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 났다고요? 그럼 빨리 사직서를 제출하세요. 그러면 실업 급여는 받을 수 있도록 권고사직으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사직서를 내지 않으면 무단결근으로 해고하게 되며 이 경우 실업 급여를 못 받게 됩니다."

황대리의 이야기는 간단했지만 명료했다. 경비는 아프지 말든지, 아프면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대학병원에 입원한 직원에게 이튿날 전화로 해고 통보라니. 결근 사유가 질병임을 할면서도 무단결근으로 해곤하다는 것은 억지였다. 아파트 경비원을 할 때도 병이 날 경우, 국공립 병원의 진단서를 첨부하면 한 달의 기간에 한해 무급 휴가가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적어도 취업규칙상으로는 그랬다. (임계장이야기 244페이지)


가끔 집으로 가져오는 음식 중 일부를 아파트 경비 초소에 가져다드린 적이 있다. 시골에서 가져온 단감 몇 개, 비타민 음료, 여름에 집으로 들어오다가 사 온 냉커피. 일상에서 소소하게,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려니 싶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 선뜻 보이게 되는 호의다. 그런데 그렇게 한 번씩 보이는 호의에도 경비 아저씨는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신다. 나이가 지긋하신, 조금 젊으신 분은 어쩌면 나에게 나이 차 있는 큰 오빠 정도로 보이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인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오히려 인사받는 내가 민망할 때가 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실까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경비분들의 고충이 이해되기도 한다.


저자는 젊은 날 회사에 소속되어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외국 파견을 나가기도 하면서 한국에서 혼자 가정을 책임지는 아내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사업을 하면서 가진 것 모두를 잃기도 했다. 취업하려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지만, 회신을 주는 곳은 없었다. 스스로 눈높이를 좀 낮춰야겠다고 마음먹고 끝까지 매달린 경비 업무 일을 따내게 되었다. 경비 교육을 받기 위한 십만 원 남짓의 돈이 없어서 친구에게 빌렸다. 그렇게 얻은 일터였다. 쉽게 물러날 곳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남들에게 경비 일을 한다고 일부러 말하지는 않지만, 그는 자기 일을 고마워하며 책임을 다한다. 그런 그에게 아파트 경비 일은, 크지 않은 금액이지만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감사한 일이기도 하면서, 스스로 아파트 시설물이라고 주문을 외우며 자존감에 상처받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경험이 낯설지 않은 건, 이미 비일비재하게 접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전 입주민 대표에게 아는 척하지 않았다고 경비를 주시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도대체 전 입주민 대표의 존재는 뭐란 말입니까?!), 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입주민들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 날벼락을 맞기도 하는(왜 음식물 쓰레기를 일반 쓰레기 속에 몰래 숨겨 버리시는 건가요?!), 밤에 몰래 쓰레기장에 내다 버린 보라색 여행용 가방의 주인을 찾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쓰레기 수거 비용 3천 원 아껴서 부자 되시려고요?!), 입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뿌려진 왕소금을 이물질이라고 부르며 치워달라고 경비를 부르는 일에 허탈해한다.


경비원과 입주민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나면 어느 편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입주자의 승리다. 경비원과 트러블이 있다고 입주자가 이사를 나가는 경우는 없다. 나가는 쪽은 언제나 경비원이다. 말이라도 잘못 덧붙였다가는 그 자리에서 계약 만료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계약이 끝나는 1~2개월 후에는 무조건 연장 없이 계약 만료, 즉 해고다. 정규직이 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의 설움이겠다.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64페이지)


굳이 아파트가 아니어도 이런 진상들을 마주하는 일은 흔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러면 안 되는데 입주민이라고 갑질 행태로 사람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사람,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계급으로 나누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나는 가방끈의 길이로 상식을 생각하진 않는다. 이렇게 비매너에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이들이 무식하다고 보인다. 아파트 경비에게 신경 쓰고 대우해주라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이분들이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일하는,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가는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며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왜 그걸 자주 잊고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하찮게 여기느냔 말이다. 혹시 지금 외제차를 타고 비싼 아파트에 산다고 당신이 그 아파트의 경비와 다른 삶으로 인생 마무리할 거로 장담할 수 있을까?


저자가 3년여의 세월을 아파트 경비로 일하면서 틈틈이 적은 메모 같은 글을 책으로 엮어낸 글이다. 그도 인생 살아오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시쳇말로 잘 나가던 때도 있었고 실패도 겪었다. 그런데도 사람을 위아래로 나눠서 보지 않았다. 그의 아파트 경비 경험은 세상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그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에 많은 생각에 잠겼으리라. 본인도 아파트에 실거주하면서 입주민과 경비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다움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그의 행동 곳곳에서 보인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 세상에는 내가 다 모르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 많구나. 사람이 이렇게 잔인하고 마음이 작을 수가 있을까 싶어 안타깝기까지 했다. 경비 초소에서 졸고 있는 그를 지적하며 마치 내가 좋은 사람이니까 이런 것도 말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걸렸으면 너는 끝이야.’라는 뉘앙스로 훈계하는 입주민 때문일까. 그는 스스로 투명인간이라 표현하며, 경비원 복장을 하는 순간 자기 안의 모든 감정을 버린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입주민이 부당하게 대우해도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뒤돌아서야 하는 자세로 일한다.


