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 하시겠어요?”

 

그들이 만난 건 [태인]이라는 카페였었다. 그는 그날따라 자주 애용하던 스타벅스에 자리가 없어서 [태인]에 와 있었다. 태인은 운이 없는 카페 중 하나였다. 원래도 그렇게 손님이 많은 카페는 아니었는데 운이 나쁘게 [스타벅스]가 옆에 생기면서 손님들이 거의 다 떨어뎠던 것이다. 그렇다고 슈퍼 바리스타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렇게 스타벅스에서 밀려나오지 않는 한은 항상 한적했다.

 

그가 주문한 커피를 후루룩 마시고, 노트북을 켜서 작업을 증간정도 했을 때였다.

그 목소리가 들려서 그는 우선 노트북에 꽂아놓았던 눈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렸다. 눈만.

 

죄송하지만 싫습니다.”

 

아니, 눈보다는 목소리가 먼저 대답했다. 그 다음 눈이 그 상대방을 응시했을 때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차 한잔 저랑 같이...”

 

그는 깜짝 놀랐다. 그건 토끼였다. 그것도 그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토끼.

소설 속에서 주인공 토끼는 보름달이 뜨는 밤, 차를 마시고 컵에 남은 차무늬를 보고 운명의 상대를 결정한다고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 토끼는 고향을 떠나 같이 차를 마실 사람을...

 

아니, 왜 하필 나를...”

 

“...소설가시잖아요. 제 운명을 결정짓는...”

 

그가 적은 부분은 운명을 찾아 떠나온 토끼가 한 남자에게 차를 같이 마시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토끼가 맹랑하게도 페이지를 탈출한 것이었다.

 

“......”

 

전 이대로 사라질 수 없어요.”

 

뭔 뜬금 없는 소리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알았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 토끼는 위대한 일을 이루어낸 후 갑자기 사라지는 결말을 정해놓았다.

 

“......”

 

사라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차를 같이 마실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였다.

 

왜 하필 나를...그런다고 내가 네 결말을 바꿀거라고 생각해?”

 

그럼 왜 하필 제가 사라져야 하죠?”

 

태인의 무심한 주인장은 토끼가 말을 하는데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카페에 따로 찻잔과 차를 들고온 토끼가 있는데도.

 

잠깐만. 어째서 네가 사라진다고 생각해? 결말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네가...”

 

거짓말이지만, 사실 비슷한 이야기기도 했다.

결말은 정해놨지만 결말까지 가는 중간 내용은 구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결말을 읽고 왔으니까요.”

 

“...?”

 

위대한 토끼는 응차~ 라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앞의 빈 공간을 향해서 앞발을 내밀었다. . 하는 소리와 함께 토끼의 앞발에 어울리는 작은 책이 떨어져내렸다.

이걸 읽었죠. 2014611쇄 찍은 책이에요. 제목은 위대한 토끼에 대해서 말하다.”

 

“....잠깐만 그거 이리...”

 

 

줄거리 변비와 아이디어 고갈로 숨이 목에 찬 그가 토끼가 꺼낸 책을 뺏으려고 한 순간.

토끼는 잽싸게 또 빈공간을 향해서 그 책을 던져넣었다.

 

안돼요. 이걸 보면 그대로 쓰실 거잖아요.“

 

!”

 

저랑 차 마셔주시면 보여드릴게요.”

 

토끼는 우아한 자세로 티포트와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저랑 같이 차 마셔요.”

 

좋아.”

 

스토리 변비와 우울증에 가까운 아이디어 고갈증상을 보이던 그는 결국 승낙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감일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는 이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 계열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차는 무슨 차야? 기왕 마시는 거 복숭아차로 줘.”

 

.”

 

토끼가 앞발을 들고 찻잔을 그에게 주었다. 앙증맞은 찻잔을 보면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이제는 소설속의 주인공에게 협박까지 당해야 하다니...

 

근데 이상한데?”

 

?”

 

오늘은 보름이 아닌데?”

 

“......”

 

토끼는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빙긋 웃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다 마시시면 그 책 보여드릴게요.”

 

그리고 그에게 복숭아차를 내밀었다. 그는 기분이 찜찜했지만 홀짝 한 모금 넘겼다.

