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숭배 - 우리는 왜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는가
클라이브 해밀턴 지음, 김홍식 옮김 / 바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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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클라이브 해밀턴은 영국 서섹스 대학의 경제발전연구소 (Instirute of Development Studies) 에서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시드니 대학교,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를 거쳐 호주 진보 단체인 ‘오스트레일리아 인스티튜트’를 설립한 대표적인 진보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이며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실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의 현실 참여와 꾸준히 갖고 있던 연구물로 탄생한 이 책은 지난 2003년 출간되었으며, 원제는 ‘Growth Fetish’로 국내에는 좀 뒤늦은 2011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첨언을 드린다면, 역자가 지면을 할애해 특별히 설명하고 있듯이 원제의 fetish를 우리 말의 ‘망상’으로 지정했는데요. 이 부분은 후에 일면적인 경제성장주의와 소비지상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할당된 용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적절한 표현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8장의 구분된 소주제로 되어 있는데요. 8장은 탈성장 사회의 이행 방법과 그 과정을 담은 사실상 결론으로 볼 수 있겠고요. 처음 1장과 2장, 3장이 전체적인 주제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며, 4장과 5장, 6장과 7장은 개략적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는 논증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처음 3장까지 부분을 제외한다면 각 장의 독립된 구분의 논증은 따로 읽어서 이해해도 될 만큼 특유의 개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논의들이긴 합니다만 꽤 설득력이 있고 논리적 군더더기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번역 또한 꽤 양호했습니다.

대략적인 큰틀에서 보자면, 경제 성장의 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와의 관계 그리고 그 이행과정에서 세계화와 소비 지상주의 및 왜곡된 현대 사회의 행복과 자기 결정권 등을 매끄럽게 연결하여 글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먼저 저자가 단언하는 오늘날 성장 일변도의 경제 발전주의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성장 일변도의 가치관 자체가 거의 ‘성장의 망상’이라고 규탄하고 있는데요.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한번 이행과정에 들어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면 더이상 수정 가능성과 돌이킬 수 없다는 터무니 없는 확신을 강요해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전자의 행로에서 서구권의 좌파 정치와 진보 세력의 철지난 이데올로그에 사로잡혀 견제와 비판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을 먼저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아직도 사회 전반의 빈곤의 문제에 집착해 신자유주의적 우파와의 정치 대결에서 힘을 잃고 내적 동력을 상실했으며, 이 점은 결국 신자유주의를 효과적으로 견제, 비판하지 못해 사실상 많은 시민의 고통을 낳게했다는 측면의 포괄적인 ‘좌파의 실패’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그동안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다룬 여느 책들에서는 볼 수 없는 꽤 상세한 내용인데요. 흔히 많은 논저에서 ‘그 동안 진보 좌파의 지리멸렬’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의 충분한 연유와 결과를 저자인 클라이브 해밀턴이 실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대한 뒷배경을 갖고 있든, 면밀한 해석상의 창의력을 갖고 있든 간에 어떤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가 우연히든 아니든 나타났다면 우선 그것을 이해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수단 내지는 방법, 이론 등이 필요합니다. 신자유주의가 그러한 이행과정을 거치면서 정치경제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면 반대의 혹은 충분히 의심을 갖고 살펴볼만한 상대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했음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진보 좌파가 궤멸해서 어떠한 사회적 병리를 낳았는지는 익히 목도했습니다. 이들이 우파와의 표심 다툼과 정권 획득과 관련해서 특유의 사회경제적 가치를 발밑에 던져버리고 욕망의 본성으로 이합집산해 버린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의 적은 집단주의와 국가권력”이라는 전제와 함께, “신자유주의 이전까지 시장에서의 권력만이 아니라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의 권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시장에서의 권력 밖에 갖지 못하나 그것마저도 일개 개인의 권력이 기업과 경제 권력의 힘에 대응할 수 없었다”고 저자는 이처럼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부분과 관련하여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영구불변해야 하는 민주적 권리”라는 절대 명제 입니다. 그동안 뉴라이트나, 시카고 학파, 밀턴 프리드먼과 아인 랜드와 같은 이들 혹은 아류들이 민주주의의 과잉 시대 혹은 민주주의의 왜곡에 주도 면밀한 쳬계로서 목소리를 높여 왔는데, 이들이 그만큼의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만큼 더불어 우리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도 그보다 더 중요하고 양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같이 민주주의는 어떤식으로든 종속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내몰려서는 안되는데 그동안 이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전방위적인 세계화는 시장이 필요하고 갖고 싶은 만큼의 권력을 종래 근대이념인 자유와 인간 해방의 민주주의 체제로부터 우선 지위를 할당받아 많은 시민들의 대다수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위에 있던 성장 제일주의 내지는 성장 유일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 책은 담고 있습니다.

