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꿈꾸었다. 앨리스는 내 꿈에 항상 나타났고, 나는 그녀의 빨간 볼에 입맞춤을 하면서 몇만번이나 더 했을 찬사를 읊조렸다.

 

 

“여보, 일어나요. 늦었어요.”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로 요염함마저 감도는 아내가 날 깨웠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새벽 5시밖에 안되었는데?”

 

 

내 말에 아내가 손끝으로 만보계를 가리켰다.

 

 

“의사 선생님이 하루에 4km는 걸어야 된다고 했다면서요. 당신 산보하고 돌아오면 시간이 딱 맞을걸요. 이해가 안간다니까, 정말. 당신같이 마른 사람이 왜 4km씩을 걸어다녀야 하는지...”

 

 

그건 거짓말이다. 내 주치의는 내게 아직 140까지 살 정도로 건강하다고 했으니.

하지만 적어도...나의 앨리스를 보는 은밀한 즐거움은 누려도 될 것 같다.

 

 

루트위지 도지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자, 내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얻기를 원하는 자리. 다른 말로 루이스 캐럴.

그의 본을 따서 나는 모 대학에서 수학과 교수를 하고 있다. 물론 시대가 다르고 장소가 달라 그가 가지지 못한 교수직을 나는 좀 더 젊은 나이에 얻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는 아내가 없었고, 나는 아내가 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 집어쳐!”

 

 

그녀와 결혼할 때 나는 모든 세상의 비난에 부딪혀야 했다. 그녀가 단순히 내 제자라서가 아니라...

이크, 그녀가 지나간다. 나는 산책로 한쪽에 숨었다. 하지만 워낙 큰 키이고 꺼부정하다보니 쉽게 들키기 딱 맞았다.

 

 

“교수님.”

 

 

그녀와 그녀의 조카가 내게 다가왔다. 그 조카는 아직 어리지만, 새벽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다. 덕분에 적당하게 마른 몸에 생기가 넘친다.

 

 

“오, 민화씨. 여전히 새벽운동 중이군. 조카도 여전히...”

 

 

나는 눈가에 뭐가 들어간 척 위장하면서 조카의 옷 매무시를 꼼꼼히 살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새벽운동에 적합한 운동복을 입혀 놓았다. 너무 꾸미지도 않고, 새벽에 일어나 오는 차림다웠다.

 

 

“교수님, 저번에 내신 <앨리스 연구>라는 사진집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던데요?”

 

 

“으음...그런가. 정아 생각은 어떻지?”

 

 

“예뻐요.”

 

 

나의 앨리스는 말 수가 적다. 아이다운 빨간볼에 귀염성은 잃지 않고 있지만.

 

앨리스 연구는 내가 오랜 세월동안 취미로 가지고 있던 사진들을 전시한 후 자가출판한 것이다. 양장은 꽤 고풍스러웠지만, 적어도 조금은 고급스러워보였다.

거기에 이 아이의 사진은 빠져 있다. 왜냐하면 나의 은밀한 즐거움을 남들에게 빼앗기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안다. 내가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뤘는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내는 <앨리스 연구>를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아침 먹어야지.”

 

 

내 말에 아내가 뭔가가 목구멍을 막은 듯한 소리를 냈다. 뭔가 할말은 있는데 뱉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

 

 

“응?”

 

 

“또 시작했어요?”

 

 

그녀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판본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내 아내가 10대일때 내 앞에서 찍은 유일한 누드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내가 비밀히 지켜왔던 -아마 나보코프라면 님펫이라고 부를-요정의 누드 사진이 겹쳐져 있었다.

 

 

“그건 또 어디서 꺼낸거야?”

 

 

“유미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그 사진집 있던 자리도 알던데요? 왜 그애 사진을 찍은 거에요?”

 

 

“...여보. 그건 그냥 작품일 뿐이야.”

 

 

“당신, 이제 난 당신기준에 안 맞아서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건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골치 아파진다.

나는 그녀가 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녀는 근 15년이 넘는 결혼생활동안 내게 충실했다. 늙은 남편, (그 당시에)출세도 못하는 늙은 남편을 왜 대학의 총장의 딸이 어린 나이에 고른 것일까.

그때는 나는 그녀가 나의 [앨리스]인줄 알았다.

