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드세다, 나대다‘ 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나온다. 외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 남녀간의 성격이나 스타일에 대한 어떤 정형화된 고정관념 같은 것이 뿌리깊게 남아있는 듯하다. ‘남자다운 건 이러한 것이고 여자다운 건 저러한 것이다‘ 같은 것 말이다. 얼마든지 남자도 여성스러운 면이 있을 수 있고 여자도 남성스러운 면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性과 반대되는 모습들을 보면 뭔가 특이하다는 식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은연중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역사적인 또는 문화적인 혹은 기타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같이 하루가 멀다하고 급속도로 변하는 사회에서 특정 성에 대한 어떤 고정된 스타일이 존재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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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한계에 부딪히다‘ 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여기선 저자가 자신이 속한 업계에서 일을 하다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인 나 자신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였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내 경우 문득 한 예로 떠올랐던 것 중의 하나가 쉬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는 걸음 수 였다. 요즘 스마트폰 어플에 보면 걸음 수를 카운트해주는 것들이 여러가지 있다. 내 경우 ‘구글 피트니스‘ 를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두 지표가 걸음 수와 이동한 거리다. (물론 이것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지표는 아니기에 생략한다.) 스마트폰에 이 어플을 설치한 후 비교적 자유로운 주말이나 공휴일같은 때 운동도 할 겸 무작정 걸었던 적이 있는데, 거의 쉬지 않고 최대로 걸었던 걸음 수가 25,000보에서 30,000보 정도 되었다. 거리로는 대략 25km 내외 정도로 측정되는데 이 정도 걸으면 거의 내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느껴지는게, 일단 내 다리가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와 달리 움직임이 확실히 둔해진다. 가벼운 느낌이 아니라 마치 모래주머니를 양 다리에 차고 걷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렇게 한계를 몸으로 경험해보면 나의 역량이 어느정도까지 인지 가늠이 되고 그에 맞게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긴다. 이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이 참 단순해보이지만 괜히 많은 곳에서 인용되는 게 아니라는 걸 위의 글을 쓰면서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나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분수에 맞게 활동하며 살 수 있는 것이지 나 자신의 한계도 모른채 무작정 의욕만 앞서서 살아간다면 머지않아 낭패를 볼 위험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내용과는 별개로 소크라테스가 왜 유명한 철학자인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오늘은 소크라테스의 말에 ‘한계‘ 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너 자신의 한계를 알라‘ 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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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이어 나오는 글 중에 ‘겁이 많다‘ 라는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의외로 호의적이어서 조금 놀랐지만, 본문에 나온 내용들을 읽다보니 저자의 생각에 수긍할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볼 줄 아는 저자의 시각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상하다‘ 라는 말에 대한 얘기도 이어지는데 이것을 ‘특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저자의 관점을 보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어찌보면 특별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전보다 좀 더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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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어 나오는 ‘살아남다‘ 라는 글에서는 한 일화를 통해 이 말에 대해 저자가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과 더불어, 시간이 지난 후 저자의 생각이 기존과는 달라지는 것들을 보면서 독자인 나 또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나와서 읽는 내내 뭔가 흐뭇하고 희망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저자가 젊었을 때는 업계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이 왠지 모르게 비참하고 억지로 뭔가를 꾸역꾸역 해나가는 느낌으로만 다가왔다고 한다. 하지만 업계에 장기간 있다보니 소위 말하는 ‘감感‘이라는 게 떨어지는 시기가 언젠가는 반드시 온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자 예전에 부정적으로만 느껴졌던 그 말이 이제는 살아남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온전히 느끼게 되었다는 게 저자의 고백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이를 들어가면서 저자도 젊을 때와 같은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아서 이런저런 고민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 속에서 저자는 자신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찾아보면서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한다.

또한 가급적이면 인성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는 얘기도 덧붙이는데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 이는 롱런을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업할 때 좀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간혹 예민해질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경우에는 가급적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실제로 저자가 업계에서 장기간동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성적으로 훌륭한 분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국가대표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인 손웅정 님이 쓰신 책을 읽었었는데, 그 책에서도 보면 월드 클래스인 선수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훌륭했다는 얘기를 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당연히 실력이 기본적으로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훌륭했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곳에 적용되는 진리처럼 느껴진다.

물론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인성은 그 가치가 좀 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분야이든 간에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성들이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생각외로 이런 기본적인 인성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신이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교만해서 그런 것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뭐 세상이라는 게 결코 완벽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뭐 그러려니 해야지 어쩌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는데 어쨌든 살아남는 것은 간혹 폼나지 않을 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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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창작하다‘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영감靈感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저자는 영감이 어디서 오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체력에서 온다는 답을 하는데, 이는 결국 우리 ‘뇌‘의 활동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더 다뤄보도록 하겠다.

여자는 부드럽고 온화하지 않은 정도만 되어도, 한국에선 쉽게 ‘쎈언니‘, ‘걸크러쉬‘ 호칭을 얻을 수 있다. 그만큼 여성의 기본값이 은연중에 책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남녀가 각각 똑같은 기본값의 성질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체적인 차이에서 오는 성향의 차이는 어느 정도 있지 않겠나.

그러나 성별에 따른 ‘모범 성향‘이라는 게 없는 이상, 어떤 성향도 유년기에 ‘잘못된 점‘으로 치부되지 않을 테고 그것이 잘 자라 한 사람의 고유한 강점 또는 질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극적인 남자 또는 적극적인 여자라서 가질 수밖에 없는 특별함을 발견할 수도 있다.

성향의 기본값은, 나의 사회적인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기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나는 세상은 방구석에서 뭐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 모든걸 바치는 덕후들과 무리에서 늘 튀어가며 소리쳐준 나대는 이들로 인해 변해왔다고 믿는 사람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자아가 있다 ...(중략)... 결이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나‘임에 틀림없지만, 세포분열을 하듯 수많은 상황 속에 각기 다른 ‘역할‘로도 존재한다.

심지어 꼭 집단에서뿐만 아니라 누구의 앞이냐에 따라 우리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기 힘들다.

모두에게, 모든 곳에서 온전한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주 이기적이어야 가능하다. 배려하기에, 사랑하기에, 책임이 있기에, 히스토리가 있기에 우리는 종종 다른 모습을 한다.

