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가게가 학교 앞에 생겼다. 별다른 장식 하나 없이 폐건물위에 간판만 얹은 그런 허름한 가게
뭔가 치울 것 같지도 않는 수더분함. 별다른 기교가 필요없는 단 하나, 초콜릿 아이스크림만을 파는 그런 가게.
가격은 쌍쌍바보다는 비싸지만 학교 재단 이사장이 한 입 먹어보고 팔아도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그 가게.
우리들은 지금 굶주린 눈으로 그 가게를 노려보고 있다.

"저 가게 뭔가 문제 있는 가게야. 며칠 전에 힐끗 쳐다봤더니 주인인듯한 영감탱이가 차가운 눈길로 노려보지 뭐야."
"귀신들린 노인?"

"그래 뭐라고 했어?"

"초콜릿 아이스크림 하나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했구나. 아이고. 넌 소심하네. 어떻게 어깨 쫙 피고 들어가서 말을 못 하냐. 영감. 아이스크림 하나! 그 집 메뉴라고 해봤자 초콜릿 뿐이잖아."

"그러는 지도 저번에 들어갈 때 벌벌 떨었으면서."

"그래도 장사라도 좀 잘 되어서 아르바이트 생이라도 고용하면 좋을텐데. 기왕이면 잘 생긴 여자나 남자로."

"니들이 그러는데 장사가 잘도 되겠다. 얼핏 듣자니 저 가게 저렇게 오랫동안 버려져 있는데는 이유가 있다던데? 저 노인이 연관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오호, 듣자하니 듣기 좋은 이야기다. 나는 중학 2학년생이고, 학교 신문에서 기사를 쓰고 있다.
문예부 선생님한테 북극의 큰 얼음이 얼음설탕이 될 정도로 갈리고 있다.
그나마 예쁜 선생님이라서 넘어가지만.
그리고 내가 그녀를 존경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 그 무서운 노인과 평온한 얼굴로 차를 마시기까지 한다는 것에 있었다.

영감은 때때로 학교 기념일에 학교 안에 아이스크림을 무료로 뿌리고 가곤 했다.
그것은 콘일때도 있었고 무스 형태일 때도 있었으며 더 나아갈 때는 안개처럼 희뿌연 맛을 남기는 구슬 아이스크림이기도 했다. 그러니 우리가 가게에는 잘 들리지 않더라도 그의 아이스크림이 맛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드레날린에 가득 찬 우리라도 그 침울하고 우울하고 냉소적인 눈과는 정면으로 마주치는게 겁이 났다.

"또 뭘 보니?"

창가에 앉아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멍~하니 쳐다보는 내게 선생님이 알밤을 선사했다.

"아야."

"별로 아프지도 않을 걸. 그 딱딱한 머리가 아플리가..."

"선생님!"

문예부 선생님이 싱긋 웃으면서 의자를 꺼냈다. 방과후 교실이라 바람은 따뜻하니 졸음기를 가져왔다.
나도 모르게 잠시 잠이 들었었나? 

"아이스크림 가게가 그렇게 궁금하니?"

"...뭐 그다지 신경쓰고 있진 않아요. 그래도 어른들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잖아요. 그 영감님은 장사가 잘 되나요?"

"글쎄다. 아까 전에 가져온 글 다시. 한번 읽어볼래?"

이럴 때 직구를 주장하다간 거하게 꿀밤을 먹을 위험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지고 온 원고지를 다시 읽었다.
----------------------------------------------------------------------------------------------------
그 초콜릿 아이스크림 가게에는 경찰들도 자주 왔다갔다. 그럴 때 영감이 그들에게 내어놓는 것은 콘 아이스크림으로 녹아도 제대로 된 맛을 전할 수 있을 정도의 헤이즐넛 향이 콘에서 풍기곤 했다. 걔중에는 그 아이스크림에 반한 사람도 있는 모양인지 아예 업무외의 일일 때도 자주 들리는 경찰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않는가? 아이스크림 하나에 비싸도 얼마나 한다고...
그러다가 나는 알고 말았다. 어느 날 경찰 하나가 돈도 안 내고 달아나려고 하다가 영감과 시비가 붙었다.

"저기 아이스크..."

겁을 내면서 이렇게 말하는데, 김순경이라고 전직 깡패라고 소문난 순경이 거칠게 아이스크림판을 뒤집어엎었다.
그리고 난 보고 말았다.


그 끔찍한 아이스크림판  밑에는...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붉은 핏자국이 나 있었다.
페인트라고 내 머리는 말했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그걸 피라고 인식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면서 가게를 뛰쳐나오고 말았다.

