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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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홀레 시리즈를 이가 빠진 것처럼 읽어왔으니, 그 오랜 세월 동안 해리가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온 모습을 다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꾸준히 찾아서 읽게 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에게 잡히는 악당들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그에게 남아있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안쓰럽기도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서 지켜보고 싶으면서도, 어쩌면 그가 겪는 고통의 시간이 그가 범인을 쫓는 원동력이 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작품을 펼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렇게 빠진 이를 하나씩 채워가는 재미를 배우는 중이어서 그런가. 점점 해리의 시간 속에 빠져들던 중에 시리즈의 12번째 작품 을 만났다. 10년 동안 한 권도 빠짐없이 만나온 독자는 어땠을까. 전작 목마름에서 이룬 해리의 행복에 기도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는데, 그의 인생 이제는 고통 없이 활짝 필 수 있었을까?


전작의 해리는 라켈과 결혼했다. 이제 더 행복해지는 일만 남았구나 싶었을 때, 이 소설의 첫 부분은 술에 절어있는 해리였다. 그렇게 행복한데 왜 그는 다시 술에 파묻힌 채로 오늘을 버티고 있는가. 경찰학교에서 학생도 가르치고 그의 심신도 안정되어 보였는데, 다시 살인범이 나타나면서 해리는 현장으로 복귀한다. 나쁜 놈도 잡았는데 그의 삶은 왜 자꾸 피폐해지는지 모르겠다. 해리 개인의 일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날도 술에 취해 누군가에 의해 집으로 옮겨진 해리는, 다음 날 자기 몸의 피 칠갑을 이해하지 못했다. 옷에는 여기저기 피가 묻어있었고, 그의 손도 피투성이였다. 그의 기억은 전날 밤 술을 마시던 바에서 멈춰있었다. 그가 술을 마신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이 정도로 기억이 끊긴 적이 있었나? 바의 사장과 다투면서 묻은 거로 생각하기에는 피가 묻은 정도가 과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살인 사건들. 한 여성의 살인 사건은 남편의 자백이 있어도 믿을 수가 없었는데, 그가 사랑하는 라켈의 죽음 소식은 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약혼자라 불리는 연쇄살인범이었다. 스베인 핀네. 이 미친 녀석이 해리에게 복수하고자 라켈에게까지 손을 뻗은 듯하다.


이제 해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라켈을 죽인 범인을 찾는 것.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작은 단서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해리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스베인 핀네를 의심하고 그를 쫓으면서도, 그날의 사라진 기억을 찾으려고 애쓸수록 다른 게 보이기 시작한다. 누가 라켈을 죽인 것인지 단 한 사람으로 단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스베인 핀네가 아닌가? 해리와 연관된 사람이 계속 등장한다. 그들은 자기 일을 하면서도 해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데도, 그게 진심인지 읽는 나도 자꾸만 의심이 든다. 무엇보다 해리는 라켈의 남편으로 범인의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으니, 나는 해리마저 의심해야 했다. 누구도 놓칠 수 없었고,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라켈이 죽은 날 밤, 해리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싸우기까지 했다. 그의 옷과 손에 묻은 피는 그날 바에서 묻은 게 맞는 걸까? 아니면 해리에게 지워진 기억 속에 라켈의 죽음과 연관된 뭔가가 있는 걸까? 해리 역시 그 부분을 찾으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그는 여러 용의자를 쫓으면서도 그 자신마저 의심해야 했다. 그동안 그가 겪은 고통은, 라켈을 죽인 범인 속에 자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다.


왜 하필 칼이었을까. 이 소설의 제목은 단순하게도 한 단어, 한 글자다. . 다양한 살인 도구를 뒤로하고 칼 하나로 피해자들을 괴롭힌 이유는 뭘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고만 있다가, 이 책을 다 읽고서 작가의 인터뷰를 소개한 부분을 봤다. 칼로 살인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가까워야 하는데,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가장 가까운?’ 그럼 해리가 범인일까? 설마, 그럴 리가 없어. 그럼 누구지? 라켈과 가까운 사람이 해리 한 명은 아닐진대, 도대체 누구란 말이야?


