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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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장강명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저자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와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심도있게 고민하고 생각해본 흔적들을 작품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특별히 이 작품에선 아직 사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젊은 세대 혹은 사회초년생의 고뇌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잘 풀어낸 듯하다. 완독후에도 독자들이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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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일일이 얘기할 순 없지만 이야기 속에 숨겨져있던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상황이 급속도로 전개되고 묘한 긴장감이 흘러서 읽는 맛이 느껴졌다. 간만에 몰입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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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끝까지 읽고나서 개인적으로는 뭔가 속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이래저래 생각해볼 것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마지막에 나온 작가의 말에서도 ‘소설 속 등장인물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작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만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볼거리를 적절한 방식으로 던져줬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 책에 추천사를 써준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남겨줘서 독자인 내가 이 작품을 그래도 허투루로 읽진 않았구나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별도로 독서토론을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만약 이 작품을 완독한 독자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토론을 한다면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와 생각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때는 허우적거리는 손을 잡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이라도 서슴지 않을 인간

일어날 수 있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대응 계획과 백업 플랜을 준비하는 능력

별마로천문대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산봉우리에 있었다.

그 옛날 소년 왕은 이곳에서 여러 차례 ㅈㅅ을 강요당했다. 청령포에서, 나는 3년 안에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퇴로가 끊겨버려 후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ㅈㅅ선언을 이기려면 세연이나 세화 못지않은 정교함과 치밀함으로 꽉 짜인 논리를 준비하고, 이벤트를 계획하고, 마케팅을 벌여야 한다. 그런 작업들을 진행하는 중에 언젠가는 사표를 제출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머릿 속이 텅 빈 상태였다. 다만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서 생활에 기반을 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먼 바다에서 공기가 태양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열대성저기압은 갑자기 태풍으로 발달해 육지를 향하고 강한 비바람으로 그 존재를 과시한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단 인간의 생명에 암묵적으로 금전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그 가치는 얼마나 될까?

위험한 직업과 덜 위험한 직업의 임금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에 어떤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이 임금 차이는 학력, 경력 등 임금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고 계산해야 한다. 이런 방법을 사용한 연구들은 대체로 사람의 생명이 100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기암 환자들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을 거쳐 마지막에 수용의 단계에 접어든다고 하는데, 재키는 자신이 아직도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산만한 정신상태로 죽음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죽음은 도피가 아닌가?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 속의 인물에게도 모두 운이 따르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시대였다. 1000년 전이거나 일제강점기거나 아니면 독재시대거나.

아무리 추잡한 것이라도 멀리서 내려다보면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

재키는 살아있는 모든 것이 불쌍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후의 순간에도 그녀의 마음은 평안해지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도 가라앉지 않았다.

재키는 마지막 순간에도 연쇄살인마처럼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만 연민을 느꼈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ㅈㅅ한 유명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베르테르 효과‘

‘언젠가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허락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

이 책이 다루는 가능성은 20대를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위대한 과업이란 철저히 개인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위대하다는 개념이 변질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위대함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고, 스토리텔링 기법으로만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들에게는 과업을 찾는 일이 바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길이다.

사람은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게 된다. _새뮤얼 헌팅턴

20대를 정의하는 각종 담론이 대체로 공허한 이유는 그 청년세대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과업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의 20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인지도 모르겠다.

장편소설을 쓰는 작업은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비슷했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이 없었던 게 그랬고, 매번 3분의 1지점 쯤에서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게 그랬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계속 쓰다 보면 끝까지 쓸 수 있다‘ 는 것과 ‘계속 쓰면 점점 나아진다‘ 는 것이다. 3분의 2 지점을 통과하면 그다음부터는 저절로 끝까지 가게 된다는 점도 글쓰기와 마라톤의 공통점이다.

‘위대함‘은 실제로는 별 중요한 의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다른 뜻을 교묘하게 섞어놓은 단어에 불과합니다. ‘역사의 흐름이 바뀔 때 우연히 해당 장소에 있을 것‘ , 그리고 ‘개인의 한계라고 알려진 선을 넘을 것‘ 입니다.

위대함은 삶의 목표로 추구하기에 적당한 가치가 아닙니다.

