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극장 피카 그림책 17
아라이 료지 지음, 황진희 옮김 / FIKAJUNIOR(피카주니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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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지기 시작하면 올해의 겨울 그림책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위한 선물은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의 크리스마스 그림책을 혼자서 아끼고 모으기도 한다. <마법처럼 문이 열리고>, <101마리 달마시안>, <나홀로 집에>를 그렇게 읽었고 프랭크 바움의 <산타클로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올해 내게로 온 첫 번째 겨울 그림책은 아라이 료지의 눈 극장(황진희 옮김, 피카주니어, 2024, 2022, 40면 분량)이다. 예술대 졸업 후 광고와 무대 미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재치 넘치는 이야기와 환상적 화풍으로 사랑받아온 작가는 21세기 일본 그림책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눈 극장은 대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집이라는 공간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일상의 장소이지만 갈등과 불안이 잠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친구와 함께 따뜻한 방에서 책을 볼 때, 그 책이 화사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찬 나비 도감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나비 도감은 아빠가 무척이나 아끼는, “소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책인데 아뿔싸, 이 책이 찢어졌다. 아이는 도감을 빌려주지 않았고 아빠를 생각하며 걱정한다. “아빠가 화를 내실까.” 아이는 더 이상 평온하지 못하다. 집을 나선 아이는 온통 눈으로 덮인 마을을 바람 날개 같은 스키를 타고 쌩쌩 미끄러진다. 나비를, 아빠를, 친구를 생각하다 아이는 그만 구덩이에 빠진다. 그 곳에서 아이는 불이 켜진 작은 극장”, “눈 극장을 발견한다. 현실 세계에서 판타지 세계로 이동한 아이가 눈을 감았다 뜨자 환상 세계는 다시 한 번 확대된다.

 

눈 극장에서 펼쳐지는 공연이라는 환상 자체가 이미 아이의 마음을 위로한다. 관객으로 머물지 않고 오늘의 무대에 초대되어 직접 공연에 참여함으로 내적인 힘을 강화하고 마음은 정화된다. 조용하게 시작된 노래는 점점 커지고 거대한 눈 팽이 형상을 갖춘다. 눈의 여왕도 노래를 듣고 있다고 할 때 화면 전체를 활용한 눈 팽이 위에 작지만 선명한 눈의 여왕이 지팡이를 짚은 채 내려다보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자연스럽고도 치밀한 연결이 독자의 상상을 기쁘게 채운다. 손톱만한 눈의 아이들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더 이상 이름 없는 눈송이, 생명 없는 결정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나비와 친구를 다시 떠올릴 때 아빠의 커다란 손으로 상징하는 도움은 외부에서 오지만 내밀한 체험은 빼앗기지 않을 기억으로 동심에 박힌다. 책은 절정을 지나 안전한 귀가를 준비하고 마지막 장면은 더없이 안온하다.

 

서사는 단순하다. 현실에서 판타지로,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이야기. 세상 근심은 꿈으로 위로받기도 하고, 꿈은 희망과 가능성으로 가득 찬다. 시기적절한 도움과 너그러운 허용은 좋은 기억의 창고를 넓힌다. 앞면지와 뒷면지는 단색 배경에 스키를 타는 소년만 등장한다. 집을 나서는 소년과 집으로 돌아오는 소년을 의미하겠지만 소년은 한 뼘 자랐을 것이다. 타이틀 표지부터 이야기가 시작될 때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두 아이가 궁금해진다. 이 그림책은 화려한 색의 향연이 압도적이다. 색색의 나비가 잔상으로 남아 하얀 일색의 눈 공연이 아닌 강렬한 원색의 폭죽을 터뜨린다. 누구나 한 번쯤 스노우 볼 안의 세상을 동경했을 것이다. 두꺼운 유리로 벽을 치고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공간에 초청받는 행복을 잠시 만끽한다.

