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족쇄가 떨어졌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던 나의 마음속에서 철커덕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이 소설은 이 장면으로 기억하게 될 듯하다. 형기를 마치고 유형지를 떠나던 날 그의 다리와 손을 연결해 묶고 있던 사슬을 푸는 장면!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내 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10년 동안 항상 몸에 붙어 있던 것이었음에도,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 물건은 그에게 생경한 외형과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족쇄 자체의 무게만이 아닌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들이 읽혀진다.

족쇄를 풀고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바라보는 이 행위는 유형 생활의 시작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화자의 마음속에서 되풀이되는 주제, 인간의 자유를 극적으로 나타내는 퍼포먼스다. 독자로서 이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白眉)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 소설이다. <페트라솁스키 서클>의 일원이었던 그는 내란음모죄로 체포된다. 이후 독방 수감, 신문, 재판, 가짜 처형, 유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험들은 그의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더구나 사형장에서 벌인 황제의 반인륜적 처형놀이는 그의 삶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는 군사재판정에서 시베리아 유형지 4년 징역과 사병복무 형을 언도받는다. 옴스크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이 소설에 담겨있다.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용소 병원의 원장과 초소 위병들의 배려로 책을 읽고 쓸 수 있었다. 작가의 일기중 이 시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직접 경험한 많은 사건들과 감정이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1부 서론으로 시작한다. 서론에서 기록자(전달자)는 시베리아에서 만난 이주민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 고랸치코프의 수용소 일기를 선별하여 옮긴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서론은 소설의 형식인 것이다. 다음 11장부터 화자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다. 그는 살인죄로 10년 형을 살고 나와 시베리아에 정착해 살고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소설 후반부로 가면서 화자(주인공)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에서 작가 자신살인범에서 정치범으로 바뀐 듯 보인다. 이 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한다. 나는 작가가 경험한 4년의 수용소 기억이 그의 삶에 깊이 각인되어서 주인공을 타인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도스트예프의 삶에서 이 경험이 그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작품의 방향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그가 불안정하고 불안한 심리, 특정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같은 부정적 심리를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수용소의 풍경을 그리며,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반복하는 화자의 말은 인간 존재의 진실이라는 동의와 동시에 비참한 수용소 환경에 대한 역설로 다가온다. 부친 살해범, 아내를 죽이고도 자랑스럽게 떠벌이는 죄수, 쾌락을 위해 살인하는 사람, 굶어죽지 않으려고 살인한 죄수, 태어날 때부터 산적질이 생업이었던 공동체와 가족의 일원이었던 타타르족 소년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같은 감옥에 갇혔다. 농노, 평민, 귀족 계급도 상관없다. 수용소는 그들의 변수와 차이를 없애버린다. 기결수와 미결수, 형기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미결수란 아직 형 집행을 받지 않은 죄수를 말하는데 이때 형은 체형을 말한다. 몇 천대의 태형을 받은 죄수의 경우 몸이 견딜 수 있는 정도로 나누어 받는 동안 그는 형장과 수용소 병원을 오간다. 그 기간 동안 그 죄수가 겪게 될 불안과 공포는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형 집행 전날 자해나 폭력행위로 시간을 벌려는 시도에서 그 극단적 공포 심리를 읽을 수 있다.

 

그가 죄수로서 자유를 잃어버린 존재라는 분명한 가시적 이미지가 바로 족쇄다.

거의 손가락만 한 굵기의 철선 네 가닥을 서로 세 개의 고리로 연결시켜 놓은 것으로, 그것들은 바지 밑에 차게 되어 있었다. 혁대는 중간의 고리에 매게 되어 있어서, 이번에는 거꾸로 그것을 루바쉬까 셔츠 위에 직접 입는 허리 혁대에 고정시켜야 했다.”

처음 그것이 채워졌을 때의 무게, 소리, 불편함이 묘사된다.

 

그는 감옥 생활의 첫날부터 자유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적는다. 봄이 오는 4월 노역을 나간 죄수들이 먼 들녘을 바라보며 어떤 초조함이나 충동적인 욕구를 강하게 느끼며 쉬는 한숨은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초원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족쇄에 갇혀 있는, 시들어 가는 영혼을 달래 보려는 한숨이다.

 

목욕장에서 족쇄를 한 채로 옷을 벗는 화자의 어설픈 동작, 벗은 몸에도 여전히 족쇄를 차고 목욕하고 있는 죄수들의 모습들, 병원에서 폐병으로 죽어가는 죄수들의 깡마른 몸에도 족쇄에 채워져 있는 모습, 족쇄가 채워진 채 죽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화자는 질문을 한다. “도대체 왜라고! 족쇄는 단지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족쇄란 하나의 수치심이며 굴욕이고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죽어 가는 자에게도 과연 형벌이 필요한 것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수용소에는 인간 존재로서의 존중은 한 치도 고려되지 않는다.

 

대재기(大齋期, 러시아 정교에서 부활절 전 6주 동안의 근행기)가 끝날 무렵 죄수들이 조별로 교회에서 하는 재계(齋戒, 고백 미사와 영성체를 하는 러시아 정교 의례)의 장면은 도스토옙스키의 유형지 경험이 그의 삶에 일으킨 변화의 심리적 근원을 보게 된다. 죄의식!

