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 - 사로잡힌 영혼들의 이야기
비비언 고닉 지음, 성원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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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미국과 공산주의자라니...이런 말도 안되는 조합이 어디있을까?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자가 비비언 고닉이라고? 아니, 내가 아는 고닉이 맞아? 그 [사나운 애착]과 [멀리 오래 보기]의 작가라고? 그 두 권의 책은 여전히 내 책장에 꽂혀있지만 이 책과 나란히 하리라곤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물론 내가 고닉에 대해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다면 전작들도 모조리 챙겨 읽는 열정이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 책 [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는 비비언 고닉이 1970년대에 미국에서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수십 명을 인터뷰한 책이다. 무려 1977년도에 펴낸 책이라니. 그 책이 2020년에 새로운 서문을 덧붙여 재발간 된 것이다.


난 예전부터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오해를 한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가 가진 근본 철학은 모른 채 그것을 물려받았다고 자신하는 정권에 속아서 억압당하고 착취당해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려 우리가 페미니즘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과 오해를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진짜 공산주의, 진짜 페미니즘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것과 무척 다른 것은 아닐까? 억압과 통치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굴레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자본의 가치에 잠식 당하거나 돈만을 위해 평생을 내쳐지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해주는 것...


비비언 고닉은 뉴욕 브롱크스 좌파 노동계급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틈새에서 성장했다. 그녀가 친구들과 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때 이해할 수 없다는 그들의 표정이 상상이 되어진다.


고닉은 서문에서 이야기한다. 공산당원인 된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헬레네와 같은 존재라고 말이다. 인간에게 존재하는 가장 극심한 갈망이 공산당이라는 페르소나를 뒤집어쓴다. 그리하여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하는 욕망에 허기가 붙는다. 그 허기가 공산당원에게 따라붙어 떨어지지않지만 나중에는 그 허기가 그들을 살게 했다고 말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의 중심에는 바로 갈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 이제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 수있다. 정의와 공정에 대한 갈망, 인간다움에 대한 갈망으로 사람들은 촛불을 그리고 응원봉을 들었다.

잘못된 것은 모두가 알지만 용기있게 지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의 안위와 영달에 대한 생각에만 사로잡혀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았을때 온 국민이 어떤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가? 자칫하면 나라가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더 많은 과제가 남아있지만 두 손에 불을 드는 시민들이 있는 나라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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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뇌 문학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문학적 성찰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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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 방대한 양의 책을 보았을때 좀 두려웠다. 더군다나 제목이 [눈 뇌 문학] 이라니... 생물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 더 나아가 문학적 지식까지 고루 갖춰야 비로소 이해될 것같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하나 하나 읽어가다보니 그동안 안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깊이있게 통찰하지 못했던 것들의 총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두고 두고 읽을 만한 철학 서적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본다는 것의 의미를 폭 넓게 독자에게 말해주고 있다. 작가에게 어느날 찾아온 안구건조증과 비문증이 본다는 것의 서막을 열었으며 러시아 문학을 바탕으로 그것은 더한 깊이로 통찰이 되었던 것이다.

시각을 상실한다는 경험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지만 보는 일이 결코 시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뇌로 본다고 생각하면 단순히 눈이라는 살덩이를 넘어서서 인간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이란 바로 제대로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하지만 보는 것이 아는 것이라는 담론은 일반화하기에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는 본다는 대상이 무척 다양화되었으며 기호화를 통해 보고 인지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볼 수 없는 것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감각과 인지가 시각이라면 본다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마저 보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시각의 위대함이라고 말이다.

정말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뇌로 본다는 것은 어떤 말일까? 더 나아가면 우리는 뇌를 넘어서 보는 것이다. 시각이 부재해도 뇌만 존재해도 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자체의 의미 설정을 달리한다.

저자는 눈의 탄생부터 윤리에 대한 문제, 환상, 창조하는 눈, 신과 마주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리에 도착에 이르기까기 각 챕터별로 일목요원하게 그 주제를 놓치지않고 한 곳을 향해 써 나갔다.

책의 내용 중 동물들도 프라이버시가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내용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감각은 각성이라는 것. 깊이 안다는 것은 종교적 행위라는 것. 진심으로 본다는 것은 각성을 의미하며 그것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 등은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깨달음이었다.

