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뭐라고.’
이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굳이 밥이 아니어도, 하루 세끼가 아니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다고, 밥 챙겨 먹는 것보다 중요하고 급한 일이 많은데, 굳이 먹는 것까지 우선순위에 두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아마 그때가 내 인생 몸무게 최저점이 아니었나 싶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먹는 일이 진심이 되었고, 전국 맛집을 찾아다니는 정도는 아니어도 시간이 생기면 뭔가 맛있는 것을 찾고 검색하며 가까운 곳을 돌았다. 고급스러운 메뉴가 아니어도, 일상에서 쉽게 먹는 칼국수 한 그릇에도 조금 더 맛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때부터 내 몸무게는 급상승하였고, 지금도 그 수치는 내려갈 줄 모른다. 맞는 옷이 없어도, 허리통이 두둥실 떠다닐 것 같아도 다이어트를 쉽게 생각하지 못한다. 세상에 맛있는 게 너무 많아서.
누구에게나 진심인 메뉴가 있다. 가끔 그 메뉴에 사연까지 담긴다면 세상 최고의 음식이 된다. ‘띵 시리즈’에 소개된 모든 음식이 그럴 거로 생각된다. (‘띵 시리즈’ 많이 읽었지만, 출간된 시리즈의 모든 책을 읽은 게 아니어서) 읽을 때마다 낯선 이에게 정이 샘솟는다. 우리 일상에 너무 깊게 스며든 온갖 메뉴에 이런 이야기가 담길 거로 생각한 적이 없는데, 살아가는 동안 겪은 많은 감정이 그 메뉴에 오롯이 담겨 나오는 듯하다. 오렌지주스나 갈아 만든 배로 해장한다는 말을 처음 듣고 놀라던 것도 잠시(『해장음식 :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 전국 팔도에 뿌리내린 해장음식이 너무 다양해서, 꼭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도 가서 맛보고 싶었다. 강원도의 달팽이(다슬기) 해장국, 제주도의 각재기(전갱이)국, 경상도의 복국이나 재첩국, 충청도의 날떡국(올갱이가 들어간다), 전라도의 설탕 국수, 서울과 경기도의 평양냉면 육수. 그런데 전라도에 사는 나도 설탕 국수로 해장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삶은 국수에 설탕을 뿌려 먹으면서 해장한다고? 이렇게 해장이 되나 싶을 정도로 놀랍고 놀라운 메뉴였다. 자고로 해장이란, 목으로 무얼 넘기든 개운하고 시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와아~ 진짜 각자의 해장 방식이 너무 다양했다. 평소 먹고 싶은 거 아주 많았는데, 여기에 해장 메뉴 추가요~
숙취에도 장점이란 게 있다면 오직 그것뿐이다. 반성하고, 쉬게 하는 것. 술을 마실 때야 언제나 즐거움뿐이다. 이 세상에는 맛있는 술,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고 하찮은 일로도 까르르 웃고 떠드는 친구들과의 시간은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천국이 따로 없다. 다만 다음 날이 되면 어김없이, 즐거움과 정비례한 크기로 찾아오는 숙취가 괴로울 뿐이다. (해장음식, 110페이지)
윤이나 저자의 『라면 :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역시 놀라운 라면의 세계였다. 평소 라면을 잘 안 먹어서 집에 라면이 있었던 적이 거의 없다. 그나마 요즘에는 귀찮은 한 끼 해결 목적으로, 언제 먹을지 모를 라면을 종종 사다 놓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유통기한 지나서 버린 적도 있다. (유통기한 넘긴 음식 그래도 먹는 편인데, 이상하게 라면은 날짜가 지나면 오래된 기름 냄새가 나서 못 먹겠더라) 라면에 진심인 저자의 다양한 라면 탐구가 인상적이어서, 이 책에 등장한 라면 이름을 적어두기도 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라면이 있었다니, 비슷해 보여도 라면스프 하나에 맛이 너무 달라서 묘했는데, 면발부터 국물맛까지 너무 다른 라면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어졌다. 근데, 이 책에 소개된 라면을 언제 다 먹어보냐. 이거 다 맛보려면 몇 년은 걸릴 듯. ^^
이번 출간작 『구내식당』 읽으면서 나도 한때 경험했던 구내식당(?)의 시간이 생각이 났다. 내가 사는 곳은 지방의 소도시인데, 1년 정도 관공서에서 기간제로 일한 적이 있다. 그동안에는 가끔 일하면서도 점심시간은 늘 일터 밖에서 해결해야만 했는데, 여기에서 일할 때는 구내식당이 있었다. 가격도 저렴했고, 밥 먹는 시간도 절약되고, 잠깐 점심시간에 쉴 시간도 생기겠구나 싶어서 좋았다. 메뉴? 그딴 거 필요 없었다. 집안에서 주방을 주로 담당하는 많은 사람의 최고 메뉴는 ‘남이 해준 밥’이다. 소박하게 마련된 구내식당에서 처음 밥을 먹을 때는 일단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고, 그다음에는 처음 보는 메뉴를 조리사님께 물어본 적도 있다. 그러다가 점점 배가 불렀는지, 메뉴에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콩나물국에 콩나물무침? 어떻게 같은 재료 음식이 식판 위에 나란히 올려질 수가 있는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도 쉽게 이해하게 됐다. 집에서 나도 그랬다. 콩나물을 한번 사면 오래 보관할 수 없으니, 그날 다 해치웠다. 국도 끓이고 삶아서 무치기도 하고, 가끔 그날 저녁 메뉴가 김치찌개라면 찌개에 콩나물을 넣기도 하고. 아, 진짜 내가 배가 불렀구나. 인생 최고의 음식인 ‘남이 해준 밥’을 앞에 두고 말이다.
