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유품정리
가키야 미우 지음, 강성욱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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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 주택에서 사시는 시어머니의 집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주방 싱크대 위는 빈 곳을 찾아볼 수 없고, 주방 옆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냄비가 쌓여 있다. 안방 침대 옆 옷걸이에는 옷이 가득 걸려 있어서 안쪽에는 어떤 옷이 걸려 있는지 감춰져 있을 정도이고, 냉장고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까만 봉지에 담긴 것들이 두서없이 쌓여있다. 봉지를 열어봐야 뭔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사정이 있어서 다른 동네에 있는 집과 왔다 갔다 하면서, 말 그대로 두 집 살림하시는 시어머니에게는 총 5대의 냉장고가 있다. 그 냉장고마다 가득한 것들은 언제 냉장고를 탈출하는 걸까. 다른 방이 하나 더 있지만, 누군가 와서 쉬거나 잠을 자고 갈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대부분이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집의 크기에 비해 많은 짐으로 가득해 보인다. 남의 살림이니 굳이 간섭할 필요는 없지만, 훗날 이 집을 정리해야 할 상황이 올 걸 생각하면 걱정이 가득하다.


소설은 갑자기 돌아가신 시어머니 집을 정리하러 온 모토코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하아. 한숨부터 나오는 건, 나 역시 그녀의 시선 그대로 느낄 수밖에 없어서, 가끔 가는 시어머니 집을 보는 내 마음이 그녀와 같았기 때문이다. 월세가 계속 나가는 시어머니의 집 정리를 서둘러 하고 싶은 모토코는 암담했다. 업체에 맡겨서 처리하자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고, 본인이 직접 하려고 시작하니 끝도 없이 짐이 쏟아져 나온다. 도대체 이것들로 뭘 하고 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시어머니의 집에서는 한 번도 뜯지 않은 물건부터 오랫동안 입지 않았을 옷까지, 다 먹지도 못할 음식들은 또 어떻고. 어쨌든 방법이 없으니 직접 해야만 했다. 빨리 처리하고자 짐을 꺼내고, 큰 가구나 가전은 수거 날짜에 맞춰 내놓아야 하니 차근차근 처리했다. 하지만, 정말 끝이 없었다. 종일 몸을 움직여 치우는데도 치워야 할 짐이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자기가 볼 때는 전혀 쓸모없는 물건들이지만, 이 집에서 나고 자란 남편에게는 다를 수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편에게 사진으로 보여주는 물건들의 처리를 물어보는데, 더 황당한 말이 돌아온다. 버릴 수 없다고. 그럼 어떻게 해? 집으로 들고 갈 수도 없고, 집으로 들고 간다고 하더라도 놓아둘 공간이 없는데 어쩌려고?


시어머니의 집을 정리하면서 불쑥불쑥 친어머니의 집이 생각나는 모토코.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던 어머니의 집은 꼭 주인을 닮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집안 모습, 딱 필요한 만큼만 갖고 있던 손수건처럼 집안의 모든 물건이나 자기 치장을 위한 것들을 최소한으로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성정을 보고 자란 모토코가 시어머니의 생활 방식을 쉽게 이해할 리 없다. 그러니 지금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집을 정리하면서 한숨만 푹푹 나오는 거겠지. 그때 시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녀가 처리하기 힘들어하던 물건을 지혜롭게 같이 정리해 주기 시작한다. 기부하는 곳에 보낼 물건, 수량 제한이 있지만 사정을 봐주기도 하는 시청의 수거 담당의 일 처리,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는 이웃들까지. 평소 시어머니와 잘 지냈던 이웃들은 암담해하던 모토코의 일을 도와준다. 이런 걸 보면서 그녀는 문득 궁금해진다. 이웃들에게 시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남겨진 짐들을 정리하면서 이웃들이 전하는 시어머니와의 일화는 의외였다. 시어머니의 오지랖이 불편했던 그녀와는 달리, 이웃들은 시어머니의 오지랖으로 도움을 받은 일이 적지 않았다.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을 돕고, 어쩌면 그들에게 베풀면서 본인도 주는 기쁨을 누렸던 건 아닐까. 시어머니의 소박한 일상은 나중에 발견한 일기를 통해 더 친근하게 다가오지만, 그 일기장 역시 자기 친어머니와 저절로 비교되는 모토코였다. 일기장까지 그 주인의 성격을 닮아있으니, 누군가 남긴 흔적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보는 기분이었다. 타인과의 교류에 감정 기복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던 시어머니의 일기장과 단 두 줄로 그날의 기록을 마무리했던 친어머니의 일기장. 시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불쑥불쑥 끼어드는 친어머니와의 기억은 또 하나의 시간여행이었다. 죽은 후 남겨진 물건들로 그 사람의 삶을 읽는다.


