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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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12-10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구단씨 2020-12-17 14:4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내년에도 좋은 (수세미)작품과 좋은 일상 이야기 계속 들려주세요. ^^

scott 2020-12-24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서재 달인 축하 축하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V 내일은 메리 크리스마스ᒄ₍⁽ˆ⁰ˆ⁾₎ᒃ♪♬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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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지금?'이라는 부정의 물음을 하고 싶은 일. 살면서 그런 순간 참 자주 맞이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절망과 좌절을 무기 삼아 핑계를 찾는다. 이래서 그랬던 거야, 하면서 말이다. 무너지고 힘들어지는 지금이 너무 당연해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나 이렇게 힘들어하는 중이니까 좀 봐줄래? 하지만 언제까지? 언제까지 우리는 넘어지고 절망하고 괴로울 때마다 내가 세상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여기고 있어야 할까. 어쨌든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숙제가 남았는데, 그 숙제를 다시 하기까지 얼마나 더 스스로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느냔 말이다. 고통스러운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빨리 그 바닥을 치고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뿐 만은 아닐 터. 근데 참 웃기다. 막상 그 불행의 순간을 내가 감당하고 있을 때는 내가 가장 힘든 것 같다. 요즘 며칠이 그랬는데, 이 책을 몇 페이지 넘기면서 마주한 시 한 편이 그 불행을 감당하고 바닥을 짚게 하는 듯하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에 대하여, 55페이지)


'아무리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생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저자의 말에 이상하게 공감된다. 그래, 바닥을 짚어야만 하는 순간이 어떻게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그랬다. 넘어지고 싶었던 적 없고, 고통을 마주 하고 싶었던 적 없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언제나 자기 맘대로 왔다가 나한테 부딪히고야 말았던 게 바닥을 보게 하는 일들이 아니었나. 알면서도 애써 공감하려고 하지 않았던 적도 있겠지. 아니야, 세상이 나한테만 이렇게 매정한 거야,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냐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시련이 마치 나에게만 이러는 것 같아서 화도 나고, 한편으로는 용기도 내고 싶은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 불행의 끝과 바닥을 보게 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바닥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어디까지가 그 바닥인지 정의할 수 없지만, 언제나 마주치는 그 바닥은 그냥 딛고 일어서야 하는 거라고. 어찌 보면 이 말이 우리가 사는 일의 정답이 아닐까. 그 바닥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어쩌겠어. 그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까?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술 한잔, 183페이지)


이 시의 첫 구절을 읽고 웃음이 나더라. 인생과 나 사이가 무엇이라고 술 한잔 운운할까 싶었다. 그러다가 그가 왜 이런 시를 썼는지 듣고 나니 웃음과 진지함이 동시에 표정에 그려진다. 인생을 객관화해서 보다 보니 내가 인생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인생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인생과 나의 관계에서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았을까? 내가 너에게 준 만큼 너도 나에게 줘야지 하는 심정이었을까? 그러네, 세상사 뭐든 주고받기가 기본인 것 같은데, 내가 인생에 닿은 것만큼 인생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나 보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과 내가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였다고, 그냥 사랑하기 때문에 뭐든 가능한 거라고. 준 것과 받은 것을 계산하는 사이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로 사랑을 주고받는, 그 사랑이 일방적일지라도 괜찮은 거. '인생에는 형식이 없고, 인생에 형식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바로 그거'(187페이지)라고 말하는 그의 깨우침이 인생의 연륜 같았다. 계속 겪고, 걸어오고, 부딪혀온 사람만이 배우는 삶의 자세 말이다.