상대방과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에서, 귓가에 살짝 입을 대고 하고 싶은 말까지 더해가면서 찌르는 칼의 잔인함은 어느 정도일까. 특히 가까운 사이에서 파고들어 오는 칼의 깊이는 말할 수 없는 공포였을 것 같다. 나를 찌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바로 눈앞에서 확인하고 있는 거니까 말이다. 소설 속 범인을 찾는 일이, 범인이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 살인의 이유가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살인범을 찾는 과정에서 보이는 해리의 고뇌를 볼 수 있던 게 이 소설의 미덕이 아닐까 한다. 거기에 해리 주변 사람들의 삶을 엿본 것도 있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해리 역시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테고, 그 상처가 고스란히 되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특히 라켈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후회가 그를 더 아프게 했을 거다. 그의 죄책감은 더 깊어지겠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좌절, 고통, 사랑, 믿음, 배신, 질투 같은 감정들을 모두 본 것만 같다. 해리 역시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누군가의 실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갈등하며 헤어질 수도 있고, 잘못을 알면서도 미워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한다. 인간이어서 그렇다.


사랑으로 시작된 모든 것. 좋은 감정, 나쁜 관계, 선한 마음, 악랄한 복수심, 피와 살인, 연쇄살인범, 사건을 추적하는 경찰, 각자의 비밀. 모든 요소가 잘 어우러져 함부로 범인을 단정할 수 없게 하면서 추리소설의 쫄깃함을 느끼게 한 작품이다. 한 작품 한 작품 읽을 때마다 해리의 고통이 끝나기 바라는 독자의 간절함을 무시하는(?) 작가의 다음 무기는 무엇일까. 더 잃을 것이 없다고 여겼던 해리에게 라켈을 잃는 고통을 선사한 작가가 어떤 이야기로 다시 해리를 소환할지 기대된다. 이런 재미의 벽돌책이라면, 등에 이고지고 다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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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감각
김보영 지음 / 아작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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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읽고 반해버렸는데, 찾아보니 생각보다 작가의 작품이 많았다. 12년 전에 절판된 초기 소설집이 복간되어 독자 앞에 나왔는데, 최근작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지만 역시 김보영 작가의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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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곽재식 지음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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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안 변했어. ㅎㅎ 저자의 작품을 읽은 지 오래되었다. 재미있는 건 알았지만 그 세세함은 기억나지 않았고, 얼핏 작품의 분위기만 생각나던 터에 만난 작품이다. 평소 방송에서 보던 그의 재치 있는 말솜씨가 문장에 그대로 묻어난다. 그러니까 문장으로 보는 방송 화면 속의 곽재식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듯하다. 작가이기도 하면서 교수도 겸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의 수업을 듣는 재미도 상당할 것 같다. 자칫 지루하고 어려운 과학 수업을 이런 강의로 듣는다면 졸림에 눈 비비는 학생은 없지 않을까. ^^


헌혈하고 받은 빵이 이상하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은 지구의 인간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알게 된 묘한 현상 하나로 시작되었다. 내 피를 뽑아내어서 누군가의 몸으로 들어가는 피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그 피를 뽑을 때는 누구에게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면서도 선뜻 내 몸에서 뽑히는 피를 지켜보는 인간의 마음은 무엇일까. 인간이 아닌 이가 지켜보는 지구인의 행동은 의아했지만, 이미 지구인으로 그 시선을 따라가는 나는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헌혈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헌혈 독려 소설쯤 되시겠다.


