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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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독서여정은 어떻게 됩니까, 라는 모호하고 한계 없는 질문에 답은 대체로 명확하다. 내가 인식한 첫 책은 <데미안>이었고 이전의 모든 앎과 앓이는 <데미안>를 위한 준비였다고 돌이켜 생각한다. 때로 데미안과 헤세는 혼동되기도 하였고 혹시 다시 데미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헤세의 소설들을 한권씩 찾아 읽었다. 녹턴이 귓가에 끝없이 울리던 짧은 에세이부터 <유리알 유희>까지 헤세의 글에 숨은 또 다른 데미안 찾기는 계속되었다. 헤세는 시로, 구름으로, 노을지기 시작하는 저녁의 부드러운 서정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치열하고 논리적인 기준점과 선택지, 신생 이론으로 답을 요구할 때도 많았다. 내가 선망하는 쪽과 내가 처한 쪽은 한 번도 자리 바꾸는 일 없었고 한결같이 스스로를 데미안을 선망하는 싱클레어로 규정했다. 그러니 나의 두 번째 이름을 에밀이라 지은 건 당연했다.

 

재독을 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다시 읽을 때에 무언가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잠재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결말을 차마 두 번 읽기 어려웠다는 핑계를 하나 더 보탠다.(다시 보니 결말은 바람 앞 흔들리던 촛불이 어떤 바람 앞에서도 춤출 수 있는 촛불로 거듭남에 방점이 찍힌다) 그럼에도 데미안은 늘 나의 시야 범위 내에 자리했는데,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했기에 종이에 활자로 찍힌 데미안이 나무 책꽂이에 기대어 있어야 했다. 삼중당부터 민음사, 문학동네까지 <데미안>들이 서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했던 생각은 잊혀지지 않는다. “얘는 언제 커서 데미안을 읽지? 큰일일세.” 여기까지는 다시 만난 데미안에게 보내는 인사다.(요즘 새롭게 놀라는 한 가지는 책에 치르는 지불 금액이다. “세상에, 데미안이 8천원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일 가치로 책값을 매기자고 시도한다면 작품에 등장하는 동화 속 청년처럼 별을 향해 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안인희 옮김, 문학동네, 2013, 1919, 240면 분량)은 온전한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스럽고도 신비로운 여정을 기록한다.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가 부제로 데미안은 화자인 싱클레어의 수기이자 성장기이다. 익명으로 출간되었던 <데미안>에 대해 토마스 만이 폭풍우 치는 등대의 불빛이라는 찬사와 함께 신예 작가 에밀 싱클레어를 궁금해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헤르만 헤세는 독일 남부 칼프에서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자라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한다.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헤세는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여 첫 시집과 산문집을 발간한다.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1904)>가 성공하며 작가의 길을 가게 되고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반전주의를 분명히 한다. 1946년에 노벨 문학상과 괴테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수레바퀴 밑에서, 게르트루트, 크눌프,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유리알 유희(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등이 있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p.7)라는 제사에서,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선 서문격인 페이지에서, 화자인 싱클레어는 독자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평이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은, 어쩌면 스치고 외면해온 주제다.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드문 오늘날, “인간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사람들”(p.8)은 죽을 때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으며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자신 또한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을 거라는 고백은 우리를 숨죽이게 한다. 내던져진 시도인 인간이라는 확인, 이해와 해석의 간극에 긴장은 더해간다. 열 살 소년 싱클레어는 지금까지 속했던 세계. 밝고 따뜻한 아버지의 집 안에 전혀 다른 성격의 또 다른 세계가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두 번째 세계는 금지된 세계에 가깝고 내 삶의 방향과 어긋나지만 분명한 끌림이 있다. 프란츠 크로머가 등장하고 이 끌림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두려움에서 그를 해방시킨 게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이 해주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비성경적이다. 지금까지의 싱클레어에게는 불경스럽고 전복적이다. 불편하고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정밀하면서 자유롭고 자연스럽기까지 하기에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스며들고 있다. 카인의 표가 죄로부터, 징벌로부터 기인한 게 아닌 뛰어남을 표식이었다고? 데미안의 다르게 생각하기는 또 다른 세계의 진입구였고 데미안의 세계를 엿보고 그로인해 그토록 그립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나 정작 구원자에게는 거리를 둔다. “, 지금은 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사람이 더 싫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p.57) 이라는 자각은 수기를 쓰는 시점까지 미루어진다.

 

싱클레어는 자신만의 공기에 둘러싸여 자신만의 법칙에 따라”(p.62) 사는 데미안을 별에 견준다. 데미안의 얼굴에 대한 묘사는 시간을 초월하여서 지배받지 않는 항속성,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나 성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존재를 보여준다. 미와 추의 개념으로 이분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간직한 그는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고 평한다. 회피의 기간을 지내고 교류한 데미안은 주의력과 의지를 집중하여 존재 전체가 소원으로 채워졌을 때 실현되는 비밀을 이야기한다. 싱클레어가 갈등했던 선과 악이라는 두 세계는 데미안에게서 더 나아가 신과 악마의 주제로 대치된다.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의 차이와 사람마다 자기만의 범위를 알아내야 한다는 견해는 익숙함, 매너리즘, 편안함과는 극단에 있는 깨어있음을 요구한다.