내가 아는 저자의 시는 많지 않다. 그의 시보다는 산문을 접한 기회가 더 많았다. 이 책을 보면서 처음 알았는데, 그의 시가 노랫말이 된 게 이렇게 많았다니 놀랍다. 역시 좋은 글은 누구나 알아보기 마련인가 보다.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또 다른 영상으로 연결되어 그 감동을 이어간다. 이동원이 부른 <이별 노래>는 이 책에서 처음 보고 검색해서 들어봤다. 어떻게 이 가사에 이런 멜로디가 잘 어울리게 불렀을까 싶을 정도다. 듣다 보니 귀에 익숙했다. 정호승의 시와 연결해 생각하지 못하고 귓가에 흘리듯 들어왔던 것 같다. 그가 쓴 60여 편의 시와 그 시에 어울리는 생각들이 함께 들려오니 시의 해설을 듣는 기분이다. 행간의 숨은 의미까지 들어가면서, 혹은 감정의 숨은 말들까지 엿본 느낌이기도 하다. 시와 산문이 자신의 문학을 이루는 한 몸이라고 생각한 저자가 이런 책을 바라왔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시를 쓰던 그 순간의 생각들을 그대로 읽히게 하고, 간직해온 추억과 경험들이 구절과 구절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반세기 동안 시를 노래하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그의 시선이 애틋하다. 총 4부로 나눈 구성이 그의 인생 4편을 보는 것 같다. 동료 시인, 문학가인 스승들, 그의 가족과 친구들, 그가 걸어온 시간 동안 마주한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는 시 <산산조각>부터 시작해서, 법정 스님과의 인연, 시인 정채봉을 생각하는 마음, 거리를 두지 않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까지. 그의 경험과 배움과 성장은 경계와 구분 없이 자라났던 듯하다. 시와 산문에서 그의 생각과 고민,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는 감정까지 그대로 담아냈기에 그의 글을 읽는 독자도 그 풍경에 같이 빠져든다. 내 인생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쓰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 닿아있던 인생과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우연히 키우게 된 강아지 한 마리에게 마음을 붙이는 과정이 흐뭇하고, 지인들과 함께했던 기억에 그리워하고, 부모님의 시간을 다시 새기는 모습이,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그 모든 감정을 글로 표현한 것일 뿐, 우리와 같은 시간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인간미가 넘쳤다.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가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나이, 533페이지)


특히 4부에서 많이 들려온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버지와 유대감이 없던 나도 울컥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관 속에 시를 넣어드리는 마음이 뭘까. 언젠가 겪을 나의 시간에 무슨 준비를 할까 잠깐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작가이기에 앞서 인간 정호승을 더 가까이서 보는 것 같다. 작가가 부모님을 얘기하니 나의 부모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계산해보니 내 나이가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보다 훌쩍 넘겼다. 나보다 젊은 나이에 나를 낳고, 많은 자식을 키우던 엄마의 시간과 노력을 다 알지 못한다.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고생하던 엄마를 떠올릴 뿐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처럼, 나도 엄마가 되어봐야 엄마의 심정을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럴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오랜 세월 어지럼증으로 고생하시면서 고통의 순간을 버티는 엄마를 지켜보는 것만이 엄마의 보살핌을 받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다짐과 후회가 생긴다.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된 여동생이 얼마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돌아가시면 후회하지 않게 하고 싶다고, 그래서 지금 좀 힘들지만 무리해서라도 엄마가 필요한 것들 해드리고 싶다고. 지금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건 건강밖에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해드릴 수 있을까. 저자가 부모님을 생각하며 어떤 추억과 후회를 같이 떠올리는 걸 보면, 어떻게 해도 후회는 따라올 것 같은데. 그냥, 우리가 덜 외롭고 덜 우는 날들이 되기를 바라면 되는 걸까...


늦은 밤, 오래된 친구와 술 한잔 나누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같은 시간 비슷한 경험을 쌓으며 걸어온 누군가와 지나간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저자의 시와 산문에 오랜 세월을 안주 삼아서. 책 제목처럼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데, 나는 외로움이 더 큰 것 같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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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274페이지)


