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성장 - 경제성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데이비드 필링 지음, 조진서 옮김 / 이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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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데이비드 필링은 지난 1990년 영국 유수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즈에 입사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의 각지를 돌며 존경받는 언론인으로 활동을 해 온 바가 있습니다. 특히 그는 2002년부터 2008년까지 도쿄 사무 국장을 역임하며, 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아시아 경제에 큰 관심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독특한 칼럼니스트로서 환경 문제와 제약 업계와 관련된 글 뿐만 아니라 경제와 투자 및 정치경제를 두루 포함하는 여러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에 대한 정보가 위키 백과에서는 나오지가 않아서 파이낸셜 타임즈에 들어가 기사를 찾아보기도 했는데요. 기사의 성향도 그렇거니와 이 글에서 보이는 논지는 일반적인 경제적 관점과는 거리가 먼 꽤 진보적인 인사로 보였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8년 “The Growth Declusion” 원제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9년 번역 출간이 되었는데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본에서도 이 책이 번역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의 구성은 총 3부, 14장의 소주제들로 이뤄져 있는데요. 글의 성격을 잠시 논해본다면 일반적인 경제학 개론서가 아니라 일종의 르포 형식의 인물 대화들과 이를 통한 저자의 분석이 섞여 있는 경제에세이 겸 가벼운 논저 정도로 규정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출간된 다이앤 코일의 “GDP 사용설명서”와 유사한 취지의 글이기도 합니다. 우선 저자는 그동안 전세계가 “경제 성장에 대한 숭배는 거의 도착증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서두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결론 부분인 14장에서 독자들의 오해를 피하고자 “GDP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들도 있지만 이 책은 아니다. 결점이 많다고는 해도, GDP는 여전히 강력한 측정치이며 유용한 정책도구이다” 라고 원칙적인 실효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경제학 자체를 숫자로 해석하는 환원주의로 고착화시키고 자신들의 분야를 일종의 ‘전문학’으로서 공고히 한 것은 비판 받을 만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모든 경제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로 경제학 이데올로기에 놓여 있는 수많은 시민들의 삶과 행복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니 오히려 그러한 해석을 일부러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경제학이 스스로 개선되어야 함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학의 메커니즘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라는 미덕(?)하에 인간의 이기심을 더욱 부추기는 형태로 발전되어 왔으며, 결국 이러한 시스템의 완성이 현재도 진행중이며 또한, 심각한 불평등의 폐해를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고 저자는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의 한계는 저자가 짧게 언급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는 불평등 문제 및 그 현상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지 못한다는 점과 시민 개개인의 행복을 어떻게 하면 실제적으로 수치화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대안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특히 축소 되고 있는 중산층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활 수준이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분노한 상태다” 라고 짧게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경제적 불평등과 중산층의 붕괴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중국 공산당의 관료인 니우웬유안 등과 같은 여러 관료들과의 대화는 해당 국가의 엘리트가 GDP를 어떤식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독자들이 간접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점은 이 책의 큰 이점이라고 할만합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 흥미로운 부분은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경제 성장에 대해 “첫째로 노동자의 수를 늘리고, 둘째로 그 노동자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일하게 만들어서 생산성을 높이게 하는 것이다”라고 대안 아닌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급여가 절실한 노동자들을 더 고용해 이들이 돈을 받는만큼 강도높은 효율성에 근거해 생산능력을 향상시켜보자는 단순한 제언이겠지만, 이것이 과연 시스템 내부에서 저항없이 수행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먼저 노동자들의 소득 수준을 높여 내수를 향상시키는 식의 경제 논리를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라고 공격하고 있는 마당에 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실효성이 어느 정도까지 나올 것인가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시민들의 수준을 무시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권력에 보다 가까운 부유층들과 거대 기업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시키고 제도와 법 위에 기업 활동과 영리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는 긍정적인 규제 재정립이 필요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과거 클린턴 행정부가 무력화 시킨 글래스-스티걸 법안과 같은 것이 유사한 사례일겁니다.

