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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 그리움을 안고 떠난 손미나의 페루 이야기
손미나 지음 / 예담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꽃보다 청춘>의 페루행을 한 번도 빠짐 없이 봤다. 페루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고 여행을 좋아해서도 아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세 남자의 좌충우돌 여행기가 궁금해서였다. 그렇게 그들의 발길 머문 곳의 풍경들과 갑작스레 닿게 된 타국에서 겪는 낯섦, 그런데도 좋아 보이는 그들의 표정에서 전해오는 행복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 테마에 맞게 찾아가는 듯한, 그들이 말하는 그 청춘의 이야기가 궁금해서이기도 했다. 그 여행에서 그들이 찾게 된 청춘의 의미. 어떤 모양으로든 만나게 된 그들의 청춘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잊고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잠시 멈춘 듯한 열정이 다시 피어오르고, 오늘과 내일을 좀 더 열심히 살아가고 싶은, 오래전 그들이 무언가를 꿈꾸었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여행의 의미는 그런 거라고, 누구에게나 어딘가를 향하게 하는 크고 작은 이유가 생겨날 때 떠나게 되는 것, 이 아닐까. 그게 언제든, 그곳이 어디든...

 

페루 여행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어 더욱 감사한 시간이었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들은 마주하면서 한없이 낮아지던 경험. 때로는 그저 겸허하게 받아들이거나 포기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깨달음. 인간 능력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교만함을 버릴수록 영혼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 이것이 바로 페루 여행에서 얻은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115페이지)

 

저자에게도 그런 이유가 하나쯤 존재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상처받은 그녀의 영혼이 향할 수밖에 없는 곳, 페루였다. 사람이 언젠가 한번은 죽게 되겠지만, 그녀 역시 그때를 가깝게 생각하진 않았던 듯하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 인생을 크게 흔든 계기가 되었다. 그런 그녀가 의지할 곳은 여행이었고, 그녀를 부른 곳이 페루였다.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라니, 그 충격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된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쉬이 들려오지 않았을 듯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위로와 치유가 절실했을 거라는 건 알겠다. 그녀에게 그 위로를 주겠다며 허락한 땅, 페루. 지구상에서 신들의 세상에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그곳에서라면 그녀의 영혼을 치유 받고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믿음이 떠오른다. 그렇게 그녀가 페루로 떠나고, 그곳의 땅을 밟고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 온기를 나누던 시간은 그녀 안으로 오롯이 들어왔다. 아름다운 그곳의 자연과 역사를 품고, 사람들이 건네는 순수와 진심을 안고 돌아와 우리 앞에 이 책을 내놓았다.

 

쿠스코의 푸른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도, 마추픽추의 웅장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는 자연과 사람들의 지혜를 발견한다. 잉카인의 문명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 비워내고 오로지 그곳에 존재하는 것들을 그 빈 곳에 다 채울 수 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페루의 유적에서 뿜어져 나오는 경건함, 곳곳에서 보게 되는 삶과 죽음의 의미,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온 현재의 모습이 간직하는 것, 자연 앞에서 인간의 겸손함을 보게 되는 곳. 그녀가 그 길에서 마주친 것들을 들려줄 때마다 놀라움의 연속이다. 이미 한 번 본 장면들도 있지만, 다시 봐도 역시 감탄사가 나오게 된다. 인류가 만들어낸 기적을 보는 기분. 그게 또 아무 데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신비함. 열대 우림과 고산, 사막과 바다, 어느 한 곳이라도 자연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는 장소여서 그 특별함을 더한다. 그 여정에서 또 기적처럼 만나는 인연들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택시 운전사 그레고리와의 만남은 우연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약속하지도 않고 서로가 느낌만으로 재회할 수 있다는 게 오늘을 살면서 내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어긋난 약속 그다음에 만나게 되는 우연은 신이 허락한 인연이 아니었을까? 그레고리의 가족들과 보낸 시간에 온기를 담아오고, 그녀의 친구인 이야의 할머니가 건넨 한 마디가 가슴속으로 직행한 듯 훈훈해진다. 시렸던 마음이 다독여지고 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녀가 왜 굳이 페루로 떠났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녹색 평원에 드러누워 있자니 내가 잔디가 되고 구름이 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인간이란 애초에 잔디나 바람 같은 존재와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긴 채 주어진 삶을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154페이지)