본디 이 만큼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인 이식이 이뤄진 상황에 다시 탈성장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유토피아적 발상이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이 있어 왔습니다. 저자는 이것과 관련해 2장과 3장에서 화폐 거래와 상품 거래 등으로 이루어진 소비 지상주의나 부와 행복간의 관계에 대해 여러가지 자료와 통계를 대입하며 그것이 허구에 가깝다는 평가를 내리고 ‘성장 유일주의-신자유주의-소비지상주의’를 함께 비판하고, “금전이 행복의 척도라는 관념이 강요될 수록, 사회 병리를 더욱 심화시킨다”고 앞선 논증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이 “명백한 진실에 근거한 비판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진실을 부인해야 득을 보는 사람들이 그 비판을 무력화하려고 들 것”이라는 분석 또한 이 정도의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탈성장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이상주의적이고 유토피아주의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의 명백한 진면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소비 지상주의와 자본주의 논리는 화폐의 합리성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덧붙이며, 대대적인 마케팅과 만난 소비 지상주의가 다수의 삶에 어떤식으로 작용했는지는 그 결과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통찰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과거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서 소비 자본주의 시대로 급격하게 변질됨으로 애초에 자본주의의 시스템의 전체적인 수단의 틀에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개인들이 소비를 통해 각각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또한 자기 망상에 의해 지탱되는 과소비 사회다”라고 평가하고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환경 파괴와 소비에 의존하여 사는 시스템 자체를 잉태했다는 것은 또한 병리의 한 형태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어쩌지 못하는 것은 “세계화의 본질이 성장과 소비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쉴 새 없이 확산된다는 데 있다”고 5장과 6장을 통해 저자는 논증을 하고 있습니다.

앞선 책에서 가이 스탠딩은 시장은 이제 ‘민주주의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수용하는 자세는 작게는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인정받는 것이며, 또한 크게는 신자유주의적 자유 시장 테제로 인해 후퇴했던 사회적 요건과 사회적 보장 등을 다시 민주주의적 논리로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일찍이 레이건이 목소리 높였던 낙수효과는 허황으로 끝났고 시장의 자유가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것도 다수의 고통으로 자리매김 했으며, 우리의 보편적인 근대가 왜곡되었던 것을 이제 ‘탈성장’ 아니더라도 뭔가 행동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의 마지막 8장은 이러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소비 지상주의가 그 자체로 세련된 표상과 문화적 소비 등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은 이면의 허상을 가리기 위한 매우 영리하고 교활한 작업이라 불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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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소득 자본주의 - 부패한 자본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가이 스탠딩 지음, 김병순 옮김 / 여문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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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스탠딩은 캠브리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영국 런던 대학의 SOAS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BIEN의 설립자이자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데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노동경제, 자본주의 시장 경제학, 신자유주의 등을 연구하며, 특히 프레카리아트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고 이해를 도출한 학자로도 유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에 번역 출간된 그의 두번째 논저 ‘불로소득 자본주의’는 꽤 반가운 소식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8년 번역 출간된 글 ‘기본소득’과 소개할 이 책은 약간 교차 출간된 것이기도 한데요. 두 권의 상당한 분량 차이가 출판 시기의 간격을 낳았고, 아마도 출판사가 서로 다른것도 그런 연유에 한몫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원제는 ‘The Corruption of Capitalism’ 이며, 지난 2016년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 번역 출판은 올 4월에 출판되었고, 꽤 상당한 분량임에도 노란색 겉표지가 절로 시선을 끄는 책이기도 합니다.

우선 책의 원제와 번역된 제목이 꽤 상이한 것을 짚고 싶은데요. 물론 양자 사이에 연관이 아주 미흡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충분한 논리확증의 연계를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완전한 시장 자본주의를 왜곡한 주범이 무분별한 불로소득임은 확실하나 이것에만 집중해서는 민주주의의 상업화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부패’를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약간 미진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논증의 과정과 이론적인 한계를 벗어나 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자료들을 서로 면밀하게 연계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은 저자에게 칭찬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더불어 번역도 나쁘지 않아서 저같은 주의력 약한 독서인도 집중해서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저자는 이 책의 중요한 인식 요소인 ‘불로소득’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불로소득자들, 부동산과 같은 보유재산에서 발생하는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는 꽤 사전한계적 의미로 먼저 인정하고 해당 단어의 본질적인 핵심은 “막대한 부를 갖고 금융과 부동산에 투입해 이러한 이익을 정치 권력들과 후견인 같은 관계로 결합하여 민주주의를 해치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자신들의 호주머니로 집어 넣는 과거 애덤 스미스가 경멸해 마지 않았던 노동없는 이익”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이 스탠딩의 이 글은 꽤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불로소득, 신자유주의, 거의 과두제에 근접한 금권 정치,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들의 상호간의 후견인 제도와 같은 보호 상황, 노동 유연성이라는 미명하에 비슷한 사회적 제도와 보호장치를 무력화 시키고, 여러 특허권을 손에 쥐고 그것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대기업, 재벌, 중개인들, 공유지를 민영화의 작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 이러한 모든 시스템의 변질로 인한 대다수의 시민들의 이익에 불일치화가 되면서 결국에는 민주주의가 망가지는 결론에 까지 이르게 있습니다.

