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미라고 합니다.”

 

돌아온 차에는 덤이 붙어 있었다. 진짜 이준구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길준은 살짝 열을 받은 상태였다. 이게 병률의 계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건 둘 다의 문제였지만.

어쨌든 돈도 써본 사람이 안다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흉내낸 것 부터가 패인이었다.

그시대는 그 시대고 지금 시대는 지금 시대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테지만.

 

난 아가씨가 필요 없는데.”

 

길준은 문 저 바깥을 보면서 이준구가 그녀를 쫓아내길 바라고 있었다.

감시원이 붙은 격이어서 앞으로의 활동에 지장이 있을까봐였다.

 

하지만 사모님이 고맙다고 전하시면서 제가 두 분께 힘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또록또록한 눈동자, 생긋 미소짓는 맵시 있는 입술. 볼우물까지 있었다면 완벽했겠지만 이 여자는 정치인의 밑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만큼 처세술에도 능란할 것이고, 정치인을 지망하는 인물답게 야심도 클 터 였다. 아무 문제 없이 데리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우린 아가씨를 데리고 있을만큼 큰 사업을 할...”

 

의장님 사모님이 직접 보내셨는데 거절하실 생각이신가요?”

“......”

 

의장 사모가 보냈다는데야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바깥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요한이 들어왔다. 그 두 사람이 실행하려는 계획에 어정쩡하게 발을 걸치면서 일을 추진하던 중이었다,

요한은 그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복수씨, 준구씨 사업에 좀 익숙한 사람이 필요...”

 

절 쓰시면 됩니다.”

 

자신만만한 그녀의 말에는 요한도 살짝 질겁을 했다. 그런 종류의 인간을 성당에 있으면서 많이 봐왔던 탓이다. 일반 사회도 그렇지만 성당도 어느 정도의 그런 분위기가 존재했다.

항상 내용은 간단했다. 정말 잘 할 수 있던가. 아니면 단순히 호기만 부리던가.

정말 우리 편이 되어서 일을 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길준이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내 이야기도 좀 들어요. 난 우리들말고는 다른 사람힘을 빌려서 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그제서야 그는 상대방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하은미.

아내의 사촌동생.

가장 아내를 많이 닮았다던 유학파 사촌...

 

어떠신가요.”

 

하은미가 다시 생긋 웃었다.

 

외모도 합격인가요?”

 

그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

 

합격인가보군요. 보니 이분이 [이준구]님인 것 같은데 맞나요? 그러고보니 아까 전의 그 분이 이준구님이라고 하셨는데...”

 

복수라고 부릅니다.”

 

요한이 미적지근하게 대꾸했다. 그는 다소 신파극적으로 느껴지는 이 계획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이름이셨군요...”

 

하은미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치밀하고 차분하고 용기 있어보이는 그 여성이 갑자기 나사풀린 표정을 하니 무척 안 어울렸다. 웃음을 참지 못한 이준구는 자신도 모르게 킥 소리를 냈고, 길준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를 잠시 노려봤다.

 

내 이름은...”

 

그는 잠시 쉬었다가 대답했다.

 

길준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불러요. 은미씨. 하지만 다른 사람앞에서는 내 이름 말하지 마십시오. 그냥 준구라고 부르면되니까.”

 

알겠습니다. 복수씨.”

 

하은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저한테도 필요한 감정이네요. 고맙습니다.”

 

길준이 아니라 복수라고 부르는 건 무슨 의미일까.

세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하은미는 그 건 아랑곳도 하지 않고 가정부가 있는 현관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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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률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일어나는 날이 많아졌다. 그 여자의 환영을 본 이후로는 입맛조차 잃었다. 모든 걸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의 망령은 자기가 가장 원하는 지점 가까이에 있는 곳에서 괴롭히고 있었다. 누군가의 복수인걸까. 하는 일마다 망가뜨리던 아버지가 알면 좋아할 일이었다.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자 병률은 그제서야 깨닫는 것이 있었다.

바로 길준. 아버지와 함께 병원을 뛰쳐나온 그 놈.

아버지가 그 재산을 몽땅 그 놈에게 맡겼다면?

아버지의 등기부등본에는 이름모를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지만, 최근 하나가 맘에 묘하게 걸렸다. 가장 큰 덩어리. 유증으로 복지재단을 설립한다는 유언장대로 되어 있었지만 그 바뀌기 전의 명의는 한 사람이었다. ‘이준구.’

 

사모님과의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이준구를 만난 적은 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것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알려지면 차를 빼앗길까봐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어차피 선거철이 되면 까발려지고 포기해야 할 그 차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모님 그 차는 어차피...”

 

숨길 때 숨길 값이라도 난 말 못 해요. 내가 무슨 죄인인가요?”

 

죄인 맞습니다.”

 

병률은 짜증이 나서 냉정하게 대꾸해버렸다.

