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세크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인경 옮김 / 꿈꾼문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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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에서 유명한 고리대금업자라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 몇이 있다. 우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계약대로’를 외치며 한 파운드 살덩이의 소유권을 주장했던 샤일록이다. 다음으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속 에브니저 스쿠루지다. 그는 다행히도 과거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을 통해 캐릭터 변화에 성공한다. 다음으로 <곱세크> 속 동명 주인공을 꼽겠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곱세크(김인경 옮김, 꿈꾼문고, 2020, 1844, 182쪽 분량)』 는 황금만을 절대 가치기준으로 삼고 일평생 매진했던 인물이다. 소설은 과도한 세부묘사가 비현실적일지언정 분명 존재할법한 하나의 표상을 완성한다.

발자크는 “작가는 시대의 비서”라고 했듯이 2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장·단편소설 90여 편을 유기적으로 엮어 총서 <인간희극>을 발표했다. <인간희극>은 크게 ‘풍속 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의 세 계열로 구분되고 90여 편의 소설로 구성되어 약 200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서사시로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인간과 사회를 관찰하는 사실주의의 방식을 확립한 발자크는 소설의 제재를 넓히고 개념을 확대해 사실주의의 시조가 되었고, 자연주의의 선구자로서 플로베르, 졸라, 도스토옙스키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데』, 『나귀가죽』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소설은 소송대리인 데르빌이 드 그랑리외 자작부인의 살롱에서 들려주는 고리대금업자 곱세크에 대한 평이자 물질중심주의 세상에 대한 적나라한 관찰기다. 곱세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에피소드가 고리오 영감의 딸인 드 레스토 백작부인의 애정사건과 이에 심신이 타격을 받고 마지막으로 지키고자 했던 백작의 재산 문제다. 자작부인은 열 일곱 살인 딸 카미유의 마음이 드 레스토 백작부인의 아들에게 기우는 것을 경계한다. 백작부인은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에서 유명하고 또 위험하기 때문이다. 백작부인은 남편이 모든 재산을 차례로 곱세크에게 매각하는 일의 속내를 가늠하며 자녀들을 위해 되돌리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데르빌은 그녀가 죽어가는 남편의 신음을 엿들으면서 민법을 연구한다는 걸 알게 되자 “음모가 정교해지거나, 계획이 형성되거나, 모략이 꾸며지거나 하는 그 동기는 늘 재산”(p.110)임을 재확인한다. 또한 뛰어나다고 알려졌던 사람 안에 깃든, “인간적인 감정을 모두 소거”(p.112)시킨 정신적 괴로움의 파괴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럼에도 데르빌은 젊은 에르네스트 드 레스토 백작이 합법적으로 재산을 보장받게 되었음을 증명함으로 새롭게 시작할 청춘의 앞 길을 터준다.

진정한 주인공인 곱세크 차례다. 곱세크는 데르빌이 성공적인 경력을 쌓는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데르빌은 자기 인생의 소설적이었던 시기, 스물다섯으로 돌아가 곱세크를 불러낸다. 곱세크는 ‘들이마시다’라는 단어를 상기시킨다. 작가가 묘사하는 그의 외모는 내면으로 빚은 물상과 흡사하다. 이름이나 외양이나 심지어 플루트 연주 같은 목소리까지 견고한 틀과도 같다. 모형인간, 어음인간(p.17)이면서 때론 “한 남자가 관여할 만한 확실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물질적인 사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일세. 그 사물은······ 바로 ‘금’이네.”(p.28)라고 황금론을 편다. 금이 아닌 다른 것에 주의를 빼앗기는 자들은 미친 자들, 병든자들, 바보들, 얼간이들, 멍청이들, 즉 “파리 사람들의 삶”(p.30)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내 눈은 하느님의 눈과 같아서”(p.46)라는 선언적 문장으로 권력과 쾌락, 인생을 정의 내린다.

