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종말, 세계의 탄생
에르베 켐프 지음, 권지현 옮김 / 생각의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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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미앵 출신의 지식인이자 언론인인 에르베 켐프는 환경 및 생태 분야의 전문가로 1970년대 전세계적인 개발 붐과 경제적 발전으로 인한 환경 파괴에 대한 연구와 90년대 후반 프랑스의 대표적 언론인 르몽드에서 활동하며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로 나온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가 전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 일으켜 큰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 책 또한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환경 문제를 다루면서 근래 많은 고위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이른바 표명에 불과한 수단으로 삼아 사실상 과두제에 놓인 현실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원제는 “fin de l’Occifent, naissance du monde”로 2013년에 출간되었습니다. 특별한 경우는 아니지만 책의 원제와 번역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이 거의 의미가 동일합니다.

저자는 도입에서 약간의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요. 이것은 전 세계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불평등한 경제적 상태였다고 밝히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저는 약간의 풍자의 의미로 다가왔지만 하여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짐작될 만합니다. 뒤이어 유럽과 중국의 18세기 상황까지 대략 짚어보면서 그 이후 유럽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과학기술적 및 경제적으로 추월하게 된 이유를 또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저자인 켐프는 이와 관련하여 “유럽과 중국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 기회가 달랐기 때문”이라며 과거 몽고 제국 시절에 중국의 화약 기술이 유럽으로 전래된 것을 인용하면서 중국의 번영이 유럽을 앞지르던 시기가 분명 있었고, 다만 18세기 들어 영국이 산업혁명에 이른 것은 인도와 미국 등의 외부 요인을 완곡하게 들면서 그것들의 차이가 영국의 유럽과 중국의 차이라고 보고 있는 듯 했는데요. 사실 이 부분은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영국이 산업 혁명에 이를수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 시기에 다른 대륙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인식과 특히 계몽적 착취 enlightened exploitation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농경지가 부족한 영국이 기존의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 그것을 만회하고자 석탄의 발견과 함께 그러한 요인들이 산업혁명을 만든 것으로 여기는 듯 한데요. 이에 약간 언저리로 말씀드린다면 우리 역사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일본인들이 원할한 한반도의 식민지적 착취를 만들어 놓은 근대화 기반 시설을 ‘식민지 근대화론’에 빗대어 해석하는 것과 일부 유사해 보이는데요. 약간 이것이 약간 다른점이라면 저자가 말한대로 인도의 섬유 제품의 생산력이 이미 영국에 의한 식민지 침탈 이전에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는 점이겠죠. 조선은 그것이 전무했다는 점이죠.

이 정도에서 제 의견을 정리하고, 일단 그가 유럽 대 세계에 대해 진단하고 있는 관점들이 크게 수긍할 만합니다. “유럽은 산업 혁명 이후 세계 전체를 봤을 때 ‘귀족사회’를 형성한 것”이라는 평가는 종래의 유럽 합리주의 시기에 전반적인 이익의 추구를 유럽이 추구하면서 일종의 귀족과 농노의 관계처럼 세계를 착취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결론에서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선진국들이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연계합니다. 이미 지구 환경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그동안 선진국이 배출해 온 이산화탄소 문제를 앞으로 중국과 인도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려 하고 있고, 중국은 이미 미국의 탄소 배출을 넘어섰죠. 즉, 전세계가 소비 자본주의적 상황에 놓여 있는데, 현재 선진국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휴대전화 및 각종 디지털 기기 소유, 자동차, 적절한 의료 제공 등의 삶의 혜택을 분명 일정 시기가 되면 인도와 중국인들 역시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이미 에너지 소비의 대폭적인 증가와 수산물 자원의 남획이 중국인들의 수요에 의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개인의 소비가 제반 산업과 관련된 자본주의적 권장 사항이 되면서 이것이 개도국이나 신흥국들이 마땅히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켐프는 선진국의 소비 생활을 대폭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사실 타당한 의견입니다. 다만 중국과 인도가 이것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인 경우죠.

