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티새 지나는 농원에 새로 세들어 살게 된 영국인 록우드 씨는 소유주인 히스클리프와 대면키 위해 폭풍의 언덕을 찾는다. “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 씨가 살고 있는 집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폭풍(wuthering)'이라는 말은 비바람이 몰아칠 때 이런 높은 곳이 감당해야 하는 대기의 격동을 가리키는 이 고장의 표현이다.”(p.11) 그곳에서 하룻밤 묵게 된 록우드 씨는 악몽을 꾸다 캐서린 린턴의 유령을 만나고 주인의 미심쩍은 행동까지 목도한 후 간신히 돌아온다. 록우드 씨는 하녀장인 딘 부인으로부터 자신이 만나고 온 인물들의 과거에 대해 듣는다. 언쇼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헤어턴과 린턴 가문의 마지막 후손 캐시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는 힌들리와 캐시의 아버지 언쇼가 “악마에게 받은 것 같”은 까만 피부의 아이 히스클리프를 집으로 데리고 오던 날부터 시작된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김정아 옮김,문학동네,1847,2011,544쪽)』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허먼 멜빌의 『모비 딕』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힌다. 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폭풍의 언덕』을 문학적 교양의 수준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모든 수준의 독자들을 만족시켜주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칭했다. 에밀리 브론테는 영국 요크셔주에서 성공회 사제의 딸로 태어나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샬럿 브론테, 앤 브론테와 함께 세 자매는 필명으로 공동 시집을 출간한다. 다음해인 1847년 각자의 작품이 나오는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 되며 1848년 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출간 당시에는 비도덕적이라고 비판이 많았으나 반세기 후 서머싯 몸, 버지니아 울프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고 지금까지 영화와 연극, 드라마, 오페라 등으로 조명받고 있다.
아버지 언쇼는 아이들에게 약속했던 선물 대신 히스클리프를 데려왔고 극진히 편애한다. 눈에 보이는 부당함에 아들인 힌들리는 원한을 새기지만 캐시는 히스클리프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힌들리의 원한은 성인이 되어서도 결코 줄지 않았고 특히 아내가 죽은 후에는 학대와 자학 사이에서 망가져 간다. 캐서린은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에드거 린턴으로부터 청혼을 받아들인다. “천국에서 살면 너무 불행할 것 같”(p.129)다는, 천국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캐서린은 이 결혼에 대해, 그리고 히스클리프에 대한 진심을 넬리에게 털어놓는다.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p.130)라는 이 유명한 문장을 당사자는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난다. “린턴에 대한 내 사랑”과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p.133)이 어떤 격차를 지녔는지를 듣지 못한 채 나가버리고 3년이 지난 후에 둘의 재회는 이루어진다.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앞으로 더욱 많은 격변을 예고하면서. 그야말로 폭풍이다.
소설은 화자인 하녀장 넬리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상황 전개, 인물의 드러난, 또는 숨은 감정도 넬리의 해석을 거친다. 그녀는 아내 캐서린의 죽음을 슬퍼하는 린턴을 보고 캐서린의 축복받은 해방을 슬퍼하니 헌신적 사랑 안에 이기심이 들어있음을 단정한다. 캐서린의 죽음에 고통받는 히스클리프의 끈질김에 감동해 마지막 작별을 고할 기회를 만든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단연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이지만 넬리의 목소리는 상황에 개입하고 의도하고 이끌고 예측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짧은 삶도 그녀의 목소리로 전해주기를 바라는 듯하다.
『폭풍의 언덕』은 소설구성의 3요소 중에서도 단연 “인물”이 주도하는 작품이다. 캐서린이 개에게 물려 처음 티티새 지나는 농원에 머물게 되었을 때 히스클리프는 그 집의 남매가 캐서린을 보고 홀딱 반했다며 “캐서린은 그런 애들 따위와는, 이 세상 사람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잖아.”(p.83)라고 자신의 우상을 확실시한다. 캐서린은 자기감정을 살피고 의지를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캐서린에서 딸 캐시로 이어지며 압박과 위협, 규범과 굴레에 굴하지 않는 캐릭터는 생생한 현존으로 다가오고 선명한 인장처럼 남는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죽음 이후 한 가지 욕구로만 치닫는다. 소설은 사랑과 사로잡힘, 집착의 경계를 줄타기하듯 그린다. 집착은 원망과 투사를 부르고 제어장치 없이 극대화된다. 감정의 해소는 파괴에 다름 아니다.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빼앗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망가뜨리겠다는 의지와 그로 인한 여파를 작가는 직설적인 단어와 빠른 전개, 황량한 풍광으로 묘사한다. 돌연히 멈추었을 때야 비로소 이를 멈출 수 있는 것은 호흡의 부재, 즉 죽음 뿐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세대를 이어 바통을 건네면서 다가오는 운명과 환경에 휩쓸리고 맞서는 인물들은 고립된 배경에서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인간의 내밀한 심리, 무의식의 발로를 언어로 아로새긴다.
고전을 읽지 않으면 고전하게 된다는 말에 동의했다. 한 가지 더, 고전은 상상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다. 유추의 대상도 아니다. 고전 읽기는 문장과 낱말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 나갈 때 멈칫거리게 되는 행간을 견디고 섬뜩할지라도 전진하는 일이다.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느리게 조절하면서 이완과 외면, 재촉과 대결을 오롯이 통과해야 한다. 굳이 “고전이란”으로 시작하는 마크 트웨인의 유명한 정의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느지막이 만나는 고전은 민망함마저 부른다. 문학기행의 꿈을 품었던 히스 언덕의 낭만은 ‘아직도 내가 낭만으로 보이니?’ 라고 물으며 비틀린 미소를 짓는다. 오해가 길어지다 보니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상상 속 이미지는 고착되고 말았다. 편역과 축역의 혼란한 선택지를 넘어서서 온전한 완역으로 본색을 드러내 보자. 비로소 얼어붙은 바다가 산산이 깨어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