물건이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고 여겨질 때가 있다. 영혼이 깃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영혼이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의 것이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보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264페이지)


시어머니가 남긴 물건을 일일이 손으로 직접 확인한 일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시어머니의 방에 있던 수많은 유품은 시어머니의 인생을 응축시켜 보여주었다. (392페이지)


평소 우리 삶의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로 익숙한 가키야 미우의 이번 작품 역시, 내가 걱정하던 그 순간을 미리 보는 것만 같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남겨진 사람이 그 집을 정리해야 할 텐데, 시어머니의 유일한 자식인 나의 남편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면 나도 남편 대신 시어머니 집을 정리하던 모토코와 같은 상황을 겪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 오히려 업체를 부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살아온 흔적이 가득한 곳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남편은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다. 어찌 시어머니 집뿐일까. 혼자 계신 나의 엄마도 언젠가 떠날 테고, 그 집 역시 시어머니 집만큼은 아니어도 정리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답답하긴 한데, 막상 정리하면서 느끼는 마음은 사뭇 다를 것도 같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엄마의 공간이면서,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자라던 나의 공간이기도 하기에. 버려도 되는 건 바로바로 버리고 살자고, 언젠가 쓸 것 같다는 마음으로 쌓아두기엔 언젠가 쓰지 않고 버리게 될 게 너무 많다고 잔소리하는 나이지만, 한 사람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는 건 역시 쉽지 않으리란 걸, 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처리하는 과정에서 모토코가 알게 된 마음을 많은 독자가 같이 느끼지 않았을까? 남겨진 물건들로 그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고부 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기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살아가는 노력으로 또 한 번 인간에 대한 이해를 쌓아가는 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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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추천 #책리뷰 #일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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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5-30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저는 이 책 못 읽을 것 같아요. 리뷰만 읽어도 몰입되서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데요 ㅠㅠ

구단씨 2024-05-31 21:51   좋아요 2 | URL
아닙니다. ^^ 마음이 와르르 무너질 일은 없는데요.
그래도, 언젠가 일어날 일을 미리 경험하는 기분은 들었어요.
그것도 제가 항상 걱정하던 일이어서 그런지,
가볍고 편하게 읽히는 문장과는 달리 마음이 무거워지기는 하더라고요.
 
용의자들
정해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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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현유정이 실종되었고, 며칠 후 현유정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단순 실종이나 가출이 아니라 살인 사건으로 변한다. 용의자는 죽은 현유정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고, 현유정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거나 통화를 했던 사람들이다.

유정의 절친으로 보이는 한수연. 둘 다 한부모 가정의 환경이라는 점에서 공감대가 생겨 친해진 것 같지만, 친하면서도 서로를 대하는 마음은 전혀 달랐다. 수연은 유정을 성격을 좋아했지만, 유정을 부러워하면서도 질투했다. 전혀 다른 아빠를 둔 두 아이의 운명은 어느 순간 달라졌다.

유정의 담임선생 민혜옥. 퇴근 후에 도착한 유정의 문자에, 제대로 응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많은 사람의 질타를 받는다. 그때 담임선생이 유정의 연락에 적극적인 대처를 했다면 유정은 죽지 않았을까?

