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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역에서 그 임산부는 남편과 함께 내렸다.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는 번화한 역이었다. 1등칸의 손님들이 비용일체를 대주겠다고 했으므로 역무원은 걱정없이 그 부부를 차에 태우고 떠났다.
1등칸의 손님들 2명이 내렸고, 홍설과 하 선생은 대화를 나눌 여유를 가졌다.

"아까...3등칸에서 왜 그러신 거에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궁금한 점이 생긴 터였다. 애정 이전의 궁금증.

"그럼 나도 한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네."

"왜 갑자기 도와줄 생각이 드신거죠?"

홍설의 질문에 우정은 천천히 가방 안에 든 책을 하나 꺼냈다.

"내겐 한가지 추억이 있습니다...갑자기 그 추억이 떠올라서 변덕을 부린 거죠."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목소리가 촉촉했다. 홍설은 그 목소리에서 막 태어난 아기가 함초롬이 눈을 뜨는 것을 떠올렸다.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홍설에게 막 태어난 인격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막 만들어진 순수한 영혼!
착각은 자유라지만 어쨌든 홍설은 그가 그 부드러운 부분을 처음 드러낸것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수녀원의 소녀들이란 건 도대체 무슨 이야기입니까?"

"전 학교를 18살에 졸업했어요. 그리고 여자학교에 다시 재입학했는데...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에 돈이 없다고 해서 수녀원에서 학교를 같이 운영하는 곳에 들어갔어요. 하지만...그곳의 아이들은 저처럼 윤택하게 살던 아이들이 아니어서, 돈을 대주는 남자와..."

"그만."

하선생은 말을 멈추게 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뺨을 때린 건 미안합니다."

무자비했던 따귀를 떠올리고 홍설은 잠시 침울해졌다. 그 순간, 그는 정말...수녀원에서 언젠가 보았던, 수녀원 학교의 학생이 스폰서에게 따귀를 맞던 장면을 떠올리고 말았다...

"전 당신이..."

그때 역무원 한명이 다가와 하선생에게 대륙어로 말했다.

"그 임산부, 종양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무사히 순산했답니다. 병원비를 대주셔서 감사하다고 방금 소식이 왔습니다."

"아...다행이군요."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홍설은 잠시 얼굴을 붉혔다.

"제가 한건 거의 없네요..."

"아니오. 당신 덕분에 병원에 가게 된 겁니다. 그 임산부는 말이죠. 1등칸의 손님들 대부분이 그리고 병원비를 대겠다고 했고...순산한 건 당신 덕분이죠."

딱 잘라 말한 하선생은 손에 들었던 책을 다시 가방에 넣으려고 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그는 자신의 일기장을 그녀에게 읽히려고 했던 참이었다. 한없이 순수한 여자.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녀의 마음에는...
 
"그런데 그 추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빈틈을 노리고 홍설이 치고 들어왔다. 하선생은 잠시 움찔했다.
"당신의 그 추억이라는 것이...왜 그런 행동을 하게..."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가 벽력같이 가방에 넣던 책을 손에 꽉 쥐었다. 보여주고 싶다는 감정과 보여주기 싫다는 감정이 그를 뱀처럼 감고 있었다.

"알고 싶습니까?"

마침 노부인이 식당칸쪽으로 자리를 옮긴 터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그녀쪽으로 바싹 갖다대며 조용히 말했다.

"다 읽고나면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그래도 좋다면..."

"......"

홍설은 고개를 돌렸다.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탓이리라. 하지만 그는 마치 악마처럼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숨결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위치였다.

"읽어주십시오...꼭 읽어주십시오...그리고...제..."

그는 그녀의 귓가에서 천천히 떨어지면서 마무리했다.

"마음이 얼마나 진실한지 알아주십시오. 홍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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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오마쥬 대상은 셜록 홈즈 시리즈에 한편 중 하나인 살인에 취미를 가진 한 귀족이 다른 귀족 여인들을 꼬여내서 결혼한 후 살인하고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하우정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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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부는 바닥에 누워 괴로워하고 있었다. 피같이 농도 짙은 땀방울이 여기저기 맺혀 있었고, 여인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가만히...가만히...우리가 왔어요."

제국인 의사가 제국어로 말하자, 그것을 노부인이 통역했다. 그녀도  제국어에 밝아 홍설이 나설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임부의 배를 어루만지며, 의사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음..."

워낙 다급한 상황인지라 의사 자신도 상황 파악을 못한 채로-그러니까 자신의 전문 분야를 잠시 망각하고- 따라온 것이었다. 그제서야 그 의사가 산부인과가 아니라 내과 의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뭐야! 우릴 우습게 보는 거냐! 장난하냐!-어차피 와줄 의사가 꼭 산부인과 의사일수만은 없다는 의견이 있자 가라앉았다.

"어쨌든 진통제가 좀 있으니, 우선..."