그래서 저자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소비 수준은 얼마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30년간 융성했던 각종 산업자본이 대규모 금융 자본으로 전환되었지만 이러한 소비 지상주의는 여전했습니다. 무작정 개인의 소비를 위한 산업의 교묘함은 금융 자본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해도 산업 자본주의의 근본 축이 되었고, 일정 부분 시민들의 소비에 대해 노동자들의 소득을 올려 내수를 크게 키우는 등의 불평등 문제의 해결책으로 연구되기도 해서 이 소비의 문제는 양가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의 절제는 병든 민주주의를 개선시킬 수 있고, 특히 거의 경제 및 정치 엘리트들의 ‘과두제’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 이를테면 ‘우리의 정언적 민주주의의 위기의 시기’에서 매우 시급해 보입니다. 저자는 이에 일차적으로 이런 과두제를 타파하기 위해 시민의 정치 투쟁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탈리아의 경우처럼 총리가 언론을 소유하고 있거나 미국의 루퍼트 머독의 사례 및 억만 장자들이 미국의 티파티 운동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앞서 평가한 대로 사실상 외형상으로는 거의 과두제와 다름없는 민주주의 국가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 자체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증명하는 사례로 여길만 합니다.

그리고 일종의 신기술 개발과 관련된 문제에 “이 기술 개발이 반대에 부딪히면 민주주의적 토론을 건너뛰고 막무가내로 날치기 통과시킬 위험이 있다”고 저자가 경고하는 것은 이런 맥락입니다. 언론이 자본의 지배에 놓여 있고, 특히 경제 시스템이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의 손에 쥐어져 있으면 이익의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민주주의를 수단화 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공상과학 소설의 허무맹랑한 예측이 아닙니다. 이래서 과두제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는 저자의 해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죠.

결국의 우리의 정치는 시민들에 의한 정치 투쟁과 보편적 가치인 공공재를 스스로 수호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제목대로 서구에서 비롯한 근대 산업주의와 소비 자본주의의 맹신이 스스로 절제를 보여야 하지만 과거 프랑스의 사르코지가 이민자들을 모욕하고 배외자 취급을 했던 것과 같은 정치인들의 비윤리적인 측면의 선명성은 너무나 차고 넘쳐 이러한 견고한 카르텔을 극복하고 시민이 효과적으로 정치에 나설 수 있을지 이것은 여타 선진국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대한 문제로 보여집니다. 희화적으로 지젝의 “앞으로 미래는 우리 모두의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그가 암울한 미래만를 맹목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보편적 가치와 공공선 및 시민의 정치 투쟁이 빛을 발하기만 하면 일단 희망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길은 매우 험난하지만 분명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경험이 많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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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구하기 - 미국에서 날아온 하나의 혁신적 개혁 모델
케빈 올리어리 지음, 이지문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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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에서 위대한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의 미국 정치와 민주주의 이론에 대한 사사를 받고, 대학원에서는 찰스 린드블롬의 영향을 받은 케빈 올리어리는 로버트 달이 후학을 가르쳤던 예일대 정치학과의 소위 ‘예일학파’의 구성원이기도 합니다. 이 책 ‘민주주의 구하기’는 그가 오늘날 미국 정치에 대한 분석서이자 세계상의 현대 민주주의적 국민국가의 의의와 한계를 명확하게 짚어낸 탁월한 이론서이기도 합니다. 특히 금권정치와 파편화된 시민 정치를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건전한 대안을 찾아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마땅히 의미있는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2006년에 출간된 책의 원제는 Saving Democracy 이고, 국내에는 2014년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번역 출판을 맡았습니다.