 

싱클레어는 자기파괴적인 방종함”(p.90)의 시기에 접어든다. 한껏 바닥을 치던 그에게 데미안 이후 두 번째 구원자가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고 그림 그리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록을 시작한다. 대상으로부터 받은 인상과 감정, 풍성해진 꿈을 그림으로 구체화할 때 또 한걸음 기대하지 못했던 자아상을 구별해내고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투쟁하는 새를 통해 데미안과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가는 세 번째 길 안내자인 음악가 피스토리우스 뿐만 아니라 동급생 크나우어까지도 역시 길을 안내하는 사람, 또는 길 자체”(p.147)라 느끼고 충실히 그들을 맞고 보낸다. 마침내 에바 부인을 만나기까지.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모든 존재의 어머니”(p.173)같다고 여긴다. 동시에 데미안이 고착될 수 없듯이 에바 부인 역시 어머니이면서 연인, 사랑의 정수이자 무한한 확대를 내포한다. 온전히 평온한 삶, 싱클레어 행복의 시대는 다가오는 격변, 전쟁이라는 불행 앞에서 상실의 시대로 추락하게 될까. 데미안의 마지막 페이지는 깊은 울림과 충격으로 잊지 못할 인장을 남긴다.

 

혹시 무언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라니, 완벽한 착각이었다. 다시 읽은 데미안은 처음 읽어나가던 순간의 충격만은 못하겠지만 무척이나 놀라워 다시 읽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이 아까워진다. 상징이 가득하고 환상적이기까지 한 작품은 등교와 크리스마스가 있는 구체적인 일상의 시간, 방과 대문, 골목이 있는 공간, 소음과 냄새까지 끼쳐오는 사실성에 밀착한다. 그래서 데미안은 독자의 외부에서 제 3자로 위치하는 하나의 픽션, 타자로 머물지 않는다. 소설은 에밀 싱클레어의 수기가 아니라 독자 개인의 고백록이자 성장기로 모습을 바꾸고 언젠가 도달해야 할 미래의 나에 대한 예표로 다가온다.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자들에게 작가는 친절하게 쉬운 예로 바꾸어 말하거나 거듭 설명한다. 우리는 싱클레어의 목소리를 빌어 반론하거나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다.

 

명민한 인도는 전쟁이라는 불행한 시대를 살아내고 있던 새로운 세대 청년들에게 먼저 향했고, 그 얼굴 그대로 지금까지 모든 시대를 향하고 있다. 헤세는 그 모두가 저마다 자연의 아주 소중한, 딱 한 번뿐인 시도인 인간들을 총으로 쏘아 대규모로 죽이는 판”(p.8)에 반대하여 최대치의 방안을 강구하였고 목소리를 내었다. 시대적 배경의 암울함과 온전한 자기 발견의 어려움이라는 이중의 고통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데미안>은 피할 수 없는 먼 길, 불안하고 명확하지 않은 길에 선 모두를 기꺼이 안내하는 나침반과 같다. 진리를 향하기에 아름답고 강력하며, 무엇보다 강제하지 않는 나침반이다. 그 방향 지침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지금 <데미안>을 처음 펴는 이들을 열렬히 부러워한다.

 

 


책 속에서>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p.110, 문학동네)

 

 

나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바로 내 옆에서 죽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증오와 분노, 때려죽이기와 없애버리기가 대상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느낌으로 깨달았다. 아니, 대상이란 목적만큼이나 완전히 우연한 것이었다. 근원적 감정은 가장 사나운 것일지라도 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근원적 감정의 피비린내 나는 행위는 내면의 표출, 속으로 찢긴 영혼이 겉으로 터져나온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찢긴 영혼은 미쳐 날뛰며 죽이고, 파괴하고, 스스로 죽기를 원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거대한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고 있었다. 알은 세계이고 세계는 부서져야 했다.(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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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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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한 번에 완독하자고 다시 한 번 약속해본다. 서평에 불필요한 사족을 먼저 언급하자면 나는 왜 쓰는가2년 전 리더동기모임의 토론도서였다. 완독을 못한 채 전반부 수록작품에서 논제를 만들었는데 그날 나온 논제 대부분이 약속이나 한 듯 앞부분에서만 나왔다. 다음 달에 후반부 토론을 하기로 하고는 아직 모이지 못한 채 2년이 되어간다. 책을 보면 2022125<문학 예방> 말미에 대단하다!’라는 메모가 있다. 지난 6월에 다음 이야기인 <행락지> 부터 펼쳤고 마지막 페이지 이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재독을 시작했다. 읽기를 중단한 사이에 특별한 변화라면 1984를 읽고(서평쓰기까지 포함) 토론했다는 차이가 있겠다. 1984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언어를 조작하는 전체주의 사회의 지옥도와 그 안의 함의들을 직접적으로, 동시에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그 후 다시 보는 오웰의 문장은 낱말 하나, 문장부호 하나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만든다. 다시 편 <행락지>부터 감탄은 계속되었다.