도대체 입주민들이 아파트에서 자기 업무를 하는 경비노동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기에 이런 이야기하는 걸까. 스스로 아파트의 움직이는 시설물로 주문을 걸면서 하루를 사는 기분이 어떤 건지, 이 책을 읽고서야 조금 알게 됐다. 작가 장강명이 이 책을 추천하면서 했던 말, 이 글을 읽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30년 넘게 아파트에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경비노동자의 삶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장강명의 추천사에 공감한다. 혹시라도 내가 하는 한 마디가 그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내가 귀찮아서 제대로 하지 않은 일에 그들의 노동이 증가하게 되는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 아파트였다. 오늘도 분리수거에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다고 투덜대면서 들어왔던 것을 급히 반성한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누군가의 일은 더 늘어나고, 그들의 자존감에 상처가 되는 일을 만든다. 물론 아파트에 사는 사람 모두가 진상 입주민은 아니다. 그 안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 근무 위치가 변한 것을 알고 안부를 묻는 입주민도 있다. 사람 온기를 넣어주는 이들이 훨씬 많겠지만, 일부 입주민 때문에 받은 상처는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이 건넨 온기를 넘어설 때가 많을 거다.


나락에 떨어져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고 알지 못했던 타인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특히 그 거울 앞에 선 나의 모습 또한 눈에 들어온다. 몸이 낮아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의 눈높이가 움직인다. 나의 한심함을 뼈저리게 통감하면서 지금 나의 처지가 나의 선생이 되었음을 느낀다.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130페이지)


이분들의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 건, 아마도 내 주변에 아파트나 건물 경비 일을 하시는 분을 종종 봐서 그럴 거다. 대부분 아파트 경비 일을 하시며, 꼬박 24시간을 근무하고 24시간을 쉰다. 퇴근하고 지친 몸을 뉘면 피곤해도 쉽게 잠이 오지 않고, 혹시라도 개인적인 볼일을 하루가 빠듯하다. 남들은 하루 일하고 하루 쉬니까 좋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루를 쉰다고 해서 그 하루가 느긋하게 흐르는 것도 아니다. 가족과 얼굴도 보고 소박한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도 있는 시간. 한 개인의 노동 기록이지만, 누구나 비슷하게 품고 사는 하루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하루를 들여다보는 일에 누구라도 선뜻 동참해주었으면 싶다. 그 작은 경비 초소에서의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지, 언젠가의 내가, 내 가족이, 내 지인이 그 자리에서 보낼 하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감해주기를.


현실적인 경비 업무 교과서가 아닐까 싶다. 좀 더 깊고 무겁게 얘기해도 되겠지만, 이 책은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이론에만 머물지 않은, 실전 경험담이 그대로 담겼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말보다 더 적나라하게 다가올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임계장 이야기중간착취의 지옥도와 같이 읽어도 좋겠다.










#나는아파트경비원입니다 #최훈 #정미소출판사 #에세이 #임계장이야기 #중간착취의지옥도

#경비원 #경비노동자 #계약직 #갑과을 #경비업무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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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1-11-22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ㅠ 임계장이야기 펑펑 울면서 읽었네요. 이번 책도 임계장이야기에서 들었던 입주민 진상 부리는 문제는 여전하네요.ㅠ경비노동자들이 일보다는 사람들한테 더 치이는 것 같아요.맘 아파요.

구단씨 2021-11-22 22:01   좋아요 4 | URL

제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런 주제의 책 많을 것 같아요.
최근에 이 주제의 책을 몇권 읽었는데, 진짜 힘들었어요. 인간이 왜 그럴까 싶었네요.
좀 더 무거운 내용도 있긴 한데, 그보다는 이 내용 자체가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scott 2021-12-09 16: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코로나 무섭게 확진자 급증 중 ㅠ.ㅠ
건강 잘 챙기세요

구단씨 2021-12-09 22:33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여기도 확진자 급증입니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mini74 2021-12-09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1-12-09 22:3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주말 지나면 추워진다네요!! 건강 챙기셔요.

그레이스 2021-12-09 16: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12-09 22:3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책 많은데 다 읽을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

독서괭 2021-12-09 16: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임계장 이야기는 읽었는데,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라는 책도 있군요. 문득 오늘 경비원분들께 귤이라도 좀 갖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구단씨 2021-12-09 22:35   좋아요 3 | URL
좋은 생각이십니다. ^^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 일에 서로의 관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새파랑 2021-12-09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당선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12-09 22:3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독서 목록에 항상 부러움이... ^^
차곡차곡 보관함에 넣고 있어요.