"야! 거기서!"

김순경이 뭐라고 외치는 걸 들었지만...나는...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가 가게안방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주위로는 문예부 선생님, 우리의 건강을 끔찍하게 여기시는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그리고 김순경과 영감이 앉아 있었다.

"어..."

내가 깨어난 걸 먼저 알아차린 건 문예부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내가 입을 열고 말을 할까봐 입에 손을 갖다댔다. 쉿.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김순경이 사죄하는 투로 말했다.

"오해해서 상처드려서 죄송합니다."

"길선생님은..."

교장선생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학교의 학생의 아버지셨습니다. 그 학생은 이 학교에서 우등생이었고, 지금 길선생님은 그당시에 잘 나가는 사업가셨죠."

"하지만..."

교감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아드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도 이런 식으로 아이들이 괴기담을 만들어내고, 김순경님처럼 일방적으로 믿는 사람이 있는 한 가게는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그 맛있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문을 닫는다고. 이때까지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마침 내 앞에 깨어나면 먹이려고 했는지 녹차 아이스크림이 팩에 담겨 있었다. 나는 선생들과 영감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내 앞에 갖다놓고 꽂아놓은 숟가락으로 퍼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맛은 녹차가 아니었다. 으윽? 이거 맛이 요상한데. 생각해보니 미묘하게 깻잎맛이 났다.
그렇게 심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 녀석!"

퍼억! 하고 문예부 선생님의 아름다운 꿀밤이 시전되었다.
------------------------------------------------------------------------------------------------
핏자국이 있는 아이스크림 통 소문은 한때 전교를 휩쓸었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그제서야 우리는 깨달은 것이다. 그 핏자국은 한때 그 가게에서 무슨 사고가 났던 것을 의미한 것이라는걸.
그리고 선량한 영감님이 싼값에 매입해서 욕심부리지 않고 꾸려나가는 가게라는 걸 모두들 알게 되었다.
특히 내가 기절한 순간 잡은 깻잎 아이스크림에 대해서 뻥튀기 하나 시키지도 않고 이야기하자 모두들 깻잎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했다.


나는 3주쯤 후에 깻잎 아이스크림과 그밖의 등등의 아이스크림을 선보이길 주장하는 아이들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던 그 음침한 영감님을 보았다. 그 표정은 즐겁다기보다는 황당함에 가까웠고, 늘어나는 수입은 그에게 새로운 시도를 할 용기를 주었다.
메뉴에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 딸기 아이스크림, 깻잎 아이스크림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영감님은 수업중일 때를 이용해서 내부 인테리어도 조금씩 하면서 가게 이미지를 바꿔나갔다.
가게 간판은 붙이지 않았다. 


내가 문예부장이 된 이래 문예부의 전통 극기훈련은 그 아이스크림의 변함없는 구형 아이스크림통을 만지고 오는것으로 바뀌었다. 뜻도 모를 일이라면서 황당해하는 녀석들이 진상을 알면 어떤 얼굴이 될지 궁금하다.

가게 제목은 우리가 갖다가 붙여주었다. 문예부가 살렸으니 그 가게는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제목은 아이스크림 깎는 노인, 시작한지 3년동안 계속 학교에 공짜로 여러가지 실험을 한 아이스크림을 전달했으니 그러고도 남을 노인이니까 말이다. 물론 아직 정식 간판은 아니다.

"저 아이스크림 가게는 원래 아드님이 하는 거란다."

문예부 선생님이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면서 말했다.

"니들이 영감, 하면서 우습게 불러도 저분은 꿈이 있어서 이곳으로 오신 거야. 이유가 있어. 하지만 오래 못 버틸 줄 알았는데, 니들 덕분에 어쩌면 원하는 걸 얻고 은퇴하실 수도 있겠구나."

그 말을 한 다음날 문예부 선생님은 문예부를 몽땅 다 불러서 아이스크림 깎는 노인 집에서 신제품인 화이트초콜릿 아몬드 아이스크림을 사비로 사주었다.
그렇게 가게는 성장해가고 있었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6-02-07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잘 읽었습니다. 건필하세요 ^^

태인 2016-02-07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시인님도 건필하셔요!
 

오! 금요일입니다!!!만세!!!!!
구정이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멋진일인지.
책상에는 태블릿 안에 막 저장한 캐롤과 같은 작가의 작품은 리플리 시리즈가 있습니다!
리플리는 한 7개월 전부터 구매를 생각하고 있던 물건이고, 캐롤은...우음...
그다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표지의 루니 마라가 너무 예뻐서...
블란쳇이 더 이쁘긴 하지만 루니 마라쪽이 더 매력있어 보이는 건...;;;;;;;;
어쨌든 연휴기간동안 재미있는 책들을 읽게 되겠군요. 다들 구정 잘 보내시고요~! 사건 사고 없이 무사하게 보내시길!
전 이게 너무 좋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달의 귀걸이라고 자칭합니다.

