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많은 말을 할 테지만, 사용하고 싶지 않은 몇 가지 말이 있다. 그중 하나가 ‘무식하다’는 표현인데, 내가 유식하지 않아서 사용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고, 오해의 소지가 많아서 웬만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상대를 앞에 두고 말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 (혹시 모르겠다. 그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이 말을 누군가에게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그렇다면 정말, 많이많이많이 반성...) 무식하다고 말하면 상대는 대뜸 ‘지금 내 가방끈이 짧다고 그러는 거냐?!’ 라며 화를 내는 것도 봤다. 그러니까 이 말은 보통, 학력이 짧다는 말로 들리기 쉬운 듯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무식은 절대 가방끈의 길이와 상관없다. 기본이라 불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기준이 되는 단어가 아닐까.

 

내가 사는 이곳 시립도서관은 4개의 분관이 있고, 몇 개의 작은 도서관이 있다. 시립도서관을 한 달에 한두 번쯤 이용하는 정도인데, 마침 집 근처에 노인 복지관과 함께 작은 도서관이 개관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작년부터 하던 공사가 마무리되고 3월에 개관한다는 것이 미뤄져 결국 7월이 되니 개관했다. 사실, 처음 여기에 도서관을 만든다고 했을 때 쓸데없이 세금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차를 타고 15분 거리에 시립도서관이 있는데, 2주에 한 번씩 이동도서관이 운행하는데, 또 도서관을 만들어 예산을 이렇게 쓰는가 싶어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시립도서관까지 가지 못하는 이용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뭐 어떤 식으로든 또 이용자가 생기겠지 싶어 개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 개관하던 날. 오후 늦게 도서관에 가봤다. 이 작은 공간을 어떻게, 어떤 책들로 채워놨을까 싶어 분위기 파악이나 할까 하는 마음으로 가봤다. 이용자는 몇 명 없었다. 학교 끝나고 온 학생. 작은 방 한 칸처럼 따로 만들어놓은 유아도서실에 있던 아기와 아기 엄마. 나까지 해서 다섯 명도 안 되는 이용자가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고 몇 분 안 되어 갑자기 막 소란스러워졌다. 가만히 보니 어떤 아줌마가 아이 둘과 함께 들어왔는데, 입구에서부터 참 시끄럽게 들어오더라. 슬리퍼를 신고 왔는데 질질 슬리퍼 끄는 소리가 계속 이어지면서 그 공간이 막 울리던데, 그 소리가 그 아줌마한테는 안 들리는 걸까? 같이 온 아이 중의 한 명은 5~6세 사이로 보였는데, 그 아이 역시 슬리퍼를 신고 열람실을 다다다다다 뛰어다니고 있었다. 도서관에 슬리퍼 신고 오지 말라는 게 아니다. 발소리를 조심해야 하는 게 다른 이용자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거, 아닌가? 한참 아이가 그렇게 뛰어다니고 큰 소리로 소리치듯 얘기하면서 열람실을 도는데도 아이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도서관에 직원이 두 명 있었는데, 그 아이를 쳐다보면서도 뭐라고 말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직원 앞에서 막 뛰어가니까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쉬~!’ 하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아이는 그걸 보고도 그냥 무시하고 뛰어가면서 소리치고... 아마 그 직원은 애매했을 거다. 소란스럽게 하는 아이를 나무라야 하는데, 아이 엄마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어떤 행동을 취하기 어려웠지 않았을까.

 

도서관의 서가 사이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소란스럽던 그 아이가 큰 소리로 뭐라 뭐라고 하면서 내 근처로 왔다. 나는 무서운 표정을 하며(영화 ‘굿바이 싱글’에서 마요미가 “아저씨 무서운 사람이야, 으르릉~” 했던 것처럼, 나 무서운 사람이야, 하는 표정으로) 검지를 입술에 대고 아이에게 ‘쉿~!’ 했는데, 아이는 또 무시하면서 그냥 갔다. 계속 아이가 소란스럽게 하는 상태로 십여 분쯤 흘렀을까.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야, 조용히 해.” 라고 말했는데, 웃긴 건 그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말도 쩌렁쩌렁 울리게 큰 소리고 말하고 있더라는 거... 참다가 너무 견디기 어려워서 내가 찾던 책 한 권만 챙겨서 나오는데, 입구에 꽂아놓은 우산을 들면서 다시 서가 사이를 쳐다봤다. 여전히 그 아이와 아이 엄마는 처음 들어올 때부터 소란스러운 상태 그대로였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서다가 도서관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소란을 어떻게 잠재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내 얼굴을 보고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 앞으로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스러운 표정.

