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에만 유현준 저자의 책을 무려 5권이나 읽었다. 책들간에 서로 겹치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읽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시간이었다.

오늘 읽는 이 책은 기존의 책들과는 약간 느낌이 다른 책이다. 알라딘 분류 기준으로 내가 앞서 읽었던 책들이 교양 인문학의 범주에 속해있었다면 오늘 시작하는 이 책은 에세이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이 책에 대한 다른 분들의 리뷰를 잠깐 봤었는데 이 책도 저자가 저자의 다른 책들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공간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얘기에 근거해 책의 목차를 살짝 훑어봤는데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공간들도 물론 있었지만 알지 못했던 공간들도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새로운 공간으로의 여행을 떠나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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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p.100, 101에 밑줄친 문장에서 저자의 깨달음을 엿볼 수 있었는데, 여기 일일이 적지는 않았지만 본문에 나오는 간단한 일화들을 통해 저자가 쓴 책에 나왔던 생각들이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쓴 글은 결국 자기가 보고 듣고 배우고 느낀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쓰고보니 당연한 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문득 이런 속담도 생각났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 즉,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다. 이를 조금 달리 말하면 내가 경험한대로 내 말이나 생각이 튀어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래서 가급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느끼려나보다.


p.109에 밑줄 친 이중 벽에 대한 설명은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이 디자인 한 ‘MIT 채플‘이라는 교회의 독특한 벽 구조에 대한 것인데, 이를 통해 소리가 증폭되는 원리에 대해 잠시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사람은 일생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 P13

책, 영화, 음악, 미술 등 예술도 한 사람을 이루는 모태가 된다. 이런 모든 경험이 모여 한 명의 사람을 만든다. - P13

시간을 보낸 공간도 그 사람을 만든다. 이 책은 나를 만든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 P13

우리가 소개팅에 나가서 할 말이 없으면 가족과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본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P13

내가 지내온 공간들과 좋아하는 공간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마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P13

나의 공간을 바라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것 - P14

같은 공간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된다. - P14

‘아는 만큼 보인다‘ - P14

버려진 장난감은 그대로는 별 가치가 없지만,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 세상에 하나뿐인 장난감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나만의 가치,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첫걸음이었다. - P16

우리의 도시는 부서진 장난감 더미와도 같다. 곳곳에 쓸모없는 공간들, 버려진 공간들, 쓰레기 같은 건축물들뿐이지만 그 와중에도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 건축가의 눈으로 보면 도시에는 재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 P16

공간에 나만의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배운다면 이 도시는 새롭게 재창조될 수 있다. 해외로만 여행을 갈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일어나는 여기서도 당신만의 새로운 공간을 ‘발명‘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추억을 만들 수 있다. - P16

이 책을 읽고 여러분만의 공간을 찾고 주변에 나누기를 바란다. 남들이 정한 ‘핫 플레이스‘만 찾아다니는 것은 기성품만을 소비하는 것과 같다. - P17

골목길 계단처럼 별 볼 일 없는 도시의 요소도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 바라보면 특별한 공간이 된다. - P25

동화 속에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파랑새 - P28

건축가 가우디Antoni Gaudi의 마지막 주택 건축물, 카사 밀라Casa Mila. - P31

나는 여전히 보라색을 좋아한다. - P31

계단참은 계단 위층과 아래층을 연결하는 평탄한 공간을 말한다. - P55

과거 학교에서처럼 지금도 계단실은 도시 속에서도 숨겨진 공간이다. 계단실은 주로 창문이 없다. 창문이 없는 공간은 비밀스럽다. 벽으로 둘러싸인 계단실은 때로는 방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계단실은 연인들의 연애 공간으로 쓰이기도 한다. - P58

나는 공간을 감정과 연관시켜 기억한다. 다양한 공간과 그 공간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한의원 약초 서랍처럼 여러 개 있다. - P87

디자인을 할 때는 내가 그 공간에서 어떠한 느낌을 받기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한 후 그 서랍에서 필요한 공간을 찾아 대입하는 식으로 작업한다. - P87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기억들이 나를 먹고살게 한다. - P87

이곳(보스턴의 뉴베리 스트리트)의 특징은 인도의 한 자리에서 두 개의 가게를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 P99

이 거리(보스턴의 뉴베리 스트리트)를 통해 가게 입구의 수가 걷고싶은 거리를 만드는 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5년에 출간한 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쓴 이벤트 밀도 개념은 뉴베리 스트리트 Newbury Street 덕분에 구상하게 된 것이다. - P99

바라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불쾌할 수 있다는 것 - P100

보는 것은 권력 및 인간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 P101

내가 즐겨 가던 가게가 사라지는 것은 일종의 수몰지역 난민이 되는 기분이다. 가게가 사라지면 나의 추억과 그 시절 그 시간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 P101

홍대나 가로수길의 임대료가 비싸서 원주민 가게가 떠나는 것이 안 좋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스타벅스나 유니클로 같은 다국적 기업만이 앵커 테넌트 Anchor Tenant가 아니다. 그 지역에 오래된 가게도 앵커테넌트다. 우리의 기억과 함께 묶여있는 장소가 앵커 테넌트다. - P101

요즘은 우리의 기억들이 각종 홈페이지와 연결되어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내 사진을 올리면 그 공간이 나의 추억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추억이 연결된 장소가 고향이다. 그런 홈페이지가 내 고향이다. 그래서 싸이월드가 폐쇄되었을 때 우리는 일종의 ‘디지털 난민‘이 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 P102

지금 싸이월드가 다시 회복하려고 하지만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싸이월드로 사람이 돌아오게 하는 것은 마치 안 좋게 헤어진 연인이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 P102

벽을 이렇듯 이중으로 만든 것은 음향적인 이유가 크다. 우선 구불구불한 벽은 음을 난반사하고, 바깥쪽 원형 벽과 안쪽의 물결치는 듯한 벽 사이의 빈 공간이 음향적 공명을 만들어낸다. 물결치는 듯한 벽돌 벽은 벽돌 사이에 공간을 두고 쌓아서 벽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으로 소리가 들어가 빈 공간에서 음이 증폭되어 나온다. 그래서 공간이 좁아도 깊이 있는 음향이 연출된다. 우리가 휴대폰의 작은 스피커를 종이컵에 넣으면 괜찮은 스피커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원리다. - P109

공간이 어떠한 시퀀스를 가지고 진입했을 때 최종 공간에 다른 영향을 줄 수 있다 - P112

버려진 공간은 소중하다. 이 공간들은 모두 여러분이 써주기를 기다리는 공간이다. 버려진 공간이 여러분의 상상력과 만나면 대단한 장소가 된다. - P113

공간은 인간관계를 규정한다. - P114

누군가가 내 방을 통해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느낌은 뭐랄까, 회장 비서실에서 잠을 자는 듯한 느낌이다. 공간은 사람의 관계를 규정하는 묘한 힘이 있다 - P115

