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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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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외교 참사라 불린 두 정상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언어의 불평등, 소통의 부재, 그리고 의도된 비난, 비아냥, 모욕 등 언어의 모든 폭력성을 본 듯하다. 구사한 언어의 내용도 그렇지만 분위기, 태도 때문에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럴 땐 언어가 없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 사이엔 날이 시퍼런 이 놓여있다. 그 칼은 자본, 권력의 언어일 것이다.

 

보르헤스의 묘비명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로 남자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87세의 보르헤스가 젊은 부인에게 이 묘비명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랑하는 두 남녀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밤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을 놓았다는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로부터 보르헤스가 가져온 말이다서슬 퍼런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8p)”라고 생각하는 남자 역시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시각 장애인이다.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민 가서 살았던 그는 십대에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17살에 청각 장애를 갖고 있는 R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은 성립될 수 없는 오류가 되어 버렸다. 그의 얼굴에 있는 흉터는 실명이 휘두른 칼날에 의한 상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R을 위해 수어를 배워 수어로 대화하던 남자는, 완전한 실명이 오기 전, 그녀에게 목소리로 말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남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화가 난 R은 남자의 얼굴에 상처를 남긴다. 20년이 지났어도 남자는 그 순간을 후회한다.

 

남자는 한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강의한다. 그의 강의를 듣는 여자는 손목에 흉터를 갖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흉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상흔이다. 여자는 강단에 선 남자의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처음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지도 같다(12p)고 생각했다.

 

여자가 고어古語이자 사어死語인 희랍어를 배우는 이유는 낯선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첫 번째 실어증에 걸렸던 때,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비블리오떼끄라는 낯선 단어가 그녀의 입술을 움직이게 했었다. 여자는 입술이 달싹이던 그 순간을 오히려 공포스럽게 기억한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17p)“

 

이혼과 양육권 포기로 인해, 20년 만에 다시 침묵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의지적으로 낯선 언어를 배우고 있다. 첫 번째 실어증은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리는 문장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 때문에 오는 수치심과 구토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절망감(혹은 공포)때문이었다. 스스로가 하는 말의 거짓에 대한 정죄, 불완전함에 대한 부끄러움, 추함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예민할 수 있을까? 발화의 순간보다는 뒤돌아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때가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언어 없이 생각하고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16p)“

 

첫 번째 침묵이 농밀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다면, 20년 후에 다시 온 침묵은 차고 희박하고 어둡다.

여자를 상담했던 심리치료사의 그녀가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 지 의심하는 내적질문에 응답해가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진단은 불편하다. 본성을 억누르고 살았기 때문에 실어증이 왔을 거라는 것이다. 전편 바람이 분다, 가라의 표현대로 한다면 내담자의 삶을 함부로 요약하는 것이다. 여자가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이해한다는 상담사의 말에 그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55p)“라고 대답한다남자의 실명보다 여자의 상실보다 세상과 그들 사이에 놓인 칼은 말이 아닐까?

 

여자는 인간의 모든 언어가 압축된 하나의 단어, 어마어마한 밀도와 중력으로 단단히 뭉쳐진 단 한 단어. …… 누군가 입을 열어 그것을 발음하는 순간, 태초의 물질처럼 폭발하며 팽창할 언어. ……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그 언어의 결정結晶이 그녀의 더운 심장에, 꿈틀거리는 심실들 가운데 차디찬 폭약처럼 장전되는 꿈(55p)을 꾸었다. 생명, 사랑과 같은 단어들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녀가 상상하는 단어는 형태도 소리도 갖추지 않은 직관적 언어다. 어쩌면 의식만으로 이어진 이미지나 감각으로 전달되는 에너지 같은 형태의 언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전달함에 있어 오류도 거짓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그런 언어를 갖고 있는가? 스스로 질문해본다. 말의 부정확성, 추함, 거짓이 나와 타인 사이에 놓인 칼이다.

 

διεφθάρθαι, 강의 시간에 여자는 받아 적으면서, διεφθάρθαι(He kill himself)차갑고 단단하다”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 수 있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διεφθάρθαι의 발음, 주어와 목적어가 하나로 동일하게 만드는 중간태(영어의 재귀대명사를 포함하는 의미)는 다른 뜻이 파생될 수 없는 완전하고 정확한 의미를 전달한다고 한다. 여자가 희랍어를 배우게 되는 이유이다.


희랍어를 잘 모르기에 이 느낌을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에게 보르헤스의 칼은 소통과 언어의 부정확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언어는 발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의미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폭력을 행사하고 고통을 가할 수 있다. 그러기에 여자는 모든 의미, 언어가 하나로 압축된 단어, 언어의 결정結晶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몸짓은?