어떤 이유로든 내게 소중한 누군가의 앞에서, 그에 맞는 나의 역할 또는 모습이란 건 분명히 있다. 가면과는 분명히 다르다. 중요한 건 내가 팀장임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모든 팀원들은 결국 나라는 줄기에서 뻗어난 가지라는 걸 잊지 않는 거다.

A&R(Arists & Repertoire) : 아티스트 발굴, 육성, 음반제작을 하는 직무

A&R은 프로듀서의 손발 역할을 한다. 프로듀서가 앨범의 방향을 정하면, A&R은 이에 맞는 곡과 가사를 수급하고 작곡가를 매칭하기도 한다.

일이 순조로울 때는 실무자의 공이 빛난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그것이 A&R의 책임이 되진 않는다. 그건 전적으로 프로듀서나 제작자의 몫이다.

내가 한 일의 경우 어떤 ‘결정‘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최종적으로 그 곡을 타이틀곡으로 정하는 일은 프로듀서의 역할이고, 어떤 통찰과 계산이 필요한 일이며,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질 능력과 강단은 없는 사람이란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하나만 잘하면 되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쉬웠다. 지시한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패닉이 오고 결국 팀원들은 할 일이 없고 나만 일을 떠안는 경우가 허다했다.

작은 부분의 디테일을 잘 보는 나의 장점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될 때까지 해보는 노력 끝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해보고 또 해보다 결국 인정하게 되는 쓸쓸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어떤 부분에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의 ‘벽‘에서 뒤돌아봐야 알 수 있는 나만의 가능성이 있다. 즉 한계에 부딪힌다는 건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도 된다.

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이 말은, 스스로는 깨닫기 힘든 부분이 잠재력 그리고 가능성이라는 뜻도 된다. 땅 끝에 닿아본 사람만이 지도를 그려낼 수 있듯, 한계치에 닿아본 사람만이 스스로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다.

무모한 자들은 뼈아픈 실패를 겪지 않았거나, 그 실패들이 남긴 데이터를 망각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겁이 많은 자들은 지켜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다. 또 자신과 얽힌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일에 대한 신중함이 있는 자들이다.

삶에 있어서 충동보다는 지구력으로 대처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나는 겁이 많은 편이야‘ 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호감이다. ‘겁이 없음‘을 매력적인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늘 강했다.

‘가나다라마바사, 너와 나의 암호말‘

내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남성성이나 여성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만 보면 슈퍼스타들이 대개 그렇다. 마이클 잭슨이라든지, 마돈나라든지.)

‘동작‘은 유행을 타지만, ‘표현‘은 그렇지 않기 때문

가사를 표현하는 몸짓을 취하는 것이 무대라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도 사랑받는 작품은 결국 그런 본질에서 탄생하는가 보다.

사람은 본인 고유의 색깔을 가져야 한다고, 특별한 나만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하곤 한다. 그러고는 정작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배척한다. 이것은 낯선생명체를 거부하는 동물적인 본능에서 기인한 습성이겠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 본능을 이성으로 거를 수 있어야함에도, 자주 그러기를 실패한다. 그리고 반짝이는 그 특별한 사람을 성의 없는 한 마디로 정의해버린다. ‘이상하다!‘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봐야 우리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앞으로 살면서 우리는 아마도, 수없이 많은 ‘이상하다‘는 말을 툭 하고 내뱉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그 말을 ‘특별하다‘고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좀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음미하며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살아남으면 돼. 그게 다야."

‘살아남는다‘는 말은 꾸역꾸역 버틴다는 말로 들렸다. ‘꾸역꾸역‘이라는 표현을 붙일 만큼 구차하고 초라한 모습이 떠오르는 말이었다. 사람 많은 배에 억지로 몸을 욱여넣고 비루하게 항해를 하는 사람이 상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묘하게도, 5년 차, 10년 차가 될 때마다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살아남았고‘, 그러기 위해 많은것들을 했다. ‘살아남는다‘는 말은 단순히 존재감 없이 그럭저럭 발을 걸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살아남아보며 깨달았다.

나를 살아남게 해준 순간들이 있다. 좋은 가사를 써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고뇌하는 순간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가사가 잘 나오지 않을 때, 슬럼프가 찾아올때, 밀려 나가지 않으려 버틸 때 등의 초라한 시간들이 내가 살아남을지 아닐지를 결정해주었다.

가사가 잘 나올 때에는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앉은 자리에서 서너 개씩의 가사가 쏟아져 나오던 때에는 오는 일을 하느냐 마느냐 선택의 문제만 있을 뿐 고민할 게 없다. 문제는 내가 본 어느 누구도, 이런 컨디션이 늘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는 ‘감‘이라는 것이 떨어지면,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속수무책이 된다. 감이란 게 있을 때라 쳐도 그 감이 통하는 ‘때‘가 있을 뿐, 나이가 들면 새로운 세대가 보기에 낡고 촌스러워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감‘으로 하는 일들이다.

시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는 패션이다. 90년대 패션, 80년대 패션으로 묶여지는 스타일에는 해당 시대가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패션처럼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타는 것이 바로 ‘언어‘다. 젊은 가사를 젊을 때 쓰는 것과, 젊은 가사를 쓰려고 썼을 때 나오는 언어의 질감은 확연히 다르다. (어르신들이 애써 젊은이 행세를 하며 인터넷에 글을 쓰면 모두가 알아볼 수 있지 않던가.)

돌아보면 쉬운 일이지만, 닥치면 어려웠던 모든 일들은 이 ‘인정‘이었다. 나의 한계를 느꼈을 때, 더이상 힘으로 밀어내는건 객기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되도록이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음악도 결국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일은 너무 잘하는데 인성 이슈가 있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낙오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러나 실력 있는 일꾼으로 날아다닐 때 나쁜 사람이 되는 건, 그 사람의 본성 탓이 아닐 때도 있기에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일이 잘될 땐 평소보다 몇 십 아니 몇 백 배의 사람들이 꼬이고 그중에는 내게 해로운 사람이 태반이기에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워질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안다.