 

함께 보고 싶은 책이 생각이 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존 로코의 <폭설>도 겨울이면 다시 꺼내보는 그림책이다. 말 그대로 폭설에서 살아남기를 사랑스러운 그림과 감동적인 이야기로 기록한다. 유리 슐레비츠의 <겨울 저녁>은 겨울 저녁의 빛이 얼마나 특별할 수 있는가 점진적인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겨울이 좋은 분명한 이유 하나는 그림책들 때문이다. 나를 꺼내세요, 다시 펼치세요. 서가에서 기지개 켠 책들이 겨울을 알린다. 올 겨울은 특별히 더 춥겠다는 반갑지 않은 예보가 들린다. <눈 극장>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뜨거운 코코아 한 잔과 빨간 스웨터, 그리고 겨울 그림책이면 슬기로운 한파 대비로 그만일 듯하다.

 


(신간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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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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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허진 옮김, 다산책방, 2023, 2010, 104면 분량)는 한 소녀가 겪는 특별한 날들을 최대치의 밀도로 보여주는 짧은 소설이다. 하나의 문장과 다음 문장은 정밀하게 재단된 듯 꼭 들어맞게 맞물리고, 이야기의 경로에는 태양과 구름이 음영을 드리운다. 조짐과 전조가 가지런히 놓일 때도 있다. 좋은 예감이 지속되기도, 피하고 싶은 소식이 도착하기도 한다. 안도하며 잠을 깨기도 하지만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도 온다. 독자는 소녀의 시선을 통과하여 닿게 되는 삶의 눈부심과 아이러니가 이토록 생생했던가 감각하게 된다.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 태생의 소설가로 첫 단편집인 남극(Antarctica)(1999)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였다. 25년간 활동하면서 5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는 고국인 아일랜드를 넘어 세계적으로 기대를 받는 작가가 되어 호평의 한가운데에 있다. 국내에서는 <맡겨진 소녀>를 시작으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3)>과 올해 <푸른 들판을 걷다(2024)>가 출간되었다.

 

소설 <맡겨진 소녀>는 영화화되어(콤 베이리드 감독) 베를린국제영화제 2관왕 등을 수상하였고, 국내에서는 <말없는 소녀>라는 제목으로 2023년에 개봉하였다. 소설과 영화의 일치율이 꽤 높고 대사도 똑같이 진행된다고 하여 영화를 보며 소설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아낄 필요가 있을까 싶음에도 책은 구입하고도 차마 곧바로 펴서 읽지 못한 채 시간을 지체했다. 활자는 필시 더욱 깊이 각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맡겨진 소녀>라는 제목에는 이중의 무력감이 배어있다. 맡겨졌다는 피동성과 더 성장해야 할 독립 이전의 소녀라는 정체성은 위태로움과 불안을 야기한다. 독자는 소녀의 안위를 바라며 그녀의 여정에 동행한다.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다. 주인공 소녀가 덥고 환한 어느 일요일 아침,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의 집으로 가서 여름 한 철을 보내고 어느 일요일 저녁,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소녀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상상하고 경계하고,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고, 경험하고 깨달아 알게 되기까지 반복되는 날들을 차곡차곡 쌓는다.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지내는 분리된 일상은 먹고 마시고, 자고 일어나고, 일하고 쉬는 보통의 날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마치 두 번째 세상이기라도 하듯 다른 방식으로 채워진다. 작가는 이 다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무엇이 다르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지, 왜 다른지를. 이 차이는 처음과 마지막만큼이나 멀고, 점점 벌어지는 간격, 넓어지는 틈은 슬프고 아릿한 맛을 지닌 채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하는 정점에 이른다. 목숨을 담보로 권리를 요구하던 아일랜드 단식 투쟁 소식이 뉴스로 보도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어린이의 인권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영역에서 어떻게 지켜질 수 있을지, 소설은 우리 모두의 유년을 조명한다.