건물 안으로 들어온 새를 도우려는 남자를 공격하는 새, 차에 깔린 개를 안아주던 여자를 물었던 개의 장면에서 인간의 몸짓조차 전달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두려움은 선의의 몸짓을 오해하게 만든다. 이 폭력적 반응은 R이 남자의 얼굴을 후려친 억센 주먹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그녀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녀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있다.(168p)“

 

남자와 여자는 밤을 함께 보내고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연한 부분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춘다. 사랑의 행위는 시()로 이어진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9p)”이라고 했던 강의실 장면은 이 시()에서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191p)”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는 행이 반복된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183p)

우리는 사랑하는 순간에도 서로를 모른다.

 

심해의 숲은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라고 한 작가의 질문에 희망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두 사람조차 서로를 알지 못하고, 언어는 부정확하고 소통은 단절된다. 여전히 스스로를 가둔다. 그들 사이에 칼은 여전히 놓여 있고, 세계와의 사이에도 칼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뚝거리는 언어와 몸짓으로 자신을 내보이며 온기를 나누는 게 인간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가끔은 그 칼에 베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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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3-04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남일보 2024.9.26. 전남대 김명술
https://www.jnilbo.com/74956793542

이런 글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갔다고 여겼으나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곪은 얼거리인지 하나하나 뒤늦게 알아보면서
우리가 그 나라 속낯을 잘못 바라보고 휩쓸리기도 하겠다고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그래서 엊그제 일은 참사가 아닌
우크라이나 민낯을 들여다보는 어떤 발판일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그레이스 2025-03-04 11: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짧게 말하려니,, 그냥 ‘외교참사‘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젤렌스키는 태도를 이미 정해놓고 시작했더군요.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도 없이 자기 주장만 일관되게 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대화에서 본 제 감상입니다.
전쟁이 끝날것같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레이스 2025-03-04 14:46   좋아요 0 | URL
김영술 인데 김명술이라 하셔서 한참 찾았습니다.^^
북플에서는 주소 카피가 안되서 외워서 검색하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숲노래님 서재에 들어가니 글이랑 링크가 있네요.ㅎㅎ
동의하고 공감하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5-03-04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에 <희랍어 시간> 재독했어요.
처음 읽었을때와 조금 다른 느낌이었는데, 여전히 좋더라고요^^

그레이스 2025-03-04 15:29   좋아요 1 | URL
네^^
노벨상 효과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과 다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강 책은 한번 읽어서는 압축된 의미를 놓치기 쉬운듯요.

페크pek0501 2025-03-06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그리고 시집, 만 읽었는데 앞으로 희랍어 시간, 을 읽어야겠네요.
페넬로페 님은 재독까지 하셨다니... 장바구니에 얼른 담아야겠어요.^^

그레이스 2025-03-06 12:02   좋아요 1 | URL
저는 장편 중 한 작품만 남았는데, 리뷰는 계속 쓸 계획입니다.
다시 읽을수록 작가의 글에 감탄하게 되요 ^^~♡
 
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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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요약하지 마라.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 빌어먹을 사랑으로 떨리는 입술을 닥쳐.

 

작가는 정체와 이탤릭체의 문장들이 충돌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소설이라고 말했다이탤릭체는 기억과 생각이다. 정체(正體)는 드러나 있는 사실이다. 진실은 곧 사라질 것 같은 이탤릭체-죽은 자의 말과 산 자의 마음-에 있다. 정체로 다시 써야 할 엄연한 진실이 있다.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산 자의 일이다.

 

촉망받던 화가 인주의 죽음 이후 그를 후원했던 강석원은 미술정신서인주 추모 특집을 싣는다. 함께 올려진 작품 사진들을 통해 그가 인주의 유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희는 가슴에 불이 당겨지는 것 같았다. ‘서인주 추모 특집을 읽은 이정희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여류 화가가 자라온 가난하고 어두운 환경-유복자로 태어나 모친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을 소개하는 글은 그녀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어둠의 진앙, 피안의 주술이라 제목 붙여진 그림들은 죽음의 경도에서 나왔다는 것을 상정하고(13p)“ 있었다.

 

정희는 인주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정희는 인주의 유품을 찾고 강석원이 출판하게 될 서인주 평전의 내용을 바로 잡기위해 그를 만난다. 그는 재능 뿐 아니라 젊은 나이, 아름다움, 압도하는 그림, 불행한 개인사, 자동차 자살이라는 극적인 최후까지(136p)” 신화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서인주를 불멸하게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강석원의 말과 태도, 서인주를 신화화하는 데서 분노를 느낀다.‘여성의 신화화혹은 숭배를 이끌어내는 기저에 폭력성이 존재함을 본다. 여성을 소유하고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폭력적 야만의 다른 형태가 아닐까? 누군가에게 힘을 행사하는 것이 때로 산 자 보다 죽은 자에게가 더 쉬울 때가 있다. 그것이 타인의 삶을 요약하고 신화화하는 행위일 경우.