이 책은 마지막 결론을 포함한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서문에 각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본래 공화주의적 이상과 건국 이념을 담고 있는 3장, 오늘날 국민 국가의 민주주의적 한계에 대한 대안을 소개하고 있는 4장의 국가 민회와 대리인 선출, 7장인 민주주의의 대의라 볼 수 있는 대중 주권, 8장은 미국 헌법하의 이러한 개혁이 미칠 영향을 다룬 위의 4개의 장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세심한 부분은 역자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배경지식을 돕기 위한 주를 상세하게 삽입하고 있는 점입니다. 인용된 학자와 사상가의 국내 번역 출간된 여부까지 알려주고 있어서 역자가 이 책에 기울인 노력이 어떠한지 짐작되었습니다. 덧붙여 역자인 이지문씨는 ‘추첨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를 기울여 온 인물인데요. 그가 올리어리의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 태도가 익히 그려집니다.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금권정치와 시민들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의회 정치인들의 노골적인 사적 이익 추구 및 소비 자본주의적 확대로 인한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저자인 올리어리가 몇가지 기울인 분석들 중에 특히 “직업 정치인의 지식과 일반 시민의 지식 차이”, “전방위적인 토론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시민들과 앞서 이런 토론장의 전무”가 크게 와 닿았습니다. 저자가 줄곧 지지하고 있는 ‘숙의 민주주의’에 있어 ‘민회’와 더불어 시민들이 지식을 쌓고 적절한 토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은 사실 그동안 많은 민주주의적 이론가 및 학자들이 입아프게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와 관련하여 부르주아들의 성장에 기여했던 공론장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했듯이, 올리어리 역시 잠재적으로 이러한 시민의 지식과 토론에 대한 노력이 시민 개인 자신에게도 중요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앞서 언급해 드린대로 소모적인 소비 자본주의의 영향력과 “현대 국민 국가에서 민주적 참여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은 모두 제한된 시간 및 관심의 창출이라는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저자의 물음이 우리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이익의 견고화로 봐도 무방한 양당 민주주의 체제 하에 만연된 정치적 불신, 말할 가치도 없는 양비론, 극단의 선동적 정치로 인해 시민들이 장 자크 루소가 말했던 공화주의적 참여, 정치적 주도권,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 등을 더욱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광범위하게 돈이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되었을 때부터, 많은 시민들을 사적 이익을 맹신하게 만들고 이런 풍조를 대단찮은 것으로 취급했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 더욱더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게 만드는 경제적 불평등도 군불을 지핀 것으로 봐야겠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특히 메디슨의 경우는 “심의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게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나오는데요. 권력 분립과 기득권의 권력 집중을 얼마간 배제할 수 있게 헌법의 초안을 만들고 그런 공감대를 초기 독립국인 미국에 이식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시에는 미국의 건국민들이 오늘날과 같은 3억 2천만이 아니었고, 규모의 민주주의로 수렴해 봤을 때, 그러한 이상이 어느 정도 수용될 최소한의 기반이었다고 여겨집니다. 현대의 미국 의회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국민의 수를 의원 한명이 원할하게 대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고, 특히 “이익집단과 결합한 정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 것이고”, “정치 엘리트와 대중의 거리는 더욱더 멀어졌다”는 것은 이처럼 자명해 보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올리어리는 타운홀 회의와 사법부의 배심원 제도를 벤치마킹한 “민회”를 여기에 도입합니다. 이 민회는 ‘추첨 민주주의’의 형태로 발전된 ‘대리인 제도’를 구상하고, 이 대리인 제도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기본적으로 여러 쟁점과 이론을 통한 정치적 재교육을 이행시키는 것으로 그 기본을 닦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약 5천만 달러로 막대한 군사비에 비해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비용으로는 아주 적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 국가 민회가 입법부에 도입된 것이지 행정부의 또다른 기능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의회에 소속된 의원들이 실질적으로 시민들을 만나기 어려운 여건을 들며, 이 대리인들이 유권자와 의원을 중간에서 정치 쟁점적 매개를하고, 국가 안보나 정치적 결단 등 중요한 안건에 있어서 의원들이 대리인들의 의견을 묻는 등의 일반적인 목표와 기능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민회와 대리인 제도가 충분히 기능상 실행 가능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대리인들은 강제적이 아니고, 추첨으로 이뤄진다는 점도 시민들이 많은 정치인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이 부분만으로도 효과적이라 파악 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법 아래에서 단지 평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는 법의 창안자로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올리어리의 논지는 우리 민주주의의 핵심일 겁니다. 하버마스가 유감스러운 경고를 했던 것처럼, “민주 혁명의 활박한 대중 에토스는 전후 시기의 소비문화에 의해 무너졌다”는 그의 평가는 전적으로 시스템이나 제도를 탓하기에 앞서 우리가 스스로 성찰적 삶과 숙고를 스스로 하지 않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자신을 선출한 시민을 위해 일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에 몰두하고 있는 정치 엘리트들의 출현은 전적으로 시스템을 원망하기는 어려운 게 아닌가 하는 관점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그 말대로 정언적 이론이며,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민주주의 아래에서 살고 싶어하는”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20여년은 세밀한 민주주의적 이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되지 않을까 고민해 봅니다.

