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난 너한테 숨기는 거 없다."

 

딱잘라서 길원택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애인한테 숨길게 뭐가 있겠니. 이 얼굴하고 손을 봐. 난 널 위해서 조명기구를 막기도 했어. 그 정도로 사랑하는데 도대체 뭘 숨기겠어?"

 

"그래요?"

 

차분하다기보다는 겁에 질린 듯한 승아를 보면서 다소 잔인한 만족감을 느낀 길원택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유령]도 거울 뒤에서 비밀문을 열고 바라보고 있었다.
길원택이 만족감을 느끼는 반면 [유령]은 다소 불안감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길원택과는 달리 마음이 보드라운 사람이었다.

 

"그 화상, 성형하면 고칠 수 있잖아요..."

 

승아는 한발짝 더 나갔다.

 

"왜 제가 뮤지컬에 데뷔했을 때 유나 언니랑, 윤선생님이랑, 권선생님이 돌아가셨죠? 그리고 2주일 전에는 중우씨 형 되시는 분이 돌아가시고..."

 

"우연의 일치야."

 

"우연이 절대로 아니에요."

 

승아는 더욱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벽면이 전부 다 거울이어서 길원택의 당황해하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비춰졌다.

 

"절 정말로 사랑한다면 진실을 말해주세요. 누가...무엇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무슨 이유로 절 지금까지 거둬주셨는지...범인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그것은 가면을 벗기는 것과도 같았다. 길원택이 바란 승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을 잘 듣고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돌.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목소리를 가졌던 그 아이.
다른 걸 바란적은 한번도 없었다.

 

"너 지금 날 못 믿는다는 거냐? 그리고 날 살해범으로 몰고 있어?"

 

"전 살해범이라고 이야기 한 적 없어요."

 

승아는 진실에 한번 더 다가가기로 했다.

 

"말해주세요. 도대체 무엇때문에 지금까지 절 이 위치까지 올려주신거죠? 그리고 왜 그 사람들을 죽인 거에요?"

 

"닥쳐!"

 

쫘악! 하고 무겁고 신경질적인 소리가 났다. 길원택이 화를 참지 못하고 승아를 때린 것이었다.

 

"왜 도대체 날 못 믿는다는 거냐.이 못된 것아. 네 말대로 내가 그 위치까지 널 올려줬는데 나한테 이런 모욕을 주다니! 여우같은 계집애같으니!"

 

그리고 길원택은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승아는 망연자실하게 있다가 핸드폰으로 얼마 전에 받았던 진중우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더 이상 희생자를 늘릴 수는 없었다.
[유령]은 지켜보던 것을 멈추고 길원택이 만들어준 비밀문을 열고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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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바스락, 신문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승아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진진우? 진중우의 형.
거기다가 시체가 발견된 곳이 바로 그 묘지였다.
경찰들은 그냥 자살로 처리했다고 하지만, 자살일리가 없었다.

 

"우리 데이트하자."

 

"네?...아, 네..."

 

"신문 보고 있었네?"

 

"아..."

 

"편지 왔더군."


겉표지에 적힌 이름. 진. 중. 우.
지금까지 길원택이 중간에 편지를 가로챘다는 걸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손수 길원택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그 도련님이 직접 오지 않는 걸 보니 뭔가 급한 일이 있는건가..."

 

"....."

 

떨리는 손으로 승아는 편지 겉봉을 뜯었다. 길원택은 예의상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그녀가 그 편지를 다 읽는 것을 기다렸다.

 

<난 약혼합니다.당신도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휘갈겨쓴 글씨로 적힌 그 내용.
뜬금없는 그 내용은 승아에게 1주일전의 그 사건과 연관되어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살인사건. 자살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그 사건.
그 것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었던 것이다.

 

"다 읽었어?"

 

그리고 길원택도 뭔가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분한 태도로 길원택쪽으로 돌아 섰다.

