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5
헤르만 헤세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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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방법은 많겠지만, 선과 악 그 사이에서 서성이다가 어느 길로 가는지 알 수 없어서 방황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우고,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며 태어난다. 얼마나 많이 깨뜨려야 완전한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 노력의 끝이 없다는 말인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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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의 직원은 당연히 여성이어야 한다는 건 무슨 선입견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콜센터에 전화하면 남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상하게도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한 마디면 될 것을 여러 번 물을 때마다 왜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지 짜증이 났다. , 이래서 고객센터는 여성이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더랬다. 이런 오류는 여성인 내가 여성의 감정노동을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가볍게 생각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콜센터 상담원에 관한 이야기를 이 책으로 처음 만난 것도 아닌데, 이 책이 유독 더 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히 감정노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흡연에서 접근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악질 진상에 감정이 병들어가는 존재이기에 앞서 콜센터 근무환경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그동안에는 잘 몰랐던, 그저 감정노동자로 알았던 콜센터 상담원이 겪는 열악한 근무환경을 이 기회로 듣게 되었다.


구로공단의 공순이가 콜순이가 되기까지의 세월은 어떻게 흘러왔나. 가성비 높은 인력이었던 거다.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 가능한 대상, 여성이었다. 구로공단의 여성 노동자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골에서 입 하나 덜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어린 여성은 공단의 노동자가 되어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은 미미하게 자기 위안으로 삼는 데 쓰기도 했고,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기도 했다. 대부분 집에 돈을 보내기 위해 일했던 경우가 많을 테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가정에 조금이라도 보내기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처지에서, 배운 게 없어서, 남대문 시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공장의 생산 라인에 섰다. 그렇게 일하면서 폐가 망가져도 누가 치료해주지 않았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집안에서부터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살아온 생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구로공단의 공순이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콜순이로 변모하며 그 자리를 지킨다.


어느 순간 업체들은 콜센터가 필요했고, 대부분 하청에 콜센터를 유지하다 보니, 콜센터 상담원의 노동력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특별한 교육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되는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로 통했다. 그렇게 인식하다 보니 걸려오는 전화의 감정노동에, 일하는 시간에 비하면 임금은 턱없이 낮았고, 그마저도 비정규직 신세였다. 그런데도 일을 놓을 수가 없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쌓인 피로와 한숨은 담배 연기로 쏟아내고 있었다. 모든 상담원이 흡연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콜센터 상담원의 흡연율이 높은 이유를 저자는 주시했다. 왜 그녀들은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를 놓지 못하는가. 그건 고객에게 받는 감정의 피폐함뿐만 아니라 업체의 분위기도 한몫한다.


한숨들의 무덤!’

콜센터에 비치된 재떨이를 보고 어느 상담사가 한 말이다. 상담 중에는 한숨 소리조차 고객에게 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꾹꾹 눌러둔 뒤 흡연실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비로소 그 한숨을 내뿜는다. 과연 이런 제한된 한숨만이 보장되는 곳을 천국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콜센터 밖 세상이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하기에 겨우 흡연할 권리가 이렇게 큰 보상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입니다, 고객님 91페이지)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전화 받고 클레임을 처리하면 되는 단순 노동이 아니었다. 콜센터는 고객의 전화 이전에 업체의 횡포와 관리자의 지독한 채찍질이 있었다. 콜 수가 곧 돈이 되는 상황이었고, 누구보다 콜을 많이 받는 상담원이 인기가 있었다. 그중에 경주마(콜 수 많이 받는 누군가)를 키워 다른 상담원에게 자극이 되게 만들기도 한다. 처음 경주마가 된 상담원은 능력을 인정받는 것 같으면서 수입에서도 차이가 조금 생기다 보니 기분도 좋았을 테다. 하지만 그게 곧 자신을 병들게 하고 다른 상담원과의 경쟁을 부추기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콜 수 많이 받으려고 팀장에게 빵이며 간식 셔틀을 하는 것도 불사한다. 좋은 거래가 될 고객 정보를 받는 상담원은 상담을 성사시키면서 점수를 높게 받는다. 성사율 높은 고객의 정보를 받는 것조차 경쟁이다. 팀장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렇게 받은 고객 정보를 성사시킴으로써 또 한 번 능력을 인정받는 게 되는, 이상한 쳇바퀴가 돈다.


