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짓을 저지르고도 들키지 않은 경험이 당신에게 있는가? 예를 들면, 어렸을 적에 동네 슈퍼마켓에서 사탕 하나 훔쳤는데 들키지 않았다던가, 시험에 커닝했는데 아무도 못 봤다던가, 뭐 그런 일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살인은 다르다. 이런 중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잡히지 않는다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저질렀는데 여전히 그 범인을 알 수 없다면 우리는 무서워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살인이 범죄소설을 따라 한 모방범죄라면 그 공포는 더 크지 않을까? 즐기려고 읽는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완벽한 살인을 만들어줄 선생이 된다는 게 평범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피터 스완슨의 작품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은 연쇄 살인이 등장한다. 처음부터 연쇄 살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나씩, 그 범죄를 추적하다 보니 이건 한 사람의 소행일 거로 여긴다. 그 중심에 범죄소설이 있다. 범인은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은 범죄소설의 내용대로 살인을 저질렀다. 서점에서 일하는 주인공 맬컴이 과거의 어느 날 블로그에 올려놓았던 글 하나가 마음에 걸린다. 그는 추리소설 마니아이면서 추리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서점을 운영한다. 그가 과거에 그 서점에서 일할 때 책 좀 팔아보겠다고 정리해서 올렸던 리스트가 이 살인사건의 중심에 있던 거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잡히지 않는다. 때로는 살인이 아니라 자연사로 보이게 하는 능력도 있다. 누군가를 죽이고, 혹은 의심받는 상황이 닥쳐도 결국은 그들이 범인으로 지목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완벽한 살인 아닌가? 그러다 보니 이 소설들을 따라 하는 사람도 등장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 소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의 범인 말이다.


범인은 왜 이 소설들을 따라 했을까? 블로그에 이 목록을 올려놨다는 이유 하나로 맬컴은 은근히 용의자가 된다. 처음에는 나도 맬컴이 범인이 아닐까 계속 의심했는데, 의심할만하면 의심이 풀리고, 의심이 풀릴만하면 의심이 되는 마음이 반복되더라. 진짜로 범인은 누굴까. 급기야 맬컴이 용의자로 지목되자 나 역시도 그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짙어졌다. 그의 인격이 두 개여서 사람 좋은 서점 주인과 연쇄 살인을 동시에 하고 있는 거 아닐까 하는 마음. 그런데 그 의심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가 범인인지 목격자인지, 아니면 그거 블로그에 글 하나 올려놓고 억울하게 의심받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모방범죄를 소재로 하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현실에서도 모방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는 종종 있었고, 그들은 마치 환상 속을 거니는 것처럼 범죄 사실을 말하곤 했다. 따라 하면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실패할 리 없을 것처럼 말이다. 그게 사실인지 알 수 없다. 지금도 미제 사건은 많겠지만, 누군가는 범인이 잡히지 않은 사건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소설의 범인이 간과하고 있는 게 바로 그 지점인 듯하다. 잡히지 않을 거라는 확신, 이 살인이 계속되어도 좋다는 즐거움을 한꺼번에 이루려는 듯 자신만만하다. 한 번의 살인은 두려움과 설렘을 주었지만, 점차 그의 인생에 활력소가 되었을 테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계속되면 그 두려움도 사라진다. 즐기는 수준에 이르지는 않을까? 누군가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만족감을 느낄지도 모르지. 이 소설의 범인도 그럴까? 사건들에 다가갈수록 사건 자체보다는 범인의 심리에 집중하게 된다. 왜 이런 살인을 계속 저지르고 있는지,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쩌면 다음 피해자는 맬컴 자신이 될지도 모르니까.


피터 스완슨의 전작들을 봐도 그렇지만, 이 소설 역시 가독성은 좋다. 계속 읽어본 작품들의 분위기가 비슷해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반면 어느 정도 기본 독자는 확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이번 작품은 새끼를 치는 책이라 그런지 더 궁금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설에서 언급된 다른 소설들을 찾아보게 된다. 살인의 방법이 된, 추리소설의 고전처럼 남아있는, 따라 해보니 정말 완벽한 살인이 될 것만 같은 소설들. ^^ 제목도 익숙하고, 어디선가 한권 이상은 분명 읽어봤을 목록이 되시겠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덫, A.A. 밀른의 붉은 저택의 비밀,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살의, 제임스 M. 케인의 이중 배상, D. 맥도널드의 익사자,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등은 물론이고 이 외의 작품들도 단서로 등장한다.