그가 막심 드 트라유 백작을 꿰뚫어보듯 하는 말은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모순적인 양면이 한 사람에게 깃들기에 “양성동물”을 닮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이중성을 열거할 때 인간의 보편성이 떠오른다. 곱세크는 악한 같지만 “볼테르의 동상과 흡사”(p.68)하고 볼테르와 비슷한 미소를 띠고, “외견상 고리대금업자”일지언정 그의 안에는 두 종류의 인간, “구두쇠와 철학자, 왜소한 인간과 위대한 인간”(p.94)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소설은 어떤 면에서 불가사의한 인물인 곱세크에 대해 레스토 백작부인 사건 이후 임종까지를 책의 말미 십 여 페이지로 간략하게 요약한다. 요약보다는 “농축”이 맞는 표현이겠다. 멸하려는 자와 살리려는 자, 썩을지라도 그러쥐겠다는 자와 돕고 나누기 원하는 자를 곱세크와 데르빌에게서 찾을 수 있다.

『곱세크』는 19세기 전반 프랑스 사회의 특권층, 귀족계급, 돈과 권력의 얼굴 뿐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기록한다. 독자는 첫 문장에서 명시한 시공간적 배경으로 이동하여 하룻밤이라는 소설 속 시간동안 파리의 희로애락을 엿보게 된다.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액자식 구성은 화자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경청하는 인물들처럼 독자의 주의도 사로잡는다. 같은 날, 동일한 장소에서 이야기를 매듭지을 때 까지. 읽는 즐거움은 인물에 이입하고 공감할 때,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마음이 일 때 경험하게 된다. 동시에 입장을 정하고 논리를 펴는 문장의 리듬감, 사례와 근거, 비유와 상징을 통해 숙고하게 만드는 문장 자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곱세크의 마지막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문학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인간의 죽음 중에서 가히 인상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돈의 지배는 모든 시대의 화두이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극적일 것이다. 매일 열여섯 시간씩 글을 썼던 작가 자신에게도 주요 동기였다. 반드시 재물이 아닐지라도 자기 꼬리를 무는 뱀처럼 어리석게 침몰하는 곱세크가 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탐심은 연막을 뿌리며 늘 새롭게 유혹한다. 한 번만 더, 아직 부족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겸손에서 비롯하는지 욕망에 근거하는지 살필 일이다. 서평 쓸 시기를 놓쳐 재독한 덕분에 이야기의 유려한 전개에 주목할 수 있었다. 한가지, <곱세크>가 국내 첫 번역 출간되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지만 잘린 책 표지가 개성 있고 아름다울지라도 본문이 훼손될까봐 노심초사다. 그게 중요한 사항인가 싶겠지만 이런 독자도 있다.(와, 모서리 헐었어! 어쩔거냐! 중얼대는) 초독이 좋았다. 역시 발자크! 재독하니 더 좋았다. 그렇고 말고 발자크! 발자크는 전작 읽기로 나아가보자.

책 속에서>

인생이란 돈이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기계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수단들은 언제나 그것의 결과들과 혼동된다는 점을 알아두게. 사실 자네는 결코 감정과 감각, 정신과 물질을 구별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금은 자네들이 사는 현 사회의 정신이라네.(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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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늘 웅진 모두의 그림책 54
조오 지음 / 웅진주니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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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의 『나의 그늘(웅진주니어, 2023)』이 싱그러운 연둣빛 표지로 세상에 나왔다. 연두는 풀색이라 희망적이고, 햇볕이 스민 듯 조금 더 밝은 양지도 자연스럽다. 제목이 나의 세상이나 나의 태양처럼 기운찰 듯도 한데 『나의 그늘』이다. 시멘트 색, 어쩌면 먼지 색 『나의 구석』이 세상에 나온 지 3년여 만에 다시 찾아온 주인공 까마귀가 반갑다. “오”라는 외 글자가 작가의 필명인지 모르겠으나 까마귀는 그의 분신일까 추측해본다. 어쩌면 그보다는 우리 모두의 이명(다른 이름)이다, 에 무게가 실린다. 무엇이 되었건 분위기는 낙관적이다. 면지는 까마귀의 구석집 창을 보여준다.

