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으로 된 띠를 두르고 은으로 된 잔으로 물을 마신다. 호사는 호사이지만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숭문관에 갇혀 있는 몸이다. 혹자는 왕의 신세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임금군자를 좌로 보고 우로 보는 것에 따라서 다른 것처럼 왕처럼 호화로워도 빠져나갈 수 없으니 거지라고 할 밖에.

 

그대는 참 대단키도 하지.”

 

왕의 조카가 금강사 저편에서 약을 올렸다.

 

나갈 줄도 알고 들어올 줄도 알면서 왜 그렇게 약을 올렸나?”

 

“......”

 

숭문관은 왕의 궁궐 중 비밀에 쌓인 궁이다. 크기도 제일 작고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어머니 몰래 은가락지를 하고 싶으니 가까운 거 아무거나 집어서 던져보게.”

 

그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심심한게 풀리셨으면 저쪽에 축국이나 하러 가시죠.”

 

나도 패설사관일때는 미처 모르던 일이었다. 그리고 패설사관을 떠나서 아우들과 진품찾기를 할 때도 모르던 일이었다. 왕실이 왕실의 물건이 외부에 있는 것을 하나하나 거두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알았더라면 그토록 위험한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이곳의 문지기와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나누었더라면...

 

 

형님! 형님! 합격했습니다!”

 

아버지로 새로 모신 분의 아들이지만 내게 격의없이 대해주었다. 그래서 한참 어린 나이여서 그랬던가 마음을 풀고 그를 대했다.

 

, 잘했구나. 훌륭한 패설사관이 되거라.”

 

그러던 형님이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더라면...

 

.

 

그때 누군가가 내 허리께를 세게 쳤다. 나는 화가 난 나머지 똑바로 보고 다녀!라고 소리를 질렀다.

 

뭔가. 이제 들어온 잔챙이 주제에 이 몸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줄 아느냐.”

 

걸걸한 노인이 관대도 띠지 않고, 관모도 쓰지 않은 채 인상을 썼다.

옷만이라면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아무리 호화스러워도 그건 정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그런 난잡한 복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졸부티라던가, 어설픈 티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게 뭔가.”

 

나는 그 노인에게 고개를 치켜세워보였다.

 

자네 앞에 있는 나는 이제 곧 패설사관이 되실 몸이란 말이야.”

 

하하하하.”

 

노인은 호탕하게 웃고는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대답했다. 주름도 하나 없는 것이 묘하게 징그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가. 그럼 나도 인사를 하지. 밀궁의 숭문사라고 한다네. 자네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조만간 내게 인사라도 하러 올 날이 있을 걸세. 그 생각 그대로라면 말이야.”

 

그러고는 잠시 잊어버렸다. 그 말을 듣던 형님의 얼굴에 스친 한자락의 불안은 생각지도 않고.

 

 

그래. 잘했다. 널 양자로 들여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아버님도 크게 칭찬해주셨다.

 

네 형도 자질은 있지만 몸이 약해 가업을 이을 수가 없구나. 너라도 우리 가업을 잘 이어주면 좋겠다.”

 

. 알겠습니다. 아버지.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패설사관이 되어 정직하게 일을 한 것은 3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 2년은 옛무리들과 다시 뭉쳐 진품들을 수집하고 다녔다. 그리고 화미인도를 찾다가 붙들려 이곳에 갇히게 된 것이 3개월 전이다.

 

 

내 말이 맞았지.”

 

궁안에 수없이 깔린 금강사 위를 사뿐히 걸어다니면서 전대 숭문사가 말했다.

 

"그 성질을 못 죽여서 결국 이곳에 갇히지 않았나. 한번 들어오면 못 나가는 곳이라네.”

 

“......”

 

여기에는 장인들과 금강사를 열고 닫는 숭문사만이 있을 수 있네. 자네는 후자지.”

 

“......”

 

실망이 컸나보군. 그러게 누가 마마님들 성격을 건드리랬나?”

