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하지만 방법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한다면 ...(중략)... 그건 당신이 충분히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뜻이다.
《인간의 굴레》《달과 6펜스》《어센덴》등 서머싯 몸의 작품에서 되풀이되는 테마가 있는데, 바로 너무 천박하다고 생각해 경멸해 마지않는 상대와 지긋지긋한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을 하는 중에도 상대방을 천박하다고 여기고 그런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긴장 상태가 포인트다.
몸은 그런 괴이한 사랑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마치 재활 노력에 번번이 실패하는 마약중독자나 도박중독자의 상황처럼 묘사하는데, 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어떤 쓰레기 같은 짓을 해도 주변 사람들이 항상 관심을 보이고 매력을 느낀다 ...(중략)... 현실에서 그럴 정도로 재능이나 매력을 갖춘 캐릭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나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정말로 믿고 있나?"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고, 지금 하지 않으면 이 기회는 지나가 버려.
왜 내가 이 기회를 저버려야 해? 다른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닳고 닳아 지금의 내가 아니게 되는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이야.
목숨을 바쳐 추진해야 할 목적이 생기니 지금 얼마나 활기에 차 있는지.
"어떤 일이 위대해지려면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어야 해.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내가 시대정신을 꿰뚫어봤다는 뜻이 되는 거야."
누군가가 손을 비비며 애원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가? 엄청나게 코믹하고 궁상맞아 보인다. 희극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사회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점
믿고 기다려보면 알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일탈할 때조차 정말 독특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회가 궁극적으로 바뀌지 못해도 괜찮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인간의 가치 하락은 인간이 하등의 항의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긴다" _버나드 맬러머드
아이러니했다. 식객이 집주인에게 큰소리치고 있는 꼴이.
딱히 별 이유도 없이, 동정심도 관심도 아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관성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당신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절대 생활이 곤궁하거나 좌절했을 때 자살하지 마라. 그런 때 자살하면 세상은 당신의 선언을 그저 패배자의 개인적인 도피로 여길 것이다. 여태까지 인터넷 자살사이트나 집단 자살자가 그렇게 많았건만 모두 잊힌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자살하든 세상은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겉으로는 괜찮아보였지만 심적 갈등이 심했고 도피처를 찾던 중이었다."라고 우겨댈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참았다가 당신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실행하라. 이 선언이 분명한 사회적 저항임을 전달하려면 그래야 한다.
창의적이면서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길 바란다
시험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티끌만 한 유불리에 부들부들 떨면서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전형적인 고시생의 모습
공감은 하지만 방법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한다면 ...(중략)... 그건 당신이 충분히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뜻이다.
어떤 주장에 대한 찬성과 반대에는 항상 여러 차원과 수준이 있다.
종교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전세계가 6일 만에 창조됐고 또 아담과 이브가 과거에 살다 죽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믿지만 창세기는 창조에 대한 비유라고 타협한다. 어떤 사람들은 매주 교회에 나가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10계명과 예수의 가르침 중 일부는 현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고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라는 고대 유대인을 통한 구원은 믿지 않지만 우주에 하나의 절대 원리가 있고 그를 통한 영적 구원이 가능하다는 점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전부 부정하지만 종교에 사회적 순기능이 많다는 점은 인정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는 신이나 악마가 없이 혼돈 그자체이며 종교를 인류 이성에 대한 거대한 범죄라고 인식한다. 이들 중 어디까지를 종교인으로, 어디서부터를 무신론자로 볼 것인가?
어떤 교회는 자신들의 교리 중 사소한 부분 하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사탄의 자식으로 간주하고 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지옥불로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다.
모든 혁명의 목소리가 처음에 그랬듯이, 우리의 주장은 다듬어져 있지 않다. 아마 당신은 우리보다 더 빈틈없는 논리와, 손실을 줄이면서도 더 효과적인 수행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혁명을 주장했지만, 공산혁명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처한 상황과 이 세대의 운명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넓은 의미의 선언자다.
"그 방식은 과격하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라고 맞서며 우리의 논리를 그 자리에 소개한다면 당신은 선언자다.
우리 세대가 하루하루 좌절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
공격은 언제나 번개같이 빠르고, 위협적이어야 한다.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
오래 달리기 요령 ...(중략)... 보폭을 너무 크게 하지 말고 숨은 짧게 두 번 들이쉬었다가 두 번 내뱉는다.
완성된 사회라는 것은 구성원 또는 계층 간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완성된 사회는 그런 갈등과 모순이 어느 범위 이내에서 더 커지지 않는 상태로 지속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완성된 사회)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 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체제를 위협할만한 심각한 모순이 없는 가운데, 완성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인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사상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일부 진보세력이 대안이라고 내놓는 이데올로기는 기실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 틀 안에서의 미세 수정에 불과하다. 또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과격한 이데올로기 대부분은 그 현실성을 따지기도 전에 논리의 정합성과 일관성에서 절망적으로 유치한 수준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를 포함한 우리 이후의 세대들은 혁신적인 사상을 내거나 시도할 수 없고, 그런 까닭에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표백 세대)에게 지배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 기준만 지니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자유민주주의는 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치 면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수정자본주의는 시장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 척도 한 가지만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치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있는가(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 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가치를 갖고 있는가‘ 가 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사회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가치를 주장할 다른 방법이 없다.
군대를 일으켜 무공을 세우는 일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어긋나며, 단식과 묵상으로 깨달음을 얻는 행위는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를 놓고 벌이는 시합에서도 표백 세대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사회는 가능성이 그만큼 고갈된 사회이기 때문에, 부를 창출하는 능력에서도 성숙한 단계에 있다. 닷컴 열풍, 부동산 시장 활황과 같은 국지적인 성장은 때때로 가능하지만 산업화 초중반에 볼 수 있었던 ‘경제 전반에 걸친 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완성된 사회의 경제성장률은 이론적으로 0퍼센트에 가까워야 한다.
표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 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이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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