모든 것이 맞아 떨어졌다. 난 루트위지 도지슨, 아니 루이스 캐럴이 되고 싶었다.

그녀와 만난 후 내 논문은 비약적인 성과를 보이며 승승장구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아동용 동화를 몇권 써서 꾸준히 들어오는 인세도 받게 되었다.

 

 

“여보.”

 

 

“그년이 전화해서 그 사진 도로 내놓지 않으면 변태 교수로 몰아버리겠데요.”

 

 

“...미안해. 걱정하지마.”

 

 

걱정하지 않을 일은 아니었다. 유미를 건드리진 않았지만 나도 켕기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정신적인 사랑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유미에게 가장 잘 나온 사진 한 장을 주었었다.

 

 

“걱정안하게 생겼어요? 당신은 교수라고요.”

 

 

아내는 그 상황에서도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 나를.

 

 

“내 잘못이니까...너무 걱정하지 마.”

 

 

유미를 어떻게 달랠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7시. 아이들을 깨워서 학교에 태워다주면 딱 맞을 시간이었다.

 

 

 

 

“요즘 뭐하니?”

 

 

공강시간에 나는 미술대학에서 유미를 만났다.

근처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다고 했다. 여기까지 온 건 미술대학에 아는 친구가 있어서 잠시 들린 것이라고는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앨리스 짓 하고 있죠 뭐.”

 

 

그 말에 잠시 마음이 덜컹거렸다. 나는 [앨리스]라는 명칭이 여기저기 사용되는 게 너무 싫다.

 

 

“뭐라고?”

 

 

그럴 때 나는 잘 안 들리는 귀를 핑계대며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한다.

 

 

“누드모델을 하고 있다고요.”

 

 

그녀가 목소리를 높여서 대꾸했다.

 

 

“당신 누드 모델 했던 것처럼.”

 

 

“오.”

 

 

그제서야 나는 미국인이나 할 법한 과장된 제스추어를 보여주었다.

 

 

“아내에게는 왜 그런 전화를...”

 

 

“...교수님이 내게 관심이 없으니까.”

 

 

유미는 내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당신 어린애 상대가 아니면 안 돌아가죠?”

 

 

“유미!”

 

 

“왜. 솔직히 말하지 그래요. 조사해보니까 나오던데? 지금 부인도 나하고 9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요.”

 

 

“.....”

 

 

“총장에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맘대로 해라.”

 

 

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각오는 되어 있었다. 사진 유출의 심각성을 몰랐던 게 내 한계였다. 본인 사진까지 제출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협박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러고 그냥 갈거에요?”

 

 

내가 그녀를 뒤로 하고 걷기 시작하자, 유미는 뒤에서 고함을 질렀다.

 

 

“정말 아무 상관 없는 거예요?”

 

 

한때 무척 요정같았고, 지금도 아름답지만 전혀 앨리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뒤에서 부르는 건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다.

 

 

 

 

 

 

“오리배를 타는 건 어떠니...”

 

 

민희를 어떻게든 끌어들여서 정아를 만나고 싶었던 나는 유미의 일은 뒤로 했다.

유미가 뭐라고 하건 유출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테니 그녀가 움직이진 않을 터였다.

 

 

“그러지 말고 동강 래프팅을...”

 

 

정아는 엄마 말고는 가족이 없었다. 그리고 그 엄마도 새벽 말고는 시간이 없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모두들 소풍을 가면 갈데 없는 정아는 민희를 따라올 수 밖에 없었다.

 

 

“래프팅은 올해는 물이 줄어서 어렵다니까, 그냥 오리배로 낙착을 보자고...”

 

 

대충 그런 식의 결론이 났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이 민희가 내게 다가왔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정아도 같이 가면 안될까요?”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나는 되도록 온화하게 보이도록 노력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차분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응?”

 

 

그녀의 손이 내게 다가와 내 손을 꽉 쥐었다. 예전의 그 감촉이 아니었다.

폭신폭신한 솜사탕같은 손이 더 이상 아니었다.

 

 

“날 버리지 말아요...”

 

 

언젠가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녀가 내게 잠시 앨리스가 되어주었을 때.

인천의 미로 박물관에서 서로를 찾다가 그녀를 잃어버린 일을...

겨우 만났을 때 아내는 내게 그렇게 손을 내밀었다.