미치도록 팔딱팔딱 뛰면서 읽었던 소설이 바로 슈퍼 사이버 펑크 120이다. 읽을수록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저자도 우리와 같은 경험이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왜 사이버 세계에서 우리는 편해질 수 없는가. 웬만한 사이트 하나 이용하는 정도가 뭐가 어때서 매번 회원가입의 절차를 거쳐야 하느냔 말이다. 주인공은 운영하는 회사에 문제가 생겨 정부 기관의 고지서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 확인을 위해서는 기관의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 말로만 들으면 간단하겠지만, 한 고개 넘으면 또 한 고개 등장하는 가입 절차를 당신은 기억할 테지. 서류 한 장 확인하려는데, 이 프로그램을 깔아서 확인하라고 하고 주소를 적으려다가 버벅거리며 첫 화면으로 돌아가고. 보안 프로그램은 왜 또 애를 먹이는가. 120분 안에 마감해야 하는데 속절없이 시간만 허비하게 하는 가입 절차라니.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려워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있는 알림 내용 같은 것을 찾아내려 모니터 '뚫어져라' 쳐다보고 헤매던 기억이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이거 뭔가, 정말 간단하고 쉬운 절차로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님?


판단이라는 작품은 문장 하나하나가 울분을 토해내게 했다. 너무 흔하게 봤던 직장 상사의 갑질이 아니던가. 새로운 직장에 출근한 김 대리는 이 과장에게 공격당한다. 인사로 고개만 까딱했다는 게 이렇게 잔소리를 넘어서는 인격 모독을 당할 일인가? 김 대리의 태도를 지적하며 끝이 없는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이 과장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은 이 소설을 읽는 모두의 마음이렷다. 이 공격을 받으면서 우리는 고민한다. 이걸 계속 듣고 있어? 아니면 한방 받아칠까? 길고 긴 이 과장의 진상 발광이 끝날 무렵 김 대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궁금했다. 결론은 안타까웠지만, 현실에서의 우리 역시 김 대리와 다른 선택을 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싶다. 직장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그 우위에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남자는 기억에 문제가 있다. 기억 밖으로 도주하기는 한 인간의 고뇌를 엿보게 한다. 도망치는 남자가 잡힐까 봐 가슴을 졸이면서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를 응원하고 있다. 이유도 모른 채로, 그가 잡히지 않기를. 그러다가 그의 기억 한 자락이 떠오를 무렵, 그가 닿은 어느 집 문을 열고 났을 때는 가슴이 아파져 온다. 그의 사랑, 그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왔을지 듣고 싶어서 말이다. 의외의 반전에 눈물이 핑 돌았던 건, 어쩌면 언젠가 우리가 맞이할 장면일지도 모를 기시감 때문이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까. 오늘의 고단함마저 감사하게 여기고 싶은 순간이다.


열 편의 작품 모두 흥미롭고 재밌다. 전설의 괴물을 불러온 이상한 녹정 이야기, 시간여행 이론을 바탕으로 한 시간여행문, 게임 속에 있다는 걸 인지한 게임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신들의 황혼이라고 마술사는 말했다등 우리 일상에서 마주하는 일상적인 모습에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야기 자체로도 즐겁지만, 소설 곳곳에 과학 이야기가 카메오처럼 등장하는 즐거움도 볼만하다. 그렇다고 그 과학 지식이 소설의 흐름을 방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짧은 정의를 보태주는 것 같다.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하나의 세계를 여행한 기분이 든다. 그 세계는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우리 삶을 비춘다. 공동체로 살아가며 베풀어야 할 일들, 우리가 맞이하게 될 인생의 후반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이들의 고단함을 봤다. 저자가 단순하게 흥미로만 적어본 SF소설이 아니라는 말씀.


