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 여자가 당신한테 잘해줬기 때문에 사랑한 거였군요. 하지만 지금은?”

“…음…”

시길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폈다. 그리고 경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멀리 했다.

“아직은 뭐라고 이야기하진 못하겠어요.”

“그 이후에 그녀가 도망쳤기 때문에 마음을 잃은 건 아닌 가요?”

그랬다. 시길이 본격적으로 배우가 되고 나서부터 다희는 그를 멀리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어느 날인가. 시길은 다희가 눈물을 흘리면서 짐을 꾸리는 걸 보았다.

“누나?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냥 거기 있어.”

시길이 주섬주섬 옷을 챙기면서 일어나자 다희는 눈물을 닦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에요?”

“아니…아니. 아무것도 아냐. 좀 있다가 구진이 와서 날 데리러 올 거야.”

“누나!”

“멀리 가진 않을 거야. 우리 둘이서 소도시에 구경을 좀 가기로 했어…널 너무 혼자 놔두진 않을게. 넌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녀는 시길에게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노구진은 다희가 시길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걸 보고 팔에 힘을 줬다. 사파리 셔츠 차림이어서 그의 팔에는 근육이 두드러져보였다.

“가지.”

경직된 말투에서 시길은 구진이 자신을 그 순간 죽이고 싶을 정도의 마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알았어. 날 어디든 데려가도 좋아!”

“배우훈련 시키는 거야. 내가 너한테 맘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사람 심기를 건드리면 곤란해.”

구진은 딱딱한 어조였지만 그래도 진심은 아닌 듯 다희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고마워!”

다희는 구진의 이마에도 입을 맞췄다. 순간적으로 구진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렸다.

“좋아. 각오는 되어 있지? 가자고!”

그렇게 시길은 눈앞에서 다희를 잃었다.
노구진이 약간 눈살을 찌푸리면서 시길을 노려보는 것 같았지만 그건 어쨌든 좋았다.
그는 그저 이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내 마음을 어느 새인가 읽어…버렸어.’

배우가 되면 다른 사람들한테 쉽게 감정을 읽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오히려 너무 잘 보이게 되어버렸나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야 말았다.

그가 스위스에 있을 때 박사는 첫 대면에 이렇게 말했었다.

‘자넨 바보인가?아니면 백치인가?’

쉽게 속마음을 읽혀버려서 시작했던 취미가 오히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들키기 쉬운 종류의 막이었다니…


하지만 시길은 그 말은 경인에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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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옆얼굴 #유랑극단 #유랑배우 #옴므파탈 #팜므파탈 #창작 #불펌금지 #도스토옙스키모사 #백치오마쥬 #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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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다희는 히스테리의 절정이었다.
상대역을 다그치는 그 순간, 구진은 잠시 정신을 돌리기 위해 시길에게 갔다.

그날 마침 엑스트라 하나가 허리뼈가 나가는 바람에 시길이 잠시 대역을 맡았었다.
서 있기만 하는 대역이었지만, 묘하게 극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외모를 드러내진 않았는데도 그의 해사한 느낌이 도는 느낌?

“아주 애송이는 아닌데?”

시길에게 대역을 시켰다고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녀를 떠올리며 
다희를 상대하다 진이 빠졌던 구진은 시길의 입 여기저기를 툭툭 건드렸다.

“소리 한 번 내봐. 아, 에, 이, 오, 우.”

시길은 그대로 따라했고, 구진은 고개를 약간 삐뚤게 흔들었다.

“가만 있자…그럼 이건 됐고, 이거 하나 읽어봐.”

구진이 내민 건 극장의 습작가가 끄적이다가 던져버린 대본이었다. 내용이야 워낙 엉망이었던터라 신경도 안 썼지만 입안에서 구르는 맛이 일품인 건 인정한 대본이었다.

“……”

시길은 시키는대로 무감각하게나마 읽었고, 점점 읽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이내 장중하고 우아한 발음을 내기 시작했다.

