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창창 - 2024 상반기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우수선정도서
설재인 지음 / 밝은세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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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계의 스타 작가 곽문영의 딸로 살아가는 일이, 썩 괜찮을 거로 보였다. 부족할 거 없는 현실의 풍요로움과 쓰기만 하면 중박 이상을 터트리는 엄마의 명성에 자식까지 저절로 뿌듯해질 것 같은데. 아니었나?


곽문영의 딸 곽용호는 용과 호랑이가 나왔다는 태몽처럼 이름이 지어졌다. 위풍당당, 어디에서도 그 힘을 발휘하며 살아갈 거로 보였던 이름이었건만, 현실의 곽용호는 그저 스물아홉의 백수일 뿐이다. 삼수 끝에 서울의 4년제 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도 매번 취업에 실패한 패배자로 살아가는 중이다.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 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 그가 바로 곽용호다. 엄마의 유명세만큼이나 그 자신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채로 성장했다. 엄마에게 관심 받지 못하고 자라왔고, 그의 인생에 비치 비춰지는 순간은 엄마 곽문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뿐이라니. 어째 형제자매 사이의 비교도 힘들다고 여겼는데, 능력 있는 작가인 엄마와의 비교도 힘들 것 같긴 하다. 그래서일까, 엄마와 사이가 좋았던 적이 없다. 매번 다투고, 서로의 인생 참견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던 어느 날. 새 드라마 제작을 앞두고 엄마가 사라졌다.


이 사실에 당황스러운 사람이 한둘이 아닐 터. 엄마의 수족인 오혜진이 곽용호에게 제안을 한다. 엄마의 새 드라마의 대본을 대신 써 달라는 것.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곽용호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여기까지 읽고 나면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 이제 엄마 대신 대본을 쓰는 곽용호는 엄마보다 더 재밌는 드라마를 완성한다. 그동안 엄마의 기세에 눌려 발하지 못한 그의 능력이 화산 터지듯 폭발하는 순간이다. 그럼 다음 문제를 해결해야겠지. 사라진 엄마는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 드라마의 완성에 곽용호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을까 없을까. 엄마 대신 유령 작가로 드라마를 쓴 곽용호의 인생은 이제 날아오를까? 사실 어릴 적 곽용호의 꿈은 작가였다. 자꾸만 엄마의 재주에 비교하다 보니 그의 재능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걸 일찍 깨달았을 뿐이다. 그런 꿈마저 사라지니, 저절로 존재감 없는 인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순간, 엄마 대신 대본을 쓰고 있는 지금 그의 재능은 어떻게 평가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마치 숨겨졌던 어떤 길을 여는 기분이다. 문제는, 곽용호가 엄마의 대본을 대신 쓰는 이 문제를 해결해도 문제, 해결 못 해도 문제라는 거다.


엄마 대신 드라마 쓰기에 한창 빠져있을 무렵, 잊고 있던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 집중해서 글을 쓸 때는 생각나지도 않았던 엄마의 부재. 엄마를 찾아야 했다. 곽용호가 엄마를 찾기로 결심하고, 같이 글을 쓰던 함장현과 배우 주민호까지 함께 엄마를 찾아 나선 여정은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이궉산의 광혜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하고 암자 같지도 않게 흉흉한 외관, 수상한 관리인 스님까지 의심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다. 이곳에 엄마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단서로 곽용호 일행 역시 이곳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놀랍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죄책감이 원인이 되는 치매, 상당히 오랜 시간 죄책감이 쌓이면서 기억을 잃어버린단다. 실제로 이런 치매가 있는지 소설 속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치매 환자가 기억을 잃는다는 게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죄책감이 쌓여 기억을 잃는다는 게 왜 이렇게 무서운지 모르겠다. 얼마나 미안한 게 많았으면, 얼마나 그 마음 끌어안고 살아왔으면 이렇게 기억을 잃게 되는 걸까. 더군다나 그런 이유로 기억을 잃은 이들은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는 마음만 남아 있다고 한다. 밥을 먹이고 씻기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가만히 앉은 채로 살아갈 수 없게 누군가의 한마디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더 아픈 건, 그들 자신을 돌보는 법을 잊었다는 거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그들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일이라면, 자신을 돌보는 법을 가장 먼저 잊고야 말았다. 스스로 먹고 씻고 하는 것조차 잊은 채로 살아간다. 처음 곽용호가 아파트 현관 문 앞에 쌓여 썩어 가는 배달 음식을 보고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더라면, 일하느라 바빠서 음식 배달 시킨 것도 깜빡할 정도로 엄마가 대본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었더라면, 지금 뭐가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단정할 수가 없다. 오랜 세월 혼자 곽용호를 키우면서, 자식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만 하면서 이기적으로 살아왔다고 보였을 지라도, 곽문영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그 죄책감을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마음의 병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생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곽문영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광혜암에 모여든 사람들의 병이 왜 시작되었는지 추측하게 된다. 해주고 싶은 건 많고 시간은 없고,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게 인생이었고, 아이 키우며 살아가기 위해 죽을 것처럼 일했고 성공도 했는데, 그렇게 살아오고 보니 남은 건 혼자 자라듯 성장한 딸에게 미안함과 죄책감 뿐이었다는, 그런 거 아닐까. 서른이 다 되도록 아무 색깔도 가지지 못한 채로 실패자로 살아온 곽용호의 인생을, 엄마인 자신이 만든 것 같아서.