“시민들이 동등한 상태로 서로 대화하고 공적 이성에 스스로 참여할 때 민주주의는 최고의 형태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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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민주주의 -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콜린 크라우치 지음, 이한 옮김 / 미지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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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 워릭 대학의 경영대학원 정치학과 교수이자 현존하는 사회학자들 중에 저명한 학자로 특히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공공 정책 및 반대의 무분별한 민영화와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평등주의의 무능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연구한 콜린 크라우치의 유명한 논저 ‘포스트 민주주의’를 읽었습니다. 이 책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출간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 학계에 엄청난 이슈화를 불러일으켰고, 특히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엘리트들과 기업인들의 불만을 초래한 바가 있습니다. 사실 작고한 정치학자 찰스 틸리 교수도 언급한 바대로 우리가 현재 직면한 민주주의의 위기에는 경제적인 불평등 문제와 시민의 파편화가 군불을 지피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시장의 배타적인 이해관계가 기존의 정치적 공감대와 토대를 뒤엎어 버리는 결과에 기인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익히 인지하고 계시듯이 이러한 논저들의 끊임없는 출판은 얼마나 이 시기가 전세계적으로 문제인지 가늠하게 해주는 지표일 겁니다. 책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 글의 원제는 Post Democracy 이며, 지난 200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8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인 콜린 크라우치가 밝히는 ‘포스트 민주주의’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글에 의하면 이 ‘포스트’라는 단어는 어떠한 결여된 속성이라는 뜻으로 즉, 결여된 민주주의, 결핍된 민주주의, 원래와 사뭇 다른 민주주의 등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점과 관련해서 저자는 이 포스트 민주주의가 ‘비민주주의’와는 다른 개념으로 분리하고 있습니다. 만약 비민주주의에 관련해 논의를 시작한 거였으면 아예 제목을 비민주주의라고 정했을 거라고 언급하고 있더군요. “오늘날 이 포스트 민주주의의 원인이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적 세계화”라고 저자는 단언하고 포스트 민주주의 자체가 전통적 민주주의와는 기본적인 속성이 완전히 뒤바뀌거나 변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일인 일투표에 의한 대의제 민주주의와 정당주의 및 여론 등의 민주 정치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가면서 대중에 의한 권력이 아니라 엘리트 기성 정치에 대한 심각한 의존, 더욱 노골화되고 있는 불평등 문제가 야기하는 ‘민주주의의 단순한 슬로건화’가 이 포스트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기본 요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총 6장의 구분으로 1980년대의 유럽 즉,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배경 삼아 논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짚고 가야하는 부분은 서유럽과 동유럽의 정치사회적 배경의 차이가 있으므로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주도하에 본디 자유 진영의 민주주의의 체제로 시작한 서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를 기본 매커니즘으로 삼은 점이 자크 랑시에르나 어제 서평을 썼던 샹탈 무페 등과 유사한 전개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크라우치의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학문적 연구에 따른 일관된 논점들이 매우 설득적인 것에 놀랐고,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이보다 명료하게 구분하고 해석한 글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본인도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학자의 글쓰기를 해왔던 그에게 이처럼 관심이 높아졌던 것에 매우 놀라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 각계의 반응을 이 책이 이끈 것은 그만큼 이 논저가 특별하기 때문일 겁니다.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시작된 시기부터 우리의 정치는 “정치 계급과 경제 계급이 결합된 엘리트 집단의 형성”을 생성시켰고, 여기에는 “기업가와 기업 경영진이 정치가와 공무원에게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획득하는 것” 등의 정치경제적인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크라우치의 무서운 통찰력은 “기업 엘리트의 부흥은 창조적인 민주주의 활력의 쇠락과 나란히 한다”는 인식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애덤 스미스도 놀랄 만한 시장의 타락’이라는 소제목으로도 나타는데요. 5장은 이러한 현실 전개와 함께 무분별한 민영화가 대기업들의 배를 불리고, 복지와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평등 가치에 치명타가 되어 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시장 안과 바깥을 구분할 필요 조차 없이 이 안과 밖에 있는 인간들의 모든 행위들을 자본주의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써 “시장이 절대적 원리, 정언 명령이 결코 될 수 없음에도” 모든 시민의 삶을 규정하는 절대적 원리로 자리 매김해 왔습니다. 