반달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클래식의 수렁에 발 끝을 살짝 담가가지고 몇년을 있었다.
다행히 여러가지 버전에 대한 수집욕은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주로 음원으로 만족하고...(물론 엘피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거고, 시디하고도 엄청난 차이가 있을 거다...아이패드로 클래식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말이 안되는 일이지...)그런데 그냥 넘어가게 두질 않는군! 김갑수님!(내가 좋아하는 김갑수는 배우 김갑수 뿐인데, 요즘 이 평론가 아저씨가 내 맘을 살짝 흔들고 있다. 그냥 뜬금없이 놀러온 외국인 여성의 이름을 딴 줄라이 홀이라니...난 의외로 황당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동년배 여자들로부터 엄청난 욕을 얻어먹는 조영남씨도 기존 생각보다는 좋게 생각하는 편이다. 재미있는 사람이니까...)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이게 책 제목이었던가?)로 시작하였는데...
처음에 프랑크, 랄로, 비외탕...으로 시작하는데 아니?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너무 어려운 말이라 스킵 스킵 하다가, 몇부분에서 그만 찌잉...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 이 사람이 추천한 건 다 들어볼테야.

...근데 그 결심 세운 지 하루만에 철회.
왜냐하면 추천한 음원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엘피판에만 있나보다...
첫 페이지의 프랑크의 곡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심지어 그 작곡가의 음원은 중복된 것까지 포함해서 6개 정도...
(물론 나와있는 거 듣기는 들었지만 이건 판단을 한 한달뒤에나 내려야 할 듯.)

결국 찾아보고 들을 수 있게 나온 것만 듣기로 융통성있게 바꾸었다.
지금은 아까 전에까지 보면서 찌잉...해버린 에마 커크비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를 듣고 있다.
샤인에 배경음악으로 나왔다는데 난 들어본 적이 없다.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는 조수미 버전으로는 들어본 적이 있다.
그때는 조수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그 기교를 사랑했는데 이 버전으로 들어보니..역시 몰겠다.
아직까지 각인이 강하게 박혀서 그런가.
그리고 그 다음 곡으로 리조이스 그레이틀리가 들리는데...이것도 조수미 버전이 먼저다...아아악...(놀라운 각인효과. 하필이면 다 조수미 버전으로 먼저 들었었다니...정정. 이건 아닌 것 같다. 옛날에 동생한테 진상하려고 했던 대성당 축전 기념곡에서 들었던 것 같은데...가물가물한 기억력.)

내 생각으로는 에마 커크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화려한 음색과 기교는 아닌 것 같다.
수수하면서도 잘 어울리는 맞춤옷 같은 느낌이긴 한데...
하지만 듣다보면 훌륭한지 아닌 지는 곧 알게 되겠지. 1주일 후에도 다시 들어봐야겠다.

 

 

ps . 좀 지난 일이지만 정명훈 지휘자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처음에 그 여자사장분이 나간 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일인줄은 몰랐네요.

제 나름대로의 의견이었지만 경솔한 건 사실이었고...

하여간, 이젠 그런 의견은 내놓지도 않으렵니다. 단견이었어요...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거서 2016-02-0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엠마 커크비는 고음악 연주를 주로 하는 소프라노입니다. 12 세기 중세부터 고전시대까지 작품이 주요 레퍼토리이구요. 기교보다는 정확한 가사 전달을 중시하고, 대화하는 듯이 자연스러운 노래를 부르고, 오염되지 않은 목소리로 인정 받고 있어요. 천상의 목소리라는 별명도 있어요. 디바가 아닌 소프라노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선구자이기도 하지요.
고음악 연주의 핵심인 정격 연주가 당시 악기를 복원하여 원곡대로 연주하는 방식이라서 근래 악기로 연주하는 것에 비해 소리의 질과 음량(볼륨)이 많이 떨어지지요. 그런 고음악 연주에 엠마 커크비의 목소리가 어울리는 매력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태인 2016-02-04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제 좀 이해가 됩니다.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왜 수수한 느낌을 받았는지 알겠네요. 그리고 오거서님께서 쌓아오신 그 높은 지식에도 항상 놀라고 맙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제가 궁금해하던 부분마다 콕콕 찝어주시니...사부를 한 분 모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오거서 2016-02-04 20:38   좋아요 0 | URL
과찬의 말씀입니다. 사부라니 가당치 않아요.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고 말씀해주시니 제가 아는대로 써놓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군요. ^^
 

다시는 그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대학 도서관 장식돌 위를 걸어내리고 있었다. 모든 여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아버지를 둔 여자는 그토록 오만한 것일까.
그것이 아버지의 후광일뿐,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그 여자는 진정으로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런 여자에게 반한 자기 자신의 잘못이리라.