『나의 구석』에서 애지중지 돌보았던 화분은 잘 자라 장 밖에까지 잎을 뻗는다. 화분을 내와 집 밖에 옮겨 심으니 잠시 누울 그늘이자 잠시 기댈 등받이가 되었다. 지나가던 새들이 쉬는 건 좋지만, 나뭇잎을 따먹는 고양이는 두고 볼 수 없다. 우산을 무기 삼아 고양이에 맞선다. 문제란 원래 예기치 않게 등장하고 연속해서 밀려온다. 이번에는 큰비다. 기지를 발휘해 나무를 붙들었지만 잎은 축 늘어져 버렸고 돌아서는 까마귀 어깨도 축 늘어져 버렸다. 두문불출의 시간, 자포자기의 심정일 때,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새가 있었다. 바로 『나의 구석』 말미에 인사 나눴던 친구다.

나무에 밧줄 지지대를? 친구 새가 했다. 식물 영양제를 꽂아둔 깨알 디테일? 친구 새가 했다. 풀도 심는다, 친구 새가! 그는 까마귀와 다른 새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고양이까지. 바닥의 연두는 영역이 넓어지고 색이 짙어진다. 풀은 무성해지고 나무는 자라고 우정은 깊어지며 휴식은 꿀맛이다. 하지만 문제란 원래 예기치 않게 등장하고 연속해서 밀려온다. 애석하게도, 역대급 스케일로 나타날 때 자비라곤 없다.

흥 많은 까마귀, 뮤직 큐에 몸을 맡기던 까마귀는 다시 한바탕 춤사위를 벌일 수 있을까? 에라 모르겠다 널브러져 있던 까마귀가 다시 기운을 추스르게 될까? 시간이 흘러, 너무 멋진 거 아닌가! 26층 나무집, 아니 현재 156층까지 나온 나무집(대체 어디까지?) 부럽지 않다. 환상적인 결말이 과연 후속작이 나올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은 전개가 까마귀에게 흠뻑 이입하게 만든다. 까마귀의 희로애락, 아연실색, 쓰라림, 희망, 기대, 비상까지 한 권의 그림책 안에서 독자는 동고동락한다.

아기자기한 그림,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까지 작가의 붓질은 허툰 구석이 없다. 그 정성이 독자 마음에 온기를 나른다. 이제 마지막 뒷면지다. 나 왜 철렁하는가! 겨울인가? 회색빛이잖아. 제본선에 있어야 할 나무는? 다음 이야기의 복선일까? 암시일까? 그림책 이론서를 너무 읽었다고 자체 진단하고 침착에 힘쓴다. 작가는 “제 그림도 누군가에게 다행인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다행은 물론이고 행복이고 행운이다. 이 말로 마치련다. 이 사랑스런 그림책을 피해가지 않는 당신이 바로 승자다!




(출판사 도서 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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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구석 웅진 모두의 그림책 29
조오 지음 / 웅진주니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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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까마귀를 보니 막내딸이 생각난다. 분초를 아껴야 할 고3이 문 닫고 뚱땅거리고 나면 책상이며 책장, 서랍장 등 가구 위치가 다 바뀌어 있곤 했다.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함이라지만 네가 이럴 때니 엄하게 나무랐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넌 힘도 세다! 기운 아껴서 공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는 드디어 “나의 구석”이 생기자 메트리스와 까마귀의 것과 흡사한 책꽂이와 화이트 러그를 채워 넣었고, 학교에서 밤새워 물레를 차며 도자기 머그잔을 구워 차를 우려 마시고, 책을 사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과제를 한다. 창을 크게 열기 위해 열심을 낸다.

