묵적인 또는 명시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부분이 그가 갖고 있던 GDP에 대한 부정이라고 볼 필요는 없으나, 한가지 명확해 보이는 것은 2차대전 이후 권력층과 엘리트들에 의해 자신들이 주도한 경제 정책의 당위성을 보장해주는 지표로 이 GDP를 이용해 왔으며, 소위 양적인 측면의 외형적 성장이 그 내실이 어떠하던 간에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이용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르티아 센과 더불어 GDP에 비판적인 세르주 라투슈 역시 “이 GDP에 대한 믿음”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저자인 피오라몬티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경제가 2퍼센트 또는 3퍼센트 성장할 때 마다, 우리의 삶의 질 역시 같은 정도로 향상되는가?”라고 말이죠. 여기서 GDP 수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권력의 지배의 도구로 널리 쓰였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정부가 민주주의적 가치를 잘 떠받든다 하더라도 경제에 있어서는 경제 자체와 정치간에는 범접할 수 없는 경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행은 근대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이것이 시민의 삶 깊숙이 들어오자 마자 시장을 마땅히 견제해야 하는 정치의 역할이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이를테면 경제적 합리주의에 입각해 이윤을 얻는 활동 모두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유일주의 말이죠. 물론 자유 경제 시스템하에서 기업과 개인이 경제 활동을 하면서 이윤을 얻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만, 수많은 개인들의 체제를 뒤흔들지 않는 이윤 추구는 마땅히 지켜볼 만하나,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과 거의 반독적점 지위를 악용하는 기업들의 매우 쥐어짜내는 이윤 추구와 영리활동 그리고 반면에 사회적 책무를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 이러한 자본과 경제의 고삐풀린 이행은 아마도 현재의 많은 문제를 촉발시킨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게임을 지배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는 것”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며, “재화와 서비스에 지불되는 가격들이 경쟁 시장이라는 틀 속에서 반드시 결정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앞선 서술한 측면에 들어맞는 이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GDP로 해석되는 경제 담론에서 “사람의 마모에 대한 경제적 적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과 “한 사람의 노동가치를 과연 경제적으로 측정할 수 있겠는가”와 “GDP에서는 소위 ‘역량의 고갈’이라는 지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GDP를 설명하는 수많은 기업들의 잘못된 관행등과 로비 움직임과 같은 것들을 여기에서 더 서술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현재 지속적으로 시민의 삶을 측정할 수 있는 세계 공통적인 지표를 특히,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다음 단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에서는 총수입계정체계 TISA와 물질적 삶의 질 지수 PQLI 및 국제적인 인간 고통지수 HSI 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의 공동 작업 등도 꽤 개선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여기에서 문제는 이러한 연구 작업과 개선 움직임이 어떤 소수의 단체나 초도 단계에서 시도되는 것보다 현재 세계 주류 경제학에 있는 학자들이 “그 시장의 합리성” 문제를 다시 저울위에 올려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바마 행정부 때 세계은행 총재로 추대받은 김용이 성장 지상주의자들과 여러 언론에서 비판 받았던 것을 고려해봤을 때, 아직도 주류와 다수 시민들의 요구와 해석에는 그 견해차가 상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보통의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해석수단과 도표와 숫자들로 증명에만 힘썼던 나머지 현실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다고 비판한 것은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더욱이 이들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대한 비전문가들의 비판을 매우 억울해 여겨왔던 것을 비추어 봤을 때, 과연 이들에게 다수의 이익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해 다소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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