저는 현대에 대단히 중요한 과업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업과 무관하게 사람이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무가치하다고 무시하는 일에 매달려 끝내 의미를 찾아내고야 마는

"꼭 랠리를 완주하세요. 어떤 숨은 선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는 마릴린 맨슨의 앨범 <메커니컬 애니멀스> 의 첫 곡입니다. ...(중략)... ‘코마 화이트‘는 같은 앨범의 마지막 곡입니다.

비극과 재앙은 그처럼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ㅈㅅ이 비인간적이라면,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팽창해 젊은이들을 궁지로 내모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인간적인 것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 _아도르노

문제적 작품은 모두에게 동의받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인가.

당대 문학은 현재 살아가는 삶의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더 나은 삶의 길을 가늠하는 일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중요한 것은 그 좌표를 통해 방향을 설정하고 길을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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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이미 다 완성되어 더이상 새롭게 변할 것이 없고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완성된 사회‘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완성된 줄로만 알았던 사회도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부조리함과 개선해야 할 것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것들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하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회에 대한 저항을 위해 택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ㅈㅅ‘ 이다.

솔직히 ‘ㅈㅅ‘이라는 말의 어감자체가 굉장히 부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에 독자인 나는 이 페이퍼를 쓰면서도 모음을 제외한 초성만 쓰는 것을 양해바란다.

다만 본문을 읽다보면 이 ‘ㅈㅅ‘을 택하는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읽으면서 그들의 행위에는 솔직한 심정으로 동의하는 것이 어렵지만, 독자인 나도 그들의 생각과 의도, 취지 같은 것은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 4분의 3정도 읽고 있는데, 뒤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진정으로 말하고자하는 바에 대해 좀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본다.

한 세대가 주도권을 갖게 됐다는 것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냥 그 세대가 중장년층이 되어 각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 세대가 사회구조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 사회는 결코 정체된 것이 아니며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단순히 ‘완성‘이라는 개념을 서로 달리 쓰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맨눈으로 보면 다 굳어서 더 움직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불안정하게 흐르고 있는 물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유리죠. 그렇다고 유리를 액체라고 해야 하나요?

제 생각에 ㅈㅅ선언은 이를테면 헵번스타일이라든가, 로큰롤과 같은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주장을 펼치는 표현 방법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기를 의도하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목표나 책임감은 없습니다.

연쇄살인범 중 일부는 자신을 신으로 착각해 자신과 타인의 목숨을 ‘관장‘해야 한다고 여긴다 ...(중략)... 그들은 남이 자신의 목숨에 손대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이 어릴 때 보이는 세 가지 징후가 있다고 한다. 야뇨증, 방화, 동물 학대가 그것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방법으로 죽어야만 이게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어."

투쟁의 수단이나 삶을 완결시키는 방법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자신이 맞이하려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올라온 사람의 절반 정도가 그냥 내려간다."

육체를 의지로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형 선고가 죄수들에게 기괴하게 삶에 대한 집착을 부추긴다고 들었다. 우리 모두가 사형선고를 받고 태어나는 셈인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다.

이번에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겠지.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재키는 존 F. 케네디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애칭이다.

소크라테스는 미망인이 된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한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의 미들 네임이다.

하비는 케네디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의 미들 네임이다. 오스왈드는 잭 루비에게 살해당한다.

제리 헤인스는 케네디의 암살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사람이다.

메리 무어맨은 케네디 암살 목격자 중 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재키, 소크라테스, 재프루더, 루비, 하비, 제리, 메리라는 이름을 영어로 구글 검색창에 입력하면 쉽게 답이 나왔을 문제였던 것이다. 위키피디아에는 ‘케네디 암살의 목격자들‘ 이라는 카테고리까지 있으니까.

케네디는 하나의 상징물이며, 오직 상징으로서만 기능하는 존재고, 그 상징은 그의 죽음과 분리되지 않는다.

선박왕 오나시스와 같은 대부호도, 재클린 오나시스와 같은 명사도, 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들과 케네디가 붙어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이브러햄 재프루더나 리 하비 오스왈드, 잭 루비, 제리 헤인스, 메리 무어맨과 같은 보통 사람들은 케네디와의 관계가 아니었더라면 후대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케네디도 찰스 맨슨과 비슷했다. 별 내용도 없는 연설을 하고 강한 개인적 매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매료시켰으며, 불멸성을 얻어 현대의 아이콘이 됐다.

