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로운 창세기 - 사회들의 기원에 대하여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김성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2월
평점 :
『새로운 창세기』
에드워드 윌슨 (지음) | 데비 코터 카스파리 (그림) | 김성한 (옮김) | 사이언스북스 (펴냄)
당신은 진화론인가? 창조론인가? 다윈의 혁명적인 등장 이후 지속된 과학적 발달로 왜 인지 이런 논의 자체가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진다. 세상이 아담과 이브에 의해서 이뤄졌든지, 유인원에서 나왔던지 말해봐야 그저 해묵은 논쟁거리로 여겨진다. 하지만 에드워드 윌슨은 명백하게 책에서 밝히고 있다. 다윈이 제시한 혁명적인 이론, 유인원을 통한 인류 진화는 이제는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진화는 바로 입증된 사실이라고 말이다. (어떤 것을 믿을지는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일 따름이다. 과학자들은 이미 이것은 믿음의 영역을 넘었다고 보는 듯하다.)
어떤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냐가 바로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서문에 총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한다. 그중 두 가지를 전제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만 마지막 하나를 답변할 수 있다고 윌슨은 말한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가이다. 두 번째 질문은 무엇이 우리를 창조했는가?이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위 두 가지 질문에 답한다는 전제하에서) 미래에 인류는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하는가이다. 인류가 언제까지 지구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마지막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리라...... .
책에서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은 선택적 진화론적 관점에서 침팬지와 인간을 비교한 대목이었다. 침팬지들 집단에서 보이는 참혹할 만한 폭력성이 어떤 인류학자는 인간 행동을 따라서 모방한 결과라고 말하고, 다른 인류학자는 모방과는 별개로 나름 진화론적 학습이라는 것이다. 폭력을 써서 한 집단이 우세하면 그 집단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번식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인류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인류의 폭발적인 성장은 바로 수렵, 채집에서 벗어나서 작물을 재배하고 짐승을 길들여서 가축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아마 인류는 혈연적, 지리적으로 한 밴드 내에서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밴드를 지키고자 나름 폭력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사는 인류가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이나 마야 문명을 멸망시킬 수 있던 것도 단연코 정착하여 작물을 기르고 가축을 길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직력이 그것이다. 조직이 잘 갖추어진 동물 집단들은 영구적으로 이어질 잠재력의 소유자들이다. 초보적인 사회들은 멸망한다. 아마도 엄청난 숫자의 사회들이 그 명을 다했을 것이다. 극소수만이 살아남는다. 저자는 이것을 바로 진사회성 사회라고 일컫는다. 진사회성은 진화에서 희귀하게 나타나는 것일 수 있고, 이런 사회에서 이타성과 복잡성이 나타난다. 이런 특성을 가진 집단이 개미집단과 인간들이다.
한쪽 눈은 실명하고, 소리까지 들리지 않게 된 저자의 생태학, 생물 다양성 연구에 대한 업적은 실로 놀랍다. 저자가 아마 한곳을 오로지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신체적 한계가 한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하게 된다. 곤충들의 페로몬 소통을 밝혀내고, 자연 선택이 사회성을 발달시켜서 진화를 일으킨다는 것, 진 사회성 집단이 아주 일부에만 나타난다는 점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이 책을 통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한번 읽고 덮었던 적이 있었는데 [새로운 창세기]를 읽으니 [사피엔스]와 통하는 점이 무척 많은 것 같다. 새로운 창세기가 다시 쓰인다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식으로 매듭지어져야 할까? 그리고 그곳에서 인류의 역할은 어떻게 다시 부여받아야 하는가?
다수의 과학자들은 지구에 남은 시간이 얼마들 없다고 한다. 그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인류의 역할을 다시 규정지어야 할 것 같다. 지구의 마지막 파괴자로서 남지 않으려면 말이다.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