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Z’ 딱 봐도 기호학인 듯 보이는 이 책은 롤랑 바르트라는 작가만 보고 사두었었다. 기억에는이미지와 글쓰기라는 책을 읽고 좋아서 책을 몇 권을 구입했는데, 읽어내는 속도는 몇 권 되지도 않은 구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 책은 책장에 꽂혀만 있는 신세였었다. 결국 바르트 읽기도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이번에 발자크 읽기를 하면서 다시 이 책을 펼쳐들었다.


S/Z』는 바르트가 발자크의 사라진느를 텍스트로 해서 강의한 내용이다. 제목의 S는 사라진느, Z는 잠비넬라의 첫 알파벳이다. 둘 다 이 소설 속에서 화자가 한 여성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문장과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 이때 텍스트는 5가지 코드로 읽혀지는데, 해석학 코드(Hermeneutic code, HER.), 행동적 코드(Proairetic code, ACT.), 문화적 코드(Referential code, REF.), 의미론적 코드(Semic code, SEM.), 상징적 코드(Symbolic code, SYM.)이다. 어떤 말과 행동 인물을 표현하는 텍스트에서 독자는 의심하고, 재생하고, 정보를 얻고, 짐작하고, 교감하는 상호작용을 한다. 바르트는 이 소설을 561개의 렉시아(lexia, 독해 단위)나누고 그것을 코드 기호를 달아놓고 분석한다. 이렇게 조각조각 내서 읽는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가끔은 내가 텍스트와 상호작용하며 얻은 의미들이 일치하는 지점에서는 작은 희열을 맛본다.

 

바르트는 이 강의를 통해사라진느를 세상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 책은 텍스트를 읽는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므로 전적으로 그것에만 의존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사라진느를 먼저 읽고 감상을 한 후에 참고한다면 확장된 독서경험이 될 것이다. 어쨌든 나는 도움을 받았다.


 사라진느는 문학과 지성사의 책으로 처음 읽었다. 힘들게 읽었던 생각이 난다. S/Z에도 본문은 수록되어 있다. 두 권이나 있는데 민음사 책을 또 산 이유는 전적으로 제목을 오독한 탓이다. 검색하던 중 사라진 샤베르 대령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발자크 읽기를 하던 중이라 망설이지도 않고 구매버튼을 눌렀고 받아보고서야 사라진샤베르 대령사이에 점 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라진샤베르 대령

! 샤베르 대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ㅋㅋㅋㅋ)

 

그러면 문지사는 사라진느’, 민음사는 사라진이라고 했을까? 프랑스어에서 SarrasineSarrasin이라는 남성명사에 e를 붙여 여성명사를 만든 것으로 사라진느로 읽는다.(전자사전에서는 사람이름이 아닌 일반명사는 사라진으로 발음이 나온다.) 여기서 또 의문! 왜 남자 주인공에게 여성이름을 붙였을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었다. 거세당한 카스트라토 가수 잠비넬라를 사랑했던 사라진은 나중에서야 그 정체를 알게 된다. 사라진에게서 이중적인 심리를 읽게 된다. 그가 진실을 알고 잠비넬라에게 퍼붓는 분노는 속은 것에 대한 화이기도 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동성애적 성향을 거부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사라진(Sarrasine)이라는 낱말은 프랑스인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여성성이라는 또 다른 함축 의미를 실어 나르고 있다. 특히 프랑스어의 고유명사 연구를 통해 남성(Sarrazin)이 통상적으로 확인되는 고유명사인 경우, 이 여성성은 여성의 특수한 형태소로서 마지막에 e를 일반적으로 받는다. (함축된) 여성성은 텍스트의 여러 장소에서 고정되도록 되어 있는 하나의 기의이다. 그것은 성격 분위기 수사 상징을 형성하기 위해 동일한 종류의 다른 요소들과 결합될 수 있는 이동성 요소이다.(S/Z롤랑 바르트 93p)”

그는 사라진이 보인 난폭한 분노는 잠비넬라로부터 온 거세공포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다시 이야기를 청취하던 여인의 분노로 나타나는데, 그녀 역시 같은 공포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쎄 여기까지는 내 지식이 짧아서 동의하는 것을 유보하고 싶다. 제목에 대한 비슷한 해석을 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남성명사는 사라쟁, 여성명사는 사라진사라진느두 가지 발음이 다 검색된다. 그러나 제목이 전하는 의미들을 생각해 본다면 나는 고유명사를 읽는 발음 사라진느로 표기하는 편을 선택하겠다.