유정의 아빠 현강수. 빚 독촉 때문에 유정의 엄마와 위장이혼 했기에, 유정의 부모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유정의 엄마를 돌보면서도 딸의 양육을 소홀하지 않았다. 오히려 딸에게 더없이 다정하고 친구 같은 아빠인 그는 무슨 이유로 용의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승원의 엄마 김근미는 어쩌다 이 사건의 용의자가 되었을까. 아들의 잘못을 감추려고 했던 것뿐인데, 그게 이 살인 사건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 그녀는 단지 아들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유정의 남자 친구 허승원.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그 시기에 여자 친구 한 명쯤 사귀고,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행위도 하니까. 그래서 유정을 만났다. 유정을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때는 한 번쯤 그래도 되는 시기라는 생각에, 많은 남학생이 눈여겨보던 유정을 여자 친구로 삼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용의자로 보였다. 공부도 잘하는데 성적까지 좋은 유정이었는데, 그런 아이가 살해당했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으로 유정을 대했던 이가 있을 거였다. 친해 보이고 밝게 웃는 모습 뒤로 진심을 꼭꼭 감춘 누군가가 유정을 미워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유정과 친하면서 동시에 미워했던 수연을 의심했었다. 비슷한 환경에 있는 것 같지만, 부모의 태도가 전혀 달랐던 수연이 유정을 한없이 부러워하면서 질투가 쌓였을 거라고. 하지만 승원이 등장하자 이 아이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사귀자고 했으면서, 자신의 선택에 책임감이 없이 가벼운 태도로 대했다. , 이런 남자 만나면 진짜 고통스러웠겠다 싶은 공감이 저절로 생기더라. 승원의 엄마는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지키고 싶은 아들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지. 너무 다정하고 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유정의 아버지는 그래서 더 의심이 생겼다. 분명 보이는 거 이면에 다른 마음을 숨기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딸을 아끼고 보호했다. 빚 때문에 위장이혼이라고 하지만, 같이 살지 않는 아빠의 상황을 자식 역시 다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각 장마다 화자가 달라져서, 등장인물 각자의 마음을 듣는 재미가 있다. 겉에서 보면 다 알지 못할 마음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의심이 생겼다. 형사의 추궁에도 자기를 의심하는 거냐고, 각자의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다 드러냈지만, 그래서 더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알리바이를 댈 수 있는 걸까 싶어서. 게다가 모든 인물이 자기에게 유리한 진술을 할 때마다 오히려 웃음이 났다. 원래 그렇지 않은가. 같은 상황 같은 자리에 있었어도, 말하는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일을 처음 본 것도 아니어서 그런가, 이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그 결백이 오히려 의심을 낳고 있었다. 그래서 형사가 이들을 대면 조사하고 추궁할 때마다, 이들의 말을 믿는 것처럼 그 순간의 조사를 끝낼 때마다 다음이 기대되곤 했다. 진실을 향한 추적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을 알기에. 결국 진실은 밝혀지고야 말지만, 그 진실을 마주하고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형사가 용의자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복잡하게 얽힌 수수께끼가 풀리는가 싶을 때, 그들 각자의 형편과 사정으로 죽은 유정을 대하는 게 달랐다는 걸 알았을 때, 각자의 자리에서 겪는 고충이 그들을 이렇게 무자비한 인간으로 만들었나 싶어서 안타까울 때, 인간의 마음이 이런 건가 하는 궁금증과 이해와 두려움 같은 게 남았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인간의 마음이 어렵고, 이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마다 공감과 씁쓸함이 공존하는 아이러니를 안고 살아가는 게 우리라는 것을.


이 책 소개 글의 어떤 부분처럼, ‘믿고 읽는다는 독자 중의 한 명이 나다. 물론 출간작 모두를 읽지는 못했고, 거의 다 읽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래서일까, 새 작품을 읽기에 앞서 어느 정도 기대감이 생기곤 한다. 사건의 전개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즐기기도 하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추리를 하면서 범인을 밝혀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하면서 읽게 되기도 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독자이면서 범인을 밝혀내는 형사와 같은 시선으로 이야기를 따라간다. 물론, 내가 예상했던 범인과 전혀 다른 사람이 밝혀지기도 하고,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을 만큼 눈에 보이는 범인이 드러나기도 한다. 조금만 읽고 자려고 펼쳤는데, 어느 새 끝까지 다 읽어버리고 말았을 정도로 가독성은 좋다. 뻔한 내용으로 진행되건 말건, 그 책을 읽는 시간만큼 이야기에 푹 빠져있으면 되는 거 아닐까 싶으면서도, 만족감까지 채워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용의자들 #정해연 #위즈덤하우스 #소설 #한국소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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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눈앞의 현실은 당장 무너져 내릴 것 같은데, 마음만 긍정으로 채운다고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돈 때문에 생긴 위기는 돈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어떤 문제 앞에서 그 문제에 대한 답은 매번 다를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긍정마인드를 옆에 두고 싶은 이 이상한 마음은 또 뭐란 말인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게 되는, 이게 답은 아닌 것 같은데 답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대감, 확신은 없는데 이 긍정이 나에게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가 될 것만 같은. 자꾸 말이 두서없이 나와서 나도 당황스러운데, 이 말 뭔지 알지? 어쩌자고, 작가는 이렇게 대책 없이 용기 내고 싶은 이야기를 또 내놓았는가 싶다.


