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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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정지인 옮김,곰출판) 2021』는 과학자인 아버지에게 헌정된 룰루 밀러의 논픽션 데뷔작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향한 인간의 고투를 담는다. 빛을 발하는 것은 별이나 식물일 수도, 물고기일 수도, 고향이나 안식처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특정하지 못하는 모호한 꿈일 수도 있다. 제목의 물고기는 어류인 물고기 자체다. 그래서 결국엔 더 큰 놀라움을 안긴다. 동시에 다양하게 변용 가능한 은유로도 해석할 수 있다. 빛을 찾아가는 과정 역시 만만치 않다. 타협할 수 없는 목표를 위해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p.146)한 결과 인간은 어떻게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치밀하게 고발하는 이 책은 위험은 늘, 너무도 가까이 있음을 경고한다. 룰루 밀러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Peabody Awards)을 수상한 과학 전문기자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찬사 일색의 평가와 함께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다. 여기에 밑줄에서 밑줄로 옮겨가기 어려운, 하나의 밑줄에 오래 묶어두는 책이라는 평을 더한다. 또한 삽화만 보는 시간을 따로 확보해도 좋을 것이다.

무질서도는 계속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알려진 이 명제는 이미 질문이 아니라 법칙이다. 혼돈은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고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p.16)이다. 저자는 과학자인 아버지의 이런 주장에 반하는 인물을 알게 된다.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재난에 가까운 혼란을 대하는 방식은 가히 놀랍다. 저자는 조던의 자서전을 통해 그를 추적하게 되는데 형의 죽음과 이 시기 식물의 수집, “승리의 선언이자 통찰의 선언”(p.31)인 라틴어 학명들, 이름들을 강박적으로 수집하며 무력함을 넘어서는 페이지들이 지나간다. 페니키스 섬에서 만나는 박물학자 루이 아가시로부터 “신성한 사다리” 개념(p.44)을 배운 조던은 평생 맞춰야 할 퍼즐이자 반짝이는 비늘로 된 실마리들인 물고기를 처음으로 만난다. 그는 혼돈과 맞서는 자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라는 일곱 살 아이의 질문에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p.54)라고 아버지는 대답한다. 설명하고 재차 강조한다. 이제 더 이상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녀에게 혼돈만이 지배자인 이 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아버지처럼 단단하기가 어렵고 가족들이 감당하는 아픔도 상처로만 새겨진다. 그때 인생의 선물과도 같은 만남으로 그녀는 안식처를 찾은 느낌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그를 잃고 그를 되찾고 싶다는 간절함만 남는다. 이 여정의 끝은 기대와는 다른 결말이지만 그녀는 이미 성장한 이후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빛과 그림자로부터 시선을 피하지 않은 결과, 끊임없이 고민하고 진실에 닿고자 움직인 결론이다. 아프지만 다행스럽기도, 충격적이지만 귀 기울이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하나의 마침, 해방에 이른다.