 

 

 

 

 

 

 

 

그렇게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생각하기 싫은 그 무식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아이 엄마는 아이에게, 도서관에서 소란스럽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나? 아니, 아이 엄마 자체가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조차도 정돈하지 않은 것을 보며, 아이에게 그런 예의를 가르치지 않은 거로 생각하기 쉬웠다. 도서관 직원도, 나를 포함한 다른 이용자도, 그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야 감정 상하지 않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지 많이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도서관 이용한 지 한두 해도 아닌데, 역시 이런 문제는 어렵다...

 

 

여동생은 아이가 둘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동생은 음식점에 가서 식사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식당에서 돌아다니면 안 된다, 자기 자리에서 식사해야 한다, 뜨거운 음식을 나르고 있으니 테이블 사이를 뛰어다니지 마라, 등등. 처음에는 말로 했는데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 엄포를 놓았다. “너희들 자꾸 이렇게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면 밥 안 먹고 집에 갈 거야.” 그렇게 말했을 때도 아이들은 엄마가 늘 하는 잔소리로 여긴 듯했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듣자 여동생은 집에 가자며 일어났다. 막 음식이 나온 상태였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모두가 일어나 집으로 갔다. 아이들은 황당한 표정. 설마, 정말 집으로 가겠어? 말만 그러겠지, 싶었나 보다. 그런데 정말 집으로 갔으니, 아이들은 당황했다. 그리고 여동생은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벌써 여러 번 말했는데도 안 들으니, 앞으로 너희가 식당에 가서 계속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다시는 너희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가지 않겠다,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밥을 먹는 게 식당에서의 예의라고. 그 이후로 아이들은 변했다. 식당에서 뛰어다니지도 않고, 소란스럽게 하지도 않았다. 놀이방이 있는 식당에서는 식사를 다 하고 놀이방에 가서 놀았다. 이 귀여운 것들. 기본을 아는 아이가 된 걸 보니 내가 다 기뻤다. 이 아이들은 그런 경험을 몇 번 해서 그런지, 처음 도서관에 가서도 한번 말하는 것을 알아듣고 그대로 따라 했다. 책을 꺼내보면 제자리에 꽂아두고 혹시라도 제자리를 모르겠거든 앞쪽에 가져다 놓으면 된다, 직원이 원래 자리에 찾아서 꽂아둘 거다, 큰 소리로 얘기하지 말고 조용히 해야 하는 곳이다, 혹시라도 너희들끼리 얘기하고 놀고 싶으면 유아실로 들어가라, 고 했다. 유아실은 말 그대로 많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들이 들어가 있는 곳이다. 아직 아기이다 보니 울기도 하고, 가끔 거기서 분유도 주고, 소리 내어 책도 읽어주고 하더라. 그렇게 해도 된다고 별도로 마련한 장소이니 괜찮다.

 

말로 가르치든 행동으로 보여주든, 아니면 아이가 말로 했을 때 알아듣는지 행동으로 보여야만 알아듣는지 다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가르쳐야 할 게 분명 있다. 그 안에서 중요한 건 기본이다. 나는 작은 도서관에서 본 그 아이 엄마의 태도를 쉽게 잊지 못하겠다. 아이가 도서관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걸 제지하지 않는 엄마, 그냥 그러려니 하는 태도로 아이를 보고 있는 엄마, 엄마가 나무라지 않으니 그게 잘못된 줄도 모르고 계속 그렇게 행동하는 아이. 무엇이 중요한지, 기본인지 가르치는 게, 비싼 옷, 명품 가방, 명문대 같은 것보다 우선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러니
훈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그려, 안 그려?! 응?! 『아이러니』

우연히 재방송으로 본 <1박 2일> 이화여대 특강에서 차태현이 그러더라. 이제껏 자기 인생이, 하나도 계획한 대로 가지 않더라는... 강당에 모인 많은 학생이 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었다. 거의 두 배의 나이 차가 있는 서로에게 얼마나 공감할까 싶었는데, 그 학생들의 나이에서는 그 나이에 해당하는 만큼의 경험으로 그의 말에 알아들었을 거다.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에게는 또 그만큼 쌓인 연륜으로 공감했을 것이고. 정도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 그 말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13년 전에 원수로 인연을 끝맺었던 준과 세진이도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듯하다. 산다는 게 알 수 없는 것투성이라고. 세진의 마음속 외침은 ‘내 인생 계획에 이 녀석을 다시 보는 일은 없었거든?!’ 이라고.

