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모우 미운오리 그림동화 1
나피 지음, 송지현 옮김 / 미운오리새끼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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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모우(송지현 옮김/미운오리새끼)2020/2022』는 ‘겨울의 모습과 상상 속 생물과 장소’를 즐겨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림책 작가 나피(Naffy)의 첫 그림책이다. 표지의 인상은 색감으로 먼저 다가온다. 앞, 뒤표지의 검은 배경, 책등의 붉은 색에 시선이 머물다보면 빨간 모자를 쓴 소녀와 작은 동물이 마주보고 선 모습에 이어 그 둘을 감싸듯이 서 있는 나무의 행렬이 깊이를 간직한 채 독자를 초대하는 듯 보인다. 둘 중 누가 모우일가? 면지 역시 검은 바탕이다. 오른 쪽 면지의 커튼이 드리워진 문은 본격적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 문을 열면 무슨 일이 생길지 호기심을 간직한 채 페이지를 넘기면 문이 열리면서 소녀와 작은 동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한 장의 트레이싱지가 소녀와 동물의 경계를 가르는데 제목만 적힌 독특한 속표지가 앞으로 펼쳐질 환상을 암시한다.

소녀, 토토는 아픈 할아버지와 함께 숲 속의 집에 살고 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찾아온 작은 괴물은 토토의 집에 들어오더니 하루를 같이 보낸다. 놀라 숨어버린 괴물을 두고 토토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괴물은 다가와 소녀의 그림을 본다. 그림 덕분에 소녀는 괴물에게 ‘모우’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다음날 모우를 따라 깊은 숲 속까지 들어가게 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 덩어리, 별들을 보고, 별 조각이 녹아 만들어진 투명한 수프를 나누어 먹고 나니 더 이상 다리도 아프지 않다. 집에 계신 할아버지가 생각난 토토는 수프를 가지고 집으로 향한다. 어두운 밤의 숲을, 눈밭을 하염없이 달려서. 집에 거의 다다라서 쏟아져버린 수프 때문에 소녀는 슬퍼한다.

면지의 문에 드리워진 붉은 커튼은 희망과 환상의 가능성을 띈다. 모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소녀의 집은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운 색조를 띈다. 하지만 모우가 들어오자 양탄자는 화사한 주황과 노랑의 조각천을 드러내고 벽지도 가구도 색을 덧입는다. 터무니없다고 현실에만 시선을 고정한다면 모우도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으로 소통하는 법은 커다란 괴물들에게서도 공감을 이끌어낸다. 불가능해 보이는 수단일지라도 진심은 마법같은 힘을 발휘해 서로를 넉넉히 연결시킨다. 이런 경험은 소녀를 성장케 하고, 성장한 후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토토는 다시 옛집으로 돌아온다. 기적 같았던 기억이 이야기로 되살아나 모두에게 다시 경험될 수 있도록. 뒷 면지의 문을 앞 면지와 비교해 보면서 이번에는 독자가 바통을 넘겨받을 차례다. 우리의 현실에도 불을 밝혀 줄지 모를 모우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건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숲 속의 모우』는 겨울 필독 그림책의 한 켠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출판사 도서 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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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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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정소영 옮김/문학동네/1990/2021)』는 현대 카리브해 문학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로 꼽히며 매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는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자전적 소설이다. 본명 일레인 포터 리처드슨이 아닌 필명을 사용하게 된 이유로, “저메이카”는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했을 당시 섬의 이름을 듣고 영어식으로 부른 이름으로 식민지성을 나타내고자 택했(p.139 연보)는데 식민 지배하인 고향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던 작가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킨케이드는 “모녀관계를 탐구하는 동시에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인종과 계급, 섹슈얼리티, 디아스포라 정체성”(출판사인용)을 주로 다루는데 수전 손택은 저메이카 킨케이드를 향해 “내가 언제고 읽고 싶은 글을 쓰는,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고 꼽는다.