민음사 번역 사라진은 너무나 매끄럽게 잘 읽혔다. S/Z에 실려 있는 번역문과 비교했을 때 좀 더 의역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춰져 있는 의도, 기호, 의미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면서 눈과 의식을 이끌어가는 힘은 민음사 번역에 더 있었다. 잠비넬라의 정체가 드러나는 지점까지 빠른 속도로 끌려가게 된다.

 

떠들썩한 연회장과 추운 겨울 회색빛 정원의 이미지로 시작된 대조법은 한 존재에게서 보여지는 상반된 이미지를 향한다. 랑티 백작 저택의 떠들석한 연회 한 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정체불명의 노인, 노쇠한 육체 위에 입혀진 화려한 의상은 누더기로 보이고, 보석들은 기괴한 존재의 모습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낸다. 더욱 의미심장한 대조는 이 환상적인 인물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여성적 교태다.

이 병약한 육신에 새겨진 노쇠의 흔적에 별수 없이 주목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 깊은 혐오가 마음을 죄어 왔다(25p).”

이질적인 요소들은 눈길을 끌고, 호기심을 갖게 하고, 심지어 혐오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인물의 등장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지만, 그를 감시하고, 부축하고, 그 앞에서 웃음 짓는 랑티가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수상쩍다. 그는 그들의 행복, 목숨, 재산을 움켜진 마법의 인물 같았다(20p)”라는 말을 통해, 랑티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사치가 그에게서 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도니스, 엔디미온은 그 노인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벽에 걸려 있는 아도니스는 사라진의 조각을 보고 그린 것이고, 그 모델이 잠비넬라라는 사실이 구술되는 순간, 존재는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결국 추기경의 노리개였던 카스트라토 가수 잠비넬라의 정체가 밝혀지고, 피그말리온의 욕망을 갖고 있던 사라진은 분노한다. 잠비넬라를 사랑했던 사라진의 당혹스러움에는 공감할 수 있으나, 분노에는 그럴 수 없다. 그의 분노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군중 속에 기괴한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병들고 노쇠한 잠비넬라에게 연민을 갖게 된다.

 

이질적인 요소들은 내러티브를 통해 연민을 일으킨다. 외부로 보여지는 이미지, 그 존재가 갖고 있는 사회 통념적 시선으로는 배척될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근원에 타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폭력이 있었음을 알게 될 때, 그에게서 비애를 느낀다. 그리고 그 폭로된 정체 앞에서 공포로 절규하는 사라진느, 그의 분노는 측은하다. 인간은 보여지는 것에 의해 눈이 멀 수 있다.

 

이번에는 발자크에게 묻고 싶다. 글을 쓴 의도가 무엇이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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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0-28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Z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통과합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4-10-28 17: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coolcat329 2024-10-29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Z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기호학이 뭔지 모르나 독자가 소설을 읽고 문장과 상호작용하는 다섯 가지 코드는 궁금하네요.
제 생각에도 ‘사라진‘보다는 ‘사라진느‘가 더 맞는 거 같아요. 민음사 번역이 읽기 수월하다니 참고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4-10-29 09: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기호학은 볼수록 어렵네요
ㅎㅎ

서니데이 2024-10-29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라진보다는 사라진느 쪽이 더 여성명사 같은데, 남성명사가 사라쟁이군요.
원서가 외국어인 책은 번역이 잘 되어 있어야 읽고 이해하기 좋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4-10-29 21:22   좋아요 1 | URL

그렇죠?
오랜만이고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님도 평안하세요

레삭매냐 2024-10-30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쓰는 기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발자쿠 선생.

평생 그렇게 많은 작품들을 어
떻게 쓸 수 있었는지 그저 신기
할 따름입니다.

S/Z의 저자는 무려 롤랑 바르트
네요. 책은 처음 알게 되었네요.