 

[날 잃어버리면 안돼요...]

 

아마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난 당신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나도 그래.”

 

 

나는 소파에 앉아서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 그녀의 머리를 내쪽으로 끌어당겨 힘껏 안아주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정아의 모습이 살아움직였다. 나의 유일한 마지막 앨리스.

 

 

 

 

오리배 타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묘하게 초조감을 느끼며 민희와 웃고 있는 정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말로 내 [앨리스]가 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가 내 이야기에 공감해준다면 그녀는 그 페이지 속에 영원불멸로 남게되리라.

민희는 유미를 닮은 여자를 대학에서 봤다고 했다. 하지만 유미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 없었다.

 

 

“자 교수님은 민희하고 정아랑 같이 타시는 게 낫겠죠?”

 

 

발랄한 청년들과 처녀들이 킥킥 거리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정한 후 남은 자리를 우리에게 배정해주었다.

아마 이 소풍으로 말미암아 몇 명의 짝이 정해질 것이다. 고루하네, 보기 싫네, 라는 설왕설래가 몇 번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소풍을 오니 다들 들떠 있었다.

 

 

“자, 갑시...어엉?”

 

 

막 배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 저쪽 강끝에서 보트 하나가 서서히 밀려왔다.

오필리어를 연상시키는 창백한 여인 하나가 두 손을 모은 채 떠내려왔다.

머리에는 화관을, 손에는...

 

결코 내가 유출시켜서는 안된다고 했던 그녀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참고인 조사로 불려갔지만, 막상 사진에 대해서는 별 말들이 없었다.

사진은 누드사진이 최근의 인기니, 흔히 있을 수 있는 거란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다시는...”

 

 

“......”

 

 

“사진 찍지 않겠다고 말해줘요. 그 어떤 사진이든 간에.”

 

 

“여보...”

 

 

“풍경사진이라도 안되요. 절대로. 이번 사건은 겨우 넘어가지만 다음번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다음? 당신, 뭐 알고 있지?”

 

 

“뭘요.”

 

 

그녀도 한 때 [앨리스]였으므로 얼굴표정을 숨기는데는 다소 서툴렀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작가는 [앨리스]를 사랑하지만 앨리스 또한 [작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념의 직조와 논리의 거미줄 속에서 결말을 향해 달려갈 수는 없을테니까...

정아는 앨리스가 되지 않았고, 유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았다. 결국 내 곁에 남은 건 내 아내. 언제나 확고부동한 자리를 가질 처음이자 마지막 [나만의 앨리스]

 

이젠 죄의식에 시달리며 정아의 볼에 입맞춤하는 상상을, 유미의 엉덩이를 만지는 불쾌하고 유혹적인 나른함에 몸을 맡기는 일만 남았다. 죄의식속에서, 유미의 죽음을 은폐한 그 죄를영원히 말소할 것이다. 남편이 루이스 캐럴이라면 아내에게도 몫을 남겨주어야 한다.

그녀에게 내 인생의 몇군데를 끊어달라고 곧 말하리라.

일기가 말소되듯 내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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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차 안에서 심신이 피로하게 느껴지거나 멍하게 있는 날.

듣고 싶은 음악은 심규선(루시아)의 노래들이다.

아직까지 cd로 굽지를 않아서 차 안에서는 들을 수 없다.(오해의 여지가 있겠지만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음원들은 모두 다 바르게 다운로드 한 것 들이다.)

하지만 피곤한 날, 엔야나 심규선, 에피톤 프로젝트, 페퍼톤스, 랄라 스윗, 어쿠스틱 카페의 음악을 들으면 뭔가 씻겨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심규선은 국내 가수들 중에서 내게 가장 힐링이 잘 시켜주는 가수 중의 하나다.

물론 주로 봄날에 어울리는 음악이긴 하지만, 사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건 간에 언제나 사람은 힐링이 필요하지 않던가.

내가 심규선의 음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에피톤 프로젝트와 함께 했던 [선인장],[꽃처럼 사랑해줄건가요?]이다.

꽃처럼 사랑받는다는 건 좋은 이야기다. 그만큼 자신이 향기롭고 순수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의미이니까. 하지만 꽃은 얼마 가지 않는다. 언제까지 자신을 꽃처럼[만] 사랑해줄건가?라는 물음이 가슴을 치고 지나간다.