1장은 어떻게 우리 시대가 이러한 불로소득을 잉태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2장부터 5장은 이 불로소득으로 인한 한쪽의 편중된 이익화와 그 반대에 있는 사회적 왜곡 변질과 폐해를 매우 상세하게 열거, 인용, 해석하고 있으며, 6장은 노동 유연성과 노동 조합의 효과적인 영향력 축소로 비롯된 프레카리아트 문제, 7장은 선출되지 않은 기득권 경제인들과 정치권력의 암울한 합작, 그로인한 민주주의의 붕괴, 8장은 정치적 기반과 경제적 획득을 날로 실패하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그렇게 잉태되어 가고 있는 분노를 설명하며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불로소득의 시대가 이행하는데 큰 이론적인 논거가 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과거의 하이에크를 비롯해 1980년대의 시카고 대학의 ‘시카고 학파’가 미국과 유럽의 오롯이 유일의 정치사회와 경제적 이데올로기로써 신자유주의를 강화시켜 왔고 이것은 ‘노동 시장의 엄격한 규제, 반대로 금융 시장에는 완전한 자유화’ 와 ‘신자유주의의 정언 명령인 민영화와 감세’를 필두로 어떻게 오늘날 노동이 없고, 만연한 금융화의 막대한 이익을 불로소득화에 부채질한 오로지 부유층의 이권의 시대를 설명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이 뿐만 아니라, 1980년대 구좌파 정당들이 표심을 잡기 위해 우익과 경쟁하며 스스로가 보수화되면서 앞선 과정을 비판하고 견제하지 못한 진보 좌파의 망각과 결국에는 금권 정치로 정치 권력과 금융 권력이 결탁해 ‘사악한 과두 금권 정치’로 귀결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논점입니다.

그외에도 애플과 아일랜드의 알려지지 않은 협력과 같은 국가가 기업들에게 투입하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여러 보조금들, 여러 조세 피난처와 막대한 법인세를 회피하면서 발생하는 크게는 대략 20조 달로에 이른다는 탈루 금액은 불로소득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뿌리깊게 암처럼 작용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불로소득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편리한 근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보유 재산 덕분에 불로소득을 점점 늘릴 수 있는 집중된 금융자본에 연결된 부호와 재벌 기업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라는 뼈아픈 결론을 도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처럼 신자유주의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롭지 않은 시장체제를 구축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도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는 특허 문제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관점이고, 주택 임대 산업과 관련해서도 막대한 보조금을 빨아들이면서도 영세하고 돈없는 시민들의 돈을 빨아먹는 형태로 자유로운 이익의 극대화를 부르짓는 것은 실로 괴상하기까지 합니다.

일찍이 로버트 달을 비롯해 찰스 틸리와 같은 학자들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일종의 동등한 관계여야 한다고 밝힌바가 있습니다. 여기의 가이 스탠딩은 이 부분과 관련해서 더 나아가 “시장이 민주주의의 통제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무분별한 자유화로 인한 시민의 피해를 우려하고 있고, 시장 자유주의를 자유방임주의로 지칭했던 칼 폴라니의 인식도 꽤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2008년 뉴욕 발 세계금융 위기와 관련해서 저자는 영국의 일부 금융인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금융 자유화로 인한 막대한 자본의 훼손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돈만 보증되면 그만이라는 많은 금융 종사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만 합니다. 이 위기에 싼값으로 투입된 공적 자금을 금융 엘리트들이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지는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수 시민들의 막대한 세금으로 만들어진 공적 자금으로 자신들의 이익금으로 전환하여 돈잔치를 벌인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가이 스탠딩이 말하는 불로소득을 뜻하는 핵심이라고 할 만하다 여겨집니다.

근래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많은 사회경제학 서적들이 민주주의와 거대한 불평등의 위기를 매우 가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단테는 사람들 손에 쥐어지는 책들의 내용들이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최근에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 ‘레트로토피아’의 결말에서 우리가 다함께 손잡고 무덤으로 가게 될지에 관한 이 음울한 디스토피아적인 메시지와 함께 만연된 정치경제적 병리 상황을 우리가 과연 해결할 수 있을지 끊임없는 스스로 질문을 해보기도 합니다. 가이 스탠딩의 그와 같은 이 목소리도 충분히 공감이 되고 동시에 진단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파괴할 지에 대해 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공에 외치는 말이 되지 않도록 시민 모두가 현실을 인지하고 좀 더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용기를 세워보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 아닌가 다시금 고민해 보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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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 2021-07-14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밀도있는 리뷰 감사드리며, 덕분에 당장 구매합니다!