처음에 그녀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솜털 보송한 뽀오얀 목덜미,싱싱한 분홍빛의 귓불. 한때는 그것이 신이 바다에 두려다가 잠시 잊고 그녀의 귀에 붙였으리라 생각하면서 얼마나 만지작거렸던가.
하지만 그게 다 옛날 이야기였다. 그의 사랑에 같은 양의 열정을 보여주던 그녀가 점점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자 얼마나 오만해졌던가.

그 조그마한 조개의 귓불이, 그 앙증맞은 치아가 내뱉는 말이.
그를 점점 더 질리게 하고 말았다.
물론 그녀측에서 먼저 찼으니, 그와 그녀의 사이를 알고 있는 동문들이나 그 나이많은 교수들에게 동정섞인 조롱을 피할 수가 없을 터이지만...

이번에 그녀와 그가 헤어진 이유는 명백했다. 자리는 하나밖에 없었고, 그 자리의 후보자는 바로 그와 그녀였다.

"당신이 포기해 줄 수 없을까요?"

그녀는 그의 예산에 맞춰 가게 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뜬금없이 이 말을 던졌다.

"무슨 말이야.  그게."

그때는 명단도 나오기 전이었기에 그는 그녀가 거기에 응시한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어렴풋이는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을 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직장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제이 대학에서 자리가 났다면서요. 나도 거기 응모했으니까..."

"어이, 거긴 당신 실적으로는 무리 아냐? 당신은 나랑 결혼할 생각 아니었어?  그럼 결혼만..."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할 거에요. 당신은 너무 가난하니까."

언젠가 그 소리를 듣고 말거라고 여동기들은 충고했지만 그는 그 나름대로 고집이 있었다.
그녀는 절대 그런 말을 할리가 없을 거라는...

"뭐야.  그럼 나는 엔조이 상대였던거야? 당신 정말...""

"내가 포기해면 뭐가 달라지는데?"

"아버지가 당신 자리를 따로 마련해주실거에요?물론 결혼은 안 하겠지만."

"포기 안 해.그러니까 당신도 헛 꿈 그만 둬. 당신 자리는 없으니까."

그렇게 쏘아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도 답답해졌다.
실력만으로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그녀도 그렇게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돌아와 그는 끙끙 앓았다. 그녀 얼굴이 거울에 비쳐  면접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그런 상태였으니 결과가 좋을 리 만무했다.
결국 그녀는 붙었고, 그는 떨어졌다.


사람은 결국 앙숙과 비슷해지는 걸까.
그는 대학의 도서관 계단을 밟으면서 이번에 올라온 조교수 후보들을 생각했다.
그때와 같았다. 조교수 자리에 남자 한명, 여자 한명의 후보.
그리고 연줄이 있는 남자와 없는 여자.
실력은 여자측이 있고 남자는 실력보다는 사회성이 더 좋은 것 같았다. 다만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이 조금은 걱정되긴 했다. 그래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연줄이 있는 성격 좋은 사람이라면 앞으로 학과장 자리를 노리는 그에게도 보탬이 될테니까.


미워하던 그녀와는 예전에 화해한 상태였다. 그녀의 남편이 이 대학의 다른 과 교수기도 했고, 이제 옛날 일을 곱씹을 정도의 미움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내심 찝찝했던 것인지 그가 진심으로 그 자리를 그녀에게 넘긴 것이라 착각하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부탁해 지금의 자리의 토대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후에 그걸 알게 된 그는 위자료냐....라면서. 씁쓸해 하긴 했지만 내심 안도했다.

이제 남은 건 둘 중 누구를 붙이느냐...다.
그는 씁쓸한 감정은 가지지도 않았다. 아까 전에 마신 하이네켄 맥주의 진미를 느끼면서 뒹굴거리면서 케케묵은 형사드라마의 결말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때 형사가 말했다.
멈춰라.  정의가 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부자인 범죄자가 말했다.
무슨 소리. 돈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그는 그 대사를 웅얼거렸다.밤 하늘, 구름에 가려 별들이 어지러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