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밥 먹다가, 울컥 - 기어이 차오른 오래된 이야기
박찬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2월
평점 :
“갓 지은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고 비벼 먹는 거예요. 요리를 하지 않는 당신도 그 정도는 하겠죠. 버터가 얼마나 훌륭한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음식이에요.”
(중략)
“버터는 냉장고에서 막 꺼내서 차가운 채로 넣어요. 정말로 맛있는 버터는 차갑고 단단한 상태에서 식감과 향을 맛보아야 해요. 밥의 열기로 바로 녹으니까 반드시 녹기 전에 입으로 가져가야 해요. 차가운 버터와 따뜻한 밥. 일단 그 차이를 즐겨요. 그리고 당신 입속에서 두 가지가 녹아서 섞이며 황금색 샘이 될 거예요. 네, 보이지 않아도 황금색이란 걸 아는, 그런 맛이죠. 버터가 엉킨 밥 한 알 한 알이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마치 볶은 듯한 향기로움이 목에서 코로 빠져나가죠. 진한 우유의 달콤함이 혀에 감기고…….” (『버터』 유즈키 아사코, 39~40페이지)
유즈키 아사코의 추리소설 『버터』를 읽다가 마주한 장면, 책을 다 읽고서도 책의 내용보다는 이 버터를 녹인 밥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우리의 추억 돋는 간장 달걀밥과 비슷한 구절이어서 말이다. 달걀 한 알도 귀한 시절의 기억은 저절로 소환된다. 따로 반찬을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이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엄마가 준비하는 최선은 갓 지은 하얀 쌀밥에 달걀노른자 하나를 올려주고, 간장을 두르고 참기름을 살짝 끼얹어 주는 것. 그 고소함에 취해 밥 한 그릇 뚝딱하면서 배 속이 꽉 찬 기분을 느꼈더랬다. 엄마가 나에게 그런 밥을 만들어주시던 기억은 벌써 과거의 일이고, 한참 아이였던 그때의 감정이 떠오를 때면 지금도 가끔 엄마의 간장 달걀밥을 흉내 내어 먹곤 한다. 갓 지은 하얀 쌀밥에 달걀노른자를 올리고 간장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서 참기름을 살짝 뿌린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유즈키 아사코의 소설에서처럼 버터를 한 조각 넣는 거다. 이미 참기름으로 코를 자극하던 감각은 뜨거운 밥에 녹아내리는 버터의 풍미를 추가하면서, 1980년대와 조금 다른 간장 달걀밥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고소함이 배가 되어도, 엄마가 해주시던 그때와 같은 맛은 아니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뭐가 빠진 걸까.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밥인데, 늘 먹던 밥이고 메뉴가 달라도 밥이 그냥 밥일진대, 가슴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게 하는 밥이 있다. 기억 속의 밥이다. 언제, 누구와 함께, 어떤 사연을 나누며 먹은 밥인지, 그 시간을 불러오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다. 저자가 기억하는 밥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의 삶을 거쳐 간 사람들과의 추억은 아름답고, 슬프고, 아팠다. 그 시절의 많은 사람이 그랬듯 많은 게 모자란 환경이었다. 사는 게 서럽고 고달픈 게 일상이었고, 가난이 버거웠다. 듣고 있자면 이게 추억인지 고통을 끄집어내는 일인지 모를 정도로, 나도 모르게 ‘힘들었겠다’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세월을 동정하는 게 아니다. 내가 그보다 여유롭게 살았다고 하는 말도 아니다. 사는 일이 참 고단하다는 생각에, 이렇게 서럽다가도 좋은 날 오겠지 하는 기대를 품고 듣고 있게 되더라. 한 번씩 엄마의 간장 달걀밥이 생각날 때마다 그 시절의 이야기가 따라오듯, 그에게도 살아온 날들의 추억은 추위에 떠는 마음을 연신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사라져 가는 것들, 서늘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들, 조금 기대고 싶어도 갑자기 얼음을 맞는 것처럼 긴장하게 되는 순간들이 고단할 때마다 그리움을 불러온다. 다정하고 고마웠던 음식들과 그 음식을 함께 나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의 그리움 속에 가득하다.