 

소녀는 네 남매 중 한 아이였고, 다섯째 아이의 출산에 임박한 부모의 결정에 따라 먼 친척 부부에게 보내어졌다.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도, 익숙한 집으로 돌아올 때도 소녀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소녀는 본능처럼 방어기제를 장착하였고 작동시킨다. 상처받느니 애초에 선물이 주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더 안 좋은 쪽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태도는 좋아본 적이 없다는 현실 인식에 기인한다. 잠시 머물 킨셀라 부부의 집과 아이의 입장에서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긴, 어쩌면 영원에 맞먹어 보이는 시간을 보낼 자기 집의 차이는 소설 곳곳에 배치되는데 다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다. 두 집의 주인이, 그들의 성정이, 말을 거는 의도와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압력, 또는 온기가 아직 어린 소녀에게 무차별적으로 감지된다.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라는 정리는 너무 편협한 요약이다. 성장하는 아이와 자라지 않는 어른,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라고 묻는 아이에게 감히 답하지 못하는 어른을 본다. 혈연이고 가족이므로 당연시하는 무례함. 무례의 권리와 폭력, 신체적으로 가해지지 않더라도 이미 전방위적으로 은연중에 이루어지는 강압 아래서 살아남기는 개인별 미션이 된다. 살아남아서 좋은 어른이 되는 건 관심 영역에서 아직 멀다. 좋은 어른이라는 추상의 이름은 차치하고,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안 할 줄 아는 한 가지 미덕을 체화한 어른 되기는 가능할지에 대해 소설은 환기한다.

 

일관되게 짚어나가는 의 변주가 책에서 가장 주목하게 되는 지점이다. 아이의 부모와 킨셀라 부부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다. 소녀가 도착한 첫날, 처음으로 지적받았던 것도 바르게 대답하는 법이었다. 킨셀라 아주머니는 “‘가 아니야. ‘라고 해야지.”(p.27)라는 언급 후에 잘 이해했는지 확인한다. 들어보기 어려웠던 칭찬이 후렴구처럼 반복되는데 일상의 언어다. 착하지, 착하기도 하지, 정말 대단한 목청이었어. 격려하고 지지하는 언어는 진심에서 나오기에 자연스럽다. 널 잡는 남자는 아주 빠를 거다. 넌 다리가 기니까.(p.41) 기록이 어제보다 못할 것을 소녀는 알고 있지만 비교의 기준을 달리기했던 첫날로 옮겨 19초가 빨라졌다고, 꼭 바람 같다고 말한다. 칭찬할 기회를 빼앗기지 않는다.

 

이에 반해 소녀를 맡기고 가던 아버지의 인사는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p.21)였고, 대신 제대로 된 작별인사는 없었다는 생각에 아이는 의아하다. 아빠의 언어 습관에는 거짓말도 있다. 밀드러드 아주머니의 언어 또한 민망할 정도로 가차 없지만 칼과 같은 말을 던지는 이들을 우리 역시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소녀는 첫날 알아차렸다.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p.25)는 걸. 새로운 말은 서서히 스며들었다. “저기서는 네가 날 업고 왔나 보다.”(p.74)처럼 아저씨가 건네는 말은 농담조차 유머가 있고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바닷가 밤 산책을 나갔던 날, 두 사람은 멀리 두 개밖에 없던 불빛이 세 개가 되어 깜박이는 걸 함께 본다.

 

소설은 말이 먼저일까 삶이 먼저일까, 그렇게 살기에 그런 언어가 체화되는지, 무심하게 상처를 주는 파괴적인 언어습성이 삶을 소리 없이 부수는지 성찰하게 한다. 또한 할 일이 산더미라 여유가 없다는 게 카드 속 노란 꽃밭에 있는 고양이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대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긍정이나 부정의 언어를 넘어 침묵의 지혜를 강조하기도 한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p.73) 라는 아저씨의 말을 소녀는 체득하고 간직한다. 작가는 사람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는 말의 문제,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를 반복하여 제시하고 소녀의 시선으로 흔들림 없이 새긴다.

 

작년 하반기에 참여했던 시립도서관의 글쓰기 수업에서 이 소설이 특히 인상 깊었다. 영화 감상 후에 이어진 교수님의 찬사는 꽤 직접적이었다. 정통 소설의 표준이며 현대 소설의 정점이다, 중편 소설의 최고 수준을 성취해 낸 빼어난 모범 텍스트다, 최소한 이십 년은 가꾼 문장력이며 작가의 엄밀한 자기 수련의 결과라고 평했다. 이 문장은 우리도 쓸 수 있다, 다음 문장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다음은 어렵다는 말씀에 작가를 향한 선망과 자신을 향한 좌절이 동시에 엄습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아껴둔 끝에 편 작품에서 만나는 낱말들, 낱말이 품은 이미지, 치장하지 않고 본질만을 건져 배치하는 진행과 장면 전환, 대화의 순간들이 몰입케 할 뿐 아니라, 작은 분량 안에서도 놓치지 않는 풍경의 묘사는 인물의 심정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이중의 역할을 해낸다. 촘촘함과 여백의 균형 또한 리드미컬하다.

