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도 주욱 비슷한 여인들의 이름이 나열되었다. 하지만. 그 여인들과 어떤 편지를 나누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들의 누드. 사진이 마치 예술품들을 진열하듯이 주욱 늘어서 있었을 뿐이었다.
설은 천천히 넘겼다. 조금 더 발전하면 그녀들의 몸을 결박하는 사진도 있었고, 꽁꽁 묶인 채로 채찍에 맞는 장면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마치 석고에서 태어난 것처럼 하얀 몸을 사진에 맡기는 것이었다.

걔중에는 그녀가 아는 인물들도 있었고(워낙 유명한 사람도 있었고)그녀가 모르는 유명인사들도 있었다.
수상쩍은 자살시도자도 있었으며, 끔찍하게 살해되어 발견된 사람도 있었다.
어떤 유부녀는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다가 유곽에서 거의 시체가 되다시피 해서 발견되기도 했다.
바로 그런 그녀의 사진도 있었다. 적어도 그 사진에 찍힌 순간만큼은 행복해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진실한 생을 살았으리라. 모자란 것을 채운 그 순간.
단지 하선생이라는 모르핀만 없었다면 결핍의 아픔은 모르고 살았을 터였다.

죽은 여인들은 마치 석고를 뜨듯이 하얀 물에 몸을 담근 채로 사진에 찍혔다.
하선생이 찍은 사진속에 그녀들은 일본 전통 가부키의 여인들이었다. 실제로 하선생이 그런 옷을 입혀서 찍은 것도 몇점이나 있었다. 그의 사진속에서 그녀들의 죽음은, 어둠이 아니라 성상화를 연상케했다.

그녀는 천천히 그 사진들을 응시했다. 그 남자가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싶어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아니 어째서 이 남자는 여자들을 이렇게 학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걸까...
마지막 장에서 그녀는 움찔했다. 마지막 여자는...
그리고 휙 하고 옆좌석을 돌아보았다. 한두는 달걀을 먹고 있었고, 하선생은 그녀가 그제서야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안심했다.

"홍..."

그가 부르기도 전에 그녀가 그의 얼굴에 그 책을 집어던졌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당신에겐 좋은 일 아닙니까?"

그녀는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욕지기를 억지로 참았다.

"당신이 쓰레기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런 짓까지 하는 사람인줄은 몰랐어요."

"뭘 그러는 겁니까. 내 요구에 응할 정도의 여인이라면 비슷한 사람이죠."

"그래서 당신은 그 비슷한 여자로 만드려고 내게 이 책을 보여줬나요?"

두 사람은 반도어로 마치 뺨을 서로 후려갈기듯이 대화했다. 반도어에는 조금 서투른 한두는 몇마디 정도 주워듣기는 했지만 별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톨스토이 성공했군~ 이 정도의 감흥 밖에는 없었다. 한두는 그녀가 그렇게 화를 낼 정도로 감정이 분명한 아가씨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신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아아, 기누코 말씀이군요."

그는 천천히 수염이 있었다면 쓰다듬었을 턱 부분을 매만졌다. 그 자세는 굉장히 거만해 보였다.

"원하는대로 해줬을 뿐입니다. 영감님이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불쌍해서 남겨두긴 했습니다."

"새어머니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에요!"

그녀의 외침에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내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편지를 당신에게 넘겼습니다..그 이후는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입니다..."

단지 당신을 마사코의 그림자로 볼 뿐이지만...

하선생은 책을 곱게 접어 가방에 고이 넣었다.

"기누코를 피해서 대륙행을 결정하는 건 위험합니다. 다행히 기누코는 비소중독이니,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비소중독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한두와 설의 눈썹이 한번에 치켜올라갔다.

"무슨 말이에요!"

"백작이 죽은 것도 사실은 비소중독이죠...기누코는 좀 까만 편이라서 화장을 진하게 했었고, 나랑 만날 때도 진주분을 바르고 나올 정도였으니까요...나는 좀 더 하얗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고 비소량이 높은 화장품을 선물로 줬을 뿐입니다. 기누코 옆에 있는 늙은 백작이니 효과는 더 강했겠죠."

법적으로 살인범으로 몰아넣기에는 증거가 약했다. 더더군다나 그는 대륙과 제국에서 유력한 글쟁이다.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어떻습니까?"

하선생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의 쪼그리다시피. 하면서  한두가 여유를 만들어주었다.

"나와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까?"

"내가 당신과 무엇때문에..."

"당신은 복수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고, 나는 ...당신에게 죽는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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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연 책표지에는 분홍빛이 채 가시지 않은 벚꽃잎이 붙어 있었다. 홍설은 자신도 모르게 표지의 꽃잎을 연분홍 손가락으로 스르르 스쳤다.
책장을 넘기자 아름다운 필체로 적힌 제국어 시와 반도의 시가 여기저기 필사되어 있었다.
노천명의 시도 있었고, 그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이육사의 시도 있었다.
그가 그토록 호언장담하는 그의 인생이 이 시들이었단 말인가...? 잠시 그녀는 의심했다.