식민 지배하인 고향 앤티가섬을 떠나 외국인 입주 보모로 미국의 대도시에 도착한 19세 루시는 “나는 이제 열대지방에 있지 않았고, 그 깨달음이 바짝 말라붙은 땅 위로 물줄기가 흐르듯 내 삶으로 흘러들어와 두 개의 강둑을 만들었다. 한쪽 강둑은 나의 과거였다.”(p.11)고 말하며 다른 한쪽 강둑은 “나의 미래”라고 이름 붙힌다. 머라이어, 루이스 부부와 그들의 네 딸과 함께 입주 보모로 지내는 동안 루시가 새롭게 보고 경험한 것들과 현재의 상황은 자신이 두고 온 과거를 불러낸다. “살아온 역사가 대단하구나.”라는 머라이어의 말에 “원하시면 얼마든지 가지셔도 돼요.”(p.21)라고 응대하는 루시는 냉정한 관찰자이자 상황 이면의 숨은 의미, 진실을 파고든다. 그녀의 관찰자적 입장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p.21)로 대변되는 이해불가, 소통불능으로 점철된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는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p.26), “어떻게 하면 그래요?”(p.36) 등으로 변주된다. 입 밖으로 소리내어 표현하지 않더라도 루시의 내면에서는 이 '불통'이 분노의 색을 간직한 채 연거푸 울린다. 개인사적으로 분노의 중심에는 자신의 가족, 특히 엄마가 자리하고 거시적으로 확장했을 때 피식민지와 지배국의 역사를 함축한다. 머라이어와 루시에게 수선화가 얼마나 다른 의미인지, “하지만 그녀가 아름다운 꽃을 보는 그속에서 나는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달라질 수 없었다.”(p.29)고 루시는 생각한다. 또한 루시의 시선은 이중성과 허위를 간파한다. “머라이어는 우리 모두가, 아이들과 내가 모든 것을 자기처럼 보기를 바랐다.”(p.33) 이는 머라이어에게만 국한된 취향은 아니다. 누구나 자기처럼 볼 것을 원하고 요구하게 된다.

루시가 살아온 시간은 시선의 방향을 이끄는 것은 물론 시력 또한 좌우한다. 가식과 허위를 꿰뚫는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쇼일 뿐,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p.41) 루시의 예상대로 머라이어와 루이스의 쇼는 곧 파경을 맞는데 이를 바라보는 루시는 이미 모든 것을 간파한 듯하다. 그녀가 경험한 것들은 이론이 아닌 언제고 적용 또는 해석 가능한 실전의 사례들로 되살아난다. “내가 떠나온 고향에서는 어떤 존재가 이건가 싶으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돌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서 ‘진짜’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p.46)

루시의 과거, 생의 한가운데는 엄마가 차지하고 있다. 엄마는 애증의 대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정점이자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절정이다. 넌 정말 화가 많은 애구나, 라는 머라이어의 말에 “물론 화가 많죠. 당연한 거 아니에요?”라고 답할 때 그 화의 주요 원인이 엄마이기도 하다. 화는 세분화되고 범주로 묶이고 루시의 선택과 행동의 동기로 작용한다. 루시라는 이름의 원래 의미를 알려주던 엄마, 마치 엄마가 원했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그 반대로 나갔다 싶은, 온힘을 다해 “비뚤어지고 말테다”하는 결기까지 느껴지는 애정행각들, “남자의 생애는 언제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참”(p.78)이고 세계 끝자락에서 태어나 고향을 떠나는 자신의 어깨에는 하인의 망토가 둘러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도. 나중에는 화 자체를 넘어서고 시선과 해석에 루시만의 통찰을 덧입힌다.