이하라 2021-12-09 18: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1-12-09 22:3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추워져서 자꾸 방안에 있게 되네요. 책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

서니데이 2021-12-09 2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1-12-09 22:3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페이퍼 속에 항상 책 한권씩 있어서 책 소개 받는 기분이 들어요. ^^
 
관리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2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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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자기가 앉은 자리에 따른 책임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당연하다.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을 것이고, 또 그 자리 아래의 사람들까지 통솔하고 맡은 일을 수행하는데 책임이 따른다는 건 진리다. 그 자리 앉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힘 때문이다. 이 소설 속 소장, 반장, 관공서와 공사 관계자들의 자리 역시 마찬가지다.


인부들은 반장의 지시 아래 일하고 그에게 소속된 사람들이다. 반장의 팀에 합류해 공사 현장을 같이 다닌다. 여러 명의 반장 역시 공사 현장 소장의 지시를 따른다. 소장이라고 자기 맘대로만 할까. 그 역시 시행사와 공사와 관련된 여러 문제와 절차를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한다. 피라미드 같은 구조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이들인 것으로 보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그 힘을 확인하고 즐기기도 한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책임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국도 옆에 파 놓은 터에 관을 메우는 공사 현장은 인부들의 바쁜 몸짓이 한창이다. 그사이에 다른 인부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한 남자 선길이 있다. 반장은 그가 신경 쓰이지만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현장 소장은 선길을 멧돼지 보초병으로 세운다. 공사 현장과 멧돼지가 무슨 연관인가 싶을 테지만, 우습지도 않은 그 일의 배경에는 소장의 비리가 있다. 소장은 늘어나는 공기(공사 기간) 때문에 발생한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고, 부족한 돈을 인부의 식사를 위한 현장식당 예산에서 챙긴다. 부실한 식사가 불만인 인부들의 항의에 소장은 밤에 산에서 내려오는 멧돼지가 식당 부자재를 위한 비닐하우스 채소를 망가뜨려 놓아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에 작업 현장에 끼지 못하고 어색한 선길을 밤의 비닐하우스 보초병으로 세운 것이다. 어쨌든 소장은 일 못 하는 사람을 자르지 않고 임무를 주어 하루 일당을 챙겨주고 있다는 생색을 낸다. 아무도 소장의 말에 대꾸 못 하고 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다.


우리 인생과 닮은 공사 현장의 모습에 많은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없는 현장에 무언가를 채우고 올려세워 눈앞에 보여 주는 것. 어느 날은 땅을 파고 있던데, 며칠 지나서 보니 바닥이 단단하게 메워져 있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보니 건물 1층이 올라와 있어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뭔가 세워지고 만들어지는 게 신기해서 바라보기만 했지, 그 현장의 논리 속에 우리 인생이 걸렸다고 여긴 적은 없다. 하지만 닮았다. 우리 삶 역시 자꾸 배우고 노력하고 올라가면서 채워지는 거 아니겠나. 규정대로 공정하게만 오른다면 문제 될 게 없겠지만, 현실의 전쟁터는 공정하지 않았다. 은폐와 카르텔로 얼룩진 불의의 현장 그대로였다. 도덕과 윤리가 사라진, 비리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곳이었다.


관리가 아니라 힘으로 움직이는 곳이 된 공사 현장은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도 모자라, 피해자를 성실하지 않은 노동자로 왜곡시킨다. 마치 그러니까 죽었지, 그래도 싸다라는 비난을 받아도 충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피해자의 가족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해 죄송한 마음으로 사죄한다. 가족을 잃은 슬픔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입힌 사람의 가족이 되었다는, 배우자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으로 살아가야 한다. 관리자들이 관리를 잘한 덕분에.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46페이지)


처음 알았다. 관리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내가 아는 책임과 너무 달라서 말이다. 책임을 지는 게 아니고 지우는 거라는 말이 이렇게 섬뜩하게 들릴 줄이야. 책임져야 할 일을 만든 시작이 누구인지, 어디인지 뻔히 알고 있는데 그 상황을 너무 쉽게 바꿔놓는 소장의 발 빠른 처리가 너무 무서웠다. 피를 흘리며 죽은 현장 근로자가 내 앞에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혹시 이거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치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사실인지 내 기억을 의심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한 부조리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피해와 결말을 만들어내는지 적나라해서 이게 소설이 아닌 다큐멘터리로 여겨도 충분했다. 이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얼마나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지 확인한다. 동시에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선택으로 이 상황을 벗어날 것인지를.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악당이 세상 악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주변에 얼마나 평범한 악당이 많이 존재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어쩔 수 없이 힘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우리다. 때로는 그 힘에 주눅 들고 타협하며,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일을 대신 떠안으며 대가를 챙기기도 한다. 힘에 기생하는 작은 인간이기도 하니까. 현실 논리와 상황 논리가 언제나 일치하지 않은 괴리감에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소설 속 비극은 선을 넘는 일이었고, 불의를 보고 넘길 수 없게 했다. 슬프게도 이런 이야기는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극인데 흔하다니, 반복해서 일어나기에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게 절망적이다.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너무 익숙한 비극이 되어 이제는 그 슬픔과 불의조차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게 될까 봐. 그래서 마지막에 현경이 굴착기의 시동을 켰을 때 흥분했던가 보다. 아직 우리가 인간이기는 하구나 하는 안도감에, 이 불의를 그대로 묻어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 같아서.