글이 이렇게 규명되니 저자와 제가 무슨 반자본주의자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겠는데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그 속성상 서로 경쟁할 수 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영역을 무차별적으로 확대하는 수레바퀴의 움직임처럼 신자유주의의 시장 논리가 얼마나 우리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훼손해 왔는지 저자를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현실적 상황은 유럽의 중도 좌파의 지리멸렬과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동일 계열의 정치인들이 정치 사회적인 어떤 대안을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일겁니다. 또한 극우가 제일 밑의 계층의 흥미를 돋우면서 성장해 왔던 것처럼 반대로 앞선 두 정치 세력의 정치적 무능이 이러한 가속화를 더 확실하게 만든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중도 좌파가 패배함으로써 이득을 봤다”는 짧은 한줄은 이 모든걸 설명할 만합니다. 또한 “자신과 자녀들이 복종적인 자세로 기업 엘리트들이 확립해 놓은 경력의 사닥다리를 오르는 일 외에는 어떠한 사회 개선에도 관심이 없도록 부추김을 받았다”는 저자의 냉정한 평가는 이러한 매커니즘이 얼마나 노골적이고 교묘했는지, 그리고 민주 사회에서 시민이 시민 스스로의 감시와 비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삶은 있으나 삶의 알맹이가 없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자기 고백일 것입니다.

결론에 이르러 크라우치는 대안으로 “민주주의 사회와 시민들에게 적절하고 강건한 접근법은 바로 정당이 시민들에게 평등주의적인 정책을 쓸 때에는 지지를 철회하여 처벌을 가하는 것임을 평등주의자들은 깨달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아직은 우리의 정당 정치가 이런 측면에서 필요하다고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세계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세계화는 어떤 것이든 무조건 반대하는 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화’ 운동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표현하며,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인류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정체성 정치를 버리고서는 포퓰리즘 정치에 대항할 수 없다고 보는 관점도 깊이 새겨 들을 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샹탈 무페의 글로 이렇게 인연이 되어 크라우치의 책을 손에 잡게 되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올해 읽은 독서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글이 될 것 같은 에감이 들었습니다. 이미 제가 구입한 이 책이 3쇄를 찍어 요즘같은 출판계의 불황에 적잖이 판매가 되고 있다는 점은 이상하게 뜻모를 안심의 기운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책을 통해 저는 국내에 번역되었지만 현재 절판된 그의 또다른 글인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를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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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샹탈 무페 지음, 이승원 옮김 / 문학세계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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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으로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교수 및 민주주의 연구소 소장,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한 저명한 이론가로서, 남편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공저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이 대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킴과 동시에 기존의 민주주의적 기초인 자유와 평등을 개조해 시민운동에 포함된 정동적 사회운동에 따른 급진적 민주주의의 개념을 만든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샹탈 무페의 최근 논저,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를 일독했습니다. 그녀에 대한 소개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뛰어난 명저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이와는 별개로 국내에는 그녀의 다른 논저 ‘정치적인 것의 귀환’ 또한 많은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민주주의의 역설’이라는 글을 읽고 싶었는데요. 제가 때를 놓쳐 지금은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 책은 ‘For A Left Populism’ 이라는 원제로 2018년에 출간된 것을 문학세계사에서 최근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헤게모니 구성을 위한 샹탈 무페의 제안’이라는 명확한 부제를 달고 있는데요. 번역도 매우 만족스러워, 개인적으로는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책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부정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포퓰리즘의 의미 때문에 제목에 대한 독자들의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요. 