 

헤어지는 아저씨의 마지막 당부는 책을 계속 열심히 읽으라는 것이었다. 곁에서 말해줄 수 없는 대신 책에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는 소녀가 가져가는 세 권의 책으로 미래를 비춘다. 하이디처럼, 행복한 재회는 이루어질까. <눈의 여왕> 마지막에 카이와 게르다가 돌아온 집은 변한 것이 전혀 없지만, 그대로인 집은 모험을 겪고 성장하여 귀가한 아이들에게 더는 그대로가 아니다. 게르다의 따뜻한 동심은 카이를 구할 만큼 강했고 그들 앞에는 다른 시간이 시작될 것처럼 소녀에게도 다른 시간이 시작되고 있다. 킨셀라 부부에게 받은 사랑의 여운이, 특히 축복처럼 닿았던 말의 기억이 소녀를 지킬 것이다. 비록 이 순간 온 힘을 다해 이별의 아픔을 참을지라도 말이다. ‘함께한 나날’(p.83)눈앞의 날’(p.82)부터 다가오는 모든 날을 헤쳐 나가게 할 것이다. 뜨겁고 맑고 투명한 눈물 빛 작품을 추천한다. 독자 역시 자신의 유년을 비추는 작은 태양을 마음에 띄우게 될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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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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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문학동네, 2018, 196면 분량)은 흰 것들의 목록으로 시작한다. 작가가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하고 처음 한 일은 목록작성이었다. 목록은 강보부터 수의까지 열다섯 가지이고 이들은 열병식을 치르듯 종으로 정렬한다. 태어나 몸에 감싸는 강보와 죽은 몸으로 입는 마지막 옷 수의 사이에 놓인 흰 것들은 고유한 묵직함으로 간격을 두고 선다. 둘 사이에 놓여 마땅한 즐거움과 괴로움, 보잘것없음과 벅참을 강보가 곧 관이었던 아기는 아무런 잘못 없이 누리지 못했다. 아무런 잘못 없는 느닷없는 죽음들은 이 도시와 저 도시에, 그때와 지금,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한 치의 변화 없이 반복되고 있다. 목록을 보면 독자는 물들듯 나만의 흰 것을 헤아리게 된다. 투명에 가까운 흰과 재색에 가까운 흰도 있을 테고, 만져지는, 향기가 나는, 온기 또는 차가움을 전하는 흰 등, 각각 꼽은 흰이 그 사람만의 세계를 축조할 것이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는 3개 장으로 이루어진다. 1장인 에서 목록부터 시작하였으나 단어가 문장이 되는 일의 의미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p.11)고 선언한다.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두 시간 만에 죽었던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작가는 <배내옷>에서 이야기를 영원의 자리로 옮긴다. 글로 생명을 덧입은 아기언니는 2'그녀에서 작가의 감각을 빌려 육화한다. 도시와 인간의 세상을 경험하는 언니는 낯설고 온통 일회성인, 그러나 잊거나 빼앗기지 않을 삶을 산다. 소설에서 가장 많은 분량과 목록을 차지하는 2장에서 그만큼 마음은 기울고 흘러 고인다.

 

3모든 흰은 가장 짧은 열한 개 목록으로 구성한다. 의지를 세우고 다시 책 밖 삶으로 걸어나서는 뒷모습 같다. 3장에서 독립된 목록 제목으로 언니를 처음 호명한다. “언니가 있었다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p.122) 하며 문을 여는 한 편은 불가능한 자매의 일상을 꿈처럼 살아본다. 마지막 두 편은 작별모든 흰이다. 최선의 작별의 말은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p.133)라고, 말을 모르던 언니에게, 당신에게, 스러지던 무명의 모두에게 눌러쓰고, 책의 마지막 문장을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p.135)라고 맺는다. 나에게서 그녀에게로 다시 모든 이, 지금도 스러지고 있는 그들에게 하는 결연한 약속이다. 개인의 아픔에서 멈추지 않고 기꺼이 연대한다는 의지로 읽힌다.

