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제공의 첫 딸이다. 제공에게는 다섯명의 딸이 있었고, 모두 한 모친 밑에서 태어났다.
제공에게는 정부인 밑에 세 아들이 있었지만, 기실 지금까지 유명한 것은 아들들이 아니라 딸들이었다.
다섯딸 중 두 딸이 황제에게 시집가고, 나머지 두 딸은 제후에게 시집갔고, 한 딸은 일찍 죽었는데 제공의 가장 사랑하는 딸이었다...

이제 나는 제공의 죽은 딸, 만인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았던 딸 저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녀 이외에 어느 누구도 황제에게 일지화라는 명을 받지 못했고, 어느 누구도...그녀 이상의 자매들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중략)

“오,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보희의 남편인 우공자가 지희의 남편에게 물었다.

“잘 지낼 수 있겠나? 자네라면?”

지희의 남편, 자공이 나달나달하게 닳은 책을 들이밀면서 꾸짖었다.

“어떻게 이게 자네 방에서 나오나.”

“오...무슨 책입니까?”

“빨간 책이잖나! 자네 출세한다고 하지 않았나? 약속 지켜야지!”

“...에? 에이~ 그 정도는 좀 참아주시죠...저도 노력 중입니다. 보희가 아직 입덧이 심해서...”

“입덧 심한 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가. 망측하게! 당장 버리게. 자넨 옛날 이야기도 모르는가! 아니 내가 버리는 게 낫겠군!”

자공은 시녀에게 나무곽을 가지고 오라고 한 후, 나무곽에다가 그 책을 넣고 노끈으로 질끈 묶었다.
그리고 시든 나무 밑을 삽으로 파 그 안에 그 상자를 넣어 버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나네.”

조그만 꼬마가 -유난히 푸른빛이 도는 머리-아장아장 걸어가다가 자궁에게 부딪혔다.
자공은 그 엄격한 얼굴에 웃음기를 띄면서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우희가 잠시 나왔나보군...그럼 민희도 깨었겠지?”

“아, 벌써 민희가 돌아와 있습니까?”

“폐하께서 혼례를 좀 미루라 하셨지 뭔가...아무래도 그림이 문제가 된 모양이야...”

“아아, 아무래도...”

민희는 저희를 너무나도 닮은 여인이었다.황태자 시절에 저희와 언약을 맺었던 그로서는 아무래도 혼례를 앞두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닮은 것이 외모라면 민희 이상인 여성은 어디에나 있었으므로 후궁에서는 민희의 후궁간택에 이모저모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일지화...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아무래도 어렵겠죠.”

“자네. 단호하군.”

“할 말 하는 겁니다.”

우공자는 그렇게 말한 후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늘 어두컴컴하고 구름이 잔뜩 껴 있는 이 궁중에 이런 하늘을 보기가 얼마나 오래간만인지...
그리고 그는 이내 발견했다. 파묻은 나무 아래를 호미로 파고 있는 민희를...

“으악! 처제!아니, 황후 마마!”

“네?”

 피로로 인해서 얼굴이 약간 홀쪽해진 민희가 생긋 웃었다.

“아직 혼례 올리지 않았어요. 형부!”

“아...아니, 그래도...거긴 파지...”

“파도 된다고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무 밑을 민희가 호미로 계속 팠다. 아까 전에 그 책 파묻은 자리를...
그리고 얼마 파지 않아 아까 전에 파묻은 목관이 나왔다.

“와~ 뭔가가 나왔네. 이거 누가 묻은 걸까...”

민희는 목곽을 열지는 않고 가슴에 포옥 안았다.

“뭐가 들었을까...”

봄이 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님인 황제 폐하 마음에 끼인 얼음이 녹아 없어지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돌아온 자신의 방 침대 위에 그 목곽을 얹어 놓았다.

———————————————————————————————————————————
황제는 잠이 오지 않았다. 황후 간택을 앞에 두고 한 선택을 어리석다 생각지 않았다.
자신은 언제나 맑은 지성과 결단력을 갖춘 사내라고 자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처음으로 자신이 바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저희...-

저희가 죽은 후 7년이 지났다. 그리고 자신이 황제가 된 지 이제 2년...
그때 그녀를 왜 그곳에 불렀던가? 괜한 질투심때문에?
그리고 그 이후에 민희를 보았을 때 왜 저희 생각이 났던 것일까...
자매라 얼굴만 닮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 건만...

-나의 일지화...-

간택 성적은 훌륭했다. 저희가 성적으로는 뒤질정도로.
하지만 민희를 보는 내내 괴로웠다. 저희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고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귀에 막막하게 달려왔다.