부부가 같은 방을 사용하다가 한 명이 자리를 비우면 방의 냄새가 달라진다. 남녀가 다른 체취를 가지는데 두 체취가 섞인 것과 혼자만의 것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좀 그로테스크하지만 좁은 기숙사 방의 두 남자는 그렇게 각자의 체취로 공간을 함께 채색하는 밀접한 사이인 것이다. - P116

권력자의 공간은 원래 들어가는 절차가 복잡하다. 회장님 방은 비서실을 거쳐서 들어간다. - P116

1994년 스물다섯 살 때 내 별명은 ‘포틴 아워 fourteen hour‘였는데, 이유는 하루에 열네 시간을 스튜디오에 계속 앉아 있어서였다. 사실 거의 종일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모형을 만들었다. - P119

건축과 학생에게는 기숙사 방보다는 스튜디오 자리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매 학기가 시작되면 스튜디오의 의자와 책상을 꾸미는 데 돈을 아낌없이 썼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가장 많은 삶을 빚는 공간이다. 그곳이 좋아야 그 사람의 삶의 질도 좋아진다. - P119

고산병은 산소가 부족해 온몸이 쑤시면서 아픈 증상이 생기는데, - P127

누구나 머릿속에 가장 멋진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을 실제로 만났을 때는 그 감동이 더 클 것이다. - P129

엑스터 도서관은 거장 루이스 칸Louis Kahn이 미국의 명문 사립고 필립스 엑스터에 설계한 학생 도서관이다. - P131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이 예상하지 못하고 그냥 일상적인 건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안에 있는 반전의 공간에 감동과 충격이 더 컸다. 인생도 그렇다. - P132

전 세계 곳곳에 여러 가지의 피라미드가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티칼은 가장 경사가 급한 피라미드다. 그리고 색상도 가장 어둡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밝은 모래색이고 멕시코의 마야문명 피라미드들은 밝은 회색을 띤다. 그런데 티칼의 피라미드는 거의 검정색에 가까운 느낌이다. 어두운 톤의 색상 때문에 그 어느 건축물보다도 무게감이 느껴지고 급한 경사도 때문에 그 앞에 서면 압도되는 느낌이 있다. - P135

나중에 <아포칼립토Apocalypto, 2006>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 건축물(티칼)의 계단으로 제물로 바쳐진 사람의 목이 굴러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 계단을 기어 올라가서 높은 제단 위에 앉아본 느낌은 대단했다.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이 위에 올라선 제사장은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겠구나‘라고 느껴졌다. 수천 수만명의 사람이 쳐다보는 그 정점에 선 느낌이다. 요즘 세상 같으면 수만 명의 시선 집중을 받는 공연장의 가수나 TV 카메라 앞에 섰을때의 느낌과도 같을 것이다. - P135

건축은 일상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나는 건축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도시에 가서 한 달 이상 살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지역 사람들의 삶과 건축을 하나의 체험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36

호텔에 묵으면서 식당에서 밥을 사 먹어서는 안 되고, 그 동네 시장에서 장을 봐서 음식을 해 먹을 때 비로소 현지인의 마음으로 그도시를 느낄 수 있다. - P136

도시의 주요 장소가 걸어서 연결되어야 하며 다양한 크기의 외부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한 달동안 로마에 있으면서 배울 수 있었다. - P137

여행을 할 때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계획을 세우면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다른 사람이 만든 교과서를 읽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P138

여행을 하면서 그곳에서는 어디가 좋은지 전혀 모른 상태에서 여행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가서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온 경우도 허다하다. 예를 들어 이스탄불까지 고생해서 갔는데 정말 스펙터클한 지하 저수조인 ‘예레바탄 사라이Basilica Cistern‘를 못보고 오는 것 같은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 P138

때로는 예상치 못한 나만의 경험을 얻기 때문에 무계획 여행의 매력을 거부하기 어렵다. 무계획 여행 덕분에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로마의 ‘성 이그나티우스 교회Church of St. Ignatius‘에 있는 안드레아 포초Andrea Pozzo의 그림을 본 것이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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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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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에서 이 책의 전반적인 리뷰와 함께 뇌과학 분야까지 내가 느끼고 생각해봤던 것들에 대해 적어보았고 오늘은 생물학 파트에 나왔던 내용들과 그에 관한 나의 생각들을 적어보겠다.


저자는 뇌과학에서 뇌를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만든 기계‘(p.38) 라고 정의했었는데, 생물학에 나오는 유전자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유전자는 목적의식을 가진 행위 주체가 아니‘(p.123)라고 말하는데 이로부터 파생된 것이 ‘삶의 의미‘와 관련된 얘기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뇌와 지금 여기 생물학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전자 모두 과학의 관점에서는 그냥 물리적 실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뇌과학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이들(뇌와 유전자)에게 주어진 어떤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의미라는 것은 애초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여 결국 삶의 의미라는 것은 과학에서 찾을 수 없기에 개개인이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독자인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이라는 것이 효용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독자인 내가 이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저자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p.127)고 말한다. 즉, 인문학이 각 사람의 어떤 철학적인 삶의 의미를 찾는데 유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과학이 말하기 힘든 부분을 보완하는 보완재 성격으로 인문학을 바라볼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이 부분을 통해 인문학의 쓸모 혹은 유용성에 대해 한 층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본문을 읽으면서 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잘 정리해서 표현했다고 생각한 문장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대단히 복잡하고 독특하게 발전한 생존기계다. 유전자가 명하는 본능에 따라 사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감정을 느끼며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p.128)

이 문장은 앞선 파트였던 뇌과학에서 언급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생존 기계로 지칭되는 물질적 실체인 ‘나‘ 와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철학적 자아인 ‘나‘ , 이렇게 두 종류의 ‘나‘ 에 대해 잘 파악하고 알아가고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주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이어 읽다가 저자가 ‘생물학 이론으로 사회주의 체제가 실패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p.117)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꽤나 눈길을 끄는 얘기였다. 이유인즉, 저자의 정치 성향이 좌파에 가깝다는 걸 독자인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좌파적 성격을 많이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점에 대해 가감없이 논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본문에서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바로 마르크스가 인간의 본능을 너무나도 이상적인 것으로 가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이기적인 본능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무시한 결과로 인해 사회주의가 무너졌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었다.

솔직히 마르크스가 얘기했던 이상대로만 현실 사회가 구현되었다면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없이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문학적 지식 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에 대한 과학적(여기서는 생물학적)지식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사회주의가 실패하게 된 이유를 분석하면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과학적인 사실들을 결코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 역행하여 어떤 일을 추진한다면 잠깐은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인간 본능에 따라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실패 사례가 명백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 나왔던 한 문장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국민 대다수가 ‘태만‘ 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 사회는 혁신과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소련은 미국이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싸우다 졌다.‘ (p.143)

위에서 내가 주저리주저리 적은 내용들보다 어쩌면 p.143에 나온 이 문장이 훨씬 임팩트 있게 느껴지는 건 비단 나만의 느낌은 아닐듯 하다.