공순이가 콜순이가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한 게 없다. 낮은 임금,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열악한 근무환경, 그로 인해 높아지는 흡연율은 반복된다. 상담하다 지치면 휴게실에 가서 담배를 피우는 이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내뱉지 못한 한숨을 담배 연기로 쏟아내느냐, 아니면 휴게실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리느냐 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흡연이 몸에 좋을 리 없다. 그런데도 멈출 수 없는 이유도 분명히 있다. 이 정도면 일의 강도나 콜센터 환경의 문제를 찾아야 하는데, 이 와중에도 상담사는 여성의 몸이라는 이유로 자궁을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취급되며, ‘아이를 낳아야 하는대상으로 몸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니까, 고객의 진상 짓에도 한숨은 삼켜야 하며(이로 인해 화병은 생기고), 한숨의 배출구로 흡연을 선택해도 여성의 몸을 지키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된다. 여성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몸으로만 여겨지며, 흡연은 개인이 지키지 못한 도덕으로 판단된다는 게 아이러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콜센터 상담원의 흡연에서 시작해 콜센터 내의 문제 안으로 들어간다. 민간기업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의 고객센터를 생각해보면, 콜센터의 수요와 공급은 어마어마하다. 업주나 팀장의 횡포는 민간기업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공공기관의 콜센터 역시 상담원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어차피 하청이고, 노동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민원인에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를 상담원은 본사 직원에게 연결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 상담원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간주한다. 능력 부족으로, 평가 점수 감점으로 말이다. 콜 수, 민원 상담 해결 횟수, 고객과의 한마디에 매겨지는 점수, 화장실에 가는 시간마저 감시당하는 이들이 어떻게 일해왔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상담원들 사이의 경쟁 역시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이들이 병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감정노동을 하는 이들이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동료이기에 앞서 경쟁자였고 무자비한 상사였고 회사였다.


디지털단지 안에서 콜센터 상담사들은 과거의 여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닭장과도 같은 공간에서 감시를 받으며 몸을 통제당하고, 고객의 갑질은 물론 팀장, 매니저들의 횡포와 동료들 간의 따돌림 등 여러 문제가 겹겹이 쌓여 있다. (사람입니다, 고객님 180페이지)


콜센터의 열악한 환경은 코로나 19로 수면 위로 드러난다. 집단 감염으로 콜센터 근무환경이 언급되기 시작했고, 닭장 같은 구조로 그들이 작은 칸막이 안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알려진다. 사실 코로나 19 때문이 아니더라고 콜센터 내부 구조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깔끔한 사무실, 정해진 자기 자리, 그 안에서 상담하고 있는 모습이 뭔가 전문적이고 단정해 보이기도 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보여준 사건이 된 거다. 코로나 19는 이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들의 일을 가중하는 계기가 된다. 비대면 민원 상담으로 업무가 늘기도 했고, ·오프라인 상담원의 감염으로 근무하는 이들의 일이 늘었다. 갈수록 비대면 상담은 늘겠지만, 상담원을 힘들게 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원하청 계약의 문제와 낮은 임금, 악성 민원의 대처를 위한 보호 방법은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관리자들은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상담원들은 그들이 던지는 문제를 고스란히 감당하면서 오늘도 헤드셋을 쓰고 보이지 않는 상대를 마주하고 있다.



저자는 영국과 인도의 콜센터 상황을 들려주면서 한국의 콜센터와 얼마나 비슷하고 다른지 말한다. 콜 수에 민감하고 화장실조차 제대로 갈 수 없는 상황은 영국과 비슷했다. 영국은 점점 외주 업체를 이용하듯 인도의 콜센터를 이용한다. 의외로 인도의 콜센터는 여성 상담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건 아니었다. 고위 학력의 사람들이 상담사로 일하기도 한다. 하지만 업무나 처우는 비슷했다. 이들 역시 내용은 달라도 차별을 겪고 있으며 하청 노동자였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나라의 콜센터 상담원을 콜키퍼라고 칭한다. 시대가 변하고 여성의 인권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집안에서 남편이나 아버지가 정한 규정대로 살아왔던 시대와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때의 여성이 집안을 돌보는 하우스키퍼였다면, 콜센터 상담원은 콜키퍼로 업무 변경을 한 것 같다. 가정의 남자의 지시에 따르고 소속된 것처럼 살아왔다면, 콜센터에서는 팀장이나 다른 상사의 감시와 차별, 악성 고객에 시달리며 일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닮았다는 거다.


