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아버지의 저택에서 열린 무도회를 떠올렸다. 지금처럼 횡단 열차를 타고 도착한 저택은 이미 그녀의 집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계모가 아버지의 옆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아름다운 계모는 검은 레이스를 드리웠지만. 그때는 아름다운 서양 옷을 입고 아버지와 사뿐사뿐 춤을 추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때만해도 아주 어렸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를 만났다.  순수히 남과 여로 만난 것이 아니라,  부자 백작의 영애와 엘리트 청년으로서.

계모는 그녀에게 분홍빛 드레스를 입혔다. 그리고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동백꽃잎을 꽂아주었다. 물론 모녀지간이므로 그녀도 동백꽃을 꽂았다. 그녀에게는 흰 동백을 자신에게는 아주 붉은 동백으로.
두 여인은 무도회에서 너무나도 두드러졌다.
계모는 안나 카레니나가 그랬듯이 육감적인 몸매에 검은 드레스에 붉은 동백 코사주로 강렬함을 과시했고, 딸은 옅은 분홍, 즉 제국을 상징하는 사쿠라색감에. 흰 동백 코사주를...

그 당시만 해도 제국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화려했고, 돈만 있다면 횡단 열차가 무엇인가. 비행기를 타고 섬 제국에 직접 가볼 수도 있었다. 초콜렛이야, 원두 커피등이 바로 바로 수도로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그랬기에 그때의 그 호사스러움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무도회에서 백작은 쿠바에서 바로 들어온 궐련을 피우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조심조심 스텝을 밟았다. 처음에는 그녀를 애기취급하던 남자들이 차차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청순함과 순진함이 그들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때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와 춤을 추어주시겠습니까?"

그때만해도 그녀는 지금처럼 차갑지 않았다. 그녀는 하얀뺨을 약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하얀 절벽같은 얼굴이 그녀를 향해 살짝 미소지었다. 그는 아마 몰랐을 터였다.  이 첫 만남이 후에 둘을 얼마나 강렬하게 엮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이 사람이 나의 남편.

그리고, 이 결혼을 만약 계모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그이의 품에 몸을 던지리라.
그가 아니라면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으리라. 아니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으리라...하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의 누군가가 경박스럽게 그 옷차림을 두고 지적했었다. 안나 카레니나와 레비나라고...
물론 그 자리만의 이야기였다면 그녀가 계모를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계모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떄문에 그건 절대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옷이 상징하듯 그 무도회 4달 뒤 백작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레비나가 될 수 없었다. 나타샤와 그녀는 놀랄만큼 닮았다.
그래서 그이는 그녀를 '나의 나타샤'라고 불렀다.

"나타샤. 나의 나탸샤."

그는 그녀의 팔을 자신의 어깨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이제껏 기다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하지만 대담하게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끝까지 저와 추어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나타샤."

"간이역입니다."

하선생이 그녀를 불렀다.
그제서야 그녀는 망연히 저 옛날로 돌렸던 시선을 그에게 맞추었다.

"아...네."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모든 여성에게 스스럼 없이 구는 것이 제 천성은 아니니까요."

몇시간전과는 달리 하선생은 좀 딱딱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그녀에게는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저 청년이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다는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나라를 구하기 위한 영웅이었다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고 들었지만 기억은 하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가 잠시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이 기차를 따라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아버지는 대륙과 대륙을 지배하는 섬을 증오했지만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는 어머니의 말에는 순순히 따라주었다.
그래서 김한두는 반도어를 잘 하진 못했지만 섬언어와 대륙의 언어에는 능숙했다.


"시간이 늦군요."

김한두는 역무원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닙니까?"

"...글쎄올시다."

역무원은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플랫폼에 서 있는 승객들은 마치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고 불안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 기차를 놓치면 다음 대륙횡단 열차를 타는 건 일주일 뒤에야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1등객 승객들과, 역무원들은 알고 있었다.
반도의 혁명분자, 김진좌가 이 기차를 털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피해는 미미했다. 김진좌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기차를. 털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금괴가 실려있다는 정보는 알려져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게 미끼라는 것을 김진좌도 알고 대륙 괴뢰국의 국군들과 섬의 정찰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왜 김진좌는 군대를 이끌고 오지 않고 소규모 병력으로 기차를 압박했을까? 그리고 왜 병력을 더 보충하지 않고 그냥 도망갔을까?

"아, 저기 기차가 오는군요."

최대한 말꼬리를 돌리려고 애쓰며 역무원이 말했지만 김한두는 말을 썩둑 잘랐다.

"저건 엔시로 가는 석탄열차잖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역무원은 젊은 놈이. 눈이 너무 좋군. 라고 투덜거렸다. 물론 대륙어로 한 말이지만 김한두는 다 알아들었다.

"혹시 김진좌가..."

그말을 다 하기도 전에 역무원이 끔쩍 놀라면서 김한두의 입을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막으려고 했다.

"반도놈의 이름을 여기서...!"

이번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킨 것은 김한두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륙어로 외치면서 역무원을 바닥에 메다꽂아버렸다.

"내가 장군의 아들이다!!"

그리고 섬제국어로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장군의 아들이라고."

그리고 장군의 아들이라는 외침이 의미심장함을 가지기 전에 기절한 역무원때문에,  김한두는 자신의 정체를 장렬히 밝히지도 못하고, 꽁꽁 묶여서. 역사에 갇혔다.
기차가 도착한 후에는 역무원을 기절시킨 폭행손님으로 찍힌 나머지 3등칸에는 가지 못했다. 대신 하선생이 있는 1등칸 옆자리에 악덕폭행범으로 감시를 받으며 대륙횡단 열차에 올랐다.