물론, 저자가 밝히는대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평등을 우선하는게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인용에는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인용되고 있는 나이지리아의 사례를 보더라도 개도국의 기득권층과 엘리트가 보다 선명한 도덕적 책임감을 갖고 있어야 하며, 제도 전반에 부패가 싹을 틔우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하는 것이 경제 성장의 완성에 선결과제일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획과 방법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실질적으로 실행할 수단을 갖고 있는 자들이 사익에 치중한다면 경제 성장이 무의미한 것입니다. 바로 나이지리아는 원유 수출의 성장세와 더불어 지난 몇년간 수치상으로는 경제가 발전했지만 다수의 국민들이 아직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부정적 예시에 해당합니다. 장 지글러의 언급대로 이러한 악순환을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면밀한 교육이 먼저 이뤄져야 하겠지만, 개도국의 수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먹고 사는 문제에 사활적 관심을 갖고 있으니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들 국가에 민주적 관심이 뿌리 내리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끝으로 2008년 미국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에 미국 메릴랜드 주의 GDP가 오히려 성장했다는 것을 저자는 인용하고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데이비드 필링의 이 책에서는 단순히 수치화 된 GDP가 과연 경제 성장의 지표로 건전하게 사용될 만한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자 역시 자신이 ‘회의주의’에 입각해 경제를 바라보는 것이 지금에선 매우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 점은 현재 중국 공산당의 관료들이 양적인 경제 성장이 좌절될 경우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측면의 이해와 일맥상통합니다. GDP에 대한 맹신을 거둬들이고 오히려 일목요연한 회의주의로 환상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경제에 대한 저자의 관점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이 ‘억제해야 될 욕구’로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열망을 들고 있는데요. 이것은 서두에 아포칼립스적인 수사로 나오는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개인들간의 군비 경쟁이 가져오는 결과의 총합이다”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GDP 통계에서 중간소득 및 평균값의 중간을 공개하자는 저자의 논의가 왜 필요한 지 다소 이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GDP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와 환경파괴와도 관련이 있으며, 지금도 수많은 미국인들이 절실하게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여러 상품을 사들이고 있다는 것을 꼬집으며, 이러한 대량 생산 추이에 과연 지구가 견뎌낼 수 있겠느냐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측면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기후 협약 탈퇴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될 것으로 여겨야 하겠죠.



- 본문 9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124 페이지에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European Commission 은 아일랜드 정부에~”이라는 문장에서 조사 ‘은’을 커미션에 맞춰 붙였더군요. 원래 ‘집행위원회는’ 이라고 표기해야 되지 않던가요. 하여튼 국문의 문장 형식이 외래어에 따라가는 건 꽤 이상한 점이라고 봐야 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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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
조지 프리드먼 지음, 홍지수 옮김 / 김앤김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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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프리드먼은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으로 미국 코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루이지애나 주립대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특이하게도 미 국립국방대학과 랜드 연구소 등 정부와 연관된 교육 기관 및 연구소에서 국제정치 및 주요 국제현안에 대한 강의, 자문을 맡은 바가 있습니다. 그는 여러해 동안 이러한 활동을 통해 미국내에서 신뢰받는 국제전문가로서 명성을 얻기도 했는데요. 이와는 반대로 프리드먼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이들은 그를 ‘국제정치학계의 예언자’로 격하해서 부르기도 하는데요. 물론 저자인 프리드먼을 판단하는 것은 각자 개인의 몫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현안에 대해서 보이는 그의 직관은 개인적으로 꽤 놀랍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소개해 드릴 이 책은 학문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약간 난감하기도 한데요. 일단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뒤에서 하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5년 “Flash Points” 라는 원제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가장 최근인 2020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국내 번역본에는 예상대로 서두에 이춘근 교수의 추천사가 있으며, 번역은 피터 자이한의 글을 번역했던 홍지수씨가 맡았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3부로서, 이하 16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거의 1억명의 목숨을 앗아간 2차대전 그리고 냉전을 거쳐 현재의 유럽과 유럽연합이 내포하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을 중점으로 꽤 에세이적인 형식의 글로 저자는 차분히 풀어내고 있는데요. 서두에서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부모를 따라 공산치하의 헝가리를 탈출하는 장면과 현재의 유럽인들이 ‘과거 31년을 계승한 사람들’이라는 외연 확장과 더불어 피로 쓴 그들의 과거사를 제대로 씻어내지 못했는가에 대해서인지 아니면 인종주의적 국가 압사의 과오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에 대한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에서 서술되어 나타나는 인식이나 평가가 과연 면밀한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료성을 떠나 너무 유럽의 상황에 대해 편파적인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러시아가 굴복시킨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프리드먼은 NATO가 연약해졌다는 식으로 서술해 내고 있습니다만, 우크라이나의 경우 러시아와 합의한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에 대해 미국이 연대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은 국제정치학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음에도 이것에 대한 서술은 쏙 빠져 있는 것은 저자의 명성을 생각해 봤을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활화산에 끼얹은 기름이 되었던 민족주의는 1871년 비스마르크가 초안한 독일 제국에 의해 비롯됩니다.저자인 프리드먼은 사실상 그 당시 발칸반도를 비롯한 유럽 전지역에서 피올랐던 민족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데요. 이후 2차대전에서의 민족주의가 인종주의와 결합해 600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역사적 사건을 연계해 해석하고 있습니다. 종전 이후, 오늘날 세계 4위의 경제 국가가 된 독일이 과거 그들이 행했던 인종주의적 말살로 인해 확실한 재무장과 보통 국가로의 이행이 독일 국민 대다수의 신중함에 가로막혀 있다고 봐도 무방해보입니다. 독일인들은 그 특유의 절제와 인내심 그리고 신중함으로 유럽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로 부상했지만, 아직까지도 꽤 진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 드골 치하의 프랑스는 핵을 보유해 발언력이 강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하였고, 영국은 전후에도 대영제국의 경계를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기도 합니다.

