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존 기계다. 여기서 ‘우리‘란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동식물, 박테리아, 그리고 바이러스를 포함한다. 지구상 생존 기계의 총수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심지어 종의 총수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 P79
생존 기계는 종류에 따라 그 외형이나 체내 기관이 매우 다양하다. ...(중략)...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화학 조성은 다소 균일하다. 특히 그들이 갖고 있는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는 박테리아에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한 종류의 분자다.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자기 복제자, 즉 DNA라고 불리는 분자를 위한 생존 기계다. - P79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여러 종류의 생활 방법이 있는데, 자기 복제자는 이 방법을 이용하기 위해 다종다양한 기계를 만들었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이고, 물고기는 물속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다. 심지어 독일의 맥주잔 받침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벌레도 있다. 이처럼 DNA는 매우 신비하게 일한다. - P79
오늘날 DNA는 생존 기계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 다만 이 책의 11장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새로운 권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예외로 한다면 말이다. - P80
DNA 분자는 뉴클레오티드nucleotide라고 하는 작은 단위 분자로 구성된 긴 사슬이다. 단백질 분자가 아미노산의 사슬인 것과 같이 DNA 분자도 뉴클레오티드의 사슬이다. - P80
DNA 분자는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그 정확한 형태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우아하게 맞물린 한 쌍의 뉴클레오티드의 나선형 사슬, 즉 ‘불멸의 코일‘인 ‘이중 나선‘으로 되어 있다. - P80
뉴클레오티드를 구성하는 단위는 단지 네 종류밖에 없다. 그 이름은 줄여 A, T, C, G라고 한다. 이 점은 모든 동식물에서 동일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이 연결되는 순서다. 인간의 구성 요소 G는 모든 점에서 달팽이의 구성 요소 G와 같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구성 요소 서열은 달팽이의 것과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과도 (차이가 큰 것은 아니나) 다르다(일란성 쌍생아라는 특수한 경우는 제외하고). - P80
DNA는 우리의 몸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몸의 한곳에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각 세포에 분포해 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수는 평균 약 10^15개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 세포들 각각에는 그 신체에 대한 완전한 DNA 사본이 들어 있다. 이 DNA는 뉴클레오티드의 A, T, C, G라는 알파벳을 이용해 몸을 만드는 방법에 관한 설명서라고 생각해도 좋다. 마치 거대한 건물의 모든 방에 그 건물 전체의 설계도가 들어 있는 ‘책장‘이 있는 것과도 같다. 세포 내의 ‘책장‘은 핵이라고 불린다. - P81
인간의 설계도는 46권이나 되며 이 수는 종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각 ‘권‘을 염색체라고 부른다. 현미경으로 보면 염색체는 기다란 실처럼 보인다. 유전자는 그 실에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다. 어떤 유전자가 어디에서 끝나고 다음 유전자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으며, 실제로 의미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 P81
‘권‘과 염색체는 같은 뜻으로 쓰일 것이다. 또 ‘페이지‘는 유전자와 같은 뜻으로 쓰일 것이다. 비록 유전자 간의 경계는 책의 페이지 사이의 경계만큼 분명치는 않지만 말이다. - P81
설계도를 그린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명서인 DNA는 자연선택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P81
DNA 분자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복제다. 즉 DNA 분자는 스스로의 사본을 만든다. 이 과정은 생명 탄생 이래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으며, DNA 분자는 복제를 아주 잘한다. 성장한 인간은 10^15개의 세포로 되어 있지만, 처음 수정되었을 때는 설계도의 원본 하나가 들어 있는 한 개의 세포였다. 이 세포는 각기 설계도 사본을 받은 두 개의 세포로 분열된다. 분열은 계속되어 세포 수는 4, 8, 16, 32...로 증가하여 몇 조가 되고, 분열할 때마다 설계도 DNA는 거의 착오 없이 복제된다. - P82
DNA가 복제되는 과정과 그것이 어떻게 몸을 만들어 내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 P82
