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 1 - 광해군의 누이, 정명공주 이야기
유광남 지음, 김이영 원작 / 미래플러스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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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탁의 주인이 된 여인, 정명공주. 『화정 1』

 

 

오랜만에 역사소설을 읽었다. 한참 드라마로 방송되고 있는 내용이기에 어떤 전개로 흘러갈지, 소설과 드라마가 얼마나 다른 여운을 줄지 비교하는 맛도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소설을 읽을 때 더욱 흥미로운 것은 활자를 통해 영상을 떠올리는 맛이다. 이런 장면, 이런 대사, 이런 배경의 어울림을 배우의 연기가 한층 돋보이게도 할 가능성이 있기에 기대되는 거다. 솔직히 첫 회만 본 상태라 어느 정도 비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첫 회의 장면을 책 속에서 발견하니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게 흘러갈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 소설을 읽어보니 다음 장면, 다음 회가 기대될 거란 생각은 그대로다.

 

의외의 전개에 잠깐 생각했다. 그동안 역사를 주제로 한, 왕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왕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조선의 역사는 흘러갔고, 온갖 정치 싸움과 권력을 얻고자 발버둥 치는 인간들의 향연을 보곤 했다. 소설 『화정』역시 그 큰 틀에서 벗어날 것 같진 않다. (아직 1권만 읽은 상태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으나...) 광해의 등장과 그가 왕이 되는 배경을 풀어놓는다. 성군이 되고자, 백성들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자 애쓰며 고뇌하는 모습이 애잔하다.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닌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버티고 견뎌야 했던 시간의 암울은, 그가 뜻을 펼치기 위해 쌓은 주춧돌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세상이, 권력이 어디 그렇게 흐르게 놔두겠는가. 그의 출신 성분은 변할 수 없었으니 그게 늘 발목을 잡는 구실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권력을 쥐려고 하는 자들이, 수시로 왕권을 흔들려는 자들과 혹시나 목숨이 위태로울까 미리 선수 치는 염려 속에서 그는 오해와 불신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거기에 정명이 있다. 이 소설이 더 기대되는 이유이자 새로운 영웅이 묘사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하는 까닭. 정비의 소생이자 그의 이복누이 정명공주. 그가 세자가 아니라, 임금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남자이자 오라비로 살아가는 인간미를 갖게 하는 누이. 정명의 미소 한 방, 천진한 표정 하나면 잠깐이지만 그의 시름은 사라진다. 이제 정명이 성장하고 십 대의 여인이 되었다. 1권은 그렇게 성숙한 정명의 마지막 모습과 부마 간택의 갈등을 두고 끝이 난다.

 

“하지만 얘야, 그렇다 해도 잊지는 말거라. 야만과 불의에 승리를 내준 것은 인간이나 다시 그것을 되찾을 수 있는 것도 그들이니! 하늘의 뜻보다 강한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걸……!” (196페이지)

 

예상하지 못했던 비밀의 등장. '불을 지배하는 자가 진정한 세상의 주인이 된다'라는 격암 남사고의 신탁이 무엇을 남길지 혼란스럽지만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언제쯤 그 의미가 밝혀질까 싶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운명을 살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그 운명이란 게 또 우습기도 하지. 때론 위선과 거짓, 의미 없는 증표를 믿으며 피와 전쟁을 불사하게 한다. 불로 상징되는 그것, 그걸 손에 넣기 위해 벌이는 싸움과 치열함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낼까... 가장 흥미로운 건 그 신탁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 여기에서 정명의 활약이 기대된다. 기구한 운명처럼, 그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이라고 들었던 그녀의 삶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거기에 또 다른 인물들, 정명공주를 사이에 두고 사내다운 면모를 보이는 홍주원과 강인우.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보이는 출중함과 영민함, 너무 뛰어나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팽팽함을 이미 1권에서 복선처럼 보여줬다. 두 사람의 활약이 더욱 기다려진다.