그레이스 2024-10-30 09:07   좋아요 1 | URL
발자크가 사라진느를 바르트가 사라진느를 텍스트로 S/N을 강의한 동기에 어떤 접점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도시에서 몰려든 관광객을 향해 내키지 않는 웃음도 지을 줄 알았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자신들의 삶을 살아냈던 것이다. 어쩌면 원형 그대로의 화포를 찾고자 하는 내 욕심으로 화포 이외의 것에서 눈을 돌렸을 것이다. 자신은 온몸으로 문명의 편리를 누리며 전통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는 꼴이었다. 당신들은 언제나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으라고 그래야만 한다며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는 몰염치와 다르지 않았다.
여행은 때로 누군가에게 모독일 수 있었다.
결국 몽족과 그녀들의 화포를 찾아 헤맨 내 발걸음도 내 안의 잣대만으로 다른 것에 눈감아버리는, 순수 혈통에 집착하는 뿌리 깊은 이기심과 닮아 있었는지 모른다. 여기는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동안 그네들이 끝끝내 지켜온 삶의 터전이었고 나는 더운 여름날 시원한바람이나 물 한 모금보다 못한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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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희곡선 을유세계문학전집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박현섭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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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명동의 극장에서 연극 갈매기를 봤었다. 이 내용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갔던 나는 전하려는 메시지를 대략 짐작만 하고 감동도 공감도 하지 못했었다. 가볍게 던져지는 대화들과 주인공의 자살이 맥락 없이 다가왔다. 연기나 연출의 문제가 아니라 체호프의 작품 자체가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19세기 말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 문학사에 있어 공백 시대에 등장했다. 네크라소프,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가 세상을 떠났다. 톨스토이는 절필을 선언했다. 그런 시기에 체호프가 등장했다. 초기에는 코믹하고 가벼운 글들을 썼고, 그레고로비치로부터 칭찬과 격려의 편지를 받고서야 지방의 의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었다. 그의 단편과 희곡들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체호프는 개인주의자였고 예술가의 시선을 갖고 있다. 그래서 1890년 강제 유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사할린으로 여행을 간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 여행 때문에 병을 얻었고 그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이유가 된다. 그는 지방의 의사로 있으면서 관찰한 사람들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고, 그의 작품에는 의사가 등장한다.

 

이 희곡집에는 갈매기, 바냐삼촌, 세자매, 벚나무 동산체호프의 4대 희곡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담겨있다. 이 희곡들은 러시아 농촌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들과 이 농촌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도시의 귀족 또는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대화의 전반적인 정서는 우울이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정치적 암흑시대의 러시아인들의 무기력과 자기중심주의를 읽게 된다. 사실 체호프는 정치에 무관했기에 지식인들의 이런 정서와 태도는 농촌소외와 더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철도의 발달과 외국 자본의 유입으로 경제는 호황이었다. 이와 더불어 철도건설은, 농노해방으로 시작되었던 사람들의 도시로 유입은 더욱 가속화했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도시 인구는 급격하게 팽창했다. 반면 농촌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 패배감으로 인해 우울함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마샤와 메드베덴코의 우울함은 표면적으로 엇갈린 사랑때문인 것처럼 보이나 이들의 대화를 읽어보면 더 근본적인 이유들을 보게 된다왜 항상 검은 옷을 입느냐고 질문하는 메드베덴코에게 마샤는 불행하기 때문에 입는 인생의 상복이라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메드베덴코는 가난에 대해 토로한다. 마샤는 트레플레프를 사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메드베덴코와 결혼한다. 과연 메드베덴코는 그녀를 사랑해서 구애했을까? 그의 구애가 너무 열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도 두 사람에게는  체념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어 있는 듯 보인다.

 

트레플레프는 여배우 아르카디나의 아들이다. 그녀는 자기애가 강하고, 그래서 아들은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 그는 유명한 여배우의 아들로 항상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하고 인정욕구가 강하며 자의식이 강하다. 당시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을 구태의연하다고 비판하고 오만하다. 그는 새로운 형식의 희곡을 쓰고 무대를 선보인다. 가정극 공연을 위해 작은 무대가 세워지고 그의 희곡은 올려지지만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어머니의 비웃음을 산다.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트레플레프 주변인들이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고, 이해하려고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인 니나도, 그의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도른조차도 그런 듯 보인다. 그의 고통의 깊이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심지어 죽은 갈매기라는 복선, 광기를 보이는 그의 행동들에서도 그의 자살 시도에 대한 아무런 전조를 읽지 못한다. 죽음을 가져온 두 번째 자살은 더욱 갑작스럽다. 관객조차도 그의 이런 심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심과 문제에 몰두해 있어 누군가의 말을 듣고 들여다볼 여유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스몰토크, 날씨 이야기, 농담 속에 외로움이 묻어나고 있다. 많지도 않은 사람들이 각자의 고민에 빠져 있으면서 그들 속에서 서로 소외시키고 소외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트레플레프는 왜 그런 무대를 올렸을까? 아르키디나가 어렴풋이 느낀 것처럼 모친인 그녀를 조롱하기 위해 난해한 작품을 올린 것이 아닐까? 모친으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과 증오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트레플레프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니나가 그의 곁을 떠나고, 그는 절망감에 자살시도를 한다. 시간이 흐르고 그는 글을 써서 성공한 작가가 된다. 새로운 형식의 글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도른은 그 사람은 이미지를 통해 사고할 줄 알아요. 그 사람 소설은 색감이 풍부하고 선명해요. 나는 그걸 강하게 느낍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분명한 쟁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인상을 던져 줄 뿐, 그 이상이 없어요. 사실 인상 하나만으로는 멀리 나갈 수 없거든요.(체호프 희곡선을유출판사, 96p)”라고 말한다. 그렇듯 트레플레프는 한계를 느낀다.