자신감이란 건 가지를 종종 쳐주지 않으면 오만이 되기 십상인데, 이 밸런스를 잡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한 번 아쉬웠어도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두 번 오지 않기 시작하면 영영 기회가 오지않는 곳이 프리랜서 업계의 현실이니까. 괜찮은 인간이 되고픈 마음 한편엔 생존본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존심을 부리지 않으려는 노력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좋은 클라이언트랑만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돌이켜보면 그건 행운에 가깝다.) 작품 하나가 아쉬운 커리어일 땐 더더욱.

15년 전쯤 업계의 중심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다른 파트의 일들을 이해하기에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고 기분 좋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들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또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졌을지언정 자존감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아우라를 갖고 있다.

감이라는 건 비단 창작업에서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유난히 수행능력이 빛나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감이 좋은 때다. 감은 영원하지도 않지만 한 번 왔다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시 한 번 돌아왔을 때 그것을 펼칠 기회가 오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그리고 그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내 지난날들엔 비굴하고 비참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시선도 많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빛나는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살아남기‘라는 것이다.

금 밖으로 나가면 게임이 끝나는 동그라미 안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휘청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올 것이다. 그때 볼품없이 두 팔을 휘저어가며 다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 그 멋없는 순간 스스로 겸연쩍어 선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면 잠깐은 폼날지언정 더이상 플레이어가 될 순 없다.

기억하자. 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 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 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단 걸.

"영감은 체력에서 옵니다."

20대는 물론이요,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감이라는 것은 여기저기서 채집한 느낌들이 나의 어딘가와 만나서 탄생하는, 그러니까 결국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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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능에 충실한 삶‘과 ‘우리가 의식하고 싶어하는 삶‘ 간에는 언제나 깊은 괴리가 있다는 말과 함께 그 괴리를 좁힐 순 없지만 그 사이를 넘나드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를 했었다. 다만 이것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 이면에는 공포 내지는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살펴봤었다. 오늘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올바른 마음가짐에 대해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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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중후반부를 보면 저자가 인도 불교와 붓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소개된 저자의 연보를 통해 저자의 주변 환경적인 영향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독자인 나는 저자에 관한 단편적인 사실이나 생각 등에 국한되기 보다는 저자의 주변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본문의 내용과는 별개로 환경적인 요소가 한 사람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 환경과 관계없이 뭐든지 자기가 하기나름이라고 말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말에 그닥 동의하지 않는다. 환경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옛말에 무슨 ‘맹모삼천지교‘ 같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내가 하는 생각과 습관 그리고 환경까지 3박자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져야 가장 최선의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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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문 내용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보면, 저자의 인도 불교와 붓다에 대한 생각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관련된 내용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름부터 생소하게 느껴지는 신들을 비롯해 인도 불교와 붓다가 지향하는 가치관과 생각들이 무엇이고 다른 종교들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대해 잠시나마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미리부터 마음속의 동요를 억누르거나 ‘미친 짓‘이라는 등의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오히려 그 동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라! 모든 성장은 그러한 상태와 결부되어 있으며 고난과 고통 없는 성장은 있을 수 없다.

‘망상‘이 당신을 괴롭히더라도 눈을 감지 말고 그 망상이 마음속에서 분명해지도록 애써 보라. 그렇지 않으면 여느 사람처럼 당신의 내부에 있는 혼돈과 점점 더 반목하게 될 뿐이다. 당신은 그 혼돈과 친구가 되어 그것을 받아들이고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고통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이 고통의 세계를 가장 빨리 통과할 수 있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생각

서로 반대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칸트, 피히테, 헤겔, 바그너 ...(중략)... 괴테나 횔덜린, 니체, 그림 형제, 아이헨도르프 ...(중략)... 모차르트나 바흐, 슈베르트

인내하는 것은 어렵다. 인내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고행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힘든 일이면서 그와 동시에 유일하게 배울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세상의 자연과 성장, 평화, 번영, 아름다움은 모두 인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내는 시간과 침묵, 그리고 신뢰를 필요로 한다.

인내는, 개인의 일생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하며, 개인의 판단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과의 연관성도 고려해야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인내‘와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앙, 지혜, 천진난만함, 그리고 소박함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싸우고 매듭을 풀었다가 또다시 매듭을 짓고는 한다. 그런 행위가 마침내 끝이 나면 완전한 이해와 흠 없는 조화, 그리고 완결된 미소와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고 목표가 마침내 달성되면 우리는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둔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며 이생의 삶을 다하고 환생하기 위해 실체가 없는 곳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이다.

여섯 줄의 선으로 이루어진 연필 스케치나 네 줄의 시와 같이 아무리 하찮은 예술 작품도 과감하고 맹목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단호하게 뛰어들어 호두 껍질 안에 숨어 있는 혼돈을 창조해 내려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고뇌다. 그들은 인내와 열성, 애정을 가지고 시나 그림, 소설 등의 작품을 형상화한다. 그와 더불어 세상은 매시간 더 풍부해지고 충만해지며 다양해지지만, 그래도 예술가는 자신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매일 그리고 매시간 홍수처럼 밀려오는 꿈과 생각들을 억눌러야 한다. 원하던 것의 천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빈약한 멜로디로 창작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창작에 대한 강박 관념은 끔찍하다. 그것은 시도를 거듭할수록, 또 작품을 많이 쓸수록 더 심각해지고 가슴은 불행과 체념으로 가득 차게 되며 정신은 광포해지고 강렬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가 나온다. 그 결과란 글쟁이의 평가나 시민의 박수갈채, 어느 소녀의 편지와 같은 ‘성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ㅡ그러한 오해는 우습지만 참을 만하다ㅡ 실제의 결과, 즉 마침내 예술가 앞에 놓여 있는 ‘작품‘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토록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작품 말이다.

세상에는 자기가 완성한 작품을 사랑하는 예술가도 있다고 한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문학 작품을 참회의 고백으로 이해한다면 ㅡ현재의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지만ㅡ 예술은 멀고 다양하며 꼬불꼬불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길의 목표는 점점 힘이 빠져 완전히 탈진해 버릴 정도로 개성 혹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완전하고도 구석구석 낱낱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더 고차원적인 것, 이를테면 개인이나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뒤따를지도 모른다.