소설 속에 우리가 겪는 현실이 있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삶의 고단함도 있겠지만, 저자는 재치와 반전의 판타지를 더하며 인생이 그리 쓰지만은 않다는 것도 보여준다. 인간미까지 놓치지 않는 작품들에 감동까지 더해졌으니, 우리 사회를 보는 맛이 절망적이지 않다는 희망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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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나의 첫 세계사 여행 : 유럽.아메리카 + 중국.일본 + 인도.동남아시아 +서아시아.아프리카 - 전4권 나의 첫 세계사 여행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송진욱 그림 / 휴먼어린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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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읽다 보면 세계여행하고 싶어질 테고, 그렇게 여행과 세계사 공부까지 한꺼번에 완성하는 책. 쉽고 재밌게 세계사를 학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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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겨울의 책의 말들을 읽다 보면, 언급된 100개의 문장 때문에 그 문장이 담긴 100권의 책이 궁금해지는 건 당연했다. 목록 중에는 내가 읽은 책도 있지만 몇 권 되지도 않더라. 그마저도 내가 읽은 그 책에 그런 문장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긴, 시간이 지나고 읽었던 책을 다시 들춰보면서, 내가 밑줄 그어놓은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웃음이 날 때도 있었으니까. 왜 이 문장에 표시가 되어 있지? 분명 그때는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이었을 테고, 그 문장에 꽂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말이다. 김초엽의 추천사처럼,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안다. 독서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행위여서 가끔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장이 실은 그 책에서 가장 무쓸모한 문장일 때도 있다는 것을.’


목록을 쭉 훑다가 받아들였다. , 내가 이 책을 다 찾아서 읽어볼 수는 없겠구나. 그래서 오히려 소개된 문장에 더 눈길이 갔다. 그중에 공감하고 싶은 몇 문장만 골라봤다. (몇 문장만 고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신도 알고 있을 테니 그 고통까지 말하지는 않으리.)



만약에 말이죠, 제가 이 서점에서 내 평생의 짝을 만나게 된다면, 서점의 어느 책 옆에 서 있어야 그렇게 될 확률이 가장 높아질까요? (젠 캠벨, 그런 책은 없는데요…』)

...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ㅠㅠ 영화나 드라마가 우리를 다 세뇌한 것만 같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이런 상상 좀 해본 적 있지 않아? 도서관의 서가 사이를 돌다가 눈이 마주친 누군가와 인연이 되는, 서점의 높은 책장에 꽂힌 책을 못 꺼내 뒤꿈치 들고 손을 뻗을 때 등 뒤에서 쑥 올라오는 기다란 팔 하나가 내가 찾는 책을 꺼내주는. 말하고 보니 너무 유치하긴 한데, 그래도 이런 상상 너무 설레잖아. ㅎㅎ 유치해도 어쩌겠나, 이미 이런 걸 너무 많이 봐 버린 것을. 그러니 이런 가능성을 상상하며 서점을 찾은 이에게 서점 직원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싶다. ‘그래요, 그런 책은 없어요. 상상과 현실을 혼동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데 혹시나 이런 장면을 현실로 옮긴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으니 함부로 단정할 수도 없겠다. 그래도 이런 상상, 은근히 즐겁다. 괜히 한번 설레고 싶을 때 이런 이야기를 찾아 읽고 싶은 건 독자의 비슷한 감성이 아닐까.


그러니까 소설책을 두 번째 장만 찢어서 가지는 사람은 없잖아요. (장류진, 다소 낮음,일의 기쁨과 슬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고민할 때 이 문장이 떠오를 것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건 단순하지 않다. 듣고 생각하고, 그 말의 의미 역시 곱씹기도 한다. 책도 그렇다. 그러니 책을 읽어낼 때, 중간부터 읽어도 괜찮은 책이 있는가 하면, 소설처럼 처음부터 읽어야 내용을 확인하게 되는 책도 있다. 그 일은 왜 시작되었는지, 과정이 어떠한지, 결말은 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항상 그렇게 집중하며 읽어가면 좋으련만, 우리는 너무 바쁜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때로는 비디오 빨리 감기처럼 축약본이나 줄거리를 찾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온전히 내가 직접 읽은 책으로 이야기의 힘을 느끼고 싶다.