결국, 이 모든 사건과 진실을 파헤치는 동안 곽용호와 그의 친구들이 마주한 것은 괜찮다는 말이었을 거다. 인생 왜 이렇게 꼬질꼬질한지, 그 창창했던 꿈은 어디에서 무너져 버렸는지, 성공하고 싶은 인생은 어쩌다 매번 실패만 하게 되는지. 그동안 살아오면서 계속 경험한 게 절망 뿐이었다면, 이제는 조금씩 나아가는 마음을 붙잡아준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광혜암의 그 많은 사람이 갖게 된 죄책감 말고, 괜찮다는 말로 그저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해준 시간이었다. 곽용호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살아가는 많은 이가 똑같이 겪는 불안정한 경험 속에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괜찮다고 말한다. 기억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미친 듯이 써 대면서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하고, 그 기억을 산 대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다독이는 일에 앞장서고, 다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던 누군가의 마음이 그대로 읽힌다. 그저 그 시간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현실이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설령 이 인생의 엔딩이 또 다른 패배자의 기록으로 남는다고 해도, 그저 나아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뭐가 하나 부족해도, 가야지. 앞으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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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책추천 #태몽 #멈추지말고나아가라는주문 #운명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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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
강재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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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 그런 대상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에 답을 중 책이 아닐까 싶다. ‘분교 사진가라 불리며 사라져 가는 작은 학교를 사진으로 담아낸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마음 머물 곳 하나쯤 새겨두게 한다. 30여년 분교를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 속의 나무들은, 이제 그의 오랜 친구가 되어 그곳에 머물고 있다. 때로는 그의 푸념과 걱정을 들어주며,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주며, 때로는 많은 동물의 삶을 전하면서 말이다.


우리 집 거실 큰 창으로 바라보는 앞 발코니에는 화분이 하나 있다. 이렇게 말하니 누군가는 내가 화초 키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기던데, 아니다. 엄마가 주신 알로에 화분이다. 가끔 물만 주면 잘 자라는, 조금 말라 있어도 괜찮은 그 화분은 사실 상처 치료용으로 둔 거다. 수시로 손가락에 상처가 나곤 해서, 상처와 염증 치료에 좋다는 알로에 화분은 내가 돌보는 유일한 식물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잘 돌보지 못하니 아예 곁에 두기를 꺼려하는 나 같은 사람이 이 책을 보고 살짝 놀라기도 했다. 마음이 머물다가 찍은 사진, 그 자리에 잘 있겠거니 하다가 우연히 다시 만날 수도 있는 존재라고 여기던 나무가, 그 자리에서 여전히 머물고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상하리만치, 마치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한다면 좀 과장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런 것 같다.