뒤이어서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지고 읽었던 사례 중 하나는 바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있는 심사평가원 이야기였다. 이것은 저자가 과거 참여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경험했던 일들에 대해 서술한 것인데, 이 사례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독자들이 보다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사례를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의료서비스 시장에는 환자로 대변되는 의료서비스의 소비자(수요자)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공급자) 이렇게 두 그룹이 있다. 여기서 공급자인 의사라는 역할의 본질은 아픈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지만, 결국 의사들의 뇌 또한 다른 사람들의 뇌와 동일하게 생존이라는 본업에 충실하다는 게 이 사례의 키포인트다. 이러한 생존 본능으로 인해 의사들은 가벼운 처방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과잉진료를 하고 공단에 과다한 금액을 청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사들의 이기적인 본능으로 인해 과잉청구된 금액을 적정한 금액으로 바로잡고 이외의 추가적인 감시감독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 바로 건강보험공단의 심사평가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다보니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감시감독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기관이 있음으로 해서 의사들의 과잉진료로 인한 부담금 과잉청구 같은 불합리한 일들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생존 본능과 관련하여 본문에 나온 임팩트 있는 문장 하나를 소개한다.

‘욕망이 이성보다, 이익이 도덕보다 힘이 세다.‘ (p.144)

개인적으로 이 문장과 관련된 과거의 기억들이 문득 떠올랐다. 과거에 나왔던 고전 소설들(예를 들어 세계 문학 같은 것들)을 읽다보면 등장 인물들이 이성에 입각해서 행동하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행동들을 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데, 이로 인해 파생되는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것들이 생각났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개인적으로 ‘본능을 이기는 이성은 없다‘ 라는 나름의 철학을 갖게 되었는데 이번에 읽게 된 이 건강보험공단 심사평가원 사례를 보면서 본능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잘 만드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추가로 더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런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결국 본능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없이는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덤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문득 이런 말이 생각 났다. ‘아는 것이 힘이다.‘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많이 알면 알수록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이다. 여러모로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도움을 주신 저자께 감사드린다.


생물학 파트 관련 포스팅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다음 포스팅에선 화학 파트에 대해 리뷰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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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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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문과 출신 사람들에게 과학이라는 분야는 뭔가 나와는 거리가 먼 분야 혹은 나랑은 관련없는 분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거라고 본다. 지금 이 리뷰를 쓰고 있는 나 또한 그랬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여타 다른 과목들과는 다르게 과학은 과목자체에 대한 어떤 호기심이나 탐구심보다는 그저 시험을 봐야하니까 그리고 전체 평균점수를 깎아 먹지 않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과학이라는 과목은 그저 시험 때만 바짝 외웠다가 시험 끝나면 머릿속에서 다 휘발되고 사라지는 그런 과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바보같고 어리석은 생각과 태도였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우주에 갈 일도 없는데 왜 우주에 대해 알아야 하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주기율표의 원소들은 도대체 왜 외워야 하는지 그리고 각종 물리공식들은 실생활에서 과연 필요가 있긴 한건가 하는 회의감, 마지막으로 생물학 용어들은 왜 그리 난해하게만 느껴지는지 등등 진짜 과학의 세부분야들에 대해 필요성과 흥미를 거의 느끼지 못했던 게 과거의 나였다. 한마디로 그냥 바보 중의 바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래서 지금도 중학교에서 과학고로 진학하는 과학에 재능이 있는 똑똑한 학생들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이렇게 과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 였는데, 성인이 되고 시간이 지나서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가 우연히 지난 5월경에《최재천의 곤충사회》라는 책을 읽고 과학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씩 샘솟아서 연관된 책을 찾다가 알게 되어 읽게 된 책이 바로《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다.


이 책이 다른 과학 책들과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바로 저자가 문과 출신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여타의 과학 교양서들은 과학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이과 출신의 과학 전공자들이 저자인 경우들이 많은데, 이 책은 저자가 문과 출신이다보니 일반적으로 과학에 익숙하지 않은 문과 출신의 독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쓰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느낌은 전혀 근거없는 느낌이 아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과학 교양서들을 닥치는대로 읽고 공부하며 자신이 느끼거나 생각했던 것들을 서술하면서 문과 출신 사람들이 과학을 접하기 좋은 순서대로 책의 내용을 배치하였다고 말한다.

목차를 보면 일반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덜한 뇌과학부터 시작하여 여기서 파생되는 생물학, 생물학을 이해하기 위한 화학, 화학을 이해하기 위한 물리학, 마지막에는 우주의 언어로 대변되는 수학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호기심을 심화시키는 형태로 목차를 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의 말미에 나왔던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저자는 이 책이 철저히 문과 출신 독자들을 주요 타겟으로 했음을 밝히는데, 자신이 본문에 썼던 내용들 중에 이과출신들이 보면 오류라고 생각할만한 것들이 있을까 두렵다는 고백도 한다. 솔직히 문과 사람인 나의 입장에서는 저자가 본문에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 각종 과학지식들만 소화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간혹 과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비교적 풍부하신 분들이 이 책을 리뷰한 글들을 보다보면 자신이 이미 거의 다 알고 있는 것들이 나와서 이 책 내용의 깊이가 얕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들을 보며 과알못(과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나같은 사람과는 달리 과학에 관심있고 깊이가 어느정도 있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앞서 저자는 이 책을 문과 출신 사람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설정하고 썼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혹여나 저자는 딱히 원치는 않지만 만약 이과출신의 독자들 중에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과학 교양서를 쓰는 분들이 있다면 앞으로 책을 쓸 때 과학을 잘 모르는 독자들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로 이 책을 활용해주었으면 하는 바램도 덧붙인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길었고 본격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독자인 내가 느꼈던 내용들 중 핵심적인 것들 위주로 리뷰를 시작해보겠다.

가장 먼저 저자는 과학공부를 하면서 자신이 오랫동안 공부해왔던 인문학의 토대가 과학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자아를 두가지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물질로 존재하는 ‘나‘ , 다른 하나는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나‘ 이다. 전자의 ‘나‘는 과학의 영역이고, 후자의 ‘나‘는 인문학의 영역이다. 저자는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여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나‘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물질로 존재하는 ‘나‘ 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듯했다. 독자인 나는 이것을 물질로 이루어진 외형이 없는 상태에서 생각이라는 것이 툭 튀어나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는데, 저자께서도 이러한 내 생각에 동의하실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러한 생각들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이러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는 거 자체가 굉장히 심오한 영역을 다루는 것처럼 느껴졌다. 읽으면서 때론 머리가 지끈지끈해지기도 했는데 여기서 어떤 의미를 찾아보자면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예 이런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일텐데, 생각의 폭을 조금이라도 확장시켜보는 시도를 해봤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저자는 ‘공부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과 사회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하는 일이다. 공부를 온전하게 하려면 당연히 과학을 알아야 한다‘(p.8) 라는 말을 하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를 포함한 문과 출신들의 경우 앞에 나온 두 가지인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것에는 익숙할지 몰라도 뒤에 나온 두 가지인 생명과 우주를 이해하는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경우가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을 공부한다면 뒤의 두 가지인 생명과 우주를 이해하는 시각까지 갖추게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눈이 더 크게 확장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게 하는 부분이었다.