그래도 조금씩 달라지려는 노력에 이들이 오늘도 버티는 게 아닐까 싶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그들의 노동환경을 변화시키려 한다. 몸펴기 생활운동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굳어진 몸을 풀 시간을 만든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변화였다. 근무환경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일을 계속해야 하고, 이제 우리 사회의 필수가 된 콜센터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일할 수도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서 변화의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경제적인 이유로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이 일에 만족감과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저자의 이 취재가 콜센터 상담원을 보는 뿌리 깊은 편견과 열악한 근무환경을 변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을 읽은 나부터도 말도 안 되는 선입견에 빠져있던 걸 반성하게 된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그들이 하는 죄송합니다한 마디가 절대 당연하지 않았으며, 나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대화로 여겨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요즘 내가 하는 일과 많이 닮아서 그런지 많이 공감하면서 읽게 되는 주제였다. 감정노동이면서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힘든지 알게 된 날들이다. 남편은 사람 꼴 보기 싫어하는 내가 하루에도 몇백 명을 상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놀라울 지경이라고 말한다. 웬만한 진상은 놀랍지도 않다고 여겼는데, 한 번씩 겪을 때마다 단련이 되었다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놀라운 건, 진상들은 매일 업그레이드하여 찾아온다는 것. 여러 현장에서 벌어지는 감정싸움의 승자는 언제나 고객이다. 그럴 때 나를 보호해주는 배경이 없다면 더 힘들 것 같다. 콜센터 상담원의 상사나 회사나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때 얼마나 좌절하고 고통스러운지 듣고 보니, 이들의 인권과 노동환경 개선의 필요에 더 관심 두게 된다. 그들이 노력하는 만큼, 개선을 위해 뛰는 만큼 결실이 보이길 바란다. 많은 이의 관심 역시 그 노력에 힘을 보내는 일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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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추천 #인문 #사회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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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4-09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2-04-23 14:0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날씨가 너무 좋은 주말이네요.

이하라 2022-04-0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2-04-23 14: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 책 너무 생생하게 듣고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추천해요.

새파랑 2022-04-09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을 진심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2-04-23 14: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책 만난 귀한 시간이었어요. ^^
 
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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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서 편하지만 당연해서 상처받게 하는 존재, 사회에서 출신 성분을 따져가며 사람을 판단하는 시선, 가족 중심의 사회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묻는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른다. 부모는 어떻게 되는가, 자식은 어때야 하는가. 가족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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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 인물편 - 벗겼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벌거벗은 세계사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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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늘의 세계가 먼 훗날 어떻게 들려올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특히 요즘 기름값 전쟁을 일으킨 배경이 된 인물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세계사에 기록될까.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기름값으로 남편은 출퇴근만 겨우 하는 정도다. 주말의 우리는 버스나 도보로 다닌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장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새삼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지만, 무엇보다 이 전쟁이 얼른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경제적으로나 피해자를 위해서나. 알렉산드로스가 전쟁의 명문을 찾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마 오늘의 이 전쟁도 분명한 명분을 제시하지 않으면 세계인의 비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다.


TV로 방송될 때 자주 챙겨보던 프로그램이다. 제시간 못 맞추면 아쉬워서 다시 보기로 가끔 찾아보기도 했다. 역사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제작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치 구연동화 듣는 기분으로 부담 없이 볼 수 있었다. 매번 주제에 잘 맞는 강연자가 나와서 눈과 귀를 호강시켜줬다. 무엇보다 역사 지식이 쌓이는 만족감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우리가 역사에 쉽고 재밌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각 회차에서 만난 여러 인물 중 몇 명을 소개한다. 이미 방송에서 봤던 내용도 있지만, 미처 다 듣지 못한 뒷이야기 같은 추가 부분이 더해져 꽉 찬 느낌이다. 굳이 외우지 않아도 이야기로 기억하게 되어 얼마나 재밌는 공부가 되는지 모르겠다.