오랜만에 고향 대전으로 내려간 솔은, 오래전 그 시절의 비디오 대여점 <돈키호테 비디오>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 하긴 지금이 어느 시대냐. 휴대폰 하나로 모든 것을 검색하고 필요한 것을 보고 듣고 하는 시대에 비디오 대여점이라니. 비디오 플레이어도 구경하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면서, 비디오 대여점이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이다. 하지만 솔이에게 <돈키호테 비디오>는 그냥 비디오 대여점이 아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라만차 클럽으로 뭉쳐 놀던 곳, <돈키호테 비디오>의 주인장 돈 아저씨가 항상 이야기를 들어주던 곳, 엉뚱한 이야기조차 실현할 수 있는 기대감으로 바꾸어주던 곳 아니었던가. 그곳이 이제는 사라졌다. 그 시절의 친구들은 물론 돈 아저씨조차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아무도 돈 아저씨의 행방을 모르고 있던 그때, 솔이는 돈 아저씨의 아들 한빈을 만나고, <돈키호테 비디오>가 있던 건물의 건물주 성민을 만난 후 결심한다. 아저씨를 찾아야겠다고. 그 시절, 꿈을 꾸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던 아저씨,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아저씨의 그 말이 필요한 솔이에게 운명은 말한다. 아저씨를 찾으라고, 무엇이 되었든 아저씨를 찾아야만 변하게 될 것 같은, 지금의 절망을 뒤바꿔놓을 인생을 품어보라고.


소설은 방송국 PD로 일했던 솔이의 경력을 배경으로, 솔이의 유튜브 방송이 시작된다. 아저씨를 찾기 위해 <돈키호테 비디오>의 역사, 주인공들, 아저씨가 필사하던 소설을 낭독하며, 방송을 보는 모든 이들이 그 시절의 자신들을 찾아 나선다. 물론, 사라진 아저씨를 찾는 일도 멈추지 않는다. 아저씨가 남겨놓은 공간에서 아저씨의 흔적을 찾으며, 대한민국 방방곡곡 아저씨를 알 만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로, 과거의 아저씨를 만나고 아저씨의 역사를 듣는다. , 아저씨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인생을 살아왔구나, 항상 꿈을 꾸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던 아저씨의 마음은 이런 거였구나 싶을 정도로, 아저씨라는 사람을 점점 더 알게 된다. 그러면서 궁금해진다.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온 아저씨는 무엇을 찾아간 걸까. 지금 어디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 쓰고 있을까.