 

지역의원은 세금의 일부를 받습니다. 공무원이죠. 공무원은 사사로이 선물을 받으면 처벌받습니다. 근데 의장님 사모님도 공무원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치가 섞여들어가기에는 선물바치는 게 일등공신이라더군요.”

 

그래서 지금 날...”

 

협박하는 거 아닙니다. 사실을 알려드릴 뿐이죠.”

 

“...알았어요. 돌려주겠어요.”

 

부루퉁한 표정이 영 못마땅한 듯 했지만 병률은 다음 계책을 쓰기로 했다.

 

사모님.”

 

왜요.”

 

의장은 차에 정신 팔렸던 마누라가 자기 정신 챙긴다고 좋아했지만 병률의 말을 들을수록 사모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차를 전달할 때 제 밑의 직원 하나 보내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모님 얼굴 상하지 않게 제가 이준구에게 빚을 좀 지워놓죠. 다음에 억대의 차가 아니라 좀 더 좋은 걸 돈하고 상관없이 받을 수 있게.”

 

그래요. , 마음대로 해요. 내가 뭔 힘이 있다고.”

 

눈에 보이지 않게 무언가가 눈을 찌르는 느낌이 들어 병률은 잠시 눈을 찌푸렸다. 강한 햇살탓인지 아니면 양심의 어딘가가 찔려서 낫고 있지 않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내일 여직원을 보내겠습니다. 사모님이 추천해주시는 여직원이라고 하지요.”

 

어머, 내 이름으로?”

 

분명히 좋아할 겁니다. 그녀도 이쪽 동네 사람이거든요.”

 

병률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향해 계속 손가락을 겨누고 있는 여인을 향해서 살짝 비켜섰다. 네가 아무리 죽어서도 날 비난해도 난 꼼짝하지 않을 거야. 네가 죽는 시점에서 내 심장은 돌멩이나 다를 바 없어졌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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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번쯤 하늘을 꿈꾸지 않았을까.

푸른 하늘, 활공하는 독수리.

어둠속 내리찍는 번개가 되고 싶지 않았을까.

 

번개도 아니고, 독수리도 아닌 나는

하늘만 쳐다볼 뿐.

달리지도 못하고 기어서 엉금엉금 하늘 보는 나는

거북이.

 

부러워서 하늘을 향해 뛰다가

등에 멍이 들었네.

가다가다보면 산이 하늘과 맞닿아있는 곳 있을 거라며

걸어가다가 어느날 하늘이 호수에 담겨있는 걸 알았네.

 

호수에 잠겨 하늘을 맛 보았네.

나는 거북이.

맛을 보니 다를 것도 없었네.

 

하늘을 가리는 번개도

활공하는 독수리도

하늘을 전부 다 지배하진 않았네.

그것들은 호수의 파문에 번져 사라지는 희미한 것들.

 

난 거북이라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하늘을 부러워하지 않는 거북이.

이제야 진짜 거북이가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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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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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엽을 구해준 후, 이준구는 길준과 죽일엽에서 가져온 차를 마셨다.

길준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법이나 실무에는 약했다. 아무리 그 노인과 토론하고 배운것이 많다고 해도 이제 세상은 그때와 달랐다.

 

 

“명의를 제 이름으로 바꾼 건 실수였습니다. 길준씨.”

 

 

이준구가 그에게 토지 대장, 등기부등본 등을 펼쳐보이면서 말했다.

 

 

“분산한 건 잘되었지만, 어차피 현 주민등록 상태에서 누가 누구인지는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큰 덩이는 제가 맡기로 했지만...다른 사람들도 저처럼 동의해줄지는...”

 

 

“그럼...”

 

 

가짜 이준구, 아니 길준은 천천히 손으로 등기부등본을 어루만졌다.

 

 

“그럼 법인을 만드는 겁니다.”

 

 

“썩 나쁜 생각은 아니군요. 다른 사람을 사단법인 이사로 해서요?”

 

 

“멀리 갈 거 없지 않습니까.”

 

 

길준은 한쪽에 앉아서 컴퓨터로 체스를 두고 있는 요한을 가리켰다.

 

 

“가톨릭에서 하는 재활센터로 하면 됩니다.”

 

 

“음...”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살짝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저 명의를 빌려줄 수 있는 노숙자와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하지만 이제 길준은 알았다. 그 노숙자는 예전에 중소기업에서 건실하게 일을 배워나가고 독립했던 기업인이었다. 사회에 대해서 경찰과 소설에만 목을 매고 있던 자신보다 더 잘알고 있었다.

 

 

“상대는.”

 

 

이준구가 천천히 다시 말했다.

 

 

“돈은 확실히 많습니다. 그래서 심부름센터라도 동원하면 들통이 날 가능성이 있어요. 더더군다나 금융실명제도 있으니까요.”