 

사제가 두 손에 성배를 들고 < ……그러나 우리를 강도들처럼 여기소서>라고 기도서의 한 구절을 읽자, 모든 죄수들은 이것을 말 그대로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며, 족쇄를 절그럭거리면서 바닥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도, 살인죄로 이 곳에 족쇄를 절그럭거리면서 엎드리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들이 죄수임을 각인시키는 시청각 효과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새 바뀌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갑자기 이들 불행한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곤 갑자기 마치 어떤 기적에 의해 내 가슴 속에서 모든 미움과 분노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걸으며 내 눈에 들어오는 얼굴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작가의 일기도스토옙스키 75p)”

 

작가는 머리를 깎이고, 얼굴에 낙인이 찍힌죄수들에게서 유년시절 그에게 친절을 베풀던 농부 마레이를 떠올린다. 사형선고와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및 강제복무 이후 그는 심리· 철학·윤리·종교적 관점에서 인간과 민중의 문제에 천착하고 죄와 벌·악령·백치·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역작을 쓰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이 비인간적 경험을 겪은 그의 삶에, 주인공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는 감정에 연민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서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형기를 마치는 날, 익숙해지고, 어찌할 수 없는 신체의 일부쯤으로 여길 정도가 되었던 족쇄가 풀어지고 낯선 그것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죄수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했던 제도, 관습, 프레임으로서의 관념들을 벗어나 그 억압의 무게를 깨닫는 순간이 온다. 진부한 질문인 듯 느껴지지만 내 인생의 족쇄는 무엇일까?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5-04-18 2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코의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가 이 작품을 각색해서 그의 마지막 오페라 <죽은 자의 집에서>를 작곡합니다. 저도 상당히 비슷한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하고 읽었는데 많이 다르더라고요. 자기도 한 문장 한다, 생각하는 작곡가들이 대개 이렇습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5-04-18 21:01   좋아요 1 | URL
아!
이걸 어떻게 구현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많이 다르다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레삭매냐 2025-04-18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전 도끼샘의 <카라마조프> 읽고
나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레이스 2025-04-18 21:04   좋아요 0 | URL
그 소설이 제일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종교적 내용이 많아서!
제겐 아직까지 <죄와 벌>이 최고입니다.
다시 읽어보면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고유예! 인간이 처한 상황이다. 카프카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이다. 요제프 K는 선고를 받기 원하지만 판사도 만날 수 없고, 법정도 찾을 수 없다.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판별하는 예심 판사만 만났을 뿐이다. 법정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있지만 문지기가 막고 서있는 역설 역시 인간의 상황이다.

 

카프카의 소송에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없다. 주인공이 혼자 있는 어두운 공간에 갑자기 조명이 켜지듯 사람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문고리를 잡은 손 위에 어떤 손이 얹어져 있고 갑자기 시야가 넓어져 그 손의 주인을 의식한다. 마치 꿈을 기억하듯 불연속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여기엔 어떤 인과관계도 설명도 없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 없음은 주인공 요제프 K 혹은 카프카의 꿈과 무의식을 수면위로 끌어올려 드러내고, 그의 억압과 실존의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존재하는 사회의 부조리들을 비판하면서 K의 꿈과 심리, 작가의 깊은 내면까지, 깊이 들어가며 여러 층위의 의미를 형성한다. 한 장면에서 다층적 해석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의 뒤편에 자리 잡은 꿈과 같은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일상의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꿈과 같은혹은 신비한, 또는 환상적인이야기를 독자의 눈앞에 실재인 것으로 제시하고, 실재적인 수법을 사용해서 설명한다고 미하엘 뮐러는 프란츠 카프카-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낯선 자들이 이른 아침 갑자기 요제프 K를 찾아오고 소송과 체포를 선언한다. K는 이 상황에 전혀 놀라지 않는다. 마치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스치듯 언급하지만 그 소송은 다른 사람의 것인데 집행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것이다. 그럼에도 K는 오히려 먼저 예심판사를 찾아간다. 여기서 그 존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죄의식을 상정하게 된다.

 

이렇듯 이 소설에는 그의 존재에 대한 의식과 거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와 삶의 부조리를 의미하는 행위들과 사물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읽다가 무언가를 놓쳤다는 느낌을 받고 되돌아가 다시 생각하게 되는 지점들이 많다.

 

소송 사실을 통보받고 잠시 방 안에 홀로 있게 되었을 때 K가 침대 옆 탁자에서 집어먹는 예쁜 사과(17p)”는 선악과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방이나 다른 공간이 아닌 하필이면 뷔르스트너 양의 방에서 낯선 자들에게 취조를 받는 것이나, 심문받기 위해 그 방의 한가운데로 옮겨진 그녀의 탁자(20p)”K의 성적 욕망 혹은 죄의식을 암시한다.

 

왜 이렇게 K에게서 억압된 욕망과 죄의식을 읽게 되는가? 라고 물으면서, 카프카의 삶을 소환하게 된다. 그가 믿든 안 믿든 유대교는 정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신앙적 전통은 그의 생활과 문화의 배경이 될 수밖에 없다. 유대교는 금지법과 죄를 해결하는 의식(儀式)의 종교다. 깨끗한가 부정한가, 죄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율법과 유전이 유대인들의 전통을 이루고 있다.

법정이 주거지 안에 위치하고, 화가의 화실 문을 열면 법원 사무처가 나타나는 장면은 이 신앙적 배경에서 기인된 작가의 심리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K의 죄의식과 판결을 받으려는 시도들은 법정이 가까이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도무지 무죄이든 유죄이든 선고로 이어지지 못한다. 카프카의 해결 받지 못한 심리적 모순 상태와 더 나아가 인간의 부조리 상태를 보여준다. K가 법정을 찾아 지나가면서 어쩔 수 없이 우락부락하고 불량한 소년들(52p)”의 놀이를 방해하게 되었을 때, 그 소년들의 화난 얼굴들은 작가가 성장하지 못하고 묶여 있는 십대의 상처를 보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 선고에서는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죽음의 저주를 받은 뒤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함으로 그 판결을 실행해버리는 이야기는작가가 부친으로부터 받은 억압과 그로 인한 내적 갈등, 고통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친의 이 선고로 아들이 자살하는 결론은 역으로 아들에게 있는 부친살해의 무의식적 욕망을 엿보게 된다. 카프카의 이런 무의식에 대한 예민한 포착은 죄의식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라리 아들이 아버지의 선고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K가 심판을 받기 위해 법정을 찾고 변호사를 찾고 브로커를 찾는 상징적 행위의 의미다.