돈키호테의 이룰 수 없는 꿈은 숭고하다. 그것이 돈키호테의 존재 이유니까. 아저씨의 필사노트로 완독한 돈키호테의 주제 역시 꿈을 향한 모험을 펼치라는 것이었다. 쉰 살이 넘은 시골 기사가 세상의 정의를 세우겠다고 길을 떠나는 설정 자체가 꿈꾸고 있네라는 핀잔을 들을 일이다. 하지만 꿈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지금 나 스스로가 돈벌이도 안 되는, 이제 얼굴도 희미한 아저씨를 찾아 나서는 모험을 하고 있기에 느끼는 바가 크다. 내 인생 30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다고, 가슴이 뛰고 활기가 넘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게 꿈이다. 밤잠을 방해하는 꿈이 아니라 낮에 꾸는 꿈 말이다. (나의 돈키호테 134~135페이지)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단순하다. 인생의 절망을 가득 안고 있던 솔이가, 어릴 적 자신에게 꿈을 심어주던 돈 아저씨를 찾아다니면서 찾아가는 새로운 꿈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그 시절의 친구들을 다시 만난다. 그들 역시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있지만, 어디 한 구석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을 이 기회에 찾아가고 있는, 이 모험에 참여한 누구라도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시간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 역시 이들의 모험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어차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꿈과 용기를 다시 찾게 하는 메시지로 마무리될 것을 알기 때문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작가의 전작들이 그러했듯이, 이미 많은 독자가 읽었을 불편한 편의점시리즈 역시 누군가의 꿈과 다시 일어설 의지를 만들어주기에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불편한 편의점이전의 작품들도, 이후의 작품들도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 만족스럽기는 했다. 그런데도 이번 작품이, 뻔한 결말과 감동일 것을 알면서도 읽게 되는 이유는 분명했다. 여전히 우리는, 종종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헤매는 인생을 살고 있기에, 이렇게 누군가가 용기를 붙잡고 달려가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어쩌면 지금 나에게 수시로 찾아와 주어야 할 이야기가 여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몇 번의 면접에서 떨어지고 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되는 게 없는지 모르겠다며 짜증만 늘어가는 요즘이었다.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한다고 지금 무슨 일을 하지 않아도 아직 밥을 굶지는 않으니 괜찮겠지 싶다가도, 다시 병원 생활이 시작될 것 같으니 번잡스러운 마음으로 갈등하지 말고 차라리 눈앞의 일에 집중하는 게 머리가 덜 아프겠지 하다가도, 쉽게 마음을 내려놓지 못해서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꾸만 자존감이 떨어지고 이대로 있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고, 이 나이에도 이런 고민과 갈등으로 내 속을 긁어대고 있는 게 나잇값 못하는 것만 같고. 한숨만 푹푹 나오던 때 저자의 마법 같은 주문에 또 한 번 걸려들었다. 물론 소설 속 이야기가 누구나 흔하게 마음먹을 수 있는 용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이걸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이러니 쉽게 용기 내기가 어렵다는 걸 모르고 하는 얘기냐고 화를 낼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놓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이미 알겠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이런 이야기가 필요하니까. 바닥을 치는 마음을 끌어올리고, 사라져 버린 꿈과 용기를 찾아와야만 하는 인간이기에.


……여기 꼭 와보고 싶었단다. 돈키호테가 잉태된 이곳, 세르반테스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보낸 이곳이 내게 용기를 줄 수 있겠더라고.”

어떤 용기요?”

네가 말한 그 돈키호테의 열정. 어쩌면 광기. 그러니까 싸울 수 있다는 용기. 정의와 자유를 위해 거악에 맞서는 선한 힘이라는 용기.” (나의 돈키호테 384~385페이지)


솔이는 돈 아저씨를 찾아다니며 일상의 회복까지 찾아냈다. 아마 솔이 자신이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시작한 일은 아닐 테다. 해야만 했으니까, 지금 이 아저씨를 찾아내지 않는다면, 다시는 용기 내고 꿈을 이뤄가는 일이 두렵기만 할 테니까. 지금 무엇이든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뭔가가 되어 있겠지 하는 막연함과 막무가내 도전이 아니었을까. 솔이 옆의 친구들에게도 비슷한 의미의 여정이었을 것 같다. 그들 각자의 일상에서 하나쯤 더 채워갈 수 있는 것을 찾아가는 여행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읽으면서 불편한 편의점의 독고 씨가 많이 생각났다. 노숙자 행색으로 편의점 사장님의 손길을 받는다는 게 기적 같았다. 우리 사는 세상 속에 그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기적으로 다시 자기 인생을 찾아가는 사람도 생겼으니, 누군가의 손길 하나는 기적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고 기억하곤 했다. 이제 그 기적 리스트에 작가의 작품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된다. 그 시절의 우리에게 돈키호테가 되었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세월이 흘러 우리도 누군가에게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도 있다고 믿으며, 어쩌면 나 스스로 돈키호테가 되어 세상과 맞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솔이의 말처럼, 그 긴 이야기에 돈키호테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는, 로시난테와 둘시네아, 목동들과 여관 주인, 이발사와 신부, 하녀와 공작부인처럼, 많은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우리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언제나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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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5-13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 님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셨군요. 계속 버티시다보면 좋은 날이 올거라 믿습니다. 저도 그래야만 하고요. 나잇값 못하는것만 같다는 표현에 울컥했네요ㅠㅠ 부디 힘내시고 저와 함께 정신승리하시죠🙂

구단씨 2024-05-21 18:10   좋아요 1 | URL
별일 아닌 것 같은데도, 마음이 바빠져서 그런지 더 조급하고 일이 겹쳐서 오는 것 같고, 뭐 그러네요. ^^
날씨까지 더워지니 더 답답한 느낌인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뭐, 다 지나가려니 하고 마음의 여유를 찾는 중입니다.
여름이 가면 가을도 오니까요. ㅎㅎ
 