베터라이프 2021-07-14 01:01   좋아요 0 | URL
부족한 서평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모쪼록 유익한 독서 되시길 빌게요
 
배제, 무시, 물화 -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김원식 지음 / 사월의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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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INSS)의 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인 이 글의 저자는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한 연구와 하버마스 이론에 따른 사회비판, 지구화 시대의 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앞선 연구들을 통해 한국 사회를 위한 종합적 비판 이론을 모색하는 것을 찾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각종 사회철학의 최근 논의들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약력을 보면서 문득 호기심이 생겼던 것은 어느 대학의 강단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로버트 케이건 등과 같이 꽤 독점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어쩌면 후학을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이 사회나 국가에 일정 부분 스스로 기여를 하고 있는 지식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덧붙여 이러한 종류의 글을 쓰는 저자와 같은 학자의 태도는 크게 존경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본격적인 글로 들어감에 앞서 개인적으로 고백할 부분은 일전에 이택광 교수의 글에 이어 실로 오랜만에 읽는 국내 학자의 글이라는 점입니다. 다소 약간의 반성의 마음을 담아 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8장의 소주제들로 구분되어 있는데요. 앞의 1장과 4장까지는 글의 주제를 아우르는 한국 사회의 부정의와 사회적 병리현상을 먼저 언급하고 이를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수단으로서 배제와 경제적 불평 및 그리고 인정과 무시, 우리 사회의 급격한 시장화로 통해 초래된 물화에 대해 서로 중첩적인 관계로 진단하고, 이어 5장과 8장까지는 한국 사회를 그 틀로 잡아 사회역사적 서술과 동시에 진행된 왜곡된 방향성을 함께 다루면서 비판하고 그에 대한 대안들을 차분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만 8장은 이 글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으로 보기는 약간 애매하고 일종의 매우 보편적인 당위성들을 담고 있는 주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적 요구 즉, 과두제와 포퓰리즘의 위협에 놓여 있는 현재의 우리 정치 등을 인식하면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에 대해 조심히 지표를 찾아보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 비로소 시작된 근대는 “봉건적 지배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어 바로 이 점이 근대성을 함축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근대를 인용한다면 이러한 근대가 사회와 정치에 매우 포괄적이고 가치일념적인 시장화를 전세계에 이식됨으로써 극히 변질되었다고 판단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원래 우리의 근대는 원래 개인의 자유와 인간 해방이었으나 시장자유주의적 진행 과정이 설사 전체적인 규모로서의 경제적 부를 가져다 주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익히 대표적으로 장 지글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비판했던 것과 같이 세계를 국가 범위로서 지배-피지배 관계로 한층 악화시키고 20억의 절대 빈곤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은 그 결실을 획득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구조적으로 고착화 된 불평등 문제와 차별로 인해 우리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시민의 고통이라고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책은 현대 사회를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에서 출발해 규범적인 문제와 현시적인 문제를 모두 포함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좀 더 ‘동등한 자유’에 집중합니다. 이것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비교 분석하며 특히 저자는 “자유의 동등성을 훼손하는 제도나 사회질서, 사회구조는 모두 불의로 규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우리 모두는 정의라는 촘촘한 그물망 안에 담겨져 있어야 하며, 이것이 본디 근대가 빛나면서 밝혔던 ‘진정한 해방’으로 다시 회귀하는 전제 조건일 것입니다. 물론 앞의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각자가 어느 것이 먼저 우선해야 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력을 누가 잡고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의 논의는 꽤 복잡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개념적으로는 서로 상충되는 부분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양자는 동등하게 양립할 수 있는 기반위에 서 있어야 하며, 아마도 그것이 절차적 정의를 갖고 있는 민주주의적 토대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앞선 해석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직면한 여러 담론의 문제들은 사회학적 기반의 문제라기 보다는 해석의 차이와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는 거듭된 주장들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도 사회적 모델을 비판의 전략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를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요. 다만 이러한 담론들이 “종류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형태의 담론들은 공동의 비판적 검토를 거쳐 공동의 문제해결을 모색한다는 점에 그 기능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서로 공동의 문제 해결을 찾는데 먼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규범적 비판 모델과 달리 현시적 비판 모델은 우선 우리 사회가 병리적 사회 현상을 안고 있다는 것을 각자 모두가 인지해야 하며, 이 병리 현상은 “사회 성원들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추구 방식이 왜곡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실상 어떤 연유이든 간에 이 왜곡된 병리 현상이 시민들을 병들게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를테면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사회 성원들을 학력과 경제적 조건으로 광범위하게 배제하거나 불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인정 받을 수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등의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역시 획일적인 경쟁의 압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이는 앞선 저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회 구성원의 문제라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결국 이런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귀결되는 결과에는 이 글의 제목과 동일하게 배제와 무시 그리고 물화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소멸시킬 수 있느냐가 중요한 관건으로 파악됩니다. 이 점은 크게 동의할 만한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다만, 반대로 약간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은, 개인의 권리를 다소 소극적으로 이해하거나 인정의 문제로 여기고 이를 권력과 비교 연계하는 것과, 특히 사회 갈등 일반을 경제적 불의나 분배 불평등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된다고 밝히는 것은 ‘현대사회 비판을 위한 몇가지 지침’이라는 항목 아래 나와 있는 것치고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문화적 무시라는 의미로서 사회 구성원간의 불의와 무시의 문제가 이내 경제적 불의로 환원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미 왜곡된 사회 조건으로서 만연된 경제적 불평등 시대에서 인정과 무시라는 개념이 경제적 불의를 초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큰 의미가 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독을 한 것이 아니라면 이미 두껍고 깊은 사회적 테두리가 이미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경제적 불의를 따로 도출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더군요.