루시의 가열찬 성장 이야기는 주제가 명확하면서도 이중, 삼중의 확장된 이야기를 품고 있다. 분량이 많지 않은 소설을 가뿐히 읽고 즐기게 되리라는 기대와 달리 “모든 사람을 조금 덜 행복하게 만드는 게 내 임무 같아요.”라고 말했던 저자의 의도는 성공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명확한 목소리, 회색지대라고는 없는 원색의 발언, 행동의 일관성을 직설적 문장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사계절을 지나면서 변하는 풍광의 생생함, 색으로 각인된 추억 속 장면들(p.105), 열대 우림과 대도시를 왕복하는 입체적 배경, 그 안에서 포착할 수 있는 인물들-‘상투적 인물’(p.49)부터 비겁자나 권력을 활용하기가 너무 쉬운 자,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와 치열하게 노력해도 결코 얻기 어려운 자 등-의 관계, 가족, 우정, 사랑의 의미 등을 응축해서 담고 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여운 덕분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모든 것은 가능하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상징적 그림책 “네 개의 그릇”도 다시 펴보고 싶어진다. 책을 읽고 나면 킨케이드가 “브론테와 울프의 후손”이라는 의견에도 공감하게 될 것이다.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루시의 이야기는 아마도 쉽게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나는 이제 열대지방에 있지 않았고, 그 깨달음이 바짝 말라붙은 땅 위로 물줄기가 흐르듯 내 삶으로 흘러들어와 두 개의 강둑을 만들었다. 한쪽 강둑은 나의 과거였다. 워낙 빤하고 익숙해서, 당시의 불행조차 지금 떠올리니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나의 미래였다. 텅 빈 잿빛 공간. 비가 내리고 배 한 척 눈에 띄지 않는, 구름이 잔뜩 낀 바다 풍경이었다. 이제 내가 있는 곳은 열대지방이 아니었고, 몸의 거죽도 속도 다 추웠다. 그런 감각에 휩싸인 것은 처음이었다.”(p.11)

머라이어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다루는 그림책을 쓰고, 그것을 지키려 애쓰는 단체에 수익금을 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머라이어와 마찬가지로 그 단체 회어ᅟᅮᆫ들은 모두 부유했지만, 눈앞에서 진행되는 세상의 피폐화와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연결시키지 못했다.(p.60)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기울어진 자전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곳이었다. 해가 쨍쨍하고 가뭄에 시달리는 단 하나의 계절만 있는 곳. 그런 장소에서 자라면서 난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나는 눈부신 햇빛을 닮은 기질을 가지지 못했고, 실제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오래도록 가뭄에 시달렸을 뿐이다.(p.71)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것만 해도 상당한 성취였다. 그걸 이루려 애만 쓰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까지 바라면 과하지 싶었다.(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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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달의 리뷰 당선되신거 축하드려요~~

mazinga 2022-03-10 23:46   좋아요 2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한 날들 되세요!

thkang1001 2022-03-08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mazinga님! 이달의 리뷰에 당선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mazinga 2022-03-10 23:4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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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최성은 옮김/은행나무)1996/2019』은 인간이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인이기에 시간과 그 변화과정을 전달할 필요가 있고 “그러므로 ‘이야기’란 ‘언어’만큼이나 오래되고 고전적인 것”(p.377)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온전히 구현해낸 작품이다. 역자는 토카르추크가 “미시 서사 기법을 활용하여 거대 서사를 축소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역사 속에 스러져간 익명의 존재, 역사의 뒤편에서 소수자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의미를 환기한다.”(p.373)고 밝힌다. 신화와 전설, 심리와 철학, 인류학 등 관심의 영역을 망라해 작품에 담아내고 많은 수상경력이 보여주듯 “경계와 단절을 허무는 글쓰기, 타자를 향한 공감과 연민은 토카르추크 작품의 본질적 특징”은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201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삶의 한 형태로서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해박한 열정으로 그려 낸 서사적 상상력”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태고(太高)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p.5) 첫 번째 글의 제목은 “태고의 시간”으로 공간적 배경인 ‘태고’를 확정한다. 태고의 사방 경계와 이를 지키는 수호천사를 소개할 때, 위험 요소와 수호천사, 인간 대 천사, 신과 인간, 창조와 명명하기(“창조는 신의 일이고, 이름을 붙이는 건 인간의 일이니까.(p.6)) 등 신화와 환상의 이미지를 던진다. 두 번째 글 “게노베파의 시간”은 환상적 공간에 침입한 현실, 전쟁중인 1914년 여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알리고 전쟁에 징집되어 남편 미하우가 부재 중 게노베파는 딸 미시아를 낳는다. 소설은 가계도를 그리듯이 가족의 생성과 변화 뿐 아니라 그 속의 단독자로서의 개인을 그려나간다. 이에 더해 종의 차이, 생명의 유무, 현실과 환상의 어떤 가능성 있는 구분과 제외도 불허하며 공평하게 인간은 물론 신이나 천사, 동식물, 게임이나 커피 그라인더처럼 생명력이 없는 사물 등에 까지도 무대를 내어주고 그 성장과 쇠퇴, 역동과 추구를 요약한다.