 

“......”

 

입만 다물고 있어서는 될 일도 안되네. 내가 떠나면 자네가 여길 관리해야 하니까 짧은 시간안에 잘 듣게.”

 

밖으로 떠나는거요?”

 

금과 옥과 은으로 범벅이 된 이곳을 이 노인은 이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금강사위에 위태롭게 섰다.

 

밖으로? 누가 밖으로 간다고 했나?”

 

....”

 

한번 숭문사가 된 자는 빠져나가질 못해. 얼마 뒤면 내가 먹고 죽을 독약이 이리로 올테니까.”

 

“......”

 

왕실은 무서운 곳이군.”

 

세상에나. 십몇년을 근무해놓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나오나.”

 

노인은 익숙한 솜씨로 이곳저곳을 소개시켜주었다. 왕실에 어울리는 호사품들과 옛 그림들.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행복해할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자유의 몸일때나 가능한 것.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 노인과 소소한 농담따먹기를 하는 것은 좋았으나, 독약이 도착한 후 마신 뒤에도 노인은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여자를 따라가게나. 정헌.”

 

“......?”

 

오래 전에 이 밀궁에 나만 아는 보물을 숨겨두었지. 영혼을 담는 그릇을. 그것을 찾으러 그녀가 올게야. 꼭 찾으러 올테니...”

 

뼈도 쉽게 삭지 않았다. 노인은 땅바닥에 녹아들어가면서 계속 그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그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녀에게 계속 조종당하는 것이 싫어서 그 메인 것을 다 떼어버리고, 그릇만 가져왔지.

그 그릇에 사람의 영혼을 담아..컥컥...“

 

남도 지방의 패설이었다.

사람의 영혼을 그릇에 담아 조종한다는 인형술사.

그런 자가 있다는 말만 들었는데, 숭문사가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소년]

 

붉은 입술에 약간 드러나는 송곳니.

화장은 한 듯 만 듯하고, 흰 소맷자락 여기저기에 붉은 까마귀의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은 그녀가.

 

[여기서 한 남자를 못 보았느냐?]

 

[......]

 

대답을 하면 안된다. 나는 그때 운명적으로 느꼈다. 대답을 하면 그녀는 옛 패설에 나온 대로 날 알 수 없는 세계롤 끌고 가버릴 것 같았다.

 

[옳지. 잘 하는 구나.]

 

여자가 내게 사탕을 주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아이는 착하지. 크게 될 것이다. 허나, 네 마음속에 이걸로 보니 탐심이 있구나. 네것이 아닌 것은 도둑질 하지 말거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그 말을 잘 지키면 너한테 선물을 해주마.]

그런데 전임자님.”

 

나는 땅에 녹아들어가 횡설수설하는 숭문사에게 말을 던졌다.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밖에 못 나온다면서 그때는 어떻게 나온 거요?”

 

“...그건...”

 

말을 하기도 전에 숭문사의 숨이 끊어졌다,

나는 시체가 완전히 녹을 때까지 들어오는 밥과 반찬을 먹으면서 무감각하게 지냈다.

그가 알려준 고급품들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 나라는 내가 땅을 순례하면서 본 것 이상이란 말인가.

그렇게 앉아서 1년을 있었다. 숭문사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가져오는 보물들을 감정하고, 어떨때는 그 감정결과로 인해서 밀궁의 다른 집에서 다리가 잘린 장인을 보기도 했다.

 

여기 계속 있었구나. 착한 아기야.”

 

그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나랑 같이 가자. 약속은 잘 지켰으니까.”

 

그녀는 한쪽 팔에 축 늘어진 남자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를 내려놓고는 붉은 딱딱이 같은 것도 밑으로 떨어뜨렸다.

 

이제 이 남자와 이 물건은 소용없게 되었으니...”

 

그녀는 녹아내린 숭문사의 옷에서 동그란 작은 그릇을 꺼내었다.

 

가자꾸나. 얘야.”

 

“......”