그 오랜 시간 나무 사진을 찍으며 살아온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우리가 겪는 온갖 마음이 있었다. 상처 받은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처럼, 든든하게 의지가 되는 힘을 뿜어내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되어주었다. 가로막힌 철망 사이를 뚫고 자라면서 살아냈다. 마치 여기에서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 언제나 와도 내가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상에 치이고 마음이 힘들어질 때마다, 인생에 충전이 필요할 때마다 에너지를 내어주는 존재로 머물러 있었다.




지금 이 책이 나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는 건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뭔가 뚜렷하게 한 게 없는 듯한데, 작년 가을부터 마음이 너무 바빴다. 마무리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새해가 되었고, 작년에 다 정리되지 않은 자잘한 일들 정리하느라 또 1월이 훌쩍 가버렸다. 그 사이의 병원 생활은 1월이 더 짧게 느껴지게 했다. 일주일 정도 미친 듯이 잠을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는데, 피곤이 쌓여 학교 다닐 때도 안 났던 코피가 났다. 이게 맞는 건가 싶은 일에 고민하느라 주저하고, 그냥 결정하면 되는 일에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단순하던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게 되는 건지, 그저 어렵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냥,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에 분노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을까 봐 불안하기만 했다. 읽는 이의 이런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작가는 나무와 사귀어 보라고 말한다.


글쎄, 나무와 사귀는 어떻게 하는 걸까? 작가는 이렇게 조언한다.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고, 집 가까이에서 마음에 드는 나무 하나 골라 친구로 만들면 된다고. 아침 출근길에 살펴보고, 저녁 귀갓길에 또 살펴볼 수 있는 나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이다. 동네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과 숲, 강가에서 친구 나무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오랜만에 찾아가 안부를 묻는다면 더 각별해질 수도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정말 오래되고 친한 친구는, 몇 달만의 통화에서도 바로 어제 통화하고 만난 것처럼 느껴지는 게, 작가가 말하는 나무와의 안부와 너무 닮았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물으면서, 행복하거나 힘들었던 마음을 들으면서, 서로 사는 이야기 나누는 그 시간이 너무 애틋해서 좋은 기분. 혼자서 견디기 어려운 게 세상살이라면, 이런 친구 이런 나무 하나쯤 꼭 옆에 두고 싶은 마음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많은 나무의 사진이, 나무의 삶이 아름다웠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 있어도, 우아하게 꽃을 피우고 있어도, 그 자체로 자기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게 우리 살아가는 모습과 닮아 있어서 한참을 보게 된다. 어느 시기에 꽃을 피우다가도 언젠가는 다 떨어진 꽃잎을 아쉬워하며 가지만 남아 있기도 하는 게, 우리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봄의 생동감(), 여름의 왕성함(), 가을의 풍성함(열매), 겨울의 고요함(나무껍질(수피))으로 다가오는 나무의 삶에서 인간의 삶을 보게 되는 건, 이미 나무와 친구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니 이제 그 친구 중 하나 정도 마음에 새겨두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어도 좋겠다. 작가가 많이 힘들 때 우연처럼 손을 흔들었던 그 나무가, 이제는 사진과 글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친구같은나무하나쯤은 #강재훈 #문학 #에세이 #한국문학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8#사진에세이 #책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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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 영 케어러와 홈 닥터, 각자도생 사회에서 상호의존의 세계를 상상하다
조기현.홍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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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케어러 조기현 활동가와 방문 진료 의사 홍종원의 대담집이다. 이 두 사람의 수식어를 보면 어느 정도 예상되는 게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역시 깊고 굵은 메시지를 가득 담은 이야기였다. 이 시대에 빠지지 않는 화두인 돌봄과 그 돌봄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두 사람이 대화의 중심에 있다. 나 역시 지금 가족 돌봄에 관련된 한 사람으로, 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낯설게 들려오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나도 언젠가 돌봄의 대상의 될 수 있는 게 자연스러운 변화이기에, 조금 더 집중해서 듣게 되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를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돌봄이 사회적 책임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돌봄의 역할에서 개인이 해야 할 부분도 있겠지만, 온전히 개인만의 책임에 묶어둘 수는 없다. 이 사회의 변화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보이는 돌봄의 문제를 사회적 책임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다. 누구나 경험하게 될 일이 돌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이 더욱 강조하는 게 돌봄의 주체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된다는 것. 그러니 돌봄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아야 하는 건 너무 당연하고, 사회가 돌봄 인프라 구축에 힘써 돌봄 위기 사회가 아니라 돌봄 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말로만 하고 있으니 막연하게 들리는데, 내가 최근 경험한 경우를 생각하다 보니, 사회가 같이 책임져야 할 돌봄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나 역시 처음부터 내가 돌봄의 주체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다. 어쩌다 보니, 또 누군가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 되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셨던 몇 년 동안, 혼자 감당할 수 없던 엄마와 함께 돌봄의 주체가 되었다. 응급실과 중환자실, 일반 병실을 거쳐 요양 병원까지 입퇴원을 반복했던 시간이 5년 정도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제 돌봄의 시간에서 벗어난 우리는 이제 각자의 삶에 집중해야 했다. 마음의 부담과 피곤함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 무렵, 이제 엄마가 아프고 몇 번의 병원 신세를 지곤 했다. 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퇴원하고 집에서 지내는 동안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나는 또 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 형제자매도 있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이상하게도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하게 되는 게 돌봄이 되어버리는 건, 또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덜 피곤한 일이기도 했다.