방송국에서 라디오 피디 세진의 입지가 점점 줄어간다. 맡은 프로그램이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기본이고, 청취율까지 저조하다. 국장은 매일 험한 소리를 하며 이를 득득 갈고 있다. 이러다 언제 패대기쳐질지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라디오 CP로 경쟁 방송사의 유능한 인재가 스카우트됐단다. 그 피디 때문에 세진의 방송 청취율이 바닥을 기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 사람이 이곳에 모셔져(?) 왔다니 기분이 영 꽝이다. 그런데 이거 웬일? 스카우트됐다는 피디가 김준이었어? 아, 진짜 되는 일 하나도 없다. ‘어떻게 저 인간이 여길 와? 왜 내 앞에 보이는 거야?’ 김준은 국장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 것도 모자라 세진의 갑이 되어버린다. 아, 진짜 자존심 상해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마음만 그래, 마음만). 설상가상 같은 방송국에서 만나던 연인 현민은 헤어지자고 한다. 사내 공개연애를 했는데, 공개로 망신당하게 생겼다. 개차반 애인에게 까여, 원수 같은 동창생은 상사로 와, 국장은 잘라낼 틈만 보고 있어, 휴... 인생 제대로 꼬여간다.

방송국이라는 배경, 그것도 한밤의 라디오가 주는 묘한 매력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했던 책이다. 작가의 전작을 한 번도 못 만난 터라 그 분위기를 알 수도 없었지만, 아마 나는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작품이라고 해도 한번은 읽어봤을 듯하다. 아무래도, 아직도 아날로그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라디오가 배경이 되는 이야기에 관심이 생긴다. ^^ 만약, 무인도에 TV를 가져갈래, 라디오를 가져갈래, 하고 물으면 고민도 없이 라디오라고 대답할 거다. 그만큼 그 분위기를 좋아한다. 한밤중에 라디오 켜 놓고 책 읽는 거 누가 방해하면 짜증이 날 정도로 싫어했는데, 요즘엔 그 시간에 눈이 피곤해져서 누워있거나, 아니면 PC를 켜놓고 라디오 듣느라 책이 자주 제외되지만, 어쨌든 나도 그 아날로그 감성이 주는 매력을 맛보며 자란 터라, 어쩔 수 없이 그 정서를 잊을 수는 없다. 요즘은 휴대폰으로도 듣고, 바로바로 신청곡을 전송하기도 하는, 아날로그지만 디지털 방식이 되어버린 라디오지만, 전파 타고 흐르는 그 공감대를 생각하면 괜히 더 훈훈해진다. 그 공간에서 함께할 남자와 여자의 케미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던 거다.

얘네들은 왜 그랬을까? 1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이렇게 원수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성장했기에 여자는 쌈닭이 되어 있고, 남자는 검사를 때려치우고 나와 방송국에 터를 잡은 걸까. 방송국에서 서로 부딪히며 하루하루가 쌓여가고, 각자 자기 방송에 대한 애정과 프로의식이 탄탄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지금 상대의 모습이 왜 그런 건지 알아지는 시간이 보인다. 그 와중에 상대를 향한 눈빛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물론이고. 세진에게 방송국은 더는 스트레스와 눌림을 당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꽃밭이자,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태도를 가르쳐주는 학교나 다름없다. 그동안 꼬여왔던 인생이 이렇게 풀리려나 보다. 오해가 풀리고, 사람을 보는 눈이 키워지고, 마음을 풀어놓으니 세상을 사는 법이 이렇게 달라지나? (아, 이 긍정마인드 어쩔껴. 내가 배워야긋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을 왜 그렇게 아득바득 싸우려는 자세로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죽일 듯이 미웠을 정도로 서로를 봤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서로가 원했던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경쟁자였음은 인정하자. 가정의 무너진 경제에 더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었던 세진이나, 세진에게 뒤지지 않으려 치열하게 공부했던 준이나... 드라마 <닥터스>에서 국일 병원 부원장 김태호(장현성)는 진서우(이성경)에게 ‘유혜정(박신혜) 선생은 진 선생에게 좋은 경쟁 상대가 될 거야’ 라고 말했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가 어느 정도 호흡의 흐름을 잡아주는 것처럼 어떤 분야에서든 좋은 경쟁자는 그 자신을 한 뼘 성장하게 해주는 듯하다. 『아이러니』의 두 주인공에게도 마찬가지. 김준에게는 세진이 그랬고, 세진에게는 김준이 그랬다. 서로 1, 2위를 다투면서 그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겠지만, 그래서 더 학업에 매진하는 정신력을 키워준 게 아니었을까. 물론 그 이면에는 서로가 알지 못했던 오해가 쌓여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와서 그 시간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의미도 없다. 지금이 좋으니, 됐다. 서로 열심히 달려서 지금 자기의 자리에 안착했고, 그 자리의 일을 좋아하고, 또 더 좋은 라디오 방송을 위해 애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니 말이다. 오해를 쌓은 채로 살아왔던 13년이 아깝고 억울하기보다, 지금의 상황과 마음이 더 애틋하고 감사하니 저절로 풀렸을 거라 믿는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연인이 될 거로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처럼, 우리 앞에 놓인 많은 것도 마찬가지. 그냥 오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마음을 채우며 살아가는 일이면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따뜻하게 다정하게, 가까이
하명희 지음, 김효정(밤삼킨별) 사진 / 시공사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가끔 꽂히는 드라마 한두 편을 보는 정도라 잘 알지 못했다. 그 당시 입소문으로 자꾸 퍼지던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를 중간부터 보게 되었는데, 이 드라마 은근 매력적이더라. 누구를 욕하고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는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은 있는데, 각 캐릭터들에게 한 가지 마음만 보낼 수 없던 거다. '이럴 수도 있을까?' 싶었다가, '그래, 이 상황에서 이런 마음도 있을 수 있어.' 하는 온갖 감정이 왔다 갔다 했다. 마음속에 자리한 그 많은 말이 한마디로 쉽게 나오지 않았었다. '이거 뭐지?' 하는 어지러운 기분. 그 이후로 방영된 <상류사회>는 보지 못했지만, 대신 하명희의 글을 만났다.