세계사에 기록된 모든 사건과 인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이미 들어온 내용도 있겠지만, 이른바 가짜 뉴스인데도 사실처럼 기억하는 부분도 있다. 이 책에서는 세계사의 진실을 들려주면서 우리가 가짜 뉴스에 속지 않도록, 가짜 뉴스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지도 보여준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다. 그녀가 하지 않은 말들, 그녀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는 상황들이 그녀를 구석으로 몰았다. 운명이 그녀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도 모른 채로 흘러왔을 뿐인데, 프랑스는 그녀를 악녀처럼 여기고 프랑스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인물로 만들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도 안 되는 유명한 말로 그녀를 비난했고, 그녀의 끝은 결국 단두대였다. 슬픈 결혼생활로도 모자라 프랑스 국민의 미움까지 감당해야 했던 어린 소녀의 인생은 참담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결합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그렇게 끝나버려 절망적이지만,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알려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보이는 것 말고, 그 이면의 이야기까지 찾아봐야 한다는 것.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한 나라, 전 세계의 진실이 다시 보일 거다.


흥미로웠던 건 폭군이라 불리던 네로였다. 어렸을 적부터 너무 익숙하게 들었던 폭군 네로.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못된 성질의 황제였다고 알았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누구도 그가 어릴 적부터 폭군이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내 기억의 오류였다. 그에게 붙여진 폭군이란 수식어가 마치 처음부터 있던 것처럼 여기게 된 건 왜일까. 네로는 엄마의 치맛바람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가 원래의 성정대로 성장했다면 어쩌면 인자하고 현명한 성군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나중의 일을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린 소년이 엄마 손에 이끌려 권력 다툼의 한 가운데로 끌려들어 갔을 때 이미 그의 인생은 그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쥐고 흔드는 대로 듣고 따라 해야만 했던 그의 성장 시기는 점점 그가 성인으로 살아가는데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결국, 여자 문제로 어긋난 모자 관계는 폭군 네로라는 이미지를 만들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그를 향한 수식어는 그의 성정에 영향을 끼친 엄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거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종종 등장하는 수렴청정과 비교하면 어울릴까?


듣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 알았던 내용과 많이 다르기도 하다. 역사에 남겨진 인물들이 모두 업적만 세운 건 아닐 테지만, 그 이면의 자세한 내용을 몰라서인지 알려진 좋은 이야기만 기억에 남았다.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적 입지와 인간미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노예 해방에 앞장섰다는 링컨 역시 그의 정치적인 발언이 온전히 노예 해방에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노예 제도를 찬성하지도 않지만, 노예 제도를 활용하는 이들의 방향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는 애매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농사에 필요했던 인력을 흑인 노예로 채웠던 미국의 남부, 기술력이 우선이라 흑인 노예가 절실하지 않았던 북부의 싸움은 사실 노예 해방을 수면 위로 올려놓기도 했지만, 무역 제재와 각자의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다. 어쨌든 전쟁은 일어났고, 북부든 남부든 피해가 있기 마련이다. 전쟁이 끝나고 무너진 지역의 복구가 우선이었지만, 이미 몰락한 농장들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우선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 있고, 링컨이 더 크게 본 것은 미국의 통합과 유지였다. 미국의 남북전쟁, 링컨의 노예 해방의 진실은 정치적인 판단이 깊게 개입되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미국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다양한 흑인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흑인을 비롯한 소수 민족을 보호하는 민권법이 탄생했으며 제대로 된 투표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고 남북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중략)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흑인 노예의 해방과 그들이 법적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와 부합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87페이지, 벌거벗은 대통령 링컨)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단순한 정의는 뒤로하고, 그 이면에는 그의 정체(?)와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돈을 좋아하는 상인이었고,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찾으러 떠났으나 그가 얻은 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신대륙 발견의 모험은 실제로 새로운 땅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터전으로 삼은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자기 문명과 종교를 강요하면서 대립하고 억압한다. 칼을 보고도 무엇인지 모를 원주민의 낙원 같은 영역을 그들은 정복하려고 했고, 살상한다. 그렇게 신대륙을 손에 얻고 좋았을까? 새로운 발견에 눈이 뜨이고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좋지만, 그만큼 부정적인 측면도 많았다. 그들이 열어놓은 여러 항로, 그리고 실크로드는 대륙과 대륙 사이의 무역이 가능해졌지만, 그렇게 오가는 많은 것 중에서 질병도 있었다고 하니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컸다. 문명이나 물질만 교류한 게 아닌 게 되었다. 얻은 게 있는 만큼 피해도 감당해야 했다. 자연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먹고 살았던 원주민은 살 곳을 잃었고, 그들의 생을 빼앗겼다. 그렇게 생긴 대륙의 발견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얻는 것만큼 내놓아야 하는 건 역시 교환의 정의인가 보다.