“미시아는 여느 다른 인간들처럼 불완전한 상태로 조각조각 나뉘어 태어났다. 보는 것, 듣는 것, 이해하는 것, 느끼는 것, 감지하는 것, 경험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그녀 안에서 제각각 분리되어 있었다. 앞으로 미시아의 전 생애는 이것들을 온전하게 하나로 결합했다가 다시 부서뜨리는 데 할애될 것이다.”(p.49) 미시아의 시간이 그려 나갈 궤적에서 빗겨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탄생에서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를 아우르는 시간의 행진, 그 간격, 틈을 비집고 배우고 익히고 도전하고 깨닫는 일은 일상이면서도 모험에 가깝다. 주어진 생을 살아내는 나름의 경로를, 미하우의 가계(미하우 니에비에스키-게노베파-미시아-이지도르/미시아-파베우-아델카)뿐 아니라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를 상징하는 크워스카와 딸 루타, 끝없이 썩은 지붕 널을 교체하던 보스키 영감, 그를 보며 ‘중요한 인물’이 되겠다 다짐했던 아들 파베우 보스키를 비롯한 다른 인물에게서 어떻게 생성, 소멸을 향하는지 반복해서 그려낸다.

“ ~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불규칙하게 돌아와 그 장면의 주인공을 불러내는 형식은 몰입을 높힌다. 다음 호명에서 이 인물은 또는 사물은, 사건은 어떤 변화나 반전, 희망이나 회생 가능성을 보일지 독자는 기대하고 걱정하고 종국에는 감정이입하다 연민하며 읽어나간다. 서두에서 “애정어린 연민”(p.15)을 천사들에게 허락된 오직 하나뿐인 감정이라고 명시했는데 이 감정은 독자에게 고스란히 자리잡게 되고 작가의 시선을 확인케 한다. 총 7회 등장하는 ‘게임의 시간’은 작품 전체의 복선 또는 안내로 이해할 수 있다. “이지도르는 실망했다. 노년기가 되면 만물을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혜안이 트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뼈마디가 쑤시고 잠을 이룰 수 없을 따름이었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그 누구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p.352) 오히려 망각은 안도감을 준다고 말하고 습득했던 것들은 삭제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작품은 어머니 미시아의 커피 그라인더 손잡이를 돌리는 “아델카의 시간”으로 막을 내린다. 연민의 쓸쓸함이 온기를 덧입는다.

『태고의 시간들』은 시간에 대한 다면적 고찰, 철학의 소설화, 철학으로 쓴 문학으로 다가왔다. 제목과 총 84편의 글에서 ‘~의 시간’이라는 형식을 일관되게 사용함으로 독자는 시간의 의미를 곱씹는다. 그리 오래지 않아 ‘시간’을 새롭게 정의하고 탐구하던 여정은 작중 인물들을 따라 나서는 관찰자적 입장에서 이탈한다. 어느새 독자 자신의 고유한 ‘지금, 여기’에 대입했을 때 작품은 더 이상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생생하게 다가와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의 시간’에는 내가 아는 누군가, 그리고 나의 이름이 들어간다. 사건과 시간이 촘촘히 모여 삶이 되고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 역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들려준다. 비유와 상징, 은유의 여러 겹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언어가 구축하는 또 다른 세상의 경지는 얼마나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가 감탄케 만든다.