 

책은 흰색 간지와 여백을 넉넉하게 품고 흑백 이미지를 가끔씩 보태며 책이라는 물성까지 하나의 주제를 위해 힘쓴다. 텍스트와 이미지와 구성이 목적을 향해 오롯이 복무하는 듯하다. 각각의 목록 아래 한 면부터 길게는 네 면 분량의 글을 담고 있는데, 한 편씩 떼어내도 그 자체로 시 같고, 지나온 페이지를 불러내 깊이를 한 뼘씩 더해가기도 한다. 독립적이면서도 밀착하고 있는 서사는 종이라는 평면에 기록되었으나 입체로 돋아난다. 과거와 현재, 이곳과 저곳(한국과 폴란드), 이미 죽은 이들과 살아남은 자들,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이들, 영혼과 실존이 혼재하고 서로를 응시한다. 떨어진 장소에서 유사한 아픔을 목도하면서 파괴된 두 도시, 두 곳에서 얼마나 다른 방식의 애도가 이루어졌나, 아니 그 자체가 없었던가 병치하는 <>(p.108~109)은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다.

 

개정판에서 작가는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책이었다.”(p.186)라는 말을 추가했다. 책 전체가 작가의 말이라고 했던 초판 발행 당시와는 달리 귀중한 힌트가 보태졌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화사하고 돋보이는 하얀에 대해 말하고 싶을 것이다. 아마 더 수월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억하고 기념하겠다는 의지를 벼려서 흰을 호명하는 일은 아프지만 아름답게 느껴졌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의 편에 서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숭고하다. 내밀한 목소리가 알알이 박힌, 고요하지만 추동하는, 차분하지만 여운 깊은 소설 <>을 추천한다. 계속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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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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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하반기에 시립도서관에서 쉽고 재밌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10회차 단편 문학 토론을 진행하게 되었다. 토론할 작품을 선택할 때 제일 먼저 포함시키는 건 도스토옙스키다. 그렇게 아홉 편을 찾게 되는데, 한 작가를 더 고정할 것 같다. 보르헤스. 보르헤스 단편집 픽션들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었던 게 지난 7월이다.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은 경이로움으로 심화된다. 단편집 전체를 대상으로 서평을 쓰고, 인터넷 서점에서 이 주의 리뷰로 선정되었으나 아쉬움은 남았다. 한 편씩 더 깊이 만나보고 싶다는 갈증이 잦아들지 않았고, 만나보아야 한다는 당위는 우선순위에서 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먼저 재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의 인장격인 작품 <바벨의 도서관>으로 정했다. 하반기에 토론하게 될 열 작품은 하나같이 선정자의 사심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토론은 누가 뭐래도 보르헤스다. 드디어 며칠 후로 다가왔으니, ‘나 지금 떨고 있니?’ 설레며 자문한다.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1944 ,2011)중에서 바벨의 도서관은 여섯 장 반, 13면의 짧은 분량으로 도서관이라는 우주를 그려낸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p.97)라는 문장으로 시작할 때 왜 우주를 도서관이라고 부를까 궁금하다. 50대 초반 실명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도서관장으로 재임명되어 수십만 권의 책 사이에 머물렀던 그, 자신이 책의 사람이며 도서관의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소설은 도서관의 구조부터 설명한다. 낮은 난간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통풍구, 동일하게 배치된 육각형 진열실, 각 진열실에 배치된 스무 개의 책장, 두 면을 제외하고 네 개의 면은 다섯 개 씩의 책장들이 덮고 있으며, ‘책장의 높이는 바닥에서 천장의 높이와 같고, 보통 키의 사서보다 조금 큰 정도’(p.97)라고 한다. 상상하니까 답답하다. 남은 두 면 중 하나가 일종의 좁은 복도와 연결되고 이 복도는 복사, 붙여넣기 반복한 듯한 진열실과 이어진다. 그리고 복도 좌우로 아주 작은 문간방 두 개, “하나는 선 채로 자는 방이고, 다른 하나는 생리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방”(p.98)이 있다. 책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도서관인데 책에 주목하기 전에 도서관 자체가 인간을 압도한다. 책에 접근하는 건 다음 문제다. 이 곳에서 버티기 위해 장착해야 할 기본적이고도 마땅한 자세는 잠도 선 채로 자야 한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에서 피로라고는 느끼지 않고 끝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도서관이 무한하지 않다고 추단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복도에 있는 거울을 빌미 삼는다. 대상을 복제하는 거울을 왜 두었겠는가, 실제 무한하다면 복제라는 눈속임을 필요로 했겠는가. 작가를 대변하는 화자인 나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책에서 나는 반대 입장이다. 거울, 그 반짝거리는 거울 표면이 무한함의 형태이며 약속이라고 꿈꾸고 싶다”(p.98)고 간절함을 담는다. 그는 간절할 수밖에 없다. 도서관 안에 있는 누구나 죽음을 불사할 만큼 간절하다.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처럼 젊은 시절 여행을 했던 나, 한 권의 책, 편람중의 편람일 책을 찾아 돌아다녔던 나. 이제 나의 눈은 멀어가고 나는 자신이 태어난 육각형 방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화자는 목적을 달성했나? 젊어서부터 한 권의 책을 찾아 돌아다닌 끝에 찾았나? 찾지 못한 채 목전에 죽음이다.