소련의 붕괴와도 거의 일치하는 1991년의 마스트리트 조약은 현재의 유럽 연합을 있게 한 장면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소련은 개혁 개방의 길에 들어설 즈음, 레이건과의 담판에서 NATO가 더이상 모스크바와 가까워지는 것을 동결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지만, ‘유럽 연합을 확대하려는 욕구’와 더불어 NATO의 확장은 결국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초래했습니다. 사실상 이것의 전제는 NATO가 효과적으로 푸틴 치하의 러시아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며, 이것의 책임의 상당 부분은 미국에게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과거 드골은 “미국이 유럽을 위해 시카고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리라고 믿지 않았다”는 저자의 인용은 본질적으로 국제 정치가 어디에 수렴되어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은 조지아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이 확실했다”는 문장 하나 만으로 미국의 불개입이 정당성을 답보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NATO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NATO자체가 미국의 그림자라고 봤을 때, 현실주의자인 푸틴이 그러한 도발을 감행하고 국제사회에 의해 어떠한 응분의 조치를 당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부정적이다 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프리드먼은 유럽의 여타 상황을 꽤 편안하게 서술하면서 우크라이나를 경계로 동쪽은 유럽의 본토로 서쪽은 유럽의 반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것은 유럽 전도를 90도로 비틀어 버린 것과 같죠. 이러한 해석대로라면 남쪽으로 밀려드는 러시아의 의도를 밑의 반도에 해당하는 국가들이 저지해야만 하는 상황일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독일의 재무장과 경제력의 유지는 매우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또한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는 프랑스와 이제는 한발 멀찍이 서 있는 영국을 고려한다면 남부 유럽의 PIIGS의 경제 불안과 그 중의 그리스의 쇠퇴는 프리드먼이 어떠한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할 만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는 영국, 프랑스, 독일이 처한 입장의 급격한 변화와 유럽 전체에 드리우는 이슬람의 그림자와 호시탐탐 러시아와 서유럽 전체의 완충지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전복이 앞으로의 방향타를 좌우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저역시 절로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전 정권과는 달리 좀 더 고립주의로 다가가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이러한 전유럽의 위기 상황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데요. 독일이 자원을 매개로 러시아에 대한 접근과는 별개로 푸틴은 앞으로도 미국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위험한 오판을 또 감행한다면 우크라이나로 시작되는 위기가 과연 어떻게 변질될지는 매우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와 동맹관계였던 폴란드가 어떠한 취급을 당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국까지 끼어들어 폴란드를 기만하기까지 했는데요. NATO의 확장과 더불어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과 모스크바는 아예 발칸과 동부 유럽의 완충지대를 자신의 영향하에 두려고 하는 등의 감히 신냉전의 초래가 될지는 일말의 확대해석에 경계를 유지하면서 좀 더 지켜볼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러한 현재의 유럽 내부의 모순과 혼란의 가능성이 오로지 유럽인들의 문제로만 먼 발치에 두고 과거처럼 미국이 수수방관한 한다면 러시아의 오판을 부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학계와 관료계에서 꽤 면밀한 관찰과 연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봤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헝가리인이었으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동화되지 않았던 자신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은 유대인이 장악한 은행, 공산주의, 진보주의에 의해 피해를 당했다”는 꽤 솔직한 고백에는 일개 독자지만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유대인의 고유한 독립성에 의해 독일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해석에는 절대 동의할 수가 없으며, 인종주의적 말살에는 어떠한 근거를 대서는 안된다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음을 밝혀두고 싶군요. 물론 앞뒤 맥락을 고려한다면 저의 해석은 다소 확대일 수도 있겠으나, 유대인이면서도 반유대주의자임을 먼저 고백했던 저자의 솔직함에 꽤 감명을 받았다고 치부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꽤 신경질적인 평가일 수도 있으나 글의 61페이지에 ‘아버지의 모친’이라는 표현에 대해 홍지수 선생께 정정을 요구하고 싶은데요. 이미 ‘조부’라는 단어나 등장함에도 왜 아버지의 모친이라는 구어를 ‘조모’로 의역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한나 아렌트를 ‘해나 아렌트’로 표기한 것은 애교로 받아들여도 충분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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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waySunny 2020-03-3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의견 잘 보았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유럽에서도 전반적으로 이제는 ‘민족주의로의 회귀‘ 가 국제 정치 트랜드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좀 더 입증하고 있는 것 같네요.

글 본문과는 조금 벗어날 수 있으나 ‘Hannah‘는 외래어 표기법상 한나가 아니라 해나가 맞습니다.