DNA는 다른 종류의 분자, 즉 단백질의 제조를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앞 장에서 언급한 헤모글로빈은 수많은 종류의 단백질 분자의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네 종류의 알파벳으로 암호화된 DNA의 메시지는 단순한 기계적 방법에 의해 또 다른 알파벳으로 번역된다. 이 알파벳은 아미노산의 알파벳이며 단백질 분자를 지정한다. - P82
단백질을 만드는 것은 몸을 만드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 방향으로 가는 작은 첫걸음이다. 단백질은 몸을 구성하는 물리적 재료일 뿐만 아니라, 세포 내의 화학적 과정 전반을 섬세하게 제어하여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에서 화학적 과정의 스위치를 선택적으로 켰다 껐다 한다. - P82
유전자는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제어하는데, 그 제어 과정은 엄격하게 일방통행이다. 즉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일생 동안 아무리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었을지라도, 유전적 수단으로는 그중 단 한 가지도 자식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새로운 세대는 무無에서 시작한다. 몸은 유전자를 불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유전자가 이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 P83
유전자가 배胚 발생을 제어한다는 사실이 진화에서 갖는 중요성은 유전자가 부분적으로나마 장래에 자신이 생존하는 데 책임이 있다는 데 있다. 유전자의 생존은 자신이 살고 있고 그 제조를 도왔던 몸의 효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P83
먼 옛날 자연선택은 원시 수프속에서 자유로이 떠다니는 자기 복제자의 차등적 생존에 따라 이루어졌다. 지금의 자연선택은 생존 기계를 잘 만드는 자기 복제자, 즉 배 발생을 제어하는 기술이 뛰어난 유전자를 선호한다. - P83
자기 복제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이지 않다. 수명, 다산성, 복제의 정확도에 근거하여 경쟁 분자 사이에서 자동적으로 벌어지는 선택이라는 낡은 과정은 아직도 먼 옛날과 같이 맹목적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계속된다. - P83
유전자는 선견지명이 없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 유전자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 P83
현대의 자기 복제자는 무리를 짓는 습성이 대단히 강하다. 하나의 생존 기계는 하나가 아닌 수십만이나 되는 유전자를 가진 운반자다. 몸을 제조한다는 것은 유전자 각각의 기여도를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협력 사업이다. - P84
당신의 왼쪽 슬개골이나 당신의 손톱 등 명확한 형태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유전자 각각이 만들어 내는 여러 부분으로 분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백 개나 되는 유전자가 협동해서 신체 일부를 대부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P504
하나의 유전자가 몸의 여러 부분에 각각 다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또 몸의 한 부위가 여러 유전자의 영향을 받기도 하며, 한 유전자의 효과가 다른 많은 유전자들과의 상호 작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 P84
다른 유전자 무리의 작용을 제어하는 마스터 유전자 역할을 하는 것도 있다. 설계도로 치면 설계도의 페이지 각각에는 건물의 각 부분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고, 각 페이지의 내용은 수많은 다른 페이지의 내용을 참조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과 같다. - P84
유전자가 세대를 통해 여행할 때 아무리 독립적이고 자유로울지라도 그것은 배 발생 과정을 제어하는 데 전혀 자유롭지도, 독립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매우 복잡한 방법으로 서로 간에, 그리고 외부환경과 협력하고 상호 작용을 한다. - P505
길든 짧든 다리를 혼자 힘으로 만드는 유전자는 없다. 다리를 만드는 일은 많은 유전자의 협력 사업이다. 이때 외부 환경의 영향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결국 다리는 음식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나 다른 조건이 같다면, 대립 유전자가 영향을 미칠 때보다 다리를 더 길게 만드는 하나의 유전자가 존재할 수도 있다. - P505
유전자는 혼자 있을 때 ‘좋은 것‘이 아니라, 유전자 풀 내 다른 유전자를 배경으로 할 때 좋은 것이어야 선택된다. - P506
좋은 유전자는 수 세대에 걸쳐 몸을 공유해야 할 다른 유전자들과 잘 어울리고 또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 - P506
유전자 복합체가 개별적인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바로 성性이라는 현상 때문이다. - P84
유성생식은 유전자를 섞는다. 이것은 개체의 몸이란 일시적인 유전자의 조합을 위한 임시 운반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P84