선인장...은 듣다보면 마린블루스의 선인장양이 생각나는 노래인데, 이것도 상당히 마음에 든다.

아마 좀 유명한 곡들이라서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노래들일테고...

이제 와서 아는 척 하는 것 같아서 쑥스러워서 이렇게 마무리한다.

이력과 좀 더 전문적인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엔하위키에서 심규선을 검색해보시라고...

그럴바에는 왜 이렇게 쓰느냐고?

 

그냥...같이 음악 듣고 싶어서...;;;;;;;;

들어봐요. 귓가에 바람이 스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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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률은 모아들인 정보를 파악했다. 자신의 편에만 서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유능한 몇몇 기사들은 길준의 편이었다. 길준의 정체까지 덤으로 파악하게 된 병률은 곧 길준의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한 탓으로 선금반납을 해야 하는 몇 명을 따로 불렀다.

 

“...죄송합니다.”

 

그들은 유능했지만 항상 유능할 순 없었다. 상대는 바로 여당의 의원이니까. 어설픈 정보를 수집하려 했다가는 그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질 위험이 있었다.

 

“아니, 뭐 꼭 그럴 필요는 없고.”

 

병률의 과거 직업을 알고 있는 그들이니 병률에게 더욱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 편하게들 앉지?”

 

“......”

 

“앉아야 이야길 할 게 아닌가.”

 

병률의 말에 한 사람씩 자리에 앉았다. 총 3명.

이 중 길준에게 가장 많이 선금을 받았던 자가 하나.

충분히 될 것 같았다.

 

“그 자네들을 고용한 남자 말인데...”

 

“네.”

 

“내가 자네 선금을 빼앗기지 않게 해준다면 어떻게 하겠나?”

 

“네?”

 

머리가 생각보다는 좋지 않은가 보다. 병률은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는 상대에게 다시 말했다.

 

“나같으면 선금의 몇 퍼센트를 붙여서 떼일 짓은 안 하지. 설사 한다 하더라도 자네는 그걸 그냥 뺏길 사람같지는 않은데?”

 

그 말에 상대의 얼굴에 마치 전구에 불이 들어온 것 같은 찬란함이 넘쳤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남은 자네 둘.”

 

“아,예.”

 

“잠깐 자리를 옮길까? 아, 처음 자네는 돌아가도 좋아. 내 제안을 곰곰이 씹을 시간이 필요할거야. 용기도 필요할테고 말이지. 부탁한 건 이미 자네 사무소에 있으니 알아서 해결하게.”

 

부탁. 이라는 말에 머리가 별로 좋지 못한 그 남자가 잠시 머리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내 무슨 뜻인지 깨닫고 바로 방을 나갔다.

 

“왜 저 친구보고 나가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나?”

 

그가 나가는 걸 확인한 후 병률이 낮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뒷처리를 하라는 이야기겠지요.”

 

둘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선금입금만 완벽하면 저흰 언제나 벙어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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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보는 가게 문을 닫고 지윤과 함께 예전 아버지가 사용하던 산장으로 피신했다.

옛날에 쓰던 산장이라, 여기저기 거미줄에 곧 허물어질 듯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가끔 들르는 손님이 있어 그런가, 생각보다는 상태가 양호했다.

 

“......”

 

털보는 충격을 많이 받은 듯 했다.

부자며, 동생이며...왜 다들 그의 이해 한계선밖에 있는지 이해를 전혀 못하는 모습이었다.

 

“형...”

 

기껏 코펠에 라면이나 끓여서 먹을 정도의 정신만 있는 그를 보면서 지윤은 답답해졌다.

 

“형이라고 부르지도 마라...내 일생 이런 헛짓거리를...”

 

“어쩔 수 없었잖아요...”

 

“어쩔 수 없어? 내 머리를 탓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저널리스트 하던 놈이 백수로 몇 년 놀더니

적한테 선수를 빼앗기다니...”

 

“.....”

 

그 적이라는 개념이라는 게 아마 금괴를 말하는 것이리라.

지윤은 금괴에는 별 관심은 없었지만, 형의 집착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질문했다.

 

“형은 금괴 금괴 그러는데 진짜 아버지가 금괴를 가졌다고 생각해요?”

 

“물론이지. 증거도 있어.”