또한 ‘먹는 것은 몸이 되고 읽는 것은 생각이 된다‘(p.8) 는 문장도 나오는데, 지극히 문과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나를 이루는 것이 단지 어떤 생각이나 관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물리적인 몸뚱아리(?)도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해준 문장이었다. 문과 출신이라면 상대적으로 어떤 물리적인 실체보다는 관념적인 철학 같은 것에 집중할 때가 많은데, 본문에 나온 이 문장을 곱씹어 읽으면서 인문학과 과학이 따로 별개의 것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이 ‘나‘라는 실체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두 축 혹은 두 날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문을 읽다보면 저자가 읽었던 과학 교양서 중 리처드 파인만이 쓴 책에 나왔던 용어가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거만한 바보‘(p.18) 라는 말이었다. 독자에 따라 이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이 말은 인문학과 과학 중에 어느 한 쪽은 정말 심도있게 알지만 다른 한 쪽 분야에는 무지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 분야에 정통한 관계로 ‘야, 나 이정도 알아.‘ 같은 태도를 보이지만 자신이 아는 분야 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도 마치 자신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내가 공부 좀 했다고 혹은 어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거들먹거리는 모든 인간들을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뭐 딱히 내세울 것도 없긴하지만 독자인 나는 살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지 한 번쯤 스스로를 돌아보고 만약 있었다면 반성하고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저자는 인문학이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망의 산물(p.27)이라는 말과 함께 이것이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때가 인문학의 위기의 때라는 점을 지적하는데, 과학이 최신 지식들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에 비해 인문학은 자신들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갇힌채 안주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새로운 사실을 지속적으로 찾아내려는 과학과 소통하고 교류하려는 노력만이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p.29).

이 부분을 보면서 어떤 학문이라도 화석처럼 굳어지기보다는 역동적으로 살아움직이는 생명체처럼 지속적으로 최신 지식들을 업데이트하면서 진화해나가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건 없다. 모든 건 다 변한다. 변화의 흐름에 역행하지 말고 그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는 것을 저자가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저자는 ‘내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누구인지 어찌 알겠느냐‘(p.30) 는 말을 하는데, 이는 앞서 언급했던 ‘먹는 것은 몸이 되고 읽는 것은 생각이 된다‘(p.8) 는 문장과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고 느껴졌다. 저자는 인문학의 익숙한 질문 형식은 ‘나는 누구인가‘ 인 반면 과학의 질문 형식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말을 한다. p.30에 나온 문장을 좀 더 알기 쉽게 풀어보자면 ‘내가 물리적으로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지를 알고난 뒤에 내가 누구인지, 즉 인문학에서 말하는 철학적 자아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 나온 문장 하나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정신은 물질이 아니지만 물질이 없으면 정신도 존재하지 않는다.‘(p.32)

어쨌든 이 얘기를 통해 과학적인 시각과 인문학적인 시각 두 가지 모두가 있어야 ‘나‘라는 사람의 실체를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과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는 말로도 바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나 자신‘에 대해 반쪽만 알고 나머지 반쪽은 전혀 모른채 살아왔다는 생각에 ‘내 자신‘에게 괜시리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뒤이어 읽다가 문득 자존감이 높아지게 만드는 문장 하나가 나왔는데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내 몸과 똑같은 배열을 가진 원자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p.32)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닌 문장처럼 느껴졌을수도 있지만 독자인 나는 이 문장을 통해 넓디넓은 우주에서 고유한 존재가 바로 ‘나‘ 라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며 ‘나‘ 라는 사람이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표현 방식이 문학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다보니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의미만 놓고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좋은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통일성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문장들도 있는데 몇 가지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내 몸을 이루는 물질은 별과 행성을 이루는 물질과 같다.‘(p.32)

‘지구 생물의 유전자는 모두 동일한 생물학 언어로 씌어있다.‘(p.32)

이 두 문장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어떤 하나의 물체에서 모든 것이 진화했다는 일원론의 생각에 기반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우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는 각기 다를 수 있어도 속에 내재된 근원의 물질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통해 우주를 뜻하는 단어 중 하나인 universe에서 파생된 형용사인 universal이 ‘보편적인‘ , ‘일반적인‘ 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이유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저자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과학은 인문학보다 힘이 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물질의 증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p.32) 는 말을 하는데, 이는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인문학의 성격이 다소 주관적인 반면 과학은 지극히 사실에 입각하여 말하는 객관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어떤 추론이나 추측보다는 명백하고 확실하게 드러난 증거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설령 인문학자라 하더라도 과학이 인문학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워보인다.

하지만 저자가 인문학자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순순히 물러서지만은 않는 듯하다. 저자는 과학이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 힘이 센 것은 맞지만, ‘원자는 생각하지 않지만 원자의 집합인 인간은 생각한다‘는 점을 근거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인문학 둘 다 필요하다고 말한다(p.37). 이는 마치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는 말이 생각나게 한다. 어느 한 쪽이 힘이 쎄더라도 힘이 약한 쪽도 결코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 관계의 모습과 과학과 인문학 간의 관계의 모습이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저자는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근거하여 인간의 뇌를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만든 기계‘(p.38)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뇌는 단지 기계일뿐 이 기계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앞에서 언급했던 과학에서 말하는 물리적인 ‘나‘ 와 인문학에서 말하는 철학적 사고를 하는 ‘나‘ 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말로 귀결된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이고 과학의 이론을 활용하면 인간과 사회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p.39)는 얘기로도 확장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뒤이어 저자는 앞서 언급했던 과학적 질문인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는 뇌다‘ 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대답을 사실을 기술한 문장이 아닌 자아의 거처를 드러내는 문학적 표현(p.47)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뇌를 떠나서는 철학적 자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p.48) 였다고 말한다. 또한 철학적 자아의 모든 감정과 생각은 뇌가 작동해서 생긴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독자인 나는 물질인 뇌와 물질이 아닌 철학적 자아가 서로 얽히고 설켜서 나온 대답인 ‘나는 뇌다‘ 라는 말이 너무나도 가슴 깊이 와닿게 느껴졌다. 얼핏 보면 단순한 대답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의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생각해보면 결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뇌와 관련된 다소 디테일한 내용들이 쭉 나오는데 보다 자세한 내용들이 궁금하신 분들에게는 저자가 본문에 정리해놓은 뇌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직접 책을 구해서 읽어 보시길 추천드린다.