 

 

“......”

 

 

“그 사람들이 제일 못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뭔데요?”

 

 

길준은 유지로서의 태도는 버리고 솔직하게 물었다.

 

 

“종교단체가 하는 재활센터 건드리기를 제일 성가셔합니다. 봉사활동이야말로 건드리기 어려운 일이죠. 정치인들도 점수따려고 종종 하는 일이니까요. 그들에게는 지역민들의 종교활동이 큰 도움이 됩니다.”

 

 

“음...참고해보죠.”

 

 

“그리고 이미 얼굴을 드러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만...대외행사에는 제가 가는 걸로 하지요. 이준구는 이준구니까요. 대조해보면 진짜인지 아닌지는 금방 나오니까.”

 

 

“대신 위탁해줄 종교인들은 좀 아십니까?”

 

 

“...좀 압니다.”

 

 

이준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 교회에서 밥을 먹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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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률은 죽일엽과 그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그가 들은 명령은 이랬다.

죽일엽을 지켜라.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하면 지키라는 말이었지만 m의장은 반어법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이라 그 뜻 그대로가 될 리 없었다.

그 축약된 말에 중간에 들어갈 단어는 그랬다. 내 소유가 될 죽일엽을 지켜라.

근데 틈이 생겨버렸다. 갑자기 이준구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그 땅을 매입해버린 것이다.

더더군다나 그 시군에서 개인 땅에 도로를 낸 것을 문제 삼아(죽일엽의 것은 아니고, 그 이웃의 미상속 체납토지였다.그것을 이준구가 샀다는 것이다.) 죽일엽을 망가뜨리려고 했던 토호들을 못 지나가게 해버렸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로 인해서 m의장에게 항의했던 토호도 돈이 먼저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도대체 그 새로 들어온 유지는 어느 정도 수준의 부자이길래 이런 일을 하는가...가 병률의 새 고민거리였다.

 

 

그는 이준구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풍겼다.

얼핏 들은 말로는 주민등록 기록상에는 거주불명등록이 되어 있다가 최근에 이쪽으로 전입해왔다고 되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거주불명등록자는 파산으로 인해서 그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기록으로 따진다면 파산자가 갑자기 억대 이상의 거부가 되어서 돌아온 것이니까.

그가 그렇게 문서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윤희가 들어왔다.

 

“뭐하고 있어. 안 자고?”

 

“서류 정리 중이야. 상속서류들도 보고 있었고...아,m의장님이 써보내라는 감사장도...”

 

“당신 요즘 항상 바쁘네.”

 

윤희는 병률이 앉아 있는 의자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별식이라도 해줘?”

 

“당연히 맛있겠지만 오늘은 포기하겠어. 늦게까지 볼 게 많으니...그거 먹고 밤에 자면 살쪄. 비례대표로 나가는 거지만 외모는 단정해야지.”

 

“그럼 야식은 나 혼자 먹어야겠네. 요즘 먹을 게 땡겨서 고민이야.”

 

“그래...근데 확실히 살이 좀 붙은 것 같...”

 

병률은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을 굳혔다. 뭔가가 아른거리는 것이. 죽은 그 여자의 환영이 윤희에게 덧씌워지는 느낌이었다. 병률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뭔가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것처럼 얼굴을 팔로 가리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병률씨.왜 그래. 여보!”

 

보였다. 그 여자의 얼굴이.

마지막에 자신에게 이별을 고할 때의 그 얼굴이.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의 그 경멸감 어린 얼굴이.

 

“안돼,안돼!”

 

그는 비명을 지르다 말고 윤희를 옆으로 밀쳤다.

그 여자를 옆으로 밀쳤둣이

 

“여보. 정신차려. 나 당신 부인이야. 왜 그래.”

 

그녀가 배를 잡고 겨우 일어나 말했다. 그녀가 배를 잡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병률은 제정신을 차렸다.

 

“당신...”

 

“그래. 정신이 이제 좀 들어?”

 

“혹시 임신했어?”

 

“......”

 

윤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요즘 피곤한 것 같아서 일부러 말 안했어. 이제 2개월이래.”

 

“......그랬군.”

 

그는 식은땀을 닦아내고 윤희에게 억지로 웃어보였다.

 

“태교 잘 해야겠네. 한동안은 바빠서 외조를 잘 못하겠지만 좀 봐줘. 일이 잘 끝나면 외조 잘하는 남편이 될테니까. 아, 그러면 웨이트리스 일은 쉬어야겠지? 그리고 이제 나 따라서 봉사활동같은 것도 안 해도 돼. 우리 애기가 중요하지. 될지 안될지 모르는 비례대표가 뭐가 중요하겠어. 그것도 본인만 하면 되는데...”

 

환하게 웃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애를 써도 써도 그건 쓴 웃음만 될 뿐이었다.

병률은 그것도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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