 

드라마와 얼마나 다를까, 혹은 얼마나 비슷할까. 몰랐다면 백지에서 시작했을 텐데, 이미 저자의 드라마를 본 터라 비교 아닌 비교를 하면서 읽게 됐다. 드라마에서 직설적으로 표현되는 대사는 어쩌면 저자의 성격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에세이 <따뜻하게 다정하게, 가까이>를 읽다가, 드라마 <닥터스>에서 홍지홍(김래원) 선생이 유혜정(박신혜)에게 직선으로 드러내는 마음을 보는 듯한 시원함을 발견하곤 했다. 역시, 사이다 같은 기분은 잠시 잠깐 한 편의 드라마에서만 나온 건 아니었어, 하는 안도와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동시에 심어준다.

 

 

저자는 살아보기 전엔 알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다며,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 중 하나가 에세이를 출간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저자의 다음 드라마는 뭐가 될까 궁금했던 정도로 이름을 기억했다. 저자의 드라마나 소설을 봤어도,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들었어도, 내가 이 책을 읽게 되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휘리릭 넘기던 페이지의 한 구절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 사람의 사정은 그 사람이 되어 보지 않으면 정확히 모른다. 인간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모든 것에 한계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범위의 삶과 다른 삶에 대해선 공부해야 알 수 있다.

상대방을 위한다고 충고하는 것보단 밥 한 끼 사주는 편이 낫다. (81페이지)

 

그 사람이 되어 보지 않으면 정확히 모르는 것들. 때로 상대방에 대해 다 안다고 자만하는 것들. 우리는 같지 않다. 비슷하게 보이고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완전히 같을 수가 없는 거다. 굳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거, 아닌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어쩌면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 못 한 채로 보고 있는데, 마치 다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경험해본 바, 말이 많아지면 실수를 하더라. 사람을 상처 내는 것도 말로 시작한다. 마치 그 사람에 대해 경험하지 않은 부분까지 다 아는 것처럼 말이 나올 때는 부담스럽고 불편해진다.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그냥, 아는 만큼만 보고,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아는 만큼만 이해하고, 다가가면 정말 안 되는 건가. 다 알면 좋겠지만 굳이 그게 아니어도 괜찮잖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적당한 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아니었나? 살아온 시간과 과정이 다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어.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역사가 있고, 그 역사 안에 자신만의 상처가 있다. 개인의 상처는 객관적인 게 아니다. 얼굴만 봐서는 그 사람이 뭐로 아파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어려운 거다. 어려운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선 우선 자신이 어떤 말을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 말조심만 해도 인간관계 절반은 성공이다. (62페이지)

 

저 부분을 한참 들여다보다,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 천천히 읽었다. 분량도 짧아서 읽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새삼스러운 말도 없었다. 그저, 저자의 말투가 이렇구나, 하는 정도. 그런데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하고자 하는 말의 방향을 가만히 살펴보니, 타인을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는 거였다. 내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짜증 냈던 거, 내가 알 수 없어서 부담스럽고 귀찮았던 것들을 꺼내며 말하는 듯했다. 차마 말하지 않은 것들을 대신 들려주는 기분. 대부분 내가 경험했던 순간들, 감정들이었기에 조금만 더 들어보자, 하는 의미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겼다. 무조건 착하고 옳은 것만을 강요하는 위로가 아니라, 아닌 건 아니 거라고 말하는 그 고요한 독설이 좋았다. 독설이라고 하기에 민망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너무 착한 사람 흉내만 내면서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니어서 좋았다는 거다.