 

나는 왜 쓰는가(이한중 옮김, 한겨레 출판, 2010, 480면 분량)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선집으로 전체 스물아홉 편의 글이 담겨있다. 쓴 순서대로 묶인 에세이들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관찰자이자 행동가였으며 진실을 추구하고 타협하지 않았던 정신의 증거이자 정직한 자화상이다. 영국령 인도에서 태어난 조지 오웰의 대표작은 <동물 농장(1945)><1984(1948)>를 꼽지만 책으로 출간한 소설, 르포, 에세이집 11권과 수 백편의 에세이가 있다. 그는 계급의식을 풍자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탁월하였으며 정치적 글쓰기로 20세기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지 오웰은 필명으로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이다. 첫 작품 파리와 런던의 부랑자(1933)부터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작가가 제일 처음으로 발표한 1931년 글 <스파이크>는 부랑자를 위한 숙소에서의 체험을, 1948년 마지막으로 집필한 <간디에 대한 소견>은 인간됨의 본질과 성인됨을 거론한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눈을 맞추었던 오웰은 그 시간에 정성을 들였고 반론이 있을지언정 대중이 우러르는 위치에 있는 자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의 글을 맺은 게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그를 정치인으로만 볼 때, 그리고 우리 시대의 다른 유력 정치인들과 비교해볼 때, 그가 남긴 향기는 얼마나 맑은가!”(p.460)로 책은 끝난다. 이 마지막 문장이 작가에게 돌아간다. 오웰이 남긴 향기는 얼마나 맑은지. 동시에 짙으면서 필요한지, 몸을 사리지 않고 세상과 그 안에서 부대끼는 인간을 꿰뚫어보았던 실천적 지식인에게로 이 문장은 기꺼이 돌아간다. 에세이들은 분량도 주제도 다채로워서 전부 겨우 6페니를 주고 산장미에 대한 단상격인 <나 좋을 대로>부터 자신이 통과한 유년을 역설적인 제목 아래 사실적으로 기록한 <정말, 정말 좋았지>까지 다양하다. 후자는 작가 사후에 지면에 발표되었으며 여덟 살부터 육년간, 유년의 시기에 세상이 얼마나 비정할 수 있나를 학습하는 장이었음을 고백한다.

 

모든 글에서 작가의 주장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치와 영어>에서는 이와 같은 선명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글은 선명해지는지, 선명하지 않은 글의 문제점과 폐해를 조목조목 분석한다. 단어사용의 엄격함과 민감함은 역시 <1984>의 작가라는 걸 확인케 만든다. 문제점을 지적할 때의 진지한 분위기에도 위트는 사라지지 않고 독자는 주목하게 된다. 또한 지적에서 끝나지 않고 유용한 처방을 내린다. 최고의 글쓰기 강의를 지면을 통해 듣는 셈이다. “나는 왜 쓰는가어떻게 쓸 것인가는 날기 위한 양 날개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하는 글을 쓰는 네 가지 동기는 스스로를 재어보게 하기에 주기적으로 떠올린다. 특히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p.300)로 시작하는 말미의 명문장은 숨을 고르게 만든다.

 

그 중에서 <어느 서평가의 고백>은 무척 흥미진진하면서 눈앞에 오웰의 방, 그의 책상, 종이더미들이 저절로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왜 내가 행복해지지, 자문하면서 읽은 후에는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도착하는 책들, 책배의 압박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가운차림으로 고문당하는 사람의 일이자 사명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한다. <물속의 달>은 반전에 놀랐던 사랑스러운 글이었다.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평론과 셰익스피어의 명성에 반기를 들었던 톨스토이에게 대응하는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는 문학비평이자 심리학적 분석으로도 읽힌다.

 