글쎄, 버티는 삶이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겠다. 근데 정의하기 어려운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면 참 모순이기도 하겠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틈틈이 찾아오는 절망의 순간을, 버티지 않으면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는가. 절망의 근원을 찾아내 원망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뿐일까? 하지만 그렇게 원망한다고 해서 또 무엇이 달라질까. 갈팡질팡, 힘들다가 괜찮다가 하는 마음을 다스릴 방법이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예민해지고, 신경이 곤두서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날카로워지는 건 싫고. 그러니까. 신경질이나 짜증, 찡그린 얼굴이 내 모습이 되어가는 게 싫은데, 그게 쉽게 변할 수도 없는 방식 같아서 화가 나는 일 반복된다. 지금 이 상황을 대하는 자세가 변하면 될 것 같은데, 그건 또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은 건 아니다. 책으로 출간한 몇 권, 그 안에서도 몇 문장을 읽으며 방송에서 보는 그의 이미지와 말투가 그대로 옮겨간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이 책을 보고 드는 생각.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또 어려운데, 글의 분위기가 변한 느낌이다. 그 변화가 싫거나 이상하지는 않다. 오히려 삶의 어떤 순간을 건너온 그가 세상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진 게 보여서 흥미로웠다. 어쩌면 그가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 게 더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항상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절대 그의 생각을 바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은 그의 모든 것이고, 그걸 부정하려면 차라리 부러져버리겠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던 시간. 이미 다 알겠지만, 그는 생사를 오가는 큰 시련을 겪었다. 힘들다는 항암 치료까지 마치고 건강해졌다. 어느 날 방송에서 다시 본 그는 변해있었다. 그와 결벽증은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먼지 한 톨 용서할 수 없는 그의 자세가 너무 익숙했는데, 그는 이제 조금 흐트러진 상태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말투도 그대로고 문장도 그대로인데, 어딘지 모르게 그가 변했다는 건 그냥 느껴진다.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마치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시간을 걷는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꺼낸다. 차분하게 말한다. 간절하고 친근하게.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서 배우 브래드 피트는 태양계 경계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절대적인 고독 앞에 혼자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다는 걸 깨닫고 지구로 귀환한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간단한 걸 우주 끝까지 가서야 알 수 있냐며 조소한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데는 늘 큰 비용이 든다. 무려 암에 걸리고서야 그걸 알았냐고. 그러게 말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109페이지)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웃음이 나고 용기가 되는 말인 줄 처음 알았다. 입버릇처럼 죽겠다고 말하고, 미칠 것 같다고 머리카락 쥐어뜯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처럼 망했다는 말도 저절로 나올 것이다. 그런데 망하려면 아직 멀었단다. 그래, 아직 망하지도 않았고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었다. 첫 장은 그의 투병 경험을 말하고 이후 달라진 그의 시선을 들려준다. 나는 그가 언제나 당당하게 말하고 아무런 불편함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항상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방송에서 그런 이미지로 보일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심지어 그가 잘못했다고 해도 말로 싸우면 그를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이미지는 그가 살아온 방식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아온 시간을 뒤로하고 혼자였던 시간을 후회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삶의 방식을 이제는 다르게 보려고 애쓴다.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왔기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안쓰러움을 느껴도 될지 모르겠다. 그 시간과 그 방식을 통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오늘을 사는 또 다른 이에게 말한다. 절망에 빠지거나 도움을 기대할 곳 없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고민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장을 쓰는 그의 마음이 문장에서 그대로 읽힌다. 그만의 방식으로, 달라진 그의 시선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다. 사람들의 고민과 절망을 들을 때마다 그가 찾은 해법을 들려준다. 불행을 인정하는 것. 삶에 언제나 공생하는 불행이란 녀석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절망과 고통을 무너뜨리는 것일 테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불행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에서 우리가 버티고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희망도 있다고, 우리 삶이 언젠가 빛을 낼 그 순간을 기다리고 기원하며 살아가는 날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이 귓가에 남는다.


불행한 일을 겪으면 사람의 머릿속은 그렇게 된다. 그리고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져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보며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살고 싶다는 농담, 54페이지)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 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60페이지)


두 번째 장과 세 번째 장은 그동안 그가 그동안 만나왔던 영화나 책, 시사적인 뉴스들을 가져와 삶의 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괜찮다고 말하는 의미를 전하고,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인간의 삶을 강조한다.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불행을 탓하는 일이 얼마나 인생을 안타깝게 만들고야 마는지 보여준다. 닉슨 대통령의 몰락, 천재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를 몰락시킨 연인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것처럼 불행과 피해의식은 우리 삶을 또 다른 불행으로 밀어 넣는다. 비단 이렇게 영화 주인공이나 과거의 인물들에 빗대지 않아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겪는 불행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그 불행의 원인을 찾아내 원망도 하고 싶은 게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또 다른 후회뿐이라는 것을. 그의 말처럼, 우리가 불행한 일들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 반복되는 절망과 괴로움,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게 불행을 원망하는 거로 생각하기 쉽다. 내 불행의 화살이 향할 곳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 불행의 화살을 쏘기만 하면서 살 텐가. 불행의 생각에서 멀어지는 것만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를 바라보는 객관성을 키우는 게 불행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도 말한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도 그 바닥에서 올라와 역작을 남긴 니체의 이야기를 하면서, 불행을 직시하고 객관화하면 이 위기 극복의 실마리를 찾는다고 조언한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자기 객관화로 불행을 다스린다면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과거의 불행을 발판 삼아 현재의 건강한 삶이 유지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다 알 수도 없지만, 살아가야만 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가는 인생을 만들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들린다. 불행이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우리 삶을 짓누르는 무게 따위 느끼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각자의 불행은 너무 다양하고, 그 불행을 해결할 방법은 본인만 안다.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버티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아프기 전과 후의 내가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지 조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로 써서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달라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나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항암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서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살고 싶다는 농담, 217페이지)