나만의 공간, 자기만의 방은 인간이 충족해야 할 기본적인 욕구에 속한다. 매슬로우의 유명한 피라미드 가장 하단에 위치할 것이다. 세상과 나로부터 경계를 풀고 묵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는 곳이 있는가? 그곳이 사방 트인 펜트하우스가 아니어도 좋다. 빛이 덜 드는 반지하 창고라도, 먼지 자욱한 다락방이라도, 나무 책상 하나 밀어 넣은 층계 밑 골방이라도 주인의 마음은 부유할지 모른다. 조오의 『나의 구석(새의 노래, 2020, 64쪽 분량』은 작가의 첫 그림책으로 공간에 대해서 말을 건네지만 내면의 힘을 생각하게 한다.

세로로 긴 판형의 그림책은 표지에서 그늘진 구석을 보여준다. 앞표지의 제목은 볕이 들지만 뒤표지는 침침하고 을씨년스러운 맨 구석이다. 구석만 드러난 타이틀 표지를 지나 첫 페이지에서 주인공은 한 곳을 응시한 채 등장한다. 독자를 등지고 구석을 향한다. 그 시선에 이끌려 독자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벽과 벽이 만나는 곳, 하지만 구석의 변신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힘껏 밀고 온 메트리스가 구석에 자리를 잡으니 제법 안정감이 느껴진다. 하나씩 추가하는 물건은 주인의 취향을 드러낸다.

“뭐가 더 필요할까?”라고 자문하더니 까마귀는 노란 크레용으로 빛 머금은 도형을 그려 넣는다. 화사한 벽화가 완성된다. 그 와중에 화분에 물을 주고 돌보는 일 역시 게을리하지 않는다. 책도 읽고 차도 마시고 춤도(어쩌면 운동) 추는 까마귀의 시간은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더 이상 구석은 찾아볼 수 없다. 주인의 개성이 돋보이는 아늑하고 멋진 공간, 아지트가 완성된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시 한번 묻는다. “그래도 허전한데······.” 구석 옆에 창이 나니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된다. 나와 내가 잘 지냈는데 이제는 나와 너도 잘 지낼 차례다. 서로 눈 맞추고 인사 나눈다. 함께 할 우리가 생길 테고, 초대할 벗이 늘어갈 테고, 구석은 사랑방이 될지 모르겠다.