베터라이프 2020-03-31 16:05   좋아요 0 | URL
해나 아렌트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그녀가 유대인인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한나 라는 표기가 더 정확하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에서 해나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국내에 이미 한나 아렌트와 관련된 성명표기가 여러 학술서를 비롯 일반적으로 ‘한나’라고 통용되고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린겁니다. 성명 표기가 특히 인종과 국적에 귀결된다면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는 마땅히 한나가 정확한 표기겠죠.

좋은 친구 2021-04-03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나 아렌트가 더 익숙하긴 하지만 2014년 국립국어원에서 해나로 표기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외래어표기법을 따른다면 해나로 표기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것이 이 책의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은 이 문제에서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미국에 사는 유대인도 많고 그들의 이름은 미국식으로 표기되니까요. 문제는 그가 독일인이냐는 것이겠지요. 독일인이라고 한다면 한나 아렌트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할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베터라이프 2021-04-03 16:00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유대인 표기법을 말씀 드린것은 유대인들의 발음 방식도 독일식이랑 유사하다는 것인데요. 흡사 라틴어 발음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지프 슘페터의 이름 표기와 마찬가지로 조셉 슘페터, 조제프 슘페터와 같이 번역자들이 기준 없이 마음대로 번역하는 바람에 성명 표기에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학계에 용인된 표기가 있는데 영어식으로 혹은 다른 언어의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은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권위를 가진 기관에서 이러한 국문 표기를 확정해주면 좋겠는데 현재는 그렇지 않죠. 국립국어원의 결정은 일단 참고는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당시 발생했던 리틀록 사건에서 스스로 유대인임을 다시금 주장했듯이 유대인으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엘리트 독식 사회 -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들의 열망과 위선
아난드 기리다라다스 지음, 정인경 옮김 / 생각의힘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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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건 대학과 영국의 옥스포드를 거쳐 뉴욕 타임스의 유명한 칼럼니스트였던 아난드 기리다라다스는 인도 출신의 부모를 둔 언론인이자, 정치 분석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1981년 생으로 그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꽤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MSNBC와 아스펜 연구소에서의 이력들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현재는 하버드 대학의 박사과정을 진행중이므로 그의 과거 경력을 감안하더라도 정치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는 한 명의 학자로서 이 글은 꽤 통찰력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미국 정치 무대와 관련된 훌륭한 경험들이 앞선 평가의 기반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아주 간단히 말해 현재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점은 칭찬받아야 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원제 “Winners Take All”로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9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7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전체적으로 글 전반은 어떤 학문적 주장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체제를 이끌고 있는 정치사회 시스템적인 상황과 이러한 현실에서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일하는 여러 인물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서사적 관점의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약간의 르포 형식의 글로 봐도 오해가 아니라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저의 개인적인 느낌은 그러합니다만 정확한 판단의 몫은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겨두고 싶습니다.

대략적으로 여기에 관통하는 주제는 “수많은 엘리트들 자신의 선한 인식이 명백하게 한계를 갖고 있으며, 시스템 자체를 변혁시키고 개선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라 기존의 시스템 하에서 다른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순조롭게 적응해 나갈 수 있겠느냐 라는 인식과 행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상황에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이 민주주의 체제 어떠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 구조상의 맨 상층부에 있는 엘리트들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바로 이 책이 제공하고 있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선을 행하기 위해 큰 경제적 희생을 기꺼이 치르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은 많은 엘리트들이 바로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보호받기 위해 그동안 무엇보다 정부를 우회하기 위한 시스템적 기반을 쌓아왔다”는 것과 다름 아닐 텐데요. 일부 이들 가운데 선한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소위 ‘윈윈주의’의라는 명제로 모두가 적당한 이득을 얻는 것의 결과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득권과 비기득권이 모두 누리는 이득 말이죠. 그런데 외형상 이러한 가치추구는 꽤 설득력이 있긴 하나, 실제적으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이 책에서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현재의 악화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또한 그러한 인식을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실효적인 시스템의 개선 없이 즉, 어느 것도 희생하기는 어렵다는 식의 안일주의가 그 원인이 되고 있다고 봐야할 텐데요. 앞선 이들 엘리트들이 이러한 현실적 문제에 있어 스스로가 도덕적 책임감을 인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에 있어서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글에서도 볼 수 없는 통찰력을 저자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나 대니 로드릭과 같은 경제학자들은 “중산층의 공동화, 포퓰리즘, 민족주의, 외국인 혐오”를 비롯해 사실상 미국이 사유화 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여기에는 자신 스스로가 분명 엘리트이자 기득권층인 도널드 트럼프가 오히려 수많은 기존 엘리트들을 비난하는 신뢰성의 문제와 인종차별주의, 권위주의와 종족적 민주주의로 무장한 근본적인 탈정치의 화신이 미국 정치 무대에 들어섰다는 것 만으로도 이 “포퓰리즘적 분노”가 얼마나 왜곡적 현실을 불러 일으켰는지 책을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선동되어졌다는 말 이상으로 트럼프의 교묘한 언설과 도덕적인 의무감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만연한 타성에도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인을 분리해 낼 수 있는 시민의 변별력을 먼저 언급하기 전에 그동안 미국이 심각한 불평등화 과정에서 시민의 기본적 기반이 위태로운 수준을 벗어나 2008년의 주택 시장 붕괴와 같은 정치와 경제적 기반의 침몰이 바로 트럼프의 탄생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러한 인식을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트럼프의 출현에 일반 시민들의 책임이 아니라 이러한 불평등을 가속화 시킨 엘리트들에게 먼저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밝혀두기 위함입니다. 여기에는 자신들이 피해자인 척 하는 부유층들과 자본주의 시장을 왜곡하는 역외 금융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시민의 의무인 세금의 의무를 회피하는 등의 ‘탈도덕적인 정당화’가 한 몫을 하였습니다. 역외 금융과 같은 문제들을 대중들이 집중하지 못하게 언론들을 움직여 왔다는 저자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근거가 됩니다.