 

가깝지만은 않은 곳이기에 선뜻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곳은 아닌 듯했던 페루를 이 여행기로 조금은 가까운 거리로 끌어당겼다. 문명을 모른 채로 살아가는 티티카카 호수 사람들의 삶에서 비워짐, 느림의 시간을 느꼈다. 도시적인 느낌이 아니어서 더 여유로움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런 삶을 여기서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특히 그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친해져 그들의 마음까지 담고 오는 저자의 기운에 뭔가가 더 가득 채워진 기분이다. 인연이라는 건 그렇게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나와는 다른 성격의 그녀가 여행에서마저 낯섦을 떨쳐버리는 듯해서 부럽기도 했다. 어딘가로 향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예민함이 크기를 키우는 나와 다르게, 그녀가 여행준비를 할 때부터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설레기부터 한다. 뭔가 단단한 게 내 안에 들어올 준비를 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결국은 그 길의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내 것으로, 나를 위한 것으로 만들려는 그녀의 의지가 힘을 발휘한 게 아니었을까... 여행에서 채워지는 건, 낯선 곳을 낯설지 않게 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길 위의 시간까지 포함하는 것이겠지. 그런 의미로 이 책을 담아보자면, 마음이 어떤 신호를 보낼 때, 그녀처럼 주저 없이 가방을 꾸리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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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반장 똥 반장 연애 반장 초승달문고 28
송언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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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니던 학교는 시골의 한 초등학교였는데요. 저는 개구쟁이 남학생과 학교 운동장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막 뛰어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비명이 들렸습니다. 같이 장난하던 남학생이 급하게 저를 쫓아오느라 계단에서 구른 게지요. 어린 마음에 얼마나 놀랐던지. 아마도 초등학교 3~4학년 때쯤이 아닌가 하는 기억이 있습니다. 다음날 그 남학생은 당연한 것처럼 팔에 커다란 깁스를 하고 나타났어요. 나 때문에 그런 건가 싶어 겁이 나서 가슴이 막 뛰는데 그 친구는 아주 어른스럽게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해주어서 안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언제나 그렇듯 오래 전 시간의 기억을 들추어내는 것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미소 짓게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지내왔던 한 순간의 웃음과 추억들을,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발견할 때 신기하면서 또한 기분 좋은 웃음을 만들어내지요. 그 주인공들은 우리의 아이들일 수도 있고, 공원을 지나다가 뛰어노는 모르는 아이들을 수도 있고요. 이 책 속의 아이들처럼 정말 개구쟁이를 볼 때일 수도 있습니다. ^^

 

 

2학년 3반의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황동민, 황동민의 마음을 뺏어간 예쁜 여자 친구 구예슬, 2학년 3반의 첫째가는 개구쟁이 오광명, 오광명의 단짝 말썽쟁이 임진수, 욕을 하다가 별명이 썩은 떡이 되어버린 썩은 떡, 그리고 나이가 백오십 살이라는 소문의 주인공 털보선생님,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있습니다.

 

 

사건은 2학년 3반의 반장선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황동민은 반장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선거준비를 하는데요. 반장에 당선되면 피자 10판을 쏘겠다고 공약을 걸면서 아주 감동적인 연설을 준비합니다. 정말 반장이 안 되면 큰일 날 것만 같습니다. ^^

저 역시도 황동민의 연설에 반해버렸습니다. 이런 실내화 한 짝을 천장을 향해 던지면서 황동민은 이렇게 외칩니다.

 

 

“저 실내화 바닥이 닳아 없어지도록 열심히, 열심히 우리 반을 위해 뛰겠습니다. 여러분, 저 황동민을 반장으로 뽑아 주십시오!”

아, 이 얼마나 감동적인 연설입니까. 그 감동이 친구들에게도 전해졌는지 황동민은 반장에 선출이 되고 자신이 마음에 두었던 구예슬을 여자 반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황반장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학교생활을 이어가는가 싶었는데, 황 반장은 한 사건의 주인공이 됩니다. 학교에서 똥을 참지 못해 결국 옷에다가......... 슬프게도 오광명이 말했던 똥 반장이라는 별명을 하나 더 갖게 됩니다. 어우~ 냄새. 바지에다가 똥을.......

