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길준은 천천히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은 퉁명스럽게 그 거리 좁히기를 거부했으나 애초에 방을 옮겨온 건 노인이었다. 길준을 거부해야 할 이유는 없어보였다. 어차피 노인은 길준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옮겨온 것이다. 느긋하게 기다려야 했다,
“자넨 내가 궁금하겠지. 어떻게 돈의 힘을 빌리고해서 빠져나갔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감시하는 놈들처럼 이젠 더 이상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어느날 시멘트 바닥을 못으로 긁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글쎄요.”
아니, 그 사람은 돈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어떻게든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저번에 자네 아내에 대해서 함부로 말한 거 미안하네.”
“......”
“사실이 어쨌든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 자넨 버틸 준비가 안되어있었으니까.”
“......”
한번 더 화를 내면 아예 못 나갈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나는 아직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네. 내 머리는 멀쩡하고 자네 몸은 아직도 제법 쓸만하지. 건강하단 이야기야. 나도 물론 노인치고는 건강한 편이지만 말이지.”
“...제가 필요하단 말씀이군요.”
“음...자네 경우에는 돈이 통하진 않을 것 같고...이거 어떤가. 내가 자네 일을 좀 도와주는거야.”
“...어떤건지 아십니까.”
“복수지. 자넬 가둔 사람에 대한, 그리고 아내의 유령이 눈에 보이게 한.”
“......”
“여자를 너무 믿지 마. 여자는 너무 위험하니까.”
“여자...”
“총을 빵하고 쏘고 싶지? 아내를 건드린, 그리고 아내를 죽인 그 놈한테. 근데 총기 소지는 안되니까 총부터 구해야 되지 않겠나. 그리고...또 그 위의 다른 놈에게도 복수해야지. 자네는 내 복수까지 해주는 거야,”
“여자는 무슨 말입니까?”
“자네 부인. 자넨 돌아가는 일이 판단이 안되는 것 같지만.”
“예?”
“그러니까 여자를 믿지 말라고 미리 이야기하는거야. 자넨 아내를 사랑하는 애처가라기보다는 모든 여자를 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호색과는 개념이 좀 다르지만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좀 바보같지.”
순간적으로 또다시 욱해서 노인의 목덜미를 잡아챘지만, 길준은 이내 노인을 풀어주었다.
호락호락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고, 우선 나가야했다.
이젠 그는 아내에 대해서 어떤 모욕을 가해도 참을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복수였다. 어머니가 자신을 가뒀다고는 하지만, 그 뒤에는 병률이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모습이...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은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노인이 복수해달라는 말을 했지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길준은 노인이 자신처럼 세상에 긍정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상인이라기엔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냉정한 계산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였다.
노인은 계속 어떤 건물의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들려주었는데, 이야기만 들어서는 동화같기도 하고, 추리소설같기도 했다.
“도대체 그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긴 뭡니까?”
“뭐긴.”
노인은 천천히 복기를 했다.
“그 남자는 레테르가 덜 떨어진 새옷을 입고, 길함동에 있는 성당으로 가는 거야. 가면 거기에는 젊은 신부가 기다렸다가 성경을 건네주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의미로 말이야.
그리고 그 성경을 펼치면 복수가 시작되지.“
“...동화같은 이야기군요.”
“나갈 수 있을 때 이야기겠지만 내가 돈을 먹인 감시원이 그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꼭 그 인간들 아니라도 나갈 수 있어. 단지 내가 체력이 달린다는 게 문제지. 자넨 여기 들어와서 나가본 적이 있나?”