그리고 저자는 많은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 해결의 당위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 부분은 동의하면서도 “오늘날 경제적 배제의 주된 원인은 여전히 자본주의 시장 체제의 변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전반적으로 재분배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약간 미진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저자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이를 명쾌하게 해결하기란 어려운 과제니까요. 수많은 개인들의 노동력을 수단화 시키고 문화적 차별, 인정하지 않는 범람한 무시와 배제의 문제 등이 우리의 자본주의 하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결국 선언적인 해결론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확대와 농밀화’와 시민들 스스로의 이성적이고 좀더 도덕적 가치에 가까워지는 길 밖에는 딱히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생활 세계가 사전적으로 합리화되는 것도 기대하기는 어려우므로 마냥 “민주주의 발전이 정치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불완정성을 제공하는 역설”이 마땅히 이해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자는 분배와 인정의 문제와 특히 타인을 도구화하고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 등과 좀 더 권력 불균형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앞선 논의의 전개 과정들에서 특별히 위의 목록들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생활 세계의 내부의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 구체적인 경제적 불의에 대응”해야 한다고 포괄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에서 대략 인정과 배제 및 문화적 차별이 좀 더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일종의 문화가치적 재설정으로 사회의 무분별한 시장화로 비롯된 일련의 문제들과 경제적 불평등을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문득 의문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5장과 8장에 이르는 내용들은 지극히 당연하고 보편적이지만 특별히 새롭거나 독창적인 논의나 주장은 딱히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인식의 전개 과정은 꽤 설득력이 있었고, 매우 일관되게 느껴졌습니다. 굳이 하버마스를 통해 도출한 것은 아니겠지만 시민들의 논의와 토론을 보장하는 시민들의 공론장과 같은 제안에 개인적으로 꽤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정치 투쟁을 효과적으로 또한 모두가 인정할 수 있게 시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일면적인 서술로서가 아니라 매우 심도 있는 방법론들이 학자들에 의해 도출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개 독서인으로서 고민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더불어 이 책의 1장과 2장 및 4장은 면밀하게 읽어봐야 할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은 꽤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인간적인 인간다운 삶이 과연 규범화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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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조건 -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
자라 바겐크네히트 지음, 장수한 옮김 / 제르미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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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처음 국내에 소개된 자라 바겐크네히트의 이 책은 독일에서 2016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저자인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독일인 어머니와 이란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조금 늦은 나이에 네덜란드 호로닝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함과 동시에 꽤 많은 저서들을 출간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독일의 한 일간지에 현안에 대해 칼럼을 꾸준히 기고하고 결국에는 의회 정치인으로 변모하고 독일의 대표적인 좌파 정치인으로 자리 매김합니다. 이미 역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그녀는 의회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꾸준히 여러 논저들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녀의 정치적 인식과 학문적인 연구물로서 이 책이 갖고 있는 위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원제는 ‘Reichtum ohne Gier : Wie wir uns vor dem Kapitalismus retten’이며, 영문으로 출간된 책의 제목은 ‘Wealth without Greed : how we save ourselves from capitalism’입니다.