조지 오웰은 어렵고 곁을 내주지 않고 심각하고 마냥 진지할 것 같았다. 그러나 대여섯 살 때부터 작가가 되리란 걸 알고 있던 오웰은 차분히 앉아 책을 쓰는 일”(p.289)에 전 생애를 바친다. 오웰에게 차분히 앉아 있는 장소는 총탄의 한가운데, 냉기 가득한 거리, 식민지의 근무처나 터무니없이 열악한 병원을 의미했고 어쩌면 기숙사의 젖은 침대도 여기에 포함되었을 테다. 읽을수록 작가의 시선은 명치 언저리까지 아릿하게 만든다. <코끼리를 쏘다>에서, 시를 쓰게 만든 이탈리아 민병대원을 기억하는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에서, 장작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인간과 너무 많은 짐을 진 당나귀로부터 사실을 상기하고 지적하는 <마라케시>에서.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는 기록하고 질문하고 입장을 밝힌다. 독자는 대답해보려 애쓰면서 책장을 넘기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견주어본다. 간결하고 또렷한 문체는 건조하고 힘있게 파고들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이나 고귀함을 서정적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그는 진지한데 위트도 넘친다. 읽어야하는 책이면서 공부해야 하는 책이다. 눈으로 한번 스치고 말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작가의 한 문장이 농축하고 있는 하루, 일상, 투신, 참여와 거리두기, 필연의 선택과 결정을 따라가 보는 일에는 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떤 글을 다시 찾아 읽게 될 테고 그때마다 감동은 여전할 것이다. 말미에 실린 <조지 오웰 연보>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또 숙연케 한다. 활자는 작가가 살아낸 궤적으로 인해 식지 않는 온기를 후대에 남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던데 서두르지 않고 오웰을 읽어나갈 수 있겠다. 남아있는 오웰의 작품들을 헤아려보며 이게 무슨 복인가 생각한다. 치열한 글쓰기의 표본, 좋은 문장의 릴레이, 간곡한 기록인 나는 왜 쓰는가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몇 주 동안 매일 언제나 같은 시간에 노년의 여성들이 장작을 지고서 줄지어 집 앞을 절뚝절뚝 지나갔건만, 그리고 그 모습이 내 눈에 분명히 비치었건만, 나는 사실 그들을 봤다고 할 수가 없다. 내가 본 건 장작이 지나가는 행렬이었다. 내가 우연히 행렬을 뒤따라가다가 묘하게 들썩거리는 장작더미에 시선이 끌려 그 아래에 있는 인간을 주목하게 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 가련한 흙빛의 육신들이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반으로 접혀버린, 뼈와 가죽만 남다시피 오그라든 육신들 말이다.(p.14)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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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씨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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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고 추구하는 이상과 발 딛고 서있는 현실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꿈이 미화될수록 현실은 척박하게 다가오고 간극은 커진다. 선택은 자기만의 몫으로 압박을 가한다. 이를테면 만 갈래로 세분화되는 선택지에서 은연중에 작동하는 방어기제에 올라타는 수도 있다. 어느 날은 자기 암시나 합리화가 선봉에 서고 어느 날은 전쟁을 선포하기도 한다. 무너뜨리겠다고 작정하다가 여기까지 온 게 어딘가라며 톤을 바꾼다. 표정을 감추고 숨어버리기도 하지만 싸우겠다고 칼을 뺐는데 대상이 증발하기도 한다. 간극이 시대적 배경에서 기인할 경우 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패색이 짙어진다.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송은주 옮김, 휴머니스트, 2022, 248면 분량)는 어긋나고 비틀리는 관계와 그로 인한 불통의 괴로움, 그에 관여하는 여러 요소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단편집이다.

 

이디스 워튼은 뉴욕의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유복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유한계급의 생활을 묘사하는 작품을 쓸 때 도움이 된다. 23세의 나이에 열세 살 연상의 에드워드 로빈스 워튼과 결혼한 후, 불행한 결혼생활, 사회적 지위와 작가적 야심 사이의 갈등으로 신경쇠약을 앓았다. 신경쇠약을 치료할 겸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으며, 소설과 유럽 여러 지역의 역사, 건축, 미술에 대한 글을 썼다. 전쟁 후 1920년에 발표한 순수의 시대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순수의 시대외에도 환락의 집(1905), 이선 프롬(1911), 암초(1912), 여름(1917) 등이 있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넘치도록 채워주는 타인을 향한 우상화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고 대개 시야를 가리면서도 속도는 높인다. <편지(1910)>의 리지 웨스트가 화가인 빈센트 디어링의 딸을 가르치느라 왕래하는 집은 긴 언덕을 올라가야 나온다. “삶의 얼굴이 바뀐 운명의 날부터 리지는 그곳에 날개 달린 발로 다가갔고, 마치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꿈의 비행(p.10)과 같았으며, 그와 함께 이야기하면 그의 "지성의 넓은 날개를 타고 창공으로 솟아 오르는" 듯했다.(p.17) 그런 듯했고, 그래 보였고, 그렇게 느꼈던 모든 일은 한꺼번에 의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녀의 삶이 그녀에게 유용한 방어 기술을 익히게 하였음에도 기술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 예외구역은 불가침 조약을 맺고 외따로 떨어져있다. 의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재회 후에도 그는 그 영역에서 건재했고, 흡족한 결실도 맺었으나 3년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개봉되지 않은 자신의 편지를 발견하면서 균열이 간다. 초점은 보고 싶은 대로만 자동으로 맞춰졌던 건가, 그렇다면 그녀는 초점을 재조정을 할 것인가. 작가는 리지의 심리 묘사를 리듬감 넘치는 언어로 생생하게 포착하고 매끄러운 문장은 각각의 장면으로 그림처럼 빨아들인다.

 

<빗장 지른 문(1909)>의 휴버트 그래니스는 명성을 얻기 위해 거의 모든 문학적 실험을 했으나 10년간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실패하였고, 자비로 무대에 올린 희곡 <곤경> 역시 대실패하면서 생애 최고의 10, 잃어버린 반생을 회고한다. 결정적 곤경에 빠진 그는 새로운 선택을 한다. 바로 사촌인 조지프 렌먼 살인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고 고백함으로 추구했던 이상에 단 한 번도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삶, 곤경 자체였던 삶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결심한다. 소설은 삶에 사슬로 매여 있”(p.119)듯이 그래니스의 시도가 거듭 좌절되는 아이러니를 속도감 있게 그린다.