사실 간병인을 고용하는 비용이 저렴하거나,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내가 병원에 상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여건이었고, 보호자나 간병인의 상주를 원하는 병원 생활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환자 본인도 혼자서 움직이기 어려웠으니, 뭐 다른 방법이 있겠나. 어쨌거나 엄마의 병원 생활은 끝났지만, 여전히 걱정은 남아 있다. 집에서 생활하는 엄마를 자주 살피러 가야 하고, 혹시나 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까 미리 걱정하는 일이 늘었다. 저자가 말하는 돌봄 위기의 근본 원인을 나는 여기에서 살피게 된다. 고령화 사회의 진입은 더 많은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은 나이 드신 분도 정정하시니 각자의 일상을 잘 살아가고 있지만, 나이 드신 분이 젊은 사람과 같은 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니 돌봄이 필요한 건 너무 당연하다. 거기에 개인주의는 돌봄이 각자의 문제라는 인식을 만들 수도 있다.


돌봄이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하는 저자들의 대화가 뜬금없어 보였는데, 듣다 보면 그 관계가 순환하는 돌봄의 문제에서 꼭 필요한 관계였다. 돌봄이 일방적으로 개인이 고통 속에서 견뎌나가야 하는 문제도 아니고, 사회와 국가만이 책임져야 할 문제도 아니었다. 그 사이에 엮어진 많은 관계 안에서 이뤄나가야 할 문제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인간이 많은 관계를 통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서로 관계 맺음으로 돌봄 인프라가 형성된다고 한다. 이때 지역 사회의 발전은 중요한 과제가 된다. 아픈 가족을 돌보며 일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멀리 있는 병원에 가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지역 공동체의 도움으로 내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치료 받을 수 있거나, 내 집에서 돌봄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줄여야 한다. 이러한 환경을 만드는 게 돌봄을 수행하는 데 정말 큰 역할을 한다.


어느 것 하나만으로 돌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저자들의 대화 역시 단순하게 돌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만도 아니다. 돌봄 사회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애쓴다. 돌봄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돌봄 인프라의 확충이 중요하다. 돌봄이 중심이 된 지역공동체의 역할과 관계도 탄탄해져야 하고, 돌봄 사회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의 실현이 따라와 주어야 한다. 거기에 우리의 역할도 분명히 있다. 우리 자신이 돌봄의 인프라가 될 때, 돌봄 위기 사회는 돌봄 사회가 될 것이다.