#관리자들 #이혁진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 #한국소설

##책추천 #소설 #문학 #불의 #악당 #카르텔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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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웃는 장례식 별숲 동화 마을 33
홍민정 지음, 오윤화 그림 / 별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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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죽음을 마주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만큼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일도 많아졌다. 정확하게는 나의 죽음 이후의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윤서 할머니 말씀처럼, ‘죽은 뒤에 몰려와서 울고불고한들무슨 소용이겠는가. 살아 있을 때 한 번 더 보는 게 낫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요즘이다. 아마 그 중심에는 점점 노쇠해가는 엄마가 있기 때문이겠지. 지난 6, 조금 늦은 엄마 생신을 챙기면서 가족이 모였다. 코로나 특수 상황에 우리의 모임은 참 오랜만이었다. 각자 살기 바쁘고, 거리 두기가 필수가 된 시대를 살아가는 게 어떤 모습인지 실감하던 때였다. 별것 없는 조촐한 상차림이었다. 포장 음식 몇 가지와 미리 주문한 케이크 하나, 엄마의 자식들과 손주들이 전부인 생신에 엄마는 울고 말았다. 이렇게 얼굴 보고 같이 밥 먹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면서.


나 죽은 뒤에 우르르 몰려와서 울고불고한들 무슨 소용이야. 살아 있을 때, 누가 누군지 얼굴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때 한 번 더 보는 게 낫지. 안 그래?” (31페이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서로를 보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유한한 시간을 살면서도, 그 시간의 유한함을 자주 잊고 산다. 언젠가는 죽겠지,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면서도 생각한다. 혹시 나의 죽음을 정할 수 있다면,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예고된 죽음이면 좋겠다고. 내 삶을 정리하고 갈 시간을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아마도 보고 싶은 사람 한 번 더 보고 싶은 바람이 아닐까 싶다. 윤서 할머니의 생전 장례식이 가지는 의미는 그래서 와 닿는다. 내가 떠나기 전에 눈에 담고 싶은 장면일 거다. 사랑하는, 보고 싶은 사람들 한 번이라도 더 새기고 가겠다는 간절함.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동화였다.


윤서 할머니가 암에 걸렸다. 치료의 시기가 지나버려 이제는 암을 낫기 위함이 아닌, 조금 덜 힘들게 지내시다가 가시는 것만이 남았다. 자꾸만 악화하는 몸의 상태를 할머니는 더 기다릴 수 없다. 자기 생전에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며 윤서 아빠에게 말한다.


사실 이 가족은 대가족이면서도 소가족이다. 집에는 할머니와 윤서, 윤서 아빠가 산다. 근처에 사는 이혼한 고모가 자주 드나들면서 윤서네 주방을 책임진다. 윤서 엄마는 중국으로 파견 근무하러 갔다. 윤서 생각에, 어쩌면 엄마는 아빠와 이혼할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생전 장례식은 윤서에게도 충격이었지만, 할머니의 소원이니 들어드려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도 경험이 없는 이 행사를 어떻게 치를 수 있을까 걱정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잊지 않으면 될 것 같다. 할머니가 보고 싶은 사람, 할머니를 보고 싶은 사람이 기억하면 되는 거다. 갑작스러운 일에 온 식구가 혼란스럽다. 윤서는 여름방학에 엄마를 만나러 상하이에 가겠다는 것을 취소했다. 고모는 재혼하겠다고 예비고모부를 데리고 왔다. 아빠는 사이가 안 좋은 형제들에게 할머니 소식을 전하면서 자주 싸웠다. 할머니가 바라는, 생일날 치르는 생전 장례식은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죽음을 생각하면 한없이 슬퍼질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장례식은 익히 그런 양상이었다. 죽은 이의 사진 앞에서 절을 한다. 이미 차려진 식사를 하고 아는 얼굴들과 이야기 몇 마디 나누다가 일어선다. 장례식의 주최자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죽음은 잠깐 스치듯 인사하고 나오는 자리가 된다. 그 정도만으로도 우리는 고인과 유가족에게 예를 다했다고 여긴다. 이 동화를 읽으면서 예의를 표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의문이 들었다. 떠나고 없는 이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떠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얼굴 보고 손을 잡고, 따스하게 나누는 안부가 더 깊게 새겨지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윤서와 친구들이 준비한 영상은 할머니의 생전 장례식이자 생신날의 최고 선물이 되었다. 할머니 삶의 터전이었던 시장, 오랫동안 교류했던 시장 상인들의 인사를 담았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질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곧 떠날 할머니의 장례식을 이렇게 치러도 되나 싶은 걱정은 다 사라지고, 할머니가 바랐던 일을 해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우리가 하는 많은 일 중의 하나는 후회일 텐데, 소중한 사람이 떠난 뒤에도 후회만 남게 될까 봐 걱정이 가득하게 만든 이야기였다. 죽음을 앞둔 윤서 할머니가 자기 삶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감동적인지. 활자를 읽고 있는데,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활자가 자꾸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읽으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엄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이다. 엄마 집 TV 옆에는 작은 액자가 하나 놓여있는데, 처음으로 가족 여행을 갔던 때 찍었던 사진이다. 엄마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다. 나는 농담처럼 저 사진을 엄마 영정사진으로 써야겠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엄마는 또 그러라고 대답한다. 이제 우리는 언제가 감당해야 할 엄마의 죽음을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윤서 할머니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엄마의 죽음 후가 아닌 지금을 더 많이 생각한다. 더 자주 보도록 노력하자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자고, 덜 미워하면서 살도록 애써보자고.