 

이곳에서의 죽음은 크게 두 가지 인듯하다. 내가 먼저 찾겠다는 탐욕으로 서로 엉켜 해친 끝에 살해당하거나, 실패를 인정하고 기도하며 죽음을 기다리거나 이다. 기도는 후세에게만은 발견의 축복을 허락해달라는 간곡함으로 점철된다. '‘나머지 모든 책의 암호 해독서이면서 완벽한 개론서'(p.106)는 분명 있으며, 이 책을 본 사서 즉 책의 사람’(p.105)이 존재하고, 그래서 신과 유사한 이자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순례를 떠나 모든 길을 뒤졌으나 허사였다니. 그를 찾는 소급적 방법은 명확하다. ‘A라는 책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A가 있는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B라는 책을 참조하고(후략)’, 이어지는 B, C의 되풀이 과정을 수행하는 일. 꽤 익숙한 사이클이다. 그러나 결국은 완벽한 책 찾기에 실패하여 내가 안 된다면 다른 누구라도 영광과 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 책을 읽어볼 수 있기를 간구하는 거다. . 영광과 지혜와 기쁨의 자리가 유혹적이다. 여기에 각자가 꼽는 최고의 세 가지를 넣어본다면 과연 덤덤할 수 있을까.

 

무한한 도서관에서 죽음의 절차는 난간 위로 던져짐이다. 난간이란 첫 장 셋째 줄, 진열실 중심의 커다란 통풍구를 둘러친 그 낮은 난간을 말한다. 죽은자는 무한하게 떨어지면서 만들어내는 바람 속에서 분해”(p.98)될 것이다. 무한한 하강은 바벨탑을 지으며 시도했던 무한한 상승의 역과 동일하다. 떨어지면서 분해되고 무로 돌아갈 충분한 깊이가 마치 블랙홀처럼 건축물 한가운데에 존재한다니, 발이라도 삐끗하면 어쩌나 맥락 없는 걱정이 밀려온다. 구약에서 바벨탑은 창세기 111~9절까지 기록되었는데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는 4절에서 인간은 욕망을 직접적으로 밝힌다. 대 피터르 브뤼헐은 바벨탑(1563)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축조와 파괴가 어지럽다.