새들의 집
현이랑 지음 / 황금가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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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모으는 방법을 모른다. 가진 돈을 아끼면서 쓰고 저축하는 게 가장 안전하고 마음 편하게 돈을 모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은 여기에서도 적용되는 듯하다. 그렇게 모아봤자 오르는 물가, 치솟는 집값을 감당할 수는 없다. 지금 사는 곳 가까이에서도 신축 아파트 분양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한 번도 청약을 넣지 못했다. 지금도 H사의 아파트가 내가 사는 곳 바로 옆에 신축으로 올라가는데도 청약을 꿈도 꾸지 못했다. 당첨이 문제가 아니라, 당첨 후의 감당해야 할 것들을 계산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다들 비슷하게 말하기도 한다. 일단 당첨되고 봐야 한다고, 안 되면 도중에 팔면 된다고. 하지만 쏟아지는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서, 입주 시기 가까워지니 분양가보다 낮게 팔려는 사람이 나타나는 걸 보면 무섭다. 본인도 감당 못 했기에, 투자를 의미로 던졌을 그 집을 내 손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우리 어릴 때 하던 부루마블 게임 알지? 그것도 봐. 땅 먼저 따먹고 건물 먼저 짓는 놈이 이기는 거야. 세상이 그거랑 크게 다를 것 같아?”(54)


비둘기도 다만 한 줌의 땅이라도 내려앉아서 먹이도 먹고 물도 마셔야 사는 거지. 인간도 저녁에는 돌아와 쉴 집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근데 당신 같은 사람들이 집 싹쓸이해서 책임도 안 지는 게 새 발목 자르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허공 위 구름에 사는 사람도 있어요? 집이 열 채든, 백 채든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닙니까?”(212)


아이의 교육이나 장래를 걱정하던 평범한 주부 은주가 주변 사람들의 투자(?)에 눈을 뜨게 된 건, 지금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이의 주변 환경이 말해주고 있었다. 남편의 서울 발령을 앞두고 아이와 먼저 초월시로 이사한 은주는, 남편이 사는 집이 팔리지 않아서 현재 초월시에서 월세로 거주 중이다. 아이는 새 학교와 친구들에 만족하지만, 아이 친구 엄마가 작은 집 월세로 사는 아이와 놀지 말라고 했다는 말에 결심한다. 망설이기만 했던 아파트 투자를 자기도 해보겠다고. 이미 은주의 친구 혜경은 부동산 투자로 돈을 좀 만졌다고 했고, 직장 선배 민정도 이 분야에서 돈을 굴리면서 은주가 부러워할 만한 거주 환경을 완성해 놓았다. 그걸 보고 눈이 돌아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부동산 투자 강의도 들으면서 가장 가깝고 잘 아는 곳에 투자하기로 마음먹은 은주였다. 그것도 지금 자기가 사는 아파트를 갭투자로 몇 채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아파트 계약서를 하나씩 불려갈 때마다 뿌듯했다. 대기업이 초월시로 들어오기로 하자 집값도 계속 올라갔다. 남부러울 게 없던 그때, 나락으로 떨어질 사건들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문제는 은주의 아파트. 동대표는 집값 내려간다고 입주민들 입단속을 하고, 햇살 따뜻한 곳에 나와 있던 할머니들의 의자를 치우기도 한다. 보기 흉하다면서, 이런 것만 보인다면 집값 떨어진다면서 말이다. 아파트에 귀신이 있다는 소문부터, 갑자기 에어컨 실외기가 화단으로 떨어지고, 어느 집주인은 비어 있는 집에 청소하러 왔다가 귀신을 보고 기절한다.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산다고, 회색빛을 한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은주의 딸 지안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야기는 전환점을 맞는다.