추가로 저자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이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경제학에 나오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든지 한계생산력분배이론 등과 같은 것들을 사용하여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들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뇌에 있는 신경세포의 성질이 경제학에 나오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과 유사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것은 문과출신(경제학과 출신)인 저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이력으로 인해 추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었기에 참으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 중에서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으로 과학자와 인문학자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부분이 있었다. 먼저 과학자는 자신이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만 인문학자는 잘 몰라도 일단 아는 것처럼 둘러댄다는 것이었다(p.68).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저자는 이렇게 둘러대는 것도 인문학의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독자인 나는 이러한 비교를 보면서 위에서 언급했던 과학과 인문학의 특성들이 문득 생각났다. 과학은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기에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 반면에, 인문학은 주관적인 생각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기에 잘 몰라도 일단 그럴싸하게만 떠들어놓고 주관적인 생각이라고 덧붙이면 그만인 것이다. 또한 그 주관적인 생각이 논리적으로만 들어맞는다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더 이상 방해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이후에 칸트의 불가지론, 거울신경세포 등을 비롯한 각종 다양한 과학 지식들을 접하고 배울 수 있었는데, 낯설게만 느껴졌던 과학 개념이나 관련 지식들을 저자가 나같은 일반인들에게 잘 풀어서 설명해 주어서 해당 내용을 이해하기가 조금이나마 수월했다. 마치 저자가 공부했던 과학이라는 재료를 독자들이 먹기 좋게 제공한 ‘요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또한 저자가 인문학자이다보니 맹자, 묵가, 양주학파 등 다양한 철학 사상에 대해서도 함께 소개되면서 과학의 내용과 비교분석해볼 수 있었는데, 이를 보면서 독자인 나는 문과 출신 독자들이 과학에 접근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수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자가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 그냥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맨 앞에서 저자가 문과인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겨냥하면서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뇌과학 부터 접근했다는 얘기를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딱히 근거없는 느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뒤이어 읽다가 ‘사람은 변한다‘ 라는 말과 함께 ‘전향‘ 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전향이라고 하면 ‘무슨 사상을 전향했다‘ 뭐 이런 말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여기서 저자는 이러한 전향이라는 행동을 인문학과 과학 이렇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서 분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인문학에서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과학에서는 이러한 ‘자유의지‘보다는 뇌의 물리적 변화나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되는 것(p.94)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좀 더 설명하자면 뇌의 시냅스 연결망과 연결패턴의 변화로 생긴 현상(p.96)을 전향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인 나는 인문학과 과학이 세상을 보는 관점 혹은 패러다임이 아예 뿌리부터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학이 참으로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한다면 인문학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것에 좀 더 가깝다고나 할까. 다만 여기서 한가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서 쓸모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과학과 인문학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일뿐 어느 것이 더 좋고 다른 것은 더 안 좋고 이런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과학과 인문학의 성격은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들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선 내용들에선 이러한 것들을 그냥 머리로만 이해했다면 지금 이 ‘전향‘ 이라는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면서는 과학과 인문학의 차이를 보다 명확히 마음속 깊이,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추가로 위에서 언급했던 뇌의 시냅스 연결망과 연결패턴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인 도파민에 대한 내용들도 본문에서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이 도파민으로도 인간의 행동을 일정부분 설명할 수 있음을 보면서 과학의 힘이라는 게 과연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감탄을 연발할 수 밖에 없었다. 특별히 최근 커다란 사회문제로 번지고 있는 마약 같은 것도 결국에는 도파민 분비에 혼란을 일으켜 야기되는 문제이기에 과학이 이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상당부분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마약이외에도 사람들의 소비행동패턴 등을 연구하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 등 우리 사회 곳곳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글 중에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패턴에 영향을 준다‘(p.99) 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풀어 쓰자면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p.99)는 말인데, 이 글을 보면서 독자인 나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과학에서 말하는 신경전달물질이 우리의 자아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우리의 생각도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왜 그토록 많은 자기계발서 같은 것들에서 긍정적인 생각이 중요하다고 하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야 신경전달물질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하는 자기계발서가 얼마나 있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독자인 내가 그동안 막연하게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던 것의 과학적 근거를 알고나자 그동안 알고 있던 생각들에 대한 믿음이 좀 더 확고해졌다.

난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 이유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 행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이 책을 통해 과학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다보니 내가 하는 어떤 행동이나 생각들에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재천 교수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지식의 영토‘ 가 확장됨에 따라 넓어지는 지식들과 파생되는 생각들이 내가하는 행동에 대한 이유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데이터도 자아에 영향을 준다(p.97) 는 말과 함께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롭게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p.100) 는 말도 덧붙인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자신의 자아에 데이터를 공급함으로써 자아가 어리석어지는 것을 최대한 늦추고자 애쓰는 저자의 모습을 보며 저자가 과학 공부를 하면서 몸소 느꼈던 것들을 단지 깨닫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을 통해 실천하며 살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멋지게 느껴졌다.

저자는 뇌과학 파트를 마무리하면서 언제가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자신의 행동이 변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자유의지가 아닌 단지 뇌라는 하드웨어가 퇴화된 것이라 여겨달라(p.100) 는 말과 함께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어떤 인간도 무한 신뢰하거나 무한 불신하지 않게 되었다(p.101) 는 말이었다. 독자인 나는 저자의 이 말을 보면서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해볼 수 있었다. 또한 뇌라는 하드웨어의 퇴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는데, 일단은 악과 누추함을 멀리하고 선과 아름다움에 다가서려 노력하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자(p.101) 는 저자의 말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일단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와 뇌과학 파트를 읽으며 느꼈던 생각들을 쭉 적어봤는데, 생각보다 양이 너무 길어져서 이어지는 생물학 파트부터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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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어비앤비 사례가 나왔었는데 오늘은 이에 관한 얘기가 좀 더 이어진다.

이후에 저자는 비즈니스의 본질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컨셉 만들기의 의미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사람은 어떤 시대든 여행을 하고 누군가와 만나고 연결되기를 바라지요. 전 세계적으로 인간관계가 약해지고 많은 선진국에서 1인 가구가 급증하는 가운데, 내가 속할 곳이 있다는 느낌은 앞으로도 점점 더 귀해질 겁니다.

에어비앤비는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새로운 기업이지만, 컨셉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그렇기에 전 세계 사람들이 공감하는 브랜드가 된 것이 아닐까요?

현대의 비즈니스에서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을 통해 그 비즈니스가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기의 시대에 왜 초가 존재하는가. 왜 우주로 향하려 하는가. 왜 커피를 마시는가. 왜 음악을 듣는가. 왜 그 옷을 입는가. 왜 그 책을 읽는가. 왜 타인의 집에 묵는가. 즉, 컨셉 만들기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뜻이지요.