이 책은 크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열거하고 비판한 1부의 총 5장과 이후 자본주의 시스템의 대안과 사회적 인간의 삶의 본질을 다시 찾기 위한 노력을 쓴 2부 총 4장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저자인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이 책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점은 바로 “자본주의 경제의 자유는 국가를 완전히 경제 외부에 세워 두는 데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는 전환의 테제입니다. 이를 주요한 원칙으로 특히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니다는 점을 여러 인용과 주장을 통해 밝혀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밀턴 프리드먼의 입을 통해 알고 있는 ‘시장 대 국가’의 대결 구도는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매우 부족한 인식이며, 특히 “그동안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본주의는 탈규제와 시장 만능주의로 위세를 떨쳐 소수의 이익에만 봉사했다”고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2부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처럼 이를 간략하게 ‘경제 봉건주의’라고 그녀는 설명합니다. 이 경제 봉건주의는 그 애덤 스미스 조차도 두려워했던 시장 독점체제와 동일한 시장 지배 체제적 대기업들과 이들의 대부분이 자기 자신의 혈통에게 기업을 되물림시켜, 오래전에 자본주의의 이점이라고 여겨졌던, 많은 시민들의 계층 상승의 기회, 전문 기술직의 마땅한 사회경제적 대우, 자본 수입과 노동 수입의 건전한 균형 등이 앞선 시장 지배권을 갖고 있는 많은 대기업들과 부유층에 의해 꽤 배타적인 상황에 놓여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이 스스로 축적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있게한 산파와도 같은 하이에크가 전반적인 국가들의 권력 상태가 아니라 이 윗줄에 경제적 이해를 관리하고 공유하는 실질적 권한을 갖는 국제단체 내지는 연합의 탄생이 시장근본주의로 불리워도 무방한 이 신자유주의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예측했던 것이 오늘날 현실로 드러났다고 저자는 평가합니다. 과거 자본주의의 여명기에는 평범한 접시닦이도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관념을 넘어 실제로도 그러한 배경과 공감대가 충분했지만 오늘의 상황은 ‘경제적 과두집단의 지배체제’와 더불어 견고하게 유리 천장이 매우 두꺼워졌고 독일을 비롯한 수많은 경제가들의 혼인과 제휴, 그리고 그것들이 세습됨으로써 과연 이것을 달리 경제적 봉건주의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될지에 그녀와 비슷한 감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개 과정은 “이미 19세기 3/3분기에 많은 분야의 대기업들이 계약의 자유를 근거로 법적 지위를 갖는 카르텔을 결성”했다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강조하며 이를 통해 대기업들의 시장 지배권을 갖는 행태를 ‘강도 귀족’이라 비판합니다. 1920년대의 대공황을 거쳐 이후 거대한 전쟁과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하면서 당시의 시장 전반에 대한 국가 개입의 절실함은 공감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후 60~70년대를 거쳐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잘못된 이식이 마땅히 필요한 규제 조차도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맞이하여 휴지조각이 되었던 것이 이후 금융 산업 전반의 도덕적 해이와 2008년 뉴욕 발 금융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저자는 국가 당국이 금융 시장을 구제하는 것으로 결정나면서 그동안 금융계 고위층들의 무분별한 성과금 제도와 책임을 지지 않고 자신들의 초기 자본은 무조건 손실되어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식의 시장주의 본연의 경제 논리에 반하는 행태가 뿌리깊이 내려왔습니다. 이에 그녀는 “1321년 카탈루냐에서는 파산한 은행가를 참수형에 처하게 한 법이 제정”되었다면서 물론 이 금융가들을 법 이외의 수단으로 극형에 처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법에 의한 처벌이 요구되었으나 미국의 상황은 결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책에서 논하고 있는 앞으로 미래 자본주의의 이행인 디지털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에 대해 전자인 혁신의 측면과 후자에는 “금융 부문이 국민경제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측면에서 앞으로 이 양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2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기존의 일반은행과 투자은행의 명확한 구분 뿐만 아니라 ‘공공번영은행’과 소유권 개념의 공익적 측면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과정 자체가 사회를 이루고 있는 시민들의 삶 자체를 규정하게 되는 중요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그녀는 밝힙니다. 그동안의 자본주의가 개인의 사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이를 통해 합리성을 실현시켜 사회에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주장되어 왔던 것 자체가 거의 유명무실한 개념임이 밝혀져 왔습니다. 앞으로 전반적인 시장에 규제를 둔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도 “21세기의 경제 봉건주의의 극복이 전제 조건”이며, 포스트 민주주의의 콜린 크라우치도 앞의 저서에서 밝혔듯이 공영 부문을 비롯한 모든 것을 민영화하자는 논리 역시 시장 지배 체제에 있는 대기업들에게는 분명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며, 이것을 용인해 줬을때 기간의 초기 투자금을 뽑아 내기 위해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그 비용 전가를 이러한 경제 봉건주의적 상황에서 국가가 규제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역시 회의적입니다. 바로 민주주의는 이러한 과정에서 크게 훼손될 수 있으며, 수많은 금융 엘리트들이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초기 자본은 무조건 보장해야 되고, 이후 발생한 손실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식의 말도 안되는 욕망을 낳았습니다. 대체로 자연스런 시장 논리에 의해 이익과 손해는 한 사이클인데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실로 시장주의라고 할 수 없는 것이겠죠.