의사의 말에 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아이부터...
그러자 제국 의사가 말했다.

"이 상태라면 사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아이를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홍설의 말에 잠시 의사의 눈이 번쩍이다가, 이내 빛이 서서히 꺼졌다.

"나도 그러고 싶습니다만...워낙 상태가 위중하니...그리고 내 소견으로는-산부인과적은 아니지만- 이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복부가 팽만되어 있고, 만져보면 딱딱하게 굳어 있어요. 한번 저들에게 물어봐주겠습니까? 임신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의 말을 길게 통역할 실력은 없었기에 -노부인도 한두도- 홍설이 통역을 맡았다. 그녀의 말에 남편되는 사람이 떠듬거리면서 말했다.

"임신한 게 오래된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그래봤자 3주나 4주 정도지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옛날 귀인들은..."

"귀인인게 중요한 게 아니요."

의사가 잘라 말했다.

"아마 배 안의 대부분에는 아기가 아니라 종양이 들어 있을 겝니다."

"...선생님!"

노부인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그렇게...말씀을..."

"이 정도로 구를 정도면 양수라도 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산부인과 의사는 아니지만 그건 알겠습니다. 아이는 죽은 겁니다. 이제 좀 있으면 산모도 죽을 테니...죽는 그 순간만이라도 고통을 줄여줘야 할 겁니다. 모르핀이라도 있으면 좋을...아니!"

그때 하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정체를 알 리 없는 3등칸의 반도인들은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고...
홍설과 노부인은 어리둥절했으며, 의사는 그가 손에 든 것을 보고 외마디 말을 질렀다.

"선생! 그건 모르핀이 아닙니까. 딱 좋은 때에 갖고 오셨군요. 어서...어서...이리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정이 말했다.

"정말, 그 산모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겁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다정했지만 어쩔 수 없는 냉혹함으로. 우정이 말했다.

"그렇다면 편히 가게 해주십시오. 이 정도 양이라면 안락사는 가능할 겝니다."

"...안락사라니! 선생!"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진통제를 찾은 거 아닙니까?"

우정은 입을 악 물고 말했다.

"도와주려면 책임지고 끝까지. 아니면 건드리질 마시오. 제국 양반!"

하선생이 스스로도 제국인이라 자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제국의 의사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멍하니 있는 그를 보고 있던 우정은 답답한 듯, 이내 대충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의사를 밀어내고, 치사량의 모르핀을 넣은 주사기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충격으로 제지하지 못하는 순간, 혈관으로 밀어넣었다...
아니 밀어넣으려 했다. 홍설이 밀지만 않았더라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하선생도 여자에게 잔인해질 수 있었다. 그는 밀어내는 홍설의 뺨을 아까 전의 복수라도 되는 듯 호되게 갈겼다.

쫙!

 충격으로 홍설이 밀리는 순간, 다시 주사기가 움직였다. 그러나 무슨 뜻이 있었던지...치사량만큼은 아니었다.
잠깐 앞으로 정기적으로 주사를 하면 잘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하선생은 벌떡 일어났다.

"바카야로(바보같은 자식!)!"

그 말과 동시에 그는 차벽을 치면서 나가버렸다.
애초의 등장만큼이나 너무 뜻밖인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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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짓이요!"

뺨을 감싸진 우정이 외쳤다.
홍설이 가락지를 벗지 않고 때린 탓에 홍선생의 얼굴에는 가느다란 한줄의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성이란 게 없는 게요?아가씨?"

"제 이름은 홍설입니다. 굳이 당신 식으로 읽는다면 코유키라고 불러도 상관없겠죠. 1등 국민은 그렇게들 부르니까요."

홍설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확 열어젖히고 나섰다.

"무슨 짓이요? 당신이 왜 그리로 가는 게요?"

하선생은 처음으로 다급함을 느꼈다. 여자에게 뒤쳐진다는 느낌은 기분이 나빴다. 그저 애정의 대상이 아닌 여자로서의 대상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우정의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수녀원에서 임신한 소녀들을 돌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에요."

"수녀원? 임신한 소녀들?"

하우정은 자신에게는 익숙하지만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듯 반응했다. 마치 잠꼬대를 듣고 있는 것처럼.
그 말에 어리둥절한 건 한두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서 갑시다. 한두씨."

그녀의 말에 우정이 벌떡 일어났다.

"안 될 말이요. 전문가도 아닌 당신이!"

"어차피 도와줄 생각이 없는 1등 국민은 앉아 계시죠."

홍설이 대꾸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선생의 팬이라 자처했던 노부인도 벌떡 일어났다.

"확실히 그렇군요. 하선생님. 저도 마침 옛날에 많이 그런 일을 했으니 이런 일은 여자가 더 잘 할 겁니다. 편안히 앉아 가세요."

"감사합니다. 어머님."

홍설이 미소지었다.

"어머, 천만에요. 홍설양."