 

모든 부분을 꼼꼼히 기록하고 싶었으나 한 장을 쓰고 나니 힘에 부친다. 서서 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무사안녕한 나의 타협이 못마땅하다. 그래도 끝맺기 전에 빠뜨릴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책의 모든 부분은 놀랍다. 상당히 논리적이라 읽으면서 설득당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문장에서도 동의표를 던지고 싶어진다. 그 중에서도 두 부분은 전복적이다. 첫째, “존재 가능한 언어에서 n이라는 숫자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몇몇 언어에서는 도서관이란 상징이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영원하고 도처에 존재하는 체계라는 정확한 정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도서관이나 피라미드혹은 그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서관을 정의 내리고 있는 앞의 일곱 단어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한다.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내가 쓰는 언어를 이해한다고 확신하는가?”(p.108), 작가는 느낌표로 경고하는 대신에 물음표로 넌지시 독자의 허를 찌른다. 게다가 괄호로 묶어서 말이다. 삶의 목적, 생의 존재이유, 추구할 모든 것인 도서관은 누군가에게는 다른 대체물일 수 있겠다는 한 가지 해석은 너무 단세포적이라 취소한다. 이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나(필자)는 왜 기뻐하는가, 전율이다.

 

두 번째로는, 결말 부분인 도서관은 무한하지만 주기적이라는 해결책 제시다. 나는 진정한 질서를 꿈꾼다. 질서는 반복되는 무질서로부터 도달한다. 마지막 문장, “나의 고독함은 그런 우아한 희망으로 기뻐한다.”(p.109) 당신이 상상하는 무한은 무엇이요? 시간은 반복될 것이요. 라고도 들린다. 빙하기-지구멸망-간빙기-빙하기-지구멸망-간빙기, 태종태세문단세-문단세-문단세, 문닫는 일 없는 돌림노래도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 반복되는 역사도 주기적으로 보인다. 이 마당에 너무도 뛰어난 는 우아한 희망을 품고 기뻐한다.

 

토론을 위해서 만든 논제가 자유 9, 선택 3, 추가 2개인데, 빼먹은 구멍이 몇 군데 더 보인다. 핵심을 간추려야 하는데 더 찾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과도하다. 욕심 부리지 말자. 바벨의 도서관을 봐! 갈망은 마지막까지 꿈을 꾸며 우아한 희망으로 기뻐한다지만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일, 욕심이 잉태하는 죄,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1:14~15)다는 경고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탐욕하는가, 나는 무엇을 아끼는가 생각하면서 때가 되면 기꺼이 손 놓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가 말이다. 목요일 저녁, <바벨의 도서관> 책 들고 만납시다. 여기는 도서관은 아니고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사택 내 독서실이다. 간략 서평을 마치며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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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 - 흔들리는 인생을 감싸줄 일흔일곱 번의 명시 수업
장석주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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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시를 잘 알지 못해도 사랑하는 건 맞다.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어떤 시는 생애 어느 시기에 푯대처럼 서있다. 단 몇 행도 괜찮고 분석이 치밀하고 해독이 완벽하지 않아도 발음할 수 있다는 자체에 감격하기도 하였다. 릴케도 헤세도 나에게는 시인이었다. 두이노의 비가는 푯대 중에서 앞에 박힌 시 대장이었다. ‘를 곰곰이 생각했으나 지금 와서 보면 이유에 논리가 정연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는다. 한 시기에 릴케를 읽었고, 릴케가 보여준 말테에 놀랐고, 로댕과 살로메를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긴다.

 

