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지성적 회심 - 과학, 신앙, 의심의 길을 걷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홍병룡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21년 4월
평점 :
오늘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저서 〈지성적 회심〉에 대해서 나누려고 한다. 처음 제가 그의 저서를 보게 된 책은 2003년 IVP출판사를 통해서 출간된 ‘자존감’이었다. 이 책은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에 대한 내용이 담긴 훌륭한 저서였다. 이 후 그의 책을 사서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의 이력과 저술들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분이다. 특히 우리가 이번 출간된 지성적 회심에 대해서 기대하는 점은 앞서 저자가 출간하였던 여러 책에서 애기되었던 그가 과학자에서 신학자가 된 배경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그의 저서는 ‘복음을 통해서 한층 더 넓게 세상을 보게 된 자기의 신앙고백서’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책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과학을 사랑하는 불안전한 자유사상가이자 무신론자였던 내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해 가는 여정을 다룬 책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p.8).
실제로 저자는 자신의 회심과정을 전기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과학을 시작으로 무신론, 마르크스주의, 플라톤 철학, C. S 루이스의 글을 접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모든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가고 있다. 이제 그가 걸어온 삶의 과정 속에 드러나게 될 지성적 회심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책의 구성을 보면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2부는 그의 성장과정과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탐구와 갈등하는 과정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다. 3부는 신앙을 갖게 된 이후 갖고 있었던 고민들이 해결되는 과정들이 기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1·2부 과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조금 힘들었다.
1장은 ‘불안정하고 초조한 자유사상가’라는 소제목을 중심으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을 상당히 좋아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의 탁월함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같다. 그는 어린 나이에 천체망원경을 만들어 우주를 보았다. 이때 그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계는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후 그는 세상을 보다 객관적이고 확실한 것에 대해서 알길 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소디의 도서관에서 C. P. 스노우의 첫 소설을 통하여 ‘화란정원’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이 개념의 의미는 혼란스러운 정글에 가져다준 질서와 구조를 통해서 정돈된 정원과 같이 보이게 만드는 이론이다. 이전까지 그는 과학 이론의 장점에 대해서 모호하고 흐릿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스노우의 저서를 통해서 더 정확하게 밝혀주었다(p28~9). 이 후 그는 더욱 종교에 대해서 구식 관념으로 여길 정도로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종교는 과학에 의하여 망상으로 드러난 과거의 해로운 유물로 여겼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가지게 된 종교에 대한 견해는 책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러셀의 성향철학사와 북아일랜드 사건은 통해서 그는 종교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무신론이야말로 과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자연스레 도달하는 결론이라고 여겼다.
이후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심취하게 되었다. 이때 마르크스주의는 종교로부터 멀어진 그의 입장을 지적으로 정당화시켜 주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책을 보면서 그는 ‘큰 그림’의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곧 인정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체에 대한 갈급함은 지속되었다. 이런 자신의 입장을 플라톤이 사용한 ‘동굴의 비유’ 속의 사람들을 예로 들어 절적하게 표현하였다.
2장은 ‘뜻밖의 회심’이다. 그의 회심은 옥스퍼드 대학을 입학하던 때에 일어나게 된다. 어느 날 채플 때 찰스 쿨슨의 설교를 통해서 그동안 그가 그토록 목말라했던 큰 그림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찰스 쿨슨이 했던 설교의 논점은 과학과 종교적 신앙은 모두 제 각자 독특한 접근법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이해하는데 필요한 통찰들을 제공하여 준다는 것이었다. 이 무렴 그는 친구의 권면을 통해서 C. S 루이스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가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나는 해가 떴다는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는다. 눈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가 찾아왔던 ‘큰 그림’을 향해 먼저 걸어간 동반자를 찾았다. 이 후 그는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며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이 후 영국교회로부터 안수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짧은 시간동안 교회사역을 한다. 그는 과학과 신학에 대한 탐구를 병행하면 할수록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과학에 대한 철학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게 된다. 특히 앞서 말씀드린 칼 포퍼의 과학철학 접하면서 그의 과학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
나는 칼 포퍼에게 시선을 돌려 그의 저술을 긍정적으로 면밀하게 읽었고, 특히 그의 에세이 '반증으로서의 과학'과 그의 책 '과학적 발견의 논리'가 인상적이었다. 만일 포퍼가 옳다면, 모든 과학 지식이 잠정적이고 추측적이고 가설적이라는 거북한 실재를 받아들이는 법을 나는 배위야 했다. 우리는 우리의 과학 이론들의 결정적인 증거를 결코 제시할 수 없고, 기껏해야 이론들을(잠정적으로) 확증하거나(확정적으로) 논박할 수 있을 뿐이다(p.70).
마지막으로 3장은 오랜 질문과 새로운 통찰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런 그에게 칼 포퍼의 ‘반증 가능성’의 개념은 그의 사고를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그가 언급한 것과 같이 과거에 정립되었던 과학 이론들이 이 후에 등장한 새로운 등장한 이론들에 의해서 모두 폐기되었다. 결국 모든 과학 이론은 반증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는 세상과 과학을 넘어 존재하는 것을 어느 누구도 밝혀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의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믿음을 선택하는 순간 그동안 그가 그동안 고백하였던 어렴풋한 느낌이 사라지고 실재를 경험하고 그 실재를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순간 그는 C. S 루이스의 책 제목대로 예기치 않은 기쁨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다름 아니라 실재를 다시 상상하라는 초대, 보다 폭넓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라는 초대, 상상력을 발휘해 새로운 형판을 채택하라는 초대,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실재를 뚜렷이 보여줄 망원경을 통해 보라는 초대였다(p.97).
그런데 그에게 또 다른 고민을 하게 된다. 과연 신앙을 가진 자로서 과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될 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는 실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다양한 시선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인간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에 대해서 서로 다른 관점으로 상호보완을 해야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 보지 못하는 부분은 과학이 밝혀주고 과학이 보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의 고민에 대한 결론이다.
이 책을 통해서 복음에 대한 큰 그림을 제공받길 원하는 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 과학과 종교가 대립하는 것이 맞는 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분 아니면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분에게 추천하여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