글의 1장에서는 앞선 ‘소위 선한 엘리트들의’ 마켓월드 MarketWorld에 대해 먼저 글의 맥락을 위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마켓월드는 현 상태로부터 이익을 얻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도 해내는 일종의 신흥 권력 엘리트들의 세계로 이것이 일반적인 리버럴한 엘리트들의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부유층 엘리트들의 독서모임’과 같은 얼마나 순진무구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지 글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 글을 통해 드러난 이들의 순진함이 단순한 가치판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존의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당위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득권층이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즉, 엘리트들의 입맛에 맞는 시스템에 대한 적당한 비판을 해오고 있는 지식 소매상들을 다루고 있는 4장은 이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지식 소매상들의 범람은 샹탈 무페가 강조한 지식인의 숭고한 책무인 “권력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설 땅을 쉽게 무너뜨리고 있으며, 앞선 지식 소매상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부유층과 기득권의 행보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들이 추구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이미 일반 시민들과 엄청난 재력과 사회적 자원을 가진 부유층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실제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이상 이 시스템을 바꾸려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명백합니다. 겉으로는 어떤 대안을 표명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떠한 대안도 바라지 않는 이들의 도덕적 위선은 사실상 지그문트 바우만이 강조한 시민들이 품위있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문제제기와 그 궤를 같이합니다.

이러한 논리적 서술 가운데 6장은 많은 부유층이 자신들의 관대함이 기반이 된 기부 행위로 시급한 사회적 정의로 대체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심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카네기와 포드는 앞선 관점으로 기부를 활용했으며, 노조를 카르텔이라 모함했던 것은 돈으로 쌓은 권력을 선민주의에 이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제가 몇번이나 다른 책들에서 반복해 왔지만, 탈자본주의로의 이행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장 자본주의에 마땅한 정치적 기본 가치를 다시 부활시키자는 취지의 주장을 해왔는데요. 마찬가지로 “엘리트들이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그 자체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저자의 평가 역시 저의 인식과 유사하다고 여겨집니다. 시장에 면밀한 정치적 감시를 회복하자는 많은 정치학자들의 주장을 공염불로 만들어내는 엘리트들과 지식 소매상들의 결합은 “제도와 법 위에 시장 자본주의가 서야 한다”는 사활적 물음에 반하는 것으로도 봐야겠죠. 마찬가지로 책의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7장에서 인용된 대니 로드릭의 “세계 경제가 직면한 대다수, 그것이 무역 규제이든, 금융 불안정성이든, 아니면 적절한 발전의 부재와 세계적 빈곤을 비롯한 다른 어떤 문제이든 간에, 이 수많은 문제들은 사실 우리의 지역 정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그 심각성은 훨씬 더 줄어들 수 있을 겁니다”라는 제언은 그 의미하는 바가 실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 다소 진정성을 갖고 있던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리벌럴이 골드만삭스와 돈으로 연계 되면서 시민에게 그 신뢰를 잃게 되었다는 대니 로드릭의 다른 관점도 설득력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한 사회의 공유된 민주적인 제도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도와야 하고, 이것의 맥락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평등의 기반에서 이뤄진다는 점은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물론 민주주의를 외길로 몬 자유시장주의가 전세계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해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시장 자유가 만연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을 우리가 양가적 측면으로 눈을 감고 외면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떤 식으로 붕괴하게 될지 예견할 수 있을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규제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대중에게 견디는 자세만을 알리려고 하는” 노골적인 의도와 건전한 비판의 눈을 끈으로 가리는 것과 같은 조작이 우리 삶의 피폐화를 초래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얼마나 우리가 더 노력을 해야하느냐에 대한 볼멘 소리가 이어질 것입니다만 요즘과 같은 엘리트 지배체제가 얼마나 타성에 젖어 있었는지 이 지점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모두가 나아가야 되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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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사다리 - 불평등은 어떻게 나를 조종하는가
키스 페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키스 페인은 행동과학과 인지심리학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한데요. 