“…야.”

구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솔직히 말해봐.”

“……”

시길은 그때만해도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몰랐던터라 그대로 시선을 저 멀리에 있던 다희에게 향했다.

“야, 다희 보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내가 너 다희랑 한 침대 쓴다고 질투하는 건 아닌 건 알지?”

“……”

시길은 눈치 볼 게 없다는 말에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뭘 말해야 되지요? 노형?”

“…이거 보게. 은근 백치미로 여자 하나 잡아 놓고 뭘 말해야 되냐고?”

“네.”

뚜렷한 발음에 조용한 판단력까지 곁들여진 목소리에 구진은 잠깐 따끔함을 느꼈다.

“너 이거 처음이 아니지?”

“…이거라뇨?”

민시길의 말에 그는 약간 빠르게 말을 꺼냈다.

“연기 처음이 아니지?”

“……”

그는 여전히 다희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날은 배도 고프고, 난치병도 도지고 해서…”

“…네 난치병 이야기는 다희한테 많이 들었어. 너 귀족이란 이야기도 오늘 저 쪽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해줘서 알았지. 민주선 백작의 손자라고…”

“……”

“왜 진작 이야기 안 했어?”

“…꼭 이야기해야 되는 거였나요?”

“마! 네가 진작에 이야기했으면 다희가 손이 까여가면서 감자 다듬기, 바느질하기 같은 거 인해도 되었잖아!”

물론 삯바느질이라던가, 감자다듬기 아르바이트 같은 건 일종의 시위같은 것이었다.
다희는 그 전에 노구진의 지갑을 통째로 들고 왔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게 살지 않아도 되었었다.

“…그건 잘못 되었네요…”

“연기공부는 도대체 왜 하는 거야. 귀족 주제에…밥그릇 떨어지게.”

“네?”

“아냐. 너 잘한다고. 다음에 한 사람 비면 너 땜빵으로 나가라.”

그렇게 이야기를 한 후 노구진은 일어났다. 그리고 가기 전 싸늘한 한 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그 날은 빨리 올테니까, 이제 다희 고생 그만시키고 떨어져 나가!”

그리고 그만큼 노구진의 후두부를 강타하는 수비도 돌아왔다.

“싫은데요. 전 저 아.가. 씨. 가  좋아요. 아주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여.인.이에요.”

그건 마치 셰익스피어의 대본의 어감을 살려 말하는 듯한 낭랑하고 격조있는 공격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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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길은 경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다희가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그는 다희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건 경인의 손을 만지면 만질 수록 확실해졌다.

“정말 그 여배우하고는 끝난 거죠?”

경인이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우린…”

그는 잠시 말을 흐렸다.

“한때 사랑했던 것 같긴 해요.”

“…한때?”

경인은 그를 추궁하는 듯한 어조로 되물었다.

“네. 한때. 날 거리에서 그녀가 구했을 때.”

“그 이야기를 좀 해봐요.”

경인의 말에 시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하국에서 스위스로 유학을 갔을 때 이야기였다. 유학이라고는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발육부진이었던 그는 뇌에도 다소 문제가 있었다.
나이가 10대 중반이었음에도 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몸상태도 허약 그 자체였다.
스위스의 모 박사가 그의 발육부진 상태를 개선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어 발음 상태와 심리는 최악에 가까웠다.

“날 좀 내버려둬!”

언제였던가…집안에서 후원이 끊기자 스위스의 박사는 그를 포기하고 대하국으로 돌려보냈다.
돈이라고는 얼마 가지고 있지 못했던 그는 어느 날 길거리에서 쓰러졌다.
우연이라면 우연일까…
노구진은 그날 다희를 거의 보쌈하다시피 해서 자신의 고향으로 데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만 치근거려! 그깟 다이아 하나에 내 맘이 바뀌는 줄 알아?”

“다이아는 영원한 거야. 그런 것도 모르나? 그래서야 영원히…”

다투던 두 사람은 잠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민시길을 발견했다.

