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 서고에서 경전을 필사하고 있었다. 날씨는 바야흐로 서서히 서늘해지고 있었다. 해배되고 나서 근신만 벌써 3개월. 유배시 죄명은 함께 대동한 무관을 의식불명의 상태로 데려온 것과 무단으로 지방관을 치죄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 결정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황명과는 다르게 움직인 것도 있어서 마음이 언짢기도 했다. 더더군다나 그 요물에게 홀린 것인지, 같은 죄인데도 그 요물편이 더 나아보이지 않는가. 적어도 백성을 괴롭히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덕분에 매일매일 경전을 베끼면서 마음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옛 강호에 있을 때처럼.
“오늘 베끼는 것은 무언가?”
경전을 베끼는 것은 하나의 정신수양이었다. 한 100장 정도 베끼고 나면 등에 살짝 땀이 배인다. 그리고 나서 밖을 쳐다보면 시원한 바람이 불고, 살랑살랑 창에 단 천이 흔들리면서 예전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 황자님.”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창을 응시하고 있을 터였다.
수린과 지금은 황태자가 된 나의 어린 아이 제 3황자를...
“그대가 지금 필사하고 있는 것이 일어경이었지.”
“예. 그러합니다.”
일어경, 한단어만으로 세상을 그려낸다는 격언집. 지금의 내 상황에 딱 맞는 것이었다.
“그래, 격언이 머리에 들어오기는 하는가? 요즘 같은 어지러운 세상에는 그대같은 이가 살아남기가 힘들지.”
“.....”
지금 내 앞에 앉은 사람은 제 6황자. 지금의 황태자의 친동생이자 가장 위험한 상대.
“황태자가 그대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이런 꼴이 된 거 아닌가. 강호에서 막 도착했던 자네가 아니었으면 형님이 살아남기도 힘들었을텐데 말이야.‘
“그때는 황자님이 태어나시기도 전이었습니다.”
“아, 그랬나?”
그래, 그리운 광경이었다. 강호에서 막 궁으로 입궁했을 때, 난 과거를 지우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하지만 패설관으로 막 임명받고 들어갔을 때는 강호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태형을 자주 당하기도 했다. 내시들의 은근한 압박과 비웃음을 이겨내기에는 내가 젊은 탓도 있었고, 궁중법도를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해 분노한 탓도 있었다.
이미 수린이 죽었을 때 마음도 죽었다고 생각했건만.
강호의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 패설관이 되면 좀 더 자유로이 노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궁중은 강호보다 더 엄격했고 더 냉혹했다.
“유주! 게 섰거라!”
그때 3황자는 황자도 아니었다. 황자의 어미는 궁중의 시녀로, 어쩌다 황비에게 싫증을 낸 황제폐하께 잠시 눈에 들어 제 3황자를 배었다. 하지만 어미의 신분이 천한데다가, 그당시 황비님의 구박도 심해서 제 3황자는 황자취급도 받지 못했다. 매일매일이 내시들의 구박으로 인해서 제 3황자에게는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내 위의 패설서기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다가 궁중의 어른들로부터 심하게 매를 맞은 뒤 서고에 갇혀 있었다. 며칠간 근신하라는 말과 함께.
“거기 서라니까!”
지금은 황태자 전하로 불리우시지만 그때는 성도 없이 유주라고만 불리고 있었다.
상궁 몇몇이 황자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여워하긴 했지만(그건 황자의 어미의 신분 탓도 있었을 것이다.)그건 신분상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서고에 갇혀서 밖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어디서 수린을 많이 닮은 듯한 어린 아이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도 궁중생활을 한 4개월 하다보니 눈치가 많이 늘어 그 어린아이가 바로 소문의 그 제3 황자가 될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모른 척 하고 지나가려고 했었다. 그 내시가 손에 칼을 쥐고 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는 내시 중에서 가장 권력이 센 내시의 양자였다.
“게 서서 내 칼을 받거라. 너같이 천한 놈이 거둬주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터! 어디 감히 꼬박꼬박 말대꾸냐! 근본도 없는 것이!”
아이는 이미 많이 맞아서 피멍이 들어 있었다. 연약한 하얀 팔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있고 옷도 많이 찢어져 있었다.
“내시주제에! 난 근본이 없지 않아! 아바마마께서 언제까지 네놈들 하는 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아?”
그래도 자신의 근본을 알고 있는 자의 행동을 보이고 있는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안쓰럽던지.
하지만 저 큰 권력앞에서 함부로 나설 수 가 없었다. 이미 나는 수많은 압박을 받고 있지 않은가. 겨우 강호에서 몸을 피해 온 것인데, 여기서 더 나갈 수는 없었다.
물론 실제 저 내시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황자의 저 발언도 궁중의 법도를 벗어나는 것을 떠나서 저 정도 체벌을 당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네놈의 아바마마냐! 이놈! 황비마마께서 이미 결단을 내리셨거늘!”
그가 칼을 휘둘렀을 때 내 몸도 창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생각만 한 것이었다.
피가 튀었고, 나는 그때 지금의 황비마마께서 아이를 감싸안는 것을 보았다.
그래, 진수린을 꼭 빼닮은 젊은 어미.