저자는 자전적 이야기의 한 가운데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혁신적 인물을 배치한다. 후회와 고통으로 자책하던 자신에게 실패에도 머뭇거리지 않는 돌진의 아이콘인 ‘조던으로부터 배우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스탠퍼드대학 총장을 역임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19세기에 활동한 생물학자(분류학자)로 개인적 아픔도 오로지 ‘일’로 이겨낸 “그릿”의 대표주자다. “어느 생물이 어느 생물을 낳았는지에 관한 실마리, 생명이 흘러가는 방향에 관한 실마리, 인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실험에 관한 실마리,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을 개선하기 위한 비결에 관한 실마리를.”(p.105) 찾는데 온 힘을 쏟았으며 그 생물의 이름을 발음하는 행위는 “새로운 종의 탄생”(p.106) 의식이 된다. 자신이 발견한 포획물들을 전리품처럼 높이 쌓아 전시하는 그는 이미 경계를 넘는다. 또 하나의 바벨탑을 세우며 결국 “우생학”이라는 악의 지대까지 확대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다음 이야기를 곧바로 듣거나 하고 싶게 만든다. 계속 몰입하게 되는 흡인력이 책을 덮지 못하게 한다. 책 속 이야기의 연결과 전환이 매끄럽고 미지의 것을 향한 항해에 동승하는 두근거림을 선사한다. 문장은 명확해서 이해하기 용이하다. 동시에 비유와 묘사가 아름답고 때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질문하는 책이다. 인물에 이입하는 읽기가 어느 시점부터 틀어지고 선망이 실망으로, 오싹한 두려움으로, 왜 이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안타까움으로, 다른 선택과 경우의 수는 없었을까 하는 두리번거림으로 번져간다. 미처 알지 못했고 그래서 관심이 덜했던 학문의 일면, 슬픈 역사의 한 장을 엿볼 수 있었고 이는 수많은 인용과 주석에서도 짐작 가능한 저자의 열정에 빚진다. 진심은 역시 독자의 가슴도 뛰게 한다. 다만, 결말에 이르자 저자의 탐구 여정과 “혼돈을 이길 방법”이라는 개인적 추구가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며 뜻밖의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저자의 환희와 감격이 가히 폭발적이라 독자는 오히려 한 발 뒤로 빼며 박수라도 쳐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잘못된 일들을 저작으로 인해 바로잡을 수 있었다는 건 다행이면서 커다란 성과다. 가능성과 희망, 겸허함과 공존에의 의지, 불확실성의 허용, 불확실성의 확실성을 사유하게끔 하는 책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 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 불가결한”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 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p.189)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p.227)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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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 사회적 재난 시대의 고전 읽기
로버트 자레츠키 지음, 윤종은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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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자레츠키의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Victories Never Last(윤종은 옮김,휴머니스트), 2022』는 “사회적 재난 시대의 고전 읽기”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고전을 거울삼아 현실을 비추는 책이다. 3년여 전 맞닥뜨린 코로나 19라는 현실은 두렵고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를 뚝뚝 떨어뜨렸던 팬데믹은 과거의 예를 거슬러 올라가고 문학의 상징을 들여다볼수록 예외적 현상이 아닌 또 한 번의 반복임을 일깨운다. 또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역사학자이면서 근대 고전 언어학자인 로버트 자레츠키는 유럽의 문화사와 지성사를 연구해 왔으며 카뮈 관련서들을 출간했다. 2020년 초 코로나 19가 미 전역을 휩쓸고 대면 강의가 중단된 시기에 저자는 요양병원 봉사를 자원해 재난에 처한 위기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는 활자로 기록된 고전 속 인물들과 예기치 못했던 환경에서 힘겨운 숨을 내쉬는 현실의 사람들을 교차시킨다. 어떤 뜨거움과 감동이 있다면 이는 학자의 책상을 벗어나 고통 받는 이들에게로 섞여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페스트”의 두 주인공, 리외와 타루의 대화에서 책의 제목을 가져왔다. 들어가기에 앞서 “하지만 당신의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뿐이에요.”라는 문장을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전염병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을 때 가능한 대처 방법으로 <페스트>의 장 타루가 강조하는 “주의력”과 아이리스 머독이 말하는 “삶의 밀도”에 집중한다. 이를 위한 방법은 철학과 문학 탐색인데 본문에서 다섯 명, 후기에서 다시 두 작품을 살핀다. 1장 “투키디데스와 아테네 대역병”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내전인 스타시스의 기원과 의미, 투키디데스가 히포크라테스의 후계자라기보다 홉스의 선구자에 가까운 이유, “희망과 거리를 둘지언정 절망에 빠질 여지는 더더욱 남기지 않는”(p.63) 태도와 그로 인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길이 소장할 고전임을 전한다. 이쯤 되면 읽어야 할 다음 책으로 순서를 바꿔 명단에 올라오고도 남는다. 2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안토니누스 역병”은 전쟁과 역병이 한창이던 때 <명상록>을 집필하며 “내려다보는 시각”, 곧 “추상하는 시각”을 추구했던 철학자이자 로마 최고 통수권자를 만나본다.