예술은 평범의 차원을 뛰어넘을 것이고, 예술가는 성인聖人이 될 정도로 성숙해질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예술이 예술가에게 끼치는 영향은, 예술가 본인의 인격에 있어서만큼은 고해나 심리 분석이 할 수 있는 기능 이상의 것을 이루는 셈이 된다. 니체의 후기 작품이나 스트린드베리의 고백서, 플로베르의 글은 모두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술가의 종착지이자 목적지는 이제 더 이상 예술 행위나 작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잊고 단념하는 것, 그리고 영혼의 평온함을 누리며 기품 있게 존재하기 위하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늘 고뇌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다.

개인을 초월하는 자아, 즉 세상과 시간이 더 이상 사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정신적인 상태에서 세상의 혼돈이 음악으로 바뀌고 그로 인해 성인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예술가의 목표일 것이다.

다만, 예술가에서 성인으로, 고백과 참회에서 신의 품 안에 안식하는 것으로 이르는 그 길이 진정한 길인지, 또 그 길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가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인간은 자기 무의식이 표현하며 드러내는 의미와 그 중요성에 스스로 매료됨으로써 심리 분석을 할 때에는 자기 자신을 잊고 그것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다.

그와 동일 선상으로 예술가는 참회의 고백을 할 때 스스로를 내던지고 자신의 진심을 말하며 쉴 새 없이 자기감정을 토해 냄으로써 자신의 편협한 자아와 점점 더 깊은 유대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문제와 고뇌, 그리고 콤플렉스에 점점 더 깊이 끌려 들어갈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은 예상과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예술가를 성인과는 정반대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내가 ‘성인‘이라고 할 때는 정의로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마음이 일치하는 경건한 사람, 자신의 감각이 전해 오는 것을 모두 신의 섭리, 즉 필연적인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상반되는 두 가지를 하나로 보고 모든 관점에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것을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가의 고백이ㅡ예술가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두든 상관없이ㅡ결코 순수한 고해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순수한 고해란 단순히 억누르던 감정을 터뜨리는 것이며, 해방이자 단념 그리고 폭로다. 그에 반해 예술가의 고백은 언제나 자기변명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예술가는 고해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에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애정을 쏟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고백이 솔직하고 신중하며 또 완벽하고 가차 없는 것일수록 다시 온전한 예술, 온전한 작품, 온전한 자기 목적이 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예술가는 자신의 고백에 몰두하고 자신의 과제와 자신이 이룬 성과 전체를 자신의 고해에 옮겨놓음으로써 늘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방황하는 경향이 있다. 어차피 예술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룬 성과와 자기변명을 모두 자신의 작품에 옮겨 놓고, 그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과장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인의 고백을 문인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금방 뚜렷해진다. 이를테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를 비교해보자. 한 사람은 신에게 자신을 내맡겼기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시키고 있는 한편, 또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변명하고 있다. 두 사람은 같은 동기를 가지고 출발점에 섰으나 그들의 종착지는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한 사람은 성인이 되고 또한 사람은 문인이 되었다. 한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극복하여 위대한 인물이 되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흥미로운 사람에 그치고 말았다. 내 생각에 니체는 그 두사람의 중간쯤 되고, 스트린드베리는 루소에 아주 가깝다.

숱한 경험으로 쌓아 온 자아를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칼에 단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태어나던 시각에 토성과 화성, 목성과 달이 떠 있었던 것처럼, 신앙심 깊고 경건한 부친과 개신교의 전통인 세례식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Vedanta(베단타): 인도 6파의 하나로 그 시조는 기원전 1세기 무렵의 철학자 바다라야나이다. 《우파니샤드》를 중시하며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견지한다.

Upanisad(우파니샤드): 인도 브라만교의 성전인《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들로서 기원전 1000~600년경에 활약한 힌두 스승들과 성현들의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100가지 정도가 알려져 있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이 성전은 사람, 신, 우주의 이치를 밝히고 있으며 그 일부인 범아일여 梵我一如 사상은 모든 힌두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Visnu(비슈누): 힌두교의 세 주신主神의 하나.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신으로 후에 크리슈나로 화신化神한다.

Indra(인드라): 인도의 베다 신화에 나오는 비와 천둥의 신. 하늘의 제왕으로 몸은 모두 갈색이고, 팔은 네 개이며, 두 개의 창을 들고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 불교에서는 제석천또는 십이천의 하나로 동방의 수호신이다.

Brahma(브라흐마): 인도 철학에서 창조를 주재하는 신이자 우주의 최고 원리로 ‘범梵‘이라고 번역하여 부른다.

Krsna(크리슈나):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영웅신으로 악한 왕을 죽이고 수많은 악귀와 용왕을 퇴치했으며 농업과 목축을 관장했다. 질서의 신 비슈누의 화신化神이라고 전해진다.

개혁자들로 이루어진 청교도 신앙은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을 법한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자기희생은 그 소수의 사람들조차 아주 드문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욕구, 혹은 희망 사항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것은 내게는 아주 힘든 일이며, 혹여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언제나 그 희생은 불완전한 모습에 그칠 뿐이다.

개혁적인 생채가 짙은 종교는 그렇게 좋지 못한 시선을 견뎌 내야 하는 열등감을 가르치고 있다.

‘나의 행동과 삶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아무런 결실도 없이 그냥 쓸쓸하게 사라져 가고 있구나.‘

"정말 슬픈 일이군요. 살다 보면 그렇게 슬픈 일이 많지요. 저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슬픔을 견디려고 애써 봐도 아무 소용이 없으면 포도주를 한 병 마셔 보세요.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면, 머리에 대고 총을 쏘는 방법도 있다는것을 잊지 마십시오."

Josef Englert(엥글레르트)(1874~1957): 헤세의 친구로 직업은 엔지니어. 헤세의 작품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klingsors letzter Sommer》에서 ‘마술사 유프‘로 등장한다.