오늘도 버티는 삶인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그의 위로가 담백하다. 섣부른 오지랖이나 조언이 아니라, 그 불행을 건너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로 들린다. 살기로 한 이들이 충분히 닮아도 좋을 삶의 자세가 그의 문장 안에 담겨 있다. 그의 문장에 담긴 따뜻함이 더 빛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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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1
정소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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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일이 누가 중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둘 중의 하나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한 번 트인 귀는 막히지 않고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으며 상한 마음과 망가진 관계는 고치기 힘들다. 얼른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당신들도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137페이지)


"우퍼를 하나 살까?"

형제자매들 모두 아파트에 살고 있다. 어디로 이사를 하여도 층간소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 단독주택에 살던 나도 이제는 아파트에 살게 됐다. 신축이냐 구축이냐를 떠나서 공동주택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소음은 예상하였고,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각오를 했음에도, 이사한 지 한 달 정도 지내면서 우퍼를 사자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평소에도 소리에 민감했지만 남의 집에서 며칠을 지내도 층간소음 정도는 충분히 감당했던 내가, 막상 계속 머물러야 할 집이라고 생각하니 이 소음에 자꾸 예민해진다. 왜 위층 사람들은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거지?


처음에는 내가 참을성이 부족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뛰고 소리를 지르는 데도 그걸 말리는 어른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 소음을 참을 수 없어서 화가 났던 어떤 날은 위층의 현관문 앞에까지 간 적이 있다. 혹시나 윗집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확인하고 싶었다. 역시 나를 괴롭히는 소음의 범인은 윗집이었다. 집안의 소리가 현관문을 뚫고 계단 아래까지 들릴 정도였는데, 아이를 말리는 어른의 소리는 단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하고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같이 노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어른의 발망치 소리는 기본이었다. 아, 나는 이 지점에서 화가 났던 거구나. 층간소음 자체가 아니라, 공동주택에 살면서 조심하려고 애쓰지 않는 이들의 태도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거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로 다투거나 살인을 했다는 뉴스가 더는 새롭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익숙한 사건·사고가 되어버렸다. 이해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그 정도 소음을 못 참고 사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층간소음은 단순히 소리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해하고 참기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감정적인 문제가 있다. 머리로는 무조건 참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공동주택에서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고 있을까 싶어 화가 치미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잘 넘기지 못하면 다툼이 되고 물리적인 폭행이나 살인이 된다. 불안하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언제 이 화가 폭발할지 무섭기까지 하다. 이 소설을 만나고 나는 더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어느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1112호 여자였고, 피해자는 바로 위층 1212호에 잠시 머물던 조카였다. 모두가 층간 소음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 아파트에서 층간소음 문제를 제기하며 민감하게 굴었던 건 1111호, 작은 소음도 참지 못하고 바로 더한 소음으로 보복하곤 했던 여자였다. 그러니 1112호가 가해자라고 말했을 때 다들 의아해했다. 설마 1111호를 잘못 말한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1111호가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1211호와 1011호가 모두 이사를 나갔을까. 나중에 들어보니 어느 날 1111호의 여자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도대체 그동안 이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던 걸까.


작가는 이 아파트의 각 호를 조심히 비추면서, 우리가 어떻게 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되고 집중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선명하게 그린다. 집은 말 그대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형식을 가졌지만, 이곳 역시 집이다. 누구나 마음 편히 쉬고 싶은 곳이다. 그런 공간이 나를 더 불안하게 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곳이 된다면, 우리는 이곳에 어떻게 머무를 수 있을까?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 처음, 이 소음으로 문제를 삼던 1111호 여자는 알고 보니 재혼 가정이었다. 어린 아들이 있는 남자와 결혼해서 시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들어와 살았다. 누구도 재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정에 최선을 다했다. 아내와 엄마, 며느리 자리에서 충실했다. 예쁜 딸도 낳았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냉랭했고 언제나 의심했다. 그 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시어머니의 냉대와 언어폭력에 여자는 아이를 낳은 지 8년이나 지난 후에 산후풍에 걸리고, 조금만 바람이 닿아도 한기를 느낀다. 그때부터 여자는 시어머니가 생전에 친했던 위층 1211호의 소음을 느낀다. 참을 수 없었다.