3장 “미셸 드 몽테뉴와 가래톳 페스트”에서 역병을 피해 영지를 버리고 방랑자가 되었던 몽테뉴는 참혹했던 6개월 이후 마흔도 되기 전 은퇴하며 철학적 사색에 매진키로 결정한다. “자기 존재를 충실히 누릴 줄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완벽하며 신성하기까지 한 일”(p.152)이라고 했던 그는 세 권의 <수상록>으로 모든 순간의 정직한 기록자가 된다. 4장 “대니얼 디포와 런던 대역병”은 17세기 영국에서 통계의 의미와 이점을 찾아본다. 즉, “겉으로 보기에 반박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위안을 줬으며, 미래를 수량화함으로써 두려움을 억눌렀고, 과거에서 일정한 형태를 찾아냄으로써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했다.”(p.175)는 통계의 기능이다. 하지만 디포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뒷받침하는 데 통계를 활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숫자가 의도에 의해 편집되는 일은 그 역사가 꽤 오래 되었다. 5장 “알베르 카뮈와 갈색 페스트”는 카뮈의 부조리 론과 이를 드러내기 적합한 장소, 알제리의 오랑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다. 페스트는 사건을 넘어 나치즘을 뜻한다고 훗날 밝힌다. 타루의 입을 빌린 “인간의 모든 문제는 꾸밈없고 명쾌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말이나, 랑베르의 예에서 “도덕은 봐야할 것을 똑똑히 보는 일“(p.227)이라는 지적은 여운을 남긴다. <후기>에서는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과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나란히 놓는다. 결국 사랑이 부조리를 치유한다.

이 책은 범 유행 전염병, 팬데믹이라는 재난을 경험하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서가의 고전 몇 권을 처방한다. 그들의 행보가 우리와 다른 듯 닮았으며 이를 통해 무엇을 취할 수 있을지 힌트를 마련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고전이 특별히 추려진 양보할 수 없는 작품임은 바로 알 수 있다. 로쟈 이현우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가 서평 겸 비평의 역할을 한다고 전한다. 흥미와 관심을 갖게 하거나 한 번 읽게 하는 서평의 역할과 작품 속 인물에게 재해석의 여지를 줌으로 다시 읽게 하는 비평의 역할을 언급한다. 자연히 책장을 덮은 후 제2, 제3의 독서가 그물처럼 이어지게 된다. 또한 여기에 머물지 않는 저자의 행보가, 스러지는 이들과 눈 마주쳤던 순간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한 인간이 받아 마땅한 예우를 저자가 대표로 표한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든다. 각자 더욱 궁금한 작품은 다르겠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탁월한 저자 투키디데스를, 자기만의 성에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수상록(에세)>의 몽테뉴를 먼저 만나보고 싶다. <수상록>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마지막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했던 우정을 어느 시대, 어느 독자가 되었건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문장이 의미로 가득 차서 한 줄도 제외할 수 없는 이 책은 느리게 아껴 읽을 만하다.


책 속에서>

그랑은 카뮈가 <페스트>를 구상하며 쓴 노트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보잘것없어 보이는 인물이다. 그러나 훗날 카뮈가 <보잘것없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말했듯, 보잘것없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을 아니다. 오히려 그랑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다른 인물과 달리,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늘 알고 있다.(p.238)