나는 ‘지도자‘로서의 공명심은 전혀 없지만, 예술가로서의 명예욕이나 자만심에 관한 부분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불교 신자들에게는 열반에 대해 논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열반이 소멸인지 아니면 신과의 합일인지, 또 부정적인 것 혹은 긍정적인 것인지, 축복인지 아니면 단순히 안식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스스로도 그것을 거부하였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열반은 개개인이 완전한 전체로 회귀하는 것이며 개체화의 원리 뒤로 물러나는 구원의 단계, 즉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개개의 영혼이 만물의 영혼인 신에게로 귀의하는 것이다.

상캬라 철학은 처음과 끝이 없는 두 가지 존재, 즉 물질과 정신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몸속에 있으며 우리가 정신 그 자체로 오인하기 쉬운 가장 섬세한 기관(신경계를 말한다)이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변화는 오로지 물질에서만 일어나고, 모든 과정은 물질의 경우에만 진행되는 반면, 정신은 늘 변함이 없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Sankara(상캬라) (700~750): 인도의 철학자로 불이일원론파不二一元論派의 시조이며 《브라흐마수트라 주해》 를 남겼다.

나는 ‘구별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다시 말해서,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의 정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 또 내가 그 체내 기관을 나의 진정한 자아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기쁨과 슬픔의 경지를 초월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면 나에게 환생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육체를 떠남과 더불어 무의식 상태가 시작되어 내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더라도 거기에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나와 물질 사이에 (뿐만 아니라 나와 환생가능성 사이에) 접촉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을 정교하게 분석하며 사색하는 방법은, 가끔씩 명상을 취하는 것과 더불어 희한하게도 요즈음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Sansara (윤회: 고통을 모두 짊어진 채 영원히 생과 사를 되풀이하는 것을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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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포장지를 뜯자마자 드립백 전체적으로 풍기는 진하고 그득한 향이 좋았습니다. 마실 때는 목 뒤로 넘길 때 포장지 맨 밑에 써있는 밤 꿀 맛이 은은하면서 달달하게 느껴졌고 포장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써있는 오렌지와 건포도는 직접적인 맛보다는 미세하게 느껴지는 향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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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종종 사용하는 보통의 언어들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저자의 생각을 통해 느껴볼 수 있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모두 다르지만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은 어느정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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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꿈과 목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나온다. 여기선 각 단어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는데, 내가 느끼기로는 꿈은 상대적으로 상위 개념이고 목표는 꿈을 이루기 위한 중간 과정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하는 것들을 하다보면 작은 목표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자연스럽게 꿈이 이루어진다는 논리(?) 였다. 어떤 의지를 가지고 간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고 간다는 게 저자가 말하는 핵심이었는데, 꽤나 설득력있게 느껴졌고 실제로 저자의 경우에도 이러한 흐름을 따라서 작사가가 되었다고 하니 본인 스스로 자신의 논리를 증명한 셈이다.

이 논리(?)에 설령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자기가 속해있는 분야가 제각기 다르기에 이 논리가 100% 다 맞다고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상당부분 수긍이 되는 얘기였기에 분명 참조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억‘은 ‘추억‘에 비해 감정이 덜 관여돼 있다.

기억은 틀릴 수가 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추억은 틀릴 가능성이 없다. 이미 내가 어떻게 저장하기로 한, 나의 감정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뼈아픈 슬픔도 시간이 흘러 추억이 되기도 하는 것

추억이 인화되어 액자에 넣어진 사진이라면, 기억은 잘려져 나온 디지털 사진이다. 잘리기 전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몰랐던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지나가긴 했지만 소멸되진 않았기에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기억이 익어 추억이 되진 못하지만, 모든 추억은 결국 기억의 흔적이다.

자존감은 근육 같은 거예요. 한 번 높아지면 계속 높아져 있는 게 아니죠. 그냥 높아질 때도 있고 낮아질 때도 있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근육처럼 키워야 해요. 가끔 약해졌을 때는 또 쉬었다가, 다시 운동해서 키우고, 그렇게 반복하는 거죠.

말썽은 아이가 내 뜻대로 굴지 않는 상황을 두고 쓰는 어른 입장에서의 표현이지, 아이에게는 일종의 갈등이다. 나의 의지와 다르게 상황이 흘러감에 대한 저항, 그리고 혼돈의 표현인 것이다.

굳이 상징적인 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거 같긴 해요.

수많은 격언들은 때로 정확하게 서로를 대치한다.
‘모르는 게 약이다.‘ vs ‘아는 게 힘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vs ‘쇠뿔도 단김에 뽑아라‘

나이에 대한 말도 마찬가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풍선과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는 말풍선은 뽀득뽀득소리를 내며 부대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파도를 타듯 자연스러울 때 근사하다

나이가 들어 육체가 약해지는 데에는 분명, 조금 더 신중해지고 조금 더 내려놓으라는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중력이 내게 해주고픈 말을 받아들이면서 다만 너무 아프지 않게 나이 드는 것, 그러나 숫자로 모든 걸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 육체의 유한함 앞에 겸허해지는 것, 이것이 앞으로의 내 나이에 관한 바람이다.

거기에 있지만 거기 있지 않은 것, 당장 손에 닿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아름다운 것. 꿈은, 어릴 때 상상했던 구름과 무지개를 닮았다.

꿈은 어딘가에서 날아온 꽃씨처럼 소리소문 없이 피어났을 때 비로소 꿈이다.

어쩌면 어릴 때 반복적으로 받은 질문 탓에 우리는, 꿈을 목표와 혼동하는지도 모른다.

목표가 지점으로써 존재한다면, 꿈은 장면으로 존재한다.

영화로 말하자면, 목표는 어느 만큼의 관객수를 동원할지, 얼마의 수익을 창출할지 등의 구체적인 ‘수치‘를 다루는 이야기다. 반면 꿈은 미술을 논한다. 어떤 분위기의 장소, 어떤 색깔과 질감의 의상, 또 어떤 종류의 소품에 둘러싸인 주인공.... 즉 나를 상상하는 것이 바로 꿈이다.

훌륭한 목표와 근사한 꿈, 어울리는 수식어도 각각 다르다.

아직 꿈이 없다면 차라리 그대로가 자연스럽다. 꿈은 ‘좋아하는 것들‘이 생겨나고 취향이 생겨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것이다.

내 마음이 끌려 탄생한 꿈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어 작은 목표들을 만들어준다. 마음이 하는 모든 일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이끌 듯 꿈도 그렇다.