최근에 지역아동센터에서 실습한 기억을 떠올려 보고, 엄마의 병원 생활을 기억해 보면, 돌봄의 문제는 이 사회 전체의 분야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일상의 관계 맺음에서 돌아보는 일이 돌봄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사회적 제도가 확충되어야 하는 일과 사람이 채워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어느 한 가지만으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돌봄이었다. 어느 날 늙고 병들어 돌봄의 대상이 될지도 모를 순간에,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까지, 돌봄의 가치가 올바르게 평가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관계를돌봄이라부를때 #조기현 #홍종원 ##책추천

#우리시대의문제 #돌봄문제 #사회문제 #돌봄의순환 #돌봄인프라 #돌봄의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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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이 내 취향인데, 이젠 없어

짧은 한 문장에 웃다가, 어느 새 웃음기 사라진 내 표정을 느낀다. 노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하는 건 아직 어렵지만, 노인의 삶을 모른다고 할 수 없어서다. 누구나 늙는다는 당연한 사실도 너무 잘 알아서다. 아흔이 넘은 노인이 자신의 취향인 연상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그보다 오래 사는 이가 많지 않다는 걸 증명하니까.


일본의 정형시 중 하나인 5-7-5의 총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를 센류라고 한단다. 이 책은 노인들의 일상과 고충을 그려낸 실버 센류당선작을 모아서 소개한 책이다. 매해 센류 공모전에 상당한 경쟁률을 보이는 응모작들 가운데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얼핏 일상에서 마주하는 쓸쓸함을 담고 있지만 그 표현이 참 유쾌해서 마냥 슬프지만 들리지도 않는다. 거기에 이 짧은 글을 다 읽고 나니 저절로 느끼게 되는 것도 많아서, 노인의 삶을, 그들이 건너온 시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도 생긴다. 흔하디흔한 그 말, 너도 내 나이 되면 알 거라면서 나무라던 엄마의 잔소리도 생각난다. 나이를 먹고 살아가는 동안 쌓이는 인생의 연륜이 이 짧은 시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누구나 걸어갈 수밖에 없는 그 길의 여정이 재밌게 들려서 읽는 동안 즐거운 시다. 살아가는 동안 겪는 기쁘고 슬픈 일들, 한때 잘나갔던 시절과 저물어가는 하루 같은 시간들. 나이를 먹으니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싶다. 그래도, 외모가 나이 들어가도 마음은 아직 여고생 같은데, 젊게 입어도 나이를 속일 수 없고, 얼굴에 화사하게 치장을 해도 나이를 알아보니, 그저 내 나이게 맞게 사는 모습이 정답이라는 걸 알게 되더라만...


쓰는 돈이 술값에서 약값으로 변하는 나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최근에 엄마가 넘어져서 손가락이 부러졌다. 바로 수술하고 2주 정도 병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퇴원하고 1주일 정도 나와 함께 지내고 있다. 수술을 잘 됐지만, 아직 한쪽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일상의 곳곳에서 불편함을 호소한다. 혼자서 머리도 감을 수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겠지. 병원비를 결제하는데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비싼 것을 먹지도 않고, 명품 옷을 사 입는 것도 아닌데, 병원비가 제일 많이 나간다고. 실제로 평소 엄마의 소비 패턴을 보면 병원비나 약값으로 나가는 금액이 가장 크다. 거기에 이번 입원비까지 얹어지니, 엄마의 한숨소리는 더 커진다. 금액의 크고 작고를 떠나서, 본인의 돈을 병원에 쏟아 부어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픈 거다. 너무 자주, 점점 더 큰 금액이 나가는 병원 출입이, 몸의 불편함보다 마음의 불편함을 커지게 한다.