누구나 각각의 범주 안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규칙 아래 경쟁한다면, 오직 차별화만이 쟁점이 됩니다.

겉모습을 꾸미거나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발상 자체를 거부하며 평범함을 사랑하는 ‘놈코어Normcore‘ 스타일

일부러 술을 멀리하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라는 라이프 스타일

사람들은 ‘무엇을 살 것인가‘에 앞서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비즈니스 또한 ‘그것은 무엇인가what‘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why‘ , 다시 말해 존재의 의미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컨셉은 비즈니스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명확한 판단 기준을 부여합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무수한 의사 결정의 연속이지요. 그럴 때 컨셉은 독자적인 판단 기준이 됩니다. 컨셉이 없다면 일반적인 합리성이나 비용같은 수치에만 기대어 결정을 내리게 되겠지요.

컨셉의 두 번째 역할은 만드는 대상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컨셉이 없으면 큰 방향성부터 세세한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적합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컨셉은 고객이 지불하는 ‘대가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소비자는 4분의 1인치 드릴을 원하는 게 아니라, 4분의 1인치 구멍을 바라는 것이다." 라는 경영학자 시어도어 래빗Theodore Levitt의 말

사물 자체가 아닌 사물이 존재하는 의미를 포착한 컨셉은 고객이 돈을 지불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컨셉은 의사 결정의 판단 기준이 되고,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하며, 대가의 이유가 됩니다. 건물을 짓기 전에 그리는 도면처럼 근거가 되어주지요.

만드는 사람에게 컨셉이란 ‘가치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컨셉을 설명할 때 ‘의미‘와 ‘가치‘라는 단어는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의미는 가치에 앞선다‘

색을 겹쳐 윤곽을 부드럽게 흐리는 스푸마토 기법

<모나리자>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11년에 일어난 도난 사건이었습니다.

‘도둑맞은 명화‘라는 의미는 곧 가치로 되돌아왔습니다.

사람은 사물에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가치를 느끼는 존재 - P41

컨셉 만들기란 의미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일 - P41

전체와 부분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컨셉과 구성요소가 ‘왜‘Why‘와 ‘무엇‘what‘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 P44

초보자에게 컨셉을 써보라고 하면 대부분 ‘무엇을 what‘과 ‘어떻게how‘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스타벅스를 ‘여유로운 공간에서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장소‘라고 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부분적인 설명은 가능하더라도 고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떤 음악을 틀어야 하는지 등 다른 요소를 판단하는 기준은 되어 주지 못합니다. 모든 요소를 결정하는 것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니까요. - P45

흔들림 없는 ‘왜‘ 컨셉으로서 경영의 중심에 자리해야만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구성 요소를 각기 다른 시대에 걸맞게 다시 해석하고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 P45

효과적인 컨셉의 4가지 조건

1. ‘고객의 눈높이‘에서 썼는가
2.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이디어가 있는가
3. ‘규모‘를 예측할수 있는가
4. ‘심플한‘ 말로 썼는가 - P50

컨셉은 ‘누구‘를 ‘어떻게 행복하게 할 것인가‘가 명확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뻐하는 고객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는 말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기술을 먼저 말할 것인가, 고객의 입장에서 말할 것인가. 이 2개의 문구를 나누는 것은 관점입니다.

자기만족으로 끝나느냐, 고객의 말로 바꿀 수 있느냐. 바로 여기서 컨셉을 만드는 사람의 실력이 드러납니다.

나 또는 내가 속한 팀만의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디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에는 의미가 없다

브랜드의 고유한 의미를 파악했다

모든 면에 능한 사람은 컨셉을 쓰기 어렵다

상식이나 절대 선을 컨셉으로 삼고 싶어 하는 이유는 누구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받기 위해서는 때로는 미움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에어비앤비의 ‘전 세계 어디든 내 집처럼‘도, 스타벅스의 ‘제3의 장소‘도,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결정하는 동시에 어떤 사람이 대상에서 제외되는지를 명확히 드러내지요.

"모두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면 결국 아무도 기쁘게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큰 사랑을 받으려면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컨셉을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각오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비즈니스의 컨셉은 어느 정도 규모가 보여야 합니다.

해당 컨셉으로 비즈니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규모가 보장되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몰두해야 할 지점은 감동을 극대화하는 것

시장의 성장이 더딜 때는 더 많은 고객이 있는 시장으로 이동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됩니다.

타깃 고객이 바뀔 때, 바로 그때가 컨셉을 대대적으로 바꿀 타이밍입니다.

컨셉은 자기 혼자 읽고 만족하는 시詩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비즈니스의 목표와 대조하며 검증해야만 좋은 컨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객의 눈높이에서 쓰였고, 아무리 독자적이며, 아무리 규모를 예측할 수 있다 해도 말이 쉽고 간결하지 않으면 컨셉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컨셉은 쉽게 이해되고 기억할 수 있으며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최대한 짧고 쓰기 쉬운 문장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기호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면 당연히 조직 내에서도 원활하게 공유되지 않습니다. 말이 복잡하면 애써 만든 컨셉일지라도 제안한 사람을 넘어 널리 퍼져나가지 못하지요.

군더더기를 버리면 ..(중략)..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체온을 뜨겁게 만드는 말인가‘

제안자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잔뜩 들뜬 모습으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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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천문학의 필요성에 대한 내용이 나왔었는데 오늘은 이에 더해 점성술에 관한 내용들도 나온다.

해와 별은 계절, 식량, 기후를 다스리고 달은 바다의 조수간만과 여러 동물의 생활 주기 그리고 인간의 월경 주기를 다스린다고 생각했다. 자손의 번성에 목말라 하던 종種에게는 월경의 주기성이 아주 중요한 관심사였을 것이다. - P112

월경의 영어 표현인 ‘menstruation‘의 어원은 달을 뜻하는 ‘moon‘ 에 닿아 있다. 순수 우리말 표현인 달거리 에서도 우리는 ‘달을 볼 수 있고, ‘월경月經의 ‘월月‘ 역시 달을 뜻한다. - P111

하늘에 해, 달, 별 말고 또 다른 종류의 천체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들을 ‘떠돌아다니는 별‘이라는 뜻에서 통틀어 행성行星, planet이라고 불렀다. - P112

행성들은 우리에게 멀리 있는 별들이 이루는 고정된 별자리를 배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달에 걸쳐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관찰해 보면이 별자리에 들어 있던 행성이 저 별자리로 이동하고 가끔은 느릿느릿
‘공중제비‘를 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하늘의 여러 천체들이 모두 인간의 삶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겼다. 해와 달은 물론 별 또한 계절의 오고 감을 알려주지 않는가? 그렇다면 행성들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점성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P112