함부로 요약하지 마라함부로 지껄이지 마그 빌어먹을 사랑으로 떨리는 입술을 닥쳐.(41p)”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정희는 진실을 밝혀내고, 강석원의 평전 작업에 맞서 인주의 삶을 책으로 쓰고자 한다. 주변 인물들을 만나, 소식을 끊고 살았던 죽기 직전 인주의 행적을 탐문해간다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며 거기에는 오랜 시간 속 여러 사람의 죽음과 고통이 지층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로스코의 도록에서 시작된 회상은 인주의 흉터, 인주의 외삼촌, 어머니에 대한 단서들이 이어지고,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서 인주와 정희의 가정사, 결혼 등 대물림과 사건의 지층이 드러난다. 강석원 식으로 말하면 달의 뒷면이다. 참 근사하고 상징적인 단어이긴 하지만 타인의 보이지 않는 삶을 유추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하게 된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219p)

 

강석원이 특집 기사에 썼던 달의 뒷면은 인주의 달력에서 본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은 이 정희가 쓴 희곡의 대사였다. 강석원은 알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희곡의 제목은 닥쳐이다. 무대에 올린 정희의 첫 번째 희곡이다. 심리치료의 임상 사례에서 모티프를 따온 이 희곡에 등장하는 닥쳐게임이 인상적이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이 이야기하면 거기에 닥쳐라는 말로 응수하는 것이 규칙이다.

 

이리 와. 내가 사랑해줄게

닥쳐.(조그만 목소리로, 겁먹은 듯이)

내가 돌봐줄게, 부드럽고 아늑하게.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돼

닥쳐.

너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닥쳐.

너는 인형이야.

닥쳐.

……

나에게 너무하는 구나.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겠다.

닥쳐

……

너 같은 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닥쳐!“

247p

 

닥쳐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떤 고통과 상처를 갖고 있는지 또 다른 사람이 어떤 가해를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화들이어서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런데 무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어두운 객석을 향해 천천히 돌아앉으며 혹시, 이것으로 내가 아픈 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내가 아픈 데는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누구에게도, 당신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관객은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보게 되지 않을까? 나에게 있는 달의 뒷면을 생각한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요약하고 달의 뒷면과 같은 상징어를 함부로 인용하는 폭력성에 대해서도!

 

인주는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53p)”

라고 말했다.

 

그렇게 회상과 추적과 탐문을 해가며 정희가 도착한 인주의 고통의 근원은 미시령이 있었다. 그곳에 오래전 인주 어머니의 소외와 아픔,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있었다. 그녀와 연루된 한 남자의 오랜 고통의 시간이 연결되어 있었다.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채.

 

강석원의 구타와 방화로 인해 구급차에 실려 인공호흡기를 쓰고 정신을 잃어가던 정희는 산소 호흡기 속에서 쒜엑쒜엑 숨을 몰아쉬던 인주의 부은 얼굴(67p,384p)”을 떠올린다. 두 사람이 호흡기를 쓰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숨을 쉬고 있는 장면이 전하는 메시지는 삶은 폭력을과 단절될 수 없음이다. ‘호흡기는 삶에 드리워진 폭력의 극단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쒜엑, 쒜엑 소리가 인주의 얼굴에서 터져 나왔다. ……마침내 의사가 나에게 빠르게 말했다.

 

환자가 갑자기 스스로 숨을 쉰 겁니다.

그게 인공호흡기가 넣어주는 숨과 부딪친 겁니다.

일단 호흡억제제를 투여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부딪치면 호흡기를 뗍니다.(384p)

 

세계는 나를 때려눕힐 주먹을 갖고 있다. 어떤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실체적이고 관념적인 모든 폭력에 노출된 삶을 산다. 특히 가난이나 질병과 같은 불행을 대물림하는 경우 그것은 노골적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의 삶에서 폭력을 없앨 수는 없다. 친절을 가장하고 완곡한 어법으로 다가오더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도에 의해 우리는 피를 흘린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 삶을 거부할 수는 없다. 살아야 한다면 그 이유는 인주에게도 정희에게도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연설문 <빛과 실> , 2024.12.7.

 

작가는 다음 작업을 위해 이 질문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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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4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2-24 10: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종으로 횡으로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어서 저도 리뷰 쓰기가 까다로웠어요.