문학의 고전적이면서도 중요한 주제 “신은 선한 존재인데, 어째서 악을 허락하는 거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은 걸까?”(p.41)부터 치열하게 살아내던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각성의 순간들, “시간 속에서 미시아를 영영 멈추게 만드는 것”(p.83)처럼 인간 보편의 내적 과업에 대한 갈망, 추구와 지향을 정확하게 설명하기에 그 문장들에 기대어 독자는 자신을 살피게 된다. 현실과 환상이 너무도 태연히 잇대어 있는 점은 『백년의 고독』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마꼰도에서 경험했던 한 가문의 흥망성쇠가 태고에서 어떻게 변주되는지 연결하며 보게된다. “태고의 시간들” 역시 해결할 수 없는 처연한 고독과 이를 감내하는 인간들을 말한다는 점이 여운을 남긴다. 작품의 전반부, “미시아의 그라인더의 시간”에서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며 “어쩌면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이자 태고라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p.54)고 했는데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는 아델카의 마지막 장면은 스러진 듯 보이는 태고와 사람들의 사라지지 않는 현존을 드러낸다. 몰락과 실패에 아랑곳 없이,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읽고 나면 더 아쉬워지는 『태고의 시간들』은 아마도 올가 토카르추크 전작읽기로 독자를 이끌 것이다.

그는 보다 고차원적이고 지속적이며 고귀한 것, 인간보다는 시간에게 더욱 익숙한 것을 원했다. 시간 속에서 그의 사랑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것, 시간 속에서 그녀를 영영 멈추게 하는 것을 바랐다. 덕분에 그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 되었다.(p.83)

“질문을 모드고 있군요. 잘됐네요. 당신의 수집 목록에 추가할 만한 질문 하나가 내게 있거든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p.98)

상상이란 따지고 보면 창작의 일부이며, 물질과 영혼을 연결하는 일종의 다리와 같다. 특히 빈번하게, 집중적으로 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경우, 상상은 물질의 파편으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삶의 기류에 융합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뭔가가 뒤틀리면서 변화가 찾아올 때도 있다.그래서 인간의 모든 욕망은, 그것이 충분히 강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물론 기대했던 바가 전부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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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개의 그림 1000개의 공감
이경아 엮음 / 아이템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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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아의 『1000개의 그림 1000가지 공감(아이템하우스)』 머리말 첫문장은 “미술은 아름다움을 보는 기술이다. 그래서 1000개의 미술엔 1000가지 아름다움을 보는 다채로운 우주가 있다.”(p.6)는 설렘 가득한 초대로 시작한다. 도감도 아닌데 1000개의 그림이 가능할까 싶은 호기심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끄는 그림의 향연으로 과장이 아니라는 확인과 동시에 우연히 펼친 장면은 한없이 머무르다 서둘러 넘기는 과정을 반복케 한다. 책은 176명의 서양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1000편의 그림을 각 사조별로 담고 있는데, 저자는 다섯가지 미술 감상독법을 먼저 소개한다. 서양 미술사의 사조 순으로 명화를 감상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며, 두 번째는 ‘화가의 사상적 변천의 흐름을 짚어보는 방식의 감상법’(p.7)이고 다음은 ‘내 마음이 가닿는 미술을 위주로 일정 주제별로 묶어서 감상’(p.7)하는 법, 넷째는 ‘당대의 문제작을 중심으로 미술사의 흐름을 짚어보는 법’, 마지막으로 ‘한 주제를 놓고 각각의 사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미술품을 비교해서 감상’(p.9)하는 법을 전한다. 감상의 기본을 알았으니 이를 중심으로 나만의 목적과 스타일을 보태 책 속 미술관에 입성할 차례다.