 

 

어찌어찌 똥 사건은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황 반장에게 또 하나의 별명을 만들어주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바로 황반장의 연애사건이지요. 황반장이 좋아하는 구예슬을 실수로 안아버린 일이 생기고, 구예슬을 좋아하던 황반장이 구예슬에게 특별한 감정을 표현하면서 황 반장은 연애반장이라는 달콤한 별명을 하나 더 갖게 됩니다. ^^

 

 

 

처음부터 끝까지 황반장의 모습에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이야기에 한참을 웃게 됩니다. 이 아이의 엉뚱함과 웃음 나는 에피소드로 채워진 학교생활, 그리고 친구들의 이야기가 삶의 한 일부분이어서 행복하다는 느낌도 들게 합니다. 이 개구쟁이를 혼내주어야 하는데,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부터 만들어내니 혼내주는 것이 조금은 참아지기도 합니다.

 

반장 선거 공약에 걸어놓은 피자 10판은 오늘날 우리 아이들의 학교에서 보던 모습들이었습니다. 선거 공약이라기보다는 선출 되고나서 기분 좋음에 한턱 쏘는 것처럼 보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도 조금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먹을 것에 대한 생각이려니 하고 한번 웃어넘기게 됩니다. 특히나 저는 실내화를 교실 천장에 던져 보이던 제스처가 정말 탁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준비된 연설에서 보일 수 있는 행동일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황반장의 기가 막한 순발력일까요? ^^ 구예슬에 대한 마음을 커플 팔찌로 표현하는 모습에서는 콧방귀를 뀌어주고 싶었습니다만, 제가 황반장의 사랑을 방해할 수는 없지요. 그렇게라도 구예슬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황 반장을 응원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동화책을 보면서 이렇게 마음에 들어와 웃음과 추억을 한꺼번에 주는 캐릭터는 참 오랜만에 만나봅니다. 저자 후기를 보니, 저자이신 송언 선생님께서 직접 경험한 학교생활이 이 이야기를 더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 감동과 재미가 더 활기차고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들려왔었나 봅니다. 그 말썽쟁이 녀석들의 이야기가 동화로 이미 태어나기도 했던데요.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불끈~! 했습니다. 안 읽어보면 이 아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거든요. ^^

 

그 나이여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서 만난 황반장이나 황반장의 친구들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 나이의 아이들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행복한 모습이지요.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어른이 되어봐야만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모습들과 감정들이라는 생각을 많이 갖게 합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이 아이들이 들려주는 재미를 같이 경험하게 해주어서 좋았고,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누군가의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해서 반가웠습니다. 그 시간 속의 그 친구들, 선생님들,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리워지는 한때의 시간을 떠올리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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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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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엄마의 눈빛은 벽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깥세상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스키나 불꽃놀이, 섬, 엘리베이터, 요요 같은 것이 생각날 때마다, 그것들이 전부 진짜라는 것이, 바깥세상에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피곤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소방수, 선생님, 도둑, 아기, 성자, 축구선수 등등, 모두 바깥세상에 진짜 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없다. 나랑 엄마는. 우리만 거기에 없다. 우리는 정말 진짜일까? (114페이지)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작은 방에서 엄마와 둘이 사는 게 세상의 전부인, TV에서 보는 것들로 지식과 재미를 채우고, 그마저도 온전하지 않다는 것조차 모르는 한 소년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소설, 엠마 도노휴의 『룸』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방 밖으로 나가지 못했고,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조차 모르는 소년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에 이입해본다. 스무 살 가까이 엄마가 살았던 세상. 모두가 정상이라고 부를만한 그 시간이 그리운 건 당연하다. 누구나 그렇게 산다. 그게 보편적이고 평범한 삶의 모습이다. 그걸 아이에게 가르쳐주지 못하고, 방안에 갇힌 채로 살아가는 게 아주 큰 무제라는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인 엄마가, 엄마도 부모의 사랑 받으며 커가는 시간일 그때를. 치유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로 보내는 시간을 더는 계속할 수 없음을 인지한 순간, 엄마는 목숨을 건 마지막 모험을 시도한다.