 

뭔가 속는 기분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태인의 주인장은 그가 사라진 의자를 바라보다가 잠시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에는 아까전까지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던 그가 있었다. 태인의 주인장은 토끼도 봤지만 워낙 무심한 성격이어서(아마 그래서 연쇄적으로 들어왔던 스타벅스나 핸즈커피를 당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간단하게 토끼를 향해서 말했다.

 

리필?”

 

“.....”

 

토끼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아까 전까지 남자가 쓰던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끼가 계속 뭔가를 칠수록 노트북 화면은 마치 지우개로 지운것처럼 내용이 사라져갔다.

 

“......”

 

토끼는 계속 내용을 두드렸지만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았다. 남자가 사라지면서 남자가 쓴 내용은 몽땅 다 사라져버렸다. 심지어는 토끼의 몸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주인공의 행동이나 내용을 쓰는 것이 소설가였으니 토끼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토끼는 사라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앞발을 빈공간으로 내밀었다.

그 빈공간이 열리면서 아까전에 토끼가 소설가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그 책이 나타났다.

하지만 토끼가 앞발로 그 책을 집어들면서 책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토끼는 울면서 사라졌다.

 

리필?”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어느샌가 노트북을 베고 잔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를 북북 긁다가 무심한 [태인]의 주인장을 향해서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메리카노로.”

 

...”

 

그는 아까 전에 한 사분지 일 정도 두드리던 내용을 찾았지만 노트북에서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 큰일났다. 내일 모레 마감일인데. 쓴 부분도 몽땅 다 지워졌어.”

 

“......”

 

결국 그에게 남은 건 달콤한 한순간의 낮잠과 텅텅 빈 노트북 화면 뿐이었다.

그는 리필하고 남은 아메리카노를 여유있게 마시는 주인장을 흘끔흘끔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 다시 내용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그 낮잠의 내용이 그에게 막힌 스토리의 맥을 잡아준 것이었다.

그는 무심한 주인장이 있는 카페에 등장한 토끼 이야기를 소설로 썼고, 그 소설은 본래 나오기로 한 출판사에서 진통을 겪다가 출판사를 바꾼 이후 소설에서 동화로 바뀌어서 책이 나왔다. 바로 201461일 일쇄를 찍은 바로 내 손에 들린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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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요곡의 일부분을 채록하기 시작했다. 성주는 그 음악을 들으면 미친다고 했지만, 채록하기 위해서 나서면서 들은 것은 그의 말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포교사라는 자와 접촉을 한다. 그자는 그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라는 것을 하며 [포교]라는 것을 하면서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그것은 역시 기도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하늘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천사]요곡이라고 불리고 있다. 하지만 천사요곡은 단 한곡이 아니었다.

 

이것을 알려준 이는 천사요곡과는 거리가 크게 먼 귀머거리였다.

그는 손짓발짓으로 그들의 모임에 대해서 전해주었는데 귀만 먹은 것이 아니라 말까지 못하는 벙어리였다. 다만 그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고문의 후유증인 듯 싶었다.

그것이 최근에 일어난 잔혹행위인 듯 했으므로 나는 내 업무에 이 진상파악도 끼워넣었다.

 

[잔혹하여라. 그대의 옆모습. 왜 날 외면할까.]

 

쟁쟁거리는 악기소리가 귀에 울렸다.

 

[돌아가라 말하네. 나의 당신.]

 

유랑안은 사랑의 노래를 금지한 적오와는 달랐다. 노래를 팔아 먹고 사는 가인들이 사는 곳이었고, 바다가 가까워 염전이 발달한 곳이었다.

소금은 귀한 조미료이므로, 이곳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풍요로운 삶을 살기에 이곳 사람들은 감정표현도 풍부하게 했다.

 

[목석같이 딱딱한 남자여.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세 번째 음계에 도달했을 때에야 나는 그것이 적오의 음성임을 알 수 있었다.

 

요망한 것!”

 

검을 빼어들었지만 이 노래가 어디서 들리는지 알지를 못했다. 검만 빼들어봤자 내 행색만 우스워질 뿐.

 

[당신은 어쩜 이리 무정할까.]