-저하 이제 놓아드릴게요...-

사냥터에서 그녀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날 그녀는 사냥터로 가는 걸 내켜하지 않았다.
그 사지로 데려간 것이 자신...

민희를 보면서 저희 생각을 안 할 자신이 자신에게 있는 것일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호롱불을 끄고 예전에 자신에게 그녀가 주었던 그림을 꺼냈다.
언제, 어디든 그 그림 찾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았다.
한때 도화서에서 그림을 했던 저희는 그림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불태워야해...이제 새 사람이 들어오는데...-

“태워야지...”

황제는 휘청휘청 일어나 그림을 불에 댕기려 했다. 하지만 이미 호롱불은 꺼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고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찢으면 되겠군. 갈갈이 찢은 후...태우는 거야...-

하지만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그림을 잘 말아 서안 아래에 놓았다.

“자기 얼굴을 원 실력대로 그리기만 했어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때 재즈를 이해해보려고 음원을 엄청나게 구입했던 적이 있다. 아마 이 블로그 어딘가에 그 관련 글이 있었던 듯도 한..;;;;;;지금은 글들이 쌓이고 쌓여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오늘 윤광준님의 마이웨이를 기돈 크레머의 바흐 파르티타를 들으면서 읽고 있었다.뭔가 안 어울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 장이 재즈에 대한 장이었고, 난 그걸 한참 필사 중이었다.
그래...재즈를 들어볼까?
그전에 틀었던 것이 힐러리 한의 바흐 연주였고, 그 다음이 기돈 크레머였으니...
뭔가 힐러리 한은 울퉁불퉁하게 느껴지고, 기돈 크레머는(나는 그의 연주와 잘 안 맞는 듯 하다...항상 이렇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그때 내 손가락이 유튜브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를 친다.
아, 나오네. 카인드 오브 블루.
처음부터 끝까지 담배냄새 날 것 같은 이 음악이 귀를 부드럽게 감싼다.
재즈 담배냄새 난다고 싫어했는데, 이런 건조한 마음에(음, 요즘은 거의 그런 듯. 개인사도 조금 꼬여 있고 해서...클래식은 마냥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가 보다.)내 생각에 약간 꼬인 데이비스가, 역시 꼬여 있는 내 마음에 꼬불꼬불 들어온다...담배연기 마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고모 할머니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사나이, 진기혁은 뉴스를 보면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적어도 그 작자가 머리를 때릴 때는 열을 받아서 확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막상 부딪친 대상이 자기 생각보다 선량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이 드는 것이었다.

“어떡하죠? 형님?”

그의 옆에 깡마른 친구 하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 일의 핵심. 머리가 지나치게 좋은 대학생인 그는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뿐만 아니라 민시길을 추락시킬 일을 하나하나 계획 중이었다. 

“그냥 포기할까? 지응아?”

현지응, 현재 폐렴을 앓고 있는 이 병약한 대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떻게 이제 와서 그럴 수가 있겠어요.”

“문서 위조는 큰 죄야...간지용씨는 가능하다고 했지만...선동만 하고 자기는 쏙 숨어버리면...”

“죄라는 걸 어디 제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제 와서 피하면...”

두 사람의 숙덕거림에 안에서 자고 있던 누군가가 잠꼬대를 했다.
이곳은 현지응이 묵고 있는 대학교 기숙사로, 6개월 전에 진기혁은 등록금 미납으로 제적되었다.
그는 원대한 꿈을 꾸는 법대생이었는데, 단지 몇백원의 차이로 제적당한 것이 마음에 계속 걸려 간지용의 수작에 걸려든 것이었다.

-자네 돈이 급하게 필요하다면서-

진기혁과 지용은 지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벌써 제적당...-

-그 이야기도 들었었지. 근데 자네 어머님이 자네를 사생아로 낳았다는 게 정말인가?-

그건 어머니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그림자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선배님이라도 그렇게 말씀...-

-아냐. 모욕하려는 게 아니니까 잘 듣게. 좋은 기회가 생겼어.-

그러면서 간지용이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조사해본 결과 진기혁의 모친은 기록상 모친으로 되어 있지 않다. 그 당시 어머니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부친의 호적에 들어있다고...
그런데 그 부친은 민시길의 조부 민주선의 양자로 들어있었을 뿐만 아니라...(다만 곧 파양되었으므로 원래의 성인 진으로 돌려져 있었다.)고모할머니와 민주선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므로 기록상 진기혁의 부는 그저 그 고모할머니와 민주선간의 불륜관계를 속이기 위해서 들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진기혁은 결국 민주선의 아들이자 고모할머니와 아들이라는 그런 이야기...