“잠깐만.”

다희는 노구진을 쿡 찔렀다.

“차 좀 세워. 저 사람 좀 데리고 가.”

“…시체따위 태우는 취미는 없어. 도망가려고 그러는 거지?”

노구진은 그 당시에도 연출가를 맡고 있었지만 그다지 자신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연출가야 어쨌든 좋았다.
눈앞의 다희만 데려갈 수 있으면 좋았다.

“저 사람 태우면 같이 갈게. 병원에도 데려다줘.”

“…정말이지?”

노구진은 그제서야 민시길을  차에 태웠다. 민시길을 몸이 시체마냥 흔들리자 노구진은 고개를 저었다.

“죽은 거 아냐?”

“아냐,아직 안 죽었어. 그리고 이거 봐.”

나다희는 민시길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아름답잖아. 아름다운 얼굴이야.”

그때 여경인이 참견했다.

“당신은 쓰러져 있었다면서 그걸 어떻게 기억을 해요?”

“…음, 들었어요, 그땐 정신을 잃었는데도 다 들리더군요.”

민시길은 그렇게 대답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민시길을 데리고 갔다. 
나다희는 노구진에게 자신을 배우로 만들어주면 그의 뜻대로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노구진은 고개를 저었다.

“안해.”

“왜? 당신에게도 그다지 나쁜…”

다희의 말에 구진이 대답했다.

“초보자를 배우로 만든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나는 그런 거추장스런 짓은 안 해. 그리고 난 연출가는 계속 할 생각 없어. 재산이나 물려받아서 편하게 살 거야.”

“향상심도 없는 인간 같으니. 쓸모 없는 인간!”

“쟤 데려오면 뜻대로 해준다면서…”

약간 뒤로 물러선 듯한 노구진에게 나다희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당신은 아무 것도 아냐.”

“…뭐?”

“당신이 못한다면 난 할 수 있어!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알아보겠어!”

“이…이봐?”

그렇게 그녀는 민시길을 데리고 나갔다. 마침 그녀에게는 구진에게 받은 돈이 있었고, 그녀는 민시길과 살 집을 마련했다.
민시길은 그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말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계속 말을 걸었다. 마치 인형같은 그에게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신발과 양말을 신기고…
그런 와중에 민시길은 점점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때로 자신의 침대에 그도 같이 눕히고 잠을 잤다.
그리고…

“알았어! 네가 원하는대로 해줄게!”

구진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녀와 민시길을 데리고 갔다. 가출한 지 넉달만이었다.
그 사이에 시길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수준이었지만, 많은 발전이었다.
그의 발달 사항에 구진은 놀랐지만 아직은 수준이 아니라면서 그는 무시했다.
우선 그는 시길은 제쳐놓고 다희를 무대 위에 올릴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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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진은 늦게나마 여소장이 잠시 있는 호텔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소장은 기분 좋게 취해 있었고, 그가 부르던 나다희의 후견인은 도착하지 않았다.

“어서 오게. 연출가 선생.”

여소장은 다소 어색한 미소를 띄우면서 그에게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지. 우린 구면 아닌가? 안 그래?”

다희의 후견인이 잠시 마음이 다희에게서 떠났을 때 한번 만난 적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구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 날 위스키를 코가 삐뚤어졌다 마셨던 탓도 있고, 다희 문제로 아버지와 절연한 날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 내가 부르긴 했지만 자네가 온 이유는 잘 모르겠군.”

소장의 말에 구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사모님이나 곧 오실 분의 의도가 좀 더 많을…”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벨이 울렸다.

“자네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온 모양이군. 사내들끼리 사내들 다운 결론을 내도록 하세.”

문이 열리고 준수하지만, 예전의 예리한 수려함은 한결 가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약간 탈모가 된 앞머리에 붉은 콧대, 부드러운 눈동자를 한 남자.
나다희의 후견인이던 간지용이었다.

“어서오게.”