 

삶의 목표와 지향, 소망과 계획이 그에게는 단단하게 빗장 지른 문처럼 열리지 않았다. ‘근심하지 않는다’(p.92)를 모토로 삼는 조지프 렌먼과 그가 키우는 멜론의 설정도 그래니스라는 인물을 비극적으로 부각한다. 표제작인 <석류의 씨(1931)>는 샬럿 애슈비에게 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를 보여준다. 집은 그녀에게 허리케인의 중심부에서 찾아낸 혼자만의 섬과 같은 안락한 성채였다. 그러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부터 도착한 회색 봉투의 편지는 불안하고 휴식할 수 없는 장소로 집을 바꾸어 간다. <하녀의 종(1902)>은 폭력적인 남편에 의해 희생당하는 브림프턴 부인과 시대적 위계질서의 고착으로 무력하게 방관할 수밖에 없는 피지배자이자 방관자의 공포를 기록한다.

 

석류의 씨에 담긴 네 편의 단편은 가리워진 진실을 그대로 둔다. 의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남고, 독자는 결말 이후를 상상하고 추적하다 길을 잃는데, 그 아득한 감정은 기시감이 든다. 참고, 넘어가고, 통과했던 크고 작은 순간들. 다행이라 여겼던 게 정말 다행이었는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전혀 다른 현재를 살고 있을지 누구나 정답 길만 걷지 못한다. 독자는 모호성, 양가성, 열린 결말(p.243)이라는 워튼의 고딕소설을 나타내는 특징에 매료될 것이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인기를 끌었던 여성 작가들의 고딕 소설은 여성의 경험을 표현할 새로운 도구가 되어 사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취약함을 언어화한다. “고딕소설의 정신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p.241)이라고 했던 워튼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에 녹인다.

 

호흡이 길지 않은 단편이라 가독성이 좋고, 익숙하지 않은 서사라 몰입도를 높일 수 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글을 이렇게 잘 쓴다고, 라는 감탄이었다. 접착제를 붙인 듯이 연결되는 문장, 단어의 선택과 효과적인 반복, 반복으로 인한 의미부여와 확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는 비유, 현미경을 댄 듯한 심리서술, 구체어와 추상어 사이의 균형, 경쾌한 문체와 때론 위트까지 독자의 관심을 한 순간도 흐트러트리지 않는다.

 

그러니 <빗장 지른 문>의 주인공 휴버트 그래니스 같은 작가는 반평생을 허비했다고 총을 집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다. 작가의 성장 배경, 받아온 교육, 어려웠던 경험들이 모두 약이었겠지만 재능이라고 본다. 그리고 빼어난 통찰력. 당연히 밑줄이 많은 책이고 필사할 문장 또한 많으며 읽는 즐거움에 대하여 상기시킨다. 작품은 대표작부터 읽어야 한다고 여겨왔는데, 읽기만 한다면야 순서가 중요치 않겠다. 100여 년 전을 살았던 한 여성 작가의 목소리가 현대의 여성들에게 전달하는 삶의 편린은 여전히 유효하다. 워튼의 장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소설집으로 추천한다.

 



책 속에서> 


소설에서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거짓말 위에 세워진행복은 언제나 무너졌고, 그 폐허 밑에 주제넘은 건축가를 묻어버렸다. 그녀가 여태껏 읽은 모든 소설의 법칙에 땨르면, 그녀를 이미 한 번 속인 적이 있는 디어링 씨는 반드시 계속해서 그녀를 속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계속해서 자기를 속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p.67)

 

그래니스는 자신의 죄를 밝히려 무슨 짓을 해도 다 소용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삶에 사슬로 매여 있었다. “의식의 죄수.” 그 문구를 어디에서 읽었던가? 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다. 한밤중에 뇌가 불타는 듯한 기분일 때면 그의 고정된 정체성, 축소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 자아의 감각이 여태껏 경험한 그 어떤 느낌보다도 더 날카롭게, 더 은밀하게, 더 피할 수 없게 찾아왔다. 정신이 이렇게 복잡한 자기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 자체의 어두운 미로 속으로 이렇게 깊이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토막 잠이 들었다가 무언가가 그에게 달라붙은 느낌, 그의 손과 얼굴, 목구멍 속에 붙은 느낌에 깨어나곤 했다. 그러다 머릿속이 맑아지면 뭔가 진하고 끈적이는 물질처럼 그에게 달라붙은 것이 바로 자신의 혐오스러운 인격임을 깨달았다.(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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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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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논리적이고 정연한 이론의 세계와 다르다. 오차를 최소화하고 검증을 마친 이론은 고고하게 자신을 넘겨준다. 근사한 활공을 허락한다며. 명백한 이론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위축케 한다. 이론이 일 더하기 일의 답을 구할 때 정답에 미치지 못하리라는 우려는 때때로 죄책감으로 변해 심정에 낙인을 새긴다. 오래되어 무늬처럼 익숙하나 애초에 흉터였던 낙인이다.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김이선 옮김, 문학동네, 2008, 2019, 280면 분량)은 이상과 현실, 이성과 본능, 정상과 비정상, 다른 각도의 시선과 각자가 구축한 이론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충돌하였고 견디어냈는지 그려 보인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앤드류 포터의 데뷔작으로 단편소설 부문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하였다. 작가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단편 작가’, ‘단편 소설의 진정한 마스터’, ‘타고난 스토리텔러등 많은 찬사를 받았으며 올해 15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 사라진 것들(2024)을 출간하며 기대를 높이고 있다.