엄마뿐이 아니다. 나 역시 하루가 다르게 병원에 드나드는 횟수가 늘어난다. 갑작스러운 무릎 통증으로 한 달 정도 치료를 받았고, 2년 전쯤 갑자기 생긴 편도결석이 이제는 더 자주 발견된다. 어느 날은 소화불량으로 내과를 찾았고, 주기적으로 치과에 다니고 있다. 어제는 손가락이 너무 아팠는데, 병원에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이다 하루가 그냥 지나가버렸다. 이 정도로 병원에 가는 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결정이 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늘어나는 건 신체의 불편함만큼이나 마음의 불안도 한 몫 한다. 어떤 것도 쉽게 선택되지 않을 때, 무거운 문제도 아닌 것 같은데 망설이다가 결정 못하고 자꾸만 마음이 오락가락 할 때.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꾸만 묻는다. 이게 맞는 건지 저게 맞는 건지.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인간의 심장은 늘 뛰고 있지만 건강한 정상인은 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부정맥 환자들은 맥박수가 건너뛰거나 너무 빨라지면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끼게 되고, 가슴의 두근거림을 호소하게 된다는, 부정맥 증상의 설명을 봤다. 누군가를 보고 가슴이 두근두근, 어쩌면 오랫동안 쉬었던 사랑이 찾아온 건 아닐까 설레다가, 부정맥 증상인 걸 알아채고 급 수그러드는 마음에 슬픔은 배가 된다. 실제로 엄마도 최근에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껴서 불안 증세를 호소하다가 검사를 하고 당황스러웠다. 부정맥이 보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나이가 들면, 내 심장이 뛴다고 해서 이게 사랑인지 부정맥인지도 확인해 봐야 한단 말인가. 사랑이 아니었다고, 착각한 거라고 인정해야 하는 마음이라니. 유쾌하게 읽고 있었지만, 시 구절의 숨겨진 뜻을 찾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 진심을 선뜻 받아들이기도 싫더라.


이 나이 되니 너무 많아 다 먹을 수 없는 콩

일본에서는 입춘 전날 자기 나이만큼 콩을 먹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이 시 구절로 이런 풍습을 처음 알았는데,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기쁨도 잠시, 내 나이만큼의 콩을 먹기에도 버거운 나이가 된 느낌을 떠올려봤다. 내 손으로 젓가락질 하면서 밥을 먹고는 있을까. 살아있느니 먹기는 해야겠고, 한 끼 먹을 때마다 소화불량으로 소화제를 달고 사는 건 아닐까. 혹시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외롭게 지내고 있지는 않을까. 그날이 그날이고, 달력의 숫자만 바뀌고 매일의 풍경이 똑같은 날들일까. 생각이 계속될수록 슬프기만 하다. 그동안 외로움을 모르고 살아왔다고, 혼자여도 괜찮다고 말하곤 했는데, 요즘은 혼자인 시간이 가끔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편하면서도 뭔가 아쉽고, 나이 들수록 모르는 거 많아지는데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는 일상이 괜찮을까 싶은 불안함.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남편의 친구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친구들이 모여 서울의 장례식장에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려고 장례식장을 나섰는데, 늦은 시간이라 택시가 하나도 보이지 않더란다. 앱으로 부르면 금방 오는데, 추운데 길에서 떨고 있었냐고 물으니, 한참 기다리니 택시 두 대가 나란히 들어와서 3명씩 나눠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고 한다. 50대 아저씨 6명이 있었는데, 앱으로 택시를 부를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여기에서 출발할 때도 내가 택시 불러줘서 기차역까지 타고 갔는데, 설마 서울에서 내려올 때도 그럴 줄은 몰랐다. 평소 운전하고 다니니 대중교통 이용할 일이 거의 없어서, 택시는 물론 카드 찍고 버스 타고 다니는 방법도 모르긴 하더라. 앱이 생기기 전에, 직접 전화해서 택시를 부르는 방식을 알고 살았던 사람들이, 변해가는 세상에서의 적응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지금도 전화로 택시 부르는 방법은 가능하긴 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변화에 금방 빠져들기 어렵다는 일이기도 하다.


일어나긴 했는데, 잘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

연세가 많으셔서요그게 병명이냐 시골 의사여

종이랑 펜 찾는 사이에 쓸 말 까먹네

연명 치료 필요 없다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

내용보다 글자 크기로 고르는 책

손주 돌아가니 아내와 적막하게 숭늉 먹는다

경치보다 화장실이 신경 쓰이는 관광지


문장 하나하나가 강렬하긴 하다. 짧은 구절 하나에 직구를 날리는 듯한, 의미가 너무 크고 깊었다. 가볍게 웃고 넘기려니 목이 막히기도 한다.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아서, 실제 내가 직접 경험한 것도 있고, 옆에서 보는 엄마의 모습이기도 하다. 고령사회, 초고령사회의 흔한 노인의 모습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시들을 그저 서글프거나 하는 마음으로만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하는 노인의 표정을 상상하면서 공감하기도 하고, 삶의 희로애락을 다 겪은 이들이 건네는 노년의 풍경이라고 이해하고 싶기도 하다. 팍팍한 날들에 한발 떨어져서 세상을 보는 여유로움도 느껴진다. 그 안에 담긴 웃음을 먼저 마주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거실에서 엄마가 머리 감겨달라고 부르신다. 한쪽 손을 못 쓰는 불편함을 어서 가서 달래드려야지.