해적과 손잡아 대영제국을 만든 엘리자베스 1세는 여성의 몸으로 그 많은 공격을 받아냈다. 그녀의 성장 역시 고요하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스페인과 싸우면서 일궈낸 업적은 대단하긴 하다. 그 배경에 해적의 활약이 있었다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대영제국 측면에서 보면 나라가 탄탄하게 커진 시간이었으니 좋은 결과라고 해야 할까. 정치를 잘한 인물 같기도 하다. 길 위의 사람들과 전염병을 단속하려고 법을 만들고, 세금을 조정하면서 국민의 반감을 잠재우기도 한다.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나 국토 확장이나 영국 의회를 조종한 듯하다. 그래도 완벽한 군주는 아니었다. 부국강병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사람은 생기기 마련이고, 그녀의 인생에도 끝은 있으니 말이다.


궁전은 왕이 사는 곳이지만 베르사유 궁전은 그보다 더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루이 14세가 자신의 절대적 권력을 과시하는 장소인 동시에 왕이 가장 통치하기 힘든 귀족을 길들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그곳은 한번 발을 들인 귀족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덫과 같은 곳이 됩니다. (234페이지, 벌거벗은 태양왕 루이 14)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존재임을 주장하고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이를 포장했지만 살아 있는 신이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불가능한 꿈에 불과했습니다. (257페이지, 벌거벗은 태양왕 루이 14)


엘리자베스 1세와 비슷한 분위기로 읽었던 루이 14세나 나폴레옹 역시 알려진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권력에 집착이 심했고, 그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의 세우면서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돈이 드는 법. 그가 무리한 덕분에(?) 사람들은 살기 힘들어졌고, 그의 마지막 역시 초라했다. 그저 평범한 노인이 죽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생의 끝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살아온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무리하게 살아오느라 애썼던 시간만큼 칭송받으면 좋으련만, 그의 끝을 보니 그다지 현명한 왕으로 기억되지는 않을 듯하다. 나폴레옹 역시 그의 출신에 심한 고민이 있던 인물이라, 그 자신의 프랑스 황제가 되고 나서도 그는 완벽을 추구했던 것 같다. 권력을 갖기 위해 이혼도 불사하고,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기도 하지만, 그의 부족한 부분을 완벽하게 채워주지는 않았다. 그가 이뤄낸 많은 업적이 너무 과했던가. 아니면 무대뽀(?) 정신으로만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여겼던 걸까. 그의 몰락은 어쩌면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의 계획과 추위를 준비하지 못한 전쟁은 많은 병사를 죽음으로 몰았고, 그에게도 치명타를 입혔다. 백일천하로 끝난 워털루 전투까지, 그의 활약은 그렇게 끝이 난다. 분명 그에게도 좋은 평가가 있겠지만, 역사의 평가는 역시 양면이 있다는 게 맞는 말인듯하다.


칭기스 칸이 이뤄낸 몽골 역시 피를 깔고 있었다. 듣고 보면 비극의 시간이었으니, 어느 시대 어느 지도자에게도 칭송받는 것 이면의 어두운 곳이 있기 마련이라는 말이 여기서도 통한다. 절대 권력을 위한 진시황제의 폭정은 만리장성을 세우면서 극에 달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뭔가를 만들고 세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 돈에 희생당하는 건 선량한 국민이고, 자기 권력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은 역시 몰락을 부를 뿐이다. 나중에서야 드러난 진시황제의 무덤 이야기나 사진 등은 정말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위신을 세우고 싶었을까? 죽은 후에 그렇게 묻히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기는 죽고 없는 세상에 그렇게 알려지는 게 좋았을까? 여전히 나는 죽은 후의 시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진시황제의 무덤을 보면서 많은 이가 다양한 생각을 할 것 같다. 그의 힘을 여전히 느낀다고 해야 할지, 무덤까지 그 정도로 만들기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은 누가 위로해주냐고 따져 물어야 할지 난감하다.