 

, 이름을 지어야지.”

 

내겐 정헌이라는 이름이...”

 

, 금강사위를 그렇게 부지런히 다닐 수 있으니, 네 이름은 거미가 좋겠구나. 수리보다는 좀 잘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거미?”

 

그렇단다. 거미. 거미로 하자꾸나.”

 

그래서 나는 그녀와 함께 왕실의 지독한 박물관, 숭문관을 떠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후에 듣자하니 패설사관직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파양되어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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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동네로 놀러갔다가 득템한 책.

정치의 즐거움.

서울 시장 박원순과 오마이북의 오연호기자가 대담한 걸 모은 책입니다.

중반까지 읽었는데, 기존 대담집이 사회운동가인 그의 면모를 잘 드러내줬다면.

지금 대담집은 굳이 나와있었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습니다.

분위기가 안철수의원의 최근(이랄게 있는지...)책과 스타일이 워낙 닮아서...

대담집은 저도 좋아합니다만 치고 받고 넘기고 다시 치고 하는 스타일을 좋아하다보니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군요.

그래도 다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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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가끔 영화를 봅니다. 3주전에 구입한 안나 카레니나를 보기로 했었는데, 오늘일정 변경으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보았습니다. 음, 어제는 또 버즈 루어만 감독의 개츠비를 봤었군요.

둘 다 아직 원작을 못 읽었습니다.

도리언 그레이는 다 못 읽긴 했지만 알고 있는 결말과 굉장히 달라서 조금 놀랐고, 해리라는 캐릭터가 소홀히 다루어진 것 같아서 별로 였습니다.

개츠비는...음 이걸 읽으려고 시도한게 3년전인데, 4분지 1만 읽고 덮어둔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마 개츠비의 라이벌이 지나치게 야비한데서 격분해서 못 읽은 모양입니다.

개츠비는 전반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영화였습니다. 전 색깔 예쁜 영화를 좋아합니다.

파티장 장면이 워낙 압권인데다가, 소품들이 다 하나같이 색감이 화려했던 터라, 열광하면서 봤지요.

결말에서 다소...ㅡㅡ 이런 분위기였습니다만.

 

그리고 무료영화인 톨스토이의 마지막 나날들은 재미있다고 할 순 없지만 꾸준히 볼 값어치는 있는 영화였습니다. 적어도 톨스토이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된다고나 할까.

여기 나온 불가코프가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그 불가코프인지 헷갈리는데 그건 나중에 찾아보면 나오겠죠.(아마 동시대인은 아닌 모양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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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물을 읽으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태인은 소설과 시를 씁니다.

남들이 보고 귀가 막히건 코가 막히건 상관없이 계속 쓰고 있지요.

보통은 소설을 쓴다고 하면 명작부터 읽으면서 필사하거나 그러는데...

태인은 고등학교 이후부터 읽은 명작이 없습니다.(사실 고교때 읽었던 테스나 적과 흑은 정말 잠이 오더군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셰익스피어 극본은 재미있었는데...)

그런데 최근에 태인은 다시 용기를 내어서 읽기를 시도했고, 처음으로 3권짜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 읽었습니다.(이건 이북이었고, 작년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근 1년이 넘었군요. 그거 다 읽는데...)

마르치노의 마지막 고백은 사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꼬아서 만들었습니다.

사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워낙 자주 언급이 되건 하던터라(마쓰모토 세이고의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대심문관 이야기는 충격적이라고들 해서)한번쯤 읽어야지 했는데 결국 3주전에 다 읽었습니다.

읽은 감상은...그래. 나도 서양문학을 읽을 수 있었구나. 정도군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한구석에 쌓여서 전자먼지를 안고 있고(이건 오늘 영화까지 봤으니.)기 드 모파상의 벨 아미는 두근두근 거리면서 읽다가 진행되는 내용을 보고 GG.

이런 악독한 놈들이...(근데 재미있는 걸 보면 저는 주인공이 다소 악독해야 보는 맛이 있는가 봅니다.)