 “새로운 형식에 대해 그렇게 떠들어 댔지만, 지금 보니 나 스스로 점점 타성에 빠져들고 있어.(체호프 희곡선을유출판사, 98p)”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오래 멀리 끌고 갈 수 없다. 그는 작품에서 진부함과 따분함을 지우기 위해 다시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트레플레프 뿐 아니라, 그가 라이벌이라 생각하는 트리고린의 말을 통해서도 작가로서의 고통을 전하고 있다. 아마도 체호프의 작가로서 고충이 녹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모친 아르카디나는 데카당하다고 비판하고, 관객의 호감을 사지 못했던 그의 작품이 후에는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모더니즘, 이미지나 상징, 허무의 냄새가 가득한 전위적인 작품을 시간이 지나고서야 대중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른의 말처럼 전달하는 메시지와 분명한 쟁점을 던지지 못함으로 그는 한계에 부딪친다. 애초에 그의 글쓰기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질문하게 된다.

 

또한 도시로 갔다가 트리고린에게 버림받고 배우로도 성공하지 못한 니나가 찾아왔을 때, 그는 니나에게 곁에 있어줄 것을 호소한다.

 “나는 외롭습니다. 내 마음에 온기를 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마치 지하에 있는 것처럼 추워요. 그래서 무엇을 쓰든 간에, 내 작품은 모두 메마르고, 딱딱하고, 음울해져요. 여기 남아 줘요, 니나, 제발 부탁해요, 아니면 당신과 함께 가도록 해 줘요!(98p)” 

얼마나 외롭고 처절한 부탁인가?

 

그는 작가로서 한계와 상실의 심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죽음의 갑작스러움에서 체호프에게 감탄하게 된다. 아무 정보 없이 봤던 연극에서 내가 너무 개연성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이유인 듯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이 체호프의 의도였다.

 

트레플레프의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구멍은 작가로서의 성공, 사람들의 인정과 같은 것으로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글을 씀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한계를 만나고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다.

 

갈매기의 트레플레프의 자살(갈매기)도 바냐삼촌의 절규(바냐삼촌)도 모두 갑작스럽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갑작스러움만 본다면 체호프가 그리려는 인물들을 지나친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나보코프는 "체호프는 등장인물을 교훈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인물을 미덕의 전형으로 만들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인간상 그대로를 정치적 메시지나 문학적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그려낸다"고 말한다. 한 인물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가 관찰한 필부 필녀를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이들이 만나 어떤 사유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체호프의 등장인물들은 진정한 도덕과 정신문화, 물질적 안정과 풍요가 러시아 민중에게 뿌리 내리지 않는 한, 고매한 지식인들께서 선술집 옆에 다리나 학교를 짓느라 아무리 고군분투하더라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456p)”

 

사람은 다 자신의 문제에 몰두해 있다. 가까운 사람이라도 타인의 고통에 오랫동안 관심을 두기란 어렵다.- 나의 문제가 가장 크고 당면한 문제이기에.  당연히 트레플레프와 같은 사람은 소외된다. 개인주의가 이제는 삶의 규범처럼 되어서 개인의 사생활은 침해당할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그 영역들의 모임에서 트레플레프와 같은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추방을 당하게 된다. 19세기말 러시아 농촌 소도시 체호프가 그려내는 사람들은 다 외로웠다

 

나는 고통받는 타인에게 어느 정도 얼마나 지속적으로 관심을 둘 수 있을까? 그의 요청이 없다면 무관심해도 괜찮을까? 혹시 내가 놓쳤던 사람들은 없을까? 등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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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10-1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통 받는 타인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유지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백만 한 가지 문제들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죠.