이탈리아 사람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떨어진 중국 땅까지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은 실크로드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몽골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몽골 제국은 실크로드를 따라 교통과 통신 네트워크를 모두 연결해 실크로드를 관리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몽골 제국 전체에 철도를 깐 셈이죠. 마르코 폴로 또한 몽골 제국의 잘 짜인 역참(驛站) 교통로를 이용해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137페이지, 벌거벗은 무법자 징기스 칸)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뤘지만 이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창업(創業)은 이뤘으나, 나라를 지키는 수성(守成)은 리우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진시황제와 진나라의 역사를 통해 새로움을 개척해 나가는 창업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키고 유지하는 수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나라와 같은 일이 역사에서 반복될 것입니다. (67페이지, 벌거벗은 정복자 진시황제)


이긴 자,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라는 역사는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누가 썼든 언제 쓰였든, 이렇게 시간이 흐른 후에 진실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한 모습에 치중한 기록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과정, 끝이 있다. 우리 눈에 다 보이지 않아도 보일 수밖에 없는 장면이 있다는 말이다. 시간이 흐르듯 과거와 현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렇게 쌓여가는 시간의 기록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르니, 언젠가 마주할 장면들 아니겠나. 속성으로 배우면서 세계사의 큰 그림만 휘리릭 넘겼다면, 이제는 한 사건 한 인물 마주하면서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세계사의 흐름을 보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아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 현재가 이루어진 과거, 미래를 그리는 오늘의 이야기가 채워지는 과정을 봐야 한다. 이야기로 만나는 역사를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재밌게 역사 공부를 하는 방법 하나를 알게 되었다.


송에서 다 못 본 내용, 방송의 여러 장면에서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을 추려서 완성된 이 책으로 우리 역사 속 인물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인물이 어떤 나라를 만들려고 했는지, 시도와 성공과 실패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후의 인물은 또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 많은 인물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로 흐른다.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 지역에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보는 해석으로 지식의 장을 넓혀보자. 이런 프로그램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고, 여운을 느끼고 방송에서 못다 챙겨본 부분을 이렇게 책으로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외우지 않아도 좋은, 그냥 듣기만 해도 즐거운 역사 여행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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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의 인사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8
김서령 지음 / 폴앤니나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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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을 못 하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의 요청이나 듣기 싫은 말에 싫다고 말할 수 없어서 얼버무리고 그냥 웃고 말았던 날들. 그게 좋은 대처라고 생각했다. 막상 거절을 쏟아내면 상대는 기분이 나쁠 것이고, 상대와 내가 서먹하게 지내야 하는 분위기가 싫어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알았다. 분명하게 싫다고 말하지 못해서 이상한 상황을 만들게 되고, 내가 웃음으로 넘겼던 애매한 순간을 상대는 긍정의 대답으로 여긴다는 것을. 그래서 연습했다. 내 마음과 다른 대답을 하지 말자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태도가 아니라 안 한다고, 싫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기를 많이 했다. 지금의 나는 거절의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만,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대답하기 모호한 상황은 찾아오고, 어설프게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딘가 싶기도 하다.


한주은행 연정시장지점 한수정 대리는 평범한 스물아홉 살의 여성이다. 고향은 부산이지만 연정시가 좋아서, 사수가 좋아서 연정으로 근무지를 골랐다. 아버지와 엄마, 동생들이 있는 대한민국 평범한 집안의 첫째 딸 한수정. 좋은 사수를 만나고 연정에서의 삶이 좋았다. 혼자 살지만 외롭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인생 선배의 돌봄까지 더해지는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웠다. 철규 씨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나도 웃어요. 나는 잘 웃는 사람이거든요. 나한테 해코지도 하지 않는데 괜히 새침하게 구는 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도 하고요. 게다가 철규 씨는 우리 한주은행 연정시장지점의 주요 고객이니까요. (27페이지)