 

"도대체 뭘 숨기고 계시는 거죠?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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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주일 후  야산에서 진진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실종되어있던 기간동안 별의별 루머가 떠돌았다. 본래 가정적이지 않은 남자였고,마초적이기까지 한 남자였기에 주로 여자와 관련된 루머였다. 하지만 시체가 발견되었을떄 경찰은 기존의 이야기들을 모두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진우가 죽은 건 그냥 자살이라고 해라."

 

진진우의 아버지, 진성환 전 회장은  침통한 얼굴로 진중우에게 말했다.

 

"아버지! 이건 살인 사건..."

 

"경찰한테는 내가 이야기해놓았다. 살인이라는 증거도 없고...목이 졸렸는데, 지문도 남아있지 않았어. 나무위에 매달려 있었다고 하니까. 그냥 자살로 넘기는 수 밖에 없다."

 

"아버지!"

 

"중우야. 때로는 부딪히지 않는 편이 나은 부분도 있는 거다. 그냥 입다물고 가만히 있거라."

 

진중우로서는 감이 잡히는 부분이 있었다. 형의 시신이 발견된 묘지는 그날 윤승아와 자신이 갔던 묘지였다.  형이 자신의 뒤를 밟았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한 것이었다. 즉, 길원택이 몰래 자신의 뒤를 밟았고, 살인용의자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좋은 증거로 아버지와 형의 말의 부분이 일치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길원택..."

 

"됐다. 그 놈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도 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이 사건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냥 모른 척 해라."

 

진성환 회장은 그렇게 말한 후 끙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제부턴 네가 어깨가 무거워질게다. 그리고..."

 

그 말에 진중우는 뭔가 스윽하고 냉기가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되도록 빨리 결혼해서 흔들리는 집안을 잡아라. 진우 자살건으로 기자들이 먹을 거리 찾아 덤비기 전에. 대상자는 내가 미리 찾아놓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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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재벌이라고 하면 무척 깨끗해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엘리트, 상위 계층, 이슬만 먹고 살것 같은 그런 고고한 이미지.
진진우도 그런 놀음을 즐겨했다. 아니, 그 윗대윗대부터...
하지만 뒤에는 작은 기업을 하던 시절부터 알게모르게 조폭들과 손을 잡아 이권을 취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길원택과 [유령]은 그 일에 끼인 다수의 인물들 중 하나였다.

 

"오래간만입니다. 사장님."

 

분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떠는 [유령]에 비해 길원택의 목소리는 유들유들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절 피해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흥, ...내가 깡패에 불과한 네놈들을 피하긴 뭘 피했단 말이야."

 

공식석상이라면 진진우가 이들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깡패라뇨...."

 

[유령]이 분기를 못 이겨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동안 길원택은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대꾸했다.

 

"저흰 그냥 일반인일뿐입니다. 조금 험상궂게 생긴. 반질한 얼굴로 뒤에서 아리랑치기를 하는 누구들이랑은 차이가 있죠, 그 조직폭력배를 고용한 게 대체 누굽니까?"

 

"이놈들이!"

 

진진우는 감시하려고 왔던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분노한 [유령]의 손이 진진우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바둥거리는 진진우의 몸을 질질 끌고 공동묘지 저 한적한 곳까지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여전히 진중우와 윤승아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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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진진우는 무덤 저편에서 그 두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숨어있을 정도로 멀지만 그렇다고 내용을 다 못 들을 정도로 멀지도 않았다. 되도록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재벌 후계자님은 억지로 몸을 구부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설명 좀 해줘. 날 아직도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해줄 수 있잖아. 항상 날 피하려고만 들어. 요 최근에 계속. 편지도 보냈는데 답장도 없고..."

 

"편지라니?"

 

"편질 못 받았다는거야?"

 

"아이돌이 편지 챙길 정도의 시간은...아..."

 

그제서야 승아는 그 편지가 누구 손에 의해서 정리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멀리도 갈 것 없는 단 한 사람.