이 중에 몇 권 읽으셨는지? ^^ 목록을 보고 고개가 푹 숙여졌다. , 추리소설 좋아하는데, 이렇게 유명한 책들인데? 이 중에 읽은 게 딱 한 권, 그마저도 내용이 가물가물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이거 꼭 확인하고 싶은데, 이 소설들 속에서 정말 맬컴이 소개했던, 범인이 원했던 완벽한 살인이 가능한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데 지금은 알 수 없네. ㅠㅠ 의지가 불끈 솟는다. 기어코 다 읽어내서 확인하고야 말리라.


소설의 내용대로 살인하는 사람의 마음을 무엇일까 궁금했다. 범인은 소설의 내용대로 절대 잡히지 않은 완벽한 살인이 될 건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게 소설에서만 가능한 일인지, 현실에 적용해도 똑같은 결말을 마주할 수 있을지. 읽는 나도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도 있을지,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잡히지 않을 수 있을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은 읽으면서 상상하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고 믿지만, 간혹 이 소설의 범인처럼 그가 그 상상을 현실로 이뤄낼 수 있다고 믿으면 대책이 없다. 정상에서 벗어난 그 사고를 멈출 수 있는 건 범인을 검거하는 것뿐이다. 그에게는 나름 이 살인의 당위성도 있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골라서 죽이는 것이니 그다지 죄책감도 없다. 쓰레기 취급받을 정도로 나쁜 사람을 죽이곤 했다. 물론 처음에만 그랬다. 살인이 계속될수록, 점점 맬컴의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범인은 맬컴을 겨냥한 거다. 그에게 보라고 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누가 쫓고 누가 쫓기는 건지 모를 정도로 줄다리기를 계속하는 기분이다. 한쪽에서 당기면 끌려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반대편에서 확 끌어당기면서 메롱하는 느낌. 그러면서 하나씩 드러나는 단서와 감춰진 진실들이 이 소설을 더 복잡하고 촘촘한 짜임으로 만든다. 뒤늦게 들려오는 진실들은 이 살인사건들과 얼마나 연관이 되어 있을지, 완벽해 보이는 범죄소설이 현실에서 어떻게 이용될 수도 있는지 묻는 것만 같다. 눈에 보이니 따라 하지 않을 이유도 없고, 누군가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는 도구가 된다. 들을수록 완벽해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이어지고, 누군가는 정말 죽어 마땅한 존재로 남아있다는 게 놀랍다. 분명 살인은 범죄인데, 그 범죄의 피해자들이 죽었다고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거. 우리가 느끼는 법 감정이 여기에서도 통하는 것만 같다. 범죄는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그 범죄의 피해자가 악인이라면 우리는 피해자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걸까? 때로는 이 아이러니한 관계가 단순해지기도 한다는 걸 알겠다. 악인은 누군가 처벌할 수도 있고, 그 처벌을 은밀하게 감춰주고 싶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의 독자는 나와 비슷한 고민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다. 죽어 마땅한 이들을 죽여도 범인이 잡히지 않기를, 그래도 살인은 범죄이니 범인이 빨리 잡혔으면 싶은 정의를 외치는... 어떤 선택도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꼭 하나로 결정되어야 하는지 묻기도 했다. 이 소설의 묘미는 고전으로 불리는 추리소설을 복기하는 것이면서, 살인사건이 계속되면서 드러날 진실에 시선이 머무는 게 아닐까. 작품을 재현하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뿐만 아니라, 살인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작품을 비틀고 응용하면서 살인을 더 교묘하게 변형시킨다. 그러면서도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노력으로 작품을 헌정한다. 소개된 작품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확인하면서 감탄하고, 함부로 범인을 단정할 수 없는 미스터리에 빠지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 이제 이 소설의 살인 도구(?)로 이용된 작품을 확인할 시간이다. 기억이 새록새록, 다시 그 범죄의 바다에 빠져 즐겨도 좋겠다.