 

뷔르스트너 양에 대한 상상과 법원에서 만난 여자(72-73p), 변호사 비서, 화가를 따르는 소녀들의 모습에서 성적 욕망과 수치심을 엿본다.

 

카프카에게서 관청과 가족의 상황들은 다양하게 맞닿아 있다. ……관청과 소녀가 공통으로 지닌 가장 두드러진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K소송에서 만나는 수줍은 소녀들처럼 모든 것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점일 것이다. 이들 소녀들은 마치 침대에서 그렇게 하듯이 그들 가족의 품안에서 불륜에 몸을 맡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런 소녀들을 만난다. 그다음에 하는 일은 술집여자를 정복하는 일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다.……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창녀 같은 여자들이 한 번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프카와 현대발터 벤야민 64p)”

 

그녀들이 아름답지 않게 보인다는 것은 그들의 처지나 법정의 부조리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억압되고 왜곡된 성적 욕망 때문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러기에 누군가 엿보고 듣고 있다는 의식을 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소송을 당하고 예심판사 앞에서 변론은 했으나 선고는 유예된 상태에서 K는 판사를 만나기 위해 변호사와 브로커 화가를 만난다. 당시 법에서의 불의를 보게 된다. 화가는 판사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림 배경에 그려져 있는 정의의 여신과 승리의 여신을 합쳐 놓은 이미지는 정의는 승자의 것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정의에는 중립이 없, "우리 안에, 저 깊숙이 살아 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기 바란다는 바티칸 추기경의 호소가 맥락 없이 떠오른다.

 

카프카는 선고유예 상태의 죄의식에 시달리는 인간 상황의 원인을 찾아갈 때, 그를 이런 상황에 빠뜨리는 원인을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소유한 볼 수 없는 존재에서 찾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신이든, 해석의 권위를 가진 권력이든, 정신이든, 그를 대신하고 있는 부친이든!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하게까지 느껴지는 장면 중 하나가 성당에서 사제를 만나는 장면이다. 성당에서 홀로 있는 K의 시야에 갑작스럽게 신부가 등장하고 그는 자신을 교도소 신부라고 소개한다. 그 신부는 그에게 법 앞에 문지기(267-269p)” 이야기를 한다(이 내용은 작가가 법 앞에서라는 단편으로 먼저 발표한 작품이다). 법정으로 들어가려는 남자를 문지기가 막는다. 문지기는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한다. 문지기는 해석자 혹은 철학자 혹은 지도자이며, 신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모르게 재판정이 열렸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집행장으로 끌려가는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가 끌려가는 채석장, 죽임을 당하는 방식 모두 유대교의 의식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다.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개 같군!”이라고 말한다. 이유는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있을 것 같기(287p)” 때문이다. 결국 그의 질문은 해결 받지 못했다. 치욕은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던 욕지기와 수치심과 관련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반쯤 잠든 상태에서 찾아오는 환상들은 그의 글의 소재들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불면증으로 고통 받았고, 이런 꿈들을 꾸는 것을 괴로워했다고 한다. 꿈과 같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일상의 중심에 놓아 독자로 하여금 아무 어색함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작가의 천재적인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불연속적이고 환상적이고 괴이한 장면들 속에서 주인공과 작가의 심연을 읽고, 그들이 찾는 답을 찾고, 여러 층위에서 해석을 한다. 그리고 작가가 드러낸 존재의 뒤편을 통해 나의 무의식 안에 침잠해 있을 억압과 상처 혹시 모를 내면 아이를 탐사한다.

 

10년 쯤 전, 지역 도서관에서 책 바꿔가기 행사를 했었다. 한 노부인이 그녀의 남편이 생전에 읽었던 책을 기증하면서, 계속 갖고 있으려 했지만 이제는 관리하기 어려워 내놓는다고 못내 아쉬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녀가 내놓은 책들 중에 내 눈에 띈 책이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평전이었다. 이 책은 절판 상태였었다(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나의 카프카역시 절판이다). 낡아서 누렇게 바랬지만 귀한 책이었기에 무조건 가져왔다. 그 날 하루 이 책을 다 읽었던 것 같다. 다 읽고 나서야 책 뒤쪽 헛지에 독서에 대한 단상이 흘림체로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적바림은 생을 형기(刑期)”라고, “옥중에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하고 있었다. 제일 마지막 줄에는 “84324〇〇로 가는 길, 터미널에서라고 적혀 있었다. 아직은 바람이 찬 터미널에서 카프카를 읽던 한 남자, 마지막 장을 넘기고 카프카의 삶에 대한 감회에 젖어 볼펜을 꺼내드는 그를 그려본다.

 

카프카 평전』 『변신』 『단편집은 카프카를 이해하는 일련의 독서였다. 그리고 소송』, 발터 벤야민의  『카프카와 현대』, 『프란츠 카프카은 그에게 깊이 들어가는 독서였다. 특별히 프란츠 카프카은 카프카의 꿈과 소설과의 연결을 이해하는 특별한 책이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5-03-25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는 숫자가 맞나요?
84년? 대단하네요.
저는 몇년 전에 젊었을 때부터 모았던 책들을 팔아서 그렇게 오래된 책은 없습니다. 카프카 평전 겨우겨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내용은 기억에 없습니다. 😂

그레이스 2025-03-25 10:49   좋아요 1 | URL

그래서 더 감상에 젖게 돼요.
돌아가신 분의 유품과 감상이어서,,, 평전이 더욱 다가왔던듯요.

고양이라디오 2025-03-25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프카가 여전히 읽기 어려워요ㅠ <성>, <소송> 모두 몇 번씩 도전했는데 완독을 못했네요.

그래도 <변신>이랑 단편집은 읽었습니다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시 카프카가 읽어보고 싶네요.