 

"도대체 왜 그 남자한테 매여있는거야? 기사대로 하자면 내쪽으로 와도..."

 

"정말 네 소속사가 맞는 거야?"

 

그녀의 말에 중우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니. 하지만 내 이름으로 운영될 회사야.그러니까 너 하나쯤은..."

 

"난, 네 소속사에 가지 않아."

 

"왜!"

 

급기야 중우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 남자는 비뚤어졌어. 그런 놈이랑 함께 있다가는 너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세상에 팬이 보낸 편지를-그 남자는 날 팬으로 알테니까-일괄 수거해서 버리는 인간이 어디있어? 나하고 같이 일하자. 우린 옛날부터 친한 친구였잖아."

 

"......"

 

승아는 조심스럽게 묘지의 석판에 손을 갖다댔다. 차가운 감촉, 덤덤한 감촉은 그녀에게 길원택을 생각나게 했다. 그와 키스할 때조차도 감각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감각은 차가워졌지만, 그녀를 향한 그의 감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화상입은 쪽의 피부는 더욱 뜨거웠다. 스튜디오에서 순백의 웨딩 드레스를 입고 노래할 때 보이던 그의 미묘한 떨림. 거부하고 싶지만, 우선은 그녀에게 그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은 길원택.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난 그 분의 노래로 살아. 알지? 소속사가 아무리 잘해도 곡을 잘 받지 않으면 살지 못해. 대표님은 그 모든 걸 해결해주시는 분이야."

 

"거짓말 하지마!"

 

중우는 자신의 맘대로 승아가 움직이지 않자 발칵 화를 냈다.

 

"넌 아이돌일 뿐이고, 그 사람은 그냥 사장일 뿐이야. 그저 한창 때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것 뿐이라고."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아버지의 발작 이후, 아버지는 병원비를  더 낼 형편이 없어서 병실 한 구석에서 퇴원만 기다리고 있어야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었던 탓이다.
진중우의 집이 부자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고, 그래서 소녀는 자주 병원에
병문안 하러 오는  그 아버지에게 부탁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긴, 그 부자는 억지로 병문안을 오는 것 같았으니까. 오는 목적도 한결같았다. 중우와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서.
그러던 어느날, 무명의 독지가로부터 병원에 결제가 끝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급히 수술날짜가 잡혔지만 수술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승아는 그때 독지가가 보내준 쪽지를 잊을 수가 없었다.

 

[네 목소리가 천사같아서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거야.]

 

그리고 그 이후부터 승아는 마음 속에 항상 음악을 꿈꿨다.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대표님은..."

 

"왜 내 앞에서 그 사람 편을 드는 거야."

 

"....넌 부잣집 아들이야. 나보다 더 좋은 여자들도 주변에 있을 테고...그래 넌 제대로 봤어. 난 대표님을 사랑하지 않아."

 

그 말에 한쪽 켠에 있던 [유령]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내 꿈은 훌륭한 가수가 되는 것이고, 대표님이 함께 있다면 우리 둘은..."

 

길원택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드디어 승아가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 준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사랑같은 거 안 받아도 좋았다. 미움을 받아도 좋았다. 그저 그 목소리로 지저귀는 작은 새가 떠나지 않기를. 그저 바랄 뿐이었다. 옛날에 병원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지. 넌 정말 천사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구나... 돌아가시기 전에..., 날 도와주신 그 분도 그렇게 말씀하셨지...넌 꼭 노래를 하거라. 그래. 이 길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자, 이게 무덤앞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야."

 

진진우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무덤가까지 와서 이야길 한다길래 무슨 이야긴가 했더니만, 겨우 아기 수준의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입을 겨우 틀어막고 보디가드들이 기다리는 차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의 바로 뒤에 있던 [유령]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니,넌..."

 

"참 오래간만이군요. 사장님. 근 10년만이던가요...밀수 사건이 있고 나서..."

 

목소리를 확인 하고 나서 진진우는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하지만 [유령]과 길원택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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