하나의 개체에 들어 있는 유전자의 조합은 일시적이지만 유전자 자체는 잠재적으로 수명이 매우 길다. 유전자의 길은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 한 개의 유전자는 수많은 개체의 몸을 연속적으로 거쳐 생존하는 단위라고 생각해도 좋다. - P85
인간의 몸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가 46권 속에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 P85
46개의 염색체는 염색체 23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세포의 핵 속에 정리되어 있는 것은 23권의 설계도에 대한 대립되는 두 세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들을 1a권과 1b권, 2a권과 2b권... 23a권과 23b권이라고 부르자. - P85
우리는 부모로부터 각각 염색체를 받는다. 이 각각의 염색체는 부모의 정소 또는 난소 안에서 조립된 것이다. 예컨대 1a권, 2a권, 3a권 ⋯ 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고 1b권, 2b권, 3b권 ⋯ 은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다. 실제로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어떤 세포의 46개 염색체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아버지에게서 유래한 23개와 어머니에게서 유래한 23개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 P85
한 쌍으로 된 염색체는 전 생애 동안 서로 물리적으로 붙어 있지도, 가까이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쌍으로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유래한 각 권의 페이지가 어머니에게서 유래한 특정한 권의 페이지와 대응한다는 의미에서다. - P85
때로는 대응하는 두 페이지에 같은 것이 쓰여 있는 경우도 있으나 눈동자 색깔의 예와 같이 다를 수도 있다. 이들이 모순된 ‘추천‘을 할 때 몸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한쪽에 적힌 내용이 다른 쪽의 내용보다 우세하다. - P86
무시되는 유전자를 열성 유전자라고 한다. 열성 유전자의 반대는 우성 유전자다. - P86
더 일반적인 경우에는 대립하는 유전자가 동일하지 않을 때 그 결과가 일종의 타협으로 나타난다. 즉 몸은 중간 형태를띠거나 양쪽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 P86
갈색 눈의 유전자와 청색 눈의 유전자같이 두 개의 유전자가 염색체의 같은 위치에서 경쟁할 경우, 이들을 서로의 대립 유전자allele 라고 부른다. - P86
항상 모든 유전자는 개개의 생존기계 속에 구속되어 있다. 유전자는 우리가 수태될 때 할당받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87
1개의 세포가 2개로 갈라지는 정상적인 세포분열에서 그 각각의 세포는 46개의 모든 염색체 사본을 전부 받는다. 이처럼 정상적인 세포 분열을 체세포 분열이라고 한다. - P87
감수 분열이라고 하는 다른 형태의 세포 분열이 있는데, 이는 생식 세포, 즉 난자 또는 정자를 만들 때에만 일어나는 세포 분열이다. - P87
난자와 정자는 염색체를 46개가 아닌 23개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특이한 세포다. - P87
감수 분열은 정소와 난소에서만 일어나는 특수한 형태의 세포 분열이다. 거기에서는 46개 염색체의 완전한 두 세트를 갖는 1개 세포가 분열하여 한 세트에 23개의 염색체를 갖는 생식 세포가 만들어진다. - P87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정자는, 정소 내 46개의 염색체를 가진 보통의 세포가 감수 분열하여 만들어진다. - P88
권(염색체)을 낱장을 뺐다 끼웠다 할 수 있는 바인더로 가정했던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정자가 만들어질 때 어떤 한 페이지 또는 여러 페이지 뭉치가 빠지고, 짝이 되는 권에서 이에 해당하는 페이지나 뭉치와 바뀌는 것이다. - P88
어떤 정자에서 제1권은 1a권의 첫 페이지에서 65페이지까지, 그리고 그다음은 1b권의 66페이지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을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나머지 22권도 만들어진다. 따라서 어떤 한 개체에서 만들어진 모든 정자 세포는 서로 다르다. 그의 모든 정자세포가 46개의 염색체로 이루어진 동일한 세트의 작은 조각에서부터 23개의 염색체를 조립하여 만들어졌더라도 말이다. 난자는 난소 내에서 같은 식으로 만들어지고 역시 모든 난자 세포는 서로 다르다. - P88
정자 또는 난자가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아버지 쪽의 염색체 조각들은 서로 떨어져서 어머니 쪽 염색체의 해당 조각과 바뀐다 (여기서 아버지 쪽, 어머니 쪽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자를 만드는 개체의 부모에게서 유래하는 염색체라는 의미다. 즉 그 정자가 수정하여 만드는 자손의 할아버지·할머니에게서 유래하는 염색체를 뜻한다). 염색체의 조각이 교환되는 이 과정을 교차라고 한다. - P89
교차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상, 당신이 현미경으로 자기 정자(당신이 여자라면 난자)의 염색체를 들여다보며 아버지로부터 온 염색체와 어머니로부터 온 염색체를 구별하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이것은 보통의 체세포와는 현저히 대조적이다). - P89
한 개의 정자에 들어 있는 염색체는 어떤 것이든 어머니 쪽 유전자와 아버지 쪽 유전자의 모자이크로 만들어진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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