그레이스 2025-03-25 11:22   좋아요 1 | URL
쉽지는 않죠
미완성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막바지 퇴고와 탈고를 거치지 않은 원고인듯요
그래서 막스 브로트가 초판본출간할때 순서를 변경하고 편집을 했다 해서 비판을 받았고, 다시 후에 원고의 원래 순서대로 출간했다고 하더군요.^^

제 경우 <프란츠 카프카-꿈>이 도움이 됐습니다.
추천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5-03-25 12:59   좋아요 1 | URL
<프란츠 카프카-꿈>! 카프카와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을 먼저 보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5-03-26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할아버지네요~!! 84년이라니~~
카프카는 그냥 읽는것보다 평전이랑 같이 읽는게 좋을거 같아요. 카프카<소송>, <성>은 이해하기 힘들더라구요 ㅜㅜ 꿈이 핵심 키워드군요~!

그레이스 2025-03-26 21:04   좋아요 1 | URL
네! 멋지시죠!
이건 말 안하려고 했는데,,, ^^
그 노부인이 사별하신 남편을 교수님이라고 부르신걸로 보아, 강단에 서셨던 분으로 추측합니다.

초란공 2025-03-26 2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4년 3월 24일... 딱 이맘때네요.. 산수유 피고, 진달래 개나리 피기 시작하는 시기.. 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시는 청년(?)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레이스 2025-03-26 21:13   좋아요 1 | URL
3,40대였을 듯 한데,,, 청년이죠^^
예 그러네요
3월 24일

초란공 2025-03-26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KBS 다큐에 나온 새한 서점 이야기가 감상에 젖어요. 학창시절에 서점이 서울에 있을 때 잠시 일했던 헌책방이었는데, 단양으로 이사 가셔서 숲 속에 책방을 열었는데요, 지난 12월에 화재로 책 60%가 소실되었거든요. 어제 다큐멘터리를 보고 사장님 나이드신 모습을 보고 짠했습니다. 텀블* 펀딩이라도 참여해야겠어요.

그레이스 2025-03-26 21:17   좋아요 1 | URL
아!
마음이 아픕니다.

(화재 이야기 들으니,,, 경남 산불이 저절로 떠오르네요
제발 빨리 진화되길 ...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페크pek0501 2025-03-27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카프카의 변신만 대단한 게 아니라 소송을 오디오로 듣고 쇼킹했죠. 낯설음과 생소함이 느껴졌어요.
판결, 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는 내용인데 결국 아들이 강에 뛰어드는 걸로 끝나죠. 이것도 쇼킹했어요.^^

그레이스 2025-03-27 22:17   좋아요 1 | URL

저도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변신도 그렇고 판결도 그렇고 우화나 자살 모두 같은 심리의 근원을 보게 되더라구요.

전야제 2025-03-27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 우리 안에 저 깊숙히 살아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기를 바란다...는 추기경님의 말씀과 카프카의 <소송>이 연결되는 흐름에 반해버렸습니다ㅎㅎ
유흥식 추기경님의 말씀 맞지요? 좋은 구절이라서 찾아보았는데 글에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중고책을 이어받으신 추억이 평생 남을 것 같아 부럽습니다.
누군가가 마음을 쏟으며 읽었던 책은 지니는 것만으로도 풍족한 느낌이라 저도 그런 중고책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ㅎㅎ

그 적바림은 생을 “형기(刑期)”라고, “옥중에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하고 있었다.
이 문장이 글을 다 읽고도 마음에 강한 여운으로 남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5-03-27 22:23   좋아요 0 | URL
예!
소송과 선고까지의 과정 중 부조리를 보다 보니 자연스레 그 추기경님의 헌재에 호소한 말씀이 생각나더군요.

저도 보물을 찾은 듯 했습니다

페넬로페 2025-03-27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때 카프카를 꽤 읽었는데 오랫동안 다시 읽지 않은 것 같아요.
읽으면 너무 허무해서~~

그레이스 2025-03-27 22:16   좋아요 1 | URL
그렇긴 하죠
실존주의가 허무주의와 맞닿아 있긴 하죠.
사실 카프카는 제 안의 심리를 들여다보게 돼요
오늘 <실종자>가 배달됐습니다
 
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전 외교 참사라 불린 두 정상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언어의 불평등, 소통의 부재, 그리고 의도된 비난, 비아냥, 모욕 등 언어의 모든 폭력성을 본 듯하다. 구사한 언어의 내용도 그렇지만 분위기, 태도 때문에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럴 땐 언어가 없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 사이엔 날이 시퍼런 이 놓여있다. 그 칼은 자본, 권력의 언어일 것이다.

 

보르헤스의 묘비명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로 남자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87세의 보르헤스가 젊은 부인에게 이 묘비명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랑하는 두 남녀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밤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을 놓았다는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로부터 보르헤스가 가져온 말이다서슬 퍼런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8p)”라고 생각하는 남자 역시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시각 장애인이다.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민 가서 살았던 그는 십대에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17살에 청각 장애를 갖고 있는 R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은 성립될 수 없는 오류가 되어 버렸다. 그의 얼굴에 있는 흉터는 실명이 휘두른 칼날에 의한 상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R을 위해 수어를 배워 수어로 대화하던 남자는, 완전한 실명이 오기 전, 그녀에게 목소리로 말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남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화가 난 R은 남자의 얼굴에 상처를 남긴다. 20년이 지났어도 남자는 그 순간을 후회한다.

 

남자는 한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강의한다. 그의 강의를 듣는 여자는 손목에 흉터를 갖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흉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상흔이다. 여자는 강단에 선 남자의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처음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지도 같다(12p)고 생각했다.