읽는 이의 가슴에 호소하는 산문시를 두고 입증되지 않은 논리라든가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 선언에 맞서려면 이 선언과 같은 수준에서 직관적이고 가슴에 와닿는 반박 논리를 펼쳐야 한다. 곳곳의 빈틈을 공격해봐야 핵심을 놓친 트집 잡기처럼 보일 뿐인데, 그게 여러 언론사의 논설위원들이 저지르는 오류였다.

귀신은 함부로 마음을 열지 않는 수줍음 많은 처녀였으며,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는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처녀귀신은 꿈을 간직한 순수한 영혼이었지만, 죽은 뒤에야 그 꿈을 이룬 소망의 존재, 비운의 주인공이다.

죽음 그 자체와 아무도 자신의 뒤를 따르지 않아 자신의 죽음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는 상황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부정해오던 절대자에게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의연하게 구는 것이 가장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

‘제자들‘을 자기와 같은 결론으로 유도해 다짐을 받고, 의지를 북돋워주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데에는 엄청난 감정적 에너지가 필요했다.

이미 결혼을 결심할 때 세연과의 약속은 저버린 거야. 세연과 한 약속만 지켜야 하고 예식장에서 한 약속은 안 지켜도 되나?

ㅈㅅ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좋은 음악이나 그림, 음식을 즐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본능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에는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삶에도 가치는 있는 거야.

‘인정에 대한 욕구‘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패배나 사회변혁이 없어도 적절한 수준에서 채워질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앞의 세대라고 해서 그 사람 중 어느 누구 한 명이 자기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것은 아니잖아. 그네들이 가진 자부심도 하나하나 쪼개놓고 보면 나도 가방 하나 들고 해외출장 나가봤다, 밤새워 일해봤다, 거리에서 돌 던져봤다, 그런 일들 아닌가.

ㅈㅅ선언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ㅈㅅ선언은 내가 야망이 없는 시시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ㅈㅅ선언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야망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얘기에는 더더구나 찬성할 수 없다. 내가 ㅈㅅ선언에 반대하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다.

ㅈㅅ선언은 잘못됐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적절한 반론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그 선언은 역병처럼 번지고 있었고, 감염자 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더욱 야망이 없는 시시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막고 싶었다.

‘야심이 너무 큰 나머지 자기 자신이 그 야심의 희생물이 되어버렸다‘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어른스럽게 삶을 사는 법을 세연에게 보여줬어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 주위에는, 아니 한국 사회 전체에 그렇게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7급 공무원으로서 나는 재미없고 불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런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고 해서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주거나 세상을 바꿀 업적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ㅈㅅ선언을 허황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 선언을 제대로 반박하려면 반대로 멋있게 사는 법을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의 생활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음은 차분한데 심장은 왜이리 뛰는 걸까. 도망치려면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어.

나는 왜 세연이 물을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궁금했다. 문학작품 속에서 물은 생명과 재생의 이미지가 아니던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하기라도 했나?

"그 계획은 잘못됐어.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우습게 여기는 생각이 정말 옳은 거라고 믿어?"
"어차피 다들 시시한 인생이잖아."

"내가 연락하지 않았다고 해서 죽어도 괜찮은 건 아니잖아."

언니는 유리 같은 사람이었어. 날카롭지만 깨지기도 쉬웠지.

뭔가 함정이 있음을 직감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건 일흔 살이 넘어서였어. 그런데 넬슨 만델라가 예순 살 때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 상황은 그냥 절망스럽기만 했어.

정말 위대한 생각은 말이지,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한테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어. 그래도 위대한 정신이라면 그 고독을 견뎌내지.

지금 세상은 너희들이 결론지은 것만큼 결코 완벽한 게 아냐.