여소장의 말에 지용은 어깨를 으쓱했다.

“담판짓자고 부른 건가. 자네.”

그 말에 여소장이 피식 웃었다.

“아니. 뭐 그렇게 심각할 거 까지야 있나…우리 경인이가 자네랑 나이 차도…그리고 그 여자도 그렇잖은가…”

“날 따돌리고 그 앨 차지할 생각인가. 여소장. 자네 부인도 눈치는…”

지용은 그 말을 하고 난 후에야 노구진을 보았다.

“아하! 요즘 다희한테 열을 올린다는 사람이 저 친구군! 아니, 바보라는 소문이 도는 그 배우인가? 이거 술을 좀 미리 먹어서 시야가 잘 보이는군.”

지용은 그러면서 신발을 벗고 주머니에서 여송연을 꺼내서 피웠다.

“아무래도 맨정신으로 그 이야기를 듣긴 그래서 말이야…”

“다희는 제 여자입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구진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그저 그 여자를 건드려 볼 생각이시라면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다희는 제 여자입니다.”

“…뭔 소지나가는 소리를.”

욕지거리를 하면서 지용은 타구에 침을 뱉었다.

“애초에 내가 후견인인데 자네가 뭔 권리로…더더군다나 다희는 자네가 아니라 민시길을 더 좋아하지 않나. 소문이 그렇게 나있던데? 전하께서도 내게 두 배우의 열애설을 물어보실 정도이니.”

구진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다희는 후견설정이 끝나는 성인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때 구진이 그녀를 납치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민시길이 길에 쓰러진 것을 본 다희가 그에게 부탁해 그때부터 세 사람이 함께 했던 것이다.

납치였지만 정작 납치당한 것은 구진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의 영혼은 다희에게 걸려 있었다. 납치당할 여자도 아니었고, 납치할 수 있는 여자도 아니었다.

“당신은 그 여자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구진이 차갑게 말했다.

“예전에는 당신하고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가 없어지면 당신은 그때 그녀를 버렸듯이 또 버리시겠죠.”

“……”

“저는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겁니다. 뼈가 드러나서 흉하더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죽음당해 시체만이 제게 돌아와도 전 절대로 그녀를 버리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 여자의 전부입니다.”

“민시길과 대결해도 말인가?”

“그 친구는…”

노구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독기 어린 눈을 지용에게 한번, 소장에게 한번 보냈다.

“제 상대가 못 됩니다. 설마 덤빈다면 얼마든지 상대해주죠. 죽여버릴 겁니다. 그 여자 앞으로 가는 길을 막는 모든 남자들은 제 손에 죽을 겁니다. 절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다희를 제 허락 없이 데려갈 수 없을 겁니다. 그녀는 제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그 친구를 재활시킨 건 자네라던데…그런 배우로 키워놓고도 아깝지 않나?”

“…더 이상 할말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왔으니 전 가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지용과 더 이상 대화 나눌 필요도 없다는 듯이 구진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그때 여소장이 그를 불렀다.

“여보게.”

“……”

노구진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더 이상 그 눈빛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안개같이 흐릿한 그 시선은 그가 나다희라는 마약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는지는 알려주었다.

“다음 자네 연출작은 수도에서 하는가? 이번 마지막 공연이 내일이지?”

“…한동안은 연출 없을 겁니다.”

구진이 말했다.

“다음 작품도 아직 정해진 거 없습니다. 왕립 극단에 연출가가 저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음 연출때는 수도에서 한번 보도록 하지. 잘 가게.”

구진이 나간 후 지용이 투덜거렸다.

“저 천한 놈이 나한테 하는 말 들었나? 아무리 잘 나가는거라지만…”

“…자넨 너무 서둘러.”

소장은 느긋하게 호텔 미니바의 맥주를 꺼내면서 말했다.

“급할 거 없지 않나. 더더군다나 그 여자가 지금 와서 자네에게 들러붙으면 오히려 자네만 손해…”

“그 앤 내 재산이야! 내가 키웠네!”