즉, 책의 제목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요구에 대한 포퓰리즘적 열망’과 신자유주의 시기에 적절한 대안이 되지 못한 진보와 좌파에 대한 대안이 되는 사회 헤게모니적 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파 포퓰리즘이 민주적 열망과 요구를 가진 대중들이 외국인 혐오로 접합되는 것처럼 이 ‘민주주의적 요구’ 좌파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라는 뜻의 의미입니다. 논의의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는 무페가 자신의 유명한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밝혔던 급진적 민주주의의 확대를 주안점으로 놓고 이것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이론적인 논리의 확대를 이 책 전반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칼 슈미트와 같은 이들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동시에 수용될 수 없는 서로 경쟁적인 가치로서 이들의 공존이 사회에서 거의 불확실하다고 보는 의견을 언급하고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서 대중에 의한 권력과 평등주의를 끊임없이 훼손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대를 일종의 ‘포스트 민주주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포스트 민주주의란 개념은 정치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의 동명의 논저에서 인용된 것으로 좀더 면밀히 풀어서 해석하면 대의제 민주주의와 수많은 이익단체들, 금융 자본주의하에서 금융 권력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과두제 형태로 사회 기득권 체제가 공고화되어 우리의 민주주의의 본질이 악화되어 왔다는 이론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무페는 “평등과 대중 권력이라는 종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2장에서 마거릿 대처의 ‘대안은 없다’에 따른 신자유주의의 속성에 대해서 그녀는 “신자유주의의 경우 우리는 자유주의의 독특한 형태와 금융자본주의를 접합시키는 사회 구성체를 다루고 있다”고 해석하고 2차대전 전후 케인즈식 사회경제적 규약이 강제로 제거되어 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개인의 자유, 특히 경제적 자유에 대한 보장을 강화시킴으로서 이런 헤게모니적 변화가 노동자들을 비롯한 대중 집단의 사회 안전 보장 철폐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정치 원리와 사회경제적 실천’ 조화를 이루어 개인의 평등과 사회 구성원의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지만 이것이 전반적으로 ‘전회’되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같은 경우는 루즈벨트의 정책과 민주당과 공화당의 민주적 합의에 대한 전통적인 공통의 공감대가 뒤이어 출현한 공화당 정권에 의해 토대가 강제로 제거된 것과 유사한 사례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레이건과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쌍두마차가 달리 나온것이 아닐겁니다.

이러한 대처주의의 교훈은 앞서 말한대로 신자유주의가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크게 훼손했고, 이런 결과에 대한 인식론적 해결책으로 “자유주의적 담론이 가진 보편주의에 대한 경향성을 전복시키기 위해서는 대중을 구성하고 평등주의적 실천을 수호하는 민주주의적 논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더불어 이 점은 3장의 이 책의 중요한 논점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는데요. 그녀는 이 과정에서 ‘반자본주의적 차원이 포함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러한 반자본주의적 투쟁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파악될 것으로 단언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반자본주의적 투쟁에 대해서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사회 전체적으로 기울이면서 ‘시민의 공감대화’가 필연적으로 이뤄져야 동시에 민주주의 가치가 더욱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불명확하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모순의 개선에 돌입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나 고민해봤습니다.

결론에서도 보이듯이, 이 책은 유럽의 현실과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실패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스스로 대의 민주제의 확고한 지지자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지만 ‘대표성’과 관련하여 대중과 이 대표성에 대한 관계를 인지하고 있는 것은 논리의 역설이라기 보다는 현실적 인식에 따른 결과라고도 보여집니다. 또한 대중들의 좀 더 나은 사회가치를 위한 정동적 움직임데 대해서도 강조한 것은 이것들 자체가 급진적 민주주의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먼제 실현되어야만 하는 전제성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극좌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점도 독자들이 그녀의 주장을 오독하지 말아야 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포퓰리즘 계기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계기가 또한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와 같은 현실 인식이 나오게 된 이유가 아닌가 고민해봅니다.