 

돌아보면 지나온 날들이 마냥 평탄했던 적이 있었나. 시간은 물 흐르듯 흐르는 법이 없다. 격류에 튀었던 물방울은 지금, 그리고 내일에 고스란하다. 못본 척 해도 마찬가지이며 무의식 깊이 묻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차라리 그 시간을 불러내어 말을 거는 게 나을지 모른다. 말을 거는 톤은 태연하기도 담백하기도 하며 때론 예를 갖추듯 정중하다. 그래서 원망하거나 미화하는 차원을 넘어서고 흰 천에 얼룩이나 습기가 베어 나와 흔적을 남기듯 상황 자체, 사건 자체, 또는 시간의 지문을 찍는다. 그렇게 찍힌 이야기들이다. 자신이 판 구멍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가는 아이러니와 고통, 구멍은 벌을 닮았는데 벌은 주변으로 번지고 죄와 벌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퍼지고 확장되는 통증이다.(구멍) 도처에 있는 구멍을 아슬아슬 피해야 하는 삶이다. 우리는 구멍과 싸워 이길 수 있나, 요즘은 대놓고 싱크홀인데, 송두리째 먹어치우기도 하는데. 첫 단편 <구멍>은 지금도 삼키고 있는 구멍이다. 구렁텅이와 같은 구멍도 있다. <폭풍>에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p.246) 바로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이라고 했다. 이런 기쁨을 잃은 가족은 느리고 꾸준한 종말의 과정을 겪는데 들여다보자면 그곳엔 달라진 삶이 있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없어진 듯”(p.240)하며 혹시 빠지지 않을까 늘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마침내 빠져버리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을 구렁이다. 이럴 때 구렁은 함정을 닮았는데 곁에 있는 한 사람이 구원의 줄을 건넬 때 결말은 달라진다. 한 사람이 필요치 않은 이가 있을까.

 

누구나 정상이고자 안간힘 쓴다. 다른이의 시선이야 관심 없다는 듯 자못 무심한 외양을 취할 경우에도 비정상은 주홍글씨이며 시대불문하고 무언의 고발이 아우성이다. 뜨거운 아우성과 차가운 시선을 나로 인해 가족이, 가족으로 인해 내가 감당하는 경우를 본다. 감당한다 생각했는데 아직 어렸기에 보여지는 것과 실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코요테를 길들여 방에서 키울 수 있으리라 낙관한다.(코요테) 지금껏 참아준 보답이라며 우리 이제 된 거지?”(p.153)라고 작별인사를 건네는 더그 형과 죽은 강가의 개들을 보러가곤 했던 때를 회상하며 이웃의 위로가 위로인지, 위로의 방향은 안착하지 못한다.(강가의 개) 선택하지 않았지만 굴레에 갇혔던 아미쉬 아이들 레이철과 아이작 킹도, 그들을 대하는 자신도 비정상임을 자각하지만 믿음과 타이밍’(p.166)이 아무리 잘 받쳐줄지언정 궤도 변경은 실패한다.(외출) 비정상이어도 좋다. 현 상태로 충분하다고 여길 때 축복은 선택하는 자의 몫이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p.215)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머킨>의 마지막 문장들은 감동을 준다. 그는, 그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하는 비판이나 판단을 하기는 쉽지만 가리키는 손끝에 누가 있을지도 내가 없으리라고도 장담하기 어렵다. 두려움과 불안, 회피와 합리화가 결국은 직면케 하는 현실은 결말에서 다시 시작할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아술)

 

선남선녀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도다, 라는 설정에 독자는 안도하지만 운명이라고도 일컫는 불가항력적인 힘은 한잔의 차로 마법을 일으킨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내적 알람이 울린다.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헤더는 시험을 끝낸 유일한 학생, 풀이를 제출한 유일한 학생이며 시험을 통과한 유일한 학생이다. 물리학과 교수인 로버트는 물리학자에게 가장 큰 방해요인은 자만심이라며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p.92)라고 덧붙인다. 소설은 헤더가 이해하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 응시하고 선택함으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되는 여정을 그린다. 이 짧은 분량으로 이토록 심도있게 삶을 반추할 수 있다니, 독자는 가장 고통스럽고 내밀한 상실들이 저장되어 있는 마음 한편”(p.126)까지 다다른다. 소설집에서 가장 손꼽는 명작이다.

 

작가는 열 개의 단편 모두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한다. 연령도 성별도 다양한 는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더는 묻어둘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낸다. 이야기는 독자를 상정하지 않은 일기나 독백과도 같지만 그때 그 순간의 진실에 최대한 밀착하겠다는 의지를 실현한다. 그런 용기는 최소한 한 발 나아가기, 명명하기, 그렇게 함으로 로버트가 지적했던 자만심의 반대편에 위치한 겸손한 발견의 기회를 획득한다. 작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시종일관 간결하게 전한다. 긴밀하고 아름다운 문장은 거듭 멈추어 생각하게 만들고 인물간 감정이 충돌할 때조차, 상황이 안타깝게 치달을 때조차 넉넉한 여백을 확보한다. 가상과 실제, 소설과 현실, 이야기와 삶은 경계를 지우고 녹아든다. 단편의 제목을 주의깊게 보면서 작가가 화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향을 살펴보는 것, 제목이 본문에 등장하는 방식, 함의와 압축, 반복과 상징을 헤아리는 과정은 독자에게 각별한 인상으로 남을 것이다. 모든 것이 비쳐 보이는 듯 투명한 소설이 독자를 보듬는다. 우리에게 소설이 필요한 이유, 문학의 효용을 일깨우는 작품이기에 거듭 추천한다.