나도 따라 뛰어들었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이것은 내가 기다려온 죽음의 방식이다. 선로에 뛰어든 어린아이를 구하려다 지하철에 치여 죽는 것을 내가 얼마나 바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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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전직 절대자는 아카데미 펫 관리자 08 전직 절대자는 아카데미 펫 관리자 8
말랑부들 / ARC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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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생을 물 위에 떠다니며 흘러가는 낙엽에 빗대어 표현한 장면이었다. 본문에선 이것을 제3자의 시선과 낙엽 자체의 시선 이렇게 2가지로 살펴보는데, 이를 통해 한걸음 떨어져서 넓은 시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스스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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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표백 세대‘로 일컬어지는 세대의 한계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그들의 잘못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완성된 사회‘가 그들에게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고민 등과 같은 것들을 할 필요조차 없게 만든 측면도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쉽게 말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좀 더 크다는 말이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이렇게 중간중간 나오는 저자의 날카로운 시대통찰(?) 같은 것들이 독자인 나에게는 뭔가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는 저자의 시대통찰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이 시대를 통찰하는 시각은 뭔가 예리함이 느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고민과 생각을 깊게 했던 흔적들이 엿보였다고나 할까. 독자인 나로썬 훌륭한 인사이트(통찰력)를 얻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저자께 감사드린다.

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표백 세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사유와 생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표백 세대는 소비를 삶의 표현 방식으로 삼는데, 이는 여가와 사교 활동에서 문화예술 및 창작 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이들의 사고와 행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들(표백 세대)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 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 수도 있기에, 이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흉함은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된다.

마르크스는 노예는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보장받는 데 비해 노동자는 그 계급적 지위가 점점 가라앉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표백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보다도 더 한심한 처지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 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표백 세대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순응은 완성된 사회의 시스템과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 판검사나 의사가 되거나 좋은 기업에 취직해 ‘치열하게‘ 살다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목표다. 존경받는 기업인이나 법조인, 정치인들은 거의 다 이 분류에 해당한다. 그런가 하면 ‘고시 폐인‘ , 범죄자와 사기꾼, 실패한 사업가나 장사꾼, ‘악바리‘ 혹은 ‘또순이‘라는 칭찬을 듣는 저소득층도 이 유형에 속한다.

타협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품으면서도 대체로 그에 따라가는 삶의 형태다. 이런 삶의 유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만족을 얻으며 그런 의심을 억누른다. 여가 시간에 봉사활동을 하거나, 권력에 대한 의지 없이 선의로 정당 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행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런 활동이 근본적으로 삶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앞에 오는 것이 아니며, 그런 활동들에 대한 욕구도 따지고 보면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삶의 형태는 완성된 사회에 대단한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권장되기까지 한다.

소극적 저항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나 적어도 그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삶의 형태다. 예술가, 종교인, 전업 NGO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직업인, "패배자라고 불려도 좋으니 아등바등 살지 않고 속 편하게 생활하고 싶다" 라며 교직원이나 하급 공무원, 카페 사장 따위를 꿈꾸는 부류도 이에 속한다.

이들(소극적 저항자)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경멸하지만, 자신들이 완성된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들 중 일부는 경쟁 시스템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런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세속적인 성공을 거머쥐게 되면 언제든지 ‘순응형‘이나 ‘타협형‘으로 태도를 바꿀 준비가 돼 있다.

소극적 저항자들은 대체로 연대를 하지 않으며 사회시스템을 전복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는 한 완성된 사회의 관점에서 대체로 무해하다.

적극적 저항은 사회에 대한 폭력적인 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정의에 따라, 완성된 사회에서 적극적 저항은 이념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적극적 저항자들은 처참할 정도로 논리가 없거나 아니면 일반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채택한다. 프랑스나 그리스 등에서 간혹 보는 방향성 없는 학생 폭동이 전자의 예이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나 대단히 공격적이고 반체제적인 환경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그룹 등이 후자의 예다.

완성된 사회는 이들(적극적 저항자)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으며 이념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적극적 저항자들의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기껏해야 기억에 남는 테러를 몇 건 저지를 수 있을 따름이다.

물을 인정할 수 없는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자살 선언자들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미약한 대가를 사양하며, 완성된 사회를 긍정해 그 구조 안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과 사후에 당할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기대나 선망도 갖고 있지 않다.

기실 완성된 사회는 어떤 사상이나 자존심을 위해 개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완성된 사회는 인간을 하찮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자살 선언자는 그 존재만으로 완성된 사회의 기본 가정을 부수며, 완성된 사회가 완전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자살 선언자는 희고 완벽한 완성된 사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점 얼룩이다.