누구나 태어나고, 누구나 죽는다. 각자의 삶을 다르겠지만, 죽음의 운명은 똑같다. 인생의 끝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을 테니까. 할머니의 뜻대로 마련된 생전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울고 웃으며 마음을 나눈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미워하면서 지냈던 순간도 잊은 채로,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이해하려는 유대감을 싹틔운다. 마치 할머니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준 선물처럼.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장례식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게 아쉬울 정도로, 감동이 한가득 남은 이야기다. 아직 죽음을 생각하는 게 서툰 우리가 배워도 좋을,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하면 슬플 장례식을, 실컷 울고 웃으면서 읽었다. 눈물은 슬프지 않았고, 웃음도 가볍지 않았다. 감동적이다.



#모두웃는장례식 #홍민정 #별숲 #어린이책 #동화

#죽음 #장례씩 #가족 #보고싶은사람들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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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내는 아이들 - 어린이를 위한 경제 교육 동화 한경 아이들 시리즈
옥효진 지음, 김미연 그림 / 한국경제신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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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에 이런 책이 있었다면, 좀 더 빨리 경제 관념을 배우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었더라면. 많은 아쉬움과 후회를 만드는 책이었다. 어릴 때는 당연하게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 받아서 생활하고, 자라서는 돈을 벌고 혹은 대출로 빌리기도 하면서 원하는 것을 이뤄가는 게 일상의 똑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사람마다 모으는 돈이 다르고 이뤄가는 속도가 다르다는 건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것 말고는 다른 걸 모르겠더라.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새삼 깨닫는다. 경제 관념,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배우고 받아들이며 사는 게 무엇인지 덩달아 알게 된 책이다.


옥효진 선생님의 이야기는 온라인에서 먼저 알게 됐다. 처음 봤을 때는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위한,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선생님으로 기억되기 위한 선생님만의 생존전략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학급 생활을 보면, 이건 선생님을 위한 게 아닌, 더 자라고 성인이 되어 살아갈 아이들을 위한 가장 실감 나는 교육이라는 것을 알겠다.


13살 시우의 6학년은 활명수 나라로 시작되었다. 새 학기 첫날, 담임선생님은 시우의 학급을 하나의 나라로 만들자고 했고, 아이들 각자에게 역할을 임명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고 책임감 있게 이끌어나갈 수 있는 각 부서의 활동이 주어졌다. 평소 용돈을 받으면 먹고 싶은 거 먹고 사고 싶은 거 사면서, 돈이 부족하면 엄마에게 더 달라고 하면서 생활했던 시우는 새 학급의 시스템이 낯설었다. 하지만 아이들 모두 자기가 선택한 일을 열심히 수행했고, 그 역할에 따른 월급을 받으면서 시우도 활명수 나라의 시스템에 익숙해졌다. 나라의 화폐 미소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


시우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평소 습관대로 활명수 나라에서 살아가려고 한 것. 가장 많은 월급을 준다는 청소부를 선택하고 정해진 대로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정해진 대로 월급을 받은 것 같은데 금액이 적었다. 나라에서 월급의 소득세를 떼어가다니, 이런 경우가 있나? 시우가 몰랐던 사실 하나, 우리가 일정 금액의 월급을 받으면 저절로 떼어가는 소득세와 건강보험료, 연금보험 등을 계산하지 않았던 거다. 그동안 몰랐겠지. 우리가 얻는 소득에는 소득세가 있다는 것을. 그것도 모르고 엄마에게 받는 용돈으로 편하게 계산하지 않고 있는 만큼 써버렸으니. 나라에서 소득세를 떼어갔다는 것에 흥분한 것도 잠시, 시우는 과거의 습관을 못 버리고 그 월급을 가장 먼저 탕진했다. ^^ 월급으로 받은 화폐 미소로 그렇게 쓰기 싫었던 일기 면제권을 사고 급식우선권도 샀다. 일기도 안 쓰고 참 좋구먼. 급식 먹을 때 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먼저 밥을 먹으니 편해서 즐거웠다.