2rjfnr 2025-02-24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어머나 ᆢ 이런 책도 있었는지 몰랐는데요? 독특한 소재에 ᆢ 구조도 그렇고
다른 작품과는 다른 소설인가봐요 .. ..

그레이스 2025-02-24 18:03   좋아요 0 | URL
^^
저는 오래 전에 읽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었어요.
한강작가가 노벨 강연때 장편 5개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했는데, 채식주의자 다음 순서로 나와요.
저는 이 책 처음 읽을때도 이번에 읽을 때도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

2rjfnr 2025-02-24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번씩이나 좋았다고 하시니 ᆢ 호감이 가는데 ᆢ 언제 읽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
기회가 오면 소년이 온다 읽은 후에 ᆢ ᆢ 아마도 그럴것 같아요. ♡♡

 
[eBook] 로기완을 만났다 (개정판)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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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향한 얕은 공감과 거짓된 연민, 금방 지치고 바닥을 보이는 나의 위로와 수고를 떠올리고 얼굴을 붉히게 하는 글들이었다. 열띤 위로로 가장된 자기만족과 담담함으로 감춘 무심함을 들키고, 나에게 기대하며 다가온 그들은 다시 원래 있던 거리만큼 떠나가던 순간들을 기억하게 했다. 진심을 들켜버린 그 순간조차 외면하고 잊어버린 나의 위선을 고발하는 글이었다.

 

화자(話者) ‘가 묻듯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30/123)”가를 생각했다. 답은 가깝고 명료함에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간, 수고, 공간, 관계, 돈 등 내가 쌓아올린 것, 소중히 여기는 나의 것을 내주고 포기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정량이란 것이 없다는 게 문제일지 모르겠다.

 

는 죄책감 때문에 행복해질 수가 없다. 아니 행복하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혐오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너를 혐오해.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적의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쏘아붙인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새벽이다.(18/123)”

 

는 다큐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다.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의 사연을 미니 다큐로 내보내고 ARS로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을 미리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려 애썼다. 윤주는 뺨에 신경섬유종이 크게 자리 잡고 있어 얼굴 대부분을 머리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엄마는 떠나고 아빠는 돌아가시고 동생은 행방불명으로 홀로 살아가는 열일곱살 고등학생 윤주에게 는 조금 특별하게 마음을 기울였다. ‘는 욕심을 부렸고, 윤주의 방송날짜를 시청률이 높은 추석으로 정하고 수술날짜도 의사와 상의해서 미뤘다. 수술실에 들어간 윤주의 종양은 신경섬유종이 아닌 악성으로 밝혀졌다. 화자는 죄의식에 갇혀버렸다. 수술을 미룬 그 세달 동안 악성으로 변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학적 의심 때문에 는 괴로웠다. 윤주를 대했던 마음이 자족적이고 가식적인 연민에 지나지 않았던 거라는 의심과 선의에서 나온 결정이었다는 위로 사이에서 덧없어한다.

 

는 브뤼셀의 L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글을 쓴다는 구실로 브뤼셀을 향한다. 그것이 도피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L’과 면담했던 브뤼셀의 의사 박씨에게서 받은 L의 자술서와 일기를 통해 그의 행적을 따라가며 복기한다. 여기에 윤주의 어린 시절과 암 투병 중인 현재의 불행, ‘의 죄의식이 오버랩 된다.

가방에서 로의 일기를 꺼내 이번만큼은 행간의 의미,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꿰뚫는 독서를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섣불리 연민하지 않기 위하여, 텍스트 외부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 스며들어가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고통과 뒤섞인 진짜 연민이란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서.(35/123)”

 

L의 이름은 로기완, 북한에서 연길을 거쳐 브뤼셀로 망명한 탈북인(북한이탈주민)이다. 연길에 어머니와 불법 입국했고, 어머니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시신을 판 돈으로 베를린을 거쳐 브뤼셀에 도착했다. 호스텔 굿 슬립 good sleep’ 리셉션 직원의 냉랭함 앞에서 뒤돌아 가슴에서 방수포에 싸인 650유로를 꺼내 세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묵직한 통증이 가슴속에 내려앉았다는 화자를 따라 나 역시 먹먹함을 느꼈다. 일주일을 머뭇거리던 로기완은 한국대사관을 찾아가지만, 밀입국할 때 버렸던 신분증이 없어 북한인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한다. 159센티미터 단신, 47킬로미터의 왜소한 몸인 그는 헬로봉주르조차 알지 못하는 무국적자이자 이방인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일상에서는 요구받지 않는 그 증명서들이 로와 같은 이주민, 망명자들에게는 그들 존재를 입증하는 단서들이 된다. 그것이 주는 위로는 영원한가? 개인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 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8/123)”

를 브뤼셀로 이끌었던 로의 문장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지 못하던 시절의 로가 그러했을까? 아니 우리 모두가 인생의 많은 순간 그렇게 살아간다. 입국허가를 받지 못한 채 그 사회의 터미널에 있는 이방인이 된다. 대사관을 나와 담장에 기대 설움을 토해내고, 우연히 들어간 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오열하던 로의 모습에서 외로움의 극치를 본다.