물론 그녀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대부분 옳다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일반의 성과금과 같은 제도들은 모두 철회해야 된다는 것에는 저는 다소 동의하기 힘들었고, 화폐 자체를 공공재로 인식하고 그것을 위한 제안들을 모두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습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시장 경제 내의 수많은 경쟁으로 건전하게 도출되는 것도 분명 무시할 수는 없는데 매번 자본주의에서 경쟁을 필요악으로 여기는 것은 또한 너무 일면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자본주의 상황이 오늘날 크게 변질된 것은 분명해 보이고 모순을 개선해 자본주의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도 지그문트 바우만이 밝힌 대로 인간의 불확실성과 유사한 생각을 피력하고 있는데요. 그동안 우리는 너무 시장의 합리성을 맹신해 왔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소수의 이익에 크게 부합하는 것을 외면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규제가 무조건 나쁜것이라는 인식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다시금 말하는 우리 내면의 고착화 되어 있는 자본과 시장주의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한편의 정돈된 자본주의사를 읽는 것 같은 풍부한 사례들과 설득력 있는 논지는 충분히 읽는 독자들이 공감할 만하다고 받아들여집니다. 끝으로 역자인 장수한씨의 번역은 크게 나무랄데가 없었는데요. 제 추측이 맞는다면 일찍이 대학 입시 때문에 일독했던 동녘출판사의 ‘역사 에세이’이의 저자가 바로 역자가 아닐까 가늠해 보는데요. 그런 의미에서도 이 책이 더욱 반가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가져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유주의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그 체제 안에서 정치는 기업과 자본의 세금을 낮추어 주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폐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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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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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성사에서도 흔하지 않은 폴란드의 유대인으로 또한 역사의 흐름과 맞지 않게도 1970년대 폴란드에서 불어닥친 반유대주의로 인해 영국에 망명해 그곳에서 평생을 보낸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관통하는 모더니티, 소비주의, 액체 근대와 통찰력 있는 사고의 균일한 확장으로 전세계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전세기나 혹은 금세기를 포함해서도 바우만과 같은 우리의 사상적 지표는 사회학 뿐만 아니라 철학을 포함한 다른 분야에서도 감히 찾아보기 힘들텐데요. 그가 2017년에 타계했다고 들었을 때 앞으로도 충분히 많은 저서 활동과 연구로 우리의 탐욕과 방종에 비판을 가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서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같은 일개 독서인이 그러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작이 되어버린 ‘레트로토피아’의 결말이 아직도 간간히 떠오르고 있는 이즈음에서도 앞선 아쉬움은 저에게는 여전한 모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소개할 이 책의 원제는 ‘Wasted Lives : Moderniry and its Outcasts’ 이며, 지난 2004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2008년 번역 출판 되었고, 특히 이 책은 해당 출판사인 새물결에서 내고 있는 What’s Up 시리즈의 4번째 기획물인데요. 필히 입수해서 읽어봐야 되는 책들 가운데 절반정도가 이미 절판인 상태입니다. 출판 시장에 있어서 인문학 분야의 나날이 더해지는 협소함 때문인지 아니면 번역이나 여타 문제로 새로운 판을 내기 위한 준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절판된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도 구해봐야 하는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을 ‘쓰레기’로 내몰거나 심지어 ‘쓰레기 인간’을 만들어 버리는 왜곡된 근대주의의 허상들과 오로지 경제적 합리성에만 집중하고 심지어 그것을 지배 올로기로 만들어버리는 신자유주의와 비판 받지 않는 시장 경제에 대한 사회철학적인 진지한 논의를 벌이고 있는 것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직면할 논제들입니다. 바우만의 글쓰기가 그렇듯이 이 글도 내내 논점이 일관적이고 인용하고 있는 많은 학자들의 논리적 적절성과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는 태도 또한 크게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바우만은 서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위기론이나 탈주론만으로는 이러한 인간의 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총 4장의 주제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통하는 요점들은 대부분 앞에서 제가 밝힌 것과 동일합니다. 사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신자유주의의 큰 흐름은 일종의 ‘지구화 과정’일텐데요. 이 지구화 과정은 특히 자유 시장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경제적 경계를 없애는 데 기여한 논리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큰 이익을 얻는 부류는 말씀을 안드려도 아실테고요. 