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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펜로즈의 계단,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히 계속되는 시간, 장소, 공간의 개념을 보르헤스의 우주와 미로에서 엿보게 된다. 보르헤스의 글은 지면에 인쇄된 문자로 대면할 때 그와 동시에 연거푸 펼쳐지는 무대, 휘어지는 소용돌이, 활동사진 같은 이미지로 이중 생성되는 듯하다. 처음 읽었던 보르헤스는 1992년 황병하 번역본이었고 빛바랜 페이지에는 감탄의 흔적만 남아있다. 다섯 권 전집을 한 번에 구입하였으나 <칼잡이들의 이야기>가 97년, <셰익스피어의 기억>이 98년과 같이 단번에 읽어내지 못했다는 건 의아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천재를 넘어서 세계문학사의 천재, 인간 백과사전 등 내게는 추앙과 경배의 사이에 위치한 작가였기에 범접불가는 오히려 범접을 미룰 핑계로 작용했다. 후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강력한 인물인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에 투영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다시 한 번 불멸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태생이었으나 영국출신 친할머니의 영향으로 영국계 가정교사에게 배웠고 모국어인 에스파냐어보다 영어를 더 먼저 사용했던 유년기의 이중 언어체험이 훗날 “세계시민적 사고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이현우 재인용) 9세에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를 영어로 번역해 신문에 투고했다는 일화도 놀라움을 자아낸다. 가계의 유전적 질환으로 시력이 약화되던 그는 변호사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22세에 첫 시집을 출간한다. 신문과 잡지의 편집자를 거쳐 시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였으나 아르헨티나 정치 격변과 함께 실직하고 강연과 집필을 이어갔으며 훗날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된다. 자신이 관리하는 수십만 권의 책을 본인은 읽을 수 없다는 소설같은 작가의 삶은 보르헤스적 아이러니이자 아픔으로 여겨지는데 정작 본인은 이와 같은 명명을 거부하고 “축복의 시”(1958)에서 입장을 분명히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1944 ,2011, 264면 분량)』 은 거침없는 상상으로 인간계의 삶을 간파하고, 일상의 무심한 균열과 그로 인한 충격을 정교하게 글로 번역한다.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치환하는 번역이 정확한 이해를 목표로 한다면 들어보니 있음직한데 보편적인 감각으로는 수용 불가능한 경계와 경계 안팎의 주제는 또 다른 의미의 번역이 요구된다. 독자는 알고 싶다는 열망과 호기심을 띠처럼 두르고 어쩌면 알게 될 가능성을 낙관하며 알게 된 이후의 ‘쓸모’에 연연하지 않은 채 잠시 맺은 휴전, 평화의 땅 입성을 감격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그런 독자를 위해 친절한 번역에 나섰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꿈과 잠, 삶과 죽음, 현재와 영원을 혼미라고는 없는 결벽의 정신이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눈으로 그려 보인다.
『픽션들』은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이다. 작가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의 서문에서 유명한 신념을 밝히는데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 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p.10)라고 말한다. 그는 이 수법을 사용한 저자를 열거하며 “더 분별력 있고, 더 요령 없고, 더 게으른 나는 가상의 책 위에 주석을 쓰는 편을 택했다.”(p.10)고 주석 격인 두 작품을 가리킨다. 보르헤스가 단편만을 썼다는 건 독자로서는 허들을 약간 낮추리라는 희망을 잠시 품게 한다. 부질없는 희망이지만 잠시가 어디인가.
화자는 비오이 카사레스와 일인칭 소설쓰기에 대한 논쟁을 벌이던 중 우크바르의 어느 이교도 지도자가 말한 격언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백과사전을 추적하나 계속 실패한다. 그는 <틀륀 제1백과사전 11권(후략)>을 발견했을 때 황홀함을 느끼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유럽의 도서관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허사였던 것”을 인정한다. 차라리 다 그만두고 그 방대한 책들을 새로 만들어버리자는 자조적 제안은 “한 세대의 틀륀주의자들만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p.20)이라며 틀륀의 정체, 틀륀의 우주관을 살피기 시작한다.
틀륀의 형이상학자들은 진실, 심지어 그럴듯한 진실조차 추구하지 않고 오직 놀라움만 찾는다거나, 틀뢴의 어느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고 다른 학파는 모든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우리 삶은 기억 또는 반영이라고, 다른 학파는 우주의 역사가 하급 신의 필치라고, 어느 학파는 우주를 암호문에 비유하고 어느 학파는 모든 사람이 사실상 두 사람인 근거를 밝힌다. 백과사전, 문학 영역과 표절, 문학비평, 사물의 복제와 망각과 구원의 가능성을 거론한다. 첫 작품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대한 스케치다. 논리는 정연하고 파격은 예리하며 꼭 들어맞는다. 도입을 막 지나면서 여기까지 어려웠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 더 어려워질 것이다. 거기에 보르헤스를 읽는 기쁨이 있다. 실제와 가상, 현실과 창작을 뒤섞는 능란함에, 가끔 발견하는 풍자적 요소에 보르헤스를 읽는 기쁨이 있다.