끝으로 글 서두에 포퓰리즘이 따로 정치 레짐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미국과 남미, 유럽에 나타나고 있는 이 포퓰리즘적 정치 현상을 계속 끊임없이 비판적 연구와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이론적 노력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개인적으로는 판단하고 있는데요. 그녀는 포퓰리즘에 대한 무수한 소모적 논쟁 때문인지 너무나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는 투의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앞뒤 맥락을 찬찬히 살펴봐도 이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저는 그녀와는 달리 이 포퓰리즘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아주 중대한 위협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며, 시민의 재교육과 정치 환기, 정치 참여가 어떠한 양비론이나 정치적 허무주의에 가로 막혀 좌절되지 않아야만 이 포퓰리즘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초입인 12페이지에 오탈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번역의 질을 감안한다면 이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느껴집니다. 편집의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하나 마무리가 제대로 안되어 출판된 것은 왠지 아쉽게 느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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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2-16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동일한 시기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모 친구님께도 즐거운 독서가 되셨기를 기대해봅니다 ^^
 
정치적인 것의 개념 - 서문과 세 개의 계론을 수록한 1932년 판
카를 슈미트 지음, 김효전 외 옮김 / 살림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독일 출신의 공법학자로서 나치스의 법학 초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오늘날에는 여러 의미로 주목을 받고 있는 카를 슈미트의 논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일독했습니다. 슈미트는 지젝과 바우만을 비롯한 여러 진보와 좌파 학자들에게 널리 인용되고 있는데요. 슈미트는 다소 위험한 국가주의자 및 결단주의자로 해석될 수 있을 만큼 근래 민주주의에서는 꽤 불안한 인식적 요소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많은 학자 및 사상가들의 입에 오르 내리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레오 스트라우스와 조르주 아감벤의 기여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레오 스트라우스는 조지 W. 부시의 임기 당시 백악관과 공화당의 주요 정치 세력이었던 ‘네오콘’의 대부로 그가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하자 동시에 카를 슈미트 역시 미국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근래 조명받고 있는 ‘21세기 백과전서’의 아감벤 역시 그의 ‘예외상태’ 개념에 대한 독창적인 카를 슈미트의 독해는 학계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 저는 최근까지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련된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카를 슈미트가 심심찮게 어록으로 등장하는 것을 목격했는데요. 이 점은 확실히 민주주의 이론에 있어서 상당히 복잡미묘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국내에는 2012년 번역 출간이 되었는습니다. 물론 국내 최초 출간은 아닙니다. 서문은 1963년 판의 서문이 실려 있고, 1932년 판의 원전을 기반으로 새롭게 출판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3개의 계론과,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해를 실어 기획으로는 정중한 모양새를 갖춘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다룬 총 8장의 소주제와 뒤이어 중립화와 탈정치화의 시대를 다룬 1929년 바르셀로나에서의 연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단 슈미트의 이 논저의 주제는 ‘강력한 국가 내지는 국가주의를 위한 일종의 정치 이론서’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극명한 이분법론적 이해 수단인 동지와 적을 그가 정치학 기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조와 그렇지 않은 이념과 사조를 적절하게 비판하고 사실상 1932년 이후의 어떤 자유주의의 퇴색과 더불어 기술의 진보에 따른 현대 국가의 개념성에 부정적 시각과 비판을 강력한 국가 체제에 대한 반대 인식으로 논리적인 범주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매우 애매하게도 부르크하르트의 입을 빌어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권력은 너무나 커서 국가와 사회 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끊임없이 논의 가능하고 변경 가능한 것으로서 유보하려고”라는 등의 뒤에 나오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관과 민주주의의 다양성, 더 나아가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앞서 설명했던 ‘강력한 국가체제 내지는 국가주의’에 대한 당위를 슈미트는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암울하고 부정적인 역사관이 한 몫 거들고 있는데요. 