저자가 이탈리아 타향살이에 눈물이 나도록 힘들 때, 후배가 보내준 멸치와 고추장을 눈물 흘리면서 먹었던 일. 갑자기 날아든 세무서 독촉장에 잊고 지냈던 조선족 ‘동포’와의 시간이 떠올랐다. 결혼식장의 뷔페가 성행할 때 상승세를 타던 친구는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하늘로 갔단다. 돈을 빌려달라는 말이 마지막 대화였다는 걸 알았을 때는 먹먹하기도 했다고. 친구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보다는 직원 월급을 해결해주려고 애쓴 사람이었으니, 보내는 사람의 마음은 무너진다. 고생 끝에 빵집 일급 기술자가 되었지만 프랜차이즈 빵집에 골목 빵집은 망했고, 이제는 도배 기술자가 되어 먹고 사는 이를 기억하면 빵 굽는 냄새가 난다. 팔에 동그랗게 기름이 튄 흔적(중식), 팔뚝의 칼날에 베인 듯한 상처(양식)로 누군가의 밥벌이를 알게 된다는 게 새삼 울컥한다. 지금 내 눈앞의 음식이 어떤 이의 손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니, 음식에 의미가 쌓이는 기분이다. 경상도 해안의 해녀들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성게 잔가시와 내장을 빼내는 뒷모습에, 성게가 목에 걸린다고 했다. 따뜻하게 배달받은 시장의 백반은 산재 처리도 못 받는 이의 몸을 상하게 했다. 남에게 밥을 해주겠다고(물론 그게 자기 장사이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지라도) 고생하는 이들의 사연에 설명하기 어려운 고마움이 저절로 따라왔다. 이런 장면들, 어디서 많이 본 것도 같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생각이 났다. 저자가 살아가면서 마주친 음식 속 많은 사람과 사연 속에 엄마가 있었다.
엄마의 왼쪽 검지 끝은 아직도 손톱이 잘 자라지 않는다. 식당 주방에서 칼질하다가 베였다. 검버섯처럼 거뭇거뭇한 흔적이 엄마의 손을 밉게 보이게 한다. 통닭집을 하다가 얻은 기름 튄 자국들이다. 연골이 다 닳아버린 무릎과 제대로 펼 수 없는 허리는 백반집을 하면서 배달하다가 쌓인 통증을 참아낸 시간의 흔적이었다. 식당에서 사용할 밑반찬을 만든다고 멸치 배를 따고, 느타리버섯을 한 상자 사서 갈래갈래 찢고, 손님상에 내놓을 동태탕을 끓인다면서 얼린 동태를 손질하면서 찬물에 담겨있던 손은 지금도 일년내내 차갑다. 저자에게는 많은 음식을 떠올리면서 그 시간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음식과 연결된 많은 사람의 사연들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많은 음식에 그대로 엄마가 있는 게 이상했다. 저자가 만나고 사연을 들려주는 그들의 시간 속에, 그 자리에 엄마가 있었다. 희한하게도, 안 그래야지 하고 매번 다짐하는데도 잘 안된다. 그동안 세상을 돌면서 밖에서 먹은 음식보다 엄마가 집에서 내어주던, 엄마가 식당을 하면서 손님상에 내놓던 음식들이 눈에 선명해서 그렇다. 그 많은 음식을 준비하던 시간 대부분에 내가 있었다. 교복을 입고 엄마의 식당에 갔고, 손님상으로 음식을 날랐다.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할 줄 아는 게 음식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을 알아서, 그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말이다. 저자가 떠올리는 서글픈 순간들, 눈물 나게 고마웠던 사람들, 지금 앞에 둔 음식에 저절로 떠올라서 울컥해지는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비슷한 기억을 가진, 너무 닮아서 등을 쓰다듬고 싶은 순간을 간직한 이들의 이야기였다.
평생을 살아도 옛날만 사는 것 같다는 저자의 말이 왜 이렇게 안쓰러운지, 아마도 많은 것이 부족하던 시절을 견디듯 살아낸 마음을 아직 제대로 위로받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두가 가난하고 어렵게 성장한 시절, 그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과 또 다른 사람들을 추억하는 방법으로 저자는 이 글을 쏟아낸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혹시 잊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닐까. 마음이 허기지고 힘들어서 뱃속에 뭔가 채우고 싶을 때마다 떠올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4월쯤이었던가, 시간이 나서 엄마한테 갔다가, 텃밭에 아직 남아 있는 쑥을 캐왔던 날의 기억이 따라온다. 우리 집에서 가장 큰 솥을 꺼내고, 냉장고에 남은 묵은지를 잘게 썰고 쌀뜨물을 넣고 끓였다. 된장을 풀고 깨끗하게 씻은 쑥을 가득 넣고 조금 더 끓이다가, 개운한 맛을 내려고 청양고추 몇 조각, 고춧가루 살짝 뿌려서 계속 끓이다 보니 맛있는 냄새가 난다. 냉동실에 넣어둔 멸치를 꺼내어 멸치 조림을 하고, 그즈음 사다 둔 냉이가 아직 괜찮아서 데쳐서 무쳤다. 남아서 처치 곤란했던 무로 생채를 만들고, 미나리를 잘못 샀는지 너무 질겨서 전으로 부쳐냈다. 엄마가 어렸을 적에 자주 해주던, 음식 재료를 넉넉하게 살 형편이 안되는 집에 그저 남아 있는 재료들로 만들어내던 음식을, 이제는 내가 만들어서 엄마에게 가져다준다. 함께 살면서 엄마의 어깨너머로 본 기억으로 흉내를 내다보니, 이제는 그럭저럭 먹어줄 만한 수준이 되었다. 언젠가 엄마가 안 계실 때, 그 맛을 내고 싶을 때마다 우리 집의 주방은 분주해질 것 같다.
#밥먹다가울컥 #박찬일 #웅진지식하우스 #기어이차오른오래된이야기
#에세이 #책 #책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