그는 사회학적 측면에서의 다중 인간 심리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다수 인간의 집단 행동 연구와도 유사한 연구 궤적을 그가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근래 많은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소위 ‘불평등 문제’와 관련해 아주 단적으로 이를 ‘공중보건의 문제’라고 확정짓는 것은 공통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소개는 의미심장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원제, “The Broken Ladder”로 지난 2017년 출간된 이 글은 국내에도 역시 같은 해인 2017년 1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종의 사회과학 범주안에 들어가도 무방한 책임에도 번역은 꽤 잘되었다고 여겨졌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키스 페인의 이 글이 최근 이어지는 사회적 문제 내지는 관심사를 반영하는 판매고를 올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점은 작성된 서평 글 수를 봐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우선 글의 결론인 9장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키스 페인의 근래 불평등 문제와 관련한 해석과 관련한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불평등을 줄이려면 많은 문제들을 한꺼번에 다룰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불평등을 도덕적으로 고찰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이를 공중보건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종래의 심화된 불평등 문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수많은 지식인들과 그들의 진단과 비판과는 약간 상이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을 시도했던 학자들도 분명 있었으나, 근본적으로는 불평등 문제가 현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작게는 개인의 능력차나 크게는 사회적 자원과 효용성을 발휘하는 측면에서의 차이가 매우 차별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들을 요약해서 분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중산층들이 여러가지 이유에서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유리 바닥을 만들어주고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을 도덕적으로 마냥 비난할 수는 없기에 모두가 동등한 선에서 출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평등주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와 관련해 일본 전 총리인 고이즈미는 “격차가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한 것과 같은 불평등 문제와 관련한 명사의 몰이해적인 측면은 이것의 인식차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굳이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개인의 인센티브 문제를 제기하지 않더라도 개개인들의 합리적 이기심이라는 전제에는 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보더라도 합당하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4장에서는 ‘합리적인 사익 추구’라는 것이 현실 가능하다고 봤던 일련의 경제학자들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4장은 통념적인 좌파와 우파의 틀로 인식되는 불평등의 관념적 측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진보적인 엘리트와 노동계급 보수주의자”와 같은 태생적 이분법 말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가 밝히고 싶은 것은 미국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 보수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과 유사한 판에 박힌 계급적 정치의식에 대해 반대하면서, “낙태를 반대하는 자들이, 사회적 복지 제도의 강화를 주장 할 수 있다”면서 반론을 제시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개인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 성향이 시시때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며, 우리가 내면화된 가치로 어떤 신념을 쭉 지켜내기란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국 시민들의 민주당 지지와 관련된 지도에서도 실질적으로 중산층 이하의 가난한 계층들이 폭넓게 지원하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노동계층이 언뜻 공화당을 더 지지하는 것으로 통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는 더 많은 노동자들이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는 밝혀냅니다.

그래서 키스 페인은 불평등과 일반적인 사회학적 관점과 관련해 우리의 편견을 타파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불합리내지는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그래도 사회는 정의롭다 혹은 정의로운 세상”이라는 결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시키는 편견에 대해서도 저자는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재능과 노력과 운의 복잡한 조합으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현실 세계”에 자신이 마땅히 원하는 것을 얻어야만 한다고 인식함으로써, 이 세상은 아직은 정의롭다고 여긴다고 측면은 6장에서 다른 여러 사례들을 통해 입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점은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그를 무능하거나 이기적이며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평가했다”는 어느 실험 사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극단적인 측면으로 여길 수 있지만 이미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결여한 채로 얼마나 부정적일 수 있느냐”에 대해 철학적 접근을 해온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 소개되는 여러 결과론적 인식을 통해 전반적인 불평등 상황이 사회 내에서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서로간의 이해를 제한시키며, 끝내는 “불평등이란 서로 공유하는 공간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공통적인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불평등을 공유하는 공간이 전무하다는 것은 시민들의 사회적 단절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욱, 사람들의 편견이 더 심해지는 특정 상황은 “돈과 권력 및 불평등이 관련되어 있다”고 저자는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5장의 불평등은 생과 사의 문제라는 표제는 제가 임의로 발췌한 것에 불과하지만 원칙적인 측면에서는 이 문제가 생과 사를 좌우하기도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꼭 돈의 차이 때문에 개개인의 수명 차이가 발생한다는 여러 주장들을 귀담아 두지 않더라도 가용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의 개별 차이와 이것의 결핍과 관련된 정신적 및 육체적 질병의 문제는 분명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해 어떠한 연민과 관심이 없는 것처럼 분명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에도 계급간의 단절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은 모두가 부정할 순 없을테죠.