나는 외롭고 싶지 않지만 또 타
인의 외로움은 잘 모르겠다 -

아, 쉽지 않은 명제입니다, 참말로.

그레이스 2024-10-16 19:09   좋아요 1 | URL
^^ ㅠㅠ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간의 고통은 변함이 없죠
표면적 이유만 달라졌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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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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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축하,,,,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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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10-10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레이스 2024-10-10 20:37   좋아요 1 | URL
어제 방송에서 후보에 올랐으나 가능성은 낮다고 하더니,,, 항상 틀리는 듯요. ㅎㅎ

독서괭 2024-10-10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굉장해요!!

그레이스 2024-10-11 09:10   좋아요 0 | URL
진짜 예상도 못했는데,,,
역시 그 해의 이슈가 될만한 주제가 던져져야 하는듯요
인간의 폭력성!

jenny 2024-10-10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있는데도 이 책을 아직 못 읽었어요
읽어야겠어요

그레이스 2024-10-11 05:13   좋아요 0 | URL
한강 책 찾느라 한참 여기저기 뒤졌네요 ㅎㅎ
애들이 이제서야 달라고 해서!

레삭매냐 2024-10-1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박으로 축하합니다, 고저.
 

인간은, 지향(指向)이 있는 한, 방황하느니라.(파우스트전영애역 317)”

발자크를 보며 나는 파우스트적 인간을 생각한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자서전적이라는 루이 랑베르를 보며 더욱 그렇다.

송기정 교수는 발자크의 거듭되는 실패와 그로 인한 부채는 그의 창작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정체성을 늘 찾아 나섰던 그의 삶은 방황으로 보일 수 있으나,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파우스트전영애역 317)” 있듯, 그 역시 글쓰기에서 길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방황이라 보였던 것들이 글을 쓰기 위한 지식들을 담는 시간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다 어떤 때는 그의 이 방대한 지식이 빼어난 묘사들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견자로서의 자질을 보였던 루이 랑베르는 사제인 삼촌의 집에서 천착했던 영성 서적들과 방돔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동안 깊숙이 빠져들었던 신비주의는 파리에서 환멸감을 느낀 시간동안 더욱 빠져 든 사유의 대상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한 가지 주제에 과도하게 빠져 고립됨으로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과연 그가 삼촌의 신비주의 관련 책을 가까이 접하게 된 것, 그리고 스탈남작부인의 후원을 받아 방돔 기숙학교에 가게 된 것이 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는가에 대한 물음이 남는다.

 

반쯤은 군사적이고 반쯤은 종교적인(21p)”인 기숙학교는 루이와 같은 소년에게 합당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발자크의 기억 속에 있는 방돔 기숙학교에서의 시간이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할 만큼 불행했음을 알게 된다. 발자크는 이 근대학교의 비인간성과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발자크는 화자로서 루이 랑베르의 삶을 말해주고 있지만 두 인물 다 발자크임을 추측할 수 있다.

 

루이 랑베르가 이 학교 시절부터 계속 천착하여 연구한 주제는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 그것은 보는 것이라고 한다. 영적인 세계를 주변에 흐르는 자기로 설명하려 한다. 지금의 지식으로 보면 허황돼 보이지만 당시 과학의 한 흐름이었다고 한다. 그는 <의지론>을 쓰기 시작하지만 완성하지는 못한다. 그 의지론은 쇼펜하워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생()의 세계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첫째 모든 욕망을 떠난 예술적 관상(觀想)을 통해서이다.” 

결국 그렇게 꼼짝 않고 먹지도 말하지도 않는 상태, 정신만 남은 것 같은 상태로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나약한 인간의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절대'를 담으려 했기에 그는 분열된 자아로 광기를 일으킨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면, 발자크는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이 작품이 그의 인간희극의 철학분야에 속해 있다는 것이 그 답을 어느 정도는 알려준다. 발자크는 철학자를 추구했다. 또한 과학에도 심취해 있었으며, 실험실을 마련하기도 했다고 한다. 철학과 과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적 명제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소설은 그가 진리를 추구해왔던 과정, 그리고 유소년기의 상처와 그를 좌절시킬 수밖에 없었던 환경들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저널들 현대 생활의 발견이란 책의 우아하게 사는 법, 발걸음의 이론, 현대의 자극제론은 발자크 <인간희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들이 있다. 나는 발걸음의 이론에서 루이 랑베르의 연구와 집착, 광기의 위험한 순간들을 엿보았다.