두 눈을 갖고도 잘 못 보는 현실, 진실이 존재해도 외면하는 것. 정말 우리는 잘 보고 있는 것이 맞을까? 시력은 있어도 장님으로 사는 사람이 많은 현실은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다시금 오래 곁에 두고 곱씹어보고픈 책을 만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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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무서운 꿈을 꾼다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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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무서운 꿈을 꾼다』​​

우사미 마코토 (지음) |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 (펴냄)

누구나 이불킥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선택을 했어야하는데...반면 이런 선택은 하지 말았어야했는데...하는 것. 하지만 인생이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우연과 필연이 왕복하는 현실은 라크라메 실처럼 왔다갔다 엉켜져서 인생이란 거대한 본류를 만들어낸다.

우사미 마코트는 전작에서 내게 무척 호기심을 일으키는 작가였다. 소외된 현실을 나름대로 자각하면서도 그 현실을 보는 눈은 따뜻했다. 무서우면서도 따뜻한, 냉혈하면서도 어딘가에 희망이 있는 것 같았다. [전망탑의 라푼젤]은 특히나 그러했는데 내게 있어 세번째인 우사미 마코토의 이 소설 역시 그러하다.

소설 시작에 묘사되는 주인공인 와타루는 고작 여덟살이었다. 이 아이에게는 어떤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 어른들에 의해서 따라가야하는 숙명이 있을 뿐이다. 아이의 엄마인 에리코가 여동생 마리나를 임신한 채 사이비 종교인 [시온의 빛] 전단지를 받아들였을때 분명 에리코에게는 그야말로 빛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 펼쳐질 인생은 그러하지 못했다.

엄마 에리코는 와타루의 여동생인 마리나를 임신한채로 살 곳을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빚만 지고 다른 여자와 살겠다면서 집을 나갔고 에리코에게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사이비 종교 시설에라도 의탁해야겠다는 희망이라면 썩은 희망이랄까 그것밖에는.

하지만 그 시설에서 괴롭힘 있었고, 그런 곳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로 와타루는 학교에서는 기쿠치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해야했다. 오직 피부가 하얗고 머리색은 갈색, 두 눈동자는 푸른색인 신비한 능력을 지닌 소년 아오트가 와타루에게는 삶의 빛이었다. 유일한 친구였다.

와타루가 어쩔 수 없이 에리코, 마리나, 아오토와 헤어져 살게 되었을때 그는 제이슨 가오라는 중국계 미국인을 만나게 된다. 타르바간 바이러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면서 전염병의 습격에 대해 말하고 전염병을 통한 수익 창출을 얻고자하는 (와타루에게는) 이상한 존재인 가오였다. 그런데 가오의 사무실에서 20년에 헤어졌던 여동생 마리나를 만나게 되는 와타루.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이들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이는 무서운 꿈을 꾼다]는 재미적인 요소와 더불어 매력적인 요소(신비주의)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까지 혼합되어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19세기 계급사회를 소환하며 베트남 소수민족 마족을 등장시킨다. 이 소설에서 마족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작가가 이 소설을 코로나 기간에 집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등장하는 바이러스가 낯설지는 않다. 소설 속 바이러스는 무척이나 치명적이지만 그래도 전세계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광범위한 바이러스를 경험했으니 말이다.

아이에게 희망은 앞으로 살 날에 대한 희망이다. 소설의 제목은 [아이는 무서운 꿈을 꾼다]이다. 그것을 [아이는 좋은 꿈을 꾼다]로 바꾸어주는 것이 더 많이 산 어른들의 책임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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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감각 - 21세기 지성인들을 위한 영어 글쓰기의 정석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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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감각』​​

스티븐 핑커 (지음) |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펴냄)

스티븐 핑커의 [글쓰기의 감각]은 기존 글쓰기 방식에 대한 불안감이나 의문을 명쾌하게 해소해주는 책이다. 부제가 [21세기 지성인들을 위한 영어 글쓰기의 정석]이라서 영어권에 특화된 책이 아닌가 생각도 되었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한국어나 기타 외국어를 쓰는 타 국가에서도 분명 통용되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그것도 아주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는 책이다.