『나의 구석』은 글 없는 그림책에 가까워 이미지가 스토리를 이끈다. 간략한 텍스트는 잠깐씩 시선을 보충한다. 세로로 긴 판형의 제본선을 중심으로 흰 벽이 세워지고 선 두 개가 만나 바닥이 된다. 독자는 까마귀의 구석에 초대받은 즉시 물건이, 색이, 음악과 빛이 보태질 때 일어나는 변화에 몰두한다. 각각의 변화는 대단하지 않지만 사소함이 쌓이자 변화는 성장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설렘으로 다음 장면을 기대케 한다.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아끼고 사랑스럽게 공들일 때 돌덩이는 보물이 되고, 빛은 퍼져 온기로 닿는다. 뚜벅뚜벅 나아가는 움직임이 사랑스럽다. 천천히 읽고 거듭 읽어야 할 그림책이다. 혼자 읽고 여럿이 같이 읽어야 할 그림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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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 나에게 친절하고 싶은 당신에게
이상희 외 지음, 김경태 사진 / 새의노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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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사진:김경태, 새의노래, 2023, 288쪽 분량)은 이상희, 최현미, 한미화, 김지은, 네 명의 저자가 공저한 그림책 에세이다. 다정함에 초점을 맞춘 그림책 서평 모둠, 즉 소개이자 추천의 책이기도 하다. 독자는 한 권의 책을 소개받을 때마다 미묘한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리게 된다. 때로는 큰 폭으로 울렁이고, 때로는 잔잔하고 끝없이 일렁이는 경험을. 발견하는 기쁨은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옅어지지 않는다. 저자들을 지금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어른의 그림책 읽기'판을 다진 사람들이라고 칭하기도 한다.(출판사 소개) 시인이자 그림책 작가, 번역가 이상희, 기자이자 작가인 최현미(너무 좋아하는 책<아이스크림 여행>번역자라니 갑자기 만면미소가 피어난다), 어린이책 평론가이자 출판평론가 한미화, 아동문학평론가이자 대학 교수로 저술과 함께 좋은 책을 찾아내 독자에게 안내하고 있는 김지은까지 그림책 현장을 지켜온 분들이다. 그림책의 아름다움을 전했던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2016)』의 다음 이야기는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으로 알차게 묶였다.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은 다정함을 주제로 한 그림책 서른 권을 네 명의 저자가 번갈아 소개한다. 글마다 그림책 앞 표지 사진에 한 면을 할애한다. 펼친 본문 두 면을 뽑아 책 안의 책처럼 삽입해서 직접 대상도서를 읽고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1장,“나에겐 소중한 기억이 있어”에서는 기억과 추억을 불러낸다. 글은 책의 물성, 형식도 다루지만 등장 인물들의 서사에 깊이 이입하며 책 속 시공간 여행에 온전히 빠져든다. <할머니의 식탁>에서 이상희는 오무 할머니는 스튜 냄새 뿐만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모성이 무수한 ‘다정’의 입자를 발신”(p.30)했을거라고 전한다. 심리학자 베티나 파우제의 책으로부터 코는 평화의 대변인임을 실감하고 팬데믹이 퍼트렸던 후각, 미각의 기능장애마저 나을 것 같다고 한계를 확장한다.

김지은은 조던 스콧의 <할머니의 뜰에서>를 찬찬히 보여준다. 보살피던 이가 보살핌을 받게 되는 역할 전환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예외란 없다. 고요하고 따듯한 서사를 따라갈 때 깊은 숨이 쉬어진다. “여러분은 할머니의 다정함을 무엇으로 기억하고 있나요.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어떤 시간보다 빨리 사라져버립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지금 어서 전화를 드려보세요. 더 많이 웃고 손잡고 자주 안아드리세요. 할머니에게는 그런 웃음과 포옹이 가장 큰 선물일 거예요.”(p.39) 이 부분을 사진 찍어서 딸들에게 보냈다. 할머니에게 전화 드리자, 얘들아.

2장,“내 곁에 다정함이 살고 있어요”에서는 우리 마음에 안부를 묻는다. 근심으로 시무룩해 있는지,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귀찮은지, 다시는 날아오를 수 없다고 느끼는지 물으며 마음을 살핀다. 버나드 와버의 여운 깊은 글과 이수지의 찬란한 그림이 함께한 <아빠, 나한테 물어봐>가 반갑다.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책꽂이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도서관까지 함께 간다. 3장, “나를 믿고 뭐든 해봐요.”편에서는 나도 한 번 해볼까, 라는 마음이 들 것이다. <물 속에서>는 물과 한 몸되는 기쁨이 생생하고 <에페의 심부름 가는 길>은 에페의 심부름에서 ‘오디세이아’같은 서사시(p.151)와 같은 씨앗을 발견하게 된다. 미션완수의 과정과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4장 “다정함을 만나러 가요”에서는 본격적으로 다정함을 감각한다. <오토의 털 스웨터>는 그림으로, 스웨터의 무늬로 오로라를 만난다. 오로라는 하늘에 떠있는 장관일 때 보다 아껴주는 마음, 진실한 관계를 증명하는 매순간 빛난다. <여행의 시간>, 몰랐으면 어떡할 뻔 했나! 마지막 5장 <너에게 다정하고 싶어.>에서 여섯 작품을 나누며 다정한 세상으로 쑤욱 나아간다.