옆집 1112호 여자 역시 어느 날부터 소음을 감지한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던 여자는 위층의 소음에 1111호가 복수하는 행동임을 알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에게 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러다 점점 옆집의 공격은 그녀를 향하고, 그녀도 더는 참지 않는다. 1011호의 아기 엄마는 1111호의 항의로 아기의 울음소리에 민감해진다. 아이가 우는 존재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오직 위층의 항의가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아이를 돌본다. 아이가 조금만 울어도 아이에게 화를 냈다. 그러다가 점점 아이의 울음을 무기 삼아 1111호를 공격한다. 아이가 울 때마다 천장 가까이 아이를 들어 올리면서 그 소리가 위층으로 잘 들리도록 노력했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절규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우는 아이의 얼굴, 그에 반해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우는 소리에 기뻐하면서 웃는 자기 얼굴에 경악했다. 이 소음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자기 아기였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고, 이사하는 것만이 답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각 호의 사연을 들으면서 점점 보이는 게 있다. 언제 어느 곳이나 소음은 있었지만, 그것을 더 잘 느끼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단순히 소음의 크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사방팔방 모든 것이 연결된, 특히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일상생활의 모든 소리가 여기에서 저기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움직인다. 결국 소설 속의 사람들은 가정이 파탄 나고 병을 얻기도 하지만, 그게 꼭 소리 때문은 아닐 거였다. 이미 각자의 삶에서 불안과 불화가 깊숙이 뿌리 내려 있던 상태에서 민감하게 다가오는 소음은, 이들에게 갈등을 일으키고 폭발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언젠가는 터지고야 말 일이 아파트에서, 이웃들을 향했을 뿐이다. 나의 마음과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 현실과 답답한 벽을 마주한 채로 마음을 위로해야 하는 상황들. 날이 선 시어머니의 말들이 가슴에 꽂힐 때마다 쌓여가는 외로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도 도움을 청할 곳 없는 현실, 처음 하는 육아가 힘들지만 감당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일들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게 속으로 담아두기만 했던 고통스러운 마음이 소음이라는 매개로 폭발하고 말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누구나 피해자라고 하지만, 언제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나만 공감하는 건 아닐 테다. 소음이 만드는 문제에 앞서 그 소음에 민감해지는 이들이 모두 집에 있던 여자들이었고, 그 여자들이 어떻게 소음에 반응하기 시작하는지 그 과정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1111호 여자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고민에 대해 남편과 상의했다. 아니, 여자의 일방적인 토로라고 해야 하나. 남편은 언제나 좋은 사람 흉내를 내면서 아내의 고통에 방관자였다. 괜찮겠지, 좋아지겠지, 아니겠지. 남편은 시어머니와의 갈등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서 자기 역할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살았다. 층간소음 문제까지 일어나자 해결하기는커녕 위층 남자와 술 한잔하고 기분 좋게 들어와서는 아내의 예민함을 탓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던 옆집 여자 역시 무책임한 남편에 혼자 양육과 생활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에 고통받았다. 이 팍팍한 일상에 마음은 너덜너덜해지고, 이해할 수 있었던 옆집 여자의 소음 공격에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거다. 어쩌면 이해와 공감을 보여줘야 하는 건 아파트 내의 공동생활 대상자들이 아닌, 가정에서 서로에게 보여줘야 하는 게 시작 아니었을까.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 가장 보살피고 이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가족이니까. 바로 옆에서 나를 이해 못하고 상처받는 나의 마음을 들을 줄 모르는 이들에게 느끼는 배신감이, 소음을 참지 못 하고 공격에 이르게 하는 행동의 발단이 되어가는 건 아니었을까 싶다. 어쩌면 나만 고통받는 것으로 느끼는 그 배신감의 이름은 외로움일지도 모르지.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나만 힘든 이 상황 말이다.



