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표백 세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사유와 생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표백 세대는 소비를 삶의 표현 방식으로 삼는데, 이는 여가와 사교 활동에서 문화예술 및 창작 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이들의 사고와 행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들(표백 세대)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 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 수도 있기에, 이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흉함은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된다.
마르크스는 노예는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보장받는 데 비해 노동자는 그 계급적 지위가 점점 가라앉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표백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보다도 더 한심한 처지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 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표백 세대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순응은 완성된 사회의 시스템과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 판검사나 의사가 되거나 좋은 기업에 취직해 ‘치열하게‘ 살다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목표다. 존경받는 기업인이나 법조인, 정치인들은 거의 다 이 분류에 해당한다. 그런가 하면 ‘고시 폐인‘ , 범죄자와 사기꾼, 실패한 사업가나 장사꾼, ‘악바리‘ 혹은 ‘또순이‘라는 칭찬을 듣는 저소득층도 이 유형에 속한다.
타협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품으면서도 대체로 그에 따라가는 삶의 형태다. 이런 삶의 유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만족을 얻으며 그런 의심을 억누른다. 여가 시간에 봉사활동을 하거나, 권력에 대한 의지 없이 선의로 정당 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행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런 활동이 근본적으로 삶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앞에 오는 것이 아니며, 그런 활동들에 대한 욕구도 따지고 보면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삶의 형태는 완성된 사회에 대단한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권장되기까지 한다.
소극적 저항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나 적어도 그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삶의 형태다. 예술가, 종교인, 전업 NGO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직업인, "패배자라고 불려도 좋으니 아등바등 살지 않고 속 편하게 생활하고 싶다" 라며 교직원이나 하급 공무원, 카페 사장 따위를 꿈꾸는 부류도 이에 속한다.
이들(소극적 저항자)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경멸하지만, 자신들이 완성된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들 중 일부는 경쟁 시스템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런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세속적인 성공을 거머쥐게 되면 언제든지 ‘순응형‘이나 ‘타협형‘으로 태도를 바꿀 준비가 돼 있다.
소극적 저항자들은 대체로 연대를 하지 않으며 사회시스템을 전복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는 한 완성된 사회의 관점에서 대체로 무해하다.
적극적 저항은 사회에 대한 폭력적인 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정의에 따라, 완성된 사회에서 적극적 저항은 이념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적극적 저항자들은 처참할 정도로 논리가 없거나 아니면 일반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채택한다. 프랑스나 그리스 등에서 간혹 보는 방향성 없는 학생 폭동이 전자의 예이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나 대단히 공격적이고 반체제적인 환경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그룹 등이 후자의 예다.
완성된 사회는 이들(적극적 저항자)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으며 이념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적극적 저항자들의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기껏해야 기억에 남는 테러를 몇 건 저지를 수 있을 따름이다.
물을 인정할 수 없는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자살 선언자들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미약한 대가를 사양하며, 완성된 사회를 긍정해 그 구조 안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과 사후에 당할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기대나 선망도 갖고 있지 않다.
기실 완성된 사회는 어떤 사상이나 자존심을 위해 개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완성된 사회는 인간을 하찮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자살 선언자는 그 존재만으로 완성된 사회의 기본 가정을 부수며, 완성된 사회가 완전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자살 선언자는 희고 완벽한 완성된 사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점 얼룩이다.
완성된 사회는 자살 선언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능력이 없으며, 자살 선언자의 행위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자살 선언자들의 목표는 완성된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사회의 천박함과 불완전성을 고발하고 자신들이 품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있으며, 그 방법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 뿐이다. 왜냐하면 봉건시대의 부르주아지와 산업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과 미래가 있었으나 표백 세대와 자살 선언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완성된 사회는 구성원들의 최대 복리를 위해 시스템을 움직이지만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은 영웅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영웅다운 죽음뿐이다.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하찮은 욕망을 채우는데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며 의미 없는 삶을 보내고 우리 세대가 별 볼일 없음을 시인할 것인가, 아니면 담대한 결단으로 그대 안에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우리를 비웃어오던 세상에 충격과 공포를 줄 것인가.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하급 공무원은 사무관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사무관은 국-과장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국-과장은 실장과 차관, 장관 눈치를 살펴야 하고, 장관은 청와대와 여론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데, 여론은 공무원들이 에어컨 바람 쐬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냉방관련 지침을 바꾸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공무원들은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하급공무원들도 그랬고, 국-과장들도 똑같았다. 황당한 지시가 떨어지지 않도록 장차관의 마음을 교묘히 움직이는 재주가 있는 국-과장들이 능력있는 상사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니 느는 것은 눈치밖에 없었다.
잡기가 사실과 진실의 기록일 때에만 거기에서 힘이 나올 것
근처에 있던 네 사람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선언은 그냥 우스갯거리일 뿐이다.
재키는 그들에게 출구를 열어두었다. 4년 뒤에 그들은 한 번 더 선택할 수 있다. 그건 출구가 있다고 말해놓음으로써 예비 선언자들을 더 교묘히 얽어매기 위함이기도 했다. 약속은 그냥 파기해도 되지만, 이 출구를 통해 나가려면 ‘왜 나는 이 세상을 살기로 결심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직장과 직업이 한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짓고, 사회적 신분이 그 사람의 내면과 성격을 좌우하는 것 같았으며,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하는 것은 노동 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임을 자각하며,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른 그 무엇을 원해도 ‘그들‘이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완성된 사회에서 자살은 낙오이며, 낙오자에게 완성된 사회가 해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낙오자 수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은 구조적인 실패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기에 완성된 사회는 그 사실을 알리는 데 인색하다.
"너, 사람이 우울증 약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좀비처럼 돼. 그게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약이 아니라 머리를 멍하게 해서 기쁜 일이고 슬픈 일이고 못 느끼게 만드는 약이야."
"거대한 마귀가 아니라 아주 작은 악마가 이반 카라마조프를 괴롭혔듯이, 나를 그저 우러러보기만 하고 아무 자존감이 없어 보이는 네가 나한텐 골칫덩이였지. 그런데 너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자기혐오에 빠지고 상처받는 사람은 나였거든. 너를 경멸할수록 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지. 너한테는 이상한 매력이 있어.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랑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이런 것 같아. 고통이야. 그러나 그 사랑의 정체가 고통이라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닌 건 아니야. 세상에는 그런 사랑도 있어."
내 남은 삶을 24시간으로 확정한 이제야, 나는 사물을 보다 뚜렷이 볼 수 있게 됐다. 그토록 손에 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너의 모습이 보이고, 너의 생각들이 분명하게 이해되기 시작한다.
나는 너 때문에 죽는 게 아니면서, 너 때문에 죽는다.
너는 내가 끊임없이 좌절하고 절망해야 했던 이유가 내 잘못 때문이 아님을 일깨워줬다. 네가 그런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자책만 하면서 계속 살아갔겠지.
나는 너를 쫓아 죽는 게 아니면서, 너를 쫓아 죽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가 겪고 있는 문제를 안다는 것은 곧 그 자신을 아는 일이었다.
표백 세대의 좌절은 돈이 많거나 적은 것과는 상관이 없어.
숭배자들은 어느 시점이 됐을 때 모두 재키에게 "너한테 나는 무슨 의미냐" 라고 따졌다. 재키는 그런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의심하는 것만큼 나도 너를 의심하고 있어.
"왜냐하면 마음속에 의심을 가진 채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도 나를 의심하지마. 나를 믿고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해."
개인적인 ‘성공 신화‘는 완성된 사회에서도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만, 그것이 사회의 변화를 일으킬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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