프랑스 혁명 이후의 나폴레옹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점,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부분에서도 일종의 이상주의나 독일의 초기 법학자 푸펜도르프의 세속화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하는 등의 예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국가적인 개념과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 일치했던’ 시기가 있었고, 본인이 독실한 가톨릭 신도여서 계몽시대 이전의 신앙과 복음이 주된 개인의 관심사였던 시기에는 도덕적 및 윤리적 관점에 대한 이견이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919년 이후 유럽에도 민족을 바탕으로 ‘국민국가’가 속속 나타난 것과 비슷하게 이 국민국가를 있게 하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과연 전쟁과 평화 양 극단의 해결책이 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5장에서 그가 중요하게 주장하는 “법의 지배라든가, 나아가 법의 주권성 같은 표현법에 대해 언제나 약간의 상세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정치적 사유의 측면에서는 당연한 것이며, 법의 지배란 즉 특정한 현 상태의 정당화에 불과하며”라고 일축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루소에 의해 고안된 주권에 의한 정부, 법에 의한 지배를 명확히 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의 출현을 막고자 했던 이 초기 민주주의 이론에 대한 거의 전면적인 부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4장에서도 “국가는 그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이익사회들과 동위이자 동렬에 있는 하나의 이익사회가 된다”고 명시하며, 이것은 국가이론의 ‘다원론’이며, 그 이론의 예리한 의미는 전부 국가에 대한 예전의 과대평가”라고 언급하고, 이러한 이익 사회에 대한 정치적 통일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불문명하다고 밝히는데, 이것은 일찌기 토크빌이 개인과 정부의 무분별한 이익화에 대한 경고와 그 궤가 비슷해 보이지만, 이 이익사회의 출현이 다원론의 입장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익사회와 다원론을 연계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대략 보여집니다. 이 부분은 홉스를 사실상 비판하고, 스펜서의 역사관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경제적인 권력적 지위의 개념이 생길 수 있다는 것”과 “오늘날 기술적 발명은 엄청난 대중지배의 수단이 된다는 점” 무정부주의에 대한 견고한 비판과 “인도적, 도덕적 진보는 누군가의 관심을 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진보의 부산물처럼 보인다”는 평가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직면한 자본주의적 엉킨 실타래에 대한 묘한 상황과 언술적으로 일치가 되어 보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사회와 정치적 진보에 대해 그가 일정 부분 회의의의 시각으로 그린 것은 아마도 앞선 다원주의화 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불편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요. 여기에는 “오늘날 기술적 발명은 엄청난 대중지배의 수단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자유냐 예속이냐의 측면을 인정하고 오히려 앞으로 우리의 자유를 어떤 식으로 지켜나가야 할지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의 진보’를 독특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술의 정신은 무시무시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종의 ‘자연적 한계’에 도전”으로 여기는 점도 이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꽤 현재 상황에 대한 해석으로 설득력이 높은 경제적 계급에 대한 인식과 기술의 진보가 ‘자연 상태’의 한계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대중 지배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은 슈미트의 비범한 통찰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감안한다면 일견 단순한 해석상의 경제적 계급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 대두의 가능성일지라도 몇가지 논리의 일관성이 부족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역자가 후기에서 이러한 슈미트의 사상이 무분별하게 여러 경로의 해석상 차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이러한 해석의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뒤에 레오스트라우스의 주해에서도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종종 슈미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그가 자주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종사하여 온 것” 등의 해석은 슈미트가 이것을 위해 글을 여러 정치적, 역사적, 철학적 관점에서 논의해 온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물론 스트라우스 개인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홉스를 비판한 것이나, 루소를 다소 평가절하하고, 진보에 대한 점진적 비관과 특히, 적과 동지라는 개념을 맨처음 도입하고 이것을 정상적인 사회구성론의 한 방편으로 보았던 것은 즉 자유주의 내지는 인간 자유의 진보를 대척점으로 여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며칠에 걸쳐서 이 책을 독해하면서도 뭔가 불편한 기분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런 요인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슈미트는 나치스와의 관련 내지는 전쟁 책임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소련과 미국에 의해 체포되지만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게 되는 이력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최근에 서평을 썼던 ‘정치 신학’과 이 책 역시 그의 학문적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저버릴 수 없는 개인적인 복잡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내에 그의 이 글을 한 번 더 정독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저의 자기 고백은 이 서평이 너무 부족한 것임을 자임하는 꼴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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