-그러니까 자네의 친어머니는 여소장의 고모할머니라는 이야기지.-

-하지만 문서가!-

-문서가 무슨 문제인가? 아니, 문서로 인해서 진실이 밝혀질텐데 말이야!-

그렇게 지용이 문제들을 다 해결해주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가 진짜로 결혼식때 돌려주겠다고 했단 말까지 안했어도...”

진기혁도 정의를 추구해 법대를 들어갔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정의파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나온 것도 다 대학등록금은 모자라서 그런 것인만큼...이 일에 대해서 어느정도 책임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뉴스에 커다란 글자가 떴다.

-문화계의 큰 별 피습당하다. 간지용 백작 사망-

-현재 피습자를 추적하고 있음.-

“형!”

현지응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질렀다.

“이런!”

진작에 일을 저질렀어야 했다고 생각하면서 현지응이 진기혁을 불렀다.
진기혁은 차라리 포기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가 지용이 저지르려고 했던 일을 막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들이 하려던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다...
불안감에 기혁은 천천히 입에 담배를 물었다.

“지응아.”

그리고 그는 천천히 말했다.

“민시길 백작이 알고 저지른 일이 틀림없어. 그 맑은 얼굴 어딘가에 날카로운 통찰력이...”

“그러면 우리가 먼저...”

뒤를 치자고 말하려다 현지응은 누워있는 외국인유학생이 신경쓰여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짐작할 수 있었던 기혁은 고개를 저었다.

“ 그 친구를 만나야겠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구진은 돌아오자마자 원망에 가득찬 다희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원망...그렇다. 원망이다.
구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희를 몇 년이나 지켜봐온 그로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무언가가 그 시선에 있었다.

“도대체...”

다희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당신 날 사랑하긴 하는 거야?”

“.......”

이 상황에서 쏘아보아야 할 것은 자신이다. 구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방에 들어섰을 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영역을 침해당한 짐승이 그런 것 처럼.

“내가 할 말인데.”

구진의 말에 다희는 눈에 살짝 티슈를 갖다댔다.

“내 영역에 다른 놈을 들여놓고 네가 할 말이라는 것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개가 그를 향해서 날아갔다.

“간지용을 죽여버렸어야지! 네가 한다는 게 고작 몸조리 잘해! 그 말 뿐이라면...난 ...차라리!”

“...죽었다.”

구진은 조용하게 대꾸했다.

“네가 원하는대로 멱을 따다 바치지 않아서 유감이겠지만...우연의 일치랄까. 그 놈 죽었다고.”

“간지용을 방에 들였다고 그런 식으로 나한테 말 한 거야? 그런 거야?”

“...그 놈 죽었다고. 그리고 내가 말 하는 건 그 놈이 아니라 시길이다. 민시길 백작.”

그리고 구진은 천천히 누워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틀림없이 울었구나. 그리고 전화해서 그 놈에게 오라고 징징댔겠지.”

“...어...정말 죽은 거야...그 사람?”

“텔레비전 틀어서 직접 봐.”

구진은 그렇게 말한 후 가정부에게 아까 전의 그 칼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정확히 4분 후 잘 닦인 칼이 그녀 앞에 놓였다.

“이게 내가 버클 사이로 찔러넣은 칼이지.”

“...도...도대체 뭘 한 거야...”

“난 깊게 찔렀는데 그 놈은 모르더군...그냥 지나갔어. 워낙 폼 잡느라 이것저것 껴입는 인간이니...”

그 말에 다희는 질린 얼굴을 하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방금 텔레비전에 지용의 시체가 나왔다. 모자이크가 심하게 되어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용을 보고 자란 그녀는 단번에 그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난 이런 남자야.”

구진은 그렇게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다희에게 이렇게 들렸다.

-난 언제고 너도 죽일 수 있어. 날 배반하지 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설한은 객잔의 3층에서 아무렇게 나무를 깎고 있었다. 벌써 이 객잔에 묵은 지 3일째다. 갈가마귀가 도착한 이후로 사촌 오라비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그녀는 초조해졌다. 황제에게 인가를 받으려면 하루가 다급한 이 시점에 그는 황제조차 무시한 것이었다.

“오라버니.”

“왜.”

설한은 무뚝뚝하다 싶을 만큼 대꾸한 뒤 한빙의 손을 잡았다. 

“어머.”

한빙은 잠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도 참...제 마음 다 알면서...”