 

발자크는 인간의 겉모습을 뚫고 나오는 의지가 전기 물질로서 드러난다는 루이 랑베르의 이론을 인용하며, 이런 인간 정신사를 증명하는 이론이 다루어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발걸음이 그의 직업, 정신, 심리 등을 드러내는 체계를 만드는 연구를 하겠다고 한다. 하루 종일 한 자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그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 발걸음에서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는 작가로서의 탁월한 관찰력이 뛰어난 표현력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임을 알게 된다.

 

나는 학자의 엄밀함과 바보의 미망(迷妄) 사이에 머무를 것이다. 나는 내 책을 읽으려는 사람에게 그 점을 충실하게 알려야 한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97p)”

 

여기서 바보는 구덩이를 보고도 빠지는 사람이고, ‘학자는 그 깊이와 거리를 측정한 뒤 계단을 만들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발자크는 말한다. 이 둘 사이에서 그 글을 쓰려면 두려움 없이 광기를 상대하고 겁 없이 과학을 상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구덩이였을까?

 

그의 연구도 난관에 봉착하는 순간이 있다.

 

내 지식의 혼돈 상태를 두고,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나는 단지 보잘것없는 콩트를 끌어냈을 뿐이고, 혼돈 상태는 거기에서 인체 생리학을 불러냈다. 나는 우리를 극단으로 내모는 법칙들을 연구하며, 신이 그 힘의 중심을 우리 마음속 어느 곳에 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능력이 각 피조물의 환경에 부여한 현상들을 밝힐 수 있었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105~106p)”

 

루이 랑베르의 좌절이 보인다.

 

신의 목소리를 가장 잘 들었던 수학자가 천부적인 분석적 재능으로 주장하였듯이, 지중해 해안에서 쏜 총알 하나가 중국 해안에서도 감지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면만약 우리가 우리 박으로 큰 힘을 발산한다면 말이다.우리는 주위 환경의 조건을 변화시켰거나, 제자리를 찾고자 하는 활력의 효과를 통해, 우리를 둘러싼 생물과 무생물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106p)”

 

루이 랑베르의 자기 이론을 연상하게 한다.


18세기 말 메스머의 동물 자기론1830년대 프랑스에서는 신비주의가 유행했다. 루이 랑베르가 천착했던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프랑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빛을 보았다. 자기에 관한 이론이 가장 많이 언급된 소설은 루이 랑베르.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루이 랑베르가 천착하며 읽었던 것들이다.

 

당시의 지적 분위기로 보아 신비주의에 대한 믿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발자크의 입장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다라고 오노레 드 발자크의 저자 송기정 교수는 말한다.

 

당시 실증주의와 신비주의를 결합하려는 연구는 수없이 많았다. 스베덴보리도 메스머도 라바터도 과학자인 동시에 신비주의자였다. 인간과 땅과 우주의 통일성을 추구했던 발자크에게 과학과 신비주의의 결합만큼 유혹적인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과학에 몰두했지만, 과학자들보다 더 대담하게 우주와 인간과 과학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실증주의자였지만 신비주의적 실증주의자였던 것이다. 많은 작가가 그의 생각에 동참했다. 그러나 아무도 발자크처럼 시대의 신비주의와 과학의 관계를 묘사하지 않았다. 19세기 풍속연구가다운 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오노레 드 발자크154-169p)“

 

나는 모든 것을 배웠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걸었다. 나와 같은 가슴, , 두개골을 가지지 못한 어떤 사람은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른 도리가 없어서 아마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발걸음의 이론111p)”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비서 역할을 하는 천재가 있다.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타키투스, 셰익스피어, 아레티노, 마키아벨리, 라블레, 베이컨, 몰리에르, 볼테르는 시대가 말해 주는 대로 펜을 들었다.(발걸음의 이론 117p)”

 

좌절의 순간에도 골상학과 신체과학으로 자신의 뛰어남을 피력하는 발자크!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시대의 비서 역할을 하는 천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주제를 연구하는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인간희극>에는 그가 문학인 이상(以上)의 정체성을 추구했음을 알려주는 철학·과학·역사·예술 분야의 방대한 지식이 담겨있다. 읽어갈수록 로댕의 <발자크>가 오버랩 된다. 좌절과 고단함, 지식으로 가득 찬 머리를 이고 가는 자만심 섞인 고뇌의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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