 

“뭔데요?”

 

“말 안하련다.”

 

하긴 금괴를 가지고 있었다면 부자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는 것도 으리으리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의 스케일에 어울리게.

 

“왜요?”

 

“말해봤자 소용없으니까.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거니까 니들하고는 상관없기도 하고.”

 

“...소엄마가 아버지한테서 선물받았던 거군요.”

 

“말을 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

 

선물이라...아버지의 비비꼬인 성격상 틀림없이 장난으로 만든 위조품인게 틀림없었다.

기자인 그녀답게 바로 나서지 못했던 건 아들을 낳고나서 몇 년 안되어서 죽었기 때문이리라.

 

“형은 부자가 되는 게 좋아요?”

 

“...글쎄다.”

 

“그런데 왜 금괴에 그렇게 집착을 해요?”

 

“그걸 꼭 일일이 설명해야 알아듣니?”

 

털보가 순간적으로 버럭거렸다.

 

“어머니 유품이란 말이다. 내 직업하고 금괴하고. 난 한 개만 있어도 족한 물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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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준은 언젠가부터 예전처럼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이젠 소설가의 꿈은 버렸는데, 항상 함께해주던 아내는 이제 없는데. 그런데도 자신은 글을 쓰고 있다.

꿈같은 상황이 아닌가. 이젠 더 이상 글로 먹고 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차피 돈이 있으니 그 돈의 이자로도 충분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

 

‘어차피, 안 될 일이야.’

 

글에 대한 욕망으로 더 이상 불타오르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건, 죽은 문어의 살아있는 신경이 있는 다리를 포크로 꾹 찌르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뭘 쓰고 있으십니까.”

 

이준구가 어느새 들어왔는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얼른 컴퓨터 화면을 손으로 가렸다.

 

“아, 잠깐 웹서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잠시 맡은 할머니에게 좀 좋은...”

 

“...그건 제가 알아서 했습니다. 그것 보다 어머님 인상착의와 닮은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만, 별로 찾지를 못하겠더군요...”

 

“......”

 

길준은 침묵했다. 아니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일시적인 미움으로 어머니를 구할 수 없는 바닥으로 밀어뜨렸따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놈의 유령이 뭐라고, 그 유령의 손가락질 하나에 어머니를 버리다니...

참담한 생각이 들었지만 표시를 하지 않으려고 그는 무척 애를 썼다.

그리고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사실 아내의 유령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아마, 돌아가셨을 겁니다. 상대는 악독하니까요.”

 

“...그러니 더욱 조심하셔야...”

 

“준구씨는 어떻습니까.”

 

길준은 활발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준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랫사람에게 하는 행동이었고, 길준은 과거에 그런 태도를 보인 상관을 상당히 싫어했었다.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길준은 그렇게 변했다.

 

“...잠깐 가족을 만나고 오셔도 될...”

 

그 말에 준구가 고개를 저었다.

 

“약속은 약속입니다. 정체를 밝히지 않기로 했으니 끝까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당신의 복수가 끝나면 난 언제든지 가족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이군요.”

 

“그것보다 법인이 생기면 첫 등록할 노인분인데, 한번 만나보시지 않겠습니까?”

 

길준은 대답대신 딴 말을 했다.

 

“법인의 이사는 곧 정해야 할텐데...적임자는 찾으셨습니까?”

 

준구는 그 말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만약 자신이 어깨를 빌려주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인간성에 실망할 태도였다.

이사가 누가 되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환자조차 외면하는 사람이 세우는 재단이라면 그건 준구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준구는 등을 돌렸고, 길준은 손으로 덮었던 컴퓨터 화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작은 다음과 같았다...

 

-그녀는 몇 시간이나 유린당한 후에야 그 무리들에게서 풀려났다. 그리고 그의 남편은 그 시간 그녀의 적이고, 원수인 상대를 위해서 호스트클럽을 뒤지고 있었다...-

 

그를 지탱하는 것은 분노였고, 분노 아니, 그 이상의 것이었다.

과거가 그를 돌려세웠고, 이제 그는 적들의 심장에 박아넣을 글들을 쓰고 있었다.

문학상을 받기 위해서, 문학에 고매하게 투신하기 위해서, 문학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심지어는 정의도 아니었다. 다만, 한 영혼만을 위한 복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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