그러면서 그녀는 객잔 1층으로 그를 확 밀어버렸다. 물론 2층, 1층에도 사람들은 많이 있었기에 그 남매의 만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엎어지고 자빠지고 했다.
설한이 뒤집어지면서 엎은 상에는 다름 아닌 비밀리에 궁에서 나온 사관이 하나 있었다.
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식사 중이었는데, 어지간한 미식가인 듯 이 객잔에서 낼 수 있는 모든 음식이 다 차려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떨어진 설한을 팔을 벌려 받아서 세워놓고는 여전한 얼굴로 식사를 했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

한 무사가 소리를 질렀다.

“객잔에 무림인이 묵고 있다는 걸 안다면 이런 장난질을 치지 못할 텐데. 매운 맛을 볼 겐가?”

“...잠깐.”

모자를 쓴 남자가 그를 제지했다.

“형씨는 뭐요! 날 내버려두셔! 호된 맛을 보게 해 줄 테니! 그러고보니 당랑적파가 객잔에만 들어오면 소란을 피우는 자들을 현상금을 매겼다더니만, 어째 비슷해보이...”

“조심하는데 좋을 게요. 당랑적인지 뭔지 하는 자들도 뭔가 잘못 알고 있군.”

그 얼굴 가린 사나이는 허리에 두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다. 오랫동안 입어 마치 피부같은 느낌을 주는 녹의에 검자루는 하나는 황금, 나머지 하나는 벽옥으로 되어 있었다.

“흥! 보아하니 검 좀 쓰나본데...”

스릉.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 듯 무사가 검을 뽑아들었다.

“검 쓴다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얼굴을 가린 무사의 젓가락이 무사의 검을 튕겨냈다. 미처 공격도 하기 전이었다.

“어...”

“아, 당신은...”

설한이 그를 보고 반색했다.

한때 무림을 떠돌면서 무림의 헛됨을 개탄했던 무자무일옹 노유의 수제자 채미홍이었다.
회복 불가능한 부상을 당하고 연인을 잃은 후, 궁으로 옮겨 간 인물 중 하나로...
사실 그 실력보다는 보통 인간의 몸으로 대륙을 극북과 극남, 극동, 극서를 종횡무진했던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황제조차 만나보지 못한 빙궁을 세 번이나 방문하여 알현한 경험도 있었다.

“조용히 하게.”

미홍이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나야 조용히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

젓가락 신공에 잠시 기가 죽었던 무사가 다시 떠들어댔다. 그 통에 1층에서 찻잔을 머리에 뒤집어쓴 사람, 구운 돼지고기를 자르려다 돼지입에 손가락이 들어간 사람 등등.
모두들 소리를 지르면서 3층으로 뛰어들어갔다.

“앗, 안...돼...는데...”

설한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중얼거림이 맞아떨어지게 이내 3층에서 약 7명의 사내가 밖으로 던져졌다.
가슴팍에는 김이 모락모락나는 장이 붉게 맺혀 있었다.

“호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한빙신장인가...”

느긋하기 그지 없는 태도로 미홍이 말했다.

“3번 가봤지만 신장 구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로군...”

“오라버니! 여기도 글렀어요! 다른 객잔...!아, 미홍이다!”

외치던 그녀는 그대로 1층으로 발을 굴러 미홍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녀의 흰 옷자락이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저런, 오늘 하루에 공주님 안기를 두번이나 하다니...이 미홍이 운이 좋군.”

“...홍. 전 여자가 아니랍니다.”

설한이 낯뜨거운 얼굴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열이 가라앉을까 하는 심정에서 한 것이지만, 어설픈 연기로 보일 뿐이었다.
싸늘한 너울로 얼굴을 가린 그녀를 받아낸 미홍이 말했다.

“그래...마침 너희들을 찾고 있는 중이었단다...까마귀는 받았던 것이겠지?”

그날에 설한이 대꾸했다.

“반지를 가지고 왔더군요.”

“역시...너희들 일부러 이러고 다니는 걸 보고서야 감을 잡다니...이 패설사관 자리도 내놓아야 하나 보다.”

일부러...인가?
설한이 휙 하고 한빙을 쳐다보자, 한빙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고 그랬을 확률이 높았다. 한빙은 무림에 나온 적이 한번도 없으니까...
하지만 채미홍은 ‘일부러’ 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채미홍이 그나마 빙궁이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흔적을 따라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까마귀 이야기도 뭔가 불길했다. 그들이 모르는 불길한 뭔가가 있는 듯 했다.

“미홍, 혹시...”

그렇게 설한이 입을 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