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불평등 자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능력, 책임을 중시하다보면 불평등이라는 결과물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인과론에 대해 유독 보수주의자들의 자기 방어적인 주장에서 뿐만 아니라 진보나 그외의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까지 이 불평등 문제가 아주 자연적이고 태생적인 문제여서 어떤 인위적인 개입을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 아직도 의구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많은 서평에서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많은 불평등의 여건에서 우리의 민주 정치와 민주주의가 과두제와 포퓰리즘이라는 악의 쌍두마차로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왔습니다. 애초에 시민 다수의 삶의 인간다운 영위에 대해 사실상 많은 정치 엘리트들은 관심이 없으며, 여기에 합세한 경제 엘리트들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것에만 신경쓸 따름이지 허버트 스펜서 류와 같은 그냥 ‘자연의 섭리’에 불평등 문제를 맡길 것을 바라고만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끝으로 이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얼마전에 접했던 리처드 윌킨슨의 글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이 책에 인용되고 있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마틴 길렌스의 다른 논저들이 하루 빨리 번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수많은 사회적 실험과 모의 실험은 흥미로운 점들이 많았습니다만 몇가지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소득이 높은 이들은 남의 말에 신경쓸 일이 많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다른 기회를 잡기 위해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에는 다소 동의하기 힘들더군요. 또한 선진국일수록 종교의 필요성에 구애받지 않고 후진국 내지는 보수적인 전통국가는 종교적 믿음에 집중하는 것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는 수긍이 가지만 오늘날 미국과 같은 나라는 오히려 사회에 있어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고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대해 언론을 통해 어김없이 밝히고 있다는 점은 꽤 예외적 사례로 불릴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광범위한 불평등 문제에 대해 이렇게 약간 상의한 접근의 글 또한 나름 필요하다고 인식되었는데요. 아예 불평등 문제가 개인의 심리적 문제와 질병 등에 어떻게 더 작용하는지와 같은 연구가 좀 더 이뤄지면 어떨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논하고 있는 다양한 사례와 실험들이 꽤 신선하다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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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정책은 국내에서 시작한다 - 미국은 자기 집부터 정리해야 한다
리처드 하스 지음, 우정엽 옮김 / 아산정책연구원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뉴욕 브룩클린의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오하이오주에 있는 미국 명문 사립인 오벌린 대학을 거쳐, 미국에서 영예로운 장학금인 ‘로즈 장학금’으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 유학한 리처드 하스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 미국외교협회의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그는 콜린 파월 전 국무부 장관의 상임 고문을 맡았고 2003년에는 북아일랜드의 평화협상 과정을 지원하기 위한 평화특사로 파견되었으며, 조지 H. W. 부시 정권 시절 당시, 새로운 외교 정책을 세운 공로를 인정 받은 바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번역된 그의 논저 “혼돈의 세계”의 서평을 작성한 이후, 두번째로 접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Foreign Policy Begins at Home : The Case for Putting” 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약간의 참고로 책의 출판을 맡은 아산정책연구원은 과거, 로버트 케이건과 같은 네오콘에 속하는 학자들이나 정치 관료들의 글을 번역해 온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더불어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실질적인 정책 행위자들로 유명했던 네오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을 때, 저 역시 레오 스트라우스와 아인 랜드의 글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내에서 손꼽히는 외교 학자이자 정책 관여자였던 리처드 하스가 이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세계의 모든 인도주의적이고 인권을 보호하는 개입을 포함한, 정치군사적 투입에 더이상 미국의 여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특히 이러한 환경적 변화 요인에 미국 국내적 상황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에 따른 비용은 2001년 이후 누적된 연방정부의 15퍼센트 정도”라고 저자는 소급해 이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2008년 이후 세게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재정적 여력이 한계에 이르렀으며, 연방 정부의 적자 규모 또한 나날이 누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전쟁 비용 지출과 같은 재정 조력이 사실상 힘들어지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리처드 하스는 2부 마지막 주제인 ‘옹호할 수 있는 국방’에서 오늘날 현대전에서는 막대한 지상군 투입이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본과 EU와 같은 국방비 지출의 후발 주자보다는 전략적이고 대외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국방비 유지를 전제조건으로 옹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스는 지상군 투입이 선결조건이라 할 수 있는 미래의 현대전은 한반도에서의 작전 밖에 예상되지 않으므로 꽤 주도면밀하게 공군과 해군에 대한 규모 유지가 필요하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우선 글이 시작되는 1부에서는 냉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후, 일종의 다극체제로의 변화 가능성으로 대두하고 있는 여러 국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브라질, 멕시코, 인도네시아, 호주, 일본, 한국 등 각 국가별로 간략히 분석해내고 있는데요. 이에 저자는 냉전의 종식 이후 바로 미국이 주도해 국제 관계에서 갈등과 대립을 조정시킬 수 있는 일종의 국제적 협의체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을 아쉬움으로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기존의 UN을 비롯한 국제 외교 무대의 한계로 볼 수도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토로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중국은 과거에 자신들이 참여하지 않은 국제 조약과 기준에 상당한 거부감을 밝히고 있는데 과연 명확한 국제 기준과 합의가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 전문가로 불리우는 조반니 아리기 역시 중국이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이 중국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게도 이득이라고 했던 것은 그 의미가 명확해 보입니다. 