나는 집에 혼자 남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엄마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외로움이 만들어낸 실체도 없는 소리가 엄마의 삶을 잡아먹었다. 나도 머지않아 그것에 먹힐 거다. 옆집 아줌마는 무슨 소리를 듣는 건지 엄마처럼 계속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112페이지)


그럼 내가 경험한 소음의 시작은 어디일까. 이사를 온 지 한 달여, 아마도 나는 이 공간과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중이 아닐까 싶다. 이사를 오기 전날부터 몸이 불편했던 게 생전 처음 대상포진을 경험했고, 그 무서운 병은 언제 어디서나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끔찍한 후유증을 남겼다. 먹는 것마다 체해서 병원과 약국의 단골이 되었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따라다녔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점점 문을 열어놓기가 싫어졌다. 아파트 주차장의 소음, 놀이터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트럭에 물건을 싣고 와서 파는 장사꾼의 목소리까지 온갖 소리에 짜증이 났다. 환기한다고 습관적으로 문을 열어놓긴 하지만 그 시간이 길지는 않다. 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지니 조금씩 주변의 것에 집중하게 되더라. 그중 하나가 소리였던 듯하다. 나와 상관없는 곳에서 전달되는 소리에 시간을 빼앗기게 되고, 이렇게 된 상황 하나하나가 못마땅했던 날들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선을 조금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위층의 아이들은 집에서 운동회를 하고 어른의 발망치 소리는 계속된다. 밖에서 들어오는 소음도 여전할 것이고,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이 만드는 소리에 그러려니 할 것이다. 나 역시 내 생활에 적응하면서 타인의 소리가 아닌 내 삶이 만드는 소리에 집중하고 싶다. 그러고도 계속되는 소음이라면 또 다른 답을 찾아야겠지. 그거 말고 찾을 수 있는 현명한 답을 아는 이가 있다면 말해줬으면 좋겠다. 누구나 경험할 이 소음에 조금은 그 고통을 덜어낼 수 있도록.


너무 생생해서 작가가 이 소설을 어떻게 썼을까 궁금했다. 이건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읽으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순간순간 올라오는 욱하는 감정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작가의 실제 경험이 담긴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이사하는 것만이 답이라는 결과를 보여줬다. 그게 정답은 아닐 테지만, 그 순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이 이사라는 건 맞지 않을까? 고요할수록 더 잘 들리는 소리는 층간소음에서 빛을 발한다. 혼자 있을 때, 그 고요함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외로움이 그 틈을 노리고 침투할 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층간소음이 누구에게 더 예민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오느냐 하는 상황을 이렇게 소설로 확인한다. 명확한 답이 없는 현재진행형의,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의 문제일 때 우리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계속 묻게 된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는,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활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상처받은 이들의 모습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그 묘한 경계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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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백수린 지음, 주정아 그림 / 마음산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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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과거를 뒤로하고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는 밤.

실패보다는 희망을 말하는 밤.

누군가에게는 과오를 덮어줄 축복처럼,

위로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밤. (5페이지)


짧은 단편 속의 이들에게 공감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 어쩌면 나와 다르지 않을 일상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처받고 아픈 시간을 보내는 상실의 감각을 드러낸다. 언제나 그 시간의 끝은 있고, 오지 말라고 밀어내고 붙잡아도 기어코 우리 앞에 다가오고야 마는 순간은 또 묵묵히 받아들여야 할 운명 같다. 그러다가도 문득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순간을 불러온다. 알게 모르게 잊고, 잃고 살아왔던 것들. 현실에 치여서, 겁나고 무서워서 포기하던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꺼내게 한다. 무심하고 무뎌지려 애쓰던 감각들이 되살아날 때마다 조금씩 두근거리는 가슴.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보다 하고 걸어왔는데, 어느 날 문득 멈췄을 때 비치는 지나온 시간이 인생의 또 다른 길을 열어주는 건 아닐까 기대가 생기기도 하는 나날.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더 시선이 머무는 이유다.


대학교 행정조교로 일하는 여자는 오늘의 삶이 불안하다. 언제나 꾸었던 꿈은 항상 궤도수정을 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애인과의 관계도 위태롭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그녀의 시간이 맞는 건가 싶으면서도 선뜻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도 못하는 일상. 언제까지 이런 삶이 계속될까 궁금하면서, 걱정과 근심이 앞서는 오늘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옳은 걸까? 「언제나 해피엔딩」의 주인공은 박 선생의 한 마디에 기운을 얻는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불행한 시간이 아닌 오늘 여기에 집중하며, 그래도 다른 의미가 있는 인생을 걸어가는 희망을 품는다. 그래, 괜찮겠지, 괜찮아지겠지, 나아지겠지. 우리가 오늘의 불안을 안고 살며 언제나 외우는 주문을 여기서도 본다. 어쩜 이렇게 비슷한 인생들인지, 안쓰러우면서 안도한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위로받는 기분이다.