『1000개의 그림 1000가지 공감』은 사조별로 자연주의 미술에서 현대미술까지 주요 화가와 작품들을 4쪽에서 6쪽 분량으로 담고 있다. 선정된 대표작과 설명은 왼편 한 페이지를 할애하고 그 외 페이지당 1~3점씩 소개한다. 대표작 오른쪽 페이지 상단에는 축소된 증명사진처럼 작은 크기의 자화상이 있는데 눈에 띄지 않는듯한 이 구성이 의외로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조금 더 눈여겨 그의 그림을 응시하게 된다. 책 한 권에 그림 1000개는 과한 것 아닌가 의아했지만 각각의 작품은 자신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독자에게 말을 건다. 유명한 그림은 유명한대로 내게만 던지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고, 그림과 화가에 대한 요약글이 그림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서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책으로 그림 감상하기는 한 순간에 여러 때, 특별한 기억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변하고, 더 알아야 할 행복한 과제로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림으로 인해 더욱 잊지 못하는 순간으로 각인되었던 장면들을 회상하고 그 그림을 찾아 화가의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세잔의 ‘커다란 소나무와 생 빅투아르 산’(p.93)은 세잔에게 감화되었던 페터 한트케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을 다시 불러온다. 어렵게 찾아갔던 미술관이 휴관일이어서 애석해했던 전시, 어쩌면 그 때문에 더 의미있게 된 윌리엄 터너, 그의 아스라한 풍경화를 기쁘게 만난다. ‘전함 테메테르 호’는 ‘영국인이 꼽은 가장 위대한 그림 1위’(p.214)를 차지했다고 하니 그날의 휴관이 더 아쉽다. 페이지를 넘기며 혹시 있으려나 찾아봤던 그림은? 역시 있었다. 한스 홀바인의 ‘관속의 그리스도’인데 ‘한스 홀바인의 걸작이자 문제작’(p.547)이라고 평한다. 이 그림은 도스토옙스키의 5대 소설 중 하나인 『백치』에서 미쉬낀 공작이 로고진의 집에서 보고 한참 이야기 나눴던 그림으로,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아내와 하루동안 스위스 바젤에 머물기도 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다시 한 번 중요하게 이 그림을 등장시킨 것이다. 먼저 그림의 크기를 확인하고 상상해본다. 이 그림 앞에 섰던 화가와 대문호와 작중 인물인 미쉬낀 공작과 로고진, 그리고 다시 한 번 찾아보고 기억하려는 독자이며 감상자인 나! 그림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기도 한다. 코로나 시대, 갇히고 때론 떨어질 것을 요구받는 시대에 그림 한 점은 시공을 초월하고 연결시키는 현존으로 다가와 벅찬 감동을 준다. 계속해서 다시 펼칠 책이고 그때마다 다른 것을 내보일 것이다. 신비로운 보물찾기가 될 『1000개의 그림 1000가지 공감』을 기쁘게 추천한다.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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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1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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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박형규 옮김/문학동네)』는 시인이자 번역가, 소설가인 보리스 파스테르타크(1890~1960)의 유일한 장편 소설로 1945년 출간에 대한 기대없이 집필을 시작해서 10년 후 완성하게 되고 출간은 1957년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첫 번째 정체성은 주인공 유리 지바고에게 투영했듯이 ‘시인’으로 상징주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 미래파 시인 마야콥스키의 영향이 두드러진 시집들을 출간한다. 1931년부터 약 10년간 작가동맹과 불화했던 스탈린 절대 권력시대에 셰익스피어, 괴테 등을 번역하며 작가로서는 침묵기를 거치고 이후 모스크바 근교에 은둔하며 『닥터 지바고』를 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자국 내 출간불허로 이탈리아에서 처음 소개된 이듬해인 1958년 “동시대 서정시와 러시아 서사문학의 위대한 전통의 계승에 기여한” 업적으로 이반 부닌에 이어 러시아에서 두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출판사 인용)된다. 『닥터 지바고』는 1965년 데이빗 린 감독의 영화로 다시 한 번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따로따로 전부가 계산된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움직임들은 그것들을 한데 모으는 삶이라는 일반적 흐름에 불분명하게 뒤섞여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자기 관심사의 메커니즘에 따라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주요한 조절 장치인 근본적인 무사태평함이 없다면 그 메커니즘은 잘 작동하지 않는다.”(p.25) 이 무사태평함은 연대감각, 연결의 확신, 차원과 역사를 아우르는 행복감을 주겠지만 이에서 불행하고도 괴로운 예외가 바로 민감한 소년 유라,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다. 긴 소설이 시작되고 몇 페이지가 지나지 않아 소년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잃은 채 친구들과 유년의 시기, 배움의 때를 지나고 있다.