 

쟁쟁거리는 음악에 귀를 막았다.

 

날 언제 봤다고 네까짓것이.”

 

“...어머나?”

 

그 노랫소리를 듣는 동안 주의를 경계하지 않고 있었던 탓일까.

어느샌가 적오가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간 채록을 하면서 주의를 흐트린 탓이었을 것이다.

 

튕길 줄도 아시는군요. 확실히 한때 강호의 풍류남이라 불릴 만 하군요. 호호.”

 

적오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래. 무정하신 분, 올해는 황산의 자무홍을 보셨나요?”

 

“.....”

 

잠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현기증이 들었다. 말하는 대신 나는 전하와 폐하께 하사받은 검을 휘둘렀다.

그저 감정적이어서 맞을리도 없었건만. 자무홍 이야기는 언제나 날 평정을 잃게 했다.

 

그래서야 어디 맞기라도 하겠나요.쯔쯔.”

적오는 세련된 동작으로 등 뒤에서 검을 빼들었다. 우선 검법을 시험이나 하는 듯이 검을 들었다가 내렸다. 쩡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흔들렸다.

 

네가 어떻게 자무홍을...”

 

적오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답니다. 모르는 게 없죠.”

 

“......”

 

검끝이 내 수염 끝에 닿을락 말락했다.

나도 평정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다.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도 검을 천천히 앞으로 두었다.

 

자무홍까지 알면 다 아는 것이겠지. 내게 그녀는 모든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네 무엇을 알까...그런 점에서 네가 내 앞길이지만.”

 

살짝 검과 검이 부딪쳤다. 쩡하는 소리가 다시 났고 적오는 뒤로 살짝 물러났다.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내가 앞길이다.”

 

나는 부딪쳐오는 그녀의 검을 피하면서 발로 그녀의 무릎을 걷어찼다. 적오는 피하려고 하지도 않고 검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

 

너는 내 과거만 알게 될뿐.”

 

그렇다면 이번에도 제 앞길을 막으실 건가요?”

 

무릎을 걷어차여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본체가 아니라는 뜻.

 

네 길이 올바르면 어느 누가 널 막겠냐만서도. 네 일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이 길어 지루하군요. 짧게 정리하죠.”

 

그녀가 검으로 살짝 내 뺨에 상처를 냈다.

 

내가 요물이기 때문에 안된단 말이죠.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나는 상처를 굳이 막을 생각은 없었다. 이길 생각도 없었다.

자무홍 꽃이 피던 자리에 있던 옛날 그녀의 자리.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검을 검집에 도로 넣었다.

 

재미없네요.”

 

적오도 검을 도로 넣고는 가벼운 동작으로 발을 다시 굴렀다.

 

당신같은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살까? 사건 추적하는 재미?”

 

“......”

 

저런 요물이라면 나라 하나 주물럭거리는 놀이를 하는 유치한 것일수도 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저것을 의식한 것이겠지.

 

그렇다면 하나 더 알려드리죠. 이번 사건에 전 결백해요. 높은 사람들을 좀 더 관찰해보시죠. 그럼 답이 나올테니. 천사요곡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노래 채집에만 시간을 더 넣지 마시고. 그래야 당신이 사랑해마지않는 전하나 폐하를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방안의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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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에서 기다리겠어요. 대협.>

 

 

그것은 안개였다. 자무홍의 꽃들이 은은한 향기를 뿜었을 때 그녀는 뒷모습만으로 그를 만났다. 그래서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뒷모습뿐이었다. 말에 앉아서 타는 금을 들고 그녀는 그를 떠났다. 언제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황산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황산에서...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강호의 옛 법이 그를 그렇게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원수로 쌓아온 생활이 언제던가. 그는 그녀의 금을 떠올리며 몇 번이고 적을 연주했다.

 

채미홍.”

 

그러다가 독주를 마시기도 하고, 원수를 맺기도 했다. 원수의 검에 찔린 적도 있고, 원수를 죽인 적도 있었다. 그렇게 그는 발을 더욱 강호에 붙들어매었다.

하지만 그가 강호인이 아닐 때가 있었다. 패설사관 채미홍을 만날 때만큼은 떠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채미홍은 처음부터 끝까지 땅을 밟고 서 있는 자였다.

