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9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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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 않고 살 방법이 없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가끔 하던 때가 있다. 늙지 않은 채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냥 적당한 나이까지 살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한 인생을 가질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상상에서만 멈출 수 있는 듯하다. 혹시나 그 상상이 현실로 가능하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두렵기도 하다. 지금도 100세 시대라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하지만 오래 산다는 것 자체가 좋기만 한 일일까? 오래 살아도, 건강하게 먹고 살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야 장수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 아니겠나. 나이 먹고 병들고 가난에 허덕이는 삶이라면, 오래 사는 일이 꼭 즐겁지만은 아닐 것 같다. 그렇다고 살아가는 목숨 강제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도 이제 초고령 사회로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가 되었다. 곧 노인이 될 나의 삶도 어떻게 그려질지...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백만 명을 죽이면 혁명이 된다." (10페이지)


이토록 서늘한 이야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소설은 우리가 염려하는 고령 사회의 문제와 고통을 생생하게 그렸다. 섬은 아니지만 섬으로 볼 정도로 고립된 팔곡마을. 전체 가구 수가 여덟, 인구수가 열. 그 열 명도 모두 노인이다. 일주일에 두어 번 팔곡마을로 들어가는 우체부가 노인들이 모두 사라졌다면서 파출소에 신고한다. 파출소장 박 경위는 우체부의 말이 근거 없다고 생각하며 귀찮아하지만, 일단 팔곡마을로 들어간다. 반쯤 잘못된 신고로 여기던 박 경위는 너무 고요한 팔곡마을의 어둠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챈다. 집마다 전기는 내려져 있고, 노인들 모두 집을 비웠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랜 기간 집에 머문 흔적이 없다.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명의 노인 전체가 사라지는 일이 가능할까? 어떻게? 왜? 박 경위는 이상하게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것처럼 이 마을에 기시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나씩 소환되는 그의 기억에서 이 마을에 닥친 사건을 읽는다. 그래, 그건 사건이다.

박 경위의 기시감은 현재의 마을 분위기와 사뭇 다른 과거의 한 장면이었다. 팔곡마을은 전국에서도 장수하는 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방송국에서도 장수의 비결을 취재할 정도였다. 박 경위가 기억하는 그날도 어느 노인의 장수 축하연이었다. 사람들 모두 모여서 노인의 장수를 축하해주고 같이 즐겼다. 집안에서 진동하는 음식 냄새와 노인들이 가득했던 마루, 마냥 즐겁게 웃고 떠들고 즐기던 사람들까지. 그리고 누가 초대했는지도 모르게 잔치에 참석해있던 회색 옷의 사람들과 이상한 영상의 과거와 '웰다잉협회'의 우편물의 현재는 노인들의 실종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추적하는 과정이 펼쳐진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소설이 무슨 추리소설 같겠지만, 사라진 노인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이 추리소설의 맛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노인들이 사라진 이유를 찾으면서 생각하는 노인의 삶, 우리가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초점이 맞춰진다. 깊게 알려고 하지 않는 노인의 자살률까지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노인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1위라는데, 이 비극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소설 속 단체인 웰다잉협회는 '뉴 제너레이션'을 꿈꾼다면서 노인의 자살을 유도한다. 분명 사라지는 노인들은 자살로 발견되거나 실종 상태로 머물겠지만, 그들이 노인들을 자살로 이끈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노인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인가. 여기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시선은 노인 혐오가 아닐까 싶다. 소설에서도 말하고 있다. '세상이 점점 늙어가고 있다면서, 노인들이 지구 전체를 뒤덮어서 결국은 모두를 쇠락과 소멸로 내몰고 말 거라는(108페이지)' 공포가 '뉴 제너레이션'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노인들이 맛이 가서 일으킨다는 교통사고. 노인들 때문에 젊은이들의 연금 부담이 커진다는 뉴스. 노인들의 만성질환 덕분에 파탄 나게 생긴 의료 재정.(115페이지)' 같은 피부에 와 닿는 문제의 원인을 노인으로 바라본 적은 없는지 묻는다. 웰다잉협회는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하고 세대를 바꾸어야 한다는 의무로 노인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일을 감행하는 것이다.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일조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넘쳐서 말이다.