 

삶의 특별함은 시간이 흐른 후, 혹은 어느 날의 느낌표로 알게 되는 듯하다. 불행한 삶이 괴롭고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는 것도 시선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행복하기만 하면 그 외의 불행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항상 옳은 선택이라고만 믿는다면 잘못된 길을 알지 못할 것이기에. 일상에서 치고받는 순간들이 가져오는 것이 꼭 나쁘게만 작용하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 시선과 감정의 다양성은 인간관계로 이어져 삶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과 이어져 나아가는 중에도 우리가 미처 짚어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표현하는 많은 것,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가리는 이중성, 사랑을 둘러싼 사람의 마음.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고 다 알 수 있는 게 없어서, 때로 그 순간이 죽을 것처럼 아프지만 또 그렇게 받아들이며 흘러간다. 그렇게 겪으며 무심코 알게 되는 것들. 사람이, 사랑이, 그 순간의 아픔을 상쇄시켜주기도 하고...

 

인류가 시작되면서, 사랑이 만들어지면서, 사랑도 함께 시작됐다. 사람에게 사랑은 유전자에 깊숙이 박힌 본능이다. 더 많이 사랑한다는 건 사랑하는 능력을 더 많이 가졌다는 의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은 굉장히 좋은 성품을 만든다. 좋은 성품은 다른 사람들도 기쁘게 하고, 자신도 기쁘게 한다. 사랑을 유지하는 건 사랑에 빠지는 거보다 훨씬 더 어렵다.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변하는 거다. (109페이지)

 

인생 뭐 별거 없다고 생각하지만, 살면서 겪게 되는 감정들이 특별해지고 문득 알게 되는 것들이 쌓여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할 때, '별것 있는' 인생이 될 것만 같다. 저자가 드라마와 글을 통해서,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을 하게 되는 것에서 그걸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살아보면서 알 수 있는 일이 그 순간 하나둘씩 늘어갈 때, 자신에게로 향하는 별것 있는 순간들이 하나둘씩 쌓여간다는 것을, 저자의 짧은 글에 함축된 말을, 이렇게 듣는다.

 

 

드라마 속의 대사가 저자의 에세이에 그대로 묻어 있다. 독설 같지만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직선으로 향하는 말들이 듣기 좋다. 그래서 이번 드라마 <닥터스>를 더 집중해서 보고 싶어진다. 4회에선가, 진서우(이성경)가 부원장 김태호(장현성)에게 유혜정을 디스하면서 했던 말에 김태호는 '말씀드릴 수 없는 사생활은 말할 수 있는 사생활보다 더 인신공격'이라고 했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상처 입히고, 비열한 공격인지 전한다. 유혜정과 진서우 사이에 필요한 건 페어플레이다. 의사로, 인간으로 살아가는 올바른 태도. 너무 무겁지 않게 흐르는 이 분위기가 좋아서 4회까지 본방사수했다. 앞으로 이 드라마가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계속 보게 될 듯하다. 의학드라마이지만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더 눈에 들어오고, 이미 시작된 유혜정과 홍지홍의 로맨스가 더 '심쿵'하게 하지만, 의학에 관해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하명희 특유의 그 인간적인 이야기가 돋보여도 괜찮을 듯하다.

 

 

그나저나, 나는 배우가 나이 들어가는 게 참 보기 좋더라. 김래원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을 봐도 비슷하다. <옥탑방 고양이>가 인기였을 때도 김래원이 좋다는 생각 못했는데, 이번 드라마에서는 확실히 김래원은 나이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도 그는 그때보다 나이가 더 들었겠지만, 이번 드라마에서 나이 마흔으로 등장하는 설정이 괜히 기분 좋다. 인간미 넘치고 연륜이 묻어나는 연기 보여줬으면 좋겠다. 현실에서 경험한 병원이나 의사를 생각하면 홍지홍 쌤 캐릭터는 판타지에 가깝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듯해 유감이지만)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건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만나고 싶은, 인간적이고 마음 쏟아 붓는 의사로 남길 바라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여름, 나는
최수현 지음 / 가하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뜨거워서 좋았던 여름이라고 기억해야겠다. 『그 여름, 나는』

 

무슨 약속이든 잘 지키는 이재이, 여자를 때린다고 소문났던 윤제희. 거부하면 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부반장과 반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서로 맞지 않는 듯 보였던 두 아이가 함께 보냈던 고3.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야 한다는 재이에게 방과 후에 과외를 해주고, 재이의 꿈을 들어주고, 자존감과 용기를 심어주었던 제희. 말이 거의 없는, 남들이 뭘 하든 관심 둘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늘 최고의 자리를 놓지 않았던 제희가 왜 재이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알 것 같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기 판단할 수는 없었으니... 막연하게나마 추측하면서 그 마음을 들여다보지만, 아직은 미성년이니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참아본다. 졸업까지 같이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 두 사람이 2002년 여름, 계절의 더위와 월드컵의 열기가 맞물린 그때, 우연처럼, 기적처럼, 다시 만난다.