탕진 재미도 잠시, 시우는 사라져가는 월급에 불안을 느낀다. 당연하지. 돈을 계획 없이 쓰니 불안은 저절로 따라온다. 이 책의 목적이자 옥효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어릴 때부터 배운 경제 지식과 올바른 경제 관념으로 우리가 어른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돈을 적절히 활용하고 저축과 투자로 돈을 버는 일을 가르쳐 주는 것. 우리가 일하고 돈을 버는 건 당연하게 알고 있으면서, 그 돈을 활용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가상화폐나 주식투자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는 주변 사람들을 봐도, 부럽기만 하고 막상 그 투자에 뛰어들려고 하니 불안하다. 항상 모자라는 돈, 어떻게 하면 안전하고 확실하게 모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 책으로 기본 공부를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돈을 잘 벌고 잘 쓰는 법을 기본으로 해서, 우리가 벌고 사용하는 돈의 흐름에 어떤 경제가 숨어 있는지 쉽고 재밌게 가르쳐주는 책이다. 급여명세서의 실수령액이 왜 그 금액인지, 나라에서는 왜 소득세를 떼는지, 가장 쉬운 은행 예금은 적금과 예금, 정기예금 등의 구분이 어떻게 나뉘는지 배운다. (사실, 아직도 이 차이를 모르는 사람 생각보다 많다) 안심하고 돈을 모을 수 있지만 이자는 적은 예금상품과 위험이 따르지만 높은 수익률도 있는 투자의 차이를 배우면서, 어떤 순간에 어떤 방법으로 돈을 모을 수 있는지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어떤 직업이 사라지고 새롭게 생기는지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시사한다. 월급을 많이 준다기에 청소 업무를 맡은 시우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절망한다. 이제 학교에서 외부 업체에 청소를 맡긴다고 하니, 시우는 백수가 됐다. 그나마 모자라는 월급으로 우울했던 시우는 이제 실업자까지 됐으니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사라지는 직업이 있다면 또 생겨나는 직업이 있는 법. 시우는 다른 돌파구를 마련하고, 또 실업이라는 위기 상황에 대비해 고용보험도 가입한다. 단순히 월급 받는 거 말고도 사업자등록을 하고 장사를 하는 법도 배우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돈을 모아야 하는지도 배운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배운 건 아니다. 아시다시피, 시우는 돈이 있으면 바라는 것을 당장에 해치우며 탕진 재미를 먼저 실천한 아이니까. 어떻게 돈이 다 사라졌는지, 장사가 잘되었는데 왜 적자인지, 어떤 아이템을 구상해야 돈이 보이는지, 상당한 시행착오를 거치고 배웠다. 몸으로 부딪친, 실전을 통한 배움이니 얼마나 뼈에 새겨질까 싶을 정도다. ^^ 시우만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시우의 친구들, 돈을 저축하며 모으기만 하던 하진이, 다른 사람들 따라 하면서 돈 쓰는 재미와 쓴맛을 동시에 본 원희, 태어날 때부터 경제 박사였나 싶게 똑똑한 경제 지식인 재완이 등 아이들 각자의 성향에 맞게 돈을 벌고 사용하면서 경제를 알아가게 한다.


사실 돈이라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아플 때 치료받을 때도, 돈은 필요하다. 우리 일상의 모든 곳이 돈과 연관되어 있지만, 어린아이가 돈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것처럼 교육받았다. 시쳇말로, ‘어린놈이 벌써 돈을 밝히냐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러니 돈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고, 제대로 설명해주는 어른이 드물었다. 그런 돈에 관한 것을 이렇게 초등학교에서 알려주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효과가 좋은 배움이었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금액의 월급을 받아도 어떻게 사용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모이는 액수가 다를 것이다. 더 많이 모으고 싶고, 더 잘 사용하고 싶은 게 돈이다. 그 개념과 활용을 일찍 배우는 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이 책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 어릴 때도 이런 책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옥효진 선생님의 반 아이들이 부러울 정도였다.


너무 중요하고 기초적인 경제 지식을 초등학생 동화에서 배우다니.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면서, 적성을 찾아내고 직업으로 받는 월급으로 소득을 올리고, 우리가 버는 모든 돈에 부과되는 세금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깊게 들어가면 이보다 더한 경제 이야기가 있겠지만, 이 정도도 충분했다. 몸으로 체험하는 경제 개념을 이보다 더 확실하게 가르쳐줄 수는 없을 듯하다. 자연스럽게 경제 개념과 이해를 돕고, 돈의 흐름을 읽는 사고를 기를 수 있다는 것에 한 표. 아이들의 시선으로 배우는 취업과 세금, 사업이나 실업, 저축과 투자, 다양한 보험으로 우리가 위기를 대비하는 방식까지. 어른 세계에서가 아니라 어린이 세계에서 미리 배워야만 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이 책 한 권 마련해서 나이 상관없이 온 가족의 경제 기초 도서로 삼아야겠다.