 

여자가 고어古語이자 사어死語인 희랍어를 배우는 이유는 낯선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첫 번째 실어증에 걸렸던 때,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비블리오떼끄라는 낯선 단어가 그녀의 입술을 움직이게 했었다. 여자는 입술이 달싹이던 그 순간을 오히려 공포스럽게 기억한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17p)“

 

이혼과 양육권 포기로 인해, 20년 만에 다시 침묵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의지적으로 낯선 언어를 배우고 있다. 첫 번째 실어증은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리는 문장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 때문에 오는 수치심과 구토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절망감(혹은 공포)때문이었다. 스스로가 하는 말의 거짓에 대한 정죄, 불완전함에 대한 부끄러움, 추함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예민할 수 있을까? 발화의 순간보다는 뒤돌아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때가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언어 없이 생각하고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16p)“

 

첫 번째 침묵이 농밀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다면, 20년 후에 다시 온 침묵은 차고 희박하고 어둡다.

여자를 상담했던 심리치료사의 그녀가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 지 의심하는 내적질문에 응답해가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진단은 불편하다. 본성을 억누르고 살았기 때문에 실어증이 왔을 거라는 것이다. 전편 바람이 분다, 가라의 표현대로 한다면 내담자의 삶을 함부로 요약하는 것이다. 여자가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이해한다는 상담사의 말에 그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55p)“라고 대답한다남자의 실명보다 여자의 상실보다 세상과 그들 사이에 놓인 칼은 말이 아닐까?

 

여자는 인간의 모든 언어가 압축된 하나의 단어, 어마어마한 밀도와 중력으로 단단히 뭉쳐진 단 한 단어. …… 누군가 입을 열어 그것을 발음하는 순간, 태초의 물질처럼 폭발하며 팽창할 언어. ……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그 언어의 결정結晶이 그녀의 더운 심장에, 꿈틀거리는 심실들 가운데 차디찬 폭약처럼 장전되는 꿈(55p)을 꾸었다. 생명, 사랑과 같은 단어들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녀가 상상하는 단어는 형태도 소리도 갖추지 않은 직관적 언어다. 어쩌면 의식만으로 이어진 이미지나 감각으로 전달되는 에너지 같은 형태의 언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전달함에 있어 오류도 거짓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그런 언어를 갖고 있는가? 스스로 질문해본다. 말의 부정확성, 추함, 거짓이 나와 타인 사이에 놓인 칼이다.

 

διεφθάρθαι, 강의 시간에 여자는 받아 적으면서, διεφθάρθαι(He kill himself)차갑고 단단하다”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 수 있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διεφθάρθαι의 발음, 주어와 목적어가 하나로 동일하게 만드는 중간태(영어의 재귀대명사를 포함하는 의미)는 다른 뜻이 파생될 수 없는 완전하고 정확한 의미를 전달한다고 한다. 여자가 희랍어를 배우게 되는 이유이다.


희랍어를 잘 모르기에 이 느낌을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에게 보르헤스의 칼은 소통과 언어의 부정확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언어는 발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의미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폭력을 행사하고 고통을 가할 수 있다. 그러기에 여자는 모든 의미, 언어가 하나로 압축된 단어, 언어의 결정結晶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몸짓은?

건물 안으로 들어온 새를 도우려는 남자를 공격하는 새, 차에 깔린 개를 안아주던 여자를 물었던 개의 장면에서 인간의 몸짓조차 전달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두려움은 선의의 몸짓을 오해하게 만든다. 이 폭력적 반응은 R이 남자의 얼굴을 후려친 억센 주먹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그녀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녀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있다.(168p)“

 

남자와 여자는 밤을 함께 보내고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연한 부분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춘다. 사랑의 행위는 시()로 이어진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9p)”이라고 했던 강의실 장면은 이 시()에서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191p)”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는 행이 반복된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183p)

우리는 사랑하는 순간에도 서로를 모른다.

 

심해의 숲은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라고 한 작가의 질문에 희망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두 사람조차 서로를 알지 못하고, 언어는 부정확하고 소통은 단절된다. 여전히 스스로를 가둔다. 그들 사이에 칼은 여전히 놓여 있고, 세계와의 사이에도 칼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뚝거리는 언어와 몸짓으로 자신을 내보이며 온기를 나누는 게 인간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가끔은 그 칼에 베일지라도!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25-03-04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남일보 2024.9.26. 전남대 김명술
https://www.jnilbo.com/74956793542

이런 글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갔다고 여겼으나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곪은 얼거리인지 하나하나 뒤늦게 알아보면서
우리가 그 나라 속낯을 잘못 바라보고 휩쓸리기도 하겠다고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그래서 엊그제 일은 참사가 아닌
우크라이나 민낯을 들여다보는 어떤 발판일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그레이스 2025-03-04 11: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짧게 말하려니,, 그냥 ‘외교참사‘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젤렌스키는 태도를 이미 정해놓고 시작했더군요.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도 없이 자기 주장만 일관되게 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대화에서 본 제 감상입니다.
전쟁이 끝날것같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레이스 2025-03-04 14:46   좋아요 0 | URL
김영술 인데 김명술이라 하셔서 한참 찾았습니다.^^
북플에서는 주소 카피가 안되서 외워서 검색하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숲노래님 서재에 들어가니 글이랑 링크가 있네요.ㅎㅎ
동의하고 공감하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5-03-04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에 <희랍어 시간> 재독했어요.
처음 읽었을때와 조금 다른 느낌이었는데, 여전히 좋더라고요^^

그레이스 2025-03-04 15:29   좋아요 2 | URL
네^^
노벨상 효과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과 다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강 책은 한번 읽어서는 압축된 의미를 놓치기 쉬운듯요.