 

대부분 과거를 이야기하며 시작하던지, 아니면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와 교차로 진행되든지 하는 구성이었던 것에 반해, 이 소설은 2015년 현재를 기준으로 본다면 과거와 과거의 교차로 진행된다. 1993년과 2002년의 시간이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거다. 그때보다 나이를 훨씬 더 먹고, 30대 후반, 4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타임머신을 타게 하는 기분이 든다. 진짜 오래전 신문을 뒤져야만 알 수 있는 일들, 어느 통신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기기들이 거리감 느끼게 할 수도 있지만, 그 나잇대를 살아가던 순간만큼은 깊게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설레던 풋풋함, 아침잠을 포기하며 투덜투덜 교복 입고 다니던 그 시간, 수능시험의 최대 수혜자가 누구냐며 성토하던 표정들까지. 저절로 기억나고, 가끔은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다. 누군가 과거의 어느 시간으로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내 주변의 사람들은 대개 스무 살이나 20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고3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게 아니고,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내가 살아갈 시간에 대해 먼 그림을 조금씩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뭐, 여러 번 생각해도 지금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냥 과거의 시간일 뿐인데 말이지.

 

재이와 제희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9년의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던 장면들은 안타까웠고, 서로의 몰랐던 시간을 조금씩 공유해가는 모습은 애틋했다. '자식들, 귀엽네.' 싶으면서도 나이와 상관없이 아픈 시간을 보내는 것에는 시선이 비켜갈 수가 없다. 특히 재이게에 열아홉, 스무 살은 제희를 만났다는 것 말고는 좋은 기억으로 남을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때는 몰라도 좋았을 삶의 고통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아이의 마음에 가득했을 비참함 같은 것, 꿈을 꾸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이 버거워서 지치던 시간, 벗어날 수 있다고 발버둥 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반복될 뿐이었던 기억들. 그게 현재의 삶까지 주관한다고 생각하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 아닐까. 첫사랑이 있던 시간이라고 해도 말이지. 그래서 소설은 소설인가보다. 꿈을 떠올리게 하고, 괜찮지 않을까 하는 어떤 기대감도 심어주는, 긍정의 결말을 바라게 하니까...

 

읽으면서 내내 괜한 마음에 아닌 척, 모르는 척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더라. '어머, 대전엑스포는 혹시 역사책에서 나오는 행사였던가요?' 라고 물어보며 한 발 빼고 싶었는데 말이다. ^^ 나와는 다른 시간이라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처음 듣는 이야기인 척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 같은 시간을 기억하는 어떤 일들에 대해 이렇게 하나씩 꺼내놓는 이야기가, 좋으면서도 괜히 우울해져서 말이다. 드라마를 즐기지 않으면서도 <응답하라 1994>에 푹 빠졌었고, <무한도전 토토가>를 보면서 미칠 것 같았던 시간을 겨우 넘겼는데, 이제 이 책이 다시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처럼 남아버렸다. '읽지 말 것을' 하고 잠깐 후회하면서도, '어디서 같은 추억을 찾아볼까?' 싶어 다 읽은 후에도 한 번 더 뒤적거리는 내가 참 어이없어서...

 

1990년에 10대 고3 시절을 보내고, 2002년에 20대의 후반을 지내면서 월드컵을 즐긴 세대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물론 나는 열아홉에 첫사랑도 없었고, 2002년에 첫사랑을 다시 만난 적은 더더욱 없었고, 길에서 우연히 첫사랑을 만난 일 따위의 경험은 없는 인간이지만, 이들이 만들어가는 그 배경의 시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열아홉에 고3을 지냈고, 대전엑스포의 열기가 사라진 겨울에 그곳을 찾았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친구들과 함께 갔던 맥줏집에서 황선홍의 얼굴이 그려진 맥주잔을 훔쳤다. 무엇보다, 호출기의 음성녹음이 10개만 된다는 건 지금 안 사실. 같은 시간을 지나왔던, 호출기를 사용했던 나도 몰랐던 이 이야기가 2015년을 살아가는, 온갖 스마트기기가 생활을 지배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악역인 듯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물, 조력자로 등장하는 귀여운 의사쌤, 제희의 꼼수에 누명을 썼지만 '끝내주는 이것'으로 미안함을 전해야만 했던 녀석. 개성 있는 인물들과 무리수 없는 이야기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다.

 

 

 

여담이지만, 몇 가지 생각나는 것.

 

* 수학능력시험의 최대 수혜자?