 


책 속에서>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되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요사이엔 문득 로버트를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나는 간신히, 그에 대한 기억을 나의 가장 고통스럽고 내밀한 상실들이 저장되어 있는 마음 한편에 놓아둘 수 있게 되었다.(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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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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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로즈의 계단,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히 계속되는 시간, 장소, 공간의 개념을 보르헤스의 우주와 미로에서 엿보게 된다. 보르헤스의 글은 지면에 인쇄된 문자로 대면할 때 그와 동시에 연거푸 펼쳐지는 무대, 휘어지는 소용돌이, 활동사진 같은 이미지로 이중 생성되는 듯하다. 처음 읽었던 보르헤스는 1992년 황병하 번역본이었고 빛바랜 페이지에는 감탄의 흔적만 남아있다. 다섯 권 전집을 한 번에 구입하였으나 <칼잡이들의 이야기>97, <셰익스피어의 기억>98년과 같이 단번에 읽어내지 못했다는 건 의아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천재를 넘어서 세계문학사의 천재, 인간 백과사전 등 내게는 추앙과 경배의 사이에 위치한 작가였기에 범접불가는 오히려 범접을 미룰 핑계로 작용했다. 후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강력한 인물인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에 투영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다시 한 번 불멸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태생이었으나 영국출신 친할머니의 영향으로 영국계 가정교사에게 배웠고 모국어인 에스파냐어보다 영어를 더 먼저 사용했던 유년기의 이중 언어체험이 훗날 세계시민적 사고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이현우 재인용) 9세에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를 영어로 번역해 신문에 투고했다는 일화도 놀라움을 자아낸다. 가계의 유전적 질환으로 시력이 약화되던 그는 변호사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22세에 첫 시집을 출간한다. 신문과 잡지의 편집자를 거쳐 시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였으나 아르헨티나 정치 격변과 함께 실직하고 강연과 집필을 이어갔으며 훗날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된다. 자신이 관리하는 수십만 권의 책을 본인은 읽을 수 없다는 소설같은 작가의 삶은 보르헤스적 아이러니이자 아픔으로 여겨지는데 정작 본인은 이와 같은 명명을 거부하고 축복의 시”(1958)에서 입장을 분명히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1944 ,2011, 264면 분량)은 거침없는 상상으로 인간계의 삶을 간파하고, 일상의 무심한 균열과 그로 인한 충격을 정교하게 글로 번역한다.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치환하는 번역이 정확한 이해를 목표로 한다면 들어보니 있음직한데 보편적인 감각으로는 수용 불가능한 경계와 경계 안팎의 주제는 또 다른 의미의 번역이 요구된다. 독자는 알고 싶다는 열망과 호기심을 띠처럼 두르고 어쩌면 알게 될 가능성을 낙관하며 알게 된 이후의 쓸모에 연연하지 않은 채 잠시 맺은 휴전, 평화의 땅 입성을 감격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그런 독자를 위해 친절한 번역에 나섰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꿈과 잠, 삶과 죽음, 현재와 영원을 혼미라고는 없는 결벽의 정신이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눈으로 그려 보인다.

 

픽션들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이다. 작가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의 서문에서 유명한 신념을 밝히는데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 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p.10)라고 말한다. 그는 이 수법을 사용한 저자를 열거하며 더 분별력 있고, 더 요령 없고, 더 게으른 나는 가상의 책 위에 주석을 쓰는 편을 택했다.”(p.10)고 주석 격인 두 작품을 가리킨다. 보르헤스가 단편만을 썼다는 건 독자로서는 허들을 약간 낮추리라는 희망을 잠시 품게 한다. 부질없는 희망이지만 잠시가 어디인가.

 

화자는 비오이 카사레스와 일인칭 소설쓰기에 대한 논쟁을 벌이던 중 우크바르의 어느 이교도 지도자가 말한 격언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백과사전을 추적하나 계속 실패한다. 그는 <틀륀 제1백과사전 11(후략)>을 발견했을 때 황홀함을 느끼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유럽의 도서관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허사였던 것을 인정한다. 차라리 다 그만두고 그 방대한 책들을 새로 만들어버리자는 자조적 제안은 한 세대의 틀륀주의자들만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p.20)이라며 틀륀의 정체, 틀륀의 우주관을 살피기 시작한다.

 

틀륀의 형이상학자들은 진실, 심지어 그럴듯한 진실조차 추구하지 않고 오직 놀라움만 찾는다거나, 틀뢴의 어느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고 다른 학파는 모든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우리 삶은 기억 또는 반영이라고, 다른 학파는 우주의 역사가 하급 신의 필치라고, 어느 학파는 우주를 암호문에 비유하고 어느 학파는 모든 사람이 사실상 두 사람인 근거를 밝힌다. 백과사전, 문학 영역과 표절, 문학비평, 사물의 복제와 망각과 구원의 가능성을 거론한다. 첫 작품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대한 스케치다. 논리는 정연하고 파격은 예리하며 꼭 들어맞는다. 도입을 막 지나면서 여기까지 어려웠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 더 어려워질 것이다. 거기에 보르헤스를 읽는 기쁨이 있다. 실제와 가상, 현실과 창작을 뒤섞는 능란함에, 가끔 발견하는 풍자적 요소에 보르헤스를 읽는 기쁨이 있다.