황비 마마셨다. 그래. 지금의 서황비 마마.
“그만두셔요! 아두 어르신! 제가 황비께 사죄드리고 차라리 자진하겠어요. 전하의 정을 받는 것이 그렇게 나쁜 짓인지 몰랐어요. 제가 유주는 꼭 제 친가로 보내서 키우겠으니, 제발 제발 그만하셔요.”
칼에 팔이 찢긴 그 어미를 보는 순간, 진짜로 내가 창밖으로 뛰어내릴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하지만 아두는 그 손을 거두지 않고 어미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그녀의 숨이 끊어질 정도에 이르렀을 때 유주가 아두의 손을 깨물었다.
“이놈이!”
그때도 선택의 여지는 있었다. 그때 물러섰다면...
아두는 정확하게 유주의 목을 향해서 칼을 꽂았다.
“악!”
그때 소리를 지른 것은 유주가 아니라 아두였다. 나는 정확히 아두의 손에 내 몸에 숨기고 있던 침을 날려 정화하게 맥이 통하는 부분을 막은 것이었다.
“네놈! 새로 들어온 패설관! 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들이!”
아두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난 차라리 냉정해지기로 했다.
“아두 어르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의관을 찾아가셔야 할겝니다.”
“뭐?”
“정확히 1시간 후면 온몸이 마비될 것이고, 정확히 2시간 후에 어르신이 돌아가실겝니다. 그러니 얼른 의관에게 뽑아달라고 하시죠. 안 그러면 궁에서 아두 어르신의 장례를 치르게 될 겝니다.”
“너, 지금 누굴 적으로 돌렸는지 아느냐? 황비 마마님을!”
“누굴 적으로 돌리다니, 황비가 뭘 어쨌단 말이야. 아두! 네놈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는. 아룡. 네 양자의 행동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느냐?”
황제폐하셨다. 서고쪽으로는 웬만해서는 지나다니시지도 않는 분이, 우리를 본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
황제폐하께서 대로하셨다.
“폐하.”
어미가 황제폐하의 발을 붙들고 울었다.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감히 천한 신분으로 씨도둑질을 한 것은 잘못된 일이오나, 이 아이가 이렇게 죽어서는...”
폐하께서는 더 이상 듣지 않으셨다. 폐하는 그 어미의 손을 발에서 치우시고는 그대로 검을 들어 아두의 몸을 치셨다. 검으로 베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바로 멍이 들어, 아룡은 허겁지겁 폐하가 더 검을 드시기 전에 정신이 덜 든 아두를 데리고 자리를 황황히 벗어났다.
“내 아들이라고?”
폐하께서는 냉냉한 눈길을 황자께 향했다.
“내 아들이라...”
“아바마마. 유주라고 합니다.”
“궁중예법을 모르느냐? 내가 네게 말을 걸기 전에는 네가 말해서는 안된다.”
그리고는 황제폐하께서는 몸을 돌리려 하셨다. 그러다가 날 보고는 한마디만 하셨다.
“배짱이 좋은 패설관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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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자네 덕분에 어머님이나 나나, 전하나 살아남은 셈이지.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전하께서는 항상 은유로 말씀을 하실 때가 많아서 진의를 파악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나는 황자의 말을 한귀로 들으면서 일어경을 다시 필사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번에는 얼마만큼 근신할 것 같은가? 이번에는 형님도 자네를 풀어주기가 쉽지 않을 것이야.”
“서황비 마마가 동황비 마마를 찾아가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래. 그렇게 모성애 넘치던 어미가 황자 둘을 더 낳았다. 그 냉냉하던 전하께서 어떻게 마음을 여신 것인지, 얼마 뒤에는 총애를 받아 직위가 올랐다. 그 뒤에는 황태후 마마의 마음도 사로잡아 황비까지 되어 한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동황비 마마와 동급이 되어 오히려 동황비 마마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의 승급을 연이어 하다가 어렵잖게 패설관들의 꿈인 패설사관이 되었다.
“동황비인들 어머님이 쉬운 상대겠나. 자네는 몰랐겠지만 어머님은 행동 하나하나가 훌륭한 배우가 아니셨나. 친가의 핏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야.”
그때 내가 제 3황자를 지키려고 했던 것은 진심이었지만, 서황비의 모성애는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황제의 아이를 갖기 위하여 황제가 여인들을 고르는데 쓰는 고양이가 좋아하는 풀을 바닥에 깔고 황제를 유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두의 그 횡포도 철저하게 계산된 것.
서황비는 계교로 밑바닥부터 황비가 되었다.
동황비 밑에 아들이 둘 있었지만 서황비의 꾀로 그 둘이 다 죽어버리고, 지금은 서황비의 맏아들이 황태자가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황궁의 현실이었고, 내 현실이었다.
모든 이들의 꿈인 황태자와 황비, 그리고 패설사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호에 있었을 때보다, 아니 궁중에서 그 뜨거운 피를 식히고 있던 그 순간이 더 꿈결같은 것은 어쩐 일인가.
내가 보는 일어경에서는 그 말을 이렇게 표현한다.
호접지몽.
내가 나비런가, 아니면 나비가 나인가.
강호의 현실이 더 각박한가.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