#세금내는아이들 #옥효진 #한국경제신문 #경제 #

#어린이경제도서 #저축 #예금 #투자 #경제기본서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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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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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가족이다. 우리가 믿을 건 가족뿐이야. 친구, 애인, 이웃, 이 지방 사람들, 국가. 그건 모두 환상이야. 정말로 중요한 때가 오면 양초 한 자루 값어치도 안 된다. 그때는 그들을 상대로 우리가 뭉쳐야 해, 로위. 다른 모든 사람 앞에서 가족이 뭉쳐야 한다고. 알았지?” (13페이지)


동생을 사랑했다. 글쎄, 가족으로의 끈끈함이었던 걸까, 아니면 동생에 맹목적으로 되어버린 이상한 마음인 걸까. 오프가르 집안의 첫째 로위는 동생 칼에게 그런 존재였다. 약간 부족한 듯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서 더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기 쉬운 이미지였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형을 의지했던 동생 칼에게 로위는 조건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언제나 동생을 보호해줄 보호자, 동생이 무슨 짓을 했어도 동생 편에 설 수 있는 지지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서라도 동생의 옆에 머물 희생자. 로위의 삶에서 언제나 1순위였던 칼을 빼면 그의 인생 어떻게 흘러갔을까, 이제 와서 궁금해지기도 한다. 마냥 평범하게, 어느 시골의 작은 집에서 새로운 가족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칼이 바라보는 형은 어떤 사람일까. 오프가르 집안의 둘째 칼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당했다. 어린 형제는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너무 강했고, 아버지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했던 집안의 분위기만 봐도 겁이 난다. 형보다 어린 동생에게 아버지는 더욱 커다란 존재였을 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동생의 두려움을 알아챈 형의 도움으로 칼은 학대의 공포에서 벗어난다. 무난하고 무료한 날을 더 좋아했던 형과 달리, 칼은 영리한 머리로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한다. 공부하겠다며 떠난 동생에게 학비를 보내던 형에게 가끔 소식을 전하면서 형제의 우애는 지속한다. 그리고 어느 날, 칼은 형에게 돌아간다. 그들이 자랐던 곳, 그 시골 마을 오스를 변화시킬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사실 칼이 고향에 돌아온 건 호텔 사업을 위해서였고, 사업을 위해서 고향 사람들의 투자가 필요했다. 그는 빈털터리였으니까. 이번에도 칼은 형의 도움이 필요했다. 거대한 규모의 사업을 구상하는 칼에게 로위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협조한다. 칼은 사랑하는 동생이니까.


오르막길의 거의 끝에 있는 오프가르 형제의 집. 부모는 사고로 동시에 사망했고, 사고 흔적이 어디 있는지 알지만 찾지 못한다. 오직 형제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형 로위는 고향에서 머물고 동생 칼은 유학 끝에 집에 돌아온다. 그의 아내 섀넌과 함께. 혼자였다가 갑자기 셋이 된 이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지낸다. 형과 동생, 동생의 아내. 너무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떨어질 수 없는 형제애라고 읽혔다. 타인은 모르는 그 집안만의 불행이 있었고, 그 불행의 끝에 살아남은 형제는 이제 세상의 유일한 가족이었으니, 두 사람만이 남은 상황에서 더 똘똘 뭉치는 게 당연해 보였다. 그리고 이 형제의 역사에는 살인이 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일에 살인이 일어난다. 이들이 죽였을까? 글쎄. 그건 둘만이 아는 진실이겠지. 명확한 사실은, 둘은 형제이고,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언제까지나 한결같을지, 나는 이런 마음이 언제나 궁금했다. 그 궁금증을 로위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한 기분이 든다. 로위에게 칼은 언제나 지켜줘야 할 동생이었고, 동생의 말이라면 당연히 따라줘야 한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형은 시골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삶이었고, 동생은 타국의 도시에서 그의 꿈(?)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무엇이든 동생이 원하는 것이라면, 이뤄지도록 돕는 게 형의 의무이자 일상이었다. 이번에 돌아온다는 동생에게 형은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갑자기 왜 돌아오는지 궁금하면서도 동생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어쩌랴. 동생인데, 상처를 안고 자란 녀석인데, 내가 아니면 누가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 아마도 로위는 이런 마음이 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전과 같은 건 아닐 것 같다. 세월이 흘렀고, 로위는 지금의 고요한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나타나 칼과 섀넌이 아니라면, 이 생활 그대로 유지하는 데 별문제는 없었을 텐데.