 

숨겨진 비밀 같은 예언이 이제 조선을 어떻게 흔들지, 광해와 정명의 우애를 어떻게 시험대에 올려놓을지 궁금하게 한다. 작은 염주 하나, 해석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글귀, 오래 전에 예언을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 피를 부르는 권력이라는 걸까, 아니면 그렇게 해서라도 차지하는 게 제자리라는 걸까. 실제 역사 속에서 정명과 광해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졌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인이기에, 공주이기에 왕권의 계승에서 제외되었던 법도를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녀가 영민하고 큰 인물이었을 거란 호기심은 생긴다. 이 소설이 미처 보여주지 못한 그녀의 삶을 재조명하여 독자들에게 다가온 이유가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한다. 광해의 집권 시기를 넘어서 인조의 시대까지 그 생명력과 권력을 이어가던 이 여인의 이야기가 비치고 있는 시대상과 인간상을 함께 보는 맛이 있을 듯해서 2권이 기다려진다.

 

실존 인물과 허구의 설정이 모호한 게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일 수도 있겠지만, 그 기본은 역사가 바탕이 될 테니 드라마나 소설로 즐기며 그 이면의 것들을 추리해가는 재미도 상당할 듯하다. 이미 여러 버전으로 만났던 광해의 다른 모습도 보게 될 것 같고, 김개시나 이이첨, 광해의 호위무사 이정표, 홍주원과 강인우까지 보여주는 흥미로움이 진하다. 소설로 즐기기에 충분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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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을 대표하는 리터러리 작가이자 베스트셀러 소설가
스웨덴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그리고 한 이슬람 이주 청년의 긴박한 하루
소수자, 약자, 혹은 혐오 대상으로서 살아가는 한 인간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 낸 문제작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는 2010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타이무르 압둘와하브(Taimour Abdulwahab)라는 남성의 자살 폭탄 테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스웨덴은 이백 년 넘게 어떠한 전쟁과 분쟁도 겪지 않은 중립국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민 2세대인 케미리는 이 작품을 통해 스웨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공포와 불안을 퍼뜨리는 테러, 그와 함께 확산되는 인종차별주의와 이슬람 혐오주의, 그리고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소수자, 약자, 혹은 혐오 대상으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류 사회’의 시각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이민자-외국인-이방인의 모습과 생각을 보여 줌으로써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 간의 소통과 교류를 시도하는 케미리는, 새로운 주제와 서사 기법으로 스웨덴뿐만 아니라 유럽 문학 지형도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문제적’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벤트 참여방법>

1. 이벤트 기간
- 2015년 6월 25일 ~ 7월 1일
- 당첨자 발표 : 7월 2일 (리뷰 작성 기간 : ~7월 14일)


2. 모집인원
- 10명

3. 참여방법
- 이벤트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해주세요.(필수)
-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함께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 서평단 응모 링크(https://goo.gl/wiEUIv)를 클릭하여 설문지 작성

4. 당첨자 미션
- 도서 수령 후, 10일 이내에 '알라딘'에 도서 리뷰를 꼭! 올려주세요.
- 서평이 등록되지 않는 경우 추후 서평단 선정에서 제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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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이 사랑하고 싶다 - 사랑하지만 상처받는 이들을 위한 관계 심리학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박규호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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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상처 없이 그 관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 궁금증의 답은 부정적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내 경험으로 보자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니까 이렇게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일이 계속 이어질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배르벨 바르데츠키가 들려주는 행복한 관계 만드는 법으로 그 상처를 극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저자의 전작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대부분 이러했다. 상처받은 영혼들, 그 영혼을 달래주는 일, 그렇게 행복해지는 길을 말하고자 애쓰는 게 보였다. 2010년 출간된 <너에게 닿기를 소망한다>의 개정판인 이 책을 이미 읽어본 사람도 있겠다. 나는 그때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개정판 출간이 더 반갑다.