점성술에 따르면 사람의 운명은 그가 태어날 때 어느 행성이 어느 별자리에 들어 있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수천 년 전부터 행성의 움직임이 국왕과 왕조와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 P113

점성술사는 행성의 운동을 연구한다. 예를 들자면 지난번에 금성이 염소자리에 들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보고 기억해둔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도 그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겠는가를 점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자신이 아주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 P113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성술사는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정식 점성술사가 아닌 사람이 함부로 하늘의 뜻을 읽는 일은 중죄로 다스리는 나라가 많아졌다. 왜냐하면 현 체제를 전복시키려면 국왕의 몰락을 예언하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황실 점성술사가 틀린 예언을 한죄로 사형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실제 사건과 딱 맞아 떨어지도록 사건이 벌어진 뒤에 아예 기록을 뜯어 고친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점성술은 관찰과 수학, 철저한 기록과 엉성한 생각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거짓말이 묘하게 뒤섞이는 가운데 발달했다. - P113

점성술의 역사가 얼마나 긴지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단어의 어원에서 알아볼 수 있다. 재해를 뜻하는 ‘disaster‘는 그리스어로 ‘나쁜 별‘이란 뜻이고, 유행성 감기를 뜻하는 ‘influenza‘는 이탈리아어로 별의 ‘영향‘을 뜻하는 ‘influence‘에서 온 말이고, 건배를 뜻하는 ‘mazeltov‘는 히브리어(본질적으로는 바빌로니아어)로 ‘좋은 별자리‘ 다. ‘shlamazel‘ 이라는 이디시 어는 악운이 끊이지 않고 겹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 역시 바빌론의 천문학 용어에서 나왔다. - P114

플리니우스Plinius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에는 ‘sideratio‘ 라 하여 ‘행성에 얻어맞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 인들은 행성을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여겼던 것이다. 여기에서 ‘고려하다‘는 뜻의 ‘consider‘를 살펴보는 일도 유익할 것이다. 이 단어는 ‘행성과 함께‘라는 뜻인데, 진지하게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행성을 함께 고려했어야 했나 보다. - P115

국가 단위의 점성술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만, 개인의 운수를 가늠하는 점성술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횡행한다. - P115

서양 점성술에서는 사람이 출생할 당시 각 별자리의 위치를 그 사람의 천궁도天宮圖, 즉 호로스코프horoscope라고 한다. - P115

이런 ‘예언‘은 예언이라기보다 충고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라."라는 식이지,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이다."는 아니다. 그리고 일부러 일반적이고 아주 모호한 표현을 써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게 한다. - P115

점성술의 실효성 여부는 쌍둥이의 삶을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 P116

점성술사들이 내리는 예언을 잘 조사해 봤더니, 사람의 태어난 시간과 장소만 가지고는 그의 성격이나 미래를 예측하지 못함을 알 수 있었다. - P116

지구라는 행성 위에 있는 국가들의 국기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 P116

모든 국기 중 거의 절반 정도에 천문학적 상징물이 들어 있는 셈이다. 이것은 문화권을 초월하고 사상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볼 수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 P117

저마다 하늘의 힘과 영원무변함을 현 국가 체제에 빗대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코스모스에 연줄을 대고자 안달을 하며 산다. 우리도 그 큰 그림의 틀 속에 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말‘ 연줄이 닿아 있었다. 그 연줄은 점성술이 둘러대는 식의 개인적이고 자잘하며 상상력이 결여된 그런 수준의 관계가 아니었다. 인간과 코스모스의 관계는 물질의 기원을 통한 관계이다. 그것은 생명을잉태할 수 있는 지구, 인류의 진화 그리고 우리의 운명이 걸린 지극히 심오한 연줄인 것이다. 
- P117

현대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점성술도 따지고 보면 그 기원이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 Claudius Ptolemaeus에까지 올라간다. - P117

프톨레마이오스는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일하던 대학자였다. 이러저러한 행성이 여차저차한 해의, 또는 달의 "집"에 올라섰다는 둥, "물병자리의 시대"라는 둥의 난해한 점성술 풀이들이 다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나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내려온 점성술 전통을 체계화했다. - P118

프톨레마이오스는 사람의 언행이 행성과 별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키, 얼굴색, 성격, 게다가 선천적인 장애도 별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 P118

천문학은 과학이고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는 학문이다. 점성술은 사이비 과학으로 확고한 근거 없이 여러 행성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 P119

천문학자로서 프톨레마이오스가 이룩한 업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 줬고 그들의 밝기를 기록하여 목록을 만들었고 지구가 왜 구형인지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했으며 일식이나 월식을 예측하는 공식을 확립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아마도 행성들의 이상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의 모형을 제시한 것이리라. 그는 행성 운동의 모형을 개발하여 하늘의 신호를 해독하고자했다. - P119

프톨레마이오스는 하늘을 연구하면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는 그것을 "나는 한갓 인간으로서 하루 살고 곧 죽을 목숨임을 잘 안다. 그러나 빽빽이 들어찬 저 무수한 별들의 둥근 궤도를 즐겁게 따라 가노라면, 어느새 나의 두 발은 땅을 딛지 않게 된다."라는 기록으로 표현해 놓았다. - P119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다. 지구 중심의 우주관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땅은 안정되어 있고 단단하고 고정적인 데 반하여 그 외의 천체들은 매일같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지구 중심 우주관이 하나의 보편타당한 자연 진리로 서슴없이 받아들여졌다. - P119

이 시점에서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가 남겼다.는 기록을 다시 읽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따라서 달리 교육을 받지 않는 한 누구나 ‘지구는 커다란 집과 같다. 그 위를 덮고 있는 둥근 천장이 하늘이고 집과 천장은 고정되어 있다. 천장 안에서 매우 작은 태양이 새가 허공을 누비며 날아다니듯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지나가는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P120

고대 이집트인들이 화성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이름들 중에는 "세크데드 에프 엠 케트케트sekded-ef em khetkhet"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거꾸로 가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거꾸로 가거나 공중제비를 넘는 듯한, 화성의 겉보기 운동이 갖는 특성을 의식해서 붙인 이름이 틀림없다. - P120

가뭄, 역병, 사상 간의 무서운 대립 속에서 허덕이던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만병통치약은 미신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오로지 변함없어 보이는 것은 별들뿐이었다. 그래서 공포에 질린 유럽 인들의 집 안뜰과 선술집에서는 고대의 점성술이 번성했다. - P126

정다면체는 다른 정다면체 안에 꼭 맞게 들어갈 수 있다. 정다면체들의 이러한 관계가 태양과 행성들 사이의 거리를 결정한다면 완전한 형상인 정다면체를 통해서 행성의 상대 배치에 숨겨진 근본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 P128