꿈은 목표와 성질이 다르기에, 반드시 이루지 않아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도 한다.

작가가 꿈인 사람은 글을 쓸 때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하기 때문에 거듭 글을 쓴 사람은 자연스레 필력이 늘고, 그러다 본격적으로 목표를 세웠을 때 꿈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내게는 음악이 그랬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온몸에 퍼지는 엔도르핀의 기운, 사랑에 빠질 때나 느껴지는 뱃속의 간질거림은 여전히 신비롭다. 그러나 그저 너무 좋았을뿐 구체적으로 목표를 세운 적은 없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음악 쪽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겨 아주먼 변두리에서 중심부로 조금씩 가까워지다 덜컥 지금의 내가 되었다.

작사가가 꿈인 누군가에겐 나의 직업이 구름이나 무지개처럼 닿을 수 없고 그저 근사한 무엇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건 오래된 하루하루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나는 그저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열광하다가 지금의 내가 되었을 뿐이니까. 언제 여기서 당신을 만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구름과 무지개를 만져보고 맛보고 싶었던 어린이의 꿈은 깨어졌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날 기분 좋게 만든다. 떠올리면 행복해지는 꿈을 갖고 있다면, 주머니 속에 넣고 살아가다가 계속 꺼내보았으면 좋겠다. 당장 가서 만질 수 없으니별수 없다고 버리지 말고.

유난스럽다 : 주로 비난의 용도로 쓰이는 이 말은 국어사전에 실린 원뜻으로는 아주 근사한 말이다. ‘보통과 달리 특별한 데가 있다‘(엣센스 국어사전 기준). 이 얼마나 극찬인가!

생각건대, 유난스럽다고 지적받은 적이 있다면 그 부분이 바로 당신을 빛나게 해줄 무언가일 것이다. 그러니 유난스러운 자들이여, 온 힘을 다해 스스로의 특별함을 지키자.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을 해보라

명상을 할 때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초보에게 권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 즉 완벽히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 호흡이 대표적이기 때문이란다.

명상의 목적은 늘 부유하는 잡다한 생각들을 멈추는 데 있다. 이런 생각들 중 대부분은 미세하게라도 과거나 미래에 있다. 다가올 일들에 대한 걱정, 또는 지난 일들에 대한 후회.

참 아이러니하다. 오직 현재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우리인데 정작 생각은 주로 미래나 과거에 갇혀 있으니 말이다.
겪어온 것들(과거)로 인해 생긴 두려움으로 피어오르는 다가올 일(미래)에 대한 걱정.

티벳 승려들처럼 명상의 고수가 아닌 이상, 보통의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생각들을 막을 순 없다. 그럴 땐 가만히 숨을 쉬며 그 생각들을 바라보라고 한다. 신기한 것은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인지하는 것만으로 실제로 스트레스가 반은 넘게 사라진다는 거였다.

현재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것, 어쩌면 명상은 그걸 위해 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을 극으로 본다면 작가는 나고 주인공도 나다.
작가가 위기에 빠진 주인공 곁에 같이 앉아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하고 발을 동동 굴러선 안 되는 법이다. 걱정에 빠진 내 인생의 주인공인 나를 위해 작가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회차로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것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순리에 모든 걸 맡기는 것.

생각에 갇혀 잠 못 이루는 밤, 긴 숨을 쉬어보자. 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만 집중해보자. ‘나는 숨을 쉬고 있다. 이렇게 잘 살아 있다. 걱정에 빠진 나를 구원하기 위해, 가만히 숨을 쉬며 누워 있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된 다음, 주인공을 위한 최선의 다음 화를 써내려가보는 거다. 주인공이 방치될 순 없으니까.

너무 내 탓을 하든 남 탓을 하든, 둘 다 본인한테 정말 안 좋은 거예요. 이것 모두 양날의 검 같아요. 저는 그럴 때마다 자의식을 조절하려고 해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오만이야"

 ‘그래 맞아. 내가 하나 못했다고 큰일이 되고 말고 할 게 아니지‘

뭘 해도 내 탓을 심하게 하지 않고 잘됐을 때도 너무 오만해지지 않고 적절하게 파도 타듯이 살아가게 된 거 같아요.

의도적으로 신경 쓰고,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치우칠 수밖에 없는 자의식 과잉과 결핍의 간극.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완벽히 내 탓인 일도, 남 탓인 일도 없을 것이다.

나쁜 결과를 지울 때는 ‘탓‘이라는 말을 쓰고, 좋은 결과를 지울 때는 ‘덕‘이라는 말을 쓴다. 둘 모두 한쪽에만 치우쳐선 안된다.

매력 있다는 말은, 주관적으로 쓰이면서 다수를 공감하게 만들기도 하는 묘한 말이다. 또 다양한 취향들 사이에 있는 중립지역에 사는 말이다.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오랫동안 서로를 지켜보지 않았을 때 우리는 서로를 평면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충분히 상대를 파악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우연한 순간에 내가 알고 있던 누군가의 평면적인 모습이 갑자기 입체성을 띄게 될 때가 있다.

누군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많은 표현들 중 ‘매력 있다‘는 말은, 한 사람이 가진 여러 면들의 다름이 기분 좋은 밸런스를 이루고 있다는 걸 느낄 때 나오는 말이다.

누군가를 ‘매력 있다‘라고 표현하는 나의 기분조차 좋아지는 건, 한 사람의 다양한 면을 보게 될 때 느끼는 일종의 해소감 때문이다.