특히 많은 서구의 학자들이 민주화 없는 베이징 컨센서스에 우려를 표명했던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일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상황과 과거에 있었던 다소 고립주의적 정책에 기반하는 복고주의를 설명하면서 논증 가운데 몇가지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선 “중국, 일본, 한국. 그리고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의견 불일치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견은 약간 반감까지 들었는데요. 청산되지 않은 역사 문제를 단순히 의견 불일치로 이해하는 점은 전형적인 미국인의 몰이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자신들이 2차 대전 당시 일본 제국과의 교전 당사국이었지만 안마당인 태평양 지역의 안보를 위해 일본 제국의 과오를 서둘러 봉합한 것은 주변국들의 이해에 기반한 것은 아닙니다. 냉전 시기에도 소련의 위협이라는 문제 앞에 일본과 주변 당사자들의 강제 화해를 주도하고 결국 일본에게는 어떠한 역사적 참회를 철저히 미연에 방지시킨 결과는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 짚어보고 싶습니다. 또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지역에 대한 이해와 동맹의 의무를 고려했을 때 군사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압박이 클 것이다”라는 서술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는데요. 한미동맹과 같은 비대칭 동맹 관계에서 미국이 항상 연루의 위협에 직면해 있지만, 다른 미국과의 우호국 내지는 동맹관계를 고려했을때 압박이라는 표현은 동맹의 의무라는 입장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번이나 미국내 여러 지식인들이 서울이 핵공격의 위협과 동시에 LA이나 샌프란시스코에 핵위협 가중될 때, 과연 미 당국이 한국에 대한 핵우산을 지킬 수 있을지에 설왕설래가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동맹에 대한 의무는 단순한 조약의 서명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한반도에서의 재래전이 핵전쟁으로 발화될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도 미국이 동맹의 의무를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해 누구나 확신을 갖기 어렵다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마찬가지 측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초기 재래전과 같은 대결이 결국 양국 사이의 핵전쟁으로 귀결될 가능성 또한 상당하기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소한 국지전이라고 할지라도 국제사회 차원의 개입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즉, 한반도에서의 무력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주변국의 노력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와 같은 엄중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집니다. 앞선 주장과는 논외로, 저자인 리처드 하스 역시 “파키스탄의 증가하는 핵무기는 거대한 위협중에 하나”라고 인정하고 있는데요. 파키스탄의 국내 정치가 사실상 부족 중심의 체제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과연 자신들의 핵무기가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이 확언한 만큼 과연 안전하고 통제권에 있는지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파키스탄 서북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테러 단체의 존재를 감안해본다면 파키스탄 정부의 핵무기가 언제까지 안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하스는 자신이 공화당 당적을 갖고 있는 학자이자 정치인이기도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책의 기조를 “전략적이고 제한적인 개입”을 미국의 대외정책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3부에서 밝히는 미국 국내적 요건과 관련해 “미국의 GDP 5분의 1이나 되는 비용을 의료보험제도에 투입”하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며 이것의 감축을 주장하고 있는데요.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과도한 의료보험비용을 지출하고 있으면서도 600만이나 되는 미국인들이 변변한 의료보험 조차 없이 지내는 것이 사뭇 이해가 안될 정도입니다. 2008년 이후 미국 경제가 다시 회복기에 이르고 있지만, 여러 국내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미국 정치가 꼭 누군가를 지칭한 것처럼 “포퓰리즘을 등에 업은 가짜 리더십”을 꼬집고 있는데요. 저자인 그도”민주주의는 단순한 선거 이상의 것이고, 선거 또한 선거 당일에 일어나는 일 그 이상의 것이라는 점이 강조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미국 정치가 ‘민주주의의 쇠퇴’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그 포퓰리즘을 등에 업은 리더가 앞으로 어떠한 결정을 하게 될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우리의 미래와 운명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실로 뜨악한 현실이기도 할텐데요. 저자의 예견과는 약간 상이하게 미국이 경제 발전과 꾸준한 국방비 투사가 함께 이뤄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방 정부의 재정악화와 대외 경제의 불안감이 미국의 패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앞으로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지켜봐야 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모든 것을 다할 수 없다”는 의미 역시, 아마도 과거의 미국과 다른 현재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의 39페이지 하단에 서술된 “쿠웨이트에서 이란을 내쫓았으며..중략”는 아마도 이라크를 이란으로 잘못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장이 시작되는 “중간의 1990년대에는..” 이라는 시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라크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오타라고 할 수 있으니, 기본적인 역사조차 인지하지 못한 역자의 책임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다만 이란의 영문표기인 Iran과 이라크의 Iraq는 뒤의 마지막 자음에 헷갈려 할 수 있지만 이 부분도 완전히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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