"하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남는 손이 없어서...잘 부탁드립니다."

"아, 별 말씀을."

"읍읍읍!"

"젊은 친구도 1등석이 더 편하겠죠.  제가 잘 돌볼테니 걱정마십시오. 재갈은 풀어줘도 좋을 것 같은데요..."

"읍읍읍!"

"그건 하선생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또 다른 역장의 두터운 신뢰를 뒤로 하고 대륙횡단열차는 이 이야기의 주역들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분명히 새벽에는 통계가 8명이었던 것 같았는데, 오후에 보니 2명...?
내가 헛꿈을 꾼 건가. 아니면 알라딘 통계가 오류가 난걸까...?
하여간 어제 하루키 책을 받았다.
원래 자기 말 안하기로 유명한 하루키씨(그런 것 치고는 에세이 종류는 많은 것 같지만-내 맘에는 안 들지만 인기는 있는 듯...)가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풀로 쓰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특히나 소설 쓰는 이야기는 잘 안했던 것 같은데-이것 때문에 일부러 파리 리뷰 국내판-제목은 다르지만-을 사야했지.-
의외로 감동적이다...정말 놀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예고편을 보고 넘어가버렸음.
난 원작은 안 좋아하지만-레즈비언 해피 엔딩물이 취향에 맞지 않는다...연애 해피엔딩물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영화 스타일이 딱 맘에 드는걸 . 특히 하정우씨.
그래서 어둠의 대륙횡단열차도 사실 아가씨 트레일러 영향이 많이 있음.(그래서 오마쥬라는 태그도 쓴 것이지만.)
남주인공이 하씨인건 하정우씨 때문인것임.
오오, 멋진 하정우씨.
김진좌는 김좌진 장군을 뒤집은 것이고, 김한두는 김두한을 뒤집어서...으으...
역사를 좀 더 잘 알면 가상의 대륙과 반도를 배경으로 안 잡았을 텐데.
막상 경성이나 그 시대를 잘 몰라서, 그냥 가상의 대륙과 반도로 잡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남자는 유명한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그의 밝은 면에 끌린 여자들은 마치 부나비처럼 그에게 접근했다가 불에 살라지는 것처럼 고통 받고 사라져갔다.
남자는 처음에는 죄책감을 가졌다. 그러다가 점점 그 죄책감이 줄어들면서 나중엔 그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한 창작의 재료로 삼기 시작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소설가였으니까.
그는 일기를 썼다. 모든 여자들이 그의 일기의 육체였으며, 영혼이었다.

"원두커피 하시겠습니까?"

그는 역사에 들러 여자들에게 커피를 돌렸다. 커피가 뭔지 알지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도 몇잔 주었다.
어차피 상류층의 하녀로 들어가게 되면 싫어도 이 맛을 알아야 하리라.

"감사합니다."

냉랭한 표정의 여학생이 그나마 좀 풀린 태도로 대꾸했다. 노부인은 뭐라고 수다를 떨었지만 남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하얀 케이크 모양의 역사에서 여자들은 아까 전의 긴장이 풀린 듯 다들 유쾌해 보였다. 그녀 조차도.
그녀의 귓바퀴끝에서 분홍빛이 살짝 도드라졌다.
발그레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생각보다는 손에 넣기 쉬울지도 모른다고.

"대륙끝부터 끝까지 다들 힘드시겠습니다.저야 일하러 가는 거지만."

그가 툭 던진 말에 노부인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대륙끝 병원에서 행방불명된 남편을 진료하고 있다고 해서 가는 길이다. 별 할 일도 없으면서 집을 나간 남편때문에 이만저만 고생을 한 게 아닌데, 이젠 별 걸로 속을 다 썩인다. 면서. 
여자는 별 말이 없었다.
남자는 잠시 그녀의 손을 보았다. 손 가운데에 낀 가락지. 그제서야 그녀가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손목에 찬 로자리오때문일지도...

그때 역장이 돌아와 그들에게 기차를 정비를 다했으며, 이젠 출발할 시간이라고 알려주었다.
남자는 그녀를 부축하는 대신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노부인을 부축했다. 그녀를 직접 공략하는 것보다는 그녀에게 호감을 사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알고 그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잘 모르기때문에 그냥 반사적으로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부서진 유리는 갈아끼운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까 전에 그랬듯 다시 한 점을 응시했다.



그녀는 몽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가 자신을 구하러 돌아올 날을.꿈꾸었다.
계모는 그녀에게 남겨진 유산을 독식하고 있었다. 돌아가게 되면. 이젠 모두 끝이었다.

"아, 언제 오시나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원장수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호사다마라고. 마냥 조심해야 한단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탄치가 않아."

약혼자는 어린 시절 단 한번 보았을 뿐이었다. 그녀보다 10살이나 많은 그는 대륙에서 유학중이었다.
얼핏 듣기로,  의협심이 강해서 대륙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고...
계모는 편지로 그는 위험한 사람이니, 그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나으리라 했다.
하지만...결국 날이 다가왔다.
그녀가 대륙 횡단 열차를 갈아타고 반도로 돌아가는 날. 그녀는 약혼자와 결혼할 것이다.
그전까지는 그저 성모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는 아까 전까지 썼던 편지를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분이 도착하면 바로 식을 올리려고 해요. 어머니...큰 돈이 드는 건. 아니니까. 그리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그분으로부터 연락은 왔나요?]

 그녀가 그렇게 쓰고 있는 동안 열차는 또 다른 정거장을 약 45km 남긴 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김한두라는 사나이가 열차의 3등칸 표를 막 끊은 참이었다. 그는 반도의 혁명가의 아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