칼칼한 바람이 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상준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생각할 조금의 여유마저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생각했다. 우리로 하여금 끝내 자신의 고통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그것은. (중략) 이 세계는 사람들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고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들며 타인에게 잔인해지도록 종용하지만, 이런 세계에 살더라도 그가 아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오직 사랑뿐이니까. (101~102, 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 타올)


공항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동안 공항에 가본 적은 없다. 「완벽한 휴가」의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에게 공항 가까운 곳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여행을 자주 갈 거로 여겨지지만, 그들에게 공항은 언제나 계획에만 있는 장소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던 탓일까. 그런 이들이 어느 날 공항으로 향한다. 어딘가로 떠나기 위함이 아닌, 말 그대로 공항에 다녀오기 위한 목적이다. 여름휴가 기간이었다. 폭염이 기승이었고 전기세를 아끼고자 에어컨도 쉽게 틀지 못한 나날. 그들은 공항에서 휴일을 지낸다. 노트북을 앞에 두고 각자의 일을 하고, 공항 안에서 음식을 먹는다. 시원한 곳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여름의 더위를 식히는 일이 괜찮은 것 같으면서 여자는 어릴 적 아빠의 모습을 떠올린다. 기억하지 못하고 지냈던 어떤 날 속의 아빠는 그리움이자 애틋함이다. 공항에서의 휴가는 완벽한 날이었다. 비슷한 느낌으로 「어느 멋진 날」은 더운 날의 해변에서 마주친 한 남자의 시선이었다. 여자는 기혼이었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책장을 넘기던 그때 무심코 마주친 시선. 남자는 여자의 치마 밖으로 나온 발을 보고 있었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여자는 묻지 않았다. 대신, 남자와 가벼운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이다. 남자는 여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했고, 그때부터 여자는 자기 발에 신경이 쓰인다. 은근히 설레면서 자기 발을 바라본다. 언제였던가, 자기에게 아름다움을 말해주거나 그런 시선을 보낸 사람이 있었던 게. 낯선 곳에서의 낭만 같은 느낌으로 여자는 그날을 기억한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혼자만 오래 간직하고 싶은 수줍은 추억으로 말이다.


「참담한 빛」의 어린 부부는 배 속에 아이를 품고 침몰하는 배의 뉴스를 듣는다. 처음 아이를 갖고 아이를 잘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용기는 배의 침몰 소식에 불안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희망이 기적이라는, 희망이 불처럼 번진다는 말에 또 한 번 용기를 낸다. 부모가 된다는 건, 이 세상 살아가는 걸음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다짐 같은 게 아닐까. 우리가 어떻게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자라며,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가는지 그 시작을 보는 듯하다. 마지막 단편이었던 「아무 일도 없던 밤」처럼 죽음을 앞에 둔 노인을 바라보는 요양사의 시선과 대조적이다. 곧 운명할 것 같은 노인의 상태, 멀리 있는 딸들이 엄마의 마지막을 보고자 달려오고 있지만, 폭설이라는 기상이변으로 시간이 지체된다. 무심하게 환자들을 대하며 감정을 배제하고 살아온 요양사는 고요하게 누워 딸을 기다리는 듯한 노인을 보며 자기 이야기를 한다. 남편이 그렇게 갑자기 죽을 줄 몰랐다고. 남편이 돈을 벌겠다며 떠나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에 또 죄책감을 느꼈다고. 애틋한 부부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부부의 모양새를 하고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서로가 조금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떠난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쌓는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르지. 여자는 다시 만나게 될 남편과의 감정에 뭔가 기대하지는 않았을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조우할 남편과의 모습에 괜찮은 가족의 모습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혹여 사지로 가는 남편을 붙잡지 않았던 것에 죄책감을 느낀 걸까 싶기도 하고. 우리 앞에 닥친 불행에 스스로 갖는 어떤 감정이 떠오른다.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걸까? 언제 어느 때고 우리 삶에 끼어들 기회를 엿보는 불행이란 놈에게 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불안과 자책과 싸워가는 게 우리 아닐까.