강호와는 달리 황제의 명을 받드는 자라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그건 어쨌든 좋았다.

 

수린의 금은 여전합니까?”

 

자무홍꽃밭을 떠났던 하수린은 금을 켜는 가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는 악기 하나 못 다루던 그였기에, 그녀를 다시 만나면 적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

 

채미홍은 말을 아꼈다. 그는 말 대신 미축에게 적을 연주하도록 권했다.

미축은 적을 입술에 갖다댔다. 채미홍이 갖고 온 남쪽 봄날씨는 하수린의 옷깃의 향기같았다.

 

“.....”

 

연주는 처음에 평탄음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휘몰아치듯 감아올렸고, 그러다가 애조를 띄었으며 마지막에는 울음으로 끝났다.

미축은 울고 있었다,

 

“...알고 있었나.”

 

채미홍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와 자네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자가 수린에게 독을 먹였다네...강호는 참 무서운 곳이지.”

 

그니는 황산에 있었습니까?”

 

그는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황산 자무홍꽃 밑에 잠들었다네.”

 

미축은 다시 적을 들었다. 자무홍꽃 냄새를 기억하려고 했지만 기억할 수 없었다.

 

역시 그곳에 갔군요...이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테니...곧 만날 수 있겠군요.”

 

떨리는 손으로 미축은 적을 잡았다.

 

미홍.”

 

? 왜 그러는가?”

 

긴 거리를 다니시느라 항상 힘드시겠습니다. 위협도 항상 받으실테고...”

 

별로 힘들지 않으이. 자네같은 검객이 내 뒷배를 봐주지 않는가. 다만 항상 아쉬운 것은...”

 

미홍이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동네 동네 돌다보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많이 듣는데, 나같은 사람이 많아야 그걸 다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지. 얼마 안되는 한줌이 모여서 이 대륙의 이야기를 다 엮지는 못할 것 아닌가...”

 

“......”

 

미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속에서 미홍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한참 뒤에야 미축은 이런 말을 툭 던졌을 뿐이었다.

 

멀리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전해듣겠군요.”

 

미축은 2년 뒤 왕의 표식을 전해받고 패설사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대륙의 최남단 황산에서 잠든 그니의 묘지를 찾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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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 남자가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지.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민감하다거나.

나는 자전거 안장을 풀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동거생활을 시작한지가 3년이 다 되어가는데, 어째서 계속 이런 불협화음이 생기는지 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한 건 안장을 다 뜯어낸 후의 일로, 나는 그 순간 그 남자의 집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흐뭇한 생각을 지우지 않았다. 그 남자는 앞으로 내가 타던 이 자전거를 다시는 타지 못할 것이다.

 

그의 집을 떠나온 후로 나는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일하기도 하고, 대형 이자카야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봉제인형에 눈을 붙이는 고전적인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는 일본이 아니라서 단순작업인 아르바이트에는 큰 돈을 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월세값을 내기도 힘들었다.

비오는 날에 공동화장실이 달린 다세대 주택에서 달팽이를 발견하고 힘겨운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그렇게 집에서 눈물을 훔치던 그때 그 남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미건아.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쫀쫀한 성격의 그라면 처음부터 내 안장 내놔라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굽히는 전략으로 시작했다.

 

“.....”

 

힘들거라고 생각해. 네가 일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잖아.”

 

“.....”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어. 어린애를 꼬여낸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내가 물론 너한테 멋대로 한 건 사실일지만 너도 알잖아. 넌 어린애같은 사람이라고, 이런 생활 오래 못 견딜거야.”

 

여러분이 생각하는 내 모습은 아마 이 남자가 생각하는 모습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난 결론을 내렸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날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자전거 안장 일은 다 용서할게 네가 뭘 알아서 그랬겠어?”

 

“......”

 

“......”

 

잠시 공백이 있었고, 난 다시 유혹에 빠졌다. 인간취급을 안 하면 어떤가. 이 남자에게는 집이 있었다. 적어도 떠들지만 않으면, 입을 열지만 않으면 집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딸칵.

 

기회를 줄게. 3시간 뒤에 전화줘.”