나를 규정짓고 있는 프레임을 벗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스스로의 매력을 파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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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독서에서 내향적인 사람은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향으로 인해 주변에서 그들의 공헌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이것은 저평가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어져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한다는 얘기를 봤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의 굴레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그 생각들이 좋지 않은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얘기를 했었다. 이러한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저자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침입할 때 즉각적으로 맞설 것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오늘은 즉각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에 맞서 싸우기 위한 방법들을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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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인생에 언어를 추가하면 세상이 넓어진다‘ 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여기서 저자는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관련한 자신의 견해를 소개하는데, 독자인 내가 여기서 느낀 핵심은 단순히 해당 언어만을 배우는 것 이상으로 자신이 배우려는 언어가 속해있는 나라의 문화까지도 이해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학교에서 독일어를 4년간 배웠음에도 독어에 능숙해지지 못했던 자신과 달리 스페인어를 자주 사용하는 환경에서 일하면서 동료들과 진정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그들의 문화까지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언어를 학습하여 스페인어에 능숙해진 자신의 아들을 비교하면서 자기 견해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이를 통해 외국어를 제대로 배우기 위한 좋은 방법이 바로 바람직한 태도와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외에도 저자는 타지의 언어만이 아니라 외향적인 사람들이 주도해나가는 이 사회에서 내향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향인의 언어‘를 외국어를 학습하듯이 학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얘기는 내가 다른 책에서는 그동안 보거나 듣지 못했던 것이었기에 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본문에서 저자는 외향인과 내향인이 사용하는 언어가 미세하게 다른 점들을 몇 가지 짚어주는데, 이러한 점들을 참조해서 내향인들이 외향인들과 소통한다면 좀 더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타지의 언어인 외국어를 알면 현지 외국인들과 의사소통이 보다 더 편해지듯이 말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타지의 언어처럼 외향인의 언어를 배우는 것에 있어서도 그들과 진정으로 더 가까워지겠다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어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목마른 사람이 먼저 우물물을 판다‘는 말처럼 내향인이 대다수가 되어 주도하는 사회가 아닌 이상 주류 사회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들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데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간단한 예로 우리가 모국어도 아닌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그 언어가 세계적으로 주류 언어이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모국어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기에 힘들고 번거롭지만 배워야 하는 것이다. 만약 해외를 나갔는데 외국 사람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을 전부다 알아듣고 의사소통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굳이 시간들여 돈들여 가며 영어 공부를 할 필요도 없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지 않은가. 외국에 나가서 의사소통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어든 혹은 기타 다른 외국어든 자신이 활동할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하듯이 내향인인 사람들도 마땅히 주류인 외향인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저자의 얘기는 그동안 내향인들이 잘 몰랐을 뿐이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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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내향인이 외향인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 언급한다. 여기서 독자인 내가 흥미롭게 느낀 것 중 하나는 내향인이 외향인의 언어를 배우는 그 과정 자체만으로도 내향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과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외국어의 유창성과는 별개로 외국어를 습득하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두뇌 기능이 향상된다고 말했던 본문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기에 독자인 나는 저자의 얘기에 주저함없이 고개가 끄덕여졌다.

비록 본문에서 글의 구조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내게 이런 미묘한 대칭 구조가 느껴지는 걸 보면 저자가 글을 쓸 때 본문의 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꽤나 신경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독자로서 저자께 감사드린다.

생각을 바꾸면 선택이 바뀌고, 선택이 바뀌면 인생이 바뀔 수 있다. 이게 바로 외향적인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토대다. - P90

스스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할 것 같으면 그 즉시 큰 소리로 "그만해"라고 외치며 강력히 맞서야 한다. 친구가 당신의 부정적인 말을 듣다못해 지쳐 "그만해"라고 말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비슷하게 말해 보라. 부정적인 기운의 악순환은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그 고리를 끊어 내야 한다. - P90

연구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듣기만 해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이건 현실을 무시하는 ‘긍정적 사고‘가 아니다. 부정적인 자기 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진실을 전해줄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 P91

"내가 저지른 실수를 더 이상 곱씹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대신 ‘너‘라는 단어를 통해 스스로에게 지시해야 한다.
"너, 네가 저지른 실수를 더 이상 곱씹지 마. 이미 끝난 일이니 전부 털어 버려." - P91

다음에 더 잘할 수 있기를 바라기만 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말하라.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이에게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해 보라. 그 사람에게 건네는 대답이 곧 당신이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이다. - P91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 그 생각을 애완동물처럼 먹이를 주고 보살피고, 놀아주면 안 된다. 그 생각은 진실이 아니라 그저 마음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임을 인지하고, 그 생각이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완전히 떠나가도록 해야 한다. - P92

자신만의 고유한 기질과 기술을 활용하는 간단한 해결책을 찾아보라. - P92

당신의 내향성에 대해서 무엇이 진실이고, 어떤 긍정적인 점이 있는지 판단해 스스로에게 자주 이야기하기를 바란다. - P92

"나는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능숙하다." - P92

외향적인 세상에서는 당신이 기여하는 바를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타인의 생각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역량에 집중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세계 최고로 거듭나기 바란다. - P93

쓸데없이 지식을 과시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영역을 확실히 꿰고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내향성이 가진 막강한 힘을 발휘하라. 눈에 띄는 사람이 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라. 그리고 당신 스스로를 포장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하라. 이렇게 하면 진정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으며 나아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 P93

그레츠키는 이 마스터 무브가 자신의 플레이의 근간이 될 때까지 연구와 연습을 반복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경기에 나설 뿐이었다. 결국 이 마스터 무브야말로 그가 엄청나게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 P98

그의 가장 큰 강점은 퍽이 어떤 위치에 도달하기 전에 퍽의 경로를 완벽히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마스터 무브‘라 부르는 것이다. - P98

골리앗의 무기에 비하면 별것 아닌 듯하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다윗은 자신의 기술을 마스터했다는 점이다. - P99

내향적인 사람이 자신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앞으로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크게 성공할 수 있다. - P100

각자의 고유한 기질에 적합한 방식으로 이 마스터 무브를 완벽하게 익힌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셈이다. - P100

- 외향인의 언어로 말하는 법 배우기

-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에너지 관리하기

- 부드럽게 설득해 영향력 만들기

- 신뢰 쌓기

- 감성 지능 키우기

- 맞춤형 업무 환경 구축하기

- 의식적인 준비를 통해 성공 보장하기 - P100

내향적인 사람으로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팁과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바로 살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마스터 무브를 먼저 익히지 않으면 우리의 성과는 미미하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즉 마스터 무브를 살펴보는 건 본격적으로 성공에 필요한 기술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우리의 역량을 키우는 작업이다. - P100

우리는 마스터 무브가 제2의 본능이 될 때까지 연습을 거듭할 것이다. 이 마스터 무브를 중심으로 전문성을 쌓으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이 닥치는 모두 대처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환경에서든 자신의 본모습을 버리지 않고서도 ‘고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 P101