페크pek0501 2025-03-06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그리고 시집, 만 읽었는데 앞으로 희랍어 시간, 을 읽어야겠네요.
페넬로페 님은 재독까지 하셨다니... 장바구니에 얼른 담아야겠어요.^^

그레이스 2025-03-06 12:02   좋아요 1 | URL
저는 장편 중 한 작품만 남았는데, 리뷰는 계속 쓸 계획입니다.
다시 읽을수록 작가의 글에 감탄하게 되요 ^^~♡

전야제 2025-03-17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굉장히 회의적인 사람이라, 특히 사랑에 있어서도 그랬거든요.
사랑하는 순간에도 서로를 모른다는 문장, 그게 제가 줄곧 의문을 가져온 부분이었는데
이 글 읽고 속시원해졌어요.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쓰셨나요?ㅎㅎ
저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칼이 제거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문단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뚝거리는 언어와 몸짓으로 자신을 내보이며 온기를 나누는 게 인간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가끔은 그 칼에 베일지라도!˝ 라고 쓰신 부분 읽고,
그레이스님 정말 따뜻한 분이시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랜만이에요!
좋은 글 써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5-03-17 22:58   좋아요 1 | URL
너무 감사합니다.
전야제님 댓글은 항상 감동이네요.
 
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함부로 요약하지 마라.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 빌어먹을 사랑으로 떨리는 입술을 닥쳐.

 

작가는 정체와 이탤릭체의 문장들이 충돌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소설이라고 말했다이탤릭체는 기억과 생각이다. 정체(正體)는 드러나 있는 사실이다. 진실은 곧 사라질 것 같은 이탤릭체-죽은 자의 말과 산 자의 마음-에 있다. 정체로 다시 써야 할 엄연한 진실이 있다.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산 자의 일이다.

 

촉망받던 화가 인주의 죽음 이후 그를 후원했던 강석원은 미술정신서인주 추모 특집을 싣는다. 함께 올려진 작품 사진들을 통해 그가 인주의 유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희는 가슴에 불이 당겨지는 것 같았다. ‘서인주 추모 특집을 읽은 이정희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여류 화가가 자라온 가난하고 어두운 환경-유복자로 태어나 모친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을 소개하는 글은 그녀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어둠의 진앙, 피안의 주술이라 제목 붙여진 그림들은 죽음의 경도에서 나왔다는 것을 상정하고(13p)“ 있었다.

 

정희는 인주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정희는 인주의 유품을 찾고 강석원이 출판하게 될 서인주 평전의 내용을 바로 잡기위해 그를 만난다. 그는 재능 뿐 아니라 젊은 나이, 아름다움, 압도하는 그림, 불행한 개인사, 자동차 자살이라는 극적인 최후까지(136p)” 신화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서인주를 불멸하게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강석원의 말과 태도, 서인주를 신화화하는 데서 분노를 느낀다.‘여성의 신화화혹은 숭배를 이끌어내는 기저에 폭력성이 존재함을 본다. 여성을 소유하고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폭력적 야만의 다른 형태가 아닐까? 누군가에게 힘을 행사하는 것이 때로 산 자 보다 죽은 자에게가 더 쉬울 때가 있다. 그것이 타인의 삶을 요약하고 신화화하는 행위일 경우.


함부로 요약하지 마라함부로 지껄이지 마그 빌어먹을 사랑으로 떨리는 입술을 닥쳐.(41p)”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정희는 진실을 밝혀내고, 강석원의 평전 작업에 맞서 인주의 삶을 책으로 쓰고자 한다. 주변 인물들을 만나, 소식을 끊고 살았던 죽기 직전 인주의 행적을 탐문해간다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며 거기에는 오랜 시간 속 여러 사람의 죽음과 고통이 지층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로스코의 도록에서 시작된 회상은 인주의 흉터, 인주의 외삼촌, 어머니에 대한 단서들이 이어지고,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서 인주와 정희의 가정사, 결혼 등 대물림과 사건의 지층이 드러난다. 강석원 식으로 말하면 달의 뒷면이다. 참 근사하고 상징적인 단어이긴 하지만 타인의 보이지 않는 삶을 유추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하게 된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219p)

 

강석원이 특집 기사에 썼던 달의 뒷면은 인주의 달력에서 본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은 이 정희가 쓴 희곡의 대사였다. 강석원은 알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희곡의 제목은 닥쳐이다. 무대에 올린 정희의 첫 번째 희곡이다. 심리치료의 임상 사례에서 모티프를 따온 이 희곡에 등장하는 닥쳐게임이 인상적이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이 이야기하면 거기에 닥쳐라는 말로 응수하는 것이 규칙이다.

 

이리 와. 내가 사랑해줄게

닥쳐.(조그만 목소리로, 겁먹은 듯이)

내가 돌봐줄게, 부드럽고 아늑하게.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돼

닥쳐.

너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닥쳐.

너는 인형이야.

닥쳐.

……

나에게 너무하는 구나.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겠다.

닥쳐

……

너 같은 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닥쳐!“

247p

 

닥쳐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떤 고통과 상처를 갖고 있는지 또 다른 사람이 어떤 가해를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화들이어서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런데 무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어두운 객석을 향해 천천히 돌아앉으며 혹시, 이것으로 내가 아픈 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내가 아픈 데는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누구에게도, 당신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관객은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보게 되지 않을까? 나에게 있는 달의 뒷면을 생각한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요약하고 달의 뒷면과 같은 상징어를 함부로 인용하는 폭력성에 대해서도!

 

인주는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53p)”

라고 말했다.

 

그렇게 회상과 추적과 탐문을 해가며 정희가 도착한 인주의 고통의 근원은 미시령이 있었다. 그곳에 오래전 인주 어머니의 소외와 아픔,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있었다. 그녀와 연루된 한 남자의 오랜 고통의 시간이 연결되어 있었다.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채.

 

강석원의 구타와 방화로 인해 구급차에 실려 인공호흡기를 쓰고 정신을 잃어가던 정희는 산소 호흡기 속에서 쒜엑쒜엑 숨을 몰아쉬던 인주의 부은 얼굴(67p,384p)”을 떠올린다. 두 사람이 호흡기를 쓰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숨을 쉬고 있는 장면이 전하는 메시지는 삶은 폭력을과 단절될 수 없음이다. ‘호흡기는 삶에 드리워진 폭력의 극단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쒜엑, 쒜엑 소리가 인주의 얼굴에서 터져 나왔다. ……마침내 의사가 나에게 빠르게 말했다.