 

소년 잭의 눈에 비친 작은 세상. 방 안의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잠깐 그려보지만, 아무리 그려봐도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집이 좁아서 답답하다는 표현과는 다르다. 잭이 엄마와 단둘이 감금된 채 사는 곳은 집이 아니라 '방'이다. 그 작은 방 안에서 엄마는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잭을 세상 속의 사람들과 비슷하게라도 키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 그 방 안에서 잭은 정상인으로 성장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필요하다. 그들이 그곳을 벗어나야만 하는 일이. 그 방을 탈출하기 위한 엄마의 시도가 불발로 끝날까 싶어 걱정스러웠는데, 다행이다. 처음부터 그 결말을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그 방에서 나왔으니 해피엔딩이겠지만, 그래도 불편한 마음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진짜 탈출은 방 안에서 나온 순간이 아닌, 방 밖의 세상에 다시 발 디딘 그 순간부터라는 것을 아니까. 진짜 고통스럽고 힘들고 버텨야 하는 시간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한 번도 땅을 딛고 걸어본 적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서로에게 어떤 예의를 갖추면서 살아가는지 배운 적 없는 잭.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고 다시 세상 속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엄마의 시작은 쉽지 않다.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고 적응해야 한다. 그들의 진짜 탈출은 그때부터 시작된 거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탈출, 엄마에게는 7년 동안 갇힌 시간으로부터 탈출이다. 잭에게는 지난 5년의 세월은 버리고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기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커가는 시간을 시작해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아니,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가능한 일로 만들어야만 하는 의무가 그들에게 지워졌다. 살아가야 하니까. 온전하게 세상 속으로 스며들기 위해 지독한 시간이 시작될지 모르지만, 그래야만 하니까 말이다.

 

엄마는 나를 꽉 안았다.

"잭, 엄마 이번 주에 좀 이상하지. 안 그래?"

모르겠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계속 엉망이야. 너한테는 엄마 노릇을 해야 하는데, 동시에 어떻게 해야 내가 될 수 있는지 기억해내려니까 자꾸만 이상해져."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똑같은 엄마였다. 나는 바깥에 나가고 싶었지만, 엄마는 피곤하다고 했다. (354페이지)

 

밤에 나는 침대가 아닌 침대에 누워서 예전의 담요보다 더 푹신한 담요를 문질러보았다. 네 살 때 나는 세상에 대해 전혀 몰랐고 그냥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엄마가 진짜 세상을 들려주었을 때는 모든 걸 다 알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제 늘 세상에서 사는데, 나는 사실상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늘 혼란스러웠다. (501페이지)

 

매일 뉴스에서 보도되는 수많은 사건을 보고 들으면서 점점 그 충격의 강도에 익숙해져서일까. '세상에 이런 일이'라며 놀라는 순간은 잠깐이다. 우리 사는 세상이 '이런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곳이라는 게 놀랍지 않다. 그런 일들을 접하면서 점점 커지는 불안을 감당해야 한다는 게 남았을 뿐이다. 5년 전, 처음 이 소설의 출간 소식에 충격이었던 건 내용 보다는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 때문이었다. 73세의 노인이 24년간 친딸을 밀실에 가두고 지속해서 성폭행해왔다는 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라는 물음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자기 친딸을? 그것도 딸이 자기 자식을 일곱 명이나 낳았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아니지. 처음부터 그게 옳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딸을 밀실에 가두는 것조차 하지 않았을 테지. 최악도 이런 최악이 있을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게 우리가 실제 사는 세상'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보니 이런 드라마는 정말 보고 싶지 않다. 소설을 넘어선 실제 사건의 충격은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그 안에서 소년 잭이 보는 세상과 인간에 대해 조금은 따뜻하고 순수하게 그리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살면서 당연하게 잃은 순수의 감각을 잭의 눈으로 따라가 보게 된다.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처음 배우는 예의, 거절의 말, 표현의 서투름이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어떤 기분을 만들기도 했다. 백지 하나 주어진 상태에서 삐뚤빼뚤 그리기 시작한 어설픈 그림 같은. 그렇게 조금씩 그리다가 점점 제대로 된 그림으로 채워질 백지의 여백이 기대된다. 잭이 배우면서 변하고 성장해가는 모습이 기다려진다. 잭은 누군가가 저지른 범죄로, 세상을 몰랐던 소년일 뿐이니까. 엄마와 잭 모두에게 곧 다가올 안정의 시간과 세상을 재밌게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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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이 끝나기 전에 궁금했던 게, 왜 알라딘 머그컵이 나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연말이 지나기 전에 항상 나왔는데 말이다.