내가 보기에 요양원의 현실은 고대 그리스 극작가들이 고안하고 카뮈가 받아들인 비극적 상황에 속했다. 1943년, 카뮈는 노트에 이렇게 썼다. “비극은 대립하는 두 세력이 동등하게 정당하고 동등하게 존재할 자격을 갖추고 있을 때 성립한다.” 요양원은 <오이디푸스 왕>의 테베는 물론, <페스트>의 오랑과 비교해도 전혀 방대한 무대가 아니었지만, 충분히 비극적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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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너머로 달리는 말 (리커버 에디션)
김훈 지음 / 파람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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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달 너머로 달리는 말(파람북, 2022)』이 2년 전 출간본의 리커버 에디션으로 나왔다. 속표지 이전 첫 면에 실린 “문장은 전투와 같고 표현은 양보할 수 없다”라는 글귀가 김 훈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면서 다시금 기대를 높인다. 공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지도와 등장인물 소개가 이어지는데 여기서 등장인물이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과 말”이라는 구체적 지목이 눈에 띈다. 그 둘의 이야기가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침 없이 동일한 무게로 펼쳐지지 않을까 예상케 한다. 최근작 『하얼빈(2022)』을 비롯하여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까지 역사소설 3부작 외에도 장편과 단편, 에세이 등에서 작가는 탁월한 문장가, 어휘의 달인, 작가들의 작가라는 명칭을 실감케 해왔다. 한편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서 보여주는 판타지적 설정은 조금은 독특한 지점에 자리한다. 간결하고 적확한 언어로 그리는 환상 서사라니,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이미 나아가고 있다.

초와 단, 두 나라는 두 세계를 상징한다. 유목 부족들을 통합하며 세력을 키웠던 초나라는 산 자들의 나라로 ‘돈몰’이라는 풍속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문자를 멀리한 대신 노래와 춤은 좋아하며 아득하게 펼쳐지는 초원을 아름답다 생각한다. ‘시원기’로 초의 시종을 어림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문자를 받들었던 ‘단’은 늙음과 죽음을 귀히 여겼고 특히 왕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필요한 목숨은 기꺼이 희생시켰다. 농사와 성 쌓기는 땅을 의지하는 이들에게 중요했다. 초의 신월마는 초승달을 향해 달리는 말이라는 의미대로 함께 이동하나 그중 일탈한 총총은 대가를 치른다. 단나라 왕의 성 수비대 마구간에서 태어난 야백은 비혈마로 그들은 지는 해를 향해 달린다. 초나라 목왕의 아들인 표의 말 토하와 단의 군독 황을 태우게 되는 야백은 인간처럼 바라보고, 느끼고, 가늠하고, 선택한다. 돈몰한 초의 목왕은 큰아들인 표에게 단의 돌무더기를 걷어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당연하고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사명이 된다. 서로를 겨누는 전쟁에 다른 결말은 없어 보인다.

소설은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가 충돌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시공간을 이탈시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로를 인정하고 허용하지 못할 때 파멸로 향하는 열차는 브레이크가 없다. 마치 표가 술에 취해 내린 결정을 깨서 뒤집고 깨서 내린 결정을 취해서 뒤집듯이 갈피 없는 혼돈이 지속된다. 개인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 겪는 흥망성쇠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보인다. 싸움도 분노도 영원할 것 같다. 그러나 한순간에 흔적 없이 스러지고 말 때의 허무함은 깨달았을 때 이미 돌이킬 수 없으니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로도 읽힌다. 또한 이 어리석음은 먼 과거의 잊혀진 순간을 넘어 현재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작가 고유의 어투, 문체를 한껏 경험할 수 있었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은 묘사하고 설명할 때에도 선언처럼 다가온다. 글이 색과 영상을 만들어내고 상상을 자극한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정의 내리기는 의미를 곱씹게 한다. 다양한 함의와 은유는 지칭하는 대상의 표면에 머물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때로는 기록, 문장, 이야기,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 읽는 자는 어떠해야 하는지도 전한다. 소설은 죽기까지 달리는 일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그 잃어버린 푯대에 대해서도 묻는다. 역동적이면서도 자주 시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은 내내 그어지는 밑줄을 모아 다시 읽고 답하도록 독자를 이끌 것이다.