돈키호테는 실제로 책이 되었고, 따라서 자기 자신으로서의 책에 충실해야 한다. (미셸 푸코, 말과 사물)

누군가의 글을 읽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 글을 쓴 이의 많은 것을 상상하는 일이다. 문장 하나로, 말 한마디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이미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실제의 모습과 다른 글로 말을 풀어내기도 한다. 비슷한 경험, 이 온라인상의 누군가도 많이 겪어보지 않았을까? 이 공간에 끼적이는 말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평소에는 못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문장 하나로 나를 상상하는 사람은, 실제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문장과 전혀 다른 나를 만날 수도 있다. 나 역시 평소에 하지 못하는 말을 이 공간에 풀어낼 때도 많으니까. 그러니 우리, 어떤 글과 그 글을 쓴 사람이 온전히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미리 연습하자. 혹시라도 문장 너머로 만나게 된다면 놀라지 않게. ^^


글자와 눈앞에 있는 멋진 세밀화들이 미워지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덮어 버린 책을 베개 삼아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조르조 아감벤, 행간)

아무리 재밌는 책이라도 졸음을 이길 수 없듯이, 아무리 읽고 싶어도 읽히지 않아 수면제로 쓰이는 책도 있다. 보통 나는 취향에 안 맞는 책을 수면제로 이용하곤 하는데, 친절하게도 많은 책을 읽어온 저자가 우아하게 수면에 좋은 책 고르는 법을 알려줬다. ‘너무 흥미진진한 소설이나 자극적인 주제의 책 말고, 적당히 어려우면서 적당히 관심 없는 책이라면 완벽하다고 한다. 너무 재미있으면 책 속에 빠져들 테고, 너무 어려우면 자꾸 책 펴놓고 딴짓하겠고, 취향인 책을 만나면 또 파고들게 될 테니, 적당히 거리감(?)이 있는 책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수면제겠지. 안 그런가?


나는 무슨 내용인지 이해도 못 하면서 생소한 책을 읽어 나간다. (세라 워터스, 핑거스미스)

저자와 비슷한 이유로, 이해도 안 되는 책을 꾸역꾸역 읽은 적이 있다. 읽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기도 했고, 전투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저자의 말처럼 시간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문장으로 써진 것 이상의 많은 게 책에 있다고 생각하면, 책은 책 이상의 존재가 된다. 이런 문장을 만날 때마다 왜 책을 읽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재미로 읽기도 하고, 내가 책으로 배운 것이 무엇인지 떠올린다. 확실히 책으로 배운 것이 일상에 도움이 될 때가 많긴 하다. 소심하고 수줍은 내가 말싸움에서 이긴 적도 있다. (이렇게 활용해서 미안하지만) 결론은, 책을 읽어서 손해 본 적은 없었다는 거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읽겠다는 마음.


필요한 서류들을 가방에 넣다가 나도 모르게 손에 잡히는 책 한 권을 넣는다.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윈스턴은 일할 때는 다리 사이에 끼워 두고 잘 때는 깔고 잤던, ‘그 책이 든 손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지 오웰, 1984)

작은 가방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공간의 많은 이가 나와 비슷할 거로 생각한다. 어차피 나가서도 이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탁자 위에 있던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고 나간다. 너무 무겁지 않은, 집중해야 내용이 기억될 두툼한 소설보다는 끊어 읽어도 괜찮은, 하다못해 주간지라도 가방에 넣고 나간다. 읽다 보면 뭔가가 남겠지. 실제로 지금은 격주로 발행되는 잡지를 자주 넣고 다니는데, 의외로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읽는다. 항상 읽지 못하고 폐지로 버리곤 했는데 말이지.


책을 옮기거나 먼지를 털어 낼 때마다 거기에 시선을 던지고, 띠지의 글을 읽고, 우연히 어떤 페이지를 읽고, 그렇게 조금씩 대부분의 내용을 흡수했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책 한 권 한 권이 깨끗해 보이는 것이, 모든 책을 자주 읽거나 자주 먼지를 터는 게 분명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보라색 히비스커스)