핑커가 말하는 좋은 글쓰기의 가치는 첫째로는 작성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가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엉터리로 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되는 것에 있다. 설령 아무리 좋은 책이더라도 번역자가 제대로 된 번역을 하지 않으면 그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 경험으로 말하자면 세간에 떠들썩해진 영미권의 어떤 책이 있었는데 한번 나도 읽어보고자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글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특별히 문장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려운 말 투성이에다 난해한 단어들의 조합이 이해를 방해하였다. 결국 그 책은 몇 장 읽지도 못한 채 내게서 잊혀져갔고, 몇 년 후 새로 바뀐 번역자에 의해서 다시 재출판되었을 때는 이 책이 그 책인가? 같은 책인가? 이렇게 쉽게 이해될 수가 있었다니...... . 하면서 의아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작성자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글쓰기는 그만큼 중요하다.

스티븐 핑커의 두 번째 좋은 글쓰기란 신뢰의 문제이다. 앞에서는 그 주장이 옳다하고 뒤에서는 그 주장이 그르다는 예시를 나열한다면 그 글 자체에 누가 신뢰를 주겠는가? 아마도 그런 글을 쓰는 이는 그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고자하는 지조차 제대로 모를 것이다. 스스로의 명확한 생각이 없는 것이다. 좋은 글쓰기는 정확한 자기 생각을 명쾌한 문장으로 쓸 때 인정받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런 글을 일부러라도 찾아보려고 할 것이다.

세 번째 그의 주장은 잘 쓴 글은 세상에 아름다움을 더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미국의 전대통령인 오바마를 정치인을 떠나서 연설인으로 감탄한 적이 있었다. 똑같은 단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쉼표도 알맞게 사용하는 그의 연설은 무척 사람을 끌어당기는 화법. 품격 있는 화법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 말이나 막하는 그 누구와 대비되는 연설이다.

글은 남는다. 그리고 좋은 글을 오래도록 남는다. 글의 역할 중 하나는 전달이다. 잘 전달될 때 우리는 그 글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핑커의 책을 읽다보면 글쓰기가 그 자체로 얼마나 즐거운 지적 유희인지... 이는 그동안 생각지 못한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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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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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Ⅰ-Ⅱ』​​

욘 포세 (지음) | 손화수 (옮김) | 민음사 (펴냄)

기존의 인물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이란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최근 배우 차인표씨의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본다면]이 옥스퍼드 대학의 아시아 중동학부 한국학 필수교재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특히 그가 소설을 쓴 계기가 몹시도 흥미로웠다. 어느 날 본 위안부의 삶... 열여섯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캄보디아 오지에서 55년을 살아온 훈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사실 제대 후 본 장면이 마음에 남아서 소설을 결심하고 2009년에 출판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런 홍보도 안 되고 이슈도 안 된 책이라서 절판이 되었다고 한다. 이번 계기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빛을 본 책이다. 그것도 우리나라가 아닌 낯선 영국 땅에서의 시작으로 말이다.

소설 멜랑꼴리아 역시 실존했던 소설가의 이야기이다. 바로 19세기말 실존했던 노르웨이 풍경화가인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이야기이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그런 삶을 작가는 멜랑꼴리로 녹여내였다. 특유의 묘사적 화법과 대사의 표법 기법으로 소설은 깊숙이 그 삶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있는 듯하다. 흡사 푹 책 속으로 깊게 빠져드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속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무언가에 푹 절여있는 느낌이다. 화가의 멜랑꼴리의 삶이 작가의 펜에 녹아들어 결국 독자까지 그 속으로 유인해내는 것 같다. 그래서 일까? 작가가 희곡 작가라는 사실이 와 닿는다. 그래서 이렇게 그림을 보는 것처럼, 연극 한편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구나 싶은 것이...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위대한 풍경화가가 되고자하는 마음으로 한스 구데가 재직 중인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로 찾아가서 그의 평가를 기다리면서 가슴 졸이는 장면은 어찌 보면 참 안타까웠다. 결국 예술은 누군가가 발견해주지 않는다면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만 만족하는 그림, 글쓰기 등 등은 과연 누가 정해준 기준인가? 결국은 드러내야하고 평가받아야 인정받는 것이다. 사후에 인정받는 것이 솔직히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스스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일은 과연 예술가가 아니라면 누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싶다. 배우 차인표 아니, 이제 작가로 칭해도 마땅한 그가 이야기한 이들처럼... 말할 수 없는 이들에겐 대변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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