그러더니 새해가 시작되자 바로 알라딘 머그컵이 등장했다.

 

헉...

이럴 수는 없다.

그동안은 같은 디자인에 색상만 고르면 되는 머그컵이었는데

(사실 색상 고르는 것도 진짜 어려웠다. 색상별로 다 가져오지 않는 이상 고민은 끝이 안 난다.)

이번에는 디자인부터 다양하게 내놓았다.

색상 고르는 게 문제가 아닌 거다.

디자인도 골라야 하고 색상도 골라야 하는데, 문제는 고를 수가 없는 거다.

거의 다 갖고 싶은 머그컵이다.

게다가 미치게 갖고 싶은 머그컵이 등장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데...

 

 

갑자기 심형탁에게 왜 이렇게 공감이 되는 것이냐...

도라에몽 파랑 머그컵이 너무너무너무너무 갖고 싶다.

아니다. 이왕이면 하늘색 도라에몽 머그컵이랑 세트로 맞춰야겠다.

그럼 어떻게 2개를 데려올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살펴봤더니

이벤트 해당 도서 포함해서 8만원 이상을 사면 2개를 고를 수 있단다.

 

열심히 책을 골랐다.

눈도 아픈데 크게 뜨고 살펴봤다.

ㅠㅠ 살 책이 없다.

이벤트 도서 목록에 있던 읽고 싶은 웬만한 책은 지난달에 이미 사버렸거나, 읽은 책이다.

왜 굳이, 해당 도서를 넣으라고 하시나요? 응?

그냥 가격만 맞추면 안 될까요? ㅠㅠ

 

아쉬운대로 이벤트 도서를 더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가격을 맞추기 위해 나머지 도서를 골랐다.

 

다행이다. 마침 조카들에게 새학기 전과를 사주려고 했는데 가격을 맞출 수 있겠구나.

얼른 전과 3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 정도면 가격을 맞추는 게 아니라 초과다.

10만원어치 이상 사면 머그컵 3개는 고를 수 있게 해주세요. 네??

 

 

 

 

 

 

 

그런데 전과를 담다가 보니 또 다른 이벤트가 보인다.

해당 이벤트 도서 5만원 이상 사면 도라에몽 무릎 담요를 준다네?

아, 이것도 갖고 싶다.

5만원은 넘겼으니 담요 사은품을 선택하면 되는데, 생각해 보니 택배가 조카네 집으로 간다.

조카가 먼저 택배 상자를 열게 될 텐데, 그럼 도라에몽 컵이랑 무릎 담요는 나에게 안 온다. 절대 못 온다.

나도 이거 정말 갖고 싶은데, 미치도록 갖고 싶은데,

이거 갖겠다고 초등생 조카랑 싸울 수도 없고...

가격만 맞추고 책만 고르면 될 줄 알았는데 복병이 여기 숨어있을 줄이야...

 

그래도 고민된다.

도라에몽 머그컵이 갖고 싶다. 도라에몽 무릎 담요도 갖고 싶다.

 

이걸 포기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젠 차선으로 골랐던 셜록 머그컵이 눈에 들어온다.

요 사이즈 컵이 집에 하나 있는데, 자판기 커피 한잔 마실 정도의 크기다.

딱 좋다.

오~ 이것도 좋네.

조카에게 이것저것 뺏기느니 차라리 이걸 골라?

 

그럼 또 얼른 책을 골라야 하는데, 고민만 쭉쭉쭉쭉~~

아, 심각한 결정 장애...

가능하면 소설로 한 권 골라보고 싶은데, 둘 중 하나더라.

관심 있는 도서와 관심 없는 도서.

관심 있는 도서는 이미 읽었거나 이미 구매한 도서...