이렇게 열 일곱 편을 되짚는 행위는 쓰는 사람에게만 유익(정신을 잠시라도 가지런히 해본다는 의미에서)이기에 핵심을 정리해야 한다. 그 어려운 걸 해내리라는 보장이 없고 심지어 줄거리 요약도 백번 의심해야 한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의 인간화이고 미로를 그리나 본인이 가장 깊은 미로, 미로를 숨긴 미로, 우주의 모양을 한 미로이기에 이를 주제로 부각하는 작품은 더욱 주목하게 된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가상의 소설가 피에르 메나르 사후 그에 대한 기억을 훼손하는 오류들을 수정하고자 필자는 ‘눈에 보이는’ 작품과 다른 작품, 즉 끝없이 위대하며 미완성이기도 한 작품을 언급한다.
끝없이 위대한 축에 포함되는 후자는 『돈키호테』 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p.56)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쓴다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고 <돈키호테> 자체를 쓰기로 한다. 그의 도전은 언어와 신앙, 역사까지 철저하게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첫 번째 시도를 지나치게 쉽다는 이유로 그만두고 대신 “피에르 메나르로 계속 존재하면서 피에르 메나르의 경험을 통해 <돈키호테>에 이르”(p.58)기로 한다. “모든 지적 활동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p.64)고 생각한 그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전복하여 차라리 헛된 행위에 먼저, 기꺼이 투신한다. <원형의 폐허들>에는 꿈꾸는 사람에게 명령하자 꿈꾸는 사람의 꿈속에서 꿈꾸어진 소년이 잠을 깬다.(p.73) 내가 실체라는 건 쉽고 단순한 진리같다.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게 펼쳐지더라도 그 중심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고 비루할지라도 의미부여의 주체가 ‘나’라고 인식하지만 그 또한 깨어진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상상력에 경탄케 하며 일면 카프카를 상기시킨다.
상상을 더욱 견고하게, 철두철미하게 쌓아올린 작품이 <바벨의 도서관>이다. 작가의 인장과도 같은 작품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p.97)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여 결말에 다가갈 때 도서관을 괄호로 슬쩍 묶어 다시금 정의 내린다. “존재 가능한 언어에서는 n이라는 숫자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몇몇 언어에서는 ‘도서관’이란 상징이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영원하고 도처에 존재하는 체계’라는 정확한 정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도서관’은 ‘빵’이나 ‘피라미드’ 혹은 그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서관을 정의 내리고 있는 앞의 일곱 단어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한다.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내가 쓰는 언어를 이해한다고 확신하는가?”(p.108)
한 작품씩 읽어나갈 때 드물게 확신하는 순간조차 모호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라고(p.63) 믿어본다. 최대한 집중해서 부분적으로는 반복해 읽으며 맥락을 파악하려 애쓰나 몇 문장은 맥락과 상관없이 페이지에서 따로 떼어내 이야기 나누어 보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킨다. 이런 지점은 도처에 지뢰처럼 또는 케이크처럼 놓여있다. 황병하 번역본의 꼼꼼한 각주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참조할 때 안내서를 지참한 듯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을 허락했다.
<장미의 이름>에서 진리의 원수를 파괴와 망각으로 정하고 진리를 지키고자 집착했던 수도원의 장서관 사서들은 어떤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미궁의 외관을 취하고 있는 도서관을 지킨다. 누구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불가능하다는 한계인식 앞에 좌절한다. 미아처럼 불안한 의식에 구원은 가능할지 작가는 차분히 헤아린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빠뜨릴 뻔했다. 노력해도 모호하고 성장과 멀어지는 둔각의 정신이라는 게 때론 감사의 이유가 된다. 푸네스와는 또 다른 천재 보르헤스를 권한다. 몇 작품은 신간으로 재구매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물론 반복해서 읽어도, 읽고 낭독해도, 단편별로 기록해보거나 토론을 해도 거울이 만들어낸 거짓된 깊이가 아닌 함께 찾아들어간 깊이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모든 지적 활동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나의 철학 이론은 처음에는 세상을 그럴듯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것은 철학사의 한 장-만일 한 단락이나 하나의 고유 명사로 변하지 않는다면-으로만 남게 된다. 문학에서 이런 소멸 현상, 즉 적절성의 상실은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애국주의의 축배이며 문법적 오만함이고, 호화롭고 요란한 판본을 낼 기회일 뿐이다. 영광이란 것은 일종의 몰이해이며, 어쩌면 최악의 몰이해일지도 모른다.(p.64)
퀘인은 항상 독자란 이미 멸종된 종족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작가가 아닌 유럽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거든.”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또 그는 문학이 줄 수 있는 많은 행복 중 최고의 것은 상상이라고 말하곤 했다.(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