재미있어도 서양 순문학이라 거부감이 드는 걸까요. 중학교때는 데미안에 감동받아 번역된 데미안 판본을 수집했었는데...;;;;;;적어도 판본 수집은 아니더라도 서양명작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소소한 재미를 맛보고 싶었는데...;;;;;;;

하여간 서재정리도 겸해서(도대체 읽은 것보다 산 게 더 많으면 어쩌잔 말인지...)

이제부터 천천히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제윤경씨가 진행하는 희망살림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죠?

냉장고턴데이. 저도 제 서재를 하나하나 털어서, 읽는 책 정리겸 안 보는 책도 좀 정리해야겠습니다. 

이름하야 서재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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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오래된 일도 아닙니다.

당신에게 천천히 들려드리죠.

그 남자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나는 질문한 것이 머쓱해져서 자리에 앉았다. 마치 심사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그인 듯 한 말투였다.

 

마르치노.”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진짜 당신의 심사관이긴 한 건가요? 당신은 매우 당당해보이는군요.”

 

나는 그에게 은근슬쩍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오늘 새벽까지 술을 퍼마셨다는 이 남자는 술기운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은 것처럼 냉정하고 침착한 얼굴로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살리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심사관들 앞에서 했던 말을 그는 반복했다.

 

오래된 일도 아니라면서 당신은 기존 사실에 대해서 계속 틀리게 말하는군요. 이건 중요한 일입니다. 당신이 가야 할 파이 행성에서는 친부살해는 죄가 아니니까요.”

 

“......”

 

마르치노. 오히려 이건 당신에게 좋은 일일수 있습니다. 황제폐하는 당신을 죽이는 것보다는 재산을 압류하고 당신을 그곳의 영웅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건가요? 솔직히 인정만 하면 당신은 영원히 잘 살 수 있을 겁니다.”

 

내게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는 간단명료했다.

 

그녀가 없이는 어디로든 가지 않겠다고 그녀와 약속했습니다. 먼 항성계의 외계인들에게 영웅이 되건 어쩌건 간에요.”

 

, 마르치노. 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자는 거기에서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천천히 들려드리죠. 그 날의 사건을.”

 

마르치노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마르치노는 파이 행성계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아버지 레오와는 항상 그렇듯이 사무적인 인사를 나누었고, 사랑하는 약혼녀에게는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열정적인 프로포즈를 했다. 아버지 레오가 그녀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이 연애감정이었다고 주장한 그의 막내동생의 말은 대부분의 심사관이 증명을 한 문제였다. 그와 그의 아버지가 죽일 듯이 서로를 증오한다는 말도 틀렸다고 그는 대답했다.

군인이기에 그는 우리가 지도하는 곳으로 가야했지만, 그는 곧 제대를 할 예정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는 파이 행성에서 1년만 있을 예정이었다.

 

파이행성은 다른 지역보다 더 냉혹하고 까다로운 곳이었다,

옛 지역의 러시아가 생각난다고나 할까.

지금 러시아는 눈으로 완전히 덮혀있지만 말이다.,

싸움과 술과 여자가 얽혀 있는 땅.

그곳이 파이 행성이었다.

그래서 황제폐하께서도 거기만은 쉽게 다루실 수도 없었다.

그곳에는 노인이 없었다. 파이 행성은 강자만을 인정했다. 그랬기에 상속권을 지닌 아들들은 친부를 살해해야만 그의 모든 것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살해당한 아버지들만이 그들의 존귀함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거라.”

 

마르치노의 아버지 레오의 말에 마르치노는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대신했다.

 

이런 날에도 침묵하는구나. 그 침묵이 아비를 슬프게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버지. 수행의 일부니 참으세요.”

 

동생의 말에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재산을 나누지 않은 걸로 내게 섭섭한 마음이 있구나. 마르치노. 이 아비는...”