 

로의 국적이 북한임을 판별하기 위해 인터뷰했던 의사 박 역시 탈북인이다. 그는 남한에서 벨기에로 왔다.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죄의식과 함께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다. 상처(喪妻) 후 그는 의사를 그만두고 북한에서 온 난민신청자들의 국적을 판별하기 위해 면담을 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박이 로의 자술서와 함께 주 벨기에 한국대사 앞으로 쓴 코멘트는 로와 같은 난민신청자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저는 귀하께 로기완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보냅니다. 그는 비록 북한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지만, 저는 그가 북한 사람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를 돕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것은 개개인의 고통이며, 이것이 우리의 비극임을 부디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심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 연락하십시오.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함께 전합니다.(91/123)”

 

이 코멘트를 쓰고 있는 박과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의 분노가 느껴진다. 그렇게 는 이방인 로의 행적을 쫓으며 냉담하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그의 외로움과 슬픔에 전이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슬픔에까지 진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어 어리석은 검열을 했음을, 진심이나 진실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다. 타인인 이상 현재의 시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 가질 수는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어쩔 수 없기에 인정하고 슬픔은 슬픔으로 반응해야 했다. 타인이 내 삶으로 걸어 들어온 거리만큼 나 역시 그에게 다가감으로 내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깨달아 가는 동안, 환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그것의 형태로 선명해지는 시각적인 장치는 의 생각의 변화와 함께 멀리 있는 윤주의 상황을 암시한다. 성공적이었지만 귀를 살리지는 못했다는 윤주의 수술 소식과 함께 그것의 형태를 선명하게 갖춘다. 그리고 는 그 귀에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말들을 그 귀에 대고 고백한다. 그것은 윤주의 대체물이기도 하다. 그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은 단절됐던 통화이기도 하다. 다의적이며 탁월한 시각적 장치다.

 

이 소설에서 의사 박의 삶 역시 의료 조력 사망(MAiD, Medical Assistance in Dying)’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박의 고통을 다 알 수는 없기에 아무것도 물을 수 없다. ‘는 윤주, , 로에게 진심으로 공감했을까? 이것이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심이란 잣대는 누구 혹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까?

 

처음으로 돌아가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가깝고 명료하다. 그런데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간, 수고, 공간, 관계, 돈 등 소중히 여기는 나의 것이 필요하고 포기되어야 한다. 거기엔 정량이란 것이 없다는 막연함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을 읽고 공감했다고 해서 나는 현실의 로기완, 윤주, 박에게 거짓 없는 연민과 환대를 보일 수 있을까? 그들은 이 소설 속의 정제된 표현들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닐 텐데.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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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4-04 0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머 저 이거 표지 때문에 연예인이 썼거나 드라마 대본집 같은 건 줄 알았어요;;; 이런 내용이었다니..! 😱

그레이스 2024-04-04 08:11   좋아요 1 | URL
^^
넷플릭스에 영화가 올라오고 광고가 있어서 그런듯요.
잠깐 스쳐가는 광고 영상으로 본 송중기 배우때문에 읽는 내내 방해가 됐어요.
159센티미터 47킬로의 로기완과 배우가 매칭이 되지 않아서....
배우의 이미지를 지우느라 애쓰면서 읽었네요.
영화는 안보려구요 ㅠ
책이 넘 좋았거든요^^

새파랑 2024-04-05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리뷰를 보니 흥미롭네요. 타인에 대한 나의 연민이 진심인지 아닌지 자주 고민했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의 작품인거 같네요~!! 마지막 질문에 공감합니다~!!

그레이스 2024-04-05 15:46   좋아요 2 | URL
^^
참 어려운 문제인듯요
함께 슬퍼하고 할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것조차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얄라알라 2024-04-07 19:17   좋아요 1 | URL
남 얘기처럼 소비할게 아니라 뜨끔뜨끔 자기를 돌아봐야만 읽을 수 있는 소설인거 같아서 읽기가 겁나기도 하네요^^:

그레이스 2024-04-07 19:31   좋아요 1 | URL
예~
내내 저 스스로를 비추고 각성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따뜻하기도 해요
 
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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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212p)”

작가는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으로 흩어져 있는 삶의 파편들을 선택하거나 배제하고, 왜곡함으로 소설을 쓴다. 그러므로 독자는 그 파편들 속에 감추어 둔 작가의 내밀한 음성을 발견해야한다. 독서는 파편들을 퍼즐 맞추듯 맞춰 사실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가 읽어야 하는 것은 소설 속에서 형상화되고 발견해 낸 작가이지, 현실의 작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독자는 소설로부터 읽은 작가를 현실의 작가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흔히 범한다.