 

 

 

 

 

 

 

 

 

 

 

 

 

 

 

 

<오르부아르>는 사인본 이벤트로 받아서 읽어보려고 하고, 리디 살베르의 <울지 않기>는 지난 주에 읽은 도서이고,

허밍버드 클래식 최신간 두 권은 이미 구매해서 조카에게 보내줬고, 이유의 <소각의 여왕>은 읽어보려고 이제 막 펼쳤고,

찰스 디킨스의 <오래된 골동품 상점>도 읽었고, <칠드런 액트>는 출간 때 구매해놓고 아직 못 읽은 책이고,

<나는 언제나 옳다>도 이미 읽었고,

<익숙한 새벽 세 시>는 알라딘 신간평가단 이번 신청도서로 올려놨는데 어찌될지 몰라서 구매가 망설여지고,

<댓글부대>도 읽었고, 기욤 뮈소의 <지금 이 순간> 역시 읽었고...

그나마 아직 안 읽었는데 관심은 살짝 있고 구매하지 않은 도서가 딱 두 권 있구랴...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와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아, 그리고...

개인적으로 송언 선생님 시리즈 좋아한다. 재밌다.

이미 낱권으로 구매해서 세트 구매는 어렵지만, 선물용으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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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mii 2016-01-1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알라딘 굿즈때문에 매번 즐거운 고민하는 저랑 똑같네요 절대공감입니다 도라에몽파랑컵 너무 이뻐서 5만원어치 두번질렀어요 8만원이상에2개인줄 몰랐네요 ㅋ 저도 하도살게없어서 조카꺼 샀다가 굿즈뺏길까봐 노심초사했던기억이 ㅋ

구단씨 2016-01-17 21:44   좋아요 0 | URL
결국 이번 알라딘 굿즈는 포기해야 할 듯해요.
살만한 책을 못 골랐어요.
조카들 교재는 변경되었고요.......... ㅠㅠ

도라에몽 컵 득템을 축하드려요. ^^

bgkim 2017-07-24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반가워요. 조심스럽게 책 두권 추천드려 봐요.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책)‘ 세스 노터봄의 ‘산티아고 가는길‘ 꼭 시간 내셔서 읽어 보시길 바래요.
 

 

엄마가 3년 정도 신경과 진료를 받고 있다. 그전 병원에서 증상에 대한 원인을 찾지 못했던 것을 지금 다니는 병원에서 찾아주고 꾸준히 진료해주고 있다. 근처 대학병원과 연계한 병원이라 여기서 안 되면 소견서 가지고 대학병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잘 진료 받고 있고 큰 문제 없이 다니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두 달에 한 번 정도 가고 있는데, 처방받는 약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거의 같은 증상으로 찾아가니 그 증상을 해결하는 약도 그리 많이 달라질 게 없겠지.

 

이번에는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진료를 받으러 갔다. 진료실에 들어서고 선생님이 환자에게 하는, 늘 반복되는 질문이 계속됐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상태는 어떠한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늘 그렇듯 나오는 대답도 똑같다. 요즘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크게 변함없는 일상을 얘기했다. 선생님에게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언급한 적은 없다. 대부분 두루뭉술하게 ‘이렇다’라고 얘기해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생님이 좀 더 질문을 늘린다. ‘이렇다’라고 말하니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묻는다. 신경 쓰고 있는, 고통스러운 그 문제가 해결이 될 일인지 물으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처음이다. 3년 동안 마주한 그 선생님과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된 것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거라고 한 번도 예상한 적도 없다. 정신과 진료도 아닌데 이 선생님과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주고받을지 몰랐다. 어차피 환자는 엄마이고, 나는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같은 진료실에 동행했을 뿐이다. 점점 얘기가 길어지자 선생님은 나를 향해 묻기도 하고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늘 그랬다. 이번에 다른 점은 좀 더 사적인 이야기가 깊어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뿐이다. 선생님이 하는 말도 평소보다 많아졌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을 계속했다. 환자는 엄마인데, 선생님과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펑펑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 평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고 엄마하고만 공유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비정상인데 누구에게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며 따져 물었다. 이건 분명 잘못된 거잖아요, 누구라도 욕할 만한 생각인 거잖아요, 저는 지금 정말 그렇게 하고 싶거든요,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생각이 없거든요? 잠도 잘 자고 싶어요, 웃고 싶어요, 밥도 맛있게 먹어보고 싶어요. 무엇보다,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 행복이란 게 가능해지려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바로 그거거든요. 그런데 해결되지 않을 거거든요.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 일이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누구도 그런 소원을 바라는 사람이 없을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비정상인 거잖아요...