인생에 언어를 추가하면 세상이 넓어진다 - P102

단순히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 이상으로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소통이 중요했다. 실제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구축하는 게 중요했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공통의 언어를 익혀야만 했던 것이다. - P104

최대한 빠르고 완벽하게 새 언어를 배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수업을 듣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연습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며 언어를 익히고 또 그 과정에서 실제로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 P104

간단하지만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단어나 문장을 익히면서 시작해 보자. 이를테면 "좋은 아침이에요", "감사합니다", "화장실은 어디인가요?" 같은 표현 말이다. 사람들은 당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릴 테고, 대다수는 당신의 노력을 높게 평가할 것이다. - P105

일단 필요에 의해서라도 차근차근 언어를 익혀 보자. 그 언어를 자주 사용하다 보면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도 깨달을 수 있다. - P105

외국에 나가서 살 때 그 나라 언어에 능통하다면 분명 좋은 점이 많다. 이처럼 내향적인 사람으로서 외향적인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마스터 무브는 2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P105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한 말은 그의 머릿속으로 전달되지만, 그 사람의 언어로 한 말은 그의 가슴으로 전달된다." - P107

우리와 그들이 서로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노력해 주기를 기대하는 대신 우리가 먼저 나서서 주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 P107

인생에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므로 어떤 성과를 원하는지 먼저 판단을 내려야 그 목표를 위해 에너지를 쏟을 수 있다. - P108

외향적인 사람은 말할 때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내향적인 사람은 간결하며 더 적은 수의 단어로 요점을 말한다. ‘많은‘ 단어를 들어 보고 어떻게 ‘적은‘ 단어로 옮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 P109

외향적인 사람은 더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 영상은 정말 훌륭했어요"처럼 말이다.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보다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영상 마지막 포인트가 정말 괄목할 만했어요"처럼 말이다. 외향적인 사람이 "훌륭해요"
라고 말했다면 "어떤 점이 그렇게 훌륭했나요?"라고 더 자세히 물어보라. - P109

내향적인 사람은 ‘혹시‘와 같은 수식어를 자주 사용한다.
외향적인 사람이 "뭐 좀 먹으러 가자"라고 말할 것을 내향적인 사람은 "혹시 샌드위치 먹으러 갈 수 있을까?"라고 말할 것이다. - P109

외향적인 사람은 관계에 대한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상황이나 정보에 대한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 P109

내향적인 사람들을 같은 공간에 모아 두면 뭔가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기름값이 너무 비싸서 차를 바꿔야겠어요" 처럼 말이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흥미로운 주제에 집중한다. 이를테면 "낚시하러가고 싶네요"라거나 "새로 짓고 있는 쇼핑몰에 어떤 가게가 들어올지 궁금해요" 같은 것들이다. - P110

외향적인 사람은 단순히 삶을 즐기는 데 집중한다.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 P110

외향적인 사람은 복수형 단어를 사용하는 편이다. "우리 좋은 곳에 왔네요"처럼 말이다.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저는 이번 행사 재밌네요" 처럼 단수형 단어를 사용한다. - P110

외향적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에 주의를 기울이되 다른 뜻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뭔가 확실하지 않다면 주저하지 말고 명확한 설명을 요청하라. - P110

내가 사는 세상은 대부분의 사람이 외향인의 언어에 능숙하다. 나는 외향적인 사람들의 언어를 공부했고, 그들과 매일 함께 일하면서 친해지기도 했으며 그들의 열정과 추진력, 인간관계와 문화를 학습했다. 그렇게 나도 외향인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됐으나 그래도 내게는 언제까지나 제2언어일 것이다. - P108

외향적인 사람들에게 어떤 단어를 쓰고 어떻게 다가갈지를 결정할 때는 나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무엇이 중요할지를 고려해야 한다. 외향인의 언어를 배우면서 배우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냈을 훌륭한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P111

고통을 느끼는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그러니 동기와 보상도 우리에게 있는 셈이다. - P107

내향적인 사람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재능을 타고났다. 이 능력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완벽한 도구다. - P111

먼저 다른 언어의 중요 단어와 구문을 배우고 연습해 본다. 그다음 우리가 배운 것을 맞게 사용했는지 사람들의 반응을보며 확인한다. 만약 틀렸다면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파악해 다르게 말을 해 본다. 이 일련의 과정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과정을 반복하면 할수록 최고의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 P112

다른 언어를 배울 때 우리는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는 방법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이런 배움의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의 언어를 구사할 때도 자연스레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더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것이다. - P113

인간의 삶은 의사소통의 연속이다. 그러니 어떤 언어든지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배우는 게 중요하다. - P113

우리가 어떤 언어를 적극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다른 문화를 들여다볼 때면 언제나 우리 문화와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차이점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 문화 사람들이 더 실감되고 그들의 사고방식도 더 잘 이해되며 그들과 소통하기도 한층 쉬워진다. 결국 우리는 그들을 보며 "우리랑 비슷한데 좀 다를 뿐이야"라고 깨닫는다. 차이를 인정하면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 - P113

다른 언어를 배우면 두뇌가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능동적 활동인 말하기와 쓰기는 물론이고 수동적 활동인 듣기와 읽기에도 도움이 된다. - P114

우리 뇌의 회백질은 사고력, 집중력, 기억력, 언어 이해력과연관된 부위인데 연구에 따르면 여러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곧 회백질을 단련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 P114

어떤 연구에서는 새로운 언어를 얼마나 능숙하게 익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배움의 결과가 아니라 배우는 과정만으로도 두뇌 기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 P114

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은 내향인에게 최고의 선택은 바로 외향인의 언어로 말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것 이상으로 외향인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우리의 고유한 능력과도 매우 궁합이 좋다. - P114

외향적인 사람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외향적인 사람에게 질문이 있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쉽게 다가갈 수 있다. 혹시 방해가 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 P115

우리는 외향적인 사람인 척할 필요가 없으며 다른 사람 앞에서 그저 본연의 모습을 보이면 된다. 불편함을 느끼는 건거의 우리지 그들이 아니다. 그들의 반응에 마음 졸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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