 

환자가 갑자기 스스로 숨을 쉰 겁니다.

그게 인공호흡기가 넣어주는 숨과 부딪친 겁니다.

일단 호흡억제제를 투여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부딪치면 호흡기를 뗍니다.(384p)

 

세계는 나를 때려눕힐 주먹을 갖고 있다. 어떤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실체적이고 관념적인 모든 폭력에 노출된 삶을 산다. 특히 가난이나 질병과 같은 불행을 대물림하는 경우 그것은 노골적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의 삶에서 폭력을 없앨 수는 없다. 친절을 가장하고 완곡한 어법으로 다가오더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도에 의해 우리는 피를 흘린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 삶을 거부할 수는 없다. 살아야 한다면 그 이유는 인주에게도 정희에게도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연설문 <빛과 실> , 2024.12.7.

 

작가는 다음 작업을 위해 이 질문으로 나아가고 있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02-24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2-24 10: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종으로 횡으로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어서 저도 리뷰 쓰기가 까다로웠어요.

2rjfnr 2025-02-24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어머나 ᆢ 이런 책도 있었는지 몰랐는데요? 독특한 소재에 ᆢ 구조도 그렇고
다른 작품과는 다른 소설인가봐요 .. ..

그레이스 2025-02-24 18:03   좋아요 0 | URL
^^
저는 오래 전에 읽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었어요.
한강작가가 노벨 강연때 장편 5개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했는데, 채식주의자 다음 순서로 나와요.
저는 이 책 처음 읽을때도 이번에 읽을 때도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

2rjfnr 2025-02-24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번씩이나 좋았다고 하시니 ᆢ 호감이 가는데 ᆢ 언제 읽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
기회가 오면 소년이 온다 읽은 후에 ᆢ ᆢ 아마도 그럴것 같아요. ♡♡


페크pek0501 2025-03-15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의 뒷면을 여기서도 보네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여자없는 남자들‘에 담긴 한 단편소설에서 달의 뒷면,이라는 표현을 봤고 그것이 두 번째로 본 것 같은데, 첫 번째로 본 것이 어느 책에서였는지가 생각이 안 나는군요. 위의 글에서 세 번째로 보는, 달의 뒷면, 이라는 표현이 인상에 남아요. 누가 가장 먼저 썼을까요?
닥쳐 시리즈의 글, 새롭게 읽힙니다.
누구의 삶이든 함부로 요약할 수 없을 듯요.^^

그레이스 2025-03-15 15:38   좋아요 1 | URL
^^
글쎄요
더 앞의 표현이 있을듯요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 숨을 멈추고 모든 삶의 행위들을 생각하게 된다. 뻗었던 팔을 안으로 거두게 되고, 함부로 걷던 걸음의 보폭을 줄이게 되고, 말의 단어들을 고르게 된다. 나는 얼마나 주변인들 혹은 타인들에게 폭력적인 삶을 살아왔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호흡을 안으로 들이마시고, 발가락을 오므리고 전신을 움츠리는 자신을 상상한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손을 내밀어 빗물에 손을 적시던 두 부부. 아파트가 답답해서 살 수 없다고 하는 아내의 우울질의 피가 흐르는 깡마른 몸뚱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내 여자의 열매24p)”, 남편은 두 손에 가득 받고 있던 빗물을 아내의 얼굴에 끼얹으며 짜증을 낸다.

 

오래전 지인에게 들었던 에피소드가 기억났다. 대학생인 딸아이와 가볍게 언쟁을 하던 아빠가 손가락으로 말고 있던 쌀알크기의 휴지조각을 던지고 일어났는데, 그게 우연히 딸의 머리에 맞았고, 화가 난 아이를 달래느라 오래 걸렸다고 했다. 쌀알 만 한 휴지조각이고 겨냥한 것도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남편에게 돌을 들고 있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했다는 지인의 말에 웃으면서, 딸이 서운했던 것은 그 휴지조각이 아파서가 아니라 그 서슬에 담겨있는 분노와 행위의 폭력성 때문이란 생각을 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말라가고 온 몸에 멍이 들어가던 아내는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어버린다. 남편은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식물을 돌본다. 식물이 시들고 열매를 화분에 심으며,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단편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베란다 사건은 인간의 작고 무심한 동작 하나에도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던 분노를 담을 수 있으며,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내 여자의 열매채식주의자로 나아가는 발걸음처럼 보인다. 이 단편이 미완성이라든가 습작처럼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과 거부하는 심리가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강의 작품들은 노벨위원회 강연에서 밝힌 것처럼 몇 개의 질문들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쓰는 동안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 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의 질문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장면은 정육점 앞을 지날 때 침이 고이는 입을 틀어막고 지나가는 영혜의 꿈이다.

 

입 안에 침이 고여. 정육점 앞을 지날 때 나는 입을 막아. 혀뿌리부터 차올라 입술을 적시는 침 때문에. 입술 사이로 새어나와 흘러내리려는 침 때문에.(채식주의자42p)

 

그녀의 반복되는 악몽들은 어린 시절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개에 물리고, 아버지가 그 개를 잔인하게 죽이고, 개고기를 먹었던 누린내의 기억에서 그 꿈은 생겨났다. 불고기를 먹던 남편이 칼 조각을 입에서 뱉어낸 사건은 영혜가 일련의 꿈을 꾸게 된 트리거가 되었다. 아마도 그 칼 조각은 영혜 안에 있는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살인의 꿈, 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꿈은 어린 시절 먹었던 개고기가 명치에 걸려 있는 것 같은 절망감과 연결되어 있다. 영혜가 육식과 섭식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영혜는 인간 종이길 거부하고 식물이 되고자 한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먹는 행위는 에로스(eros, 성적충동)만큼이나 타나토스(thanatos, 죽음의 충동)과 관련이 있고, 생명만큼이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육식은 도살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몽고반점에서 영해의 형부인 화자는 성적 충동과 예술가의 양심이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몽고반점으로 촉발된 욕망은 예술가의 것일까?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를 향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예술가의 것이라면, 예술이라는 행위 안에 있는 폭력성을 구별하는 경계가 모호한 까닭에 더욱 많은 폭력이 생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채식주의자50p)”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를 향해 하는 아버지의 눈물 나는 애원은 다음에 이어지는 행동에 의해 폭력적이라는 것이 더욱 극적으로 폭로된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가해를 하는가?