연정 시장에서 떡볶이 가게를 하는 철규 씨는 매일 오후 3시에 현찰이 든 가방을 안고 한주은행 연정시장점으로 온다. 정확하게는 한수정 대리 앞으로 와서 그날의 매출을 입금한다. 은행으로서는 단골이니 놓칠 수 없다. 싫은 내색 해서 괜히 고객 하나 잃을 수는 없으니까. 문제는 철규 씨가 올 때마다 수정에게 치근댄다는 거다. 수정을 좋아한다면서, 이러지 말고 자기에게 시집오라고, 자기만 한 사람 없다고. 수정에게 철규 씨는 은행의 고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철규 씨는 수정을 사랑한다고, 금팔찌와 금목걸이를 휘두르고 끈질기게 괴롭힌다. 웃긴 건 주변 사람들이다. 안면 있는 시장 사람들은 수정을 볼 때마다 말한다. 너무 튕긴다고, 철규에게 시집가면 호강하면서 살 텐데 왜 그러냐고, 뭘 그렇게 재는 거냐고, 그만한 남자 없다고. 왜 수정이 바라보는 철규 씨를 그 사람들이 판단하는 걸까? 당사자는 수정인데?


참고 또 참던 수정은 철규에게 야멸차게 거절을 표현했다. 그리고 2주가 지난 어느 날, 스산했던 11월의 어느 밤에 철규 씨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수정을 따라왔다. 당신을 사랑한 거 말고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며 따졌다. 그날, 수정은 죽었다.


소설은 죽은 한수정의 목소리로 서술된다. 수정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철규 씨가 눈이 돌아버린 순간 어떻게 죽었는지, 수정이 죽은 후 사건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들려준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자니 두려움이 따라오는데, 동시에 수정이 아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건 화가 난다. 누가 누구의 마음을 받아주는 게 왜 타인이 결정할 일인지 모르겠다. 수정이 철규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해서 죽어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자기 마음 자기가 결정하는데, 왜 수정의 마음은 수정이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가. 이런 상황 종종 만나다 보니, 나는 타인의 간섭과 선을 넘는 일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칫 버릇없어 보일지라도 딱 잘라서 말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사람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자주 하는 착각이 있다. 인생 좀 살아온 어른으로, 그들이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단정하면서 내뱉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연주시장 상인들이 수정에게 하던 말은,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일을 기어코 이루어주려는 착각에 저지르는 폭력이었다.


사람을 죽였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피해자와 가족들은 그가 죗값을 받는 걸 지켜봐야 하는데, 오히려 보복당할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철규 씨가 감옥에서 나온 후에 찾아오면 어떡하지? 수정의 동생이나 가족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어쩌지? 6년 형을 받고 억울하다며 항소하는 가해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이 왜 이러나. 왜 법은 제대로 심판하지 못하나. 왜 피해자는 계속 피해자로 살아가야 하는가. 잊지도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날들을 누가 보상해주냔 말이다. 어떻게 살인이 청년의 순정으로 불릴 수 있는지... 자식을 보낸 엄마는 가슴을 치느라 손이 멍들었고, 동생들은 밥 한 숟가락 뜨는 거도 죄스러워 목으로 음식을 넘길 수가 없다. 수정의 사수는 이대로 있을 수 없어 탄원서를 챙긴다. 그런데도 피해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됐다. 슬픔은 끝나지 않았고,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가 세상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 못한 사람은 누가 데려올 수 있지?


읽는 내내 서러웠다. 무섭고 화가 났다.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왜 간절히 바라야 하는 일이 되었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맵고 달달할 것만 같은 떡볶이가 이렇게 맵기만 하다니.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떡볶이를 좋아할 수 없을 듯하다. 떡볶이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철규 씨가 있을 것만 같아서, 혼자 사랑하고 혼자 배신에 떨던 그가 떡볶이 판을 뒤적이며 서 있을 것만 같다. 수정의 마지막 인사에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겠지만, 돌아간 그 자리는 처음의 그 자리가 아닐 테지. 그런데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게, 아프고 또 아프더라.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세상을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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