 

소설 중 화자 는 작가로서 출판사 편집자로부터, 한 작가의 문학과 삶을 집중 조명해서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는 작가탐구에 글을 써줄 것을 청탁받는다. 그에게 부여된 글쓰기 대상은 그 작가의 소설이 아니라 바로 그 작가라는 말은 쉬울 수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 작가의 삶의 과정그의 문학이 맺고 있는 인과성(14p)”을 전달하는 작업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몇 번의 인터뷰와 그의 자전적 소설에서 작가의 의식 안쪽에 단단하게 붙어 그의 삶과 문학을 지배해 온 질기고 억센 몇 개의 큰 흉터들을(19p)” 발견한다. 사실과 진실에 관해 침묵하는 박부길 앞에서 는 어쩔 수 없이 그 흉터들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자기 노출적인 소설 <내 속의 타인>에서 마주친 흉터들은 이후 작품들 안에서 질서 없이 몸을 섞고 있다. ‘는 그 흔적들을 찾으며, 어느새 박부길을 소설적으로 바라보고 있는(18p)” 자신을 깨닫게 된다.


가 작품들에서 찾은 파편들로 맞춰진 퍼즐, 그는 이렇게 불행하고 지독히도 외로운 존재가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비극적이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모친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했던 신화 속 아버지는, 유년기의 그가 목격한 한 남자의 광기와 죽음, 그 남자를 향한 이유모를 끌림, 그의 죽음에 자신이 가담했다는 죄의식, 선산을 태우고 고향을 떠나면서 흉터가 된다. 모친의 사랑 역시 받아보지 못하고, 자신을 향한 사랑을 왜곡된 정서 죄의식과 회환으로만 표현하는 애처로운 어머니를 외면하는 그는 굶주리고 외로운 존재다. 그가 고향(현실)을 떠난다는 것은 곧 무극사(신화)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95p)”이지만 그 신화는 무극사에서 끝이 난다.

 

작가탐구를 준비하면서 박부길의 자전적 작품을 <지상의 양식>을 싣기로 한다. 이 소설은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고향을 떠난 그의 청소년기와 20대의 삶을 그리고 있다.

외로움 안에 갇혀 있었던 그는 같은 세계에 사는 동질의 원형질을 가진 단 한 사람의 동료를 만나는 것(141p)”이 간절했기에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습관적인 독서 안에서 의도적인 오독을 한다. 골방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철저히 혼자인 존재가 하는 독서란 외부 세계와 개인의 내면 사이에 높은 벽을 세우고 하는 행위이기에 오독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는 오독이 일어나는 상황과 그 빈번함을 소름끼치게 깨달았다. 나의 상황, 기분 안에서 작품들을 읽고 해석했던 많은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그는 나처럼 이 세상에 잘못 보내진 나의 형제, 나와 동일한 표적을 소유한 나의 동지, 나와 원형질이 같은 단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159p)” 그러므로 사랑 역시 그 대상을 자신과 같은 세계의 사람이라는 오해로 시작한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사랑의 불구성을 짐작할 수 있다.(288p)” 사랑을 받지 못했고 배우지도 못한 그의 사랑은 너무 아슬아슬하고 가학적이었다고, 전쟁처럼 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289p)” 했다.

 

그의 사랑도 신앙으로 대체되어 있는 갈망도 가짜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신과 인간의 문제를 깊이 천착한 다른 작가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회의와 갈등, 반항과 구원의 드라마로부터 너무 자유롭다.(262p)”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도 동료들과 공감대를 찾지 못한다. 그가 주장하는 학자적 태도는 불통의 이면을 갖고 있다. 그가 세상을 따돌리는 오만함은 사실 슬픔과 울분, 또는 슬픈 울분이고 그 뿌리는 좌절감(31p)”이다. 그는 세상과 불화하며 부유(浮遊)한다. 많아지는 생각은 결핍으로 향하고, 불화감은 증폭된다. 그 증폭된 불화감은 더 복잡은 생각의 밑천이 되는 악순환에 갇힌다.