#사랑인줄알았는데부정맥 #센류 #실버센류 #일본도서 #노인의일상

##책추천 #책리뷰 #신간도서 #우아한인생이야기 #아름다운시간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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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lC 2024-01-2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누구나 젊어본 적 있는 예비 노인이잖아요.
영화관, 공연장보다 병원 출입이 점점 더 잦아지는 요즘 공감도 가고 웃프기도 하네요. 특히 부정맥은... 진짜 조심해야겠어요😭

구단씨 2024-01-28 11:51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예비 노인.
저도 환자로 보호자로, 병원 출입 더 자주 하게 되네요.
나이 들수록 챙겨야 할 거 첫 번째가 건강 아닐까 싶어요.

호시우행 2024-01-25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절기엔 더욱 조심해야 하는 부정맥, 제 아내도 여러 차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요. 선천적으로 약한 심장을 갖고 태어났으니ㅠㅠ

구단씨 2024-01-28 11:52   좋아요 0 | URL
정말 조심하셔야겠어요.
저희 엄마도 이번에 전신 마취 때문에 몇 가지 검사했는데,
기존 알고 있던 내용을 더 심각하게 확인하게 되었어요. 부정맥, 동맥경화, 심장 판막의 문제 등.
조금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완전 식겁했네요.

호시우행 2024-01-2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에 더욱 관심을 갖고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2024-02-21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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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엄마가 입원한 병실에는 4명의 환자가 거쳐갔다. 작은 병원의 2인실인데, 대부분 노인인 데다가 몸의 어디 한 군데든 수술을 한 환자들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건 당연했으니, 누군가 돌볼 사람이 상주해야만 했다. 그중 세 번째 환자는 보호자도, 간병인도 없었다. 당연히(?) 내가 그분을 화장실에도 모시고 갔는데, 밤에 내가 없는 시간에는 엄마가 그분을 휠체어에 태워 화장실에 같이 갔다고 했다. 엄마도 손을 수술해서 불편한 사람인데, 환자가 환자를 돌보는 상황이 된 거다. 그것도 생판 남을.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치료 받고 쉬어야 할 엄마가 이런 일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내 마음이 전혀 편하지 않았다. 어지럼증으로 고생하는 엄마가 옆 침상의 소리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자고 불편한 상황은 더 커져만 갔다. 화장실에 가겠다고 부스럭대면서 몸을 움직이는 소리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분은 연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그런 말도 불편했다. 사소한 일인데 사소하지 않았고,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모른 척할 수 없는 상황이 그저 어렵기만 했다.


돕는다는 의미. 크게 작게,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이 되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온전히 나만 생각하면서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을 위태롭게 하는, 나의 가족에게 닥칠 불행을 알면서도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게 언제나 가능할까?