 

영혜와 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견디고, 그 시간은 두 사람에게 다른 모양의 흉터를 남겼다. 여전히 그녀들에게 고통은 진행형이다. 영혜가 입원해 있는 지방 병원을 찾아간 언니는 죄의식을 느낀다. 유독 아버지의 손찌검의 대상이었던 영혜는 자매가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그냥 돌아가지 말자고 했다. 산길을 내려와 경운기를 얻어 타고 집을 향하던 길에 저녁 빛에 불타던 미루나무를 말없이 바라보던 영혜를 떠올린다.(192p) 영혜의 고통을 모른 척 했던 것은 그때도 지금도 자신 역시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영혜를 실은 앰뷸런스 안에서 창밖으로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다.(221p) 영혜가 바라보던 풍경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희망을 남겨두었다고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불평등을 외면했었던가, 요구 받은 정의를 얼마나 많이 회피했던가를 생각했다.

 

우리 안에는 원래부터 폭력이 내재 되어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폭력 아래 놓여 있고, 폭력을 습득하고, 행사하는가를 생각한다. 폭력적인 행동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문을 쾅 닫고, 서류를 사납게 낚아채고, 볼펜을 탁탁 거린다. 내뱉는 단어, 휘젓는 손짓은 누군가를 멍들게 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화자의 아내는 식물이 되기 전 온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지가 나오고 점점 나무로 변해간다. 그녀를 멍들게 하는 것은 도시의 주거 형태의 폭력성과 그녀가 추구하는 삶에 무심한 반려라는 이름의 타자, 그리고 짜증 섞인 말과 행동들이다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직접적이며 주관적폭력은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인 폭력과 사회체제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구조적인 객관적 폭력이 존재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런 폭력을 행사하게 됨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라고 한 한강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왔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 답으로서 인간 종이길 거부했던 영혜에게는 죽음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재되어 있었든 학습된 것이든 내면에 가득 찬 폭력을 해결하는 길은 두 사람이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 나무 불꽃의 마지막 장면에 있다는 생각이다. 나무 불꽃은 유년시절의 영혜가 바라보던 풍경이고, 이제 영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하는 언니가 바라보는 풍경이다. 세계와 인간의 내면에 가득 찬 폭력을 밀어내고 관심과 배려와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 표지는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가 담겨 있다. 그는 날카로운 선들로 야위고 핍진(乏盡)한 자화상과 피멍 투성이의 육체를 그렸던 화가다. 노을진 하늘과 땅, 나무들조차 병든 육체의 멍을 떠올리게 하는 검푸른 점과 선들이 섞여 있다. 사랑이 육체에 남긴 폭력적 질병과 죽음의 트라우마를 지닌 화가의 그림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희망을 찾은 화가의 삶과 작가의 질문들이 겹쳐진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5-02-08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여자의 열매가 그런 의미였군요 ㅋ 한강작가님의 폭력성에 대한 묘사는 너무 강렬한거 같아요 그래서 더 공감이 된다는~!!

그레이스 2025-02-08 18:52   좋아요 2 | URL

단편을 읽으면 다른 작품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데, 폭력, 빛 등의 주제들인듯요.
맞아요 공감!

stella.K 2025-02-08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는데 좀 당혹스러운 작품이란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해 주시니 일견 그렇구나 싶은데 아마 저는 채식주의자 이후 다른 작품을 읽을 수 있을까 회의스럽더군요.ㅠ

그레이스 2025-02-13 12:14   좋아요 1 | URL
저의 경우, 노벨위원회 강연과 관련해서 읽으니 더욱 선명해져요.
작가가 자신의 몸을 도구로 해서 글을 쓰고, 혼이라는 존재를 통해 풀어가서 불편한게 아닌가 했어요.
사실 채식주의자는 이번이 세번째인데,,, 처음엔 저도 불편했어요.^^

2rjfnr 2025-02-09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블로그 글에서 한강 작가의 .책들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너무 가라앉고 착잡했다고 하는 글을 봤는데 ᆢ ᆢ 이해가 간다는 생각이 드너요 ~~!!

그레이스 2025-02-09 10:1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흰> 정도 가면 조금 밝아지긴 해요
조금요^^
뭔가 희망적 메시지가 보이는...!

페크pek0501 2025-02-13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채식주의자를 읽고서 한동안 고기가 싫더군요. 인간은 폭력이 폭력인지 모르고 행사할 때가 있어요.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육식도 죽여서 먹고 생선도 죽여서 먹는데 식물처럼 남을 해치지 않고 그저 햇볕과 비, 만으로도 살 수 있으니 식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동생을 끝까지 돌보는 언니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봤습니다.^^

stella.K 2025-02-13 12:08   좋아요 2 | URL
그게 그뜻일 수도 있겠군요. 전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괜히 광합성이나 생각하고. 내내 멍하기만 하더군요. 😂

그레이스 2025-02-13 12:13   좋아요 2 | URL
ㅎㅎ
식물이 폭력적이지 않으니까요.
경작문화보다 육식, 수렵문화가 더욱 남성위주이고 폭력적이라고 하죠?!
<내여자의 열매>에서는 여자의 몸에 든 멍에서 가지가 나오고 잎이 나는 걸 보며, 그 상징성 때문에 감탄했어요.
다프네를 떠올리기도 했구요.^^

2025-02-14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