이승우 작가는 이 액자소설을 통해 한 사람의 지독한 외로움을 통해 사랑, 신앙심이 진실이 아닌 거짓일 수 있는 인간상황에 대해 그려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면서 그것을 드러내거나 감추고 가장하면서 쓰는 작가의 작업과 그렇게 흩어져 있는 작가의 파편을 읽어내는 독자의 시선에 대해서 생각을 전하고 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주제를 전하기 위해, 이런 소재와 구성을 취한 작가의 글쓰기가 탁월하다.

 

작가는 물론 자신의 삶을 사실 그대로 베끼지는 않는다. 기억되거나 말해진 사실은 결국 발췌된 사실일 뿐이다. 선택과 배제를 통해 사실이 구성된다. 거기에 굴절과 왜곡이 끼어든다. 그것이 작품이다.(210p)”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백미라 할 수 있다. 어둠이 그와 충분히 친해졌을 때, 박부길은 충동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으로부터 상상력의 위험을 경고 받은 바 있는 작문 <아버지>의 세련된 늘이기에 다름 아닌 이 작품을 씀으로써 그는 막혔던 글의 길을 비로소 뚫는다.(335p)” 그의 글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선생님들의 경고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그의 잠재된 죄의식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기도하듯 내면의 고백을 털어놓는다.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그것은 자기 이야기를 마음 놓고 솔직하게 늘어놓기 위해서이다.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한없는 끈기와 인내로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들어 줄 상대를 찾아서 사람들은 기도처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지상의 양식>) (331p)“

 

그는 그 죄의식을 노출하여 공식화함으로써 아버지를 인정하고자 했다.(335p)” 어릴 적 뒤뜰에 살고 있던 광인 아버지를 감추려했던 어른들의 태도로부터 전이된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아버지의 존재를 시인하고, 아버지로 하여금 그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새로운 신화를 쓰고자 했다는 말에서 뭔가 긍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해낸 것은 아버지와의 값싼 화해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교묘한 것이다. 죄의식의 되돌림.(335p)”이라는 말에서 자전적 글쓰기가 가져다 줄 수밖에 없는 회환에 갇히는 작가의 고통을 보게 된다. 작가의 작업은 교묘하다. 드러냄은 전략적이다.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335p)”

작가들은 그렇게 신화를 쓴다. 그러기에 글쓰기가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 고통스럽지 않을까?

 

사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그 도시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의 감추어진 마음 혹은 무의식 혹은 영혼의 어두운 곳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다. 그것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면이고 그것을 보는 것은 지울 수 없는 고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승우 작가의 이 책 제목이 생각났다. 누구나 갖고 있을 생의 이면’,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억나게 하는 흉터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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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12 1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삶을 사실 그대로 베끼지는 않지만 상당 부분 자신의 경험과 생각은 들어갈 것 같아요.
올려주신 기도에 대한 인용문~^
저는 신에게 제 얘기 늘어놓는 게 귀찮아서 ㅋㅋ
남을 위한 기도만 하는 듯요^^

그레이스 2024-01-12 21:56   좋아요 3 | URL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그 기도 장면 너무 처절했어요.

혹시 ‘다 아시잖아요?‘
이런 말은 안하시나요?
^^

청아 2024-01-12 2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죄의식의 되돌림‘, ‘감추기 위해 드러낸다‘ 그런 고된 작업이기에 작가들의 평균 수명이 의외로 낮은가 봅니다.ㅎㅎㅎ
그래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절박함이 느껴져서 슬프기도 하고요. ‘흉터‘맞는 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4-01-12 21:57   좋아요 2 | URL
예!
작가의 글쓰기의 고됨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서곡 2024-01-14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일요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4-01-14 15:39   좋아요 1 | URL

서곡님두요
길 미끄러운데 조심하세요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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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박구리가 죽어 있던 그날 아침(9p)

직박구리를 묻어주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던 철이는 가슴 속에 치밀어오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슬픔일까, 아니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까?”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죽음을 불현 듯 실체로 직면한,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아버린 자의 두려움과 슬픔일 수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 감정은 마치 상점의 쇼윈도 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볼 수는 있지만 손으로 만질 수는 없는.(16p)“이란 표현에서 수상함을 발견한다. 인간이 감정을 이런 식으로 느끼나?

 

막연한 추상으로 먼 곳에 머뭇거리던 죽음이 어느 날 급습하여 아버지의 몸을 관통해서, 나와 정면으로 맞닥뜨렸을 때의 그 예리한 통증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11p)”

 

대부분 발작적인 구토증, 흉통, 손끝의 저림, 눈물 등 즉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철이에게는 그 분출이 거치는 단계가 있는 듯 보인다.