많은 사람이 알겠지만, 일하면서 점심시간은 단순한 점심이 아니다. 맛있게 열심히 먹고, 잠시 한눈도 팔면서 오후를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저자에게도 비슷하다. 일을 열심히 해도 회사를 무조건 사랑할 수 없는데, 밥벌이를 위해 매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살벌한 일터에 사랑하는 대상 하나쯤 저장해두고 그걸 위해 아침 출근길을 나서는 것도 괜찮잖아? 그렇게 만든 시간, 우리가 사랑하는 건 점심시간이었다.
저자의 구내식당에도 뭐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두 가지 메뉴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거, 하루에 두 번씩 구내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언론사 특유의 시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뭐, 부럽긴 하더라. 어쨌든, 저자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던 구내식당 사진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던 순간, 사람들은 그날의 메뉴 사진이 없으면 궁금해했다. 특별한 거 없는 단체 급식 사진에 이렇게나 궁금해한다고? 우리가 하루에 먹는 음식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사는 인생의 한 과정이었고, 그 음식으로 울고 웃을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마감에 쫓기며 스트레스를 받아도, 사람과 일에 치이며 한바탕 울고 싶은 날에도, 소중한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저자에게는 구내식당이 있었다. 눈물을 삼키며 숟가락을 들어 올리고 다시 힘을 냈다. 거기에 기자가 일하는 곳이라는, 그곳에서 일하지 않으면 경험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분야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니, 저자가 전하는 구내식당 이야기가 더 특별해진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전해지던 순간, 종이신문 마감 시간까지 어떤 기사가 그 기쁨을 채우게 되는지 들려왔을 때는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구독자에게는 기쁨의 소식과 놀라운 정보가 더해지는 순간이지만, 그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들의 시간은, 마치 깜짝쇼처럼 수상자를 미리 알지 못하니 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 기자들이 이렇게 분주하게 보내는 짧은 몇 시간으로, 우리는 그 순간의 영광을 더 기쁘고 다양하게 만끽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문득 모든 게 다 귀찮아지면서 산란기의 연어처럼 구내식당으로 회귀한다. 이번엔 문 닫기 한 시간 전에 식당 입성. 매콤제육 장조림은 간이 잘 맞는 데다 부드럽고, 수제비는 쫄깃하면서 뜨끈하다. ‘이만하면 괜찮은 한 끼잖아!’ 하면서 다시 생각해본다. 아까 그 점심은 왜 그렇게 맛이 없었던 걸까. 출근하기 싫어 늑장 부리다 음식이 다 식었을 때야 겨우 식당에 도착한 일요일 당직자의 후줄근한 마음, 덩달아 후줄근해진 미각에 아무래도 그 책임이 있지 싶다. (구내식당, 78페이지)
구내식당이 단순하게 배를 채우는 곳이 아니라, ‘한솥밥을 먹는다’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노동의 장소이면서, 같이 부대끼고 울고 웃는 사람들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곳이라는 말이 이해되기도 하더라. 상사에게 까인 동료를 밥 한 끼로 위로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떡볶이 메뉴에 학교 앞 분식집을 떠올리기도 하는, 먹고 싶었지만 내가 만들기도 귀찮고 배달로 먹으면 식감이 떨어지는 메뉴에 나도 같이 먹고 싶었다. 길어야 한 시간 남짓, 삶을 채우고 고단한 밥벌이를 버티게 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집에 있으면 밥 먹기 귀찮아서 끼니를 거르거나 군것질로 대충 때우기도 했는데, 일할 때만큼은 점심을 전투적으로 먹었다. 그 점심 한 끼가 오늘의 모든 식사였던 날도 있었으니까. 주방 조리사님께 물어본 메뉴를 집에 와서 그대로 만들어서 먹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경험했던 구내식당은 점심을 해결하는 곳만이 아니라, 의외의 레시피를 배우는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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