 

한참을 들으며 중간에 한 번씩 대꾸하던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정상입니다.”

 

“어떻게 이게 정상일 수가 있어요. 누가 봐도 저를 욕할 일인데요? 이런 마음을 욕하고 벌을 주려고 할 텐데요.”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 상황에 그런 마음 드는 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정말요?”

 

“네. 맞아요.”

 

“정말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정상인 거니까요.”

 

계속 의심하면서, 끊임없이 물으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정상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하아... 또 한 번 통곡하듯 울고 말았다. 이런 비정상이 있을 수 있나 싶게 생각했던 게 정상이란다. 그게 맞댄다. 그러니 염려 말라고 한다. 그런 마음이 들면 드는 대로 괜찮은 거란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나중에 이러이러한 마음이 들게 될 텐데, 그것마저도 거부할 수 없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또 이러이러한 마음이 들게 될 거라고. 그게 순서이고, 거부할 수 없고, 그런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고. 의학적으로도 그렇고, 오랜 시간 많은 환자와 가족들을 보면서 확인한 결과, 열이면 열 모두 그러하다고. 경험에서 나온 말이고, 정신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니 그것마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게 너무 싫다고 했는데,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싫다고, 거부한다고 해서 그런 마음이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라고... 그러니 그때가 되면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지금은 또 지금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게 덜 불행해지는 방법이라고 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불화가 생기는 이유는 상대에게 바라는 게 있어서, 라고 했다. 상대에게 무심하고 아무 상관도 없을 거라면 불화가 생길 이유가 없다고.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더 좋은 관계가 되고 싶어서 상대에게 자꾸 바라는 게 생기는 거라면서. 그게 채워지지 못할 때 불화가 생기고, 고통의 시간이 이어지며, 상처로 깊숙하게 남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 계속 생각했다. 지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상대에게 나는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은 의지가 있었나? 전혀 없다. 칼처럼 잘라내고 끊어내고 싶었지, 어떤 관계가 되고 싶지도 않고 끊어내고 싶은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면? 내가 지금 겪는 이 고통의 무게만큼이나 나는 그 상대에게 무언가를 바라던 게 있었던가? 있다. 오직 한 가지가 있더라.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원하는 단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걸 바라는 게 이렇게 큰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일인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자꾸 머릿속에 내가 비정상이라고 배워왔던 생각들이 가득한 건데... 병원에 다녀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선생님 말씀을 자꾸 곱씹고 있다. 오직 한 가지 바라고 있는 그것마저 버린다면, 무심해진다면, 눈 감고 귀 닫고 모른 척한다면, 이 불화도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짙어지는 중이다.

 

 

진료시간 5분을 넘기는 일이 굉장히 힘든 일인데, 선생님은 우리에게 20여 분의 시간을 내주었다. 오래 보아온 환자와의 유대감을 만들어준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풀어내지 못했던 진짜 원인을 이렇게 찾아내어 준 걸까. 일어나서 진료실 밖으로 나오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선생님, 다음에는 엄마가 아니라 제가 진료받으러 올게요. 저에게 더 필요한 시간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진료실 밖으로 나가면서 인사하니 선생님이 웃더라. 3년 동안 다니면서 가벼운 농담을 건네기도 했는데, 그 선생님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이번에 웃는 걸 처음 봤다. 다음에는, 조금 더 편하게 볼 수 있을까요? 라고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동안 어떤 병원에 다녀도, 대학 병원이든 동네 병원이든, 의사들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가 없었다. 그들이 의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인간적으로 호감이 없던 대상이었다. 실제로 여러 의사를 겪으면서 반감이 생길만한 일도 있었던지라, 그저 한 개인이 선택한 직업이고 그들 나름의 밥그릇을 챙기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 선생님과 보낸 20여 분의 시간이 그 생각을 바꿔놓을 정도로 큰 힘을 발휘했다. 적어도 이 선생님에게만은 의사 이전에 인간적인 신뢰를 무한히 보낼 수 있을 듯하다. 선생님이 내놓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정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나는, 정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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