#여덟건의완벽한살인 #여덟건의완벽한후기 #피터스완슨 #푸른숲 #추리소설 #범죄소설

#미스터리소설 #살인 #오마주 #진실 #비밀 ##책추천 #책리뷰

#ABC살인사건 #열차안의낯선자들 #죽음의덫 #붉은저택의비밀 #살의 #이중배상

#익사자 #비밀의계절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5-12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빅픽쳐 읽을때 그런 느낌?이었어요
영원히 잡히지 않기를...^^

구단씨 2022-05-13 16:08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맞아요. 잡히는 것보다 어떤 사람들을 죽이는지 더 궁금해지더라고요.

mini74 2022-06-10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덱스터 생각도 나네요 ~ 구단님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2-06-13 18:45   좋아요 1 | URL
아, 덱스터. 읽다가 말았는데 다시 펼쳐봐야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6-10 1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주말되세요^^

구단씨 2022-06-13 18:4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더위가 너무 일찍 찾아온 듯해서 힘들어요. 괜찮으신가요? ^^

새파랑 2022-06-10 1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구단씨 2022-06-13 18:4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6-10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구단씨 2022-06-13 18:4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thkang1001 2022-06-13 2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 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구단씨 2022-06-13 18:4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신소재 쫌 아는 10대 - 석기부터 나노까지, 소재로 쌓인 문명의 탑 과학 쫌 아는 십대 10
장홍제 지음, 방상호 그림 / 풀빛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렇게 다양한 소재가 우리 삶을 누비고 있다고? 호기심이 소재라는 주제와 만나서 화학으로 말한다. 따로 놓고 보면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화학과 일상과 공학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신소재 개발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변화시키는 게 볼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
와타야 리사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온라인 설문 조사에 응할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이와 성별을 선택하는데, 언젠가부터 마주한 설문 조사에서 그동안 2개였던 성별 항목이 3개였던 적이 종종 있다. 남성, 여성, 선택하지 않음. 익숙하게 남성과 여성 중에서 고르면 되는 성별이 3개가 되었다는 게 처음에는 놀라웠다. 점점 그 항목을 보는 시선은 달라졌다. 성전환하거나 혹은 같은 성을 사랑하거나 하는 이들의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런 시선은 아니었을 테다. 놀랍고, 이상하고, 당황스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볼 때 이상한 시선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걸 점점 알아간다. 우리가 이성을 사랑하듯, 지금의 성을 자연스럽게 살아가듯, 나와 다른 이가 분명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면 되는 일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소우와 아이 커플은 여행지에서 소우의 친구 다쿠마와 그의 연인 사이카를 만난다. 우연히 만난 두 커플은 소우와 다쿠마의 오랜만의 재회에 반가워하면서 여행지에서 같이 지낸다. 처음 아이가 사이카를 봤을 때는 제법 도도하고 냉랭한 분위기여서 거리감이 있었는데, 여행 이후에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아이와 사이카는 서로 연락하고 만나는 사이가 된다. 이십 대 초반, 성인이 된 이들의 새로운 우정은 돈독하고 깊어진다. 일반인으로 단순한 일을 하던 아이와 이제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 사이카는 서로의 환경은 달랐지만, 제법 친해진다. 이제는 소우와 다쿠마와 상관없이 둘만의 우정을 쌓기에 바쁘다. 거부감 있던 첫인상은 언제였냐는 듯, 둘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돈독한 관계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다쿠마가 사이카와 헤어졌다는 말을 듣는다. 바로 어제 만난 사이카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은 어느 순간에 찾아오는 걸까. 어떤 순간에 그 마음을 사랑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아이를 처음 본 순간, 사이카는 아이를 마음에 담았다. 여행지에서 이후에 자주 만나면서 자기 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고백했다. 사랑한다고. 입을 맞추고 안고, 온몸으로 그 마음을 표현했다. 처음 아이는 사이카의 행동에 당황했다. 사실 아이는 학창시절 짝사랑하던 소우와 연인이 되었고, 별일 없다면 두 사람은 곧 결혼하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사이카의 고백이 아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건, 생각하지 못했던 고백 때문이 아니었다. 사이카의 고백과 동시에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그 마음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매몰차게 거절하면 되는 일인데, 중요한 건 사이카의 마음을 점점 받아들이는 아이 자신의 마음이었다. 거부하는 게 아니라, 이 마음이 뭔지 고민하기 시작하는 건 이미 그 사랑에 빠져들었다는 거 아닐까?