처음으로 노부인이 홍설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세 사람, 그리고 뒤이어 1등칸의 일본인 의사가 급하게 따라나갔다.

우정은 변절한 이래로 처음으로 철저한 고독을 맛보았다. 1등칸의 모두가 그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미안하오. 형님. 하지만...]

대장의 목을 따기 위해서 자던 대장에게 총을 쏘았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육혈포를 쏠 수 있지만, 첫발은 너무나 힘들었다.
독립군으로서 살다가 변절한 것이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 오로지 살기 위해서. 2등 국민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서.
그들의 시선에 맞추며 살다보면 언젠가는 좀 더 나은 삶이 올거라고...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말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기차에서 죽었지.]

그의 교수, 그리고 그의 사촌누이의 남편이 말했다.

[임신중독증인데, 억지로 기차안에서 엉뚱한 사람이 도와준다고 나섰다가 그만...]

 [...안됐습니다...]

단지 그말만을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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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일치되는 책들은 아닌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강렬하게 느껴져서 씀.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다 읽은 건 아닌데 동서출판사의 논리철학논고부분까지 읽었다.
수학이 나오는 부분부터는 띄엄뛰엄 봤는데 중간중간 나오는 부분은 거의 시라고 봐도 될 정도로 아름답고 강렬했다.
왜 오사와 마사치의 책의 힘과 함께 엮느냐고 하면 마사치 선생의 책의 앞부분에 [사태]와 [사건]에 대한 설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근데 우연의 일치인지 어제 논리철학논고에서 그 두개의 정의를 내려주는 부분이 있었다.
오! 신선하고 강렬한 느낌.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먼저 읽으니 이해가 더 잘된다.
오사와 마사치 선생의 책의 힘을 읽으실 분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부분은 읽고 읽으시길 강력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물론 나도 철학이나 사회과학하고는 담을 쌓았지만...가끔 이런 재미있는 경험도 있군요.
책은 확실히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연계가 잘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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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은 그녀가 돌아온 후 자신의 옆의 빈자리가 있다는 걸 깜박했다. 그러다가 1시간이 지난 후에야 한두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역에서 직원들이 그에게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그녀에겐 그보다는 한두가 더 친밀한 관계라는 것도 그의 부아를 돋구웠다.

"한두씨 어디 갔습니까?"

그의 질문에 여전히 성모송을 읊조리던 홍설이 성모송을 그만 읊고 그를 쳐다보았다.
말간 눈동자.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고요한 그 모습이 우정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걸 왜 제게 물으시죠?"

"두 사람이 같이 나가는 걸 봤으니까요!"

그의 말에 그녀가 피식하고 웃었다.

"팬하고 계셔서 잘 모르시는 줄 알았더니 보고 계셨군요."

그 표정에서는 조금이라도 하우정은 마음에 담고 있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는 어떤지 몰라도 우정은 감을 잡았다.
이 여자도 조금은 나를 신경쓰는군...약간이지만 가능성은 있겠어..라고.

"어디 갔습니까? 그 사람?"

"...3등칸에 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한 순간의 그 멍한 눈동자...그걸 보고서 하우정은 그녀가 처음으로 민족의 현실을 마주했음을 깨달았다. 그랬을 것이다. 계모의 계략으로 먼 곳으로 보내진 그녀는 귀족으로서의 교육만 받았을 것이다. 현실을 한번도 마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데려와야겠군요..."

"왜요?"

그녀의 반항기 섞인 말에 그는 마치 조카를 어르는 삼촌처럼 조금 엄하게 말했다.

"부탁받았으니..누군들 좋아서 그러는 줄 아시오?"

"남은 신경 안 쓰는 분인줄 알았어요. 오로지 글, 오로지 여자, 오로지 제국."

그녀의 말에 우정은 움찔했다. 그녀가 자신을 담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였던 걸까...

"나는..."

그가 말을 이으려한 순간 문이 열리면서 한두의 얼굴이 보였다.

"김군! 어디 갔었소!"

한두가 들어서자 우정은 그를 질책했다.

"3등칸이 다 차서...그것보다 1등칸에 의사 선생님 안 계십니까? 2등칸에도 없어서 들어온 겁니다!"

"의사?"

우정의 말에 한두가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초조한 얼굴로 외쳤다. 

"3등칸에 지금 임산부가 위험합니다! 의사 안계십니까!"

"조금 있으면 역이 나올 거요.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 걸 괜히 시끄럽게 하지 마시오! "

우정의 질책에 한두가 말했다.

"당신의 공상같은 글보다 더한 현실입니다! 도와줄 생각 없으면 방해하지 마시죠!"

"2등 국민을 도와줄 1등 국민이 있을 거라 생각하오?"

그 순간 홍설이 벼락처럼 일어나더니 한두의 옆에 서 있던 우정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쫙!

하는 소리와 함께 우정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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