 

왜 그 남자가 끊을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는지 속상했지만 적어도 집은 생기는 것이다. 집이 생기는 것이다. . . . . . . ,

나는 다세대 주택 화단에서 발견한 달팽이를 생각했다.

난 왜 달팽이가 아닐까.

왜 난 집을 안고 태어나지 않았을까. 달팽이의 집이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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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날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창문은 늘 그랬듯이 먼지로 더러웠다. 그건 그의 게으름 탓이었지만 방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건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었다그는 새가 싫었다. 특히나 그것들의 배설물은 더욱이나!

그는 새가 싫었다. 특히나 그것들의 배설물은 더욱이나!

하지만 정부에서는 언제부턴가 특정 해초류를 먹고 싸는 그것들을 유망자원으로 분류했다. 당연하게도 그 전에는 면허라도 받아서 잡을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당연히 새들에 대한 살인면허가 있었다. 빌어먹을 정부

인권과 조권의 힘중에서 정부는 조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게 무슨 인간을 위한 정부인가.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정부에 항의서한을 작성했지만 답변은 불가였다. 별 다른 설명도 없었다.

하여간 그 이후부터 그는 세상에 절망해서 방안에 틀어박혔다.

인터넷으로 모든 것을 사들이고, 전화번호부로 수리공을 호출했다.

청소하는 것만은 직접 했는데 그나마도 창에 새똥을 싸는 그 새들이 건물에 새로운 거주자로 등장하자, 그는 청소하는 것도 어느 정도 포기하기 시작했다.

찌르레기가 지저귀고, 뻐꾸기가 슬프게 우는 계절이 순서대로 왔다가 사라졌다.

그래도 그는 봄의 상쾌한 바람과 여름의 미칠 듯이 푸른 신록을 거부했다.

그에게는 모든 새가 적이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쏘지 못하는 그 격렬한 감정은 그를 침대에서 못 일어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쏘고 싶어도 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빌어먹을 조권 때문에.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결국 창문청소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너무 더러워서 건물의 미관을 해친다는 항의때문이었다. 그는 인터넷으로 세제와 수세미를 여러개 구입한 후 어정쩡한 자세로 창문을 한 개 두 개 닦기 시작했다.

한 손은 방쪽에 두고 발을 창턱에 가로 두고 세제를 미지근한 물에 풀어서 수세미에 적셨다.

그 자세는 결국 자신이 거부했던 세상에 대한 항의처럼 읽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창문에 잔뜩 눌어붙어 있는 새똥때문이었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잠시 기력을 잃은 사이에 그 적들은 엄청난 양의 배설물을 그의 닫힌 창문으로 투척했던 것이다. 그는 분노했지만 억지로 가라앉히면서 천천히 그것들을 닦기 시작했다.

천천히 닦아나가면서 그는 일말의 선의 경지에 도달했다.

왼손으로 다섯 번, 오른손으로 다섯 번, 연인의 등을 쓰다듬는 심정으로 그는 천천히 고동색 격자무늬 나무틀을 닦았다. 엄청난 양의 먼지와 함께 수세미에 뭔가가 묻어 나왔다.

반짝거리는 어떤 것이.

반짝?

그의 신경회로가 잠시 밝은 빛을 내뿜었다.

그것은 황금과 닮아 있었다.

포수로 일했을 당시에 박제취미로 인해서 그와 긴 고객 관계를 유지했던 보석상이 그에게 황금을 식별하는 법을 가르쳐줬던 기억이 잠시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자는 결국 오래된 연락처를 뒤져 보석상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쉽게도 황금은 아니네.”

 

그는 낙담했다.

 

하지만.”

 

보석상은 오랫동안의 노련한 장사꾼이었다. 그는 잠시 혀를 말면서 어떡하면 이 불쌍한 남자를 자극하지 않고 보석을 손에 넣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결국 오랫동안의 우정을 위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황금보다 더 좋은 물건이지.”

 

?”

 

자네도 알잖는가. 특정 해초류를 먹은 특정 부류의 새들은 순수한 에너지 자원으로 쓸 수 있는...”

 

“......”

 

남자는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 있어서 새란 증오해 마지 않을 종들이었다. 특히나 그 배설물들은.