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 (포레스트북스, 2024, 308면 분량)는 장석주 시인이 사랑하던 시를 가려내고 모아서 감상과 해석을 곁들인 시 에세이집이다. 나태주 시인은 추천의 말에서 읽어서 마음의 꽃다발이 되고 샘물이 되었던 시 작품들이라고 소개한다. ‘시인들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 시인은 오랫동안 아끼고 품었던 시를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내어놓는다. 5개 테마로 묶인 77편의 시가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기도 하고, 처음 읽는 시는 여러 가지 감정을 일으킨다. 시인은 꼭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서두르는 일 없이 시로, 삶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한 편씩 읽다 보면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이 그랬듯, 더 오래 머물고 싶은 시가 있다. 저자의 짧은 첨언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도 만난다. 위로가 필요할 때를 응시하는 1장부터 그래서 모든 날, 모든 순간에 저마다의 시가 있어야 한다는 5장까지 순서대로 읽을 때 시를 교재로 삼은 인생 수업의 방향성에 더욱 수렴하겠으나, 조금 더 마음이 가는 부분을 먼저 읽어도 머물고 누리고 새기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백석의 시는 대표작이라 할 만한 한 편이 실렸는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작은 도서관에서 자기 돌봄 예술 글쓰기 강좌를 진행 중인데 자화상 그림을 보며 나를 생각하는 첫날, 필사할 선물로 드렸던 시다. 개인적으로 백석의 시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가장 좋아한다. 마냥 뭉클해서 한 행에서 다음 행으로 이동하기 어려운 심정을 매번 경험한다. 어떤 시는 계절을, 하루에 속한 때를, 그 시간에만 들려오는 음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김현승의 고독한 이유에서 오랫동안 고독하다고 울부짖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밝힌다. 그는 입버릇처럼 고독하다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인한 정신, 자기 단련, 맨손 체조라고 생각했다. , 그렇게 고독하다고 말하는 이를 폄하했던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메마른 사람이었던가.”(p.103)라고 고백한다. 내게도 운동이 필요하구나 생각하며 다시 시를 읽는다. “고독은 마침내 목적이다./고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고독은 목적 밖의 목적이다./목적 위의 목적이다.”(p.102) 목적에 넘치도록 부합하는 노래는, 시는 얼마나 이 땅을, 사람을 이롭게 하는지 감탄한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시집은 소금과 빵을 가지고 있다. 종이는 갈변에 이르고 활자로 남은 잉크는 분해 직전이다. 소금빵은 구미를 당기는데 소금과 빵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양식에 담긴 긴박함을 연상케 한다. 바하만을 다시 읽어보겠다고 작정한다. 작정이 너무 많다보니 장작처럼 높이 쌓여만 간다. 저자의 시는 <> 한 편이 담겼다. 그 많은 시 중에서 호명된 <>이기에 더욱 신중하게 읽어본다. 나도 밥을 위해 타협하지 않으며, 밥 값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외면할 수 없는 주제를 받아든다. 밥을 초월한 존재인 천사 이야기로 시작하는 <두이노의 비가>1비가가 실렸다. 여전히 경이롭다.

 

이 책은 시가 거의 모든 것이었던 시인의 추억 앨범과도 같다. 시간을 거슬러 함께 걸어보는 듯하다. 소개하는 시인에 대한 간략한 요약은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시집을 찾아보고 싶게 만든다. 무엇보다 시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 정의내리고 선언하는 지점들이 가장 인상 깊었다. “시는 움직이는 생물이고, 우주의 비밀을 새긴 로제타석이라는 것을.”(p.153), “파블로 네루다는 물음 그 자체가 시임을 증명한다. 시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묾음으로 끝나는 것!”(p.158), “쉬운 시가 늘 좋은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는 만인의 감정과 조응하는 바가 있어야만 한다.”(p.203) “시는 심상한 것의 심상치 않은 발견이다. 아무 발견도 머금지 못한 시라면 밋밋하고 무의미한 말의 무더기일 테다.”(p.230), 새겨야 할 말은 계속된다.

 

정독 도서관, 서울시내 고전 음악감상실 등 엄마에게 늘 듣던 단어를 읽는 일도 즐거웠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저자로부터 더 많은 소개와 추천과 해석을 듣고 싶어서 이런 책이 2, 3권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시집을 사러, 아니 구하러 나가고 싶다. 시집은 왠지 클릭으로 구입해서는 안될 것 같다. 몸을 이끌고 공기에 부딪히며 발로 나아가서 손에 매만지며 품에 꼭 끌어안고 와야 할 것 같다. 장석주 시인의 책이 그 길에 동행할 것이다. 추워지는 계절에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파블로 네루다는 물음 그 자체가 시임을 증명한다. 시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물음으로 끝나는 것! 물음은 시의 첫 징조요, 첫걸음이고, 곧 피어날 꽃봉오리다. 물음보다 더 강력한 시의 촉배제가 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그것은 시의 알파이고 오메가다. 물음을 품지 않은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천진한 물음은 좋은 시의 새싹이다. (p.158)



(신간서평단_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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