지금 집으로 이사하면서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 방 한 칸을 나에게 양보했다. 방 두 개 중 하나를 나에게 내어주면 자기의 공간은 없을 텐데, 괜찮다고 한다. 이사하면서 어느 정도는 버리고 갖고 있을 책만 가져왔는데도, 이 집의 책방은 다시 이사 오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책장을 청소하는지. 솔직히 말하면, 책장의 먼지를 털어낸 적이 거의 없다. 책 한 권 꺼내는데 손에 뭐가 묻어나오지 않는 이상 책장 청소를 생각한 적도 없다. 지금처럼 이사할 때나, 책을 몽땅 버리자고 정리할 때가 아니면 말이다. 이 문장을 봤을 때 그 생각이 났다. 예전에 편지를 버리려고 하나씩 꺼내 볼 때, 정작 정리는 못 하고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시절의 편지들을 다시 읽느라 시간을 다 써 버렸던. 책 정리도 그렇게 하면 될까? 청소하면서, 한 권씩 꺼내면서, 조금씩 다시 들춰보면서 다시 읽는 시간으로?


테크 기업들이 인류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흡수해 버리려고 해도, 종이책 읽기는 그들이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몇 남지 않은 영역이다. (프랭클린 포어, 생각을 빼앗긴 세계)

우리,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한 손에 들고 쉽게 페이지를 넘기는 전자책은 너무 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종이책을 계속 사는,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이 문장을 보면서 정말 세상의 발전이 종이책 영역으로는 파고들지 않았으면 싶기도 하다. 우리 집 작은 책방에서 책이 넘쳐 흘러도, 정리하지 못해 쏟아져 내려도,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먼지가 쌓여있어도 종이책이 내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 듯. 그래도 한 번씩은 정리해야지. 책을 적당히 들이고 내보내면서, 그때마다 살짝 책장의 먼지를 닦아주기도 하면서 그들(?)이 종이책을 손에 넣지 못하도록 지켜야지.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 책을 한 권 들고 가서 오래오래 베이글을 먹는 건 윤나만의 즐거움이었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정세랑 소설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내가 바라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느긋한 아침에 집 근처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며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 상상만 해도 즐거운데, 현실은 주말 아침에 다른 일정이 없으면 꼭 늦잠을 자고 말리라 다짐하면서 전날 밤 잠든다. 일어나면 아침이 아니라 점심에 가까운 시간, 그날의 첫 끼니는 점심때를 훌쩍 지날 때도 많다. 그래서 나에게 이 문장은 상상만으로 멈추기 일쑤다. 잠이냐 로망이냐. 선택은 늘 어렵다.


탑승 수속을 할 때 무게 제한에 걸려 이민 가방을 풀고 밑바닥에 있는 책을 몇 권 꺼내야 했어.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어딘가로 움직일 때마다 늘 가방에 책이 있다. 며칠씩 이동할 때도 책을 몇 권 추린다. 그냥, 습관처럼 그렇게 책을 골라놓을 뿐이다. 몇 권은 챙겨 넣고, 몇 권은 넣었다가 뺐다가. 읽지 못할 것 같아서 빼고 가방이 무거워지니 빼고. 다시 생각해보니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넣고 좀 무거워도 책이니까 넣어야 한다고 우기면서. 책은 정말, 가까이하고 싶은데 가끔은 이렇게 가까이하기를 고민하게 되는 이유가 생긴다니까. 여행 가방에 챙겨 넣을 게 너무 많은데, 그 공간을 책에 나눠준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불청객이 올 때를 대비해서 책을 세워 들어요.” (뮤리얼 스파크,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나를 건드리지 마.’ 무언의 경고를 하고 싶을 때 이어폰을 끼고는 했다. 음악을 듣지 않아도 그냥 귀에 꽂아두면 선뜻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말 걸지 말라는 의미는 전달된 것 같아서, 그거면 됐다고 여겼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지만 않는다면 이 평화는 계속되겠지. 그와 비슷한 이유로 책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걸, 책을 읽으면서 느낀다. 책을 펼쳐놓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려면 약간 고민하는 마음이 생긴다. 집중하고 있는 상대를 방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든다. 이 문장을 보고 감탄했다. 이런 방법이 있었네! 언제 올지 모를 불청객을 대비해서 책을 세워 들으라니. , 그럼 일단 내가 책을 읽고 있다는 표시를 강하게 하는 것, 그것만이 불청객을 해치우는 방법이 되겠군. 너무 좋은 방법이야.