한때 힐링이라는 말이 대표 꾸밈말로 쓰였던 것처럼 이제는 다정함이구나 싶었다. 새삼 브라이언 헤어와 바네사 우즈의 선한 영향력에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다정함에의 갈망은 언제나 생존본능처럼 우리 곁에 존재했던 것 같다. 이미 알았을 테지만 각성하고 끌어낼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던 계기가 두 저자인 셈이다. 다행이다. 기타 그림책 안내서와 이 책의 가장 눈에 띠는 차별점은 접근하는 방식에 있다. 관점인데, 그들이 “육아를 학습을 치유를 어떻게 얼마만큼 도울 수 있다”는 시선이 도구로서의 그림책, 목표 지향적 읽기를 내포하고 있다면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은 다른 결을 보여준다. 즉 그림책의 본질, “원형질”(p.9)인 “다정”에 집중한다. 그림책 세계에 고스란히 빠져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발화하는 감동을 나누겠다는 방향대로 책은 안온한 파도 속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구입할 책 장바구니가 찰랑찰랑 차오를 차례다. 이미 알았지만 재발견함으로 손 가까운데 끌어둘 작품과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 명작이 한 곳에 모였다. 저자들의 그림책 사랑과 연결하고 발견해온 열정, 기록하고 나누어준 정성 덕분이다. 그 정성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양장 표지(겉싸게를 분리하면 표지가 무척 아름답다)와 넉넉한 판형 등 장정에서, 작가 김경태의 사진에서, 활자의 크기와 여백까지도 독자를 배려했다. 처음에는 그림책 입문자를 위한, 필요할 때 찾아볼 ‘참고서’격이겠다고 펼쳤다. 그런데 마치 교과서처럼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때로 낭독하며, 때로 멈추며, 때로 수첩 모퉁이에라도 옮겨 적으며! 폭력과 슬픔이 만연한 세상일지라도 이 다정한 씨앗이 단단한 동아줄처럼 우리 삶에 드리워지기를.

책 속에서>

맛있는 복숭아를 만나거든 린 할머니를 떠올리기로 해요. 저온에 약하고 쉽게 무르는 복숭아는 보관이 어렵습니다. 냉장고에 두어봤자 단맛이 덜어지기만 합니다. 물론 병조림을 할 수도 있지만 잘 익은 복숭아와는 맛이 다르지요. 복숭아는 잘 익었을 때 남김없이 먹어야 합니다. 복숭아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린 할머니처럼 말이지요.(린 할머니의 복숭아나무/한미화/p,123)

여름은 길고 무더위는 견디기 어려우니 우리에게는 서늘하고 우아한 유령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윌리엄 볼컴이 1970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작곡한 음악 <우아한 유령Graceful Ghost>과 함께 이 그림책을 감상하시기를 권합니다. 여러 연주가 있지만 제가 추천하는 것은 양인모와 홍사헌의 연주입니다.(우리 집에 유령이 살고 있어요!/김지은/p.267)

 