가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갈등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가족과 얽힌 문제일 때가 많다. 누가 봐도 저건 허무맹랑하고 이상한 일인데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믿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가족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상식적으로는 그런 일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화를 내고 나무랄 것인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럴 때 정말 이성이라는 걸 장착한 사람이 분명하게 이 혼란을 정돈시켜줘야 하는데, 이 형제에게는 그 중립을 지키며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다. 아니, 섀넌이 있었나? 칼의 아내 섀넌은 칼과 같은 마음일까? 두 사람의 등장은 로위의 일상을 흔들고, 오랜 세월 이 가족에게 감춰졌던 비밀이 드러날 위기에 처한다. 비밀은 비밀로 남아 있을 때 힘이 되는 법인데, 로위에게 힘이 되었던 그 비밀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 형제의 운명도 변화를 일으킨다. 형제의 아버지가 이뤄냈던 그 왕국, 오프가르 집안의 명성을 유지하는 일은 아버지를 이어 로위에게도 운명처럼 어깨에 내려앉은 듯하다. 가문의 수치,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로위가 해야 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 동생 칼도 보호해야 하고, 비밀이 비밀로 남도록 만드는 일도 해야 한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위해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하고 있느냔 말이다. 가족이 무엇이기에, 형제가 어때야 하기에, 고통을 이기려고 했던 그 일들이 모두 가려진 채로 남아야만 하는 이유를, 우리는 들을 수 있을까?


가족관계, 피를 끊어낼 수 없는 혼란을 그대로 표현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 안에는 분명 사랑도 가족의 애정도 존재하지만, 때로는 끊어낼 수 있는 냉정함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며 가족을 끌어안는다. 하지만 범죄라면? 어느 날 뉴스에서나 보던 사건을 작가의 입으로 듣는다. 대개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잔혹하고 폭력적으로 된다고, 가족의 강한 유대와 의리가 도덕을 넘어서는 순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이야기라고 말한다. 가족이니까 가능한 일들, 가족이니까 해서는 안 되는 일들. 이 형제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품고 산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듯 자리 잡은 믿음은 이 형제에게 끔찍한 진실을 가린 채로 살게 한다. 로위가 견뎌야 했던 일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이 된다. 아마도 그곳은 지옥이 아니었을까. 로위는 그 지옥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거다. 후켄 계곡에 쌓여가는 시체와 망가진 자동차를 보면서, 누구도 그 진실을 찾아내지 못하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일. 아버지가 세운 왕국을 지키면서, 마치 그는 지옥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그곳에 머문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 우리를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전부 사막의 신기루야. 하지만 형이랑 나는 하나야. 우리는 형제니까. 사막의 두 형제. 한 명이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사라져.”

그래. 죽음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는다.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짐승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우리 모두가, 살인할 수 있는 심장을 지닌 우리 모두가 가게 될 그 지옥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686페이지)


눈에 뻔히 보이는 살인, 용의자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왜 이들을 가만히 둘 수밖에 없는지 지켜보는 독자는 답답할지도 모른다. 법으로 그들을 심판하려면 찾아야 할 그것, 증거. 심증 말고 물증. 매의 눈으로 주시하는 것 말고 눈앞에서 찾아낸 무언가로 살인자를 증명해야 한다. 의심하고 추측하지만, 아무도 이들 형제에게 죄를 묻지 못한다. 그렇게 범죄의 증거는 누구도 함부로 내려갈 수 없는 절벽, 후켄에 쌓여가고 형제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만의 사랑으로. 혹시 지금 내가 보는 게 맞는 걸까 싶을 정도로, 로위가 풀어가는 이 이야기는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은 마음이 자꾸 갈등을 일으킨다. 설마 하는 순간 사실이 되고, 의심하는 순간 사건은 벌어진다. 그들의 감정을 읽어갈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게 사랑인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질투인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이들에게 이제 남은 건 무엇인가.


요 네스뵈의 작품을 좋아하고(이렇게 말하지만, 열정 독자는 아니었던 듯), 언제나 신간 출간 소식이 반가웠지만(언제나 신작 소식은 즐거움), 그런데도 그의 작품에 쉽게 빠져들 수 없었던 건 그를 기억하게 하는 해리 홀레 시리즈를 완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가 빠지듯이 읽어온 그 작품들은 언젠가 완독해야 할 목표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해리 홀레 시리즈라면 신작이라도 섣불리 덤비지 못하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다. 그 와중에 만난 <킹덤>은 반갑고 또 반갑다. 새로운 독립적인 이야기인 데다가, 이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본성(?)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가족 이야기이면서, 형제 이야기이기도 하고, 타인을 통해 나를 보는 섬뜩함까지 마주하는 일이 내 앞에 펼쳐진다.


혹시나 나처럼, 요 네스뵈의 작품을 미친 듯이 읽고 싶지만, 그 시리즈의 두려움에 망설이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얼른 펼치라고 말하고 싶다. 단박에 빠져들고야 말 테니. 그러고 나면 이 빠진 것처럼 읽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완독도 멀지 않았다는 기대감에 빠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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