책 속에서>

후세에, 상양성의 폐허에서 기왓장에 새긴 단의 고문자가 발굴되었다. 상양성 시대보다 오백 년 앞선 시대의 문자인데, 그 후에 단 문자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고문자는 단어만 있고 문법이 없었다. 글 읽는 자들의 헤아림으로 단어와 단어 사이를 엮어가면서 문맥을 통해야 했는데 읽는 자들 사이에 이해득실이 어긋나서 글자들 사이에서 때때로 피바람이 불었다.(p.153)




(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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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이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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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이현우 옮김, 문학동네) 1899, 2020』은 속수무책 무거운 바통을 독자에게 넘기고는 숨죽이게 만드는 작품이다. 역자 이현우는 열린 결말을 문학적 장치보다는 등장인물의 역량 부족에서 찾는다. 읽을수록 묘하게 겹쳐지는 실루엣을 어느 순간 발견하게 될 독자는 필시 위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번에 읽고 다시 읽게 하는, 나아가 무한 루프에 가두는 것이 어쩌면 단편 소설이 추구하는 미덕이 아닐까. 세계 최고의 극작가, 세계 최고의 단편 작가로 불리는 안톤 체호프(1860~1904)는 1000편에 이르는 단편 소설을 썼다. 나보코프는 이들 중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이라고 꼽는다. 작가는 단편을 발표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그가 활동한 시대는 ‘체호프 시대’라 불린다. 하비에르 사빌라의 일러스트를 더해 감상하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상상의 여지를 한 뼘 더 넓힌다.

이른 결혼으로 아직 마흔이 되지 않은 구로프는 아내를 비롯해 대부분의 여성을 저급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경험에서 비롯한 결론이었고 수차례 누적된 외도는 연애의 생리부터 시작과 종결에 드리운 감정의 고저까지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일상으로 지루하게 치부되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역시 빠르게 잊힐 또 하나의 추억을 보탰을 뿐이다. 휴양지 얄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서로에게 점점 자연스러워 보인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이제 별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둘만의 공간에서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보인 반응은 남자에게 의외다. 그녀의 진지함은 그의 루틴을 깬다. 더 나은 삶을 찾고 싶었던,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던 스무 살의 안나는 결혼했고, 그때의 선택이 괴로웠고, 현재의 자신도 괴로울 뿐이다. 헤어질 시간 앞에서 구로프는 잊지 못할 거라고 진심을 전하는 그녀와 달리 가면 쓴 자신을 내버려 둔다.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자기 탓이 아니다. 그가 확신하며 ‘끝’이라 내렸던 결론. “하지만 정말로 끝나기까지는 아직도 얼마나 먼 길이 남은 것인가!”(p.47)라고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절정에 이르러 독자를 놓아버린다. 마치 롤러코스터의 꼭대기에서 숨죽인 채 동작 그만 하고 있는 형국이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닌 이 결말, 다른 결말을 주소서, 작가에게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고 싶기도 하고,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가장 복잡하고 힘겨운 일’(p.59)을 어쩔 거냐며 걱정이 앞선다. 소설은 훌훌 털고 책장을 덮지 못하게 하는 강렬한 몰입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옳고 그름, 도덕과 부도덕, 사랑이냐 그를 가장한 합리화냐, 이어지는 흑백 논리만으로는 결코 만족스런 결론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환상에 빚지는 일 없이 지극히 사실적이다. 그럼에도 현재를 채우는 균일한 일상에 틈을 내고 감각을 넘어 또 다른 차원을 알아차리게 하는 장면들은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한다. 또한 구로프만 특별히 공적인 삶과 비밀스런 삶이라는 두 가지 영역을 살아내고 있을까? 조건부 진실과 조건부 기만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꿈꾸는 자들이 여전히 얼마나 많을 것인지. 누구나 예외일 수 없는 보편적 갈망은 어쩌면 질문 보다는 공감을 취할 것이다. 성장은 비탈보다는 계단 오르기에 가깝다고 한다. 그로프와 안나가 의도하지 않았던 계단에 함께 오르게 되었으니 어떤 빛깔이 되었건 보이는 풍경은 달라지지 않을까. 백 년이 더 지난 고전이 고전(苦戰)하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책 속에서>