(신간 서평단_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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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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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버킷 리스트가 자주 회자되었다. 백 개의 목록을 작성하기도, 체크리스트 형식으로 달성 날짜를 기록하며 지워나가기도 했다.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 때면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귀찮다는 생각, 헛짓이니 이럴 시간에 지금 할 일을 해라 등 내면의 소리가 울렸지만 두근거림, 말하자면 근거 없는 떨림도 무시 못했다. 버킷 리스트 칸이 백 개라면, 아니 천 개라도 단 하나만 거듭 적었을 사람이 있다. 바로 제이 개츠비로 이름을 바꾼 제임스 개츠다. 그는 리스트를 데이지라는 이름 하나로 빼곡히 채운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요술램프의 지니 역할을 시작한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김영하 옮김,문학동네, 2009, The Great Gatsby, 1925년, 252쪽 분량)』는 시간을 되돌려 스스로를 구원하려다 추락하고 마는 이야기가 마치 포물선처럼 그려진다. 곡선의 끝은 ‘없음’으로 수렴하기에 이전 모든 점이 간직한 치열함은 독자의 속을 쓰리게 한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미국문학의 ‘잃어버린 세대’ 작가로 1차 대전 이후 방황하던 지식인 그룹을 속한다. 여기에는 헤밍웨이, 포크너 등도 이름을 올리며 뉴욕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소설 <맨해튼 트랜스퍼>의 존 더스패서스도 같은 시기의 작가다. 그는 재즈 시대로 불리는 1920년대, 눈부신 경제 성장과 도덕적 타락이라는 빛과 그림자가 혼재하던 시기를 통과했고 『위대한 개츠비』는 특정 시기, 떠오르는 신생 강대국의 초상을 가감 없이 포착한다. 작가는 딘빌리어스를 인용한 제사 앞에 “다시 젤다에게”라는 헌사를 더한다. 개츠비와 데이지에게서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의 투영을 찾아볼 수 있다. 역자인 김영하는 삼 년간 매달렸던 『위대한 개츠비』의 실패가 젊은 작가 피츠제럴드의 기를 결정적으로 꺾었다고 해석한다. 1920년 『낭만적 에고이스트』를 개작한 첫 장편소설 『낙원의 이쪽』을 발표한 뒤 세 편의 장편을 더 쓰고, 생계를 위해 수많은 단편을 발표했는데 작가의 이른 죽음 이후 대표작은 단연 『위대한 개츠비』가 된다.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는 도시의 불켜진 노란 창을 올려다보며 궁금해하는 자, “놀랍도록 다양한 인간사에 매혹당하는 한편으로 진절머리를 내면서”(p.50)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는자라고 스스로를 인식한다. 화자는 아버지의 충고대로 감정을 개입하지 않으며 이해하는 태도로 그들을 본다. 그 기록이 이 소설이라는 설정이다.이웃인 제이 개츠비, 먼 친척 조카뻘인 데이지, 그녀의 남편이자 폴로선수로 소개받는 톰 뷰캐넌, 톰의 불륜상대 멀턴과 멀턴의 남편, 조던 베이커와의 시간은 뜨거운 여름을 통과해 가을의 초입에 이를 때 많은 것은 달라진다. 동시에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은 채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도 있다.

제이 개츠비의 파티는 모두에게 허용되어 있다. 밤을 밝히는 파티는 무료개장 놀이공원처럼 반짝임으로 소란스럽다. 개츠비는 모두를 환영하지만 단 한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가 처음으로 만났던 ‘상류층’여자 데이지다. 데이지라는 존재 때문에 그녀의 집은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유쾌해 보였고 도시는 우수어린 매혹으로 가득 찼었다. 게츠비는 무일푼이라는 정체를 감추고 자신을 믿고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영영 놓쳤고, “그녀를 뒤에 남겨두고 간 듯”(p.188)한 느낌은 여전히 아물지 않는다. 잃어버린 보석, 유일무이한 존재 되찾기는 생의 사명이 되고 과도하게 뚜렷한 목표는 비현실적인 계획에 엔진을 달아준다. 초록색 불빛은 북극성만큼이나 재고의 여지 없는 진리가 된다. 개츠비는 플라자 호텔 스위트 룸에서 자신과 데이지의 사랑이 세상에 선포되기 원했다. 그의 맹목은 브레이크가 없다.

개츠비를 하나의 이미지로 치환한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한 장면으로 각인시켰듯이, 바로 ‘미소’일 것이다. 닉이 개츠비를 처음으로 인식하는 순간을 압도했던 미소다. 그 미소는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이며 “변치 않을 안도감을 주는, 일생에 네 다섯 번쯤 밖에 마주치지 못할 드문 성질의 것”(p.64)이다. 제이 개츠비가 톰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입고난 후 닉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찬사를 전했을 때 게츠비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찬란한 미소”(p.190)를 짓는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희소하고 찬란한 만큼 찰나적이다.