 

블랙박스에는 여기까지 담겨 있었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마르치노에게 들어야했는데 12명의 심사관이 이 단계에서 모두 실패했다.

 

나의 아버지 레오는...”

 

마르치노가 내 눈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말을 했다.

 

소설가였습니다. 그것도 잘 나가는 소설가였죠. 친부살해를 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씌우면서 당신들은 아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약혼녀와 아버지와의 사이가 돈독했으므로 아마 그 질투로 아들이 아비를 죽였을 것이다! 이것이 극적이고, 플레이보이였던 내 아버지를 훌륭하게 매장하는 방법이었겠죠.”

 

“...난 그런 이야기는...”

 

살리오. 당신은 13명의 심사관이 최고로 뽑은 내 아버지 다음의 예술가입니다...적어도 당신은 조금 다르게...”

 

이야기나 마저 듣지요.”

 

마르치노는 말을 이었다.

그날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이별을 했다.

기존에 돌던 말처럼 재산으로 인한 말다툼은 전혀 없었고, 마르치노는 그 이후 약혼녀를 만났다.

그의 약혼녀는 사치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검소한 여자였고, 가난한 마르치노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부자였다.

사실 재산으로 인한 다툼은 거기에서 일어났다.

 

마르치노.”

 

.”

 

그녀는 그날 자신에게 온 편지를 그에게 읽히지 않았다. 그가 몰래 열어본 것이었다.

 

옛 연인이 당신에게 결혼을 요청한다고 하는 편지를 읽었어.”

 

“...당신, 나 몰래 메일을 열어본 거야?”

 

연인들 사이에 흔히 있는 다툼이었다. 젠은 마르치노 이전에 수많은 연인이 있었고, 마르치노는 그녀의 명성과 과거의 연인들에게 질투심을 안고 있었다. 특히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연인은 돈이 궁한게 분명했다. 그 돈을 메꾸기 위해서 그녀에게 다시 결혼을 신청한 것이었고, 그녀는 아직도 옛 남자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

 

말다툼이 있었고, 마르치노는 젠을 떠밀어버렸고, 젠은 약혼자의 거친 행동에 바닥에 미끄러져버렸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고, 마르치노는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놀라 그녀에게 사과했다.

젠은 일어나서 마르치노의 뺨을 때렸고, 그를 밀어버린 후 거칠게 문을 닫았다고 했다.

사랑으로 뭉친 연인의 질투의 결과였다.

 

나는 젠과 그렇게 싸운 후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마르치노가 말을 이었다.

 

문을 열어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열어주지 않았죠.”

 

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젠과 젠지르노는 우연히 성명의 앞글자가 같아서...두 사람이 비밀번호를 쓰는 법도 같았던 것이다.

두 사람 다 문의 비밀번호를 성명의 앞글자를 썼기에, 그는 젠이 나가는 것을 보고 몰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는 아버지 레오가 앉아 있었다.(마르치노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자리에 앉아있던 레오가 옛 구애자였다고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많이 놀라셨겠군요.”

 

내 말에 마르치노가 대꾸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군요, 아니오. 난 놀라지 않았습니다.레오는...그러니까 내 아버지는 사실 젠을 무척 질투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연인이 아닌 다음에는 어떻게 그 비밀 번호를...”

 

난 질투심에 그녀를 때리긴 했지만, 그녀가 그렇게 타락하지 않았다는 걸 압니다.”

 

마르치노가 대답했다.

 

레오는 그가 들어온 것을 알자 신음소리를 냈고, 순간적으로 무척 놀란 마르치노는 레오의 머리를 병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기절한 노인을 등에 업고 레오의 집에 내려다놓았다.

 

보세요. 결국 당신이 머리에 병을 쳐서 죽은 것 아닙니까.”

 

“...의사들의 진단 결과도 안 보신 겁니까?”

 

나는 그에게 진단결과를 알려준 의사를 증오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 마르치노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레오의 눈에 띄어버린 탓에, 메일을 훔쳐 본 것도 모자라, 연인의 집에 침입했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마르치노는 증언했다.