그녀는 허기가 져 병실에 비치된 냉장고를 뒤지다가 누군가 사놓은 딸기를 찾았다. 향긋했던 딸기는 뭉개지고 짓물러 있었다. 단지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딸기의 뭉개진 부분들을 과도로 도려내고, 얼마 남지 않은 과육을 입속에 허겁지겁 집어넣었다. 딸기가 달았다. 히터를 세게 튼 병원은 창밖의 세계와 완벽히 단절된 듯이 비현실적이었다.

"오늘 밤은 죽지 말아요."

그녀가 노인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226~227페이지, 아무 일도 없는 밤)


엄마와 딸의 여행을 그린 「비포 선라이즈」는 누구나 한번은 경험했을 여행의 의도를 보는 듯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딸은 엄마와 프랑스 여행을 계획한다. 엄마가 고생하지 않고 좋은 것을 보고 다닐 수 있게 여행 일정을 잡은 딸은 출발하기 전부터 엄마와 의견 충돌을 겪는다. 여행 다니면서도 서로 여행 스타일이 다른 것에 당황하며 급기야 짜증이 나기도 한다. 엄마를 이해할 수 없던 딸은 어느 날 숙소의 창가에 앉아 일출을 기다리는 엄마를 본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해 뜨는 것을 기다리자 싶었던 엄마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행 일정에는 없던, 엄마와 숙소의 창가에 마주 앉아 부모님의 세월을 듣는 일. 아버지를 생각하며 애틋한 표정으로 부부의 젊은 날을 이야기하는 엄마의 표정에는 여행보다 더 좋았던 시간이 그대로 묻어 있다. 해 뜨는 것을 보겠다며 기다리던 엄마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고, 서서히 드러나는 해의 눈부심에 찡그리는 표정마저 행복하게 보인다. 엄마의 낭만을 이뤄주겠다고 시작한 여행은 뜻밖의 장소와 시간에서 행복한 여행이 된다. 여행의 의미가 바로 이런 거겠지. 우리가 꿈꾸는 여행도 같다. 같이 먹고 걷고 보고, 그러다가 좋은 것을 함께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진짜 여행인 거지.


딸을 만나러 프랑스에 간 아버지의 낯선 시작이 펼쳐질 「여행의 시작」, 옛 연인과 이십 년 만에 추억의 장소에서 만나는 「오직 눈 감을 때」, 첫 키스가 무섭다며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연인이 귀여워 안아주던 「우리, 키스할까?」, 불면의 밤에 눈을 뜨고 외로울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건 얼마 전에 구조한 유기견뿐인 「그 새벽의 온기」, 갑작스러운 누나의 동물원 방문이 어색했지만 언젠가 그리워질 날이 될 것 같은 「봄날의 동물원」, 여행지에서 만나 여행지에서 헤어지며 다음을 말하는 게 쓸쓸하다는 걸 알게 되는 이별의 순간 「어떤 끝」, 사랑을 위태롭게 하는 현실 속의 자기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될 「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 타올」. 모두의 이야기이면서 또 각자의 이야기가 될 단편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건너가는 우리가 쉽게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 그렇게 우리는 어떤 끝을 만나고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평범한 주인공들의 평범한 일상을 마주하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으면서도, 어떤 날을 살아가는 내 모습 같아서 씁쓸하기도 했다. 왜 누구나 바라는, 피해갈 수 있는 순간들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도 짙다. 다들 비슷하지 않나? 불행을 피해가고 싶고, 불안을 감당하기 무섭고, 행복을 기다리고. 어쩌면 그렇게 바라는 행복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당연하게 마주치는 일상 같기도 해서 무던해지고 싶은데 또 그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순간들. 우리가 사는 수많은 오늘이 그러하더라.


“……괜찮아지나요?”

박 선생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민주의 책상 위에 차가 담긴 종이컵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하고 말했다. (155페이지, 언제나 해피엔딩)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불안하고 불행한 순간들을 맞닥뜨렸을 때의 우리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 지나간 어느 날을 꺼내 보며 애써 미소 짓기도 하고,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한다. 오직 그것만이 방법인 것처럼, 그게 최선인 것처럼. 하긴, 다른 무슨 방법이 있을까. 내가 아는 방법도 그것뿐인데. 누군가의 마음, 누군가의 하루를 들여다보며 찾아내는 이런 위안의 방식도 있다는 것을 이 짧은 소설들로 또 배운다. 오늘은 사라져버릴지 몰라도 언젠가 오늘을 기억하는 순간이 찾아올 테니. 또 어떤 불행과 불안의 순간에 기적 같은 희망을 바라며 오늘의 흔적을 더듬어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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