이런 항구성에, 우리들 각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완전한 무관심 속에, 아마도 영원한 구원의 약속, 지상에서의 삶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완성을 향한 무한한 진보의 약속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중략) 구로프는 우리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인간적 존엄을 잊은 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했다.(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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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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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는 퍼즐로 완성한 아버지의 초상, 딸이 부르는 사부곡이다. 작가는 1990년 첫 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낸 후 신춘문예 당선 및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32년 만에 나온 장편소설로 리얼리스트의 완벽한 귀환을 알린다. 정지아는 후기에서 “나의 비극은 내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 비극의 출발이었다.”(p.267)라고 말한다.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는 독자를 흠뻑 빠져들게 했는데 허구가 아닌 자전적 색채를 덧입자 감동은 배가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남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던 깊은 여운과 예기치 못했던 ‘과제’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도와 카타르시스, 그리고 약한 체증을 동시에 경험케 하는 책이다. 소설의 시간이 끝나면 비켜갈 수 없는 독자 개인의 시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p.7)라는 첫 문장이 강렬하다. 내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하는 딸의 회상이 영정 속 빼뚜름한 아버지의 시선을 받으며 그려진다.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대학 강사인 딸 고아리는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 고상욱의 또 다른 모습과 만난다. 사회주의자였고 전 빨치산, 합리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꼿꼿한 선택과 행동이 현실주의자인 딸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의 나됨은 내 선택이 아니었기에 그로 인한 원망도 세월만큼이나 쌓였던 딸.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해 선 보증으로 거푸 빚을 떠안으면서도 필시 사정이 있었으리라 원망하지 않았던,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다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찾은 사람들이 내민 조각들은 노란 머리 염색하고 할아버지를 애달프게 그리는 소녀처럼 처음 보는 것들도 있었다. 하나뿐인 동생에게도 원수처럼 여겨졌으나 그 원망을 무심히 받아내다 그대로 떠났기에 더 마음 아픈 아버지지만 작은아버지의 ‘사정’처럼 비로소 알게 된 것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청춘의 빛나는 시선을 가진 소년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사시였던 게 아니었다. 질게 뻔한 전쟁에 젊은 목숨을 살리고자 따르는 청년을 만류하는 아버지도 있었다. 그런 싸움을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뒤늦게 헤아리는 시간, 조금 더 일찍 알 수 없었기에 슬픈 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읽는다는 행위가 이토록 재미있는 일이었나 싶을 만큼 빠져들게 만든다. 또한 고상욱이라는 인물의 삶을 엿보며 해방 이후 70년의 혼란과 비극을 살피는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아픔은 깊지만 마냥 어둡지 않았다. 이는 대화와 서술의 균형, 맛깔나는 사투리(때론 노래 같은), 유머의 일상화, 타고난 재치가 곳곳에 반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공감하게 되는 진지한 사유는 독자를 머물게 한다. 작가는 아리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 맺는 법, 삶을 대하는 태도, 소중한 것을 묵묵히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다.

내 부모님의 해방일지를 쓰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몇 해 전 이00 교수님의 자서전 쓰기 수업에 참여한 이후로 마음속 어느 구석엔가 가라앉아 있다. 혹여 흔들리기라도 하면 깔린 진흙이 금새 흙탕물로 일어날까 싶어 살금살금 걷고 있는 중이다. 소설은『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재미있었나? 그렇다면 이제 당신 차례요!’라고 독자를 환기시킨다. ‘저는 독자일 뿐이요!’라는 말은 궁색한 변명이다. 탓은 쉽고 감사는 어려웠던 날들, 오늘만 날인가 외면하던 순간들이 너무 늦었다고 아우성치기 전에 직시해야 할 것이다. 자유는 또는 해방은, 불편하게 옥죄는 굴레를 날 선 칼로 끊어낼 때가 아니라 이해함으로 화해할 때 목울음처럼 뜨겁게 안겨오는 게 아닐까. 한달음에 읽어내고 오래 붙잡힐 소설이 이 겨울을 따뜻하게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사정이,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의 사정이.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p.33)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p.181)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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