하지만 첫표지의 벚꽃이 계속 생각나는 것이었다. 이 시들이 벚꽃이라고?
글자체도 우아하다기보다는 끝물이 다 되어가는 노숙한 꽃잎 같았다. 떨어질 때를 알았던 꽃잎들.
잠시 넘기면서 하선생이 있는 쪽을 살짝 넘겨다보았지만 하선생은 한두와 대화 중인지 심각한 얼굴로 둘이서 뭔가를 종이에 적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매끄러운 가죽 장정에 잉크가 뚜렷하게 선을 그은 종이.
만약 자신이 무사히 결혼을 하고 나중에 정착하게 된다면 이런 종이를 쓴 가계부를 쓰고 싶었다.
그녀가 그렇게 안도하면서 시가 적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마지막 페이지에는 몸의 왼쪽에는 한복을 걸치고 다른 반쪽에는 기모노를 입은 여인의 초상화가 나왔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김소월의 '초혼'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 꼼꼼한 사내는 그녀가 실재했던 인물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듯. 기모노 천 조금과 한복 천 조금을 붙여놓았다.

'누구일까?'

그리고 마치 미친듯한 사랑의 고백인 듯, 그 그림밑에 날려쓴 글씨가 있었다.
어느 쯔음엔가 그녀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으로 광포해진 듯, 사내의 손톱자국이 그 종이에 깊게 남아 있었다.
막 찢어내려고 한 순간에 억제했던 것일까...

이와시게 바카야로! 바카야로! 바카야로!!

일어로 미친 듯이 적힌 그 밑에 마치 커피를 엎지른 것 같은 자국이 있고...
그 밑에 미친듯했던 그 문장보다 침착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와시게 타츠히로(몰)
드디어 누이의 뒤를 따르다.
나는 그가 부럽다.

초혼을 할 수 있다면...
아니, 나도 저승으로 갈 수 있다면!
내가 그렇게 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건만! 바카야로 타츠히로!
내 손에 피를 묻히게 하다니...

그리고 그 뒷장을 넘기는 순간, 그녀는 알았다. 이것이 그의 진짜 고백이란 것을. 첫페이지부터 읽지 않았다면 별 거 아닌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의 책과 편지를 받고 읽었을 때 그 진면모를 알 수 있을까? 아마도 모를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나았으리라.

그녀는 두번째 장에 붙여져 있는 하선생의 사진을 보았다.
좀 더 젊었을 때의 사진으로, 지나치게 핸섬한 것이 부담스럽기는 했으나 절반쯤은 슈트의 힘이었다.
그는 지금은 좀 더 몸이 붙어 인상이 좋아졌지만 그 사진에는 턱이 지나치게 각이 져 있었던 것이다.
흑백이라 그 단점이 더 두드러져 보였다.

마치 명화의 한 장면을 흉내 내듯, 그는 후지산 위 구름 자욱한 가운데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당시 그의 연인인 듯한 게이샤 하나가 우산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림의 연인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 주고받은 엽서를 노트에 붙여놓았다.

미츠코라는 그 게이샤는 미모에 비해 속이 허한 사람이었는지 그저 짤막짤막한 날씨 이야기나 해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의 애정을 다소 부담스럽게 생각한 듯, 단나가 되는 것은 포기해달라고 적기도 했다.
하지만 하선생은 거의 전재산을 털다시피 하며 미츠코의 단나가 되었다.

미츠코의 마지막 편지에는 그를 원망하는 어조로 날 도망치게 만든 것은 당신이니, 날 원망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녀의 편지는 없었다. 
그리고 붙어 있는 대륙일보의 사진에는 애인과 동반자살한 미츠코의 최후가 찍혀 있었을 뿐이었다.
하선생은 매우 냉소적으로 그녀의 사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난 도망가는 미츠코를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죽였다. 이와시게 마사코에는 미치지도 못한 열화판이었으니...
증거가 없으니 아무도 모를 것이다. 더더군다나 함께 죽은 사람이 자신의 애인으로 알려져 있는 바에야.
완전범죄다." 

그리고 밑에는 그녀를 죽게 한 약물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확신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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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휴를 이용해 여행 및 쇼핑을 하려고 했으나 취소.
    그동안의 책지름으로 인해서 쇼핑할 돈이 없다...
    물론 통장에 돈이 있긴 하지만...(내 생각을 뛰어넘는 잔고...오오, 내 통장에 이렇게 돈이 있을 때도 있구나...)
    어차피 결제일이 되면 썰물같이 빠져나가겠지. 그리고 그동안 차는 가만히 있냔 말이지...;;;;;주유비 어휴...