“그 재산, 저 친구가 돌려줄 걸세…얼핏 듣자니 돈 많다더군. 더더군다나 전하의 총애도 받고 있다고…그리고 설사 저 친구 아니래도 저기 저 방에 있는 시길이도 고모 할머니가 따로 챙겨줄 증여재산이 있다고 하니…자넨 손해는 안 볼거야.”

지용은 소장을 쳐다보았다.

“자넨 내 놓을 거 없고?”

“…흐.”

소장이 다희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안 지용의 예리한 반응이었다.

“포기가 빠른 건 내 재산이라네.”

“흥!”

#배우의옆얼굴 #소설 #창작 #유랑극단 #유랑배우 #불펌금지 #도스토옙스키모사 #백치오마쥬 #백치 #오마쥬 #팜므파탈 #옴므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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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날 사랑해?”

어느새 분장실로 들어온 노구진이었다. 단지 그녀의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지만 다희는 끈질겼다.
다희는 어느 순간 구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노구진은 조금 초조해졌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다희는 일부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태도로 그가 나가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사랑하지. 그러니까 팔 좀 풀어봐.”

다희에게 여러번 사랑을 고백했었지만 다희는 콧바람만 불 뿐이었다. 시길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조금 마음이 풀어지긴 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뺨도 맞을 뻔 했다.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여! 너도 다른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잖아! 내가 패물이나 좋아하는 여자로 보여!’

“어머, 기회가 여러번 있는 줄 아는가 봐. 자기는…”

“저기, 다희야…”

민시길과 같이 나가려고 했지만, 그 멍청한 놈은 이럴 때는 머리가 돌아가는지 그를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다희는 원래 좀 불안증이 심했다.
어린 시절 배우로 키워지면서 후견인에게 심한 꼴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일 이후로 후견인은 그녀에게 꼼짝도 못했고, 그녀는 한때 후견인과 결혼을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얼마 안 가 그녀측에서 후견인에게 파혼을 선언했었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의 연기력에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고, 자만하곤 했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자신의 연기력이라던가 외모에 심한 자괴감을 느끼면서 방에 혼자 틀어박혔다.
그걸 이때껏 조율하면서 함께 성장한 게 노구진이었다.

“여러 번 오는 기회가 아니야. 노구진씨.”

그 달콤한 말이 귀에 들어오자 구진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당연하겠지…물론 나도 그건 잘 알아…”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다희의 손을 풀었다.

왕립극장은 국내용이다. 더더군다나 왕립으로 되어 있으니 앞으로 먹고 살 길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구진의 꿈은 컸다.
국내용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 그의 뮤즈 다희는 더더군다나 보기 드문 하늘이 내려준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배우에게 외모만으로 다 해결되는 무대는 없지만, 타고난 몸매는 어느 정도 큰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발성, 연기력에서 다희가 문제가 된다고 해도, 발성은 타고난 소리통이 있으니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것이고…
연기력이야 계속 쌓아나가면 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가에 어느 정도 지지기반이 있는 장성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날 버려두고 가려고!”

다희가 은근슬쩍 벗어나려는 구진의 팔을 세게 붙들었다.

“안돼!”

여소장은 급수되는 그다지 높은 지위는 아니었지만 다른 장성급들과 귀족들과 만나는데 큰 도움이 될 인물이었다.
그는 더더군다나 아직까지 다희에게 맘이 있는 그녀의 후견인과 친했다.
그가 다희를 여전히 자기 여자로 하고 싶어한다는 걸 아는 노구진은 이번 기회가 그 후견인과 결판을 낼 중요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손 자국이 구진의 팔뚝에 엄청난 생채기를 냈다. 길게 기른 손톱으로 그의 팔을 긁은 것이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구진이라고 그건 참기 힘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다희야. 놔! 놔줘!”

“안돼! 그 남자랑 만날 거잖아! 안돼! 못 놔줘!”