그리고 뒤 이어 레오를 집에 데려다놓고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온 젠지르노와 마주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젠지르노가 했다고 생각하는군요,”

 

엉겁결에 공격했던걸 알고 있던 사람은 그 애밖에 없으니까요.”

 

젠지르노는 매우 친절하게 마르치노에게 비밀로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젠과 달리 젠지르노의 증언은 없었다.

 

그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이 곧 행동이죠.”

 

군대 강령을 외우듯이 그가 대꾸했다.

 

옛 애인이 젠지르노였던 겁니다.”

 

그건 비약이 심한데요.”

 

내 말에 마르치노가 비꼬듯이 말했다.

 

당신은 내 사형선고를 언도하기라도 할 것 같군요. 이렇게 공정하지 않은...”

 

“.....”

 

그 놈은 내 약혼녀에게 내가 떠나는 날을 골라서...”

 

젠지르노는 그가 그녀와 사귀기 전, 1년간의 연애기간을 가졌다고 했다. 그때는 그녀가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이었고.

젠지르노는 사업상의 이유로 그녀와 좀 떨어져 있었다.

 

시기상으로 보면 그가 당신보다 앞이었죠,”

 

“...내게 누명을...”

 

그의 말에 따르면 젠지르노는 그녀와 그를 합쳐서 대항한다 해도 이길 수 없을만큼의 거부였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아버지의 재산에 탐을 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또 레오를 죽여야 할 이유는 뭡니까.”

 

, 파이 행성으로 아예 보내버릴 작정이었던 거죠. 그리고 젠과 새로 시작할 목적으로...”

 

나는 거기서 이야기를 중단했다. 밖에 있는 젠지르노가 손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울방에서 나와 젠지르노를 마주했다.

 

형님이 뭐라던가요.”

 

당신의 혐의를 주장했지요.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심사관법은 새로운 범인을 지목하진 않습니다.”

 

“......”

 

젠지르노의 침묵에 난 힘이 빠졌다. 이렇게 본인을 도와주고 있는데도 맥없이 있다니. 그가 몇마디만 추가를 한다면 그의 눈엣가시인 형을 제거할 수 있는데도.

마지막 양심이 그의 마음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리라.

 

. 몇마디만 더 하면 됩니다. 당신이 꿈꾸던 삶과 우리가 꿈꾸던 삶이 이루어지는거죠. 파이행성을 올바로 바로잡을 사람은 당신 형밖에는 없으니까요. 컴퓨터가 그렇게 정한 겁니다. 이 시련을 이겨내고 그 땅을 정화시킬 영웅으로 말입니다. 당신은 사랑 때문에 형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못하겠습니다.”

 

젠지르노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이건 아니에요. !”

 

그는 거울방을 손으로 두들겼다. 하지만 마르치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 있는 마르치노를 보던 젠지르노가 나직히 말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죽인 건...”

 

“...부디 용서하십시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린 그가 무척 필요했습니다. 때로는 이런 방법을 써야 할 정도로요. 그는 영웅입니다. 우리에겐 그와 같은 사람이 제대를 해서는...”

 

“......”

 

젠지르노는 어깨를 내려뜨린 후 자리를 떠났다,

그의 결혼식이 이루어지면 마르치노도 파이행성에서 자리를 잡으리라. 친부살해의 죄를 쓴 채로, 파이행성인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단지 새로운 지구에서 추방되었을 뿐, 더 풍요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 사실은 이렇다.

 

레오는 타격을 입었지만 치명상을 당하지는 않았다.

젠지르노의 동생, 즉 막내는 우리의 명령을 받고 레오에게 주사자국도 남지 않을뿐더러 부검에도 나오지 않는 신약을 주사했다. 2초만에 레오는 숨을 거뒀고, 방정맞은 의사가 떠들지만 않았더라면 심사관들은 단 한번에 그를 파이행성으로 추방할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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