2.  영화? 아가씨...내 기대와는 달라진 듯 해서 한동안 포기.
     나중에 사이트에 가격이 좀 다운되면 그때 보기로...
     '박쥐'같은 느낌이라...'박쥐'도 결국은 네이버에 올라온 뒤에야 봤는데 그때랑 감정이 비슷하다.
      영화 한참 막 극장에 걸리기 직전에 꼭 보고 싶었는데 그러다 넘어갔다. 조금만 기한이 지나면 보기가 싫어지니...나란 사람은...심지어 칸느에서 상을 탔을 때도 상 탄지도 몰랐다. 아, 이 무심함이여...

3. 책? 오자마자 인터넷질이니...;;;;;;;;;
    요즘은 책을 지르는게 일상이라...1과 같은 고민을 자주 하게 된다.
    옷이냐? 아니면 책이냐...
    다행히 화장품이냐? 책이냐?에서는 많이 벗어났다. 다만 화장품 지르는 것도 버릇이 되어서...꼭 화장한 게 티나지 않는 부분만 사들인다는 게 문제지...

4. 기계 부품 지르는 것도 장난이 아니다. 결국은 책지르는 것만큼이나 제지를 받았다.
    "도대체 그건 어디 쓰는 물건이야?" 라는 직설적인 물음...
     네...죄송합니다. 이건 아이패드에 쓸 신제품이에요....;;;;;;;;;;;;
     요즘 아이패드에 들이는 물품이 장난이 아니다. 이어폰 쓰다가 귀가 아파서 헤드폰으로 바꿨는데 주변 평은
     마치 하얀 헤드기어를 쓴 듯 하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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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주 아픈 편이라, 병상일지를 쓰는 게 좋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여간 며칠 전부터 숨막히는 증상이 생겨서 어제는 아예 일찍 누웠다.
모로 자니 계속 숨이 막히길래 그냥 똑바로 누워서(나는 평소에 모로 누워서 잔다...그냥 자려니 답답했다.)잠이 들었다...
5년에 한번 정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익숙하긴 하지만..그래도 답답하다. 빨리 나아라...

2.

어제는 배송된 도미니크 로로의 책을 읽었고, 오늘은 톨스토이 전기문 중 '부활' 부분을 읽었다.
톨스토이는 뜻도 모르고 존경하는 작가지만, 내용을 보아하니...성자하고는 거리가 조금 있는 분 인것 같다.
스토킹하는 재미랄까...일기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특히나 사모님(소피아)의 일기도 같이...
소피아와 신경전을 벌였던 체르트코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그 사람이 그렇게 오만해질 줄이야...(스포일러?)


3.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는 실험해볼 필요도 없는 것 같다.

4.영화 '아가씨'를 볼까 계속 고민 중인데...사실 보거나 말거나 구조가 내가 좋아하는 구조는 아니다...
   핑거스미스랑 비슷하게 가는 모양인데, 나는 핑거스미스가 전혀 재미있지 않았으니까...
   하정우가 재미있어보이긴 하는데 예고편에서의 일본어도 그랬고, 보고 온 사람들말로도 영~ 별로다 하니...
   난 일본어 대사를 꽤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일본어 발음 자체를 좋아하니까...-배우들이 일본어 발음을 잘 하는지 못하는지도 꽤 관심이 간다...

5, 라 벤타나가 신곡을 냈다. 바이올리니스트 구오(첼리스트던가?)의 왕좌의 게임 오에스티도 괜찮았다.

6. 죄송합니다. 친구 신청해주신 분 중에 페이퍼수가 적거나, 너무 최근에 만들어진 블로그 주인분들의 친구는 맺지 않습니다...죄송합니다.
기존분 중에서도 최근 북플 활동만 하시는 분들은 친구취소를 했습니다. 오랫동안 비워두신 분도 그렇구요...
죄송합니다...하지만 요즘 흉흉한 일이 워낙 많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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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분이 늘어났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내가 댓글을 잘 달지 않는 성격이라는게...
무뚝뚝하고 맘에 들어도 표현을 잘 안해서...
좋아하던 분이 친구추가를 해주셔서 기뻤다.

하여간에 오늘은 오전에 1일 1글을 쓴다.
내킬 때 써야지 아니면..
여전히 다자이 오사무의 쓰가루를 읽고 있고...(의외로 유쾌한데 놀랐다.-그리고 하필이면 산쇼다유를 언급하는 부분과 연결되어서 더욱 놀랐다. 하필 모리 오가이의  산쇼다유를 읽었던 게 생각나서...)아침에 성경-고린도전서 전체-를 읽었다.
가끔 이렇게 새벽에 깨질 때가 있는데, 대부분은 도로 잠들지만 오늘같은 날은 계속 깨있으면서 이 이북, 저 이북 읽어본다. 사놓은 건 많은데 막상 읽을만한 책이 잘 안 보이네. 진지하게 읽어야 할 책도 있고...

오늘 주문해놓은 도미니크 로로의 책이 온다. 그리고 내일은 톨스토이 전기가 오는 날이고...
어쩌면 알라딘에서의 마지막 주문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성격이 원래 그렇듯이 다음달이면 또 미친듯이 주문을 할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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