이질감 없이 술술 읽히는 이 소설이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작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들을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무섭기까지 했다. 이게 대부분 사실이었으니까. 특히 빌라 전세 세입자들이 피눈물을 쏟아내게 하면서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법의 교묘한 틈을 파고들어 돈을 챙기는 악마 같은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숨어 있었다. 오히려 큰소리치면서 잘도 살아간다. 이런 걸 보면 부동산이 부의 축적이라는 말이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말이 진리가 되는 순간 내 집 한 칸 구하려는 사람들의 눈물은 더 많아질 것 같고, 그 눈물을 책임지지 않고 회피하는 사람들 역시 더 늘어날 것만 같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돈을 모으는 방식을 어디까지 참견하고 제재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언젠가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닐 때,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사장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냥 여윳돈 있어서 하나 사두려고 하는지(Buying), 실거주 목적으로 이사를 계획하는 건지(Living) 물었었다. 당연히 내가 살 집을 구하려고 방문했던 곳에서 들었던 이 낯선 질문이 이제는 너무 익숙하다. 그때는 참 순진했다. 집을 몇 채씩 가지고 살면서 세입자를 들이는 이들은, 원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던 거다. 누구나 여러 채의 집을 가지고, 누구나 세입자를 들이고, 누구나 부동산으로 돈을 쌓을 수 있는 건데 말이다. 그냥, 이 소설을 읽고 있다 보면 정말 은주처럼 부동산 투자에 발을 들여서 차익으로 부를 쌓는 게 현명한 건지, 무리해서 덤비는 것보다 나 쉴 집 한 칸 있으면 만족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기에 헷갈리기도 한다.


소설에서 복선처럼 들려왔던, 은주가 기대했던 호재에 찬물이 끼얹어질 것을 예상했지만, 막상 예상했던 반전이 일어나니 나부터도 기절할 것 같았다. 은주의 딸 지안이 엄마의 손목에 끈을 묶어놓았던 것처럼, 엄마가 새처럼 날아갈까 봐 걱정했던 것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웠다. 다행인 건 은주에게 이 일은 잘 마무리되었고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현실에서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소설 속 결말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현실이다.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준비를 하고 시작해야 하는지 경고해 주는 느낌이고, 지금 은주와 같은 위기에 빠진 사람이라면 어서 그 늪에서 빠져나오라는 위험신호를 보내는 것 같기도 하다. 거기에 부동산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또 다른 사회 문제와 그대로 연결되어 있는 게 그대로 보여서 뉴스를 보는 기분마저 든다. 뭐가 됐든, 삶의 우선순위를 정한 사람들의 치열한 싸움판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새들의집 #현이랑 #황금가지 #민음사 #문학 #소설 #한국소설 #부동산

##책추천 #책리뷰 #가독성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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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5-07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동산, 재테크랑은 관계없는 사람이랑 읽고 나면 어떤 마음일지...!
반전이 궁금하네요

구단씨 2024-05-11 23:24   좋아요 1 | URL
반전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절로 감지하게 됩니다. ^^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얘기라서 푹 빠져 읽었어요.
이거 보니까, 무리하게 욕심 내지 않고, 그냥 없으면 없는 대로 이렇게 살아가는 게 답인가 싶기도 하더라고요.
폭망의 후폭풍이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몇 달 전에 책에 관한 어떤 시험을 봤는데, 모두 주관식이었다. 이미 수업 들은 교재에서 그대로 나오는 형식이라 미친 듯이 외워서 쓰면 되는 거였다. 말이 쉽지, ‘~서술하시오.’라고 하는 문제에 답을 쓰기가 쉬울 리 없다. 그런데 더 어려웠던 건 마지막 문제였다. 내 인생의 책 한 권을 소개하라는 거였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이 질문이 가장 어렵더라. 책이라는 게 취향이 있어서 각자 좋아하는 최고의 책이 다를 거고, 또 하찮고 가볍게 들려도 어느 순간에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게 책이라는 거 아니겠나. 그래서 누구에게 함부로 소개해 줄 만한 책이 없다. 내 인생의 책이라고 꼽을만한 것도 없다. 그냥 그때 이 책이 참 좋았다는 정도로 기억하고 느끼곤 했다.


이번에 이 이벤트 보면서도 한참을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선뜻 떠오르는 책이 없어서 망설였다. 그러다가 책장을 살펴보는데 갑자기 눈에 들어왔던 책들이 있다. 이 책들이 각자 담은 내용도 다르고,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유치하기까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세상에 이런 책들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이 책들을 읽으면서 했던 것 같다. 세상에 필요한 책이라니, 이 정도면 이 책들의 존재 가치가 있는 거 아닌가?