40대의 남자 빌 펄롱의 그날은 이상하기도 했고, 특별하기도 했다. 나라 전체가 실업과 빈곤에 허덕이는, 혹독한 겨울이었다. 빌은 부자가 아니었지만, 먹고 사는데 부족함은 없었다. 아내와 다섯 명의 딸과 행복했다. 특별할 게 없어도 별일 없는 날들이 그저 감사하다는 게 뭔지 보여주는 가정이 아니었을까. 도시는 쇠락해가고, 굶주린 사람은 늘어만 가는 날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아침, 그는 수녀원으로 땔감 배달을 갔다가 창고에서 한 여자 아이를 발견한다. 맨발에 때가 낀 상태로,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를 아무 일 없듯이 수녀원에 데리고 들어간다. 수녀원에서 불법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는 확인할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알고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는 할까 싶기도 하고. 수녀들의 품으로 돌아간 여자 아이는 말끔한 모습을 하고 그들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빌은 여자 아이의 첫 모습을 잘 못 본 거라고 여기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마주친 모습은 그의 일상에서 잊히지 않았고, 수시로 떠올리는 기억이 됐다. 그 여자 아이의 모습이 수녀원의 실상은 아닐까. 소문으로만 듣던 수녀원의 불법적인 일이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빌은 이 여자 아이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끝도 없는 고민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고, 그는 잊으려는 듯하면서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기억을 안고 지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수녀원으로 찾아간 그는 확신했다. 그 여자 아이가 다시 창고에 갇혀 있으리라는 것을, 다시 그 여자 아이를 창고에서 발견한다면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의 마음이 가는 대로, 그 여자 아이를 집으로 데려갔을 때 벌어질 일을. 그의 삶이 아주 불편해질 것이고, 그의 딸들이 다닐 학교에서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주의를 줄 정도로 위험에 빠질 것을. 그의 가족의 안위가 보장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여자 아이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마음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에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에 이르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혼란스럽고 많은 생각 끝에 그 여자 아이의 손을 잡았는지 알기에 숨이 트인다. 추운 새벽, 그의 야적장 자물쇠가 얼어붙어 있던 날, 처음 본 집의 문을 두드리고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를 건네받았던 그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친절은 누군가의 목숨을, 삶을 구원하는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어렵기만 한 시절에, 시들어가는 채소 한 바구니에도 고맙기만 한 날들에 보여준 손길이었을 것을.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119페이지)


미시즈 윌슨은 미혼모인 엄마와 그를 버리지 않고 도움을 주었다. 그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주었고, 그의 형편에 부족하지 않고 성장하게 해주었다. 물론, 바라는 모든 것을 채우려고 한다면 한없이 부족할 수 있지만, 그가 가진 조건으로 보자면 그의 성장 과정은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게 미시즈 윌슨이 내민 손길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면, 그가 수녀원 창고의 여자 아이에게 내민 손길은 한 사람의 인생을 구원하는 첫 온기였으리라. 그에게 다가올 불행을 걱정하면서도 그의 선택에 은근한 응원을 실어주고 싶은 이유는 그 작은 여자 아이가 나일 수도, 나의 가족일 수도 있어서. 어느 날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누군가 나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에 말이다. 서로 돕고 사는 삶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빌 펄롱의 말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엄마와 같은 병실에서 보호자 없이 지내던 어르신은 다인실로 병실을 옮겼다. 입원한 첫날부터 돈이 없다고, 다인실에 자리가 생기면 자기부터 옮겨 달라고 간호사만 보면 말씀하시곤 했는데, 대기자가 많다고 했는데 갑자기 옮긴 걸 보면 그분의 사정을 누군가가 배려한 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어제는 엄마가 그분 병실에 가서 인사를 나누었다는데, 그분은 보자마자 또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고 한다. 여기 병원에서는 식사 때 개인적으로 수저를 준비해야 했는데, 첫날 아무 준비도 없이 입원한 분에게 내가 집에서 일회용 숟가락 젓가락을 몽땅 갖다 드린 일이, 그게 아직도 고맙다고 하신다. 자녀들이 있지만 멀리 산다고, 이렇게 병원에 입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이번에는 아예 연락을 안 했다고 말씀하시던 그분의 말이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녀가 부모의 간병을 책임져야 한다거나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일을 보험 드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아이가 없이 살아가는 내가 언젠가 이런 상황을 경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분의 모습은 어느 날의 나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씁쓸하기도 했고, 서글프기도 했고, 변해가는 세상의 당연할 수도 있는 모습이기도 한 그 장면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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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1-1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몇달간 병동생활을 했어서 느낀 점들이 많네요. 그곳의 공기와 적막함은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보다 이 작품 자주 보이던데 리뷰보니까 읽고싶어지네요. 겨울이라 그런지 좀 울적해지고 싶나봐요🙂

구단씨 2024-01-18 16:28   좋아요 1 | URL
그곳의 공기와 적막함은 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

이 작가의 전작도 좋았는데, 이번 작품도 짧은 글에 느끼는 바가 많아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