"이 지루한 과정에 진력이 나시거든, 이런 계산을 적어도 70번 해본 저를 생각하시고 참아 주십시오." - P137

기원전 6세기의 피타고라스로부터 플라톤,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케플러 이전까지 살던 기독교 세계의 천문학자들은 모두 원이 ‘완벽‘한 기하학적 도형이므로, 행성들은 마땅히 원 궤도를 따라 돌아야 한다고 믿었다. 행성들은 하늘 높이 자리 잡고 있어, 이 땅의 ‘부패‘로부터 거리가 먼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신비와 ‘완벽‘을 겸비한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P137

갈릴레오, 튀코 브라헤, 코페르니쿠스도 행성이 운동하는 길은 원이라고 못박아 두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원형이 아닌 궤도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라고까지 단언했는데, 왜냐하면 "최상의 모습으로 창조된 신의 피조물을 감히 불완전하다고 여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 P137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케플러도 지구와 화성이 태양 주위를 원 궤도를 따라 돈다고 간주하고 튀코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이해하고자 고심했던 것이다. - P137

거룩한 분의 섭리로 우리는 튀코 브라헤라는 성실한 관측자를 가질 수 있었다. 그의 관측 결과는 …………… 이 계산의 오차가 8분이라고 판단해 줬다. 하늘이 주시는 선물은 감사히 받아들여야 마땅하거늘. 내가 8분의 오차를 모른 체할 수 있었다면 나는 내 가설을 땜질하는 식으로 적당히 고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시될 수 없는 성질의 오차였다. 바로 이 8분이 천문학의 완전 개혁으로 이르는 새로운 길을 내게 가르쳐줬던 것이다. - P138

원 궤도와 실제 궤도를 분간하는 일은 우선 측정값이 정확해야 가능했고 비록 자신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 측정값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 P138

원 궤도와 실제 궤도를 분간하는 일은 우선 측정값이 정확해야 가능했고 비록 자신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 측정값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 P138

"어디나 조화로운 비율이 장식처럼 박혀 빛나는 이 우주이지만, 그러한 조화의 비율도 경험적 사실에 반드시 부합해야 한다." 케플러는 여기서 원 궤도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성한 기하학에 대한 그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영혼에 가해진 충격을 감수해야만 했다. - P138

케플러는, 천문학이라는 마구간에서 원형과 나선형을 쓸어 치우자, "손수레 한가득 말똥"만 남았다고 했다. 원을 길게 늘인 달걀의 모습(타원)을 그는 이렇게 말똥에 비유했던 것이다. - P138

결국 케플러는 원에 대한 동경이 하나의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구도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대로 과연 하나의 행성이었다. 그리고 케플러가 보기에 지구는, 전쟁, 질병, 굶주림과 온갖 불행으로 망가진, 확실히 완벽과는 아주 먼 존재였다. 이런 지구를 완벽하다고 믿었다면 나머지 행성들도 완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행성들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케플러는 고대 이래 행성이 지구처럼 불완전한 것들로 구성된 물체라고 이야기한 몇 안 되는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만일 행성이 ‘불완전‘하다면, 그 궤도 역시 불완전하지 않겠는가? - P139

케플러는 달걀 모양 곡선을 여럿 시험해 보았다. 열심히 계산해 내려가다 산술적 실수를 하기도 하고 (그래서 옳은 답인데 틀린 것으로 여겨 버렸고) 몇 달 뒤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타원의 공식을 이용하여 분석을 다시 시도했다. 그 공식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페르가의 아폴로니우스가 처음 만들어 낸 식이었다. 결과는 튀코 브라헤의 관측값과 완전히 일치했다. - P139

"자연의 진리가, 나의 거부로 쫓겨났었지만, 인정을 받고자 겉모습을 바꾸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들어왔으니・・・・・・ 아, 나야말로 참으로 멍청이였구나!" - P139

케플러는 이렇게 해서 화성이 태양 주위를 공전할 때 원 궤도가 아니라 타원 궤도를 따라 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행성들의 궤도도 타원이기는 하지만 화성의 궤도보다 훨씬 더 원에 가깝다. 튀코 브라혜가 화성이 아니라, 예를 들어 금성의 움직임을 연구해 보라고 부추겼다면 케플러는 영영 행성의 진짜 궤도 모양을 발견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 P139

태양은 타원 궤도의 중심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중심을 조금 비껴나간 초점에 자리한다. 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행성은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행성이 태양에서 가장 먼 곳에 이르렀을 때 궤도 속도가 가장 느려진다. 이러한 운동 때문에 행성이 태양을 향해 떨어지는 중이지만, 절대로 태양으로 곤두박질하지는 않는다. - P139

행성의 운동을 규정한 케플러의 첫 번째 법칙을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제1법칙, 행성은 타원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태양은 그 타원의 초점에 있다. - P140

일정한 속도로 원 운동을 하는 행성이라면 중심각이 같은 부채꼴의 호로 또는 그 부분의 원둘레를 도는 데 같은 시간이 걸린다. - P140

타원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행성과 태양을 이은 선은 타원 내부에서 부채꼴 형태의 영역을 쓸고 지나간다. - P141

행성이 태양 가까이 있을 때 주어진 시간 동안 행성과 태양을 이은 선은 호의 길이가 길어 넓적한 모양의 부채꼴을 그리며 간다. 그러나 부채꼴의 넓이는 호의 길이만큼 크지는 않은데 이것은 행성이 태양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행성이 태양과 멀리 떨어져 있을때에는 행성과 태양을 이은 선이 역시 같은 시간 동안에 훨씬 짧은 호와 뾰쪽한 모양의 부채꼴을 그리지만 부채꼴은 더 넓게 펴진다. 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케플러는 궤도가 아무리 심하게 찌그러진 타원이라도 이 두 넓이가 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P141

행성이 태양과 멀리 있을 때의 길고 뾰족한 부채꼴의 넓이는 행성이 태양과 가까이 있을 때의 짧고 넓적한 부채꼴의 넓이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것이 행성의 운동을 규정한 케플러의 두 번째 법칙이다.

제2법칙,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동경은 같은 시간 동안에 같은 넓이를 휩쓴다. - P141

우리는 중력이란 힘으로 지구 표면에 붙어서 우주 공간을 날아다닌다. - P141

행성 탐사를 목적으로 우주라는 이름의 바다에 진수시킨 인공위성들의 궤도 운동, 쌍성계를 이루는 두 별의 상호 궤도 운동 그리고 외부 은하들의 운동 등을 살펴보면 케플러의 법칙이 어디에서나 성립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온 우주 어디에서나 천체들은 케플러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 P142

케플러는 "조화 harmony" 라는 한마디 말로 그가 알고 있던 많은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행성 운동에서 볼 수 있는 질서와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을 기술할 수 있는 수학적 공식의 존재, 게다가 음악에서의 화성음 등을 "조화"라는 개념 속에 포함시켰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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