한편, 데이지라는 캐릭터는 목소리가 인물 자체다. 작가는 인물의 기분과 상태, 분위기와 의도, 열망과 진실, 거짓이나 번복을 목소리로 그려낸다. “그녀의 음성은 뭐랄까, 귀가 따라가며 알아서 맞춰 들어야 될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음정들의 배열 같았다.”(p.21) 개츠비가 정확히 보았듯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이기에 매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데이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범주 안에서, 그 영역이 빛나는 것들로만 꾸려진 덕에 힘들이지 않고 부(富)에서 부(富)로, 편안함에서 편안함으로 아쉬울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솔함이라고? 의식 자체가 없다.

소설은 꿈을 현실로 믿어버린, 믿기로 작정하고 자기만의 성 쌓기에 스스로 갇힌 희망의 극점을 보여준다. 희망은 거의 절망적인 기운을 띤다. 또한 어리석어 보일만큼 순수와 맞닿아 있어 독자는 개츠비에게 연민을 갖게 된다. 꿈을 향한 그의 헌신은 현실감각을 잃을 만큼 처연하다.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닉을 제외하고 그의 곁을 스쳤던 것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파티가 열리던 여름, “이 모든 사람이 그 여름 개츠비의 저택에 찾아왔었다.”(p.81)라고 적은 닉의 다이어리는 책의 두 면 이상을 할애해 방문자들을 열거한다. 작가는 왜 이토록 또박또박 별로 중요할 것 없어 보이는 이름과 행적을 기록했을까. 개츠비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의 삶의 끝에 받아야 마땅한 일말의 강렬한 개인적 관심”(p.202)은 그들 중 단 한 명만 표했다. 무참한 노릇이다. 재즈 시대, 흔들리는 운율처럼 명멸하는 익명의 군상들이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밤이면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남자와 여자, 자동차들이 쉴새없이 몰려들며 눈을 어지럽히는 이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p.74)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뉴욕의 다채로운 묘사다. 감각적인 그림이 눈앞에 그려지고 그 안에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화려한 도시는 작고 더러운 강이 흐르는 잿더미 계곡과 대조적이다. 데이지와 톰이 거처하는 이스트에그와 개츠비의 저택이 있는 웨스트에그의 대조는 전통적 부유층과 신흥 부자들의 대치를 보여준다. 동부로 향했지만 개츠비와 일련의 사건을 겪고 다시 중서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화자 닉 캐러웨이의 회귀도 주요 테마다.

소설은 활자로만 읽히지 않고 1920년대, 전쟁 후 미국의 도취를 불러일으킨다. 두 번 영화화 되어 어떤 페이지에서는 자동으로 영사기가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데이지의 목소리가 일으키는 끌림에 침몰하는 개츠비의 미소 외에도 많은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번역이 더욱 입체적인 간접 경험을 가능케 한 면도 있다. 평론가 신형철은 매년 한 번씩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다고 한다. 이미지, 상념, 현상, 어른거리는 심상을 명료하게, 게다가 간결하게 활자화시킨 문장의 향연이다. 세 번째 읽는 개츠비가 마치 초독인 듯 새로워서 일 년에 한 번은 아니어도 다시 돌아와 펼칠 것 같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존 더스패서스의 <맨해튼 트랜스퍼>를 함께 읽는 것도 추천한다. 그곳엔 지미 허프와 앨런이 있다.

책 속에서>

나는 더 이상 타인의 내면을 우월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요란하게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개츠비, 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제공한, 내가 진심으로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개츠비, 그만이 예외였다.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결국 일련의 성공적인 제스처라고 한다면, 그에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었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미명하에 흔히 미화되곤 하는 진부한 감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이야말로 그가 가진 탁월한 천부적 재능이었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성질의 것이었다.(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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