미망인인 아말리야 카를로브나는 아들과 딸 라리사를 데리고 가난의 공포 속에서 후원자 코마롭스키에게 의지한다. 곧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생명체’(p.43)였던 라라를 그는 ‘정신적으로 계발시켜 주었’(p.79)으며 비열함이 결여된 라라는 이에 ‘궤변의 길’(p.81)로 들어선다. 소년 안티포프를 만나게 된 라라는 그의 마음을 거부하지 않는다. 유리 안드레예비치는 코마롭스키와 함께 있는 라라를 우연히 보았을 때 인형극의 괴뢰사와 꼭두각시 인형에 견주는데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유라와 토냐에게 결혼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얼마 후 함께 파티를 향하던 날, 유라(지바고)와 라라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각각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지나친다. “유라는 거리를 둘러보다 조금 전 라라의 눈에 비쳤던 것과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p.130) 의학을 공부하면서 시적 감동에 사로잡혔던 유라는 언제나 깨어있는 영혼이다. “유라는 불현 듯 블로크를 떠올렸다-그는 러시아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북방 도시의 일상에, 최신의 문학에, 현대적인 거리의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금세기 객실에서 밝게 타오르는 욜카를 둘러싼 크리스마스라는 현상이었다. 유라는 블로크에 대한 글은 필요 없고, 자신이 써야 할 것은 혹한과 늑대와 어두운 전나무숲과 함께 네덜란드 사람들이 그렸던 것과 같은 동방박사 세 사람의 러시아적인 경배라고 생각했다.”(p.131)

또다시 특별한 상황에서, 총성과 함께 만나게 된 라라. 이후 그들의 재회는 계속된다. 각각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 가정의 구속력은 시대적 상황 앞에서 바람 앞 촛불같다. 소설은 1903년부터 1929년 지바고의 죽음까지, 그리고 지바고 사후 약 20년을 그린다. 사후의 기간은 소설 말미 17장 ‘유리 지바고의 시’라는 유작시 수록의 에필로그 배경으로 삼는다. 1917년을 기점으로 한 혁명 전 후, 29년까지를 그리는 소설은 대격변 시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유리 지바고의 생애를 통해 묵직한 주제를 담아낸다. 순수하고 자유로운 개인, 사랑의 추종자이자 완성에 닿기 원했던 지바고는 내적 갈구와 선택들을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아침이 되자 그는 그전까지 사람들이 부르던 똑같은 이름으로 자신이 불리는 것에 거의 놀라움을 느낄 만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p.157)고 그려진 안티포프. 라라와 결혼 후 그의 돌연한 선택, 혁명으로의 도피와 투사가 그의 인생에 남긴 회복할 수 없는 상흔은 또 다른 ‘붉은 마가목 열매’로 종결을 맞는다. 순결과 세속의 정점으로 그려지는 지바고의 영원한 여인, 영혼의 단짝인 라라, 그녀는 현상을 꿰뚫어보며 단순하고 확고하게 삶의 궤적을 새기지만 비극적 한계를 넘지 못한다. 한결같이 감내했던 토냐는 또 어떤지. 그리고 역사의 급한 변화 속에서 희생당했던 민중의 초상, 죽어갔던 그들의 얼굴도 잊을 수 없다.