다희의 히스테리에 구진은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직진이 우선이다.

“그래. 만날 거야.”

냉정을 찾은 그의 말에 다희가 잠시 멈췄다. 고장난 테엽인형처럼.

“방…금…뭐라고 했어?”

그녀의 의외의 반응에 구진이 당황했다.

“만난다고.”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세게 나가야 했다. 마음이 갇힌 다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 후견인이랑 만난다고.”

“미쳤어! 자기야?”

다희는 정신을 차리고 난 다음에 구진의 뺨을 주머니에 구깃구깃 넣어놨던 긴 장갑으로 세게 후려쳤다.

“안 미쳤으니 내 말 잘 들어.”

엄청나게 풀 스윙으로 갈긴 거라, 뺨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구진은 할 말은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네가 민시길을 좋아한다는 거 알아.”

“…뻔한 말 하지 말고 본론 이야기해.”

“그 후견인. 여소장의 친구인 거 알지.”

“…잘은 모르지만 그렇겠지.”

“그 남자가 사실은 여소장의 딸하고 결혼하려고 했어.”

“……”

“아까 전에 왔다 갔던 그 아가씨. 바로 그 여자랑.”

흥! 하고 그녀가 다시 콧바람 소리를 냈다.

“근데 고모 할머니라는 분이 위독하신데. 그 고모할머니가 시길이가 옛날에 스위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 시실이랑 여소장의 딸을 이어주고 싶어했대.”

“귀족이란 참 편리하고 좋네.”

비아냥거리는 말에 구진은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희가 서서히 진정한 것이다.

“근데 그 당시에 시길이 상태가 안 좋아서…놔두고 있다가 배우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생각한 거야. 재산도 증여하고, 둘이 결혼을 시켜줘야겠다고…이렇게 되면 그 후견인이 뭐가 되겠어.”

“…근데?”

“어쨌든 그 남자가 너하고 멀리 떨어지게 된 건 확실하잖아. 그래서 오늘은 찾아가서 결판을 지으려고 했지. 앞으로 잘 나갈 배우 인생에 초치지 말라고.”

“…씁쓸한 결말인데.”

어느샌가 구진의 팔을 놓은 다희가 말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아니, 모를 수 밖에 없었지. 잘 했어. 다희야.”

“아니, 바보야.”

다희는 그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넌 바보야. 노구진.”

“……”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구진은 안도했다. 자, 그녀를 떼어놨으니 얼른 정장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다희가 말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여경인씨한테 시길이랑 결혼하라고 편지를 보냈잖아…”

 “…너, 아직도 시길이를 포기 못 한 거야?”

구진의 말에 다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포기하고 말고도 없어. 당신도 알잖아. 우리 동거했던 거.”

“…알지.”

싸늘한 어조로 구진이 대답했다.

“너하고 그 놈하고 떼놓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지. 기억나지?”

다희가 분장실을 뒤지는 소리가 났지만 구진은 이미 초대고 뭐고 머리에 담지도 못한 채 주저앉았다.

“처음에 시길이는 발음도 하나 제대로 못 했잖아. 그래서 내가 걜 인간으로 만들었지.”

쿰쿰한 술냄새가 풍겼다.
그제서야 구진은 그녀가 분장실에 술을 숨겨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여자가 정말!

“술마시지마.”

그의 포기한 어조에 다희가 대꾸했다.

“조금 정도는 괜찮아. 줄까? 내 후견인하고 이야기하려면 웬만한 정신으로는 안될 테니까.”

“사양하지.”

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녀와 그는 오랜 세월 함께 해왔기에 한 공간에서 누가 옷을 갈아입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잘 갔다와…돌아오면 입맞춰줄게.”

“그거 고마운데 이왕이면 선불로 해줘.”

그러면서 그는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갔다올게.”

그녀의 입술에선 살짝 쉰 와인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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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진 ->노구진.
나스타샤->나다희
아글라야->여경인
미쉬낀 공작->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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