애초에 루소의 공화주의가 태동한 시기와 성숙된 계몽주의를 통해 시민들은 어떠한 정치적 억압이나 불평등한 상태가 아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발전된 경제학이 정부의 역할 논리를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정치학과 경제학의 경계가 더불어 모호해지기도 했습니다만 본디 정치학의 목적은 여기의 지그문트 바우만이 확정지어 밝히는 것 처럼 ‘인간의 만연된 불확실성’을 제어하는 데 있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바우만이 책에서 언급하는 이 인간의 불확실성에 대해 깊은 숙고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4장인 쓰레기 문화에서 채 1세기도 누리지 못하는 인간의 필멸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인간에게 영속과 지속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며 그것은 끊임없는 과거를 통한 성찰, 즉 오늘날 근대성이 이것을 상실한 일방통행에 대해 꼬집어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경제적 신자유주의 시대에 프레카리아트를 비롯한 바우만이 지칭하는 인간 쓰레기를 각별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쓰레기가 된 인간들, 잉여와 여분의 인간들 즉 공인 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 집단”이라고 풀어내며, 이것을 나중에는 ‘포함/배제’의 게임으로 확장시킵니다. 여기에서 이 쓰레기 개념을 독특하게 차용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자발적으로 쓰레기가 된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에 의해 쓰레기화가 된 것인가? 에 대해 누구나 짐작할 만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장 자본주의의 일상의 ‘만연된 소비주의’를 비판할 때도 나옵니다만 결국 이 ‘인간 쓰레기화’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한 상품의 생산과 소비 또한 권력과 비권력의 구분으로 선진국이 에너지를 수입해 후진국에게 공해와 쓰레기를 수출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시장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을 매우 비판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눈감아 버리는 악의 과정’을 인간 본연의 합리적인 경제인상 및 경제적 합리성을 옹호하면서 이를 통해 인류 모두가 발전해 왔다는 논거를 들이댈 수 있겠습니다만, 과연 이것이 공리주의적 입장인지, 아니면 자본의 배타적 축적을 옹호하는 것인지는 아주 면밀히 살펴봐야 될 문제입니다. 그 주체는 바로 시민이 되어야겠죠.

무엇보다 이 인간 쓰레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바우만이 특히 강조하는 “단지 경제 발전의 부산물일 뿐인 인간 쓰레기의 생산은 비인격적이고,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가 가진 모든 특징을 보여준다”며 인간이 본디 합리적인 속성을 대체로 지니고 있기 보다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사회 역시 짐작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오로지 ‘물질적 권능’으로만 이를 누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의 전제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은 모든 정치 권력의 주된 존재 이유”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이러한 인간의 불확실성이 시장의 힘에 노출되었을 때 어떻게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지에 대해 이미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이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삶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비판한 한나 아렌트나 자꾸만 예외 상태를 만들려고 하는 이익을 가진자들을 비판한 조르조 아감벤 등이나 “자유 경쟁과 평등한 거래의 화려한 막 뒤에는 위계적 인간이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는 이를 넘어서는 바우만의 경고는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경제적 엘리트와 정치 엘리트, 사법 엘리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과두제’의 상황과 엇비슷합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목적으로 노동 시장에 수입해 이제는 사회의 목적 변질로 쓰레기가 되어버린 수많은 이민자들의 문제도 이와 같을 겁니다. 근본적인 이민자들의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이런 상황 자체를 자국의 안보 위협 상황으로 몰아가는 수많은 선진국들의 행태는 우리가 과연 어떠한 삶의 환경에 놓여 있는지 목도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바우만은 레트로토피아에서 ‘타인의 고통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들’이 범람하고 있는 세계라고 일침을 가한적이 있습니다. 이 음울한 우리의 액체 근대가 시민을 고통에 담가버리는 세계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지는 이 책의 결말에서도 뚜렷한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근대가 벌인 ‘잉여, 유기, 거부, 배제, 소모’와 같은 책임 회피를 뒤로하고 과거의 삶을 통해 성찰하고, 시민들 모두가 서로의 네트워크화를 통해 타인의 삶 또한 지켜보고 관심을 갖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지구화와 세계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점은 바우만도 익히 동의하리라 여겨지고요. 대다수의 시민이 동의하지 않는 주입된 삶의 태도나 경제적 합리성만을 유일로 삼아 소수자들의 견제 받지 않는 이익을 옹호하는데나 쓰여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개인의 자유일리는 만무하고, 그나마 우리가 모두 누릴 수 있는 이익을 위해 좀 더 우리 스스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될 사활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끝으로 제가 이 책을 일독하고 느낀 것은 현재 바우만의 유고작으로 알려진 ‘레트로토피아’의 꽤 훌륭한 보론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이 절판된 상태라 독자들은 아무래도 출판사의 재출간을 기대해봐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이 책 역시 살면서 꽤 오래도록 제 기억에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 번 다시 일독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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