 

 

<미 비포 유>

이번에 개정판이 나와서 더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루와 윌의 로맨스에 설레게 되는, 그냥 로맨스 소설로 여길 수도 있다. 나 역시 그 설렘을 잔뜩 느끼면서 이 소설의 가독성에 감탄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윌이 루에게 전하는 인생의 소중함이었다. 자신이 죽을 때를 정해놓고, 자기를 돌봐주러 온 여자에게 남겨준 건 삶의 가치, 자기 인생을 발전시켜 나가는 기회였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줬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당당함, 노랑 줄무늬 스타킹은 그냥 신으면 되는 거라고, 하고 싶은 것을 계속 생각하고 꺼내라는 말이 이렇게 힘이 될 줄이야. 시골 마을에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누르며 살아가는 한 여자의 삶을 바꿔놓은 남자. 윌 역시 자기 삶을 자기가 정하면서 떠났지만, 루에게 자기 삶을 완성해 가는 법을 가르쳐줬다. 단순히 재미만 장착한 소설은 아니었다.



<원숭이의 손>

화이트 씨 가족에게 찾아온 모리스 상사는 원숭이의 손을 꺼내놓는다. 소원 세 개를 빌 수 있다고 하니, 이게 무슨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보였나 보다. 하지만 그냥 소원만 빌 수 있는 건 아니다. 위험하다. 분명 원숭이의 손을 들고 소원을 빌면 이뤄지지만,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얻은 것만큼, 아니 얻은 것보다 더 크게 잃게 되는 게 이 원숭이의 손 법칙이었나 보다. 소원은 소원처럼 이뤄지지 않았고, 쓰디쓴 인생의 교훈만 남겼을 뿐이다. 분량이 짧은 소설이라 가볍게 보면 오산이다. 이 소설에 담긴 메시지는 누가 봐도 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메시지가 우리 인생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법칙이라는 걸 잊지 않도록 하는 힘이 있다. 중요한 것을 읽고 나서 후회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끝이 없는 호기심에 또 다가서는 게 인간이라는 이 아이러니는 뭔지...



<개의 심장>

인간의 뇌와 고환을 개의 몸에 이식시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소설의 주인공 필리쁘 필리뽀비치 교수는 그의 숙원이었던 이 연구를 실행한다. 수술을 성공시키고 수술의 예후를 지켜보기 시작한다. 과연, 이 수술은 성공적이기만 했을까? 인간의 뇌와 고환을 이식받은 개는 점점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다. 인간의 이름도 얻는다. 두 다리로 서고, 인간의 옷을 입고, 걷는다. 하지만 개로 살았던 본성은 변하지 못했다. 예절도 없고, 아무 데서나 소변을 보고, 여성을 희롱한다.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이 떠돌이 개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거다. 1920년대 러시아 사회가 배경이 되어, 인간이 된 개의 모습으로 이 혼란을 정리하려는 필리쁘 필리뽀비치 교수의 마지막 시도가 인상적이다. 잘못된 것을 되돌려 놓으려 애썼지만, 아무 일도 없던 처음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상처 자국만 더 선명해지고 늘어났을 뿐이다. 인위적이고 강압적으로 시도하는 일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다. 재미도 있었지만, 개의 변해가는 모습과 태도가 기억에 진하게 남아 있다.



<제가 한번 해 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으로 연재되었던 것을 책으로 만났다. 우리 일상 곳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불편하고 어려운 부분을 같이 경험하는 내용이다. 알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내가 잘 알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던 순간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겪어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라는 깨달음. 우리 삶에 너무 닿아있는 모습을 담아냈기에 더 귀한 책이었다. 세상의 정의를 외치면서 앞에 서지는 않아도, 누군가의 삶과 마음을 함부로 단정하지는 않아야 하는 다짐을 더 하게 만든다. 우리가 알아야 하고 서로의 삶을 응원해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던 저자의 말이 그대로 담긴 책이다. 그의 경험에 더해진 사진들을 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매우 힘들어 보였던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우리 사회 곳곳의 많은 사람들이 겪는 힘듦을 공감하는 건 당연했다.


인생 책이라고 하면 어떤 책을 떠올려야 할지 항상 고민되는데, 그냥 그 순간 생각나는 책이 가장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기억에, 마음에 남은 책이 아니라면 그렇게 떠오르지 않을 테니. 장르를 떠나서, 어떤 책이든 우리 인생에,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르침을 준다면 그게 최고의 책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다.











#책의날 #인생네권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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