내가 읽고 대화를 경청하는 책 속의 인물들과 나 자신이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 이상하게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그게 어떤 소설이 되었든,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그것이 모두 허튼소리라는 것을 숙지해야만 하며, 그러면서도 읽는 동안에는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어슐러 르 귄, 어둠의 왼손)

책을, 소설을 왜 읽느냐고 묻는다면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어서 속상했다. 뭔가 이유는 있는데 그게 또 전부는 아닌 것 같고, 허구의 세계에서 뭘 하느냐고 핀잔이라도 듣는다면 그게 또 기분이 나쁘고. 이 묘하고 어정쩡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는데, 어슐러 르 귄의 문장을 보니 알 것 같다. 소설을 허구이지만, 그 허구의 세계에 있는 동안은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에 빠져들고 즐기면서 현실로 돌아오면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을 듣는 게 좋았고,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이들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는 게 좋았다. 그거면 된 거지, .


그러나 고독한 이는 모름지기 책을 벗 삼아야 한다. (라르스 스벤젠, 외로움의 철학)

책이 우리 인생을 구원해줄 거로 믿지 않는다. 책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책을 놓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덜 외로우려고 그러는 건 아닐까? 책은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취미이자, 혼자서도 외로움을 덜어낼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책을 친구 삼아 대화하고 소통하며 세상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인간이기에 외롭지 않기는 어렵겠지만, 책을 좋아하는,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책이라는 친구로 덜 외롭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 역시 그러하기를.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누구나 할 말이 많을 듯하다. 그래서 독서 토론도 하는 건가 싶지만, 선천적으로 게으른 인간인 나는 독서 모임에 참여한 적이 없다. 내가 나를 안다. 꾸준히 성실하게 독서 모임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책을 읽고, 약속한 시각에 각자 읽은 책을 이야기하는 일이 나에게는 버거운 일이기에 진즉에 포기했다. 대신,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나 혼자 재밌게 읽어야지 하는 다짐은 변함이 없다. 어쩌겠어,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 이렇게라도 만나는 책의 많은 이야기가 그저 반가운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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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6-17 0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책의 한 문장들을 꼽아 써내려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문장들이 특히 책에 관한 부분인 건 몰랐네요. 이거야말로 책에 관한 책에 관한 책이로군요! ㅎㅎ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구단씨 2022-06-20 20:24   좋아요 2 | URL
100개의 문장이 다양하게 담겨있는데요. 지금 보니 제가 골라본 게 책에 관한 문장들이네요. ^^

바람돌이 2022-06-17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책에 관한 문장들을 만나면 할 말이 많아지는 우리들이잖아요. 김겨울 작가가 뽑은 문장도 좋고, 구단씨님의 대답도 좋고 , 독서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가 저랑 똑같아서 더 좋고요. ^^

구단씨 2022-06-20 20:23   좋아요 1 | URL
아, 정말... 독서 모임은 저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냥 저 혼자, 제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봅니다. ^^

mini74 2022-07-08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청객이 올 때 책을 세워들어요 ㅎㅎ 넘 웃깁니다 구단님 축하드려요 *^^*

구단씨 2022-07-09 00:25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방법이지 않나요?! ㅎㅎㅎㅎㅎ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7-08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상쾌하고 행복한 주말되세요.^^

구단씨 2022-07-09 00:2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푹푹 찌는 이른 더위 어떻게 견디고 계시나요?
너무 덥네요...

이하라 2022-07-09 06:59   좋아요 1 | URL
네. 정말 너무 덥지만
상쾌한 기분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분 좋은 아침 되세요. 구단씨님^^

새파랑 2022-07-08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의 말들> 좋더라구요. 당선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2-07-09 00:26   좋아요 2 | URL
편하게 읽히고 소개해준 문장들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