아이가 혼란스러워할수록 이 소설을 읽는 나의 마음도 불안해졌다. 각자의 애인이 있던 상황에서 어떻게 정리가 될까 싶어서 말이다. 소우와 다쿠마는 선뜻 둘의 사랑을 인정해주고 애인의 자리에서 깔끔하게 물러날까 궁금했다. 어떻게 이 마음을,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사회의 시선은 아직 이 사랑을 예쁘게만 바라볼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헤쳐나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아이와 사이카는 두 사람의 사랑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소우와 다쿠마가 인정하고 물러났음에도, 두 사람은 당당하게 서로의 사랑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사랑에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사랑했고, 각자의 일을 응원했다.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며 하루하루 감정을 쌓아갔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던 건, 아마도 내가 가진 시선 때문이겠지. 타인의 사랑, 누구나 사랑이 같은 모습을 아닐 거라고 알면서도, 인정하면서도 시원하게 이 사랑을 바라볼 수 없던 건, 나 역시 그 사랑을 바라보는 많은 이의 시선에서 비껴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지.


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변하기 시작한 부분은 바로 여기에서부터다. 동성의 사랑은 어떻게 표현될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많이 들을 수도 없을 지극히 사적이고 드러나지 않은 표현일 것 같았다. 서로 입을 맞추고 몸을 만지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두 사람이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는 이미 이들의 사랑을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사랑하는 마음 너머에 서로의 육체에 닿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는 부분에서였다. 보기만 해도 좋은데, 입 맞추고 그 피부에 닿고 싶은데, 저 표정 저 행동 하나에 반해버렸는데, 이 마음 그대로 육체로 표현하고 나누었으면 좋을 텐데... 같은 성의 연애가 아니라, 그냥 서로를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보면 되는 일이다. 이 마음이 사랑이라고 인정하면 간단한 문제다. 하지만 현실은 이 사랑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 연애를 공개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서 부딪힌다. 한창 주가를 올리는 배우 사이카의 활동에 제약이 될 두 사람의 관계를 사이카의 소속사에서 정리한다. 공개되어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기 전에, 사이카의 경력에 방해되지 않게 미리 잘라낸다. 아이는 이 사랑을 위해 잠깐 물러난다. 소문이 잠잠해지면, 곧 사이카에게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소속사의 의견에 따른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다.


읽으면서 누구나 비슷할 거로 생각한다. 당신의, 나의 사랑은 어떠했을지 자연스럽게 떠올려 보게 된다. 이 사랑을 오래 지키기 위해 지금 잠깐 물러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오래 만나지 못해도 그 마음 변함없이 지킬 수 있는지, 나를 거부하는 상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 수 있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인간이기에 나를 더 보듬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이 사랑을 위해 이렇게 애써왔는데, 보지 못해도 이 마음 간직하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런 것도 몰라주고 나를 향한 원망만 쏟아내는 상대를 품어줄 마음이 나에게 남아있을까 궁금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나의 그런 의문에 답을 내려주듯,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의 사랑을 어떻게 복기하는지 증명한다. 오직 가슴에 자리한 사랑만 꺼내놓는다. 과거 두 사람이 열정적으로 나눴던 사랑을 기억한다. 그거면 충분했다. 어떤 이유도 필요 없이, 그저 계속되는 사랑에만 집중한다. 이십 대 초반의, 인생의 찬란했던 시절에 경험했던 그 사랑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청춘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세월을 이기고야 만 사랑에 관해 말한다.


그동안 퀴어 소설을 접할 기회는 많았지만, 완독하거나 깊게 읽으면서 그 사랑을 헤아려보지 않았다. 지금 우리 사는 사회에서 점점 그 시선이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알기 위한 노력도 없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쩌면 현실 속 동성의 사랑은 이럴지도 모른다는 솔직한 느낌을 받았다. 사랑은 이런 거지. 이렇게 진하고, 솔직하고, 다정하고, 배려하는 마음. 사랑을 나누는 상대가 누군지, 성별이 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사랑이면, 그거면 된 거다. 원래 사랑은 그런 거 아니었나...