 

꾸준히 사랑해야 할 관계들이다. 기본적으로 가족부터 친구, 동료, 지인들. 그 외 많은 사람에게 받는 마음의 상처가 어떻게 다독여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보이는 이기심이 상처를 부른다. 높은 기대감, 지나친 집착 같은 변질된 사랑이 상대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한다. 거기에는 자기애가 곁들여진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 되어 상대의 감정을 돌보지 않기에 사랑의 부정적인 면을 만들어 상처를 내는 것. 그 상처들을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는 삶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다정하게 처방을 내린다. 내면의 나를 들여다보고 다독여주고 안아주라는 말. 처방이라고 내놓은 말들이 다 따뜻한 말들이다. 손짓과 품이 만들어내는 포근함이다. 거창한 무엇이 필요한 게 아니어서 ‘이런 게 필요한 거였나?’ 하는 웃음도 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가장 필요한, 정말 간절했던 반창고는 바로 이런 게 아니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여기에서 9가지 방법으로 그 상처를 다독여주라고 말하고 있지만,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어디 그 방법이 9가지뿐이겠나. 누군가에게는 더 모자랄 수도, 더 많은 수도 있겠지. 저자가 내린 처방을 근거로 그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범위를 넓혀갈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이 책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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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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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의 신간 소식이 반가웠지만, 이번 세 번째 도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편하게 읽히는 책 한 권을 만날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이 책을 얼마쯤 읽었을까, 저자의 글에서 '제임스 설터'가 몇 번 언급된 부분을 보다 생각났다. 아, 그 책의 번역가였구나. 제임스 설터의 전작 두 권을 읽으면서 봤던 이름이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번역가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했던 작품이었다. 감정적으로 흥분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제임스 설터가 그렇게 썼는지, 아니면 번역가의 번역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법 담담하게 읽었던 여운 때문이었다. 저자와의 그런 인연(?)이 생각난 순간, 이 책이 달리 보였다. 편하게 읽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흥분되지 않는 감정의 선을 더 그어갈 수 있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분명 어떤 감정이 들어가 있기는 한데, 내가 읽은 이 책은 감정의 흐름보다는 조금은 담담하게 읽혔다. 저자의 말투와 흐름이 여전했다는 느낌?

 

무엇을 강요하거나 억지스럽게 소개하려는 애쓰는 게 없다. 담담하게 풀어가는 일상의 한 부분이며, 저자의 생활 대부분을 이루는 책과 예술을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지극히 사적인 저자의 시선을 담은 뉴욕이란 도시 생활기이자, 그곳에서 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일기처럼 풀어낸 글이다. 때론 타지에서 겪는 향수가 살짝, 삶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상 보기가 약간, 그림과 작가에 대한 지식이 많이, 담겨 있다. 자신이 걸어온 길과 자신이 쓴 글을 되짚어보는 일이자, 앞으로의 시간을 꾸려갈 어떤 마음의 확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시선으로 읽게 했다. 무엇보다 저자의 사적인 도시의 이야기다, 그동안 내가 뉴욕이란 도시에 가졌던 선입견을 흐리게 했다는 거다. 상당히 거리감 있게, 뭔가 어울리지 못하고 삭막하게,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표본처럼 여겼다. 그런데 말이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니, 뉴욕이든 어느 도시든 특별해지는 건 한순간이더라. 그 특별한 감정을 함께한 곳이 저자에겐 뉴욕이었을 뿐이다. 뉴욕에서 살면서 크게 작게 저자가 겪어간 시간이나 장면이 저장한 기억이 이 글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러한 것들이 모여 저자에게 특별하고 사적인 도시로 만든 거다. 그 도시 전체가 아니라 저자를 품었던, 저자가 걸었던 그 길이 이젠 그냥 도시가 아니고, 그냥 길이 아닌 게 된 것. 읽다가 문득, '나에게 그런 도시는 어디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아쉽게도 그런 특별한 기억저장소로 들어갈 도시가, 나에겐 없더라.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숨 쉬고 걸었던 그곳의 이야기가 사적이고 특별해 보였다. 반면에 그 특별함에 속하지 않은 나도 불편하지 않게 읽을 수 있게 한다. 낯선 곳을 걷는 기분으로, 낯선 사람들과 웃는 얼굴을 마주하는 표정으로, 낯선 기분을 즐기게 하면서.