『닥터 지바고』는 사실적임에도 그 아름다움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풍경의 묘사가 시인의 소설이라는 것을 확인케 한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푸시킨을 비롯해 문학의 거목들을 불러내고 신화와 신앙을 재조명한다. 지바고의 눈과 입을 빌려 작가는 그의 신념은 물론 예술론을 맘껏 펼친다. 문장과 묘사 자체가 ‘시’이기도 하다. 이것이 시가 아니면 뭐람?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다. 음보를 줄이며 압축시키는 과정을 작가는 실제로 설명한다.(2권 p.305)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던 지바고가 삶의 마지막 시기에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 모스크바를 노래하게 되는 점도 그의 시들과 더불어 여운을 남긴다. 세대간의 사상으로 인한 반목과 갈등, 인간성 말살과 이에 대한 고민 또한 간결한 문장으로 반복해서 전달한다.

『닥터 지바고』를 읽으며 어쩔 수 없이 내내 떠오르는 작품으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빼놓을 수 없다. 전자가 1917년부터 1921년의 혁명과 내란이 배경이고 후자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조국전쟁)이니 약 100여년의 간격이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개별 성장사를 파노라마처럼 점진적으로 보여주는 『전쟁과 평화』에 비해 『닥터 지바고』는 농축되고 밀도높은 일직선상의 사랑, 사랑이 도달하기 원하는 지향점을 내내 강조한다. 『전쟁과 평화』에서 느껴지는 화음, 합력한 선(善)의 온기는 『닥터 지바고』의 실랄하고 건조한 현실인식, 차가운 내던져짐과 대조적이다. 지바고는 라라를 향한 이끌림을 자신의 언어로 정의 내리곤 한다. “영혼의 합일보다 더욱 강하게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은 것은 그들을 다른 세계로부터 떼어놓고 있는 심연이었다.”(p.232) '사랑‘ 자체를 넘어 나와 닮은 인간으로써, 영혼이 합일되는 ’나와 동일한 타자’, ‘나의 확장’으로서의 또다른 개체는 경이로움일 수 있겠다. 나아가 라라는 ‘러시아’자체로 상징성을 띈다. 적합한 문장으로 이 경지를 표현해내는 작가의 능력은 여전히 신비롭다. 작품은 물론 『닥터 지바고』에 바쳐진 헌사까지도 독자를 숙연케 한다. 100년을 채 못 사는 인간, 유한한 인간에게 삶은 무엇이어야 하나, 매 순간이 현재성을 띈 유일무이한 격동임을 부인할 수 없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닥터 지바고』는 묻고 경청하는 고전이다. 처음인 듯 새롭게 내리는 이 겨울의 눈처럼.

인간은 누구나 파우스트로 태어나, 세상의 모든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경험하고 모든 것을 표현하고 싶어한다. 파우스트가 과학자가 된 것은 선조들과 동시대인들이 범한 실수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과학의 진보는 반발의 법칙에 따라, 지배적인 오류와 잘못된 이론에 대한 논박에서부터 출발한다.

파우스트가 예술가가 된 것은 스승들의 영감을 주는 실례 덕분이다. 예술의 진보는 끌림의 법칙에 따르며, 좋아하는 선구자를 모방하고, 계승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2권 p.59)

그리고 저멀리 펼쳐져 있는 광경이 바로 러시아다, 바다 너머까지 이름을 떨쳤던 비할 데 없이 거룩한 어머니 그의 러시아, 수난자이자 고집쟁이이자 미치광이이며 결코 예견할 수 없는 대담한 파멸의 위험이 도사린 모험에 뛰어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러면서도 장난스럽고 못견디게 사랑스러운 러시아! 오,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 일인가! 이 세상에 살며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 일인가! 오, 이 삶과 존재 그 자체에 얼마나 감사한지, 이 삶과 존재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얼마나 감사의 말을 하고 싶었던지!

그것이 바로 라라다. 삶과 존재 그 자체와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그것들의 대표자이고 그것들의 표현이며, 존재의 말없는 원천들에 주어진 청각과 말의 선물이다. (2권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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