#처음부터내내좋아했어 #와타야리사 #비채 #김영사 #소설 #퀴어소설

#문학 #일본문학 #사랑 #우정 #청춘 ##책리뷰 #책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먹는 것과 싸는 것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몸은 내 것인데, 그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경험. 혹시 경험해본 적 있는가? 한 달 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옆으로 돌아눕는 것도 힘들 정도로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저절로 났다. 이렇게 죽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만큼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아프다는 게 두려웠다. 맹장 수술 말고는 수술대 위에 누워본 적도 없고, 자잘하게 병원 드나들곤 했지만 큰 병을 걱정한 적은 없다. 그러니 많은 이가 겪는 질병의 고통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테다. 이 책을 읽고 많이 생각할 수 있던 건, 저자의 말처럼 상상할 수 있다는 위험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누군가 아픈 일, 그 고통을 상상하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쉽게 말하면 안 된다. 아니, 상상 이상의 것이 존재하고,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저자가 겪은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이 책을 다 읽고도 알 수 없었다.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희귀질환을 처음 들었다. 갑자기 스무 살 청년에게 닥친 설사. 뭐 살다 보면 설사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싶었는데, 단순한 설사가 아니었다. 혈변이었다. 혹시 큰 병이 아닐까 걱정하면서, 이러다 말겠지 하면서 고통을 견디고 있으니 병은 더 심해졌다. 고열과 복통에 시달리다 찾은 병원에서 생소한 병명을 듣게 된다. 궤양성 대장염. 여기까지 읽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 아니고 이니 다행인 거 아닌가 했다가, 바로 후회했다. 그 어떤 병명 앞에서도 다행인 건 없었다. 병을 알게 된 그 날부터 저자의 인생은 완전히 바뀐다.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노력은 물론이고, 아무리 노력하고 좋은 약을 써도 완치가 되지 않는 병 앞에서 절망한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을 수도 없다. 가만히 있으면 병은 더 심해질 테니까.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병원의 처방대로 하면 몸은 좋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낫는 게 아니라 괜찮아졌다가, 그 노력이 좀 부족해지면 다시 안 좋아지는 상황의 반복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완전히 알 수 없다. 몸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가장 중요하고 인간의 기본이 무너진다. 아무거나 먹지 못했다. 아무 데서나 변을 지릴까 무서웠다. 면역력이 약해져서 타인에게 옮을 병이 두려웠다. 그런 삶을 13년이나 계속했다. 그 시간 동안 반복된 입원과 퇴원은 단순히 환자라는 이름만 붙여준 게 아니었다. 그가 먹는 것과 싸는 것을 어려워하는 동안 그의 사회생활은 불가능했다. 아무거나 먹을 수 없으니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변을 지릴까 봐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그의 생활은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집에서 나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먹고 싸는 제법 단순한(?) 문제를 두고 굳이 책으로 써야 할 이야기가 있을까 싶었지만, 반전은 책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먹는 것과 싸는 일이 인간에게 무엇인지 묻는 게 되었다. 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저자가 생각하고 쏟아내는 말은, 독자에게도 강한 충격이 된다.


누군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먹지 않든, 다른 사람이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 누군가의 식단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이 뭐라 불평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가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난하고, 먹이려 한다. (133페이지)


지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병에 걸렸으니, 나이가 먹었으니, 수치스러워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역시 수치스러운 일이다. (193페이지)


먹고 싸는 일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먹고 싸는 일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먹고 싶다고 다 먹을 수 없었고, 싸는 일도 자유롭지 않았다. 먹는 일은 여럿이 모여서 함께 하는 일이 되고, 누구에게나 드러내놓을 수 있다. 식사는 같이하기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싸는 일은 왜 혼자 숨어서 해야 하는 부끄러운 행위가 되었나. 배설하는 일은 수치스러움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배설의 상황에 수치까지 얹어지면 인간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싸는 일이 두려워 스스로 은둔을 선택하면서, 은둔형 외톨이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그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저 타인으로 지켜봤을 일이, 자기 일이 되니까 시야가 넓어진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알지 못했던 일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자기 병으로 인해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리고 싶기도 하다. 이런 병도 있다고, 이 병은 이런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모르고 하는 한 마디가 상처와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린다.