완성된 사회는 자살 선언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능력이 없으며, 자살 선언자의 행위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자살 선언자들의 목표는 완성된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사회의 천박함과 불완전성을 고발하고 자신들이 품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있으며, 그 방법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 뿐이다. 왜냐하면 봉건시대의 부르주아지와 산업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과 미래가 있었으나 표백 세대와 자살 선언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완성된 사회는 구성원들의 최대 복리를 위해 시스템을 움직이지만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은 영웅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영웅다운 죽음뿐이다.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하찮은 욕망을 채우는데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며 의미 없는 삶을 보내고 우리 세대가 별 볼일 없음을 시인할 것인가, 아니면 담대한 결단으로 그대 안에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우리를 비웃어오던 세상에 충격과 공포를 줄 것인가.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하급 공무원은 사무관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사무관은 국-과장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국-과장은 실장과 차관, 장관 눈치를 살펴야 하고, 장관은 청와대와 여론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데, 여론은 공무원들이 에어컨 바람 쐬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냉방관련 지침을 바꾸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공무원들은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하급공무원들도 그랬고, 국-과장들도 똑같았다. 황당한 지시가 떨어지지 않도록 장차관의 마음을 교묘히 움직이는 재주가 있는 국-과장들이 능력있는 상사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니 느는 것은 눈치밖에 없었다.

잡기가 사실과 진실의 기록일 때에만 거기에서 힘이 나올 것

근처에 있던 네 사람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선언은 그냥 우스갯거리일 뿐이다.

재키는 그들에게 출구를 열어두었다. 4년 뒤에 그들은 한 번 더 선택할 수 있다. 그건 출구가 있다고 말해놓음으로써 예비 선언자들을 더 교묘히 얽어매기 위함이기도 했다. 약속은 그냥 파기해도 되지만, 이 출구를 통해 나가려면 ‘왜 나는 이 세상을 살기로 결심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직장과 직업이 한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짓고, 사회적 신분이 그 사람의 내면과 성격을 좌우하는 것 같았으며,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하는 것은 노동 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임을 자각하며,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른 그 무엇을 원해도 ‘그들‘이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완성된 사회에서 자살은 낙오이며, 낙오자에게 완성된 사회가 해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낙오자 수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은 구조적인 실패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기에 완성된 사회는 그 사실을 알리는 데 인색하다.

충격적인 아이디어를 열심히 짜내보라

"너, 사람이 우울증 약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좀비처럼 돼. 그게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약이 아니라 머리를 멍하게 해서 기쁜 일이고 슬픈 일이고 못 느끼게 만드는 약이야."

"거대한 마귀가 아니라 아주 작은 악마가 이반 카라마조프를 괴롭혔듯이, 나를 그저 우러러보기만 하고 아무 자존감이 없어 보이는 네가 나한텐 골칫덩이였지. 그런데 너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자기혐오에 빠지고 상처받는 사람은 나였거든. 너를 경멸할수록 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지. 너한테는 이상한 매력이 있어.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랑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이런 것 같아. 고통이야. 그러나 그 사랑의 정체가 고통이라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닌 건 아니야. 세상에는 그런 사랑도 있어."

내 남은 삶을 24시간으로 확정한 이제야, 나는 사물을 보다 뚜렷이 볼 수 있게 됐다. 그토록 손에 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너의 모습이 보이고, 너의 생각들이 분명하게 이해되기 시작한다.

나는 너 때문에 죽는 게 아니면서, 너 때문에 죽는다.

너는 내가 끊임없이 좌절하고 절망해야 했던 이유가 내 잘못 때문이 아님을 일깨워줬다. 네가 그런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자책만 하면서 계속 살아갔겠지.

나는 너를 쫓아 죽는 게 아니면서, 너를 쫓아 죽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가 겪고 있는 문제를 안다는 것은 곧 그 자신을 아는 일이었다.

표백 세대의 좌절은 돈이 많거나 적은 것과는 상관이 없어.

숭배자들은 어느 시점이 됐을 때 모두 재키에게 "너한테 나는 무슨 의미냐" 라고 따졌다. 재키는 그런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의심하는 것만큼 나도 너를 의심하고 있어.

"왜냐하면 마음속에 의심을 가진 채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도 나를 의심하지마. 나를 믿고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해."

개인적인 ‘성공 신화‘는 완성된 사회에서도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만, 그것이 사회의 변화를 일으킬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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