 

사람들이 내가 쓴 책에서 원하는 것은 결국 뉴욕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거의 처음부터 나에게 뉴욕이란 도시는 중요했다. 내가 태어난 도시가 아니라 내가 살기로 선택한 도시. 뉴욕은 나라는 개인에게 매우 사적인 은유였다. 내가 자라나며 불만을 품었던 중산층적 가치들의 전복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 안정과 위생과 효율보다 도전과 거침과 우회가 인정되는 곳, 불가능하게 치솟은 빌딩들처럼 위대함이 꿈꾸어지고 시도되는 장소로서의 은유. 뉴욕은 내 삶의 변명들을 뭔가 다른 것으로 바꾸어가는 데 필요한 나만의 내면적 장치였다. (87~88페이지)

 

거의 모든 예술가의 도시라고 여겼던 곳. 뉴욕의 갤러리들과 거리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게 한다. 공연과 영화를 찾아다니며 음악으로 귀를 붙잡고, 그 시대의 패션과 스타일을 그리게 한다. (이 책은 2005~2010년까지의 기록이다) 예술 작품들을 이야기하고, 무심코 책 한 권을 꺼내 어느 구절을 찾게 한다. 사실 나에게는 저자의 관심사나 기록, 저자가 언급하는 예술 작품들의 흥미로움이 그대로 전해지지는 않았다. 내가 잘 몰라서 소화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다. 하지만 저자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 의미를 고민하게 한다. 평범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공기가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그 진지함과 특별함에 눈길을 머물게 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그 분위기를 끌어가며 뭔가 더 말하고 가르쳐주려고 하는가 싶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읽는 이에게 강요하는 게 없어서다. 그저 저자의 생활 주를 이루는 것들을 얘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런 관심사가 있고, 이런 일을 하며, 이런 사람들과 이런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다. 바로 여기, 뉴욕에서...'라고 말하는 듯이.

 

언급되는 작품들과 작가들의 이야기에서, 미술을 보는 전문적인 눈을 가지면 좋겠다는 부러움의 시선도 가지게 된다. 그림을 자유롭게 보면 된다고 하지만, 제대로 볼 줄 아는 자연스러운 지식을 말한다. 여러 작가를 말할 때는 애정과 관심이 넘쳐 보였고, 그들의 작품과 생을 들려줄 때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좀 더 관심 두게 된다면 예술을 접하는 깊은 눈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많이 들어본 작가도 있었지만, 저자가 어디에 아껴두었다가 꺼낸 것처럼 생소하게 들리는 작가도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저자의 취향을 살짝 엿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패션, 미술, 문학 등 다양하게 그 취향의 멋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자가 번역한 작품들, 애정 있게 보는 그림들, 시대의 흐름을 말하는 패션의 대가들. 서로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작가와 작품들의 이야기가 연결된 듯하다. 같은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위대한 질문이야말로 큰 영감을 준다.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모두 위대한 질문이었고 다른 작가들이 밟고 올라서는 토대였다. 이렇게 우리가 방을 채워가는 수많은 답들은 그 자체로 다시 방만한 질문이 된다. 과연 우리가 이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이 중요한 것들을 누구의 힘으로 어떻게 지킬 것인가. (171페이지)

 

뉴욕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느낌이 강했다. 오랜 시간 뉴욕에 머물면서 보고 듣고 겪었던 저자의 시선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곳과 이곳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지. 몰랐던 장면들에 낯선 시선을 던지면서도 신중하게 듣게 하면서, 단어 하나가 품은 여러 의미를 어느 순간에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도 고민하게 한다. 이건 아마도 살아가는 태도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적용하는 듯하다. 매일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적어낸 것을 이렇게 한 권으로 만나게 되어,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아, 이런 문화의 이야기가 여기서 들려오는군요.'라고 알게 되었다고 말해야만 할 것만 같다. 번역자로 만났던 저자 특유의 분위기가 글 곳곳에 녹아있어 이국의 도시를 이야기하는데도 친근함은 있다. 번역자로만 알고 있던 저자의 이름에 다른 이름이 많이 더해질 듯하다.