꼭 질병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먹기를 강요(?)당하는 게 너무 괴로워서 힘든 적이 있다. 먹고 싶지 않은데 굳이 같이 먹어야 하는 경우, 간단하게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도 굳이 식사를 같이해야 하는 자리를 만들 때마다 괴롭기만 했다. 물론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면서 쌓이는 신뢰나 관계의 돈독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원할 때 좋은 효과를 내는 거 아닐까. 특히 저자처럼 병 때문에 먹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상대의 이유를 무시하면서 끊임없이 권하는 건 무슨 마음일까 싶기도 하다. 같이 먹는 걸 거절하면 비난하면서 배제하는 것으로 확대하여 해석한다. 음식을 거절했다고 그 사람을 거절한 것으로 여기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다. 같이 먹지 않는다고 마치 무슨 문제가 큰 사람으로 여긴다. 왜 우리는 타인의 절박한 상황을 듣지 않고 함께 먹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코로나 상황이 전 세계를 고통에 빠트렸지만, 여럿이 모이거나 함께 먹기를 강요하는 사회를 잠시나마 멈출 수 있어서 좋았던 점도 있다. 솔직히 이제 거리 두기 해제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방역 지침으로, 잠깐 멈췄던 회식 문화나 불편했던 사적 모임이 다시 불을 피울 것 같아서 걱정이긴 하다.


단순하게 보면 이 책은 한 사람의 투병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다 읽고 나서 독자는 그 단순함을 머릿속에서 지우게 될 거다. 아픈 이야기가 무슨 책이 될까 싶겠지만, 질병의 고통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다양하게 뻗어 나간다. 희귀질환 앞에서 고통스러운 사람, 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고 먹기를 강요하는 사회, 똥을 지릴까 봐 선뜻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을 이어진다. 단순히 먹는 것과 싸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것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그러니 혹시라도 저자처럼 낫지 않는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의 진짜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상상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 고통을 경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사자가 왜 같이 식사하는 걸 어려워하고 음식을 가려야 하는지, 인간의 기본인 생리현상으로 힘들어하면서 외출을 두려워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다.


누구도 몰라줄 경험이 점점 쌓여간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푸념하지 않으려고 참기도 힘들지만, 푸념을 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더욱 힘들다. (255페이지)


겪어본 자만이 알 수 있다는 걸 그대로 확인한다. 섣부르게 아는 척하면서 병은 나아야 하는 거라는 둥, 인간은 성장해야 하는 존재라는 식의 판단은 넣어두시라. 세상에는 회복되지 않는 병도 많고, 그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도 성장하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 그게 사실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당연하게 여겼던 극복 서사가 아픈 사람에게 육체적 고통에 정신적 고통까지 얹어준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사회와 현실에서 위로와 이해를 받지 못한 저자는, 자기가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에서 문학으로 구원을 찾는다. 그가 연구하는 문학에서 마주한 문장으로 그의 마음을 대변하면서, 아프고 나니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이 책을 읽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타인에 대한 이해 넓혀주기를 바라는 게 저자의 마음이고,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 사회가 낫지 않는 병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지적하는 저자의 절실한 마음을 듣는 게,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웃음이 난다. 재밌다. 이 불편한 상황을 너무 적나라하게, 감추고 싶은 진심까지 드러내면서 쏟아낸다. 거기에 너무 잘 어울리는 표지, 저자의 솔직함과 재치 있는 문장(말투), 문학에서 찾아낸 적재적소의 인용구까지 삼박자가 잘 어우러져 즐겁게 읽힌다. 제목만 보고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마시라. 도대체 먹는 것과 싸는 것으로 무슨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느냐고 걱정하고 있다면, 기우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식욕)와 생리현상(싸는 일)이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이렇게나 민감하고 중요한 일인지 새삼 알게 될 것이다. 너무 감동적이다. 흑흑.



#먹는것과싸는것 #가시라기히로키 #다다서재 ##책추천 #희귀질환

#문학 #에세이 #상상할수없는것이있다 #이해 #공감 #경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년손이 고민해결사무소 2 - 도깨비시장 위험에 빠지다 천년손이 고민해결사무소 2
김성효 지음, 정용환 그림 / 해냄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편보다 이야기가 더 탄탄해졌다. 미지의 시공간에 빠져들어 생생한 모험이 펼쳐진다. 등장인물도 더 많아지고, 조금 더 복잡해진 관계 속에서 재미는 더해진다. 우리의 옛이야기를 재해석한 상상이, 누가 읽어도 즐거울 수밖에 없는 소재로 이용했다. 익숙한 이야기가 신선하게 들려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