고3 때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된 아이가 있었다. 하루 7~8교시 수업 내내 과목과 상관없이 책만 읽던 아이다. 단행본 만화책, 격월간지 만화책, 온갖 소설류, 할리퀸까지. 용돈 전부를 책을 사는 데 쓴다고 말하던 아이였다. 신기했다. 책을 저렇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을 보여줬다. 특히, 전교 등수도 아니고 반 등수에서 하위권을 달리던 그 아이에게 대학이란 단어가 상관없는 줄 알았다. 정말 아무런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학교에서는. 모의고사나 중간 기말 성적은 말할 것도 없이 바닥이었다. 다들 그 아이가 대학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학생식당에서 점심 메뉴를 고르고 있었던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기에 돌아봤다가 놀란 기억. 그 애였다. 수업시간 내내 소설과 만화책만 보던, 내신이나 모의고사 성적이 바닥이었던 그 아이. 겨우 얼굴과 이름만 알고 있었던 그 아이가 너무 반가워 그날 학생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같은 학교 불문과에 입학했다고 했다. 와우~ 괜히 반가운 마음. 나중에서야 들었는데, 그 아이는 수능 언어영역 만점을 받고 입학했단다. 지금 수능시험의 분위기는 잘 모르겠는데, 그 당시만 해도 수능시험에서 언어영역 점수를 잘 받는 건 수리나 외국어에서 만점 받기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가 있었다. 내 경험으로도 그 말은 맞는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수리영역 만점 받는 게 더 쉬웠다. 그래서 우리끼리 그때 얘기를 꺼내면 어김없이 그 아이 이름이 등장한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시험으로 바뀌어서 가장 크게 이득 본 사람은 그 아이라고... ^^

 

* 호출기의 녹음은 10개까지만 되었던가?

그랬나 보다. 사실 기억에 없다. 호출기 녹음이 10개까지 되는 건지 아닌 건지.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호출기가 새삼 신기하기도 했는데, 녹음이 10개까지만 된다는 이유로 아쉬운 마음을 녹여냈던 게 제법 잘 어울린다. 거의 대학 졸업 때까지 호출기를 사용했고, 90년대 후반부터 휴대폰을 사용했다.

 

* 대전엑스포는 어느 나라 행사였던가?

아마 요즘 아이들은 모를 수도 있겠다. 대전엑스포는 우리나라 행사, 맞다. 행사가 다 끝나고 겨울에 갔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 7~8명쯤 같이 갔었다. 휑한 그곳을 걸으며 춥다고, 따뜻한 뭔가를 먹자고도 얘기했었고, 우리끼리 그런 낯선 곳에, 먼 곳에 갔던 게 처음인지라 무섭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무사히 귀가했고 그날의 경험으로 우린 더 멀리까지, 며칠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부모님의 허락은 받았음) 그때 대전엑스포는 한동안 이슈였고, 이런 게 정말 세상에 나올까 싶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우리 삶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래의 시간, 상상을 말했던 게 현실이 되고 있음을 증명하던 시간.

 

* 2002년 월드컵.

제희가 한밤중에 편의점을 돌면서 경험했던 일(?)은 아마도 사실일 거다. (편의점마다 달랐을 수도 있으니 그건 알아서 판단하시고) 그 당시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서 엄청 많이 들었었다. 그래서 이 부분 읽으면서 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제희의 표정이 그려져서다. 아, 도대체 몇 군데를 돌았을까? 그래도 무책임한 녀석은 아니어서 좋네.

2002년은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은, 대한민국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이 일어났던 시간인 듯하다. 그 시간을 지났던 모든 사람, 특히 스물여덟을 살았던 이들에게 더욱 공감하는 이야기겠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일
송지성 지음 / 로코코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20일, 외로움이 거둬지는 시간... 『20일』

 

외로운데 외롭다고 말하지 못하는, 외로울 텐데 외롭지 않으려 애쓰는, 외로우면 안 될 것 같은 외로움. 말이 좀 안 되나? 그럼 이런 거. 외로움이 너무 익숙해서 외로운데 외로운지도 모르고, 외로움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마음. 『20일』일 속의 인물들에게 그런 걸 봤다. 섬으로 밀려 들어온 애희에게, 섬이 싫어서 떠난 윤기에게, 섬의 모든 것이 가족 그 자체라 여기며 사는 어매, 아재들. 각자의 외로움에 치여 그 외로움을 묻어버리거나, 서로의 외로움을 똘똘 뭉쳐 없애버리거나...