 

 

덧)

책 재킷을 벗겨내어 펼치면 안쪽에 자리한 뉴욕의 지도가 하나의 산책로로 정리되어 있다. 손끝으로 그 산책로를 짚어가며 눈으로 걷는 길을 만끽해도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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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도 - 관점을 뒤바꾸는 재기발랄 그림 에세이
김수현 글.그림 / 마음의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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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오늘도...『180도』

 

 

가끔, 뻔한 그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처럼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말에 위로를 얹어보고, ‘괜찮아’라는 말에 어깨를 기대고 싶은 순간이 있다. 별일 없는, 별 기대 없이 흐르는 하루였을지라도 말이다. 괜찮을 거로 생각했던 일들이 괜찮지 않은 것으로 결말이 나곤 할 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알게 되는 건 만만하지 않은 세상이라는 것, 없는 게 메리트라는 것만 확인하게 되는 순간의 반복. 입버릇처럼 쉬운 게 없다는 말. 휴... 그래도 살아가고, 또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듯 오늘도 숨 쉬고, 버티며 또 걷는다. 뚜벅뚜벅. 자신에게 거는 주문처럼.

 

김수현이 전하는 뒤집어본 생각들 역시 그 걸음에, 위로와 용기에 한 손을 보탠다. ‘이렇게’ 보던 것을 ‘저렇게’ 볼 때 달라지는 것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세상을 180도 뒤집어 바라보니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가오는 것들로 살아갈 만한 세상을 꿈꾸게 한다는 것. 이런 말들과 생각 역시 별거 아닐 수 있는데, 그 별거 아님을 쉽게 찾지 못해서 이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게 아닐까 싶다. 어디 들어갈 데 없나 싶어 숨을 구멍을 찾아 헤매고, 이 비를 피할 곳 없나 싶어 넓은 처마 밑을 찾아 두리번거리게 하는 상황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들, 그렇게 보면서 생각하는 것들이 고개를 약간 기울이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일상의 여러 장면과 생각으로 풀어낸다. 30도에서 시작한 고개의 기울임이 60, 90, 120, 150, 180도에 이르러 정반대의 시선으로 왔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 ‘이렇게 보는 것도 괜찮네’ 하는 시선의 변화가 만들어낼 긍정의 후기가 그려진다.

 

안다.

사는 게 때론 계란 노른자 마냥 퍽퍽하다는 것을.

때론 삶의 중력에 짓눌려 버릴 것 같다는 것을.

그러나 이런 퍽퍽함 속에서도

누구의 ‘탓’인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은 나의 ‘몫’을 해나가는 것이다. (62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청춘의 특권, 실패할 수 있는 자유. 도망치거나 겁먹지 않고 용기 낼 수 있게 하는 한 마디가 짧은 글 속에 가득하다. 생각을 180도 바꾸니 세상이 180도 만만해진다는 정의를 몸소 실험해보고 싶게 한다. 실제 나를 둘러싼 환경이나 상황이 금방 바뀔 게 아님을 알지만, 그 불행이나 고통이 뒤집힐 수 있는 방법은 뜻밖에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늘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이런 책, 이런 문장이 하나씩 찾아와 글자를 굵게 칠하고 상기하게 한다. ‘여기, 이런 말도 있는데? 이런 시선도 있는데? 어때? 괜찮지?’

 

사소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이 뒤집어 본 생각 한 번으로 얼마나 다른 자세를 만드는지 굳이 여러 번 말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아니까 한 번만 더 언급하고, 아니까 더 잘해볼 수 있는 시도, 아니까 긍정의 결말을 기대하는 바람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김수현만이 전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에 저자가 보태고, 독자가 빠져들면 좋을 메시지들이다. 특별할 것 없고 부담스럽지 않는 읊조림 속에서 조금은 다른 세상을 맛보고 싶다면, 한 번쯤 펼쳐 들고 그 소박한 울림에 동참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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