 

이렇게 열 일곱 편을 되짚는 행위는 쓰는 사람에게만 유익(정신을 잠시라도 가지런히 해본다는 의미에서)이기에 핵심을 정리해야 한다. 그 어려운 걸 해내리라는 보장이 없고 심지어 줄거리 요약도 백번 의심해야 한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의 인간화이고 미로를 그리나 본인이 가장 깊은 미로, 미로를 숨긴 미로, 우주의 모양을 한 미로이기에 이를 주제로 부각하는 작품은 더욱 주목하게 된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가상의 소설가 피에르 메나르 사후 그에 대한 기억을 훼손하는 오류들을 수정하고자 필자는 눈에 보이는작품과 다른 작품, 즉 끝없이 위대하며 미완성이기도 한 작품을 언급한다.

 

끝없이 위대한 축에 포함되는 후자는 돈키호테1부의 9장과 38, 그리고 22장의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p.56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쓴다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고 <돈키호테> 자체를 쓰기로 한다. 그의 도전은 언어와 신앙, 역사까지 철저하게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첫 번째 시도를 지나치게 쉽다는 이유로 그만두고 대신 피에르 메나르로 계속 존재하면서 피에르 메나르의 경험을 통해 <돈키호테>에 이르”(p.58)기로 한다. “모든 지적 활동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p.64)고 생각한 그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전복하여 차라리 헛된 행위에 먼저, 기꺼이 투신한다. <원형의 폐허들>에는 꿈꾸는 사람에게 명령하자 꿈꾸는 사람의 꿈속에서 꿈꾸어진 소년이 잠을 깬다.(p.73) 내가 실체라는 건 쉽고 단순한 진리같다.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게 펼쳐지더라도 그 중심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고 비루할지라도 의미부여의 주체가 라고 인식하지만 그 또한 깨어진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상상력에 경탄케 하며 일면 카프카를 상기시킨다.

 

상상을 더욱 견고하게, 철두철미하게 쌓아올린 작품이 <바벨의 도서관>이다. 작가의 인장과도 같은 작품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p.97)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여 결말에 다가갈 때 도서관을 괄호로 슬쩍 묶어 다시금 정의 내린다. “존재 가능한 언어에서는 n이라는 숫자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몇몇 언어에서는 도서관이란 상징이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영원하고 도처에 존재하는 체계라는 정확한 정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도서관이나 피라미드혹은 그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서관을 정의 내리고 있는 앞의 일곱 단어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한다.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내가 쓰는 언어를 이해한다고 확신하는가?”(p.108)

 

한 작품씩 읽어나갈 때 드물게 확신하는 순간조차 모호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라고(p.63) 믿어본다. 최대한 집중해서 부분적으로는 반복해 읽으며 맥락을 파악하려 애쓰나 몇 문장은 맥락과 상관없이 페이지에서 따로 떼어내 이야기 나누어 보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킨다. 이런 지점은 도처에 지뢰처럼 또는 케이크처럼 놓여있다. 황병하 번역본의 꼼꼼한 각주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참조할 때 안내서를 지참한 듯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을 허락했다.

 

<장미의 이름>에서 진리의 원수를 파괴와 망각으로 정하고 진리를 지키고자 집착했던 수도원의 장서관 사서들은 어떤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미궁의 외관을 취하고 있는 도서관을 지킨다. 누구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불가능하다는 한계인식 앞에 좌절한다. 미아처럼 불안한 의식에 구원은 가능할지 작가는 차분히 헤아린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빠뜨릴 뻔했다. 노력해도 모호하고 성장과 멀어지는 둔각의 정신이라는 게 때론 감사의 이유가 된다. 푸네스와는 또 다른 천재 보르헤스를 권한다. 몇 작품은 신간으로 재구매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물론 반복해서 읽어도, 읽고 낭독해도, 단편별로 기록해보거나 토론을 해도 거울이 만들어낸 거짓된 깊이가 아닌 함께 찾아들어간 깊이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모든 지적 활동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나의 철학 이론은 처음에는 세상을 그럴듯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것은 철학사의 한 장-만일 한 단락이나 하나의 고유 명사로 변하지 않는다면-으로만 남게 된다. 문학에서 이런 소멸 현상, 즉 적절성의 상실은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애국주의의 축배이며 문법적 오만함이고, 호화롭고 요란한 판본을 낼 기회일 뿐이다. 영광이란 것은 일종의 몰이해이며, 어쩌면 최악의 몰이해일지도 모른다.(p.64)

 

퀘인은 항상 독자란 이미 멸종된 종족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작가가 아닌 유럽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거든.”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또 그는 문학이 줄 수 있는 많은 행복 중 최고의 것은 상상이라고 말하곤 했다.(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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