 

외로움의 곁에 있어 본 사람은 안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사무치게 이기적인지. 전염병처럼 퍼뜨려 놓고 수습은 하지 않는 그런 이기적인 외로움. 윤기는 새벽녘 나가는 아배의 등에서 그 모습을 수도 없이 발견했다. (368페이지)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윤기는 섬으로 다시 들어왔다. 다음 배가 들어오면 나갈 거다. 지긋지긋해서, 미움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섬을 떠났는데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다. 온 동네의 어매 아재들이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했다. 아니다. 그들이 상주 같았다. 모두가 가족처럼 지내온 사람들이니 이런 장례가 낯설지 않다. 그 풍경 속의 낯선 여자, 애희. 모두가 나이 든 사람들뿐인 그곳에 젊은 여자가 분주히 움직인다. 조용하게 움직이면서도 그 흔적을 남긴다. 관심 없다. 상관도 없다. 이 섬에도 그 여자에게도. 그런데도 자꾸만 윤기를 끌어당긴다. 어매 아재들의 정이, 애희의 이상한 흔적들이... 닷새에 한 번 들어오는 배. 그 배를 놓치면 다시 닷새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섬에서는 그의 삶이 없다. 고기를 잡고, 어망을 손보며 보내는 하루, 바다로 나간 배가 제대로 돌아올까 걱정하면서 부둣가를 서성이는 불안함 따위 겪고 싶지 않은데, 뭔가가 자꾸 윤기를 붙잡고 있다.

 

아버지가 남긴 한 문장, 스무날을 섬에서 지내고 가라는 말. 그 말을 지키려고 했던 건 아니다. 처음 들어와서 닷새만 지나면 바로 나가려고 했다. 미련도 없을 거로 여겼다. 한 번 놓치고, 두 번 놓치고... 그렇게 쌓여 스무날을 섬에서 보냈다. 스무날이 지나고 윤기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숨은 것처럼 섬으로 들어온 애희가 윤기에게 전하고 싶은 건 뭘까.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해하고 싶지 않던 것들이 무엇을 보여주게 될까.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눈빛이 무얼 말하고 있는 건지. 그래서일까. 애희가 윤기를 향하게 하는 무엇, 윤기가 애희에게 향할 수밖에 없던 것은. 민철 아재가 배에 그린 그림이 그의 진심을 대신하는 것처럼, 그 그림을 보고 단번에 알아챈 윤기처럼, 윤기를 그 배로 데려가 보여주는 게 마치 자기 할 일이었다는 애희의 표정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왜 그토록 모른 척하며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 마음을 읽어도 의미를 담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배가 싫어 떠났고, 무엇도 남겨진 것 없을 거라 여겼던 섬이 싫어 떠났는데, 왜 자꾸 다른 감정이 침투하려는 것인지 감당할 수 없어서 화가 나서일지도. 그래서 다 모른 채로 떠나고 싶었을지도...

 

참 이상도 하지. 그런 마음으로 있을 때마다 자꾸 다른 게 들러붙어 감정을 하나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 미우면 미운 채로 남겨두지, 왜 자꾸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까. 미처 듣지 못한 말을 굳이 듣게 하려 애쓰는 사람들의 진심이 보이지만, 그건 그 과정을 몰랐던 사람들이 부리는 오지랖 아닐까. 이 부분에서 나는 어느 작은 마을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정을 나누는 거라는 이유로 타인의 삶에 온갖 간섭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에 화가 났다. 나는 정말 이런 거 싫은데. 가깝게 지낸다면서 거리감 제로인 삶을 강요하는 분위기. 고립된 곳이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오랜 시간 그런 생활이 당연한 것으로 쌓인 삶의 흔적들일까. 그래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의 삶이다. 적당한 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라고 믿는 나에게 그 섬의 분위기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윤기가 섬을 떠나고 싶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보기를 방해하는 많은 것 때문에.

 

어쨌든 이야기의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애희와 윤기의 로맨스가 이루어지는 건 당연해 보였다. 섬으로 들어온 여자와 잠시라도 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남자의 만남이 '민철 아재'라는 매개로 무슨 운명처럼 엮이기 시작했을 때 이미 나온 결말이다. 이 소설은 오히려 그 과정과 시간의 흐름에서 매력을 뽐낸다. 취향이 아니면 읽기 힘든 소설인 듯도 하다. 이 책을 2주 동안 읽었다. 처음에는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아서 힘들었는데, 읽다 보니 온갖 감정이 밀려들어 페이지를 더디게 넘기고 있었다. 애희의 사연, 윤기의 분노, 어매 아재들의 팍팍한 삶, 그런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하지만 '묶은' 것처럼 보이는 섬. 이 섬의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까 궁금해하면서 읽게 된다. 바닷바람과 바다 냄새나듯 들리는 어매 아재들의 마음이 부담스러웠다가, 등만 봐도 그 표정을 아는 섬사람들의 혜안에 고마웠다가, 고립되어 보이는 섬이라는 공간에 답답했다가... 그런데도 결국은 미워할 수 없는 그들 삶의 방식을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 관객이 거의 없는 상영관에서 단편 영화 한 편 보고 나온 기분이다. 장르소설이 아니라 일반소설로 만났다면 더 만족했을 분위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