 

철이는 휴머노이드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휴먼매터스의 연구원인 최박사를 자신의 아버지라 여기고 있던 철이의 정체는 곧 드러난다. 등록되지 않은 휴머노이드를 검거하는 요원들에 의해 잡혀 수용소로 보내진다. 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독자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철이는 수용소에서도 오랫동안 자신이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떤 느낌일까? 후에 자신에 대한 자료를 찾아 나선 철이의 기억은 항상 직박구리가 죽어있던 그날 아침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흔들리던 그 순간에서 시작한다. 존재의 근원이 흔들리고 딛고 있는 지반이 사라진 주변을 둘러싼 모든 관계와 사물이 무의미해지는 그런 경험이 아닐까?

 

철이가 아버지라고 여겼던 최 박사는 가장 인간다운 휴머노이드, 인간의 감정과 윤리를 그대로 가지고 인간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해나갈 휴머노이드(94p)”를 연구했다. 철이는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철이가 갖고 있는 성품은 만들어질 당시 입력된 데이터들과 최박사가 철이에게 했던 교육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철이에게서 보여지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공감능력, 배려심 등은 가장 이상적인 인간성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철이가 수용소에서 만난 선이는 인간의 치료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클론이고, 민이는 애완용으로 제작된 휴머노이드다. 인간이 해야 할 노동이나 물질적 활동 뿐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까지 휴머노이드에게 역할을 맡기게 되면서 인류는 존재할 이유를 상실한다. 의식은 데이터화 되어 사라진다.

 

몸이 파괴되거나 수명이 다한 휴머노이드는 인공 뇌를 활성화 시켜 의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상태는 마치 전신마비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데이터 망을 이용해 자신이 살던 휴먼매터스 위를 조망하는 자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애초에 인간의 육체를 가진 존재로 만들어진 철이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몸으로 해왔는가 새삼 깨닫는다. 작가는 민이의 재활성화라는 문제를 통해 다른 몸을 가진 존재는 처음 존재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될까? 라는 질문을 하지만, 철이가 의식으로 있을 때나 두 번째 몸을 갖게 될 때, 다름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순으로 그 질문을 의미 없게 한다.

 

몸이 낡아 그 생명을 다해도 구조요청만 하면, 의식으로는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철이는 더 이상 존재하길 거부한다.

 

여기서 구조되더라도 육신이 없는 텅 빈 의식으로 살아가다가 오래지 않아 기계지능의 일부로 통합될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295p)”

 

자작나무 숲에 누워 있는 철이는 직박구리가 죽어있던 날 아침을 회상한다. 의식이 사라지는 완전한 소멸의 순간 그가 회상한 그 장면은 철이 안에 심겨진 궁극의 인간성이 아닐까? 그 인간성이란 유한한 육체를 갖고 있는 인간의 죽음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인간의 조건이 윤리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수용소의 문제, 생명 윤리, 인간의 조건, 죽음, 마음의 실체 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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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1-07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작가는 계속 책을 내고 있군요!
한국 작가들 작품을 안 읽은지 너무 오래 되어 요즘은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궁금하긴 합니다.
요즘 한국 작가들 책들 보면 정말 예쁘게 잘나와 매우 읽고 싶게 만드는 거 같긴한데....읽어야할 세계문학 대기작이 넘쳐나서 읽을 수가 없어요..^^;; 그럴수밖에 없는게 김영하보단 부차티가 매우매우매우 좋아서...그런 순환의 연속..ㅎㅎ 한국작가들은 잠정적 후순위로 계속 밀리네요...하하~

그레이스 2023-11-07 11:44   좋아요 1 | URL
김영하작가의 읽어본 작품 중에 좋았어요.
항상 뭔가 걸리적 거리는 구석이 있었는데,,,
<검은꽃>, 소재는 좋았고 초반 내용도 좋았는데 뒤로 갈수록 읽기 힘들었구요
<엘리베이터...>는 처음부터 힘들었구요

항상 아이디어를 뒷받침할 스토리 구성력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제 생각!
제게 좋았던 작품은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는데... 이 작품 추가했습니다.
자료 풀이 좀 넓어지고, 구성력도 더 좋아졌단 생각입니다.
이런 평가할 자격이 있나 싶지만요.
제생각입니다.^^

새파랑 2023-11-07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의 별 다섯이군요~! 이 작품 너무 감동적이라고 하던데~!!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이 떠올라서 왠지 손이 안가더라구요 ㅎㅎ

그레이스 2023-11-07 19:11   좋아요 1 | URL
저도 클라라와 태양이 생각나긴 했어요
그런데 그 작품과는 결이 다른듯요.
이시구로는 모호한 면이 있는데,,, 이건 차이가 있는듯요
뭐가 좋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읽는데 어려움이 없어서 하루 안에 읽는게 가능하더라구요.
마음 감정 이런 것에 꽂힌다면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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