 

창문을 새로 달아줄테니 저 창을 내게 통째로 넘기게. 어떻게 하다가 저 물건들이 이 창문에만 가득 붙어 있는지 알 수가 없군.”

 

“.....”

 

황금보다 더 나은 물건이라지만 그는 굉장히 낙담했다.

적에게 동정받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일생에 새는 증오해마지 않을 존재였고, 박제당해야 마땅할 생물이었다.

그것들이 새끼를 까고, 날아다니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그와는 상관없는 일들을 마구마구 자신의 창문 밑에서 벌이고 있다니 생각만 해도 우울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잘못하면 건물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산을 거의 다 써가고 있었던) 남자를 구제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자네도 창문 청소하기 싫을 거 아닌가.”

 

남자의 마음의 빈틈을 예리하게 읽은 보석상의 말에 그는 항복하고 말았다.

3일 뒤 인력공사에서 그의 창문 8개를 떼어가고 새 창문을 달아주었다.

남자는 다시 방안에 틀어박혀서 창문 닦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인터넷으로 의식을 해결하고, 증오스러운 새들을 언젠가 쏴버리기 위해서 총을 품에 안고 기름칠을 했다.

물론 그건 꿈에서만 가능할 일이었다. 조권이 신성하게 수호되고 있는 이 나라에서 가능할 턱이 있나. 그렇다고 언제까지 밥을 갖다 차려주시는 저 짐승들에게 증오심을 품는 것도 어려울 듯 싶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1년이 지났다.

보석상은 또 그의 보석을 채취하기 위해서 직접 납셨고, 전에 그랬던 것처럼 창문을 뜯어가고 새창문으로 갈아끼워주었다.

보석상은 남자가 한 곳에 곱게 세워둔 공기총을 보고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포수시절부터 집요하기 짝이 없었던 그 증오심을 아는 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새들은 그와 보석상에게 한재산을 불려주었다.

이제 남자는 새들에게 생계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는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장례비조차 그 새들이 마련해준다고 생각하니 죽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남자는 한가지만을 원했다. 어느 순간, 죽기 직전이라도 좋으니까 저 똥덩어리들을 다 쏴버리고 싶다고. 그게 남자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그가 세상에 나가지 않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하고 있었다.

물론 인터넷으로도 세상은 알 수 있지만, 그것 외에도 사람들과의 접촉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자료들도 있었다.

그런 모든 것에서 남자는 멀어져 있었다.

어느샌가 남자의 창문은 보물의 집합지로 알려져서 그가 모르는 사이에 어린아이들과 도둑들이 몰래 새똥을 긁어가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거의 대부분을 창문을 닫은 채로 생활했고, 새들과 도둑들은 주로 새벽이나 밤을 이용해서 실례를 했기 때문에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날 통장계좌에 문제가 있어서 직접 와야 한다는 말을 은행직원에게서 들었다.

그는 인간이 싫어서 은둔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새똥을 피하기 위해서 킬힐을 신고, 모자를 꾹 눌러쓴 채 거의 3년만의 외출을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은행직원은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녀의 스타킹아래쪽에 든 푸른 멍이 그걸 증명했다.

하여간, 은행에서의 에피소드야 나열해서 더 좋을 것도 없겠지만 남자로서는 그 배설물에 닿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사소한 오류가 있었고, 남자는 계좌의 문제점을 해결한 후 집으로 돌아가 그 빌어먹을 신발을 집어던지고, 모자를 제 자리에 걸었다.

그리고 창문을 무심히 응시하다가 <도둑님>과 눈이 마주쳤다.

도둑은 후다다닥 급하게 창문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그는 딱히 기분 상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적어도 자기 손으로 그 똥을 만지지만 않으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미묘했다.

그건 그의 <재산>이기도 했던 탓이었다. 만지고 즐길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건 그의 재산이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지키기로 했다,

그는 총을 잡고 총구를 밖으로 향하게 한 후 창문안쪽에(굉장히 더러웠다.)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었다.

 

<새똥을 긁어가지 마시오. 긁어가면 발포하겠음.>

 

그리고 그는 잠자리로 돌아가 꿈을 꿨다.

기관단총으로 창문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대는 자신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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