노인 혐오 시선을 가진 적 없는지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소설 속 노인들은 다행히(?)도 강경에 젓갈을 사러 단체관광 다녀온 것이었다. 열 명의 노인은 무사히 돌아왔는데, 관광버스 안에서 내리던 것은 열 명의 노인보다 더 많은 포장된 젓갈이었다. 평생 먹어도 다 못 먹을 것 같은 양의 젓갈은 왜 샀을까 궁금하던 차에 한 노인이 하는 말이 낯설지 않다. '자기도 모르게 젓갈을 이렇게나 많이 사지 않았는가. 나중에 아들 내외나 딸이 오면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할 것인가. 하긴,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다. 확실히 이런 걸 노망이라고 하는 거겠지. 김장할 것도 아니면서 이걸 다 사다니.(147페이지)' 뉴스에서도 종종 보던, 노인을 상대로 하는 다단계 업체의 사기 같은 거 말이다. 노인들은 노래 불러주고 즐겁게 해준다고 그들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고, 돌아올 때는 두 손에 가득 뭔가를 들고 왔다. 소소한 생필품에서부터 고가의 제품들까지. 일반적인 판매 가격보다 비싼데도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물건을 사서 집안에 쟁여놓는다. 원재료가 제대로 확인도 안 되는 건강식품, 어디 제품인지도 모를 전기레인지, 화장품 가게에서 2천 원에 파는 피부 세안제를 만원이 넘게 사서 오는 일들. 직접 눈으로 보고 들은 일들에 왜 저러나 싶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쌓아놓은 물건들은 당연하게 자식들의 잔소리가 되었고, 싸움이 되고, 혐오의 시선을 만든다. 인간이기에 실수하고 그럴 수 있는 일이, 노인이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는 건 아닐까 묻고 싶기도 하다.


그만그만한 거리에 적당히 모여 있던 작은 섬들의 노인이 계속 사라지면서 섬 세 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되었다. 나머지 두 개의 섬 중 하나가 팔곡마을이었다. 팔곡마을 노인이 사라지는 사건은 그냥 하룻밤의 해프닝이 되었지만, 며칠 후 마을의 노인 한 명의 시체가 호수 위로 떠 오른다. 이래도 그냥 웃고 넘길 하룻밤의 착각일까?


노인의 시체가 호수 위로 떠 오른 것으로 이야기는 끝났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 노인 한 명의 시신이 발견된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노인이 더 생기지는 않을지, 다른 세대에게 짐 덩어리처럼 여겨지느니 우아한 마지막을 선택하겠다는 다짐이라도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여전히 세대 갈등은 계속 있을 것이고, 시선이 어긋날 때마다 그 혐오는 짙어질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금방 적응하지 못하면 스스로 도태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자존감이 떨어질 테지. 이 세상에 자기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타인에게 민폐가 되는 인생이라고 여긴다면 삶에 대한 애착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 대상이 내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나도 이제 '노인'이라 부르는 인생으로 들어갈 테니까. 대립이나 갈등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같이 찾아야 하는 문제로 남은 듯하다. 그들(노인)이 선택한 죽음이 개인의 선택에서 머물지 않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민낯을 비추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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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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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라스 로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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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받아들인 적은 없다. 그렇다고 마냥 무겁게만 대하기에는 뭔가 이야기를 덜 한 느낌이라 개운하지 않았다. 꺼내기 어려운 주제이지만, 잘 듣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자주 접하고 싶기도 했다. 나와 내 가족이 경험하게 될 어떤 장면을 미리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조금 다른 의미로 보자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죽음이 내가 알던 것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도 했다. 그 죽음의 다양함을 확인하는 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 전부는 아니겠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우리 살아가는 곳곳의 의미를 누군가의 죽음으로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사실 내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죽은 사람이 만든 냄새가 가져다줍니다. 그 냄새를 극적으로 없앴을 때 내 비즈니스는 성공하지요. 대가로 살아 있는 사람이 나에게 돈을 지급합니다. (죽은 자의 집 청소, 6페이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죽은 자의 시간은 멈췄으니, 남겨진 자들은 죽은 자를 보내는 일과 죽은 자가 남기고 간 자리를 정리해야 한다. 보통은 그 일을 가족들이 맡아서 한다. 장례를 치르고, 죽은 자가 살았던 방(집)을 정리하고 청소한다. 하지만 혼자 있다가 죽는 사람은 누가 정리해줘야 할까.


여러 가지 사연으로 고독사하는 이들이 머물다 간 곳을 청소하는 사람. 저자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한다. 처음 일반청소로 시작했던 일이 점점 찾아주는 사람이 많아지고, 청소의 범위나 사연이 다양해지면서 어느새 그는 특수청소의 전문가가 되었다. 일이 다양해지고 힘들겠지만, 그만큼 그의 손을 거친 장소는 깨끗해졌다. 그리고 그 특수청소 안에서 그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가 청소하면서 읽은 그 공간의 주인들 삶이 조금씩 전해진다. 일명 고독사. 그 공간에 혼자 머물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보인다.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서 일하면 안 되겠지만, 인간인지라 보이는 것들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공간의 시간이 느껴지면서, 덩달아 연결되는 또 다른 생각들까지 같이 읽게 된다. 죽음이 우리 삶, 우리 사회와 절대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다. 누군가는 죽고 우리는 그 누군가를 애도하며 살아간다. 언젠가 나의 죽음을 두고 누군가의 애도를 받기도 하겠지. 만약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다가 죽은 게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혼자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나도 저자와 같은 특수청소업자의 마지막 인사를 받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어떤 고독사의 얼굴들을 만났을까. 비슷한 죽음 같았다. 죽음 이후의 청소하는 것도 다 똑같은 거 아닌가 싶었지만, 달랐다. 죽은 지 며칠, 몇 달 후에 발견되었다는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죽은 자리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기도 했고, 마치 오늘 아침에도 청소한 것처럼 분리수거를 해놓고 죽은 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죽기 전에 청소 가격을 문의하기도 했다. 읽으면서도 의심스러웠는데, 결국 그 의뢰인(?)은 자기 죽음 이후를 정리하는데 얼마의 돈이 드는지 그에게 묻고 싶었던가 보다. 보통은 죽은 이의 가족이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고, 세입자가 머물다 간 장소를 청소하고 복구해주기를 바라는 집주인이나 부동산 중개업자의 의뢰도 있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죽은 이가 머물던 자리를 정리하는 것이지만, 애도의 색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 떠나서 슬픈 마음 담은 정리와 재산 보호에 목적을 둔 이들의 의뢰가 완전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가끔은 경찰이나 검찰에게 의뢰받는 범죄 현장 정리도 있다. 범죄 피해자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장소에 다녀오기도 한다.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그리고 가난해지면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 가난과 외로움은 사이좋은 오랜 벗처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이 세계를 순례하는 것 같다. 현자가 있어, 이 생각이 그저 가난에 눈이 먼 자의 틀에 박힌 시선에 불과하다고 깨우쳐주면 좋으련만. (죽은 자의 집 청소, 47페이지)


TV 뉴스에서나 보던 소식을 저자의 입으로 듣는 느낌이 달랐다. 혼자 살던 노인이 죽은 지 며칠 후에 발견되었다는, 세입자의 월세가 안 들어와서 가봤더니 벌써 죽은 지 몇 달은 되어 백골 형태로 남아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들. 저자가 방문하는 장소들의 사연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혼자 살다 죽은 자연사에 더해진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사연도 겹쳐 있다는 것이다. 고독사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확인하게 되는 건, 지금 우리 사회의 민낯이었다. 자기 존재를 죽음의 냄새로 먼저 알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씁쓸했다. 죽음의 현장에서 맡아지는 냄새를 온갖 수식어로, 그대로 표현하고 싶어도 적당한 표현이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그 자리에 없지만, 죽은 상태로 오래 방치되었다는 사실을 냄새로 알리는 듯하다. 방호복과 신발 위로 신은 덧신, 방진 마스크와 방독마스크, 의료용 장갑과 청소 소독 용품까지 챙긴 저자의 발걸음 무게를 알 것 같다.


세대를 가리지 않은 쓸쓸하고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죽음이 어느 사람인가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죽음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목숨을 내려놓기 바로 직전까지도 살아보려고 했던 흔적들이 집안 곳곳에서 발견된다. 죽은 이들에게서 나온 피와 오물, 여러 가지 유품에서 죽은 이들의 생전 일상을 유추하기도 한다. 대개 가난한 이들이 혼자 죽었으며, 가족이 아닌 채권자들이 안부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유품이나 쓰레기에서 죽은 자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죽음에 다다르게 된 이유를 유추하게 되는 증거이기도 했다. 방바닥에 놓여있던 자기계발서에서 위로받고자 했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병원 처방전에서 죽은 자의 몸이 어땠을지 그려보면서, 신문광고 속의 구인란을 눈여겨보던 어느 인생을 생각한다.


그가 보고 확인하는 죽음의 흔적에서 삶을 생각하게 된다는 게 아이러니이자, 저자가 이 기록을 남기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은 무게감에,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사실과 기록하는 이의 감정까지 들여다본다. 1인 가구와 고령 인구가 늘어나고, 매 순간 가계 빚이 사상 최고점을 찍는 현실의 암담함이 저자의 기록과 연결하여 생각하게 한다. 나는 아직 고령이 아니지만 죽음을 아주 먼 일로 생각할 수도 없게 하는 이야기에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고독사가 나이 성별 따져가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고독사의 공간이 아닌 쓰레기 집을 청소하는 의뢰가 올 때면 안도하기도 한다. 의뢰가 들어오는 쓰레기 집이 자살이나 고독사의 전조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말이다. 그런 집을 치울 때면 누군가 다시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외치는 것처럼 들릴 것 같다. 나를 옥죄던 이 공간을 치우면서 다시 살아갈 의지를 만드는 기도같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할 수는 없다. 변기를 꽉 채운 똥을 장갑 낀 손으로 퍼내거나 오줌이 가득 찬 패트병을 볼 줄 누가 알았으랴. 고양이 사체 몇 개를 치워야 했던 순간은 또 어떻고. 그럴 때면 치우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에서 살아야 했을 누군가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내 옆에, 내 공간에 자꾸만 뭔가를 쌓아가는 일. 저장 강박증은 조금 더 관심 두어야 할 현대인의 질병이 아닐까.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도기용 광택제를 뿌려서 변기와 세면대를 천사장 가브리엘의 이빨이라고 할 만한 수준으로 하얗고 눈부시게 닦아놓으면 마음이 참 뿌듯해진다. 더러움이나 불쾌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 자리엔 그저 순수하고 충만한 행복이 남는다.

어째서인지 인간의 마음도 더러운 화장실 청소처럼 얼마간 곤욕을 치르고 나면 잠시나마 너그러워지고 밝아진다. 평소 우울감에 시달려 단순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화장실 청소를 추천하고 싶다. 그 화장실이 더럽고 끔찍할수록 더 좋다. (죽은 자의 집 청소, 220~221페이지)


"누군가의 죽음을 돌아보고 의미를 되묻는 이 기록이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고 굳세게 만드는 기전이 되리라고 믿는다"는 작가의 말이 무엇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느껴진다. 저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그의 생계를 책임지는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다시 삶을 생각한다. 죽음의 공간을 청소하면서 마음속 청소를 한다. 위로가 된다. 죽음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묻는 방식이 누군가가 죽은 공간을 청소하는 일이라니 놀랍기도 하지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죽음의 모습들을 보니 세상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개인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 죽음에 이르는 환경과 감정의 문제는 개인만의 일이 아니기도 하다. 사회가 같이 묻고 답을 찾아가야 할 많은 일 중의 하나를 이렇게 마주한다.


저자의 말처럼, 죽음이란 게 참 신비하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익숙하게 마주하는 죽음의 흔적이 지겨운 밥벌이의 고충으로 느껴질 법도 한데, 저자는 그 시간에 죽음의 곁을 들여다보고 삶의 생생함과 행복을 찾아간다. 오늘, 내 앞의 사소한 것들이 더 귀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시선 그대로를 배우고, 죽음 앞에서 삶이 더 절실해짐을 확인한다. 우리는, 우리 인생은 너무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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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9-10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이들에게 둘러쌓여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는 그런 죽음의 장면. 그게 제가 꿈꾸는건데요. 쉽지않겠죠. 내 죽은 뒤의 자리를 스스로 정리하고 준비할수 있는것 누구에게나 오는 축복은 아니겠죠. 정말 죽음은 예측불허이므로 살아있는 오늘 하루가 소중해집니다. 구단씨님의 글로 죽음의 자리를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구단씨 2020-09-14 16:01   좋아요 0 | URL
저는... 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장면을 기대하다가도, 정말 누군가에게 악담을 들으면서 떠나는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 혹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지 문득 걱정되기도 하더라고요.
죽음으로 바라본 생의 의미를 들려주는 이야기에 한참 시선이 멈